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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6-17 08:10:15

서울대학교/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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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팩차기2. 캠퍼스 관련
2.1. 역사2.2. 크기2.3. 건설공사2.4. 정문2.5. 서울대생들도 잘 모르는 교내 지리2.6. 특이한 건물들2.7. 자하연
3. 날씨4. 도서관 열람실 외부인 출입 통제5. 식당 밥값 이원화6. 이론학풍을 추구한다는 설7. 정치 성향8. 입시 결과 관련9. 오해
9.1. 일제의 전신?9.2. 서울대생들에 대한 편견
10. 한 때 대학 입시에서의 국어 미반영11. 논쟁
11.1. 학교 수준에 관련된 논쟁11.2. 법인화 논쟁11.3. 국공립대 공동학위제 논쟁11.4. 시흥캠퍼스 유치 관련 논란
12. 기타 일화

1. 팩차기

내용이 길어져서 분리되었다. 해당 문서 참고.

2. 캠퍼스 관련

2.1. 역사

서울대 개교 당시에는 각 단과대들의 소재지가 여러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동숭동(문리과대학[1], 법과대학, 미술대학), 연건동(의과대학, 치과대학, 약학대학), 공릉동(공과대학)[2], 수원시(수의과대학, 농과대학), 종암동(상과대학[3]), 을지로(사범대학), 남산동(음악대학)[4]으로 캠퍼스가 나뉘어져 있었다. 각각 따로 설립된 학교들을 통합하다 보니 나온 결과인데, 이 정도면 뭐 거의 파편화에 가깝다.(…) 고로 관악캠퍼스에 통합하기 이전에는 다른 단과대학과의 교류가 매우 적었을 뿐 아니라 아예 다른 대학 취급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관악캠퍼스로 통합 당시 단과대학 명칭 개편 및 유사학과 통폐합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반발이 있었다고. 단, 시대가 시대인 만큼 크게 항의하지는 못하였다.

1968년에 와서야 서울대학교 총동창회가 발족했다. 서울대 특유의 개인주의적 분위기는 여기에서부터 유래한 것일 수도 있겠다.[5] 문리과대학이 기초학문의 중심지란 상징성 때문에 서울대 대학본부가 동숭동에 위치하는 등 동숭동 캠퍼스가 명목상 서울대학교의 중심 역할을 하긴 했지만, 이런 파편화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통합 캠퍼스 구상은 1960년부터 제기되었다고 한다. 미국 대학과 체결한 계약에 의해 추려진 실태 조사단이 분산화된 캠퍼스 때문에 시설 중첩과 교육 기회 제한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한 것. 그 후 캠퍼스의 통합을 골자로 하는 ‘종합5개년 계획안’이 꾸려졌으나 예산 부족과 단과대학간 갈등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다시금 이 떡밥이 떠오른 것은 1968년 '종합10개년 계획안'이 수립되면서부터다. 당시 메인캠퍼스 부지로는 공릉동, 수원시, 안양읍 비산리[6], 태릉, 동숭동 등이 떠올랐으나 협소한 부지, 교통 문제, 육군사관학교와의 갈등 우려, 부동산 투기(…)로 인한 예산 부족 등의 다양한 이유로 취소되었고, 결국 1970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관악산 기슭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결정이 위원회나 총장이 아닌 대통령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듯 하다.

그 후 정부는 동숭동 캠퍼스의 문리과대학/법과대학 건물(구 경성제대 법문학부 건물)을 철거하고 초호화 아파트 단지를 세울 계획이었지만 교수 및 여론의 반대로 공원화하여 마로니에 공원을 만들었다. 아직도 동숭동에는 '법대 문방구'라는 이름의 문방구가 남아있다. 마로니에 공원이 된 것은 문리대 건물 앞에 경성제국대학 시절 일본인 교수가 심은 일본칠엽수 나무를 마로니에 나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7] 그밖의 동숭동 캠퍼스 부지에는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초등학교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여자중학교가 들어섰다. 단 舊 서울대학교 본관(겸 舊 경성제국대학 본관) 건물은 동숭동 캠퍼스 건물 중 유일하게 사적으로 지정되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썼으나, 2010년부터 아르코가 구로동으로 이전하면서 '예술가의 집'으로 사용중이다.

공릉동 캠퍼스는 현재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종암동 캠퍼스는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8]이 본관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즉, 상대 건물은 서울사대부고가 아니라 서울사대부중이 물려받은 셈. 실제로 부중 별관이 부고 본관보다 더 낡아 보였다. (현재 부고건물은 리모델링을 완료한 상태)]로 바뀌었고, 을지로 캠퍼스는 잠시 헌법재판소로 이용했다가 철거하여 훈련원터 공원이 되었다. 연건동 캠퍼스는 서울대학교병원을 운영(?)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이전 대상에서 제외되어 지금도 계속 그 자리에 있다.

관악캠퍼스 마스터 플랜은 1971년 완성되었고 마스터 플랜이 있는데 캠퍼스가..., 기공식 또한 당해 이루어졌다. 그 후 1단계 이전은 1974년에 이루어졌고, 1979-1980년에 4단계로 공과대학이 이전하였다. 그 후 2002년 수의과대학이, 2003년에 농업생명과학대학이 이전하면서[9] 현재의 캠퍼스 내 단과대 구성이 갖춰졌다.
앞으로 의대/간호대가 이주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2012년 현재 간호대에서는 교수님들을 중심으로 관악캠퍼스로의 이전하자는 주장이 상당히 표면화되어있고, 의대에서도 일각에서 관악캠퍼스로의 일부 이전 주장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병원 실습 문제와 관악캠퍼스 내 부지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미지수. 만약 이 두 단과대가 이전한다면 가장 많이 고려되는 곳은 301/302동 근처라고 한다. 치의학대학원의 경우 2015년 3월 관악 서울대학교 치과병원을 개원하였다.하지만 학부생은 여전히 연건으로

현재 위치인 관악산으로는 박정희 대통령 때 이전한 것으로 일설에 따르면 당시 종로, 청량리 등 단과대 별로 서울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존재하고, 특히 동숭동 캠퍼스가 서울 도심에 위치해서 학생운동의 통제가 어려웠던 서울대를 학생운동시 "진압"을 손쉽게 하기 위해서 시내에서 먼 곳으로, 한군데로 몰아넣은 결과물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입구가 정문 하나뿐이었고, 그 정문 외에는 관악산이 뻗어 있기 때문에 토끼몰이식 진압이 용이했다고 한다. 더불어 관악경찰서(과거 관악파출소)와 관악소방서는 서울대 정문과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관악캠퍼스 이전 당시 용이한 학생운동 진압을 목적으로 같이 만들어졌다. 당시로는 동양 최대 규모의 경찰서소방서였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이전 초기 불광동에서 관악캠퍼스를 통학하는 데 왕복 5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고립 효과는 대단했을 듯 하다. 지금은 버스 교통이 편해져서 조금 낫지만, 여전히 서울대 정문에서는 서울대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서울대가 이전한 관악산 부지는 1967년부터 삼성그룹 계열사 동서관광이 운영하던 관악컨트리클럽(골프장)이 있던 자리로[10], '버들골'의 골프장스러운 모습과 현재 교수회관으로 쓰이고 있는 옛 클럽하우스가 그 과거를 대변하고 있다. 현재 폐쇄된 솔밭식당과 실외수영장 역시 골프장의 부속 건물이었다고 한다.[11]

서울대 농생대는 전국의 여러 산에 200km2에 가까운 엄청난 크기의 연습림을 소유하고 있다[12]. 다만 이것이 국유재산으로서 법인화 이후 서울대에 귀속되는 것이 옳은지, 혹은 수용 자체가 정당했는지 등의 분쟁이 이어지는 중이다.

윗공대는 설립되던 당시부터 부지가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공대생들 사이에서는 '서울대 공대는 과천공업전문대학입니다'라는 식으로 농담거리가 되어왔다. 행정구역은 서울로 되어 있긴 한데, 2001년 여름에 일어난 과천시 대규모 정전 사건 때 공대도 같이 정전이 되어 공대=과천캠퍼스라는 농담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서울대 (윗)공대 가려는 사람이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렸더니 서울대 입구가 없고, 서울대 입구까지 갔더니 이번엔 서울대가 안보이며, 가까스로 (아랫)공대에 도착했는데 내가 찾는 과는 캠퍼스 맨 꼭대기고, 돌아가는 길에 학생회관에 서울대입구역 9번 출구가 보이길래 들어갔더니 식당이더라... 하는 서울대 낚시열전을 펼칠 수 있다.

2.2. 크기

최고의 대학이라는 명성답게 국내 대학 중 단일 캠퍼스로는 최대 면적을 자랑한다. 여의도의 1/2 정도인데, 이게 얼마나 넓은가 하면 농협이 학생회관, 자하연, 농업생명과학대학, 경영대학, 공과대학 등등 캠퍼스 곳곳에 따로 입점해 있으며 교내에 시내버스 정류장이 여러 개 있고, 교내 정류장들만 다니는 순환 셔틀도 존재한다.
덕분에 다른 대학교들에 비해 한 단과대학에 넓게 여러 건물을 줄 수 있다. 다른 대학에서는 다소 홀대받는 인문대학을 예로 들면, 고려대학교문과대학 전용 건물은 서관 하나 뿐이지만 서울대학교는 인문대학 권역에만 건물 10여 채가 들어서 있다. 그나마 인문대는 그 차이가 적은 편. 공과대학의 경우는 국내 유명 사립대와 건물 연면적에서 넘사벽이다.
타대생들에게는 자뻑처럼 들릴까봐 얘기하지 않는 서울대생 불만거리 중 하나가 '학교가 쓸데없이 넓다'이다. 진지하게 생활적인 측면에서 따져봤을 때, 캠퍼스가 많이 넓은 데다 경사져서 오가기가 정말 거지 같다. 서울대생들이 시간표를 짤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바로 한 수업에서 다음 수업까지 이동시간은 충분히 확보되는가이다. 다른 학교는 '이렇게 시간표를 짜면 뛰어서 가야되는 게 아닌가'라는 고민을 하지만 서울대생은 '과연 이 시간표가 물리적으로 가능한 시간표인가(...)'를 고민한다는 것. 실제로 수강신청 시즌에 스누라이프에는 "83동에서 25동 연강 가능한가요?"와 같은 질문들이 폭주한다.참고로 가능하다. 부지런히 걸으면 도착은 할 수 있다. 도착하고 졸려서 그렇지...

캠퍼스관악산을 거의 뒤덮고 있으며[13] 굉장히 넓어 일년에 한번씩 서울대 순환로[14] 마라톤대회가 열린다. 부지 취득을 위해 관악산을 조금씩 깎아내며 건물 부지를 확보했는데, 녹지를 파괴한다는 환경단체들의 항의와 서울시의 규제로 인해 예전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식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래도 관악산에 자리잡은 덕분에 자연 경치만큼은 캠퍼스 중 최고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특히 봄 벚꽃과 겨울 설경은 매우 아름답다.[15] 낡은 건물이 미관을 방해하지만 그럭저럭 고풍스러운 분위기라고 쉴드를 쳐줄 수는 있다.

참고로 서울대 캠퍼스 넓이를 대략적으로 알아보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네이버 지도의 지적편집도 기능을 이용하는 것이다.[16] 서울대가 위치한 관악산 인근은 서울특별시-경기도의 경계이므로 대부분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학교 건물을 짓기가 어렵다. 그러나 서울대 소유 부지는 건물을 쉽게 지을 수 있게 하기 위해 70년대 그린벨트를 제정할 당시 그린벨트에서 빠졌다(일반 자연녹지다). 그 빠진 경계가 너무 티 나게 빠졌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 관악산 정상까지이며 순환도로 내부 면적의 약 2~3배 정도 된다. 이 때문에 서울대에 특혜를 준 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그럴만 한 게 똑같이 70년대 대학 이전 부지로 마련했던 단국대학교 내곡동 부지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자곡동 부지는 비교적 입목도가 낮은 토지였으나 얄짤 없이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묶이는 바람에 두 학교 다 캠퍼스 이전에 실패했다. 그러면서도 서울대 주변 땅은 학교 교육환경 보호 목적으로 자연녹지로 묶었다. 서울대 정문에서 신림중학교까지의 그 넓직한 평지에 건물이 없는 것도 이런 이유. 그런데 그 자리에 동양 최대의 파출소가?

