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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7 23:47:45

벡사시옹

1. 개요2. 초연3. 재연 사례들4. 이 곡보다 더 긴 곡들

먼저 맨 아래 줄의 주제를 연주하고 1번째 줄의 변주, 다시 주제, 그 다음 2번째 줄의 변주를 연주하면 된다. 이제 이걸 840번만 반복하면 된다.[1]

1. 개요

Vexations

에릭 사티피아노 독주곡. 제목은 프랑스어로 '짜증'이나 '고통'이라는 뜻으로... 들어보면 왜 이런지 이해가 갈 것이다.

사티는 굉장한 괴짜 음악인으로 유명했지만, 정작 그가 남긴 작품들은 약간 제목이 괴상하단 점만 빼면[2] 오히려 선법을 비롯한 옛스러운 음악 어법과 특유의 단순성으로 듣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이 곡은 아니다. 무슨 이유인지 사티는 이 곡을 살아생전 평생 공개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발견하고 공표한 이는 사티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와 자료 수집에 몰두하고 있던 자이자, 그 전설의 마곡 4분 33초로 악명 높은 존 케이지였다.

케이지가 발견한 자필보는 1949년에 복사판으로 처음 간행되었고, 이후 여러 음악출판사나 음악잡지 등에서 정서한 공식 출판본이 나왔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그저 그런 유작 피아노곡이겠구나 싶겠지만...

곡은 무척 단순하다. 18개의 음들로 이루어진 단선율의 주제와, 그 주제로 만든 두 개의 변주가 전부다. 게다가 빠르기나 박자표 같은 것도 전혀 없다. 변주도 잘 보면 장단이나 선율에 변화를 준 것이 아니라, 오른손 성부의 음높이를 자리바꿈한 것일 뿐이다.

현대적으로 정서된 벡사시옹 악보. 단 한 페이지 분량이다. 정말 허전하지만, 진짜 저게 다다.

여기에 사티는 저 스케치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악보 위에 다음과 같은 지시어를 써놓았다;
이 곡을 연속해서 840번 반복해 연주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고요함 속에서 진지한 부동성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작곡가가 적어 놓은 메트로놈 지시에 따라 정확하게 연주하면, 대략 13시간 4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참고로 840번 연주하라는 의미는 그의 종교[3]에서 따왔다는 추측도 있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이 때문에 이 곡은 단일 피아노 작품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곡으로 기네스북에까지 올라가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때문에 사티 피아노곡을 거의 다 녹음한 피아니스트들은 많지만, 엄밀히 따지면 전곡을 녹음한 피아니스트는 한 사람도 없다. 만약 이 곡이 음반에 포함된다 하더라도, 첫 루프 혹은 두세 루프 정도만 녹음되어 있어서 나머지는 청취자가 알아서 840번 반복시켜 들어야 할 뿐이다. 아니 그 전에 이럴 시간이나 있을지... 같은 멜로디를 13시간도 넘게 800번 이상 반복해서 들으라니, 이건 뭐 엽기적이고 폭력적이다 못해 음악이 아니라 고문 수준... 어떤 책에서는 이런 반복에 대해 '무지막지한 반복테러리즘'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을 정도니...[4] 사티 살아 생전에는 한번도 완전히 연주된 적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비록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겠어 정도의 정줄놓 작품으로 여겨졌지만, 이 곡이 가져다준 충격과 여파는 꽤 대단했다. 케이지를 비롯해 미니멀리즘을 음악에 도입하려고 한 이들은 이 곡이 그 아이디어를 미리 선취한 곡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호사가들은 이 곡에서 사티가 자신의 개인적인 주관이나 일화를 암호화시켜 기록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 곡이 사티와 관계가 깊었던 종교 단체인 '장미십자회'의 은유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인도 철학만트라 개념을 도입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고, 여성 화가였던 쉬잔 발라동과의 연애 관계가 파토난 것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투영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한 팩트는 없고, 사티가 재림해서 이 곡을 왜 썼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진실은 저 너머에.

2. 초연

첫 공연은 에릭 사티 사망 수십 년 후인 1963년 9월 9일미국 뉴욕의 포켓 시어터라는 극장에서 행해졌는데, 곡을 처음 발견한 존 케이지를 비롯해 그의 동료 4명이 돌아가며 연주했다. 교대로 연주를 한 이유는 당연히 이 긴 음악을 도저히 혼자 연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주자도 사람인데 근육 긴장 푸는 건 당연하고, 몇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야지 연주자들 중에는 피아니스트가 아니거나, 아예 음악인이 아닌 이들까지 있었다.[5] 이렇게 벡사시옹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니, 서양음악 사상 전대미문의 연주기록이다.

공연은 그날 밤 6시에 시작했으며 주최자인 케이지는 이 곡의 연주가 얼마나 걸리는지 전혀 공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티의 유작이라고 해서 수많은 청중들과 피아니스트, 기타 음악 전문가들이 객석을 메웠지만, 똑같은 부분이 하염없이 반복되는 것에 질려 하나 둘 공연장을 뜨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인내심을 발휘해 객석에 남아 있던 청중들도 이내 음악을 BGM 삼아 서로 잡담을 나눴고 심지어 음료를 마시거나 과자를 먹는 이들도 있었다.

