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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20:17:27

밥 딜런/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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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종교3. 사용 기타4. 화가5. 호칭6. 관련 인물7. 기타

1. 개요

밥 딜런에 대한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종교

1979년 말 밥 딜런은 갑작스레 '거듭난 그리스도인'(born-again Christian)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더 나아가 이 때 발표한 세 장의 앨범 < Slow Train Coming >(1979), < Saved >(1980), < Shot of Love >(1981)에는 자신의 회심을 고백하고 신을 찬미하는 노래들로 채웠다. 이후 몇 년간 그는 전도자로 활동한다.

비슷한 시기 유대인이었던 밥 딜런이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당시 대중들에게 이런 충격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밥 딜런의 전기 작가인 로버트 쉘턴(Robert Shelton)에 의하면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고, 어릴 때 다른 유대인들처럼 유대교 예식 참여는 물론 히브리어도 상당 수준으로 학습했다. 일부 언론과 평단은 늘 베일에 쌓여있던 그의 신비주의 전력을 근거로 그의 회심을 의심했다.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벌인 일종의 쇼라는 것이다. 더욱이 몇 년간의 뜨거운 전도활동 후 그는 자신의 신앙적 입장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으니 이런 의심이 생길만도 하다.

1970년 전후, 미국 음악계의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왜곡된 히피 정신을 가졌던 찰스 맨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배우 샤론 테이트를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또한 롤링스톤즈의 알타몬드 공연에서는 흑인 청년 메레디스 헌터가 오토바이족 헬스 엔젤스의 칼에 맞아 죽었다.[1] 패션이 된 약물은 수많은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소위 '27세 클럽'의 '위대한 3J'(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가 약물중독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은 음악계에 흐르던 저항문화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대신 카펜터스, 캐롤 킹, 짐 크로치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의 서정적이고 따뜻한 노래가 사랑 받게 된다.

밥 딜런 역시 이 시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행복했던 결혼도 권태기에 빠졌다. 결국 밥 딜런의 외도로 아내 사라와 이혼했고 다섯 자녀의 양육권 역시 긴 소송 끝에 잃어버렸다. 또한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 Renaldo and Clara > 역시 평단의 지독한 혹평 가운데 실패했다. 무엇보다 그의 내면에 지독한 허무감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1970년대 밥 딜런은 시적 은유가 가득한 노랫말의 확장과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계속했다. 당시 그의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자신의 의미가 무언지를 되묻는 사상적 고뇌가 두드러진다.

당시 밥 딜런은 '흑인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흑인 음악, 흑인 음식, 흑인 스타일에 흑인 애인까지. 부인과 이혼 후 그가 사귀었던 여성들은 모두 남부 출신 흑인들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코러스 싱어 케롤린 데니스(Carolyn Dennis)와 결혼해 여섯째 아이를 낳았다. 그녀 역시 흑인이었다. 한대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밥 딜런은 흑인들의 가스펠에 매료되었고, 그 안에 담긴 그들의 신앙에도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1978년 그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빈야드 펠로우쉽 처치'의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된다. 이 교회가 속한 '빈야드 크리스천 펠로우쉽'은 은사주의적 성격이 강해 기독교에서 이단 시비까지 일으킨 바 있는 초교파 교회이고, 이적과 체험을 강조한다. 이 교회는 1990년대에는 '모던워쉽'을 주도하며 기독교 음악계에 큰 획을 그었다. 지금도 미국 뿐 아니라 국내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빈야드가 발표한 노래들을 예배 때 부르고 있다.

이런 '복음주의' 기독교는 보수적 교리와 사회관, 그리고 종말론적 가르침을 강조한다. 밥 딜런이 회심한 빈야드 교회 역시 그 특성상 이런 '복음주의' 그룹에 속한다. 이 교회에서 그는 존 듀이어 목사의 영향을 받으며 결정적으로 회심하고 세례를 받는다. 신약성서를 깊게 읽으며 자신의 공허한 일상을 위로하는 예수의 메시지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1979년 발표한 < Slow Train Coming >은 제리 웩슬러(Jerry Wexler)가 프로듀싱하고 다이어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가 기타로 참여하며 평단으로부터도 큰 찬사를 받았다. 제리 웩슬러는 빌보드지 기자 시절 처음으로 '리듬 앤 블루스'(R&B)란 용어를 사용했고, 1950-60년대 레이 찰스아레사 프랭클린 등의 음반을 프로듀싱하며 흑인 음악 활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때까지 그의 수많은 히트곡들을 외면해 왔던 '보수적인' 그래미는 놀랍게도 이 앨범의 타이클곡, 'Gotta serve somebody'에게 그의 첫 번째 그래미상(최우수 록보컬 남자 부문)을 안겨주었다.