2.3. 건설공사

공사가 말 그대로 끊이지를 않는다. 관악캠퍼스는 1975년부터 지금까지 조성 중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 최소한 2006년부터 2018년까지는 계속되고 있다. 아무 공사도 없이 흘러간 해가 혹시 생기게 된다면 추가 바람 [17] 전통적으로 중앙도서관인문대를 학교 중심으로 하여 바깥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건물을 세워 왔다. 그 덕분에 2000년대까지의 학교 확장은 그야말로 스프롤링(sprawling)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난개발이었으며 학교 권역은 갈수록 늘어났다. 2000년대 초반에는 하다 하다 안돼서 공대식당과 셔틀버스 기지밖에 없던 관악산 공원 방향 순환도로 바깥쪽에 대규모의 자연대와 농생대 건물을 올렸고, 그 직전에는 관악산을 쭉 타고 올라가 거의 중턱쯤에 신공학관 건물 2개를 지어 버렸다. 이 때가 서울대학교 난개발의 절정기. 심지어 이때 301/302동의 2배 크기인 제3공학관(303동)을 그 위에 지어 아랫공대에 남은 학과 전체를 수용함으로써 전 공대를 산 중턱에 갖다 심어버린다는(…) 계획까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서울대의 마구잡이식 공사는 07년경 결정된 기숙사 신축계획에서 그 막장성을 과시했는데, 8억을 들여 조성한 잔디구장 - 예약제로 운영되었는데 인기가 좋았다 한다 - 을 1년여만에 갈아버리고 새로 기숙사를 지어버렸다. 공사가 진행되던 2009년 즈음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기숙사에 입주하지 못했고, 학교 주변 원룸값이 좀 많이 올랐다. 뭐 학교에서 지원금을 주기는 했지만 말그대로 쥐꼬리... 2010년 2학기에 신축 기숙사가 완공되고(구관보다 시설은 좋지만 월 10만원 가량 더 비싸다) 2011년 초에 와서는 다시금 근처 녹두거리의 월세가 하락하는 듯 하다. 2009년 초와 비교할 때 같은 조건에 월 1,2만원 씩 싼 방들이 많이 늘었다.

이런 마구잡기식 건축이 전통이었는지 건물 번호도 제멋대로다. 번호가 1번 인문대학 건물에서부터 950번 국제백신연구소까지 있으나 아쉽게도(?) 건물이 950개인 것은 아니고, 중간중간에 쓸데없는 숫자 공백이 있기에 일어난 혼란. 사실 초기에 지어진 건물들(법대, 사회대, 인문대, 중도, 학관, 자연대, 아랫공대 등)은 번호가 규칙적으로 붙여져 있었지만 캠퍼스가 확장하면서 신축한 건물들에 워낙 잡스럽게 번호를 매겨서 발생한 문제이다. 번호가 붙어있는 건물 기준으로 세면 2013년 11월 현재 본 캠퍼스 기준 197개이다(신축 중인 건물 포함). 900번대는 기숙사 또는 그 바깥에 위치하는 연구공원에 부여되는 것이니 그렇다 쳐도, 200동(농생대), 301, 302동(윗공대), 501~504동(자연대)[18][19]만 해도 상당히 뜬금없는 건물번호다. 음미대-경영대의 경우 주변 건물들이 5X번대로 규칙적이지만 동원관 혼자 뜬금없이 113번이며, 3신양의 경우 사회대에서 주로 사용하긴 하지만 사회대 본 건물(16번)과 연결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16-1번이라는 요상한 번호를 부여받았다. 공대 대형강의동 43동 역시 많은 문과생들이 공대 쪽으로 제일 멀리 가본 곳이라고들 하는 43-1동과는 전혀 다른 건물이다. 여담으로 서울대학교 1학년들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글쓰기의 기초[20] 과목의 기말과제가 조별 소논문인데, 이 소논문의 단골 주제가 서울대학교 캠퍼스 건물들의 번호 부여 기준이다. 이들의 결과는 항상 '기준 없음'이다.

교내에 관악캠퍼스 개교 당시(1975년) 지은 건물부터 시작해서 2015년에 지은 건물들까지, 최대 40년의 시간 격차를 지닌 건물들이 함께 늘어서 있다 보니 각 시대에 다른 건축 트렌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인문대, 구 자연대, 사범대 건물과 중앙도서관, 대학본부 등의 건물은 전형적인 1970년대 식 재미없게 생긴 건물로 그 모양이 성냥갑을 닮았다.[21] 반면 1990년대에 지어진 사회대, 경영대, 법대,[22] 행정대학원은 벽돌과 타일을 사용하여 1970년대의 정형화된 모습으로부터 다소 탈피해 있다. 게다가 바로 옆에 예쁜 벽돌 건물도 보유 중. 200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은 회색 벽면에 전형적인 유리궁전 양식인데, 두레문예관, 포스코 스포츠센터, 신양학술정보관 시리즈를 비롯하여 저명한 건축가 렘 쿨하스가 지은 미술관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90년대 후반에 지어진 신공학관(301, 302동)도 크고 아름다운 유리궁전이다. 2000년대 후반에서 최근까지는 주황색 벽돌 자재와 유리궁전 양식을 적절히 혼합한 대규모 건물이 지어지고 있으며 신 자연대, 농생대, 종합교육연구동, 보건대학원, 생활과학대학, 자유전공학부 건물이 여기에 속한다.

2.4. 정문

정문의 '샤'자 조형물은 국립 서울 대학교라는 단어의 첫머리 글자인 ㄱ ㅅ ㄷ을 합친 것이다. 이로 인해 80년대에는 공,산,당의 약자, 90년대에는 계집(혹은 고스톱), 술, 담배(혹은 도박)의 약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서울대의 등록금이 아주 쌌을 적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다니는 대학교'의 약자라는 말도 있었다는 듯 하다.

'샤' 모양의 정문은 샤대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하는 원인이다. '샤'마크 자체는 1946년에 학교 휘장을 만들 때 들어간 것이다.# 관악 캠퍼스로 이전 후 3가지의 정문 안을 놓고 투표를 하기도 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결국은 미대, 공대, 환경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의 전문가 교수 9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에서 휘장에 들어있는 '샤'마크를 활용하기로 합의를 보아 지금의 정문이 탄생되었다.#

서울대 하면 생각나는 이 상징물은 생각보다 작기 때문에 정문은 4차선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실제 진입로는 2차선에 불과하다. 덕택에 정문 도로는 통학 시간에 항상 만원이다. 특히 수시/정시 시험, 입학식 등 외부 차량이 많을 때는 그야말로 헬게이트. 그런데 2014년 1학기를 맞이하여 학교 밖으로 나오는 차선이 하나 늘었다! 하지만 학교로 들어가는 건 여전히 갑갑하다.

정작 학생들은 정문을 걸어서 통과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십중팔구는 버스로 지나간다. 정문 앞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관악산 등산객 혹은 서울대에 구경온 사람들.

예전에는 누구나 쉽게 손잡이를 잡고 올라갈 수 있었으며, 실제로 새벽에 술먹고 이 조형물 꼭대기위에 올라가 기타를 치며 아침이슬을 부른 사람도 있었다. 요즘엔 감시를 해서 올라가기 힘들다. 특히 2011년에 정문 법인화 반대 고공시위 이후, 철탑 측면 틈을 막아버려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기사

정문의 색이 매년 바뀐다. 여기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용역하청업체에서 서울대 측과의 계약유지를 위해 서비스 차원에서 그냥 칠해 준단 것이 가장 인정 받고 있다. 몇몇 개념없는 고등학생들이 자기들이 ㅇㅇ학번이라고 낙서를 하고 가기 때문도 있다. 그런데 그랬다는 학생 중 실제로 입학한 학생은 본 적이 없다. 저주라도 걸려 있는 듯? 서울대 오는 학생들은 여기까지 올 시간에 공부하고 있다 2006년에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색을 다시 칠한 다음 스포트라이트를 달아서 그때부터 매일밤 다른 색의 조명을 돌아가면서 켠다. (2008년부터는 전기비 아끼려는 건지 안 켠다.) 그 뒤로는 아직 색을 다시 칠한 적이 없는 상황. 홈페이지에 의하면 이제 다시 색이 변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글쎄? [23]

2.5. 서울대생들도 잘 모르는 교내 지리

학교지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기가 상당히 난감하다고 한다. 학교가 처음인 신입생들의 경우 학기초 학교에서 길을 잃어서 수업에 지각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서울의 모 대학을 다니는 학생은 '그냥 자기가 상대방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는 눈물겨운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서울대학교의 건물은 200개가 넘어가는데다가 거의 매년 건물이 새로이 지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번호체계라도 없으면 카오스화가 예상된다.[24] 그런데 사실 번호체계도 썩 만족스럽지 않아서 지도를 찾지 않으면 쉽게 위치를 알 방법이 없다. 일례로 17동은 법대인데 18동은 자연대 소속이고(자유전공학부 초기의 건물이었다) 직선거리로 600m가량 떨어져 있다(!) 60m가 아니다. 게다가 관정도서관 뒤쪽의 가파른 계단들을 올라가야 있다. 또 22~28동이 자연대 구역을 이루고 있는데, 자연대생에게 20동, 21동 위치를 물어보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설사 자연대생이 20, 21동이 약대에 있는 건 알아도 29동은 진짜로 모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25] 따라서 학교 내부에 있는 표시판에는 대부분 건물 번호가 아닌 블록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학생들은 블록 체계를 잘 모르거니와 솔직히 블록 체계도 그닥 잘 안 맞는다.

따라서 외부에서 찾아가는 경우 찾아가기 전에 가야 할 건물의 번호를 알 수 있었다면(확률이 매우 낮기는 하지만) 반드시 서울대 홈페이지에서 캠퍼스 맵으로 확인해보고 가기를 추천한다. 서울대생들은 대체로 자기가 자주 다니는 곳이 아니면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지도가 달려있는 학생수첩을 가지고 다니는 학생도 썩 많은 편이 아니므로 운이 없다면 물어보는 사람마다 모르는 경우도 있으니... 학교 좀 오래다닌 학생들이라고 해도 처음 듣는 건물 번호일 경우 기존의 아는 건물 번호와 대조하여 비슷한 번호면 그쯤에 있겠지(...) 하는 안일한 발상으로 알려줄 것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물어보느니 직접 스마트폰의 지도 앱에서 검색하는 게 빠를 수도 있다. 그리고 서울대입구에서 서울대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타면 택시기사가 주요 건물의 위치를 꿰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2.6. 특이한 건물들

1동부터 12동, 그러니까 인문대와 사범대는 연결통로를 잘 이용하면 비오는 날에 비를 맞지 않고 전부 주파할 수 있다. 호그와트? 대부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결통로가 정말 복잡하므로 웬만한 비라면 외부로 걸어가는 게 훨씬 낫다. 단 7동과 9동은 떨어져 있으니 뛰어야 한다. 그래봤자 거리는 10걸음도 안 되지만.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층수가 복잡하다. 1동 3층과 2동 2층이 연결되어 있는 식이다. 그래서 항상 학생들이 층수를 헷갈려 하는 걸 보다 못한 국문과 모 교수님의 제안으로 현재는 각 건물 각 층에 층수가 표시되어 있다.

이건 자연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 대형강의동인 26동과 28동은 떨어져 있다. 사실 26동은 27동을 통해 이동할 수 있는 구름다리가 있다. 자연대 학생회가 그 통로를 학생회실로 쓰고 있어서 그렇지... 어차피 그 구름다리가 천장 역할을 해 비를 맞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이렇게 구름다리가 많은 이유는 경비 규칙상 심야에는 경비원이 상주하는 곳만 문을 열어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새벽에 27동을 가고 싶으면 25-1동으로 들어가 3층에서 구름다리를 타고 24동 3층에서 2층으로 내려와 25동 2층에서 반대편에 있는 27동 1층으로 통하는 구름다리를 타야 한다. 또한 56동과 22동 23동도 서로 연결되어있다. 이 때문에 야간에 시험을 봐야 하면 시험장 가기가 매우 힘든 경우가 있다.[26] 외부인은 물론 자연대 전공이 아니면 서울대생도 여기 들어갔다가는 미아가 된다.

물리천문학부가 사용하는 56동의 경우 외부 계단이 그야말로 압권이다. 얼핏 봐서는 평범한 사선 계단으로 보이는데, 걸어올라가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계단의 방향은 사선인데, 계단 턱 하나하나는 똑바르게 배열되어있다. 이렇게 /≡/ 생겼다 아 이거 딱 올라가보면 뭔지 아는데 말로 표현이 안 되네 연직 방향 시선으로 계단을 바라볼 때 난간과 턱이 수직을 이루고 있지 않다고 하면 되지 절대 정상적으로 올라갈 수 없게 만든 계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두 개나 나란히 놓여있는 덕분에, 이 곳은 자연대의 변태계단이라는 유니크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계단이 물리천문학부 특유의 abnormal함을 상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27] 서울대학교 문서의 스누 스탠다드 문단 참조.

