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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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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항서의 지도자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경력

2.1. 초기

은퇴 후 친정 팀 LG 치타스의 트레이너로 선임되어 1996년까지 LG의 트레이너와 코치로 활동했다. 1994년에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 출전하는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하며 김호 감독을 보좌하였으며,[1]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감독을 맡은 김호 감독을 따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로 합류하여 2000년(시즌 전)까지 활동했다.

2.2.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파일:image_4485127341506831921278.jpg

거스 히딩크 감독과 찍은 사진.[2]

허정무 감독이 사퇴하여 공석이 된 뒤, 후임 대표팀 감독을 보좌할 수석코치로 내정된 박항서는 2000년 12월 20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한일 정기전에서 감독 대행 자격으로 경기를 지휘했고[3], 이후 히딩크호의 수석코치로 합류하여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까지 대표팀 수석코치[4]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했다.[5] 그렇게 감독과 선수들 간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국 대표팀 선수단의 융화를 일구어내며 월드컵 4위의 성과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황선홍이 조별 리그 첫 경기인 폴란드전 때 선취골을 넣고 안기러 간 사람이기도 하다. 진상은 게임 시작 전에 황선홍이 골을 넣으면 박항서 코치를 안아준다고 농담 삼아 말을 했는데 골을 넣어버려서... 옆에 있던 히딩크는 섭섭해 했다고. 그래도 포르투갈전에서 박지성이 골 넣고 히딩크를 안아줬으니 섭섭함은 풀렸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16강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이 결승 골든 골을 넣은 뒤 환호하다가 이내 눈물을 글썽거리며[6] 그라운드로 향할 때 다가와서 격하게 환영해주기도 했다. 관련 영상 안정환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이 때 박항서의 키스를 받아 피부가 좋지 않다는 농담을 했다. 관련 영상

히딩크호의 수석코치였지만 히딩크 감독이 상대팀 분석을 위해 경기장에 직관하러 갔을때도 모든 훈련을 총 지휘했으며 대표팀내 선수들의 군기반장역할도 마다하지않고 관리를 철저히 해주었고 때로는 아버지처럼, 동네 형처럼 선수들의 멘탈과 여러가지를 잡아주었다고 한다. 사실상 히딩크호의 진정 숨은 주역이라고도 볼수있다.

2.3.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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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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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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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이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을 맡으며 생애 처음으로 감독직을 맡게 된다. 하지만 당시 하늘을 찌르던 대표팀의 사기를 등에 업고도 겨우 동메달을 땄다고 AG 이후 해임됐다. 월드컵과 올림픽에 비하면 우승 가능성이 확연히 높은 대회에서, 그것도 대한민국 안방에서 열린 대회임에도 금메달을 못 땄다는 점이 컸다.[7]
상대팀 경기 결과 스코어 득점자 비고
북한 0 : 0 - 친선경기
아랍 에미리트 1 : 0 이동국(PK) 친선경기
쿠웨이트 2 : 0 김은중
이천수
친선경기
몰디브 4 : 0 최태욱
이동국
상대 자책골(2)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조별리그
오만 5 : 2 조성환
김두현
이동국
이천수(2골)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조별리그
말레이시아 4 : 0 김은중(2골)
최태욱
이동국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조별리그
바레인 1 : 0 이동국(PK)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8강
이란 0(3) : (5)0 -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준결승
태국 3 : 0 박동혁
이천수
최태욱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동메달 결정전

9전 7승 2무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으나, 아시안 게임 준결승에서 이란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여 아쉽게도 우승은 좌절되었다.

이 대회에 박항서가 지휘했던 스쿼드를 보면 참으로 화려한데, 월드컵 4강 멤버 중 박지성, 이천수, 최태욱, 현영민이 발탁되었고, 비록 월드컵 본선엔 함께하진 못했지만 이동국김용대는 히딩크호에도 꾸준히 뽑혔던 멤버였으며, 김은중, 김두현, 김동진, 최성국, 박용호, 조병국 등이 합류했고, 더군다나 와일드카드 3명 중 2명을 또다른 월드컵 4강 멤버중 하나인 이운재이영표로 선발하는 위엄을 선보였다.[8] 그만큼 군 면제는 둘째 치고 무조건 우승만 노리고 참가한 대회였으니 부진한 성적인 건 맞다.[9]