밥 딜런의 크리스천 삼부작 앨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종교적 회심의 진정성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딜런은 특히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말씀들을 자신의 노래들에 인용했다.

앨범 발매 이후 딜런은 1979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투어를 진행했다. 총 79회의 공연에서 그는 오직 새롭게 만든 종교적 노래만으로 세트리스트를 채웠고, 공연 중 신앙고백과 전도 메시지를 전했다. 1980년 5월 투어를 마치며 그는 저널리스트 카렌 휴스(Karen Hughe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분이 언제나 나를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적절한 때와 뜻을 이루십니다. 나는 바로 그분의 때에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1980년 11월부터 1년간 지속된 다음 투어에서는 공연 중 종교적 노래와 자신의 히트곡을 함께 불렀고, 공연 전 대기실에서 세션들과 함께 '주기도문'을 함께 낭송하며 공연을 시작했다.

< 밥 딜런 평전 >(실천문학사, 2008)을 보면 당시 그의 회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가 후대에 기독교에 심취하게된 이유는 미국의 혼란스런 사회상에서 이데올로기도, 아니면 그에 반하는 이데올로기도, 전쟁을 찬성하는 국가지배층도, 반대로 반전을 주장하는 이도, 그들의 행동 양식은 결국은 성경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밥 딜런은 빈야드 교회와 결별하며 자신의 회심에 대한 지속적인 고백이나 전도 활동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다. 1982년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을 중단하고 다시 유대교로 복귀했다는 소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아울러 그의 종교적 입장과 변화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앨범, < Christmas In The Heart >을 발매한다. 종교적 다원사회가 된 미국에서 "Merry Christmas"라는 인사는 공식적으로 “Happy Holiday”라고 표현한다. 2000년대 발매한 대부분의 캐롤 앨범도 “홀리데이” 뮤직으로 명명하지만 밥 딜런은 앨범에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표기하고, 선곡도 예수에 대한 찬미의 노래들로 채웠다.

그의 새로운 신앙의 노래는 의외로 2012년 발표한 앨범 < Tempest >에서 나타난다. 이 앨범에 수록된 'On Narrow Way'의 가사다.
나는 광야의 길을 걷고 있어요. 내 영혼의 안식처를 찾기까지.
나는 내가 뒤에 남겨지리라(left behind)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날이 저물어가던 때에 한 음성을 들었어요.
“평안하라 형제여, 평안히 기도하라”
그것은 먼 길이죠. 아주 멀고 좁은 길이예요.
만약 내가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언젠가 나를 끌어내리겠죠.

3. 사용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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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커피 하우스에서 연주했던 그의 첫번째 어쿠스틱 기타는 마틴 1949년형 00-17이었다. 그는 그것을 1959년에 취득했는데, 그가 처음 미니애폴리스에서 뉴욕으로 이주했을 때였다. 그는 이 일에 대해 크로니클에 쓰고 있다.
제가 첫번째로 한 일은 일렉트릭 기타를 팔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일렉트릭 기타는 제게 쓸모가 없었을 겁니다. 더블 디 마틴 어쿠스틱 기타입니다. 그 가게의 남자는 나와 균등하게 교환했고 나는 그 기타를 들고 떠났습니다. 나는 이 기타를 몇년 동안 연주할 것입니다.

이 '2년'이란 시간은 그의 공식 녹음일 이전이었이만, 1961년 라이브로 출시된 미네소타 호텔 테이프에서 미네소타 테이프와 '물 속의 웨이드'를 포함한 다른 초기 테이프에서 기타 라이브를 들을 수 있다.