그러나 캠퍼스 맵을 보고도 찾아갈 수 없는 건물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길을 잃지 않고 찾아간다 해도 건물 안에서 길을 잃게 된다. 미대의 50,51,52동은 호그와트를 방불케 하는 구조로 특히 졸업 전시회 기간에 악명을 떨친다.(세 건물이 이어져 있는 데다가 어떤 입구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진입 가능한 층수가 달라진다?!) 미대와 음대 건물(이전 서울대학교 예술관)은 유명 건축가 김수근이 "미로"(...)라는 주제로 설계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상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한다. 대학이 아닌 교도소를 지었어도 이렇겐 설계 안 했을거다 교도소는 안 지었지만 고문 시설은 지었다. 대공분실문서 참조 군인이 지었다는 설도 있는 다른 밋밋한 건물들(리모델링 전의 낡은 건물들)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일리있는 말. 그나마 70년대 건물들은 서울대 밖에서는 어디 가서 볼 일이 없다는 희소성이나마 있지, 주로 90년대 시공된 타일 외벽 건물들 (사회대 16동이나 자연대 56동 등) 은 그야말로 '어느 반도의 흔한 학교 건물'밖에는 안되니.
미대 미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50동은 건물이 두 개의 독립된 건물로 나눠져 있다. 두 건물 중 한 건물의 2층은 1층에서 올라갈 수 없다. 그 곳으로 가려면 나머지 건물 2층에 있는 구름다리를 건너거나 51동 2층에서 구름다리를 건너야한다. 51동은 1·2층 사이와 2·3층 사이에 창고가 있다.9와 4분의 3 승강장 52동 1층 일부는 지하에 있다. 같은 층 안에서 계단이 있는 것은 예사이고, 한 강의실 안에도 계단이 있다. 미대 학생들도 자신이 사용하는 실기실 외에는 헷갈리기 일쑤. 덕분에 미술대학 교양을 듣는 타대생들은 죽을 맛

28동은 춥기로 악명이 높다. 이유는 조낸 낡아서...비도 샌다 단순 춥다는 것만으로는 기재되기에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도 있으나, 너무 추워서 교수님이 수업을 중도 포기한 전적이 있으니 그 정도는... 단지 그만큼 여름에는 시원해서, 기말고사 볼 즈음 과잠을 입고 들어가면 온도가 딱 적당할 정도라고 한다. 일명 석빙고. 이 건물에서 여러 이과 과목 시험을 보는데, 의자 옆에서 나오는 손바닥만한 책상에 A3 크기 용지의 답지를 놓고 시험을 봐야 하는 이과생들의 불만이 매우 크다고 한다. 한 번은 수업을 하는데 손바닥만한 거미가 성큼성큼 기어다녔다. 참고로 건물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도시전설이 아니라, 실험자재들 잘못 놓으면 데굴데굴 굴러간다고(...) 서울대의 실상 jpg. 피사의 사탑 다시 지을 때가 됐는데 대형 강의들을 책임질 공간이 없어서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겨울에는 1층 강의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바닥에 석순(?)같은 무언가가 자라고 있었다.

특이하진 않지만 특이한(?) 건물 중에 하나는 19동이다. 19동에서는 '물리학실험' 과목이 진행되는데 학생들이 실험할 때마다 결과가 다르게 나오며, 심지어 어떤 실험에서는 중력가속도[28]가 음수값이 나오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동 근처는 이 세계와는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시공간이다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모 교수에 의하면 음미대 건물은 단열재를 넣지 않고 공사했다고 한다. 원래 벽돌로 지을 예정이었는데 어른의 사정으로 콘크리트와 타일로 변경되며 일어난 설계 미스라고. 가뜩이나 천장이 높아 난방효율이 나쁜데+단열도 나쁘고+주로 전기난로와 에어컨으로 난방+밤을 새는 학생들을 위한 조명+학생 개인 전자기기+특히 학년 말 11월쯤에 다들 남아서 밤새 컴퓨터 등 각종 기계를 돌리기까지 하면 종종 건물 두꺼비집이 내려간다.(...) 방학마다 대대적인 전기공사를 해서인지 2010년부터는 빈도가 매우 줄었다.[29] 건물의 노후화 문제로 2015년부터 리모델링에 들어간다. 참고

2.7. 자하연

지나칠때 느껴지는 묘한 물비린내와 녹색의 푸르죽죽한 물때문에 "여기에 던져지면 피부병이 옮는다"/"자하연에 빠지면 에이즈 빼고 모든 병에 다 걸린다"라는 소문이 있다. 사실 이런 소문은 대학교 호수(혹은 분수)라면 어디에나 있는 소문이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축제기간에 실제로 사람을 여기다 던지는 전통이 살아 숨쉬던 곳이다. (99년에 실제로 던져졌었는데, 자하연 옆 씨멘트에 허벅지가 피칠이 된 실제 사례도 있다) 그러다 한 번 만취한 학생 2명이 익사한 이후 그런 모습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서울대저수지(버들골저수지)나 공대폭포의 수질이 1~2급수 정도인 데 비해 자하연의 수질은 3~4급수에서 나아지질 않는다. 한편에선 자하연은 화학부와 화학생물공학부의 공동 하수 처리장이라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2011년 교직원들이 총출동해 연못 물 다 빼고 바닥청소까지 한 적 있는데도 얼마 안돼 수질이 원상복귀되었다. 이후에도 몇차례 전문 인력들이 투입되어 청소를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2009년도의 루머에 따르면 화학부의 검사 결과 자하연의 수질이 2급수로 판정되었다고 한다. 가끔 3급수가 나온다는 설도 있다. 생명과학부 등 식수검사를 실습하는 과의 경우에는 자하연 물은 반드시 검사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해캄이 많아서 그렇지 생각보다는 깨끗한 걸지도...? 일단 자하연에 던져졌다가 들이킨 물 때문에 누가 병났다는 이야기는 없다

2006년 가을 축제기간에는 당시 흥행한 영화 '괴물'을 모티브로 한 괴물이 나타났다. 탄생 배경은 어느 반에서 버린 막걸리. 미대생이 제작했다.

잉어와 거북이가 생태계를 이루고 있으며, 가끔 다람쥐가 발견되고, 매일 커플들이 발견된다. 2004년 봄에 학교 축제의 일환으로 오리보트를 띄운적이 있으나, 잉어들에게 영향을 주어 다음해 없어졌다. 자하연에서 서식하는 잉어는 기계항공공학부에서 제작한 로봇이라는 농담이 있다.[30]

생태계라면 또 생태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자하연 근처에 자리잡고 사는 고양이가 있다. 특별히 누가 키우는 건 아닌데 사람 손을 많이 타서인지, 길가에서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고 만져도 피하지 않고 되려 즐긴다(...) 길 한가운데 대자로 뻗어 자는 경우가 많아서 죄없는 학생들의 심쿵사를 유발하기도크흑 여러 마리가 사는 것 같은데 제일 눈에 띄고귀여운 아이는 회색의 코숏. 주로 자하냥이라고 불리지만 드뷔시, 샤샤 등 학생들 나름대로 만들어낸 이름들도 자주 쓰인다.

2002년 겨울까지는 연못을 가로지를 수 있는 지극히 즉물적인 다리(잘못 지어진 다리라는 뜻의 誤作橋로 불렸다)가 있었으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허물었다. 이곳에서 사람을 던지는 일이 빈번한 것도 이유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것과는 별도로 숫처녀가 지나가면 물이 넘치고 숫총각이 지나가면 오작교가 무너진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오작교의 철거로 영원하게 묻혔다.

2018년 4월 잉어의 개체 수 조정을 위해 캠퍼스 관리과에서 두 마리의 오리를 데려다 놓았다.[31] 매일 출퇴근 한다는 소문이 있다.이름이 도널드, 트럼프라 카더라 쀽뺙이 아니었어?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사람이 접근해도 도망다니지 않는 모에한 생명체가 있어서 인기를 끌고 있다.

근처 도림천에 사는 왜가리나 어디서 굴러들어온지 모르는 자라도 종종 눈에 띈다.

3. 날씨

오늘의 서울대 날씨가 궁금하면, 일기 예보에서 관악구 날씨가 아니라 중부산간지방의 날씨를 봐야한다는 농담 아닌 진담이 있다. 관악산 중턱에 입지한 탓에 관악구 기온관측소(보라매공원 소재)보다 기온이 3도 가량 낮은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초봄의 쌀쌀한 날씨에 서울에 비가 내린다면 서울대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비가 눈으로 바뀌는 기적을 체험할 수도 있다. 이와 맥을 같이하는 우스갯소리로, 가을철 열리는 학회에서 가장 먼저 조끼를 착용하고, 봄철 열리는 학회에서 마지막까지 조끼를 벗지 않는 교수는 백이면 백 서울대 교수라고.

정문과 가장 끝에 있는 301동과의 엄청난 고도차로 인해 "정문에 비가오면 301동에는 눈이 내린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실제로 추운 비오는 날에 입구역에서 5513버스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창문에 내리는 비가 진눈깨비로(...)변하는 일이 은근히사실 자주 보인다. 정말로 심한 경우는 신림동에서 볼때는 비가 오다가 정문을 지나 올라가며 진눈깨비로 변하고 301동에 도착하면 그냥 눈이 내리는 상황도 있었다.이것도 자주

서울대학교는 아무래도 관악산에 위치해있다 보니 캠퍼스 도로에 눈이 쌓이면 학교 업무가 하루이틀은 대책없이 마비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어느 정도냐면 겨울의 한파와 폭설 때문에 겨울 계절학기가 없었다! 폭설을 뚫고 올라오는 정도야 감수할 정도로 졸업이 간절했던 학생들의 끊임 없는 탄원으로 2007년 겨울에서야 신설. 하지만 계절학기에 시험 보러 오는 학생이 1시간 정도 늦는 것은 애교고 심한 경우는 교수가 학교에 오지 못하여 시험 날짜가 미뤄지는 경우가 있다.(가끔은 조교가 탄 버스가 못 올라와서 시험을 못 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인지 여름계절학기는 9학점 제한이지만 겨울계절학기는 6학점 제한. 서울특별시는 주로 1월에 쌓일 만한 많은 눈이 오는데, 문제는 1월에 그해 정시면접(사범대와 의대)이 있다.(예전에는 정시논술도 있었다.) 물론 실제로 눈이 오는 날과 논술, 면접 날짜가 겹치는 날은 많지 않지만...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08년도 정시모집 논술날, 사실은 그 전날 쌓인 눈이 조금 있었던데다가 새벽부터 내리는 눈은 폭설이라기 보단 폭 진눈깨비... 거기다가 논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수험생들과 학부모들로 인해 서울대입구역부터 캠퍼스 정문까지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서울대입구역은 수험생/학부모/버스기사들의 열기와 비명과 고함이 난무했고, 버스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서울대까지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폭설로 버스가 정문까지밖에 운행하지 않아 버스 타고 온 사람도 시험장까지는 걸어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내부에서는 차량 운행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진입한 차량마저 경사가 얼마 안되는 편인 농생대 언덕 쯤에서 헛돌고 있었으니 뭐... 덕분에 그 날 301동에서 논술 시험을 봐야했던 공대 입시생들은 그야말로 지옥을 맛봤다. 덕분에 09시로 맞춰져 있던 입실시간은 응시생 50%의 대규모 지각 크리로 10시로 늦춰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런 일이 발생한 이후로는 학교측에서도 제설문제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지 정말 급작스럽게 내리는 눈이 아니라면 캠퍼스 도로만큼은 순식간에 제설작업이 완료되는 모습을 보인다. 2012년에는 새벽 4시까지 눈이 내려서 정상적으로는 버스가 301동까지 올라가지 못 했을 상황이었음에도 새벽부터 제설작업이 시작되어 교내순환셔틀이 다닐 시간에는 아무 문제도 없이 버스가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4. 도서관 열람실 외부인 출입 통제

과거에는 고등학생을 제외한 무제한 출입이 가능했지만, 외부인 이용자가 너무 많아지고 도서관 좌석에서 음식료 등을 섭취하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다수 나타나면서, 재학생들의 면학 분위기가 저해된다는 이유로 통제하고 있다. 중앙도서관과 관정도서관 사이의 중도 터널 옆 3B 열람실은 외부인에게도 개방하고 있으나, 이 역시 2012년부터 3A 입구(3층 도서관 통로)에서 신분증(주민등록증,운전면허증)을 맡기고 일일 열람증을 발급받아 들어갈 수 있도록 바뀌었다.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는 3B 열람실은 도라지 옆으로 새로운 입구가 생겼다.

각 단과대 도서관은 출입통제 시스템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외부인들에 의해 면학분위기가 저해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사회대 도서관은 2013년 초 학생증을 찍고 들어가게 바뀌었다. 관정도서관, 법학도서관, 의학도서관, 농학도서관, , 중앙전산원, 신양학술정보관, 해동학술정보관 등 대부분의 건물 입구에 전자식 게이트가 설치되어 학생증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자연대의 경우 중도와 가깝다는 이유로 도서관이 없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다.