조별예선에서 몰디브와 말레이시아를 각각 4:0으로, 오만을 5:2로 완파한데 이어 8강에서 바레인까지 꺾었지만, 준결승에서 이란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금메달이 좌절되었다. 참고로 이란전은 일방적으로 가두어놓고 패는 축구를 했지만 골대를 맞는등 불운이 엄청 따라왔다. 당시 경기영상을 보면 이란을 경기 내내 압도하고 있었으나...3-4위전에서 태국을 3:0으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하는 데에 만족해야만 했다. 참고로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는 박종환 감독 체제로 금메달을 받았었기에 16년만의 안방 금메달을 엄청 기대했던 분위기였다. 월드컵 탈락의 한풀이를 하러 왔던 이동국빼도 박도 못하고 시즌 후 군대 확정. 한국을 꺾고 올라간 이란이 결승에서 일본까지 격침시키고 금메달을 차지해 아쉬움을 더했다.

하지만 마냥 박항서 책임으로 묻기는 어려운 게, 당시 축구 협회는 2002월드컵에 올인 하느라 이 대회 준비를 소홀히 했다[10]. 연령별 상비군을 확보해 두긴 했지만, 정작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없었다. 이 무슨...결국 대회 3달을 앞두고 부랴부랴 아시안 게임 대표팀이 꾸려졌고[11], 당시 월드컵 엔트리 탈락 후 상심하여 방 구석에서 소주만 빨고 있던 이동국도 차출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 타임 라인을 살펴보면 박항서 감독이 얼마나 축구협회로부터 홀대를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다. 2000년 12월 20일 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에 부임하고, 2002년 6월 29일 터키와 3·4위전을 끝으로 지휘봉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8월 6일 아시안 게임을 약 두달 앞두고 박항서 감독이 코앞으로 다가온 아시안 게임과 2004 아테네 올림픽까지 대표팀을 이끌기로 졸속 계약을 맺는다.

지금이야 홍명보처럼 올림픽 대표와 국가대표 감독을 겸임하거나, 울리 슈틸리케신태용처럼 따로 운영하는 등 장기적으로 대표팀의 세대교체를 염두에 두고 각급 대표팀을 운영하지만 저때는 아예 사전에 코칭 스태프를 꾸리지도 않았다는 점을 눈여겨 보자. 즉 히딩크 후광을 업으려고 박항서, 정해성 두 사람을 각각 감독과 코치로 선임한 정황이 뚜렷하다. 그나마 정해성은 이를 고사했다.

그리고 9월 7일 남북축구대회가 열리는데 축협은 방한한 히딩크 감독을 기술고문 자격으로 대표팀 벤치에 앉히는 큰 일을 저지른다.[12] 9월 9일 박항서 감독은 협회와 연봉 문제로 이견차를 좁히지 못해 아시안게임까지 무보수로 맡은 뒤 다시 논의하자고 협회에 제안했다라는 충격적인 성명서를 발표한다. 관련기사

한마디로 보수 등 기본적인 계약내용조차 정하지 않고 일단 앉혀놓고 봤다는 얘기. 이에 대한 축협의 반응은 협회에 대한 명백한 항명이라며 퇴출을 시사했다.관련기사 그래서 일각에서는 동메달은 핑계고 박항서 감독이 비주류 대학 출신인 것과 축구협회 사이의 불화 때문에 경질된 것이라는 주장도 일었다.