1961년, 딜런은 기타를 케빈 크라운에게 주었는데, 그는 그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크라운이 1992년에 죽었을 때 기타는 피터 매켄지에 넘겨졌는데, 피터 매켄지는 맥과 이브 매켄지의 아들이다. 딜런은 종종 뉴욕 초기에 연주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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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기타는 낡은 깁슨이었던 J-50 모델이었고 프로듀서 존 해먼드 주니어의 말에 따르면, "조금 흠이 있었지만 깔끔했고 훌륭한 기타"라고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 기타는 밥 딜런의 데뷔 앨범 ‘Bod Dylan’ 커버에서 들고 있는 기타다. 또 다음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에서도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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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어느 날, J-50이 갑자기 행방 불명되었고, 그 대신 그의 가장 유명한 기타인 ‘Gibson Nick Lucas Special’이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 기타는 63년 말부터 66년까지 그가 콘서트에서 사용했던 메인 어쿠스틱 기타다. 앨범 ‘Another Side of Bob Dylan’과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도 이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딜런은 그는 기타 상점을 운영한 마크 실버로부터 그것을 샀다.
나는 60년대에 그에게 몇 가지의 기타를 팔았지만 그 후에 그를 안 봤다. 내가 그것을 그에게 팔았을 때는 새 것 같은 상태였으나, 조금 부서졌다. 그는 그 기타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아마도 70년대 초반에, 저는 우드 스톡까지 차를 몰고 가서 그에게 멋진 60년대 Martin이라는 기타를 팔았어요. 하지만 그는 기타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사업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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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딜런의 기타 컬렉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한가지 예외는, 다큐멘터리 ‘Eat the Document’에 나오는 펜더사 어쿠스틱 기타다. 딜런과 더 밴드의 로버트슨이 함께 ‘What Kind of Friend is This?’, ‘On a Rainy Afternoon’을 부를 때다. 기타 명은 펜더 킹[2]이고 1963년 이후로 펜더가 내놓은 어쿠스틱 기타 시리즈에 속하며 이는 일렉트릭 기타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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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1970년대 그는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 뉴포트에서 기타를 빌렸고, 1968년 1월에 거스리 트리부트 콘서트를 열어, Martin 0-18을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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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앨범 Nashville Skyline의 기타는 조지 해리슨에게 선물받은 Gibson J-200이다. 그 해 말에 와이트 섬 축제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70년대 초 그가 대부분의 출연한 곳에선, 그는 마틴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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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Self portrait’ 작업 동안에 사용한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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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캐쉬쇼에서 사용한 Martin Triple-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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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공연에서 사용한 Martin D-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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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칠레 공연에서 사용한 Martin 00-21.. 마틴이 포크 붐 이전에 제작한, 50년대의 제작한 것이다. 1974년 더 밴드와의 투어에서 대부분 이 기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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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Blood On The Tracks’ 제작 기간 중 뉴욕 세션에서 사용한 칠레 공연에서 사용한 Martin 00-2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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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무도관 투어 동안, 그는 야마하 기타 두개를 받았다. 그는 이 기타를 무도관 투어에서 종종 사용하였고 이 투어부터 워시번 기타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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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투어에서도 워시번 기타를 사용한다. 라이브 앨범 ‘Real Live’의 앨범 커버에도 이 기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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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과 1987년에는 워시번과 마틴을 번갈아 가며 연주했다. 왼쪽 사진이 1987년 6월에 사용한 워시번 기타, 오른쪽 사진이 1986년에 사용한 마틴 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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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엔딩 투에서는 여러해 동안 그는 Martin D-28을 사용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깁슨 기타를 재사용한다. 1998년 이후 거의 전적으로 sunburst J-45을 사용한다. 사진 오른쪽이 1993년 뉴올리언스에서 사용한 마틴사 기타. 왼쪽이 2000년 깁슨사 J-45 in 0-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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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2001년 가을 투어에서는 예외적으로 마틴사 기타를 사용한다. 이 기타는 어쿠스틱 기타 매거진의 기념일로 만들어낸 HD-28이다. 딜런은 그것을 보고 마틴사에게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4. 화가

데뷔초인 1960년대부터 꾸준히 그림을 그려오며 본인의 앨범 커버를 직접 그린적도 있다.[3] 밥 딜런의 경우,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뭔가를 볼 때 쓸데없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가능해짐’을 느낀다고 한다. 1994년 11월에는 밥 딜런의 첫번째 드로잉집 ‘Drawn Blank’가 출판되었다. 모노크롬의 선묘화 화집으로 풍경이나 인물 등 그림의 대상이 다양했다. 선으로 그려진 그림들에 색깔을 칠해 하나의 작품을 가지고 몇 가지 패턴을 만들어내는 시리즈 ‘Drawn Blank Series’도 2007년부터 전람회가 개최됐다. 그 후 여러 화랑과 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그의 회화와 드로잉은 1990년대 중반부터 아트마켓에서도 제법 잘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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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평범한 이들의 살아가는 모습, 때로는 낡고 누추하지만 독특한 정경을 만들어가는 이름 없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드로잉은 특히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브라질 시리즈>와 <철길 시리즈>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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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 시리즈