5. 식당 밥값 이원화

2012년부터 서울대 구성원(교직원, 학생)과 외부인으로 구분해, 외부인들에게 재학생들과 다른 밥값을 징수하고 있다. 구성원은 그대로, 외부인에게는 1,000원씩[32] 더 받고 있는데 이는 관악산 등산객이나 택시기사[33], 견학생 등 학교를 출입하는 외부인들이 밥을 많이 사 먹기 때문이다. 서울대 구성원, 특히 학생들은 생활협동조합과 명목상 연관이 있고 또 등록금도 내지만(교수나 직원의 경우는 직장복지 개념) 외부인들은 이런 것이 없이 낮은 가격[34]에 무임승차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한 듯 하다. 법인 전환 이후 바로 이런 조치를 단행했다. 독립 법인으로 전환되면서 정부 지원금이 줄어들고, 독자적으로 학교 재정을 꾸려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2015년 봄학기부터 학교 내 모든 생협 식당에서 학생증이 아닌 카드로 결제를 하기 위해서는 서울대 학생증을 구 식권 판매대에 있는 결제카드 등록기에 접촉해 구성원 인증을 받고 결제에 사용할 카드(1인 1카드만 등록이 가능하다)를 등록하여야 구성원 가격이 적용된다. 최초 사용시에만 등록을 하면 되고 등록된 카드를 바꾸고 싶다면 다시 학생증으로 인증을 받고 다른 카드를 등록하면 되지만, 등록을 하지 않으면 비구성원 가격으로 결제가 되니 주의가 필요하다. 한 명의 카드로 여러 번 결제하는 경우(신 학기에 후배에게 학식을 사주거나 친구 것까지 결제하고자 할 때)에는 결제기에 카드로 결제한 뒤 결제기 화면에 있는 추가 버튼을 누르고 또 결제하면 된다. 또, 밥 받는 곳 결제기 말고 현금결제기에서 식권 여러 장을 동시에 살 수 있는데 그게 더 편할 듯

6. 이론학풍을 추구한다는 설

물론 서울대학교가 하버드 대학교처럼 모든 핵심 분야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전 세계 주요 대학교 인문대학에 개설되어 있는 음악사학과가 없다. 그럼에도 대체로 연구중심 게다가 국립 종합대학교로서 고등학문지속세대 양성을 목표로 하는지라 실용적인 학풍보다는 이론적인 학풍이 강하다.

서울대와 많이 비교되는 연고대의 경우 상대적으로 실용적인 학풍을 추구하는데 서울대학교는 유난히 순수학문과 기초학문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인문사회계열에서는 지극히 이론과정을 추구하고, 자연공학계열에서는 지극히 고급과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35]. 그래서 그걸 제대로 알아듣는 학생의 비중이 겨우 3/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스스로 포기하는 학생은 가차 없이 도태시킨다.[36] 그래서 한없이 자습으로 학기를 보내는 경우도 생각보다 흔하게 일어난다. 서울대 갔다고 끝이 아니다. 진짜다. 지금까지 12년 동안 공부하던 양을 1년 정도에 쏟는다고 생각해야한다. 넘는 것 같은데...? 심지어 일부 학생들은 아예 철학과 논리학을 예습까지 해놓기도 한다. 그러나 순수학문과 기초학문을 지망하는 소수의 수험생에게는 서울대학교가 거의 유일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입학성적은 알아서 챙기는 걸로

농생대, 자연대, 약대 등에서도 그러한 점이 두드러지는데 진행되는 세부연구를 샅샅이 살펴보면 다른 대학에서는 취급하기 힘들 정도로 돈 안 되는 연구를 많이 한다. 흔히 '빵을 위한 학문'으로 취급되는 법학에서도 법해석학뿐만 아니라 광의의 법학(법제사[37], 법철학)같이 다른 대학 같으면 당장 써먹기도 힘들다고 건드리지도 않을 연구를 한다. 또한 종교학, 인류학, 과학철학 등 한국 내에서 비주류로 취급받을 수많은 순수학문과 기초학문이 아직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며 그나마 수준을 유지하는 곳이 서울대학교다[38]. 지금도 수많은 순수학문과 기초학문 연구자들이 서울대학교에 모여 꺼져가는 마지막 불씨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순수학문과 기초학문의 대표적인 보루라는 것이지 유일한 보루라는 뜻은 아니다. 다른 국립대들 역시 비주류로 취급받는 기초학문과 순수학문을 유지하고 가르치고 있다. 지금도 지방 국립대에서는 국립기관으로서의 위치와 교육이념(기초순수학문 유지 및 육성)에 따라 소위 말하는 돈 안 되는 학문에 지속적인 인재육성과 투자를 하고 있다[39][40] 또한 순수학문과 기초학문의 완벽한 보루라는 뜻도 아니다. 다른 해외 유수 명문대학과 비교할 때 기초학문 교수진의 양과 질, 분과학문 내에서의 다양성 등에서 서울대학교가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41].물론 이들 대학에 비하면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 예산을 주세요 하지만 이미 한국 국립대 예산 중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게 함정


7. 정치 성향

파일:서울대학부생정치성향.gif
▲ 세대별 서울대 학부생의 정치 성향 (2018)

8. 입시 결과 관련

의과대학을 제외하고는 동일학과를 두고 보았을 땐 국내에서 입학하기 어렵다. 전체 수험생 숫자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서(1990년대 초반 100만명이었으나, 현재는 60만명선을 유지하고 있다) 대학입학 그 자체는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해졌다는 얘기도 있지만, 적어도 서울대학교에서만큼은 큰 해당 사항이 없다. 왜냐하면 서울대학교의 학부 정원 역시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면서 과거에 비해 많이 줄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1990년대 초반에는 신입생 모집인원이 약 4300명, 공대 증원이 이루어진 1990년대 중반에는 약 4,600명선이였던 것이 2002년엔 3,990명, 2006년에 3,260명, 2018년 현재는 2,900여명 정도가 되었다.[44]

수능 만점자가 66명이나 나왔던 2001학년도 입시에서는 법과대학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한 전국 수석(만점자)이 두 명이나 있었으나[45], 법학전문대학원 도입으로 인해 법과대학이 마지막으로 신입생을 선발하였던 2008학년도에 법과대학 입시에서는 거의 미달 직전까지 가서 사범대 체육교육과 정도의 성적물론 서울대학교는 체교과도 무시할 수 없다.이면 합격이 가능했었다.

내신이 나쁠 경우 만점자들끼리 경쟁해서 떨어지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이론상으로는 현재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같은 극강의 상위권의 경우 원점수 만점이어도 불합격하는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2014학년도 자연계열 유일의 수능 만점자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면접에서 밀려나 탈락한 적이 있다.(선택과목이 당시 난이도가 낮았던 물리1, 생명과학2이기 때문에 표준점수 1위는 아니다) 이론상 2016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물리 2지구과학 2를 고른 학생은 만점을 받았어도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하는게 불가능했다. 이 둘의 백분위 평균이 겨우 95이기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본다. 하지만 전국 어디에도 그런 학생이 존재하지 않아서 전혀 회자되지 않은 듯하다.

9. 오해

9.1. 일제의 전신?

파일:나무위키+유도.png   경성제국대학 전신 문제에 대한 내용은 서울대학교/역사 문서의 5번째 문단을 참조하십시오.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은 미군정 당시 정식 폐교되었고 서울대학교가 이 경성제국대학의 학부를 흡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성제국대학 외에도 11개의 더 전신 학교를 두고 있었으므로 경성제국대학만이 유일한 전신인 건 아니며 해당 학부의 전신이라고해서 현재와 같은 대학기관인 것이 아니다. 경성제국대학에서 통합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구제전문학교가 서울대학교에 통합되면서 격상한 것이다. 자세한 건 서울대학교/역사 문서 참조.

일본과 엮이는 게 어지간히 신경쓰였는지 공식 발표는 1946년 폐교된 경성대학 등 10개 학교의 시설을 바탕으로 신규 설립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공식 역사야 어쨌든 사실은 엄연한 사실로, 실제로 법대나 농생대, 의대 등의 일부 단과대학은 자신들의 근원을 경성제대나 설립 당시 통합된 전문학교, 또는 구한말 설립된 관립학교[46]로 보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2010년 3월 말에 서울대 총동창회에서 1895년으로 개교년도를 바꾸는 것이 어떻냐고 제의한 바 있다. 또한 의대는 국립병원이라는 점을 내세워 광혜원이 세워진 1885년까지 올려잡는 경우가 있다.[47]

경성제대를 비롯한 서울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구제전문학교/사범학교 졸업생들은 서울대를 모교로 생각하고 있어서, 학교 내의 각종 도서관에서 경성제대 졸업생들이 기증한 책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어로 씌여있고 누렇게 뜬 책들은 거의 100%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설립 주체와 설립 목적이 바뀌었다는 점, 경성제국대학 이외에 여러 단과대학이 합쳐져 만들어진 학교라는 점[48]을 들어 경성제대 계승론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하나의 학교라는 관점에서 경성제국대학이 국립 서울대학교에 남긴 유산은 많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직원은 거의 일본인이었는데, 해방 당시 조선인 교수는 1명[49]이었고, 역대 통틀어도 4명에 불과하며, 이들의 재직 기간을 다 합쳐도 2년[50]이 채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교수, 연구 인력의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경성제국대학의 유산은 캠퍼스와 교정, 소장도서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만 대학이 아닌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 국가 우위의 대학교육, 관료 지향적 학생들의 양산 등의 현상이 식민지 조선의 교육에 연원을 두고 있고, 그 중심에 경성제국대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경성제국대학의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51]

결코 적지 않다는 증거는 이른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의 존재와 인문대학 음악사학과의 부재에서 확인 가능하다. 학부과정에 주요 기초학문인 음악사학과가 없고 철학의 분과학문에 불과한 미학 관련 학과는 있는 전 세계 주요 대학은, 그 전신이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제국대학이었던 곳 정도 외에 사실상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2010년 10월 10일 기사를 보면 서울대 최고의결기구인 평의원회는 1895년 한성사범학교[52] 와 법관양성소가 개설된 이후부터 경성제대 시절까지를 포함해서 묘사하는 역사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50년의 역사를 버리고 싶지 않은 모양. 다만, 서울대학교의 "개교"는 여전히 1946년이고 1895년은 "근대적인 대학 교육이 시작됐다는 의미"에서 '개학(開學)연도'로 한다'고 결정했다고 한다.[53]

서울대가 하드웨어를 이어받은 경성제국대학은 제국대학인데, 이것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서울대를 현재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배출한 온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일본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 설립모체라는 점은 서울대를 깔때 흔히 사용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이고, 사실이 사실인지라 학교 차원에서도 은근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 일례로 설립 직후인 1947년에 외국어학과의 대대적인 개편을 감행하여 당시 있던 일문학과(제국대학 당시 문학과. 단 이때의 문학과는 일본어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도 합쳐서 문학과라고 불렀다.)를 폐지했으며 아직도 부활되지 않고 있다.

미군정청은 미국식 대학의 한국 설립과 영어강의 진행 등 미국식 학제의 이식을 원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어가 저절로 배제되고, 정부수립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아무도 일본의 지금과 같은 재약진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일본어를 학문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언어로 간주하여 해방 이후 설립되는 신생 대학들은 일문학과를 굳이 개설할 필요성이 없었다는 정도가 유력한 설로 취급되고 있다[54]. SKY 중에서 유일하게 일어일문학과가 있는 고려대학교도 1983년에야 만들어졌을 정도이며 연세대학교에는 아예 일어일문학과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 창립 당시 일본의 도쿄대학에 조선어문학과가 없어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는 음모론이 있다. 그러나 당시 국대안을 추진하면서 일문학과를 없앤 것은 미군정청이기 때문에 별로 관련은 없다. 도쿄대에 조선어문학과가 없어서 서울대에 일어일문학과가 없다는 말은 서울대생이나 세간 사이에서도 꽤 퍼져 있는 잘못된 루머이다. 2000년 서울대학교에서 일어일문학과를 설치하려는 시도가 있자 당시 사회학과 교수였던 신용하 교수가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했던 발언이 그 진원지로 보인다.[55] 여담으로 도쿄대학 대학원 과정에는 한국조선문화연구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80년대 후반까지 입학심사에 제2외국어일본어 과목에서 얻은 점수를 반영하지 않아 수많은 시비에 휩싸였고 1992년 이에 대한 헌법소원이 진행되어 서울대 측의 해명과 사과문의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대학측에서 실시하는 입학심사는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 중 일부이고, 당시 고3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소송(92헌마68, 92헌마76)은 패소했다. 물론 현재는 내신이나 수능 제2외국어의 일본어 과목도 반영되고 있다.