명단만 보면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외화내빈이나 다름없는 팀이었다. 우선 부산 아시안 게임부터 아시안 게임에 나설 남자축구 대표팀은 만 23세 이하였으며, 여기에 연령제한을 초과하는 와일드카드 선수는 최대 3명까지 허용하여, 20인 엔트리로 구성하도록 변경되었다. 그래서 직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들을 엔트리에 모두 넣을 수 없었다. 당시 나이 제한에 걸리지 않는 선수는 현영민, 박지성, 이천수, 최태욱 등 단 4명에 불과했고, 현영민은 월드컵 본선에 기용되지 않았고 최태욱은 터키전에서 고작 11분을 뛴 것을 고려하면 뽑을 수 있는 월드컵 레귤러 자원은 박지성과 이천수 밖에 없었다.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이 빠지고 히딩크의 황태자 고종수는 부상으로 대표팀 중원을 신인 김두현이 맡게 된다. 부동의 공격수 황선홍도 빠지고 그 자리를 메꾼 이동국도 월드컵 엔트리 탈락 여파로 멘탈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13] 심지어 홍명보, 김태영, 최진철 스리백 수비라인을 통째로 뜯어버리고, 스리백을 전원 새 얼굴로 채웠다. 부족한 점을 메우고자 와일드카드 3장을 모두 활용하였고, 골키퍼 이운재와 중앙 수비수 최진철 그리고 측면 수비와 미드필더까지 가능한 이영표를 낙점하였다. 그러나 최진철은 대회 직전에 부상으로 낙마하여, 김영철로 대체하였다. 여기에 대표팀의 엔진 박지성은 소속팀과 차출 문제로 8강전부터 합류가 가능하다는 핸디캡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대교체를 이룬 석달짜리 대표팀 치고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14] 다만 아시안 게임은 연령별 대회에 피파 주관이 아니며, 아시아 한정으로 치러지는 대회이기에 여러모로 좋은 성적을 기대해볼만한 대회였고, 한국이 좋은 전력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괜찮은 전적을 거둔만큼 아쉬움은 남지만, 좋은 성적이라고 하기엔 다소 애매한 부분은 있다.[15]

2.4. 포항 스틸러스&전남 드래곤즈 코치

그 후 포항 스틸러스에서는 자신보다 후배인 최순호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 2년 간 부임했고 이후 전남 드래곤즈에서는 기술고문을 맡았는데, 애초에 포항 코치를 그만두고 전남의 감독에 올 예정이었으나, 허정무 감독이 당시 대표팀 수석코치를 그만두고 감독으로 오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치면서 기술고문은 사실상 명예직 수준이었다.

2.5. 경남 FC 감독

결국 2005년에 고향 팀인 경남 FC의 창단 감독으로 취임했다.

첫 시즌인 2006년에는 7승 5무 14패를 기록하면서 12위로 시즌을 마쳤다.

2007 시즌, K리그에서 경남을 4위까지 끌어올리면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 5위 포항을 만났고, 홈에서 1-1로 비겼으나 승부차기에서 패하면서 아쉽게 탈락했다.

4위라는 성적에도 불구하고 구단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2.6. 전남 드래곤즈 감독

경남 감독에서 물러난 후 2007년 12월 27일, 대표팀의 감독으로 선임된 허정무의 대체자로 전남 드래곤즈 감독에 부임한다.

전남 감독 부임시절에도 리그 컵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는 등, 지원도 시원찮은 구단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데 뛰어난 능력을 이때부터 보였다.

2010년 11월 5일,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전남 드래곤즈 감독에서 사임했다. 2010년 전남의 K리그 성적은 8승 8무 12패 10위. 후임으로 11월 10일,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당시 대표팀 수석코치였던 정해성이 전남의 새 감독으로 취임했다.

다른 팀 감독을 맡는 대신 잠시 재충전 시간을 가지겠다고 밝혔다. 관련 기사는 여기.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에서 많은 수의 전남 선수들이 2010년에 승부조작을 한 혐의로 대거 구속되면서 2010 시즌 팀의 부진은 박항서 감독의 탓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동안 K리그 승부조작 루머 기사에서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라고 밝힌 익명의 前 K리그 감독이 박항서 감독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영상

2.7. 상주 상무 FC 감독

2012년에는 상주 상무 FC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2013 시즌 상무를 1부 리그로 승격시켰고, 덕분에 2014 시즌을 클래식에서 이끌게 되었지만 2014 우승팀 전북 상대로는 원정에서 0대 6으로 패하는 등 1부리그의 벽은 높았고, 결국 전력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 시즌만에 다이렉트 강등당하고 만다.