밥 딜런은 2008년에는 덴마크 코펜하겐국립미술관에서 <브라질 시리즈>'를 선보였다. 또 독일 켐니츠에서는 대표작인 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어 2013년에는 이탈리아 밀라노 시 초대로 <뉴올리언즈 시리즈>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작업을 토대로 그는 6권의 드로잉집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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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시리즈

2011년에는 세계 최대의 화랑이자, 영향력 1위의 가고시안 갤러리의 초대를 받아 뉴욕 가고시안 화랑에서 성황리에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이 전시에 밥 딜런은 아시아 뮤직투어 때 틈틈이 그린 드로잉과 회화를 선보였다. 당시 일본, 중국, 베트남, 한국을 여행했던 밥 딜런은 아시아 여러 도시에서 접한 풍경과 아시안들의 삶을 특유의 드로잉으로 옮겼다. 이는 '아시아 시리즈(Asia Series)>로 소개돼 높은 호응을 얻었다. 2013년에는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영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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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영국 런던 핼시온 갤러리

2013년, 2016년에는 영국 런던 핼시온 갤러리에서 작품 전시회를 했다.

5. 호칭

밥 딜런을 대표하는 호칭으로는 시대의 목소리(The Voice of a generation)[4], 포크의 왕(King of Folk)[5], 포크의 신(God of Folk)[6], 음유시인(Bard) 등이 있다.

6. 관련 인물


폴 매카트니: 그 형은 저희의 우상이었어요.
링고 스타: 밥은 저희들의 영웅이죠.
조지 해리슨: 아니, 우상이 아니라요, 우리는 단지 그 형의 레코드를 들었어요... 그리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앨범을 계속 듣고 또 듣고 또 들었죠.
나는 그를 존경했고, 나는 그를 많이 존경했다.[7]
존 레논, 1970년

비틀즈는 1964년 저널리스트 알 아로노비츠의 주선으로 밥 딜런과의 뉴욕에서의 만남이 성사된다. 밥 딜런은 비틀즈의 음악이 가진 활력에 매료되어서 비틀즈와의 만남을 원하고 있었으나 비틀즈는 딜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8] 딜런은 비틀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마초를 선물로 준비한다. 이 만남은 이후 비틀즈와 딜런 상호간에 음악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밥 딜런과 비틀즈 멤버들은 나이대가 얼추 비슷한데, 밥 쪽의 경우 존과 링고(1940년생)보다 한살 어리고 폴(1942년생)보다 1살 많다.

흥겹고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가사의 대부분이던 비틀즈는 밥 딜런의 노랫말에 깊은 인상을 받아 1965년부터 작사에도 큰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사에 멤버들의 가치관이 많이 반영되어 철학적이거나 사회비판적인 면모가 가사에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포크적인 요소도 수용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드러난 출발점이 비틀즈의 대표 명반 중 하나인 Rubber Soul 앨범이다.
반대로 밥 딜런은 비틀즈의 다이나믹한 록큰롤 사운드의 영향력을 목도하며 과감하게 일렉트릭 기타[9]를 들고 무대에 섰다. 이런 그의 음악적 변신의 중심에 밥 딜런의 명곡, 'Like a Rolling Stone' 이 있다. 이 노래는 1965년 그의 세 번째 음반 Highway 61 Revisited에 실려 빌보드 핫 100 2위에 올랐고 밥 딜런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밥 딜런, 비틀즈, 그리고 이 둘 모두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버즈(The Byrds), 이 세 뮤지션에 의해서, 종전엔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포크'와 '록'이 급속도로 융합되기 시작했으며, 이런 화학작용은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두 거물의 만남은 서로에게 엄청난 윈윈이 된 것이다.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도 조지 해리슨은 밥 딜런과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 관계를 쭉 유지했다.
”우디 거스리는 인간성의 여러가지 측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평범한 노래는 단 한 곡도 없었다. 우디 거스리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비판했다. 이때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진실을 포착했고 마침내 다다른 항구의 바다 깊숙이 무거운 닻이 내려진 것 같은 감각이었다.”
― 밥 딜런
”거스리는 사물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깊은 감정이 넘쳐 흘렀고 힘찼으며 리듬이 살아 있었다. 진지하고 강렬했으며 그 목소리는 칼처럼 날카로웠다. 우디 거스리는 그때까지 들었던 다른 그 어떤 가수들과도 달랐다.”
― 밥 딜런