소송에서 이겼지만 일본어 성적을 반영하지 않는 점이 대외적으로 공개되고 문제가 되어 버렸기에 일본어 강좌를 개설하고 교양과목에 '고급일본어' 과목을 추가하게 된다. 기초나 중급일본어 강좌도 없이 고급 일본어만 있는 점, 교수도 일본인이고 애초 강의계획서부터가 일본어로만 써져 있으니 숙련자가 아니면 수강하기도 힘들다는 점, 기껏 개설된 고급과정도 난이도가 상당히 어중간해서 중급도 고급도 아닌 점에서 많은 불만을 사고 있다. 한동안 학점에 반영조차 되지 않는 유명무실한 과목이었지만 최근 정식 교양과목으로 학점화는 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 언어교육원에서 일본어 강좌를 등급별로 개설하고 있으며, 국제대학원과 사회과학대학이 합동으로 일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사 및 일본정치에 관한 강의 역시 여타 대학보다 훨씬 나은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실상 공식 일본어 교양강의가 개설되지 않는 점을 제외하면 서울대 학교의 일본연구는 다른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인문계의 탑 레벨이다.[56] 또한 전후 일본 인문학이 약진하는 현재에 와서 국어국문학과나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언어학과 등에서는 일어일문학과 개설을 바라고 있는 실정이며 실제로도 꽤 예전부터 일본 관련 수업과 연구를 진행하는 학부 개설에 노력해왔다.

결국 2012년에 인문대학 내 신설되는 아시아언어문명학부[57]에 '일본언어문명전공'이라는 이름의 일본학 과정이 생겼다. 참고로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는 지금까지 서울대에서 다루지 못한 일본, 인도, 동남아시아, 아랍권에 대한 언어, 역사, 종교, 사상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9.2. 서울대생들에 대한 편견

후술할 이유 때문에 서울대학교 본교생들은 스스로가 서울대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웬만해선 밝히지 않는다. 이는 이들이 긍정적인 사회적 편견보다는 주로 부정적인 사회적 편견을 더 많이 의식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서울대생들의 인터뷰 관련 영상에서도 본교생이라고 밝히는 걸 꺼리는 것으로 보인다.

명실상부 국내 최상위 대학에 소속된 선망의 눈길 속에 살아가는 건 맞지만, 그에 대한 부담감도 크다. 대표적으로 '서울대학생은 뭐든 잘해.', '서울대생은 노잼이다.', '서울대생인데 왜 못해?'[58]라는 대중들의 일차적인 시선에 휩싸여 있다는 점이다. 먼저 이런 식으로 명문대생이라는 특수성을 이용해 '서울대생도 ~하냐?'는 식의 질문은 당사자에게 굉장히 무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무례하다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서울대생들은 그런 피곤한 질문들을 미리 예견하고 차단하는 데서 필요 이상의 다양한 방어기제가 발현하기도 한다. 누군가 학력에 대해서 따로 묻지 않는 이상 밝히는 일이 드물며, 상대가 자꾸 캐묻게 되면 이에 적당한 대답을 미리 준비해둔다거나, 돌려말하기, 화제 전환, 아니라고 확답한 뒤 태연하게 빠져나가기 등을 시전한다. 주로 부모, 친척 간의 관계보다 외부나 타학교, 인터넷에서 만난 사이일수록 보완 심리가 더 커진다는 특징이 있다.[59]

또, 서울대에 다닌다는 것은 대다수의 선망이기도 함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학생이 스스로 학밍아웃을 해버린다는 것 자체가 국내 정서상 허세같아 보이는 착각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학력에 컴플렉스 있는 사람들에게 주 표적이 되기도 해서 본교생임을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무위키의 경우, 서울대학교/의견 및 비판 문서가 따로 작성될 만큼 여느 타 대학에 비해 엄청나게 긴 비판이 쓰여져 있다. 이렇듯이 은근 깎아내리려는 외부의 시선에 이미지 관리 차원으로 대응하기 위해 본교생임을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조금이라도 행실을 잘못하면 사실 내가 딱히 잘못한게 없어도 "공부 잘하면 뭐해. 인성이 엉망인데."라는 단정적인 평가를 받기 십상이라 무슨 사고라도 터지면 언론에서 집중 포화를 받는 대학이 서울대다. 문제는 세상엔 공부도 인성도 글러먹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 이렇게 학력 서열화 사회의 최고 수혜자이지만 동시에 피해자스러운 면모를 갖추고 있어서 어느 쪽이든 학생 입장에서는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이 서울대학교 학생이라고 뭔가 특이하고 남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에 이들을 특별히 다르게 대우하는 것은 그 시전 방향만 바꾸면 정확히 인종차별과 같아진다. 이 점은 의외로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울대생인데 이것도 못해?"와 같은 편견 섞인 발언은 소재가 학벌이라는 점만 다르지, "흑인인데 랩을 못해?"와 같은 발언과 똑같다. 당연히 서울대학교 학생 입장에서는 인종적 편견 발언을 듣는 사람과 같은 부담감을 갖는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서울대학교 학생들도 명심해야 하는 게, 자기기 서울대학교 나왔다고 남들과 다르고 우월하다는 사고에 젖어 있으면 이는 역시 소재가 학벌이라는 점만 다를 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갖는 마인드와 똑같다. 결국 비(非)서울대생들이 서울대생들에게 가지는 편견적 시선과 서울대생들이 스스로에게 갖는 우월감 모두 가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각자는 각자에게 걸맞는 영역이 있고, 각자의 성격과 가치관, 취미 등은 모두 다르다. 서울대학교 학생이라고 고지식하다거나 공부만 한다거나 놀 줄 모른다는 것은 편견이다. 개개인에게는 자신이 잘하고 자신에게 맞는 영역이 다를 뿐, 다 같은 사람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별과 편견을 타파해야 할 것으로 보면서 정작 이런 것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때가 많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10. 한 때 대학 입시에서의 국어 미반영

역사적으로는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이 공포되기 전, 국어(한국어)를 배운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60],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회에서 입시 과목에 국어와 한문을 제외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자 외국인 총장 앤스테드 대위가 “자국어 시험을 치르지 않고 학생을 뽑는 대학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훈계한 역사가 있다. 수외과

11. 논쟁

11.1. 학교 수준에 관련된 논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부터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은 서울대학교라는 생각이 틀에 박혀 있는 상태다. IMF 이후 높아진 의학계열 선호로 인해 서울대 이과의 경우 다소 선호도가 떨어진 상태이긴 하지만 의대에 뜻이 없거나 특정 학문을 좋아하는 최상위권이 소신 지원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다른 대학들보다 의대 선호의 영향을 적게 받는 편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 수리과학부 같은 경우 최상위 의대 수준의 컷을 나타내고 있다.[61] 서울대학교에 관한 일반의 인식은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명문대라는 것이 정평이며, 재학생의 강인한 학구열교수진의 교육열, 연구열 등 피차의 교학 결실로써도 최고의 수준이라 여겨져 타교의 모범으로 가하다는 중론이 막강하다. 또한 서울대학교의 졸업자들은 대한민국 내 주요 각계각층, 즉 정경 문화 전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층층이 포진하여 한국 최고의 요인들을 이루는데, 이러한 위세를 조롱하는 동시에 경탄하는 말로써 ‘서울대 공화국’이라는 용어까지 발생할 정도이다[62]. 종합적으로 볼 때 국내에 비록 유수의 명문 대학들이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수험생과 학부모라는 신분을 지닌 자들이 실로 ‘서울대’라는 고유명사를 제일의 지향으로 간원해온 것은 하나의 사회 현상이다.

전국의 모든 대학교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의대와 다른 학과의 입결이 별로 크지 않은 대학교이다. 당장 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도 의대와 나머지 학과 간의 입결 차이가 꽤 난다. 2017년 기준으로 서울대 이과 중에서 가장 높은 입결을 자랑하는 학과는 화학생물공학부(2018학년도 입시에서 화학생물 공학부의 최종 입결은 서울대식 누백 1.83%로 핵빵이 났다.)인데 서울대 이과와 연고대 이과 사이의 격차도 상당하다.

일단 촌구석 고등학교 출신 학생이 이곳에 합격하면 출신지(졸업한 학교, 다니던 학원, 마을 어귀 등)에 현수막이 내걸리며 신상정보가 죄다 털린다(...) 그나마 도시권에서는 동네 이름만 빠지지 진짜 합격생이 자주 배출되는 곳은 몇 명 합격인지로 경쟁한다. 좀 더 앞서가면 부모님 이름까지 걸려있다. 00씨 몇 번째 아들/딸 ㅇㅇㅇ 서울대 ㅇㅇ과 합격 뭐 이런 식으로.[63] 아니, 군이나 면 정도까지 안 내려가도, 2010년대에 경기도 하남시에 본문의 양식대로 된 현수막이 걸린 바 있다. 그리고 대도시 지역에서도 현수막까지는 아니지만 서울대 다니는 손주나 외손주를 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있다면 동네 이웃들이 그 할아버지나 할머니한테 수시로 먹을 걸 갖다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울대 다니는 손주가 평소 좋아하는 음식을 항상 준비해 놓기도 한다. 예를 든다면 그 서울대 다니는 손주가 콩밥을 좋아한다면 할아버지나 할머니 댁에서 평소 쌀밥을 먹었어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손주의 방문에 대비하기 위해 쌀밥을 끊고 콩밥을 먹기도 한다.][64] 최상위권 학생 독점현상은 이과에서 의치한의대 같은 고소득 전문직 계통의 학과로 대체되었고[* 의치한 정원이 무려 4,000명이나 되는데 2000년 이후 이러한 의치한 선호도가 서울대 자연계열 선호도를 넘어서면서 상대적으로 서울대 입학 성적이 많이 내려갔다. 예를 들면 정시에서만 해도 이과에서 전국 100등 안에 드는 최상위권 학생들은 가장 꼭대기의 서울대 의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세칭 메이저 의대라는 명문의대에 진학을 하는 실정이며 지방의대라 할지라도 대부분 서울대 정도의 성적을 받아야만 갈 수 있다. 한때는 서울대 공대 컷이 상위 3%대에 자리잡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전체적으로 서울대의 명성을 따라잡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서울대생들은 주장한다. 설령 대학 서열이 사라진다하더라도 서울대생들의 불투명한 진로[65], 그리고 급속한 세계화로 학부 유학생이 대거 증가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떡밥. 여기에 모교로 인한 우월감을 대책 없이 드러내는 일부 인사와 서울대학교라면 무조건 열폭부터 하고 보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2000년대 초중반을 상당히 뜨겁게 장식했던 화제이다. 언론학자 강준만이 서울대 폐지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도 이 무렵. 또 2006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 다니다가 서울대학교 교환학생으로 온 미국 교포 학생이 "서울대 별거 아님ㅋㅋ"을 노골적으로 제목으로 내세운 <하버드 vs 서울대>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학교는 처음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지만, 점차 이쪽 문제에 대해 신경 쓰기 시작했다. 2010년 일본도쿄대학에서 7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을 때는 전/현 총장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했다.[66] 한 이과생은 2015년에 또다시 아시아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와서 시험 기간이라 진도 나가야 하는데 교수님이 "우리나라는 이래서 안 돼!!#@&*~"하며 한 시간 장광설을 늘어놓았다는 카더라가 있다. 교수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예전에는 세계적인 지명도가 입학기준에 비하면 상당히 떨어진다는 말이 있었고, 특히 2000년대 초반에는 대학평가에서 순위 100위 안에도 들지 못하면서 까이기도 했다. 각 대학 평가기관에서 더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채점기준을 바꾸고 평가 대학 수를 확대하면서 더욱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입학 요구조건은 최상위권이고 그 학벌로 한국에서는 제왕적으로 군림하면서 전 세계적으로는 그다지 위상이 높지 않다는 비판이 쇄도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서울대학교 측에서는 평가순위를 높이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고, 2010년대 들어서는 50위 안팎까지 상승하여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2010-2011부터 2014-2015까지 서울대학교의 타임즈 순위는 154, 109, 59, 44, 50위였으며 실제로 꾸준히 순위는 상승하여 안정적으로 5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이 순위는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던 국제화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차지하기 위해 중국인 유학생을 대거 유치하였기 때문이어서 내부적으로는 '교육이나 연구의 질에 치중하지 않고 외부의 평가에만 신경쓴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2015년 순위는 85위로 많이 추락했으며, ARWU에서는[67] 서울대는 늘 항상 100위 밖이다. 이 외에도 US news&world report 에서도 2015년 서울대가 100위 안에 들지도 못했다. 이로 인해 서울대를 포함한 한국대학이 학문을 연구하는 상아탑이 아닌 교수들이 갑질을 하고 취업기관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취업률이 낮다'라는 오해도 있지만 이는 대학이 취업을 위해 존재한다는 잘못된 편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실제로 많은 학생들은 취업보다는 전문직, 연구직과 같은 진로를 선호하고 있어 졸업 이후 바로 취업을 하는 인구는 낮은 편이다. 애초에 취업률 자체가 '취업에 뜻이 있는 인구'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단순히 졸업 후 취직자 수를 졸업생 수로 나눈 값은 거의 의미가 없다. 취업률이 낮기 때문에 종합대학인데도 불구하고 연구 분야에서 다른 연구중심 대학만큼의 강점을 나타낸다고 분석되기도 한다.