2014년 10월,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축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면서 뜬금없이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번 아시안 게임 대표팀 20인 전원이 군미필자였는데 이들이 모두 병역특례를 받게 되면서 상무는 졸지에 20인 선수를 빼앗긴 셈이 되었으니 속이 쓰리지 않겠냐는 것이 골자. 네티즌들의 농담이라면 몰라도 너무나 질 떨어지는 기사였지만, 박항서 감독은 '그 선수들이 상무에 오려면 5년은 있어야 되는데 내가 그때까지 감독 자리를 보전할지도 장담 못한다.', '20인 엔트리 가운데 내년에 상무에 올 예정인 선수는 골키퍼 김승규 하나뿐이었다.'[16]고 해명 인터뷰를 했다.

2015년 시즌 팀을 정비해서 간신히 다시 1부리그 승격을 성공시켰다. 그해 12월 11일, 상무와의 계약 기간이 끝남으로써 상주를 떠나게 되었다.

사임 후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4년간 세 분의 부대장을 모셨는데, 지난 두 번의 부대장들은 지도자의 의견을 존중해 줬다. 소통도 잘 이뤄졌다. 그런데 이번 부대장은 선수들을 전투병 비슷하게 만들었다. 세계 군인 선수권 대회가 있다며 선수들을 숙소가 아닌 운동장에서 쉬라고 시켰다. 시즌 중에도 아침마다 4~6㎞씩 구보를 시켰고, 리그 경기 하루 전에 (선수들을) 산에 올려 보냈다. 그러면 선수들 근육에 무리가 간다. 지난해까진 구단에 국장이 있어 부대하고 소통했는데, 올핸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부대장이 올 때마다 정책이 바뀌었다. 선수들이 군인은 맞지만 전투병은 아니잖느냐? 개인적으로 면담을 요청해 우승하지 못하면 결과 갖고 책임진다고도 했다. (그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겠지만, (상무의) 30개 종목 특성이 다 다른 거 아니겠나? 축구 감독 처지에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박 감독은 그러면서
“작년까진 어느 정도 감독의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선수 선발에 권한이 없었다. 세계 어딜 가도 그런 기준은 없다. 일정 부분에선 감독이 선수를 뽑을 수 있는 재량권을 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선수 선발 부정) 예방 차원이라지만, 그러면 (감독을) 처벌하면 되는 거다. 올해 유독 문제가 많았다”고 그동안 불편했던 심경을 토로했다.

이렇게 군 당국에 의해 선수 선발이나 훈련에 대한 간섭이 지난 날들보다 극심하게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이미 상주 상무의 승격은 확정되었으나, 그 동안 상주를 잘 이끌어온 덕장에 지나친 간섭을 가한 군 당국에 대한 비판이 이뤄졌다.

2.8. 창원시청 축구단 감독

파일:7297_12694_1228.jpg

상주에서 사임한 후 고향인 산청군으로 돌아가 짧게 고등학생 유소년들을 코칭하다가, 2016 시즌을 끝까지 책임지고 타계한 박말봉 감독의 뒤를 이어 내셔널리그 창원시청 축구단의 제2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프로 팀 감독 경험이 풍부한 박항서의 취임은 큰 기대를 모았다. 전반기만 해도 창원시청은 중상위권을 유지하며 리그 3위까지 주어지는 플레이오프를 충분히 노려볼 만했으며, 6월에 개최한 내셔널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후반기가 접어들수록 여름 이적시장에서 전력 보강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한계를 드러내며 순위가 8팀 중 7위로까지 급하락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지도자 세대교체가 워낙 빠르게 진행 중이라서, 환갑이 다 되어가는 박 감독 스스로는 이렇게 프로팀 커리어는 끝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아내가 동남아는 어떠냐고 물으며 직접 에이전트와 연결해 줬고, 솔직하게 나는 지금 무직이며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며칠 후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제의가 오고, 박항서 감독은 기뻐했으나 한편으로는 외국인 감독들의 무덤 자리라는 소문을 듣고는 잘못 선택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선택은 자신의 인생은 물론 한 국가대표팀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2.9.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재임기간 2017년 9월 29일 ~ 2023년 1월 31일.