밥은 우디 거스리에거서 자신의 이상, 영적인 아버지이자 음악적 모델로 생각했다. 자신의 ‘에피타프’에 거스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마지막 우상이었네
최초의 우상이었으므로
나와 얼굴을 맞대고
남자들은 남자라고 가르쳐준
내가 만난 최초의 우상이 그였으니
심지어 우상으로서의 자신을 깨트리며
우디는 한번도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고
어떤 희망도 짓밟지 않았네
그는 그냥 인간의 책을 가지고 다녔고
그것을 내게 읽도록 주었으니
그리고 그로부터 나는 가장 위대한 교훈을 배웠네
밥 딜런은 선배 가수인 디온과도 친했다. 디온은 밥 딜런이 대중가수로서의 삶을 꿈꾸게 만든 버디 홀리의 겨울 댄스 파티 투어의 게스트로 활동했을만큼 대선배로 1962년부터는 함께 컬럼비아 레코드에 소속되었다. 밥은 디온의 노래중 A Teenager in Love를 좋아해서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들어있는 노래라고 극찬했다. 디온 역시 밥을 높게 평가해서 자신의 앨범인 Kickin' Child의 수록곡 중 밥의 노래인 Baby, I’m in the Mood For You, Farewell,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커버했다. 디온이 컬럼비아 레코드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후에도 친분을 유지했으며, 2020년에 발매된 디온의 앨범 Blues with Friends의 라이너 노트를 써주었다. 또한 디온을 위대한 가수라며 높게 평가했다. 디온 역시 밥의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을 자신의 인생을 바꾼 5개의 앨범 중 하나로 뽑았다.

7. 기타

시카고 데일리 뉴스: 당신은 이른바 포크록 음악을 부를 생각이 있나요?
밥 딜런: 아니요, 그건 포크록이 아닙니다. 그냥 악기들이요... 나는 그걸 기계 음향이라고 불러요. 뭐랄까 독립음악 같은 거죠. 정말이지 설명을 못 하겠는데... 나는 열세 살인가 열네 살때부터 열 다섯 살 때까지 로큰롤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열여섯 살인가 열일곱 살때 그만두고 말았죠. 그냥 그런 식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시: 포크 사운드는 왜 그만뒀습니까?

밥: 그것만 줄창 하기에는 여기저기 너무 많이 가본 거죠. 진정한 포크는 절대로 42번가를 보지 않죠. 비행기를 타는 법이 없어요.

시: 마치 사람들로부터 끔찍하게 유리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밥: 어떤 압력 때문에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습관이죠. 내가 원래 그런 식이에요.. 모르겠어요, 연결되는 것보다 단절되는게 더 쉬운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나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엄청나게 존경해요.. 관련이 너무 많았죠, 상황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아서, 자신을 깨트리는 것보다는 그냥 관련되지 않았죠..

시: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는걸 피하시나요?