한국의 대학들이 세계대학들과 경쟁력에서 많이 뒤처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한국에서는 가장 지명도가 높고 국가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알려져 있으며, 건국 이래 해외 대학원 유학생을 배출한 덕택(?)에 유학 시 외국대학의 인지도는 생각보다 높은 편이다[74] 대학서열이 정형화된 한국과 달리 미국은 상위권 학생들이 대학들을 유동적으로 진학해서해서 (WAS로 불리는 Williams, Amherst, Swathmore, Yale, Princeton, Stanford, 시카고 대학교, MIT, 듀크 대학교, Caltech 등) 가고 학부교육 전체의 질이 높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 말은 UC 버클리 사회과학대학 대학원 입학위원회에서 심사를 맡았던 한국계 미국인에게 들은 말이다. 덕분에 아이비 플러스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연고대 등이 약진하는 경향이 있으나 여전히 아직까지는 서울대학교가 이 분야의 진 최종 보스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이공계의 경우도 카이스트나 포항공대보다 국제적 지명도가 높다. 서울대 쪽이 학생이 많고 역사가 길다 보니 카이스트나 포항공대 보다 해외 유학을 다녀왔거나 현재 나가 있는 졸업생의 머릿수 면에서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흔한 편견의 하나인 서울대(이공계)가 카이스트와 포항공대보다 실적 면에선 한참 떨어진다는 생각은 연구 쪽에 발을 담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생각이며, 실제로 세 학교의 연구실적을 비교해 보면 각자의 특기분야가 존재한다. 영국 타임즈지의 대학순위에 따르면 서울대는 자연과학, 즉 이학에 강하고 카이스트는 공학에 강하며, 포항공대는 이 두 분야의 융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 각 순위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며, 전체적으로는 엇비슷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규모면에서 서울대는 다른 대학에서 쉽사리 엄두내지도 못하는 대형연구를 할 수 있는 데 반해 카이스트는 적은 인원에 비해 많은 지원을 받는 소수정예로 밀고 가는 성격이 강하다. 학생수가 가장 적은 포항공대 또한 풍부한 예산을 바탕으로 한 소수정예 교육과 연구를 지향한다.

순위, 지명도, 학문적 수준은 사실 학부생 입장에서는 거의 상관없는 내용들이고 학부생 기준의 수준 논의를 해보자. 학사를 따기에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이다. 2010년 초반 기준으로 매 학기 학부강좌만 4,000개에 육박하는 수가 열리며 대학원 강좌까지 포함하면 8,000개가 넘는 강의가 개설된다. 교수진과 동급생 모두 다른 학교에 비해 무척 높은 열의를 가지고 있다. 학교시설 면에서는 강의실 등 노후화 된 시설이 많다는 건 이제 옛말이 되었고 아직까지 국내 최고수준이라고 하기는 부족하지만 최근에는 공격적인 리모델링과 신축건물 증축 등으로 갈수록 최신식(현대화)으로 변하고 있는 추세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교수진과 학생들이 있는 만큼 사람들은 최고, 하지만 열악한 재정이나 시설, 짧은 역사, 강대국이 아닌 나라에 있는 대학으로서의 학문적 한계(언어의 한계, 주요 정치경제적 문제에서의 변방)[75] 당장 때문에 차차 사정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최상위권의 벽을 쉽게 깨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외에도 사람들 자체의 한계로서는 사고의 경직성, 창의력의 부재 등이 거론되기는 한다. 뭐, 사실 이것은 대한민국 전체 교육의 문제점이기도 하지만...

과거에 이장무 총장이 일본도쿄대, 중국칭화대에 동시에 라이벌을 선언한 적이 있다!! 그 후로 딱히 대국적인 구도가 되진 못한 듯.

학교의 수준이나 위치에 대해서는 이 대학이 소재한 국가의 별명 중 하나가 서울 공화국. '서울대의 나라'라는 책까지 있다.

11.2. 법인화 논쟁

서울대는 세계 10위권 대학 진입을 목표로 법인화를 통과시켰다. 법인화가 되면 서울대학교의 명의로 계약을 체결하고 재산을 취득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 법인화를 통해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하여 자율성을 가지겠다는 것이다.(사립대가 되겠다는 것은 아님) 즉 서울대는 법인화를 통해 대학의 경쟁력을 갖춰 세계 10위권 대학으로 도약하겠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서울대학교는 '국립서울대학교'에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가 된다.

학생회 등은 법인화가 되면 등록금이 오를 수 있고, 학과 개설/통폐합 권한이 대학으로 넘어가므로 기초학문이 무시당하거나 학교에 영리 기업이 들어올 수 있는 등의 이유[76]를 들어 법인화에 반대하고 있다. 서울대 교수진들은 법인화 내용이 전혀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있고, 거점국립대학교들도 자신들도 법인화가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반발하고 있다. 게다가 법안 자체가 통과되는 과정이 보기에 안 좋아서[77] 넘어야 할 산이 여전히 많이 남았다.

이장무 전 총장 시절 법인화를 밀어붙이면서 내세운 논리가 국가로부터 더 많은 예산을 확보하고 교육부 소속 국가기관이라 제약이 많은 인사관리권을 가져온다는 것이었는데, 현재 통과된 상황에 따르면 돈은 돈대로 못받고 국가의 입김이 더 강해지는 상황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애초에 서울대는 국가기관 아니었나? 물론 서울대학교가 한국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볼 때 어지간하면 막장으로 가도록 사람들이 냅두진 않겠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현재 한국의 정책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망했어요 덕분에 재학생들은 등록금이 뛰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졸업해야한다고 반쯤 진담으로 말하고 있는데, 08학번부터는 심화/이중전공 의무화로 8학기 졸업이 엄청나게 힘들어졌다! 현재 서울대학교 본부에서 어떤 대책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

도쿄대학 같은 경우는 법인화 이후 예산이 엄청나게 늘었지만(물론 다른 국립대학들이 그만큼 쪼그라들었다... 서울대 법인화도 아마 이 길로 갈 확률이...) 각 학과에 대한 본부의 통제력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하는데, 서울대 교수들의 학내 지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 일부 찬성론자들은 이참에 교수들이 테뉴어 받고 띵가띵가 노는 걸 막자는 이야기를 하지만 애초에 모든 학문의 연구성과가 단순히 기간 내에 압박을 넣는다고 튀어나오는 건 아니다.

서울대 총학생회에서는 5월 30일 학생총회를 성사시키고 법인화 전면 재검토[78] 및 법인서울대 설립준비위 해체 요구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된 이상 본부로 간다본부 건물 점거를 결의했다. 당초 총학측에서 제시한 행동방침은 동맹휴학, 국회 앞 집회, 본부점거 세 가지였는데 표결을 실시한 결과 압도적인 표차로 본부점거가 결정된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화끈하게 본부를 점거해 버렸다.[79]

점거라는 행동은 근본적으로 인원수가 딸리면 저지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시험기간임에도 서로 교대식으로 본부를 오갔다.원래 시험기간에 잉여력이 폭발하는 법 직접 본부점거에 참여하지 못하는 학생들과 졸업생들은 식사와 간식, 각종 물품(침구류, 멀티탭, 살충제 등)을 지원했다. 심지어 몇몇 교수님들과 강사님들도 점거에 참여했다.(...) 시험기간임을 감안하여 본부 4층 한 층은 본부 4열로 명명하고 책걸상을 구비하여 시험공부가 가능한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이게 '공부하면서 시위하는 서울대생들'이라는 식으로 언론에 의해 화제가 되기도...

6월 16일~17일 현재 일부 학생들(명칭:본부스탁을 추진하는 날라리 내부세력)이 주축이 되어서 법인화 반대 행사로 개최하려고 했던 본부스탁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이유는 무대 설치 차량등 행사 진행 차량을 학교 입구에서부터 검문을 통해 틀어막고 총장잔디로 들어가는 도로에 버스 바리게이트를 쳐서 2중으로 막고 있기 때문. 거기다 본부에선 본부스탁 진행기간 중 총장잔디에 들어가는 모든 학생을 퇴학시키겠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러한 본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이른바 '경륜산성'을 피해 손으로 직접 무대 차량을 들어옮기는등, 공연을 성사시켜 16-17일 양 일에 걸쳐 성황리에 공연을 개최하였다. 이번 본부스탁은 흥했다!!!

그러나 본부스탁에서 점거투쟁의 동력은 피크를 찍고, 종강 후 본부에는 점거인원도 적고 동력을 상실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80] 결국 6월 25일 열린 전체학생대표자회의의 결과로 본부와의 내용도 없는 합의를 받아들이고 28일 아침 8시 이후로 모든 점거를 풀었다.

한편 9월 24일에는 2010년도 법대 학생회장이라는 학생이 법인화 반대 고공시위를 벌이다 50시간만에 119에 의해 실려나가는 일도 있었다. #

2011년 12월 28일 결국 법인화가 되었다. 학생들은 분향소를 차리고 故 국립 서울대학교를 추모했다(...)

한동안 캠퍼스를 뜨겁게 달궜던 법인화 논쟁은 대선기간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래 내용 참조.

11.3. 국공립대 공동학위제 논쟁

4.11 총선 이후 대선 정국이 시작되면서 민주통합당에서 국공립대 공동학위제를 정책으로 추진한다고 발표하였다. 전국의 모든 국공립대를 한 대학교로 만들어서 어느 대학교에서나 수업을 들을 수 있고 입학 및 졸업 학위도 공동으로 수여한다는 계획이다. 이 정책에 따르면 서울대를 나오던 전남대를 나오던 똑같은 국립대 졸업이기 때문에 같은 대학교에서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보겠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따라 많은 서울대학교 재학생들은 이 정책을 사실상 서울대 폐지나 마찬가지라고 보고 노무현 정권때의 서울대 죽이기가 다시 부활했다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4.11 총선이후 보여주었던 민주통합당 및 통합진보당의 여러가지 병크에 더해서 직접적으로 서울대 구성원들에게 타격을 주는 정책을 추진하는 만큼 기존의 소위 진보정당에 우호적이었던 시각이 정반대방향으로 바뀌었고 민주통합당이 해당 정책을 추진하는 이상 새누리당을 지지하겠다는 발언도 스누라이프에서 공공연하게 나타나고 있다.하지만 새누리당에서 서울대 세종시 이전을 검토한다면 어떨까[81] 특히 법인화 완료 이후 민주통합당에서 발표한 정책이라 서울대학교 법인화가 신의 한수였다는 평가도 나타나고 있다.[82] [83]

특히 총학생회에서 작금의 상황에 대한 코멘트를 전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이 까이는 듯하다. 정문점거하던 패기는 어디로 갔어요? 해당 총학생회장은 해당 사안이 한창 뜨거울 때에도 다른 정치적 활동은 활발하게 했기 때문에 학생회 임기가 끝나고도 한참 지난 2013년 1월 현재까지 까이고 있다. 사건이 처음 터졌을 때에는 농활 가있느라고 현재 의사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라고 하면서 페이스북에는 셀카와 자기가 농활에서 만든 음식 등을 올려대며 히히덕거리고 있었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방학이라 전학대회를 할만큼 위원들이 모일 수가 없어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이름으로의 대응은 힘들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해적녀의 시위에는 참가해서 해적녀 옆에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서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고, 스랖에서는 탄핵드립 등 온갖 이야기들이 다 나오고 온갖 욕을 다 먹었으나 모르쇠로 일관하고 페북에서 시시덕거리다가 어느새 임기가 끝났다. 평소에 스랖에 상주하며 댓글도 달고 키배도 하던 모습은 대체 어디에 갔나
선거 기간에는 그럴듯한 말과 샤대문에 올라가는 등의 퍼포먼스로 학생들을 속여넘기고 당선된 후에는 학교는 나몰라라 하고 학생회장이라는 직함만 챙겨서 정치활동에만 몰두하는 '잘못된 운동권 총학'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평. 이 일과 담배녀의 이연타로 운동권 뿐만 아니라 그냥 학생회 조직 자체가 2012년 말 이후 학내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하며 총학, 인문대, 사회대, 법대, 공대, 농대로 이어지는 사상 초유의 선거 무산 사태가 벌어졌다.

11.4. 시흥캠퍼스 유치 관련 논란

2010년 2월에는 경기도 시흥시 군자지구에 국제캠퍼스와 글로벌 교육/의료 클러스터 조성에 관한 협약을 맺어 시흥시에 캠퍼스를 설립하기로 했다. 당시 송도의 연세대처럼 선진문명형..이 아닌 유배지 기숙형캠퍼스타운로 조성하려고 하였으나, 학내구성원들의 극심한 반발로 인해 전면무산되고 현재 순수 기숙사와 관련 부대시설들로만 구성하는 것으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시흥캠퍼스의 문제는 그 필요성에 대한 학내 구성원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본부는 시흥캠퍼스 추진을 계속해왔고, 지난 8월 시흥시 및 민간 사업자와 실시협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학생사회에 입장에서는 1. 추진 과정에서의 학생 배제 2. 캠퍼스 구성에 대한 구체적 계획 부재 3. 부실한 재정 마련 방안 4. 산학협력 확대로 인한 대학 공공성 훼손을 근거로 시흥캠퍼스를 반대해왔다. 2009년 시흥시와의 첫 양해각서 체결 이후 4년간 학생을 배제한 채 추진해왔을 뿐 아니라 대화협의회를 구성해놓고도 “논의를 진행할 만큼 진척된 사항이 없었다”며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 본부에 대해서도 학생사회는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학생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본부가 “아직 정해진 것이 없으며 앞으로 논의를 진행할 것”이라는 답변만을 내놓자 이러한 불신은 더욱 깊어져 갔다.