어찌됐든 공연은 그와 상관없이 계속 진행되었고 청중들의 고충에 못지않게 연주자들의 고충도 대단했는데, 아무리 피아노 연주에 통달한 이라도 삼전음(tritone)과 감화음(diminished chord)으로 가득한 괴이한 곡을 계속 반복한다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나마 악보에는 콩나물 대가리 빼면 아무 연주 상의 지시도 없는 탓에, 연주자들은 자기 순서가 될 때마다 곡을 빠르게 치거나 느리게 치거나, 약하게 혹은 세게 치거나, 모든 음을 똑똑 끊어 스타카토로 치거나, 반대로 페달을 왕창 밟아 울림을 마구 섞기도 하는 등 저마다 자신의 해석(?)을 이입시켰다.

사티가 써놓은 대로 정확히 840번째 반복이 끝났을 때는 다음날 오후 12시 40분 무렵이었다. 밤샘 진행된 이 공연을 견딘 청중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모두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거나 해탈 혹은 멘붕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3. 재연 사례들

4. 이 곡보다 더 긴 곡들

이 곡의 아성에 도전한 후배 작곡가들이 등장하면서, 가장 긴 음악 작품이라는 기록도 갈아치워졌다. 경쟁작들을 몇 곡 소개하자면...
문서 참조. 작곡자가 잡은 연주 시간이 28시간.
제목 그대로 12일 걸린다.
역사 상 가장 긴 녹음된 곡으로 432시간(18일)이 걸린다. 라디오헤드 앨범 커버 디자이너인 스탠리 돈우드의 전시회를 위한 음악이며 딱 전시회 기간 동안 재생된다. 꼭 432시간 동안 들을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벡사시옹보다는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1970년 개최된 오사카 엑스포의 스칸디나비아관 테마 음악. 여섯 개의 오픈릴 테이프에 담긴 음악을 반복 재생하도록 작곡되었으며 작곡자 지시에 따르면 연주시간은 102년.
원곡은 1985년에 작곡된 피아노 독주곡 'I' 였는데, 2년 뒤에 파이프오르간 독주용으로 편곡한 것이 이 곡이다. 연주에 따라 1분 미만에서 80분까지 다양한 소요 시간을 보이고 있지만, 곡에는 아무런 빠르기 지시 없이 그저 '가능한한 매우 느리게'(ASLSP=As SLow aS Possible)라고만 되어 있어서 절대적 기준은 없다.[6] 2001년 9월 5일에 독일 작센-안할트의 할버슈타트에 있는 부르하르디 가톨릭 수도원 유적에 설치한 소형 자동 오르간으로 시작한 연주가 2020년 기준 이 곡을 가장 느리게 연주하고 있는 사례로, 총 639년이 소요될 예정이다. 연주라고는 해도 몇 년에 한 번씩 관을 갈아끼우거나 빼서 음을 1~4개 바꾸는 정도고, 이 찰나를 보려고 청중들이 몰려들고 있다. 2020년 기준으로 가장 최근의 음 변화는 2022년 2월 5일이며, 연주가 끝나는 해는 2639년으로 예정되어 있다. 할버슈타트의 존 케이지 오르간 프로젝트 홈페이지 (독어)
2020년 기준 세계에서 가장 긴 음악. 젬 파이너는 영국 록밴드 '더 포그스(The Pogues)'의 밴조 주자 겸 작곡가다. 2000년 1월 1일에 런던의 클럽 'O2' 에서 이 작품의 연주가 시작되었고, 끝나려면 2999년 12월 31일이 돼야 한다. 즉, 전체 연주 시간 1000년. 롱플레이어 프로젝트 홈페이지 심지어 2999년 12월 31일 연주가 종료된 이후 다른 곡을 1000년 동안 틀기 때문에 총 연주시간은 2000년이다.
작곡자가 잡은 연주시간이 10년. 그 악보는 이러하다: "지금부터 5년간 한쪽 눈을 파내라. 5년이 지나면, 다른 한쪽 눈도 똑같이 하라."[7] 이것이 악보의 전부이며, 당연하게도 이 곡을 연주하겠다고 나서는 이는 아직 없다. 일종의 위험 음악.[8]
다만 해당 곡의 경우 음악적 기법만 빌려왔을 뿐 문학적 의미가 더 강하므로 음악이 아닌 문학으로 보는 의견이 강하다.


[1] 비디오에선 2번만 반복 연주하고 주제를 한 번 연주하는 것으로 끝난다.[2] '개를 위한 정말로 엉성한 전주곡' 이라든가 '관료적인 소나티네', 심지어는 '바싹 마른 배아' 같은 것들.[3] 사티 자신이 창시한 1인 종교로 사티 자신만 믿었다.[4] 출처: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5] 뉴욕 타임스의 평론가인 하워드 클라인도 연주자로 참가했다.[6] 엄밀히 말하자면 이 곡이 오래 연주되는 곡의 리스트에 포함된 이유는 그만큼 느리게 연주되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정도 이상으로 느려질 경우 인간의 뇌가 그것을 음악으로 '즐기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론상, 박자가 33bpm 이하로 떨어질 경우 각 비트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어져서 우리의 뇌가 그걸 서로 연결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고. 유튜브에서는 1주에 한 비트씩 연주하는 영상 시리즈가 업로드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7] 今から五年間、片方の目を抉り出しておきなさい。 五年経ったら、もう一つの目も同様にしなさい。[8]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도 '딕 히긴스를 위한 위험 음악'이라는 작품에서 연주자에게 "살아있는 고래의 질 속에 들어가시오."라고 지시하고 있다. 당연히 이 곡도 아직껏 연주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