밥: 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요. 나 같은, 역시 단절된 사람들이요. 단절된 사람들이 많죠. 나는 소외되었다거나 단절되었다거나 두렵다는 느낌이 없어요. 단절된 사람들 간의 어떤 종류의 조직화는 별로예요. 나는 그냥 어떤 조직과도 함께 갈 수 없어요. 언젠가는 어떤 지하철에서 자선이 완전히 혼자 있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르죠. 전기도 나가서, 오도가도 못 하고, 40명의 사람과 함께. 그러면 저는 그들을 알아야 했죠. 그때는 그냥 해야 하는 일을 할 거예요.
― 1965년 11월, 시카고 데일리 뉴스
내가 그의 셋째 음반을 건네고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자 그는 자기 사진에 턱수염과 콧수염을 그리고 서명했다. 나는 그에게 블루스를 정의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 “블루스는 주머니가 텅 빈 바지입니다. 마음에 들어요? 블루스는 주머니가 텅 빈 찢어진 바지라고요.”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블루스(blues)는 색이에요. 그게 다에요.” 그리고 나는 “미국 포크 음악에서 본인의 위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포크 가수면 개나 소나 포크 가수일걸요.”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그리고 앞으로 올 세대가 그들 자신의 지도자를 발견할까요?” 그는 약간 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새 세대를 믿어요. 곧 새 세대가 내게 맞서 반항할겁니다. 내가 더 예전 세대에 반항했듯이요. 변화만큼 안정적인 건 없지요. 나는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 데일리 헬럴드, 스튜어트 크럼프[12]
딜런은 그가 자신을 의식하는 동안 모든 이가 자신을 의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탬버린 맨을 들을 수 있는 그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동시대인들의 야심의 핵을 건드렸습니다. 오크와 팩스턴과 팀 하딘 같은 소수의 사람들은 그의 에너지를 느끼고 에너지를 전달받았습니다. 일부, 엔더슨교 블루와 나머지, 리처나 파리나 같은 이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영웅이었고 마지막 위대한 소포모어인 폴 사이먼은 딜런에게 충격을 받았지만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 마이클 토머스, 1968년 8월
KQED 방송국: 자신이 기본적으로 가수라 생각합니까, 시인이라 생각합니까?

밥 딜런: 아 나는 자신을 노래하고 춤추는 남자라고 생각해요.

K: 당신의 개인적 미래 희망은 뭐고 세계가 어떻게 달라졌으면 좋겠습니까?

밥: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없고 그냥 갈아 신을 장화가 많았으면 좋겠네요
― 센프란시스코 KQED 방송국, 1965년 12월 3일
KQED: 포크 가수 가운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오늘날 저항 가수들로 규정 할 수 있을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밥 딜런: 이해가 안 가는데요. 다시 질문해주시겠습니까?

K: 당신과 동일한 음악적 터전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저항 가수인 사람들이 얼마나 되나요? 즉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오늘날 사는 사회적 상태에 관해 저항하는 데 음악을 이용하나요?

밥: 얼마나 많냐고요? 약 136명이요 (웃음) 136명이나 아니면 132명이요.

K: 저항이라는 단어는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나요?

밥: 노래하고 싶지 않을 때 노래를 한다는 뜻이지요. 노래하고 싶은 희망을 거스르며 노래한다는 뜻입니다.

K: 저항가요를 부르시나요?

밥: 아니요.

K: 무슨 노래를 부르시나요?

밥: 모든 사랑 노래요.

K: 개명을 하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렇다면 다른 이름은 뭔가요?

밥: 쿠네제비치요. 친척들이 이곳저곳에서 찾아여 콘서트 표 같은걸 달라고 할까 봐 바꿨어요.

K: 밥, 오늘날 가수들은 왜 그렇게 마약을 널리 이용할까요?

밥: 몰라요. 당신은 가수인가요?

Q: 밥, 당신은 작곡을 할 때 어떤 주법을 사용하시나요, 아니면 기법이라고 부르나요?

밥: 음, 그냥 앉아서 정신 차려보면 곡이 나왔어요.

Q: 당신은 왜 우리와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면을 썼나요?

밥: 나는 그냥 당신 질문에 수준에 맞취 답변하고 있을 뿐인데요.

Q: 틀림없이 천 번은 들으셨을 질문인데요. 음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시나요? 저는 노래 한 곡이 이해가 안 가는데요.

밥: 음, 기분 나뻐하거나 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아요. 못 알아들었다면, 정말이지 고민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한테 하는 말이 아니니까.

Q: 글을 쓸 때 뭔가를 말하려고 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즐기시나요?

밥: 나는 그냥 엔터테이너예요. 그게 다에요.

Q: 당신은 글을 쓰고 노래하는게 자신에게 진정 중요하다고 느끼시나요?

밥: 당신 때문에 화가 날 것 같은데요.

Q: 아니면 그냥 잘되어가기 때문에 하고 싶은건가요? 당신이 쓰는 것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느끼나요?

밥: 느낄게 뭐가 있는데요? 몇 개만 대봐요.

Q: 기본적 감정들이요. 고통, 후회, 사랑...

밥: 나는 그런 감정이 없는데요.

Q: 당신은 작곡을 할 때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밥: 나는 내 느낌들을 설명할 필요 없어요! 여기 재판정이 아니에요!
― 센프란시스코 KQED 방송국, 1965년 12월
플레이보이: 왜 저항가요를 작곡하고 부르는 것을 그만두셨나요?