당초 학생사회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됐던 것은 거주대학(Residential College, RC) 계획이었다. 2013년 시흥캠퍼스 관련 사안이 공론화될 당시 연세대가 송도에 위치한 국제캠퍼스에 13학번 신입생을 의무 기숙시키면서 시흥캠퍼스 역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증폭됐다. 본부는 이러한 우려에 대해 “특정 단과대나 학년을 강제로 이전시키는 방식의 RC는 없을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밝히는 한편 “현재는 연구 시설과 교직원 주거 시설을 위주로 계획 중”이라고 해명했으나 학생들 비밀리에 RC를 논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체결 관련 문서 입수

대학 본부(총장 성낙인)의 시흥캠퍼스 추진에 대해 학우들의 총의를 모으기 위한 전체학생총회가 2016년 10월 10일에 소집되었으며,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실시협약 철폐가 의결되었다. 또한 그에 대한 실천방안으로 본부 점거안이 채택되어 10일 오후 11시경부터 학생들이 무기한 본부 점거에 돌입하였으나 2017년 3월 11일 강제 해제되었다. 뒤이어 4월 4일 전체학생총회에서 성낙인 총장 퇴진 요구와 실시협약 철회 기조 유지가 의결되었으며 천막 농성과 단식 농성이 진행되었다. 또한 5월 1일 서울대생 총궐기에서 본부 재점거가 이루어졌다.

12. 기타 일화

... 서울대 학생들의 체력이 약골이에요. 조사를 해 보니까 서울대 학생들의 체력이 50대 아저씨 수준이라고 밝혀져서 충격을 주고 있어요. ... 일반인과 서울대 남학생 체지방률, 근력, 근지구력, 유연성 이게 모두 50대 아저씨들 수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20대 청년들의 평균 체력보다 현저히 낮다는 그런 연구 결과도 있어서 충격입니다. 일본 20대하고 서울대 학생들하고, 심지어 서울대에서 운동을 주기적으로 참여한 학생들도 일본 20대 아이들보다 더 낮습니다. - 2010년 국정감사