2018년 동남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2019 필리핀 동남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따내면서 '동남아시아 축구 패권'이라는 베트남 축구협회의 기대에 부응한 것을 넘어 사상 첫 AFC 주관 대회 준우승, 56년만의 아시안 게임 4위, 사상 첫 아시안컵 3라운드 8강 진출, 사상 첫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탈(脫)동남아급 활약이라는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특히 아시안 게임 4위와 아시안컵 8위(8강)는 일본·이란·호주 등의 AFC 강팀들도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무대인 만큼 박항서의 용병술이 빛을 발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2.10. 야인 생활

신태용 대신 인도네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을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그 외에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후보로도 거론됐다. 그러나 가능성은 낮았고 결국 김병수가 부임했다.

동남아권의 국가대표팀에서도 감독직 제의가 들어오고 있지만 전부 거절했다. 박항서의 차후 행보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는데, 박항서 본인은 베트남이나 한국, 인도네시아에서 감독직을 맡을 계획은 전혀 없다고 밝히면서 각종 루머들을 일축했다. 아마도 나이가 70대가 가까워지는 만큼 지도자 생활을 은퇴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베트남 유소년 축구 육성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언급하면서 이후의 여정에 대한 힌트를 남겼다.

그리고 박항서는 2023년 8월 기준으로 더 이상 프로 구단이나 국가대표팀의 지도자 생활을 하지 않고 하노이PHS 풋볼아카데미를 세워서 베트남의 유소년 선수들을 육성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한국의 방송에도 출연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프로 선수들을 지도하는 감독 생활을 끝내고 은퇴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하는 여론이 많다.#

한편 한국의 감독 위르겐 클린스만이 아시안컵에서 충격적인 졸전 끝에 탈락하자 차기 감독으로 그를 찾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냉정히 그의 베트남 대표팀 성적으로 대한민국 성인 대표팀 감독을 연결시키기엔 무리가 있다. 여태까지 약팀을 맡아 중상위권 전력으로 끌어올리는 능력을 보여준 것이 전부이기에, 현재의 다수의 유럽파들과 국내파를 아우러서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 자리에는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몇 년 전까지 연령별 대표를 감독함으로써 대표팀 선수들을 지휘했던 신태용, 김학범과는 달리, 박항서는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을 지도한 지 너무 오래되어[17] 연속성에도 의문이 있다. 그리고 애초에 박항서 본인이 과거 여러차례 자신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을 의향이 전혀 없다고 못박은 바 있다.

2024년 2월 19일, 베트남 3부 리그 소속인 박닌 FC의 고문으로 부임했다. 계약 기간은 2029년 1월까지이며, 유소년부터 성인팀, 그리고 기술 및 행정 파트 등 구단의 전반적인 컨설팅 업무를 수행하는 비상근 고문 역할로서 베트남 대표팀 감독직 사임 후 두 번째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태국과의 월드컵 예선 2연전을 앞두고 이 경기를 임시로 지휘할 사령탑으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왔다. 가장 큰 이유는 베트남 A팀과 U-23팀을 지휘하면서 2018년부터 2023년까지 태국 대표팀을 가장 많이 상대해 본 국내 지도자라는 점이었다. 본인 역시 태국 2연전 정도는 국가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수락할 수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황선홍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임시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박항서가 대표팀을 지도하는 일은 없어졌다. 박항서를 임시 감독으로서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도 아쉬움을 표출했다.

박항서가 물러난 다음에 후임으로 필립 트루시에를 감독으로 영입했던 베트남이 2026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인도네시아에게도 0-3으로 대패하고 인도네시아 상대 3연패, 필리핀을 2-0으로 이긴 경기를 제외하면 최근 10경기에서 1승 9패를 거두자 결국 트루시에를 경질했고, 베트남에서 박항서를 그리워하는 여론이 폭발하고 있다. 하지만, 박항서 본인은 베트남 대표팀으로 다시 복귀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이후 K리그1대전 하나 시티즌이 감독직을 제의하였다는 루머가 떠올랐다. 24시즌을 앞두고 AFC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를 목표로 김승대, 이순민, 홍정운 등 리그 정상급 선수들을 거액을 들여 야심차게 영입하였지만 시즌초반 극악의 부진을 면치 못하며 이민성 감독이 경질되고 리그 최하위로 떨어져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이 워낙의 고령에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직 말년에도 지친 모습을 여러차례 보이며 승낙할지는 미지수였고, 끝내 결렬되었다.# 구단에서는 충분히 시간을 주는 형식으로 압박을 주지 않고 다독이려는 형태로 선임을 하고 싶어했고 박항서 본인도 심도있게 고민을 한 사항이였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인해 결국 대전의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전의 빈 집은 황선홍이 가져갔다.