밥 딜런: 메시지가 있는 노래들은 다들 알겠지만, 지겨워요. 내가 하려는 건 시청을 세내서 약 50명의 웨스트 유니온[13] 사람들을 데려오는거에요. 내 말은 그러면 진짜 메시지가 있을 수 있겠죠.

플: 작년에 한 인터뷰어에게 ‘나는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게 사실이라면 더 기대할게 남아 있나요?

밥: 구원이요. 그낭 순전한 구원이요.

플: 소년 시절 꿈의 정석인, 커서 대통령이 되는 꿈을 꾼 적이 있나요?

밥: 아니요. 어렸을때는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이었어요. 누가 트루먼이 되고 싶겠어요?

플: 음,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칩시다. 첫 1,000일 동안 무슨 성과를 달성하고 싶나요.

밥: 맨 처음 할 일은 아마도 백악관을 옮겨야죠. 나는 즉시 미국 국가를 새로 쓸 거고, 어린 학생들은 ‘아름다운 미국’을 암기하는 대신 ‘Desolation Row’를 외워야 할겁니다. 그리고 나는 마오쩌둥에게 당장 승부를 걸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싸우겠어요.
― 플레이보이, 1965년
" 존 포드의 영화엔 용기와 용감한 행동과 구원 그리고 고뇌와 황홀함의 기이한 조합이 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드라마틱한 방식을 통해 보여 준다. (...) 찰리 채플린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조차 그렇다. 난 항상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를 의식하는 것 같다. "[15]


[1] 다만 아무 짓도 안했는데 폭력배가 일방적으로 칼로 찌른 것은 아니다. 메레디스 헌터가 술에 취해 무대로 난입하려다 경호를 맡고 있던 헬스 엔젤스 단원들에게 폭력적으로 추방당했고, 그는 다시 돌아와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이때 헬스 엔젤스 단원들이 그를 제압해 때려눞혔으나, 다시 무대를 향해 리볼버를 꺼내들자, 헬스 엔젤스 단원 한명이 칼을 들고와 그를 찔렀다. 이 장면은 영상에도 찍혀서 화재가 되었으나, 그를 찌른 헬스 엔젤스 단원은 상대가 먼저 총기를 꺼내든 것이 확인되어 정당방위로 무죄를 받았다.[2] 1966년 말"킹맨"이라고 이름 붙여짐[3] ‘Self Potrait’, ‘Planet Waves', 그리고 젊었을 때 "The Band"의 첫 앨범 'Music From Big Pink'의 앨범 커버를 그려주기도 하였다.[4] 출처 출처[5] Daniel Mark Epstein (January 4, 2011). The Ballad of Bob Dylan. Souvenir Press Ltd. p. 94.[6] Colleen Josephine Sheehy; Thomas Swiss (2009). Highway 61 Revisited: Bob Dylan's Road from Minnesota to the World. U of Minnesota Press. p. 108. [7] Wenner, Jann S. Lennon Remembers, Rolling Stone Press (2000) 148쪽[8] 알 아로노비츠가 로큰롤의 역사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말한 내용과 다르다. 딜런과의 만남을 주선한건 레논이었다고 하며, 딜런의 추종자였다는 얘기가 나온다.[9] 포크 페스티벌에 일렉트릭을 들고 나타난 딜런을 보고 관중과 동료들은 '아무리 잘 나가도 그렇지,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야유를 하고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아니다. 딜런이 하는 것이 포크이니 저게 바로 포크의 미래다.'라며 그를 옹호한 것은 바로 미국 포크·민중가요계의 대부 우디 거스리.[10] #[11] 역대 10위[12] 크럼프는 “인터뷰라기보단 익살극 같네요.”라고 인터뷰를 평했다.[13] 금융, 통신회사.[14] 처음으로 언론에서 인터뷰를 할 즈음엔 언론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기 사진이 잘 나오는 지 신경을 쓰는가 하면, 후술할 첫 일렉트릭 콘서트에서 청중들과 거의 싸울 듯한 모습을 보이는 듯 하다나 공연이 끝나니 관객 수가 몇명인지 묻는 등. 또한 부랑자를 연상케하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섬을 몇 개씩이나 보유한 부동산 부자다.[15] #출처 기사 / #중앙일보 번역 기사[16] 이 발언이 나온 배경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우스타샤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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