[1] 현재의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의 전신.[2] 현재 공릉동 캠퍼스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다.[3] 현재의 경제학부, 경영학과의 전신. 현재는 사범대 부속고등학교가 위치해 있다.[4] 처음에는 예술대학 음악부로 출발했다가 음악대학으로 발전했다. 옛 조선신궁 자리였다고 하며 이후 연건동 의과대학 내로 옮겼다가, 1959년에 을지로6가에 있던 약학대학과 캠퍼스를 맞바꾸었다.[5] 대부분의 대학들이 동창회를 그냥 동창회라고 부르는데 서울대는 동창회다. 즉 그냥 동창회는 과거 같은 캠퍼스를 쓰는 단과대학만의 동창회라는 것. 참고로 고려대는 교우회라고 부른다.[6] 현재 안양시 비산동 일대로, 평촌신도시 북쪽 지역[7] 실제로 지금도 마로니에 공원에 심어져 있는 대부분의 가로수들은 일본 칠엽수이다. 진짜 마로니에 나무는 서너 그루밖에 안 된다고 한다.[8]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에서 개교60주년을 맞아 퍼낸 "부중60년사" 라는 책에서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교사는 일제시대 건물로 서울 상대가 있었던..."이라는 표현과 함께 4페이지 뒤에 삽화에 지금의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별관 건물(지금은 신관 신축 후 철거됨.)[9] 농경제학과는 학과 특성상 이미 80년대부터 경제학과가 있는 관악캠퍼스에서 수업했다. 하지만 학과의 명목상 위치는 농생대가 관악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수원캠퍼스였다. 실제로 소속은 농생대지만 학생들은 사회대와 같이 OT를 가는 등 사실상 사회대 소속처럼 활동한다. 그러니 연고대 경제학과보다 입결이 높았지 농대의 관악 이전이 끝난 2003년 이후 부터는 농대와 새터를 함께 간다.[10] 이 자리에 있던 관악컨트리클럽은 땅이 정부에 징발당하면서 1971년 화성군 동탄면 오산리(현 동탄 신도시 오산동 일대)로 옮겨가 새로이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대농을 거쳐 2001년 신안그룹에 경영권이 넘어가 강남과 유성에 있던 리베라 호텔 인수에 맞추어 '리베라컨트리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단장하였다.[11] 솔밭식당은 골프장 이용자들에 딸린 비서들과 운전기사들이 주로 이용하던 구내 식당 건물이었으며, 실외수영장은 골프장 이용자 가족들을 위한 위락시설이었다.[12] 이 면적의 대부분은 지리산에 위치한 남부학술림. 실제 서울대 법인이 소유한 부지 면적의 90%가량이 남부학술림의 면적이다[13] 애당초 관악구 신림동 산 56-1이라는 토지를 등기부에서 찾아 보면 관악산 정상까지다. 관악산 정상에 301동 같은 건물을 세워도 법적으로는 아무 하자가 없다는 것.[14] 관악 캠퍼스를 감싸는 순환로는 그 길이가 무려 5km 정도라고 한다.[15] 대신 등산객들에게 수시로 시달린다고 한다. 특히 등산로 입구에 있는 생명과학부 건물은 주말이면 등산객들 때문에 1, 2층 화장실을 못쓸 지경이라고 한다.[16] 그냥 종이로 된 지적도를 봐도 된다.[17] 운동장 리모델링 → 농생대 신규 건물 건축 → 학관 리모델링 → 구교사(인문대,자연대) 리모델링 → 보건대학원 및 종합교육연구동 건물 신축, 자연대 건물 신축 → 법학도서관 리모델링 → 기숙사 구관 재개발, 제3신양 신축 → 공대 건물 신축 → 법대 강의동 신축 → 예술계연구동 신축 → 도서관 관정관 신축 → 커뮤니케이션센터 신축 → 체육연구동 신축 → 14동 재건축 → 학관 리모델링 → 치과병원 신축 → 미대 리모델링 → 동물병원 증축 등.... 2016년에만 해도 14동 재건축, 26동 웨어하우스 재건축, 규장각 공사를 했다. 2018년 현재도 300동(유회진 학술정보관), 69동(실험동물자원관리원), 907~909동(외국인학생기숙사) 등이 신축되고 있으며, 곳곳에 리모델링 중인 건물들이 있다. 그러면 2005년 이전에는 공사가 별로 없었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몇 가지 대표적인 예만 들자면, 16동(사회과학관) 완공, 근대법학백주년기념관(84동) 신축, 제1공학관(301동)[92] 신축, '걷고 싶은 거리' 조성(콘크리트 바닥을 죄다 걷어내고 보도블록을 깔았는데, 그 규모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산 소모용으로 하는 보도블록 교체 사업은 저리가라 할 수준이었다) 등등(이상 무순).*[18] 원래 계획상으로는 210동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변경. 참고로 BK 1단계 건물은 39동, BK 2단계가 500동이며, BK 3단계는 220동이다[19] 굳이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보자면 윗공대의 경우 공대 건물이 주로 3으로 시작하여 앞자리를 3으로 맞춘 듯 하다. 301/302동 이외에도 윗공대 인근의 연구소들의 동은 모두 300번대이고, 신축하는 유회진 학술정보관 역시 300번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500동의 경우 같은 이유라면 200번대이어야 하는데 뜬끔없이 500번대이며, 굳이 접접을 찾자면 56동이 있긴 하나, 50번대는 자연대보다 음미대-경영대의 이미지가 강하다. 220동도 뜬끔없다.[20] 2013년까지는 '대학국어'[21] 공사는 육군 공병들이, 중앙도서관의 디자인은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했다는 루머도 있지만 <서울대학교 60년사>에 따르면 시공에 필요한 기본 설계는 응용과학연구소에서 이미 완성하였고, 건축 설계는 한국종합기술공사 외 여덟 회사에서 담당하였으며, 토목과 설비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외 다섯 회사에서 담당하였다.[22] 현재의 법대는 로스쿨 전환에 즈음하여 전면 리모델링한 것이며, 예전의 법대는 전형적인 공공기관 스타일의 건물로 누런색/빨간색 타일에 둘러싸인 건물이었다. 참고사진 1(리모델링 전)참고사진 2(리모델링 후) 예전 타일을 뜯고서 새 타일을 붙인 게 아니라, 아예 기존 건물 벽에다 새로 벽을 덧씌운 것이다.사진에 있는 '정의의 종'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유서깊은 물건이라고 한다.[23] 정치적인 문제가 있어서 - 파란색은 무슨당, 녹색은 무슨당, 빨간색은 무슨당...식으로- 가장 중립적인 색인 은회색을 칠했다고하니 현재 색을 유지할 거 같다.[24] 일례로 서울대에서 배포한 캠퍼스 맵을 잘 보면 정문 주위에 115라고 쓰여 있어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정문의 번호가 아니라 정문 옆의 관리실이 115동이다.[25] 자연대 28동과 공대 30동이 길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29동은 생뚱맞게 고도차로 인해 기후와 식생대가 다른 학군단 옆에 있다(...) 약대 소속이다.[26] 단 대학원생의 경우에는 따로 과 건물 카드키가 있는 관계로 상관 없는 이야기.[27] 약간 억지스러운게, 원래 56동이 지어지자마자 가장 먼저 사용한 학과는 화학과이다. 뭐 화학부라고 abnormal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28] 정확한 값은 9.8m/s^2이다.[29] 단열이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단열이 잘 되지 않는 거라면 여름에는 찜통이어야 할텐데 오히려 여름에는 서늘하다.[30] 이 농담은 특히 거의 썩어들어가다시피 하는 자하연의 수질 때문에 사실로 알고있는 학생도 많다. 사실 잉어는 수질 오염에 대한 저항성이 높은 어종이라서 3급수 정도의 물이라면 충분히 서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농담.[31] 이 2마리는 두 번째로 투입된 오리들로, 1기 오리 2마리는 정착한지 한 달여만에 숨졌다. 1기 오리 중 한 마리는 관람온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준 먹이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다른 한 마리는 길고양이에게 습격당했다.[32] 학관B는 800원씩[33] 특히 정문에서 가까운 동원생활관은 가격을 올리기 이전에는 점심이나 저녁시간이 되면 학생들 못지않게 싼 값에 밥을 먹고 가려는 택시기사들로 붐볐다. 이는 동원관 앞이 교내에 출입하는 택시들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34] 서울대학교의 밥값은 2,500~3,500원 사이로, 2013년으로부터 10년 전이었던 2003년과 거의 동일하다(2,500원짜리 메뉴가 주를 이루다가, 2013년에는 3,000원짜리와 비율이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정도가 되었다는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만 가장 싼 메뉴인 학관B는 많이 올랐다(? 2002년에 1,300원이었고, 2006년에 1,700원이었고 2014년까지 1,700원을 유지하고 있는데, 많이 오른 것인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공대간이식당(30-2동) 운영주체가 바뀔 때 '공깡짜장'의 가격이 파격적으로 올랐다. 2014년 기준 2,500원. 과거 가격은 2003년 초 900원.)[35] 당장 미적분학·선형대수학·해석학·현대대수학을 자체교재를 가지고 강의한다. 물론 난이도는 이미 안드로메다급. 사실 안드로메다급이라기 보다는 자체교재다 보니 교수님들이 사고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거라 생략이 조금 많을 뿐. 도서관에서 외국교재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36] 이는 포항공과대학교KAIST에서도 지극히 흔하게 일어난다. 심지어 한국과학영재학교, 서울과학고등학교, 경기과학고등학교 등의 상위권 영재학교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37] 고대 로마법 연구나 경국대전의 법제사적 의미[38] 처음엔 최대 규모의 국립대학에서 백화점식 학과 나열을 한다고 비판의 대상이었으나, 요즘 같은 시대에는 대학 학과 통폐합을 밥 먹듯이 하는데 이렇게라도 유지하는 게 어딘가.[39] 실제로 국립대와 사립대 간의 단과대의 숫자 차이는 많으면 2배 가까이 벌어지기도 한다.[40] 입결 지상주의로 변질된 입시계에서 지방 국립대의 입결을 떨어뜨려 인서울 대학교들에 비해 저평가 받게 하는 주원인이기도 하다.[41] 예컨대 서구 명문대학에 비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헌 연구가 부족하다. 서양 대학에서 이들 학문을 '고전학(Classics)'이라 통칭하고 별도의 학부를 운영하는 것과 비교해볼 수 있다. 다만 학부는 없으나 인문대학에 협동과정으로 '서양고전학 전공'이 1995년 설치되어 운영 중이다. 그리고 서양과 한국에 기본적인 환경 차이가 있다는 것도 감안할 필요는 있다. 고등학교 때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 안 배우잖아 동아시아 고전도 연구해야 한다 더하여 코어사업으로 지정되어 생기는 것이라 논란은 있으나, 학부에 연계전공의 형식으로 '고전문헌학 전공'이 설치될 예정이다.[42] 대표적으로 제18대 대통령선거 통합진보당 후보 이정희가 있다.[43] 특히 민주당 계열[93][44] 물론 서울대 들어갈 수 있는 문턱이 4분의 3으로 극단적으로 좁아지지는 않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겠지만 1990년대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저출산 문제 때문에 전체적으로 지원 가능한 고등학생의 수 자체도 줄어들었다.[45] 제2외국어에서 1문제를 틀렸기 때문에 언론에서 말하는 수능만점은 아니다*[46] 가장 역사가 긴 단과대학은 법대인데, 이들은 1895년 설립된 법관양성소를 연원으로 삼고 있다. 법관양성소는 이후 경성전수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거쳐 해방 이후 경성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일부와 함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발족한다.[47] 이로 인해 현재 광혜원-세브란스병원-세브란스의대로 광혜원의 전통을 나누어 계승한 연세대학교와 정통성 분쟁을 벌이고 있다.[48] 단순히 경성제국대학 역사만 따질 경우 다른 단과대학들의 역사를 흑역사화 하는 것이 된다.[49] 해방 직전인 7월 17일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김종원이 교수로 임명됨.[50] 13개월, 4개월, 1개월, 3일[51] 정준영, '경성제국대학과 식민지 헤게모니' 참조.[52] 사범대학의 전신이다.[53] 이전 판에 한국 최초의 4년제 대학이 1905년의 숭실대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 대한제국 말기와 국권 병탄 직후에 ‘대학(大學)’이나 ‘대학부(大學部)’라는 명칭을 가진 고등교육기관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학으로 볼 수 없다. 이 명칭을 가졌던 현재의 일부 대학교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대학과 대학부라는 명칭을 가진 학교를 인가한 사실을 들어, 자신들이 최초의 대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당시 총독부의 숭실협성대학, 경신학교 대학부, 이화학당 대학부의 인가 내용을 보면, 전문학교급 인가였으며, 대한제국의 인가사항을 연장하여 임시로 인가한 것에 불과했고 정식으로 전문학교령이 제정된 이후에는 모두 인가를 상실했다. 이 시기 일본의 교육법제상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은 설립ㆍ운영할 수가 없어 1918년에 대학령이 제정되기까지는 일본에서도 제국대학 이외에는 대학의 설립과 운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총독부가 상기 학교의 대학이나 대학부라는 명칭을 대학으로 인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법제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1926년 경성제국대학 본과의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대학교육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54] 사실 교수를 담당할 전문가도 없었다. 어문학과는 단순히 어학을 배우는 곳은 아니다. 해방 당시 지식인들은 일본어 서적으로 공부하고 일본말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데다가, 패망한 일본과는 국교나 교류도 없어서 실용적 어학 교육의 수요는 적었으며,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네이티브들이 넘쳐나서 취직도 못할 일본 문학을 전공하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55] 신 교수는 서울대가 일문과를 먼저 만들거나, 우리는 학과를 만들고 도쿄대는 관련과목만 개설한다면 민족을 대표하는 국립대로서 있을 수 없는 굴욕이라며 자존심을 반대 이유로 내세우기도 했다. 출처는 #[56] 물론 서울대 소속 연구자의 질과 학 생들의 일본에 대한 향학열이 충족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일본사 및 일본정치에 대한 강의 수 자체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동양사를 전공하는 학생들의 경우에 도 이에 대한 불만이 크다. 개개의 연구자들이 눈물겹게 노력해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시스템의 문제를 해소 하지는 못한다. 실제 로 일본 기피증이 있 든 없든 학문연구에 장애가 된다는 것은 문제다.[57] 학부생 정원은 법대의 로스쿨 전환 및 약대의 2+4 체제 전환으로 남은 학부생 정원의 일부를 이용해 마련했다.[58] 취업 후에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이 부서에 알려지면 근무초기에 질리도록 들을수있다. 타교졸업생들이랑 똑같이 실수해도 더 많이 혼난다.[59] 대충 예측하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어느 학교인지는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데 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학교가 산에 있고, 교통이 불편하고, (입구역 일대가 융성하기 이전의 졸업생에 한하는 이야기지만) 대학가가 빈약하고 등등의 이야기가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 서울대다...[60] 실제로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어'는 1938년에 민족말살정책으로 선택 과목이 되었다가 1943년에 아예 폐지되었다. 해방 뒤 '국어'(일본어) 시간이 한국어 시간으로 바뀌기는 하였지만 식민 통치가 워낙 오랫동안 이어졌다보니 한국어가 많이 잊혀져서 교과서는커녕 한국어를 정확하게 가르칠 교사도 부족했다.[61] 정시에서도 최상위 입결을 나타낸다. 심지어 서울대 의대의 입결을 넘어 전국 1등을 한 적도 있었다(...) 이쯤 되면 정말 수학을 사랑해서 진학하는 거라고밖에 볼 수 없다.[62]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서울대를 나와도 좋은 직업을 갖거나 취업 100%는 옛말이 되어버렸다.[63] 이전 버전에서 이러한 현상이 90년대에나 있던 일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군, 면, 리 단위로 내려가면 이러한 현수막은 반드시 내걸린다.최근 확인된 게 2013년이니 말 다한 거다[64] 또한 서울대 등 명문대 재학생들은 명절증후군에서도 예외가 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명절이나 집안 행사에서 오지랖을 시전하는 오지라퍼들이 잘나가는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는 경우가 많을 뿐더러 이러한 대학에 들어갈 정도의 엘리트들은 실력도 남들보다 출중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고속도로 같은 뻥뚫린 인생을 살아왔던 경우가 많다보니 자기 실력과 능력에서 노력만 한다면 대기업에 들어가면 임원까지 올라갈 수 있고, 행정고시 등 고시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상당하기 때문에 명절날 질문이 들어와도 남들보다 잘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65] 적어도 학부에서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해야 이후의 진로가 보장되는 외국 대학과 달리 서울대, 특히 문사철 학생들은 고시를 한 번쯤은 생각하고 이를 피해갈 수 없는 게 현실이다.[66] 도쿄대학은 11명, 교토대학은 10명, 나고야대학은 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67] 대학 평판도나 교수 인터뷰, 설문조사 등의 점수로 합산해서 주관이 개입된다는 논란이 있는 다른 대학 평가들과 달리(대표적으로 QS), ARWU는 노벨상, 필즈상의 개수 등으로 수치화해서 대학을 평가한다.[68] 성균관 같은 국립교육기관이 있기는 했지만 근대 학문을 교육한 건 아무리 일찍 잡아도 1880년대부터, 좀 제대로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 이후이긴 하나 한국전쟁으로 교수인력들이 납북 등으로 와해되고 대학 시설물은 대부분 박살나서 실질적으로는 1950년대 미국의 원조 이후부터 진짜 제대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잘 봐줘야 100년 정도, 실질적으로는 60년 정도밖에 안 됐다는 소리. 그리고 이 60년 대부분의 기간동안 한국은 후진국, 잘해봐야 중진국이었다.[69] 실제로 서울대가 법인화한 이유도 재정 문제와 관련이 크며 매년 주력하는 일 중 하나도 예산 확대다[70] 가장 짧은 일본도 한국보다 50년 이상 역사가 길며, 대학교육과 연구의 질은 안드로메다급으로 차이가 난다. 일본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일본에서 박사학위까지 모두 끝마친 학생이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참고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때가 1949년이고 한국전쟁은 1950년에 일어났다.[71] 서울대 못지않게 학생과 교수 규모가 크고 국립대 중 바로 다음으로 많은 예산을 지원받는 대학이 바로 경북대인데, 2014년 기준 지원받는 예산이 서울대의 1/4밖에 되지 않는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62822.html[72] 2009년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의 홍보자료 중에는 서울대학교 1년 예산 총액이 도쿄대의 그것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내용...정도가 아니라, 이과 기준 도쿄대 한 학과에 있는 자재, 시설들서울대 이과 전체가 나눠쓰는 수준이라 하니 그저 안습. 건물 후져서 추운 학교에 뭘 바라 하버드, 예일과 같은 곳은 말할 나위도 없고.[73] 이공계의 외국어 수준이 낮다는 말이 아님을 유념하자. 같은 수준의 연구라도 해도 이공계보다 인문계가 외국에 어필하기 어렵다는 것.[74] 서울대학교는 인지도만 높을 뿐, 메리트를 못 받는다. 외국 대학원은 출신 학부보다 연구실적 등을 많이 보는 측면도 있지만, 아예 외국에서 한국 대학교들을 잘 모르는 측면도 있다. 미국 대학원에서 서울대학교를 대한민국 최고 대학으로 보지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75] 강대국이 아닌 건 맞지만 주요경제,정치,사회,과학적인 문제는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대한민국헬조선 문서 참고[76] 학생들이 다양한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은 좋으나, 반대로 돈 없는 학생들은 이러한 서비스에서 소외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77] 야당이 점거한 국회의사당을 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여 돌파해 2분만에 법안을 통과시켰다(...).[78] 반대가 아니다[79] 학생총회가 정족수를 채워 성사된 것만도 기적인데 그 자리에서 점거를 결의하고 바로 행동에 옮기는 걸 보고 오히려 총학 집행부에서 놀랐다고 한다.[80] 앞서 말했듯 점거는 충분한 인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방학으로 접어들면 동력이 감소할 수밖에...[81] 새누리당의 경우 세종시 이전을 검토까지만 했고 정식으로 공약으로 내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인제 등 일부 핵심인사들은 이후에도 수 차례 이전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아주 폐기한 정책은 아닌 듯...[82] 법인화의 가장 큰 효과가 정치권으로 부터 압력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83] 물론, 이것은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는 수준의 결과론이다. 법인화를 추진하는 쪽에서도, 찬성하는 쪽에서도 정치권의 이러한 움직임을 예상하지도 못했고, 이러한 이유로 법인화를 추진하거나 찬성하지도 않았다. 거기다 법인화 이후로 학교에서 추진하고 있는 수익사업은 학내 구성원들에게 유익하지도 않고 수익성도 없는데다가 소위 '돈 안되는' 과에 대한 지원 감축이 벌써부터 진행되는 것을 보면.... 거기다 국공립대 통폐합 이야기를 꺼내던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가 낙선하면서 국공립대 통폐합논쟁이 사실상 종결됨에 따라 그 결과론도 다시 의미가 없게 되었다.[84] 역명 낚시의 끝판왕은 단연 총신대입구역이다. 서울대입구역은 그나마 서울대로 향하는 출구는 있고, 그리로 나가서 쭉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총신대입구역은 사당동, 방배동 주민이 아닌 한 어느 출구로 나가야 총신대로 향하는지 종잡을 수조차 없게 되어 있다.[85] 사실 서울대 안 와이파이는 무지 많은데 그 중 가장 잘 쓰이는 망인 SNU-Member가 이 IP다. 다른 공용 IP는 아직까지 열려 있는 경우도 많다.[86] 사실 제호나 명칭을 보통명사 하나로 퉁치는 명칭부심은 최초, 최고의 위상이 확고한 경우에 종종 드러나기도 한다.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 이름은 그냥 "TIMES"이고 세계 최초인 잉글랜드 축구협회 명칭은 그냥 "FA", 미국 프로야구 리그 이름은 그냥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그 결승전은 그냥 월드 시리즈.[87] 의과대학=경성제대 의학부+경성의전, 법과대학=경성제대 법학부+경성법전, 공과대학=경성제대 이공학부+경성공전+경성광산전문 등등[88] 오죽하면 한번 이긴 것으로 우승 기분을 내겠는가?[89] 참고로 이 설부심은 재학생보다 오히려 딱 저 정도 나이대의 중장년층이 어마어마하다. 서울대학교의 위상과 최상위권 독점현상은 지금보다 중장년층이 훨씬 높아서 그렇다. 그 당시 재학생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서울대 하위학과까지도 타대보다 높은 취급을 받았고 고시합격률 등의 타대에 비해 압도적이었으며 서울대를 나오면 학과 불문 대기업이 알아서 모셔가는 시절이 있었다고(80학번대 즉, 지금의 중장년층의 얘기이다.)[90] 대한항공 제주 노선. 곧 볼 수 없게 될 모습이다.[91] 일본항공전일본공수도쿄 하네다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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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학교 입구에서도 보이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보니, 美 통상법 '슈퍼 301조'에 빗대어 "슈퍼 301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93] 민주당 계열로 차별화한 이유는 같은 진보 정당인 민주평화당이 민주당 및 친문 계열과 반대로 정시 확대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