이집트 제2중간기 제13왕조 초대 파라오 세켐레 쿠타위 소베크호테프 Sekhemre Khutawy Sobekhotep | ||
소베크호테프 1세의 두상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세켐레 쿠타위 아메넴헤트 소베크호테프 (Sekhemre Khutawy Amenemhat Sobekhotep)[1] | |
부왕 | 아메넴헤트 4세[추정] | |
선대 | 소베크네페루 혹은 세제파카레 | |
후대 | 손베프 혹은 켄제르 | |
묘지 | 아비도스 S 10 마스타바[추정]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803/1724년~기원전 1800/1718년 중 하나, 재위기간 최소 3년 |
1. 개요
이집트 제2중간기 13왕조의 초대 파라오이다. 언제 재위했는지 상당히 논란이 있다.2. 통치
그의 통치에 대해 알려진 것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내용뿐이며, 13왕조 초의 정치적 혼란기였기에 후계 질서가 명확하지 않다. 라훈(Lahun)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는 그가 아메넴헤트 3세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통치했음을 시사한다. 나일강 수위 기록은 12왕조 후반 및 13왕조 초기의 일부 군주들에 대해서만 작성되었는데, 이는 그의 통치 시기를 특정하는 데 일부 도움을 준다. 토리노 파피루스 7열에 따르면 그는 왕조의 중간에 위치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가 사실상 목록의 시작에 위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이중 이름 '아메넴헤트 소베크호테프'는 "아메넴헤트의 아들 소베크호테프"라는 혈통을 나타내는 이름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아메넴헤트 3세 또는 아메넴헤트 4세의 아들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다만 아메넴헤트 3세에게는 딸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 사위이자 양아들[4] 또는 손자[5]가 왕위를 주장했을 가능성도 있다.3. 입증
소베크호테프 1세는 13왕조 초기에 해당하는 동시대 자료에 의해 입증된다.즉위 1년 차에는 이집트 중부의 라훈에서 작성된 파피루스에서 언급되며, 이후에는 주로 와세트[6]에서의 건축 요소들을 통해 알려져 있다. 그의 통치 중 마지막 기록은 누비아 지역의 나일 수위 기록에서 나타난 통치 4년 차이다.
3.1. 문서
3.1.1. 카훈 파피루스 IV, 피트리 박물관 UC 32166
그는 카훈 파피루스 IV(Kahun Papyrus IV)에 언급되어 있다. 이 문서는 상형문자로 작성되었으며, "왕의 즉위 첫 해에 작성된 한 낭독 사제(lector-priest)[7]의 인구 조사 기록"을 담고 있다. 문서에는 낭독 사제의 아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해당 아들은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파라오의 40년 차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40년 차는 아메넴헤트 3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소베크호테프 1세의 통치 시기는 아메넴헤트 3세와 매우 가까운 시기였음을 나타낸다.3.1.2. 나일강 수위 기록
소베크호테프 1세는 셈나(Semna)와 쿰마(Kumma)에서 발견된 3개의 나일강 수위 기록에서도 확인되며, 이 중 마지막의 기록은 통치 4년 차로, 최소 3년 이상 통치했음을 입증한다.[8]3.2. 건축
그의 칭호가 새겨진 건축 요소들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메다무드(Medamud)의 세드 축제[9] 예배당 조각, 데이르 엘 바하리와 메다무드에서 출토된 3개의 상인방[10], 룩소르의 기둥 윗부분, 그리고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메다무드 출토의 문설주[11]가 이에 해당한다.3.3. 소형 유물
그의 이름이 확인되는 소형 유물로는 게벨레인(Gebelein)에서 출토된 원통형 인장, 도끼날, 케르마(Kerma) 출토의 작은 조각상, 피트리 박물관 소장 파이앙스[12] 구슬(UC 13202) 등이 있다.3.4. 후대 자료
토리노 파피루스의 7열 19행에는 두 왕[13] 세켐레 쿠타위 소베크호테프가 x년간 통치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 목록에서 그는 7열 18행의 세제파카레에 이어 기록되어 있으며, 7열 20행의 켄제르 앞에 위치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목록에서 그가 7열 1행의 웨가프와 혼동되어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4. 무덤
소베크호테프 1세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4.1. 추정된 무덤
그의 무덤은 2013년 아비도스에서 발견되었다고 알려졌으나, 그 귀속 여부는 현재 의문시되고 있다. 2013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요제프 W. 베그너(Josef W. Wegner) 교수팀은 아비도스에서 ‘소베크호테프’라는 이름을 가진 왕의 무덤을 발견하였다. 2014년 1월부터 여러 언론 보도에서는 이 무덤이 소베크호테프 1세의 것으로 소개되었으나, 이후의 조사 결과, 해당 무덤은 소베크호테프 4세의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우세해졌다.5. 학설
이 파라오의 13왕조 내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이견이 있다. 왕호 세켐레 쿠타위레(Sekhemre Khutawyre)는 토리노 파피루스에서 13왕조의 19번째 파라오로 등장한다. 그러나 나일강 수위 기록 및 엘-라훈(El-Lahun)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 의하면, 그는 13왕조 초기의 파라오로 판단된다. 이 두 기록은 모두 12왕조 후반 및 13왕조 초기에만 나타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토리노 파피루스에서 쿠타위레(Khutawyre)는 13왕조의 첫 번째 왕으로 되어 있는데, 킴 라이홀트(Kim Ryholt)는 목록 작성자가 세켐레 쿠타위(Sekhemre Khutawy)와 쿠타위레(Khutawyre)를 혼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 둘은 각각 소베크호테프와 웨가프의 이름으로 여겨진다.
'세켐레 쿠타위'라는 왕명을 가진 왕은 최소 3명[14]이 알려져 있어 식별에 혼란이 있다.
그의 이중 이름 아메넴헤트 소베크호테프는 "아메넴헤트의 아들 소베크호테프"라는 혈통적 의미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그가 12왕조의 후대 파라오인 아메넴헤트 4세의 아들이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그는 13왕조 제2대 파라오인 세켐카레 손베프의 형제였을 수도 있다. 다른 이집트학자들은 '아메넴헤트 소베크호테프'를 단순한 이중 이름으로 보며, 이는 12~13왕조 시대에 흔하게 사용되던 작명 방식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1] 소베크호테프 1세 혹은 소베크호테프 2세라고 하기도 한다.[추정] [추정] [4] 이를 antiyant라고 부른다. 여담으로 히타이트에서는 antiyant가 왕위를 잇는 것이 법이였다.[5] 장녀의 아들[6] 상이집트의 4번째 놈(행정구역)이다. 주도는 테베[7] 사원 내 의식이나 국가에서 여는 공식적인 의식에서 주문과 찬송가를 낭독하는 사제이다.[8] 셈나에서는 통치 2년 차와 3년 차에 수위 기록이 남겨졌으며, 쿰마에서는 통치 4년 차의 기록이 발견되었다.[9] 즉위 30년 후부터 행해졌던 축제. 즉위 30년이 되는 해에 한번 치루고 그 이후로 3년마다 행해졌다.[10] 문, 창, 벽난로와 같은 개구부를 덮는 일종의 보[11] 상인방을 지지하는 측면 부분[12] 주석을 함유한 유약을 발라 장식을 입히는 형태[13] 세트와 호루스[14] 소베크호테프 1세, 판트제니, 카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