2024년 6월 27일 인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박항서에게 감독직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8일 후속보도에 따르면 이미 지원했다는 것은 거짓이지만, 아직 인도에 관심을 가지고 제출기한인 7월 3일까지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인도 대표팀은 스페인 국적의 마놀로 마르케스를 선임 했다.


[1] 도하의 기적 당시에도 현장에 있었다.[2] 겉보기에는 환갑인 노인으로 보여 56세인 히딩크보다 박항서가 더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2002년 월드컵 당시 박항서는 만 45세, 세는나이로도 46살이었고 심지어 주민등록상으로는 만 43세였고, 세는나이로 환산해도 44세였다. 히딩크 감독보다 무려 10살 넘게 어렸다! 대개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노안이라는걸 생각하면 놀랄만한 상황이지만, 2002 월드컵으로부터 2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히딩크는 세월의 흐름이 엿보이는 반면 박항서 감독은 차이가 거의 없는 편.[3] 해당 경기는 안정환이 전반 14분에 선제골을 뽑아냈으나 후반전에 실점하며 1-1 무승부로 끝났다.[4] 일각에서는 핌 베어벡이 수석코치라고 알려져 있지만, 2002 월드컵 대표팀 수석코치는 박항서가 맞다. 굳이 따지자면 핌 베어벡 또한 박항서 못지 않은 비중으로 히딩크를 보좌했으나 실제 히딩크와 선수들의 가교 역할을 하는 수석코치는 엄연히 박항서였고, 핌 베어벡은 히딩크가 데려온 코치들을 대표했던 셈. 당장 2001년에 히딩크호가 출범하기 직전이었던 2000년 12월 한일전에서는 박항서가 대표팀 수석코치 자격으로 대신 선수들을 지휘했고, 이후에도 히딩크가 휴가 등의 이유로 자리를 비웠을 때 박항서가 감독대행 역할을 맡았다. 특히 월드컵 기간중이었던 2002년 6월 5일에 수원에서 열린 D조 미국 - 포르투갈 경기의 전력분석을 위해 히딩크가 직접 갔는데 코치들 중에서는 박항서만 동행했고, 6월 16일 스페인 - 아일랜드 16강전 때도 히딩크가 8강전을 대비하여 전력분석차 관전했지만 정작 애인 엘리자베스와 함께 간지라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대비한 한국 팀의 훈련은 박항서가 대신 지휘했다.[5] 사실 월드컵 직전에 이영표가 부상 당했을 때 히딩크가 불같은 성질을 터트려서 박항서도 울컥했지만, 인내하고 넘어갔다고 한다. 다행히 이영표의 부상이 심각하지 않다는 게 알려진 후 히딩크가 자신이 지나쳤다며 사과를 하면서 훈훈한 마무리...[6] 이 날 경기에서 안정환은 전반 초반 페널티 킥을 실축하면서 자칫 역적이 될뻔했다. 그러다가 지옥에서 천당으로 워프했으니...[7] 심지어 남자 농구, 야구, 배구는 모두 금메달. 특히 농구와 배구는 결승전에서 각각 아시아의 최대 강호인 중국과 이란을 꺾었다.[8] 또 한명의 와일드카드였던 김영철은 2006년 독일 월드컵에 발탁되어 주축 수비수로 활약한다.[9] 이 대회에서는 실패했지만,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81~83년생을 주축으로 2년 뒤의 2004 아테네 올림픽 축구에서는 56년 만에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천수, 최태욱, 조병국, 박용호, 김두현, 김동진, 최성국 등이 아테네 8강 멤버이다.[10] 여기에 당시 연령별 대표팀의 성적이 참혹했던 탓도 있다. 조영증 감독이 이끌던 U-20 대표팀은 중국에 일격을 당해 세계 대회에 나가지도 못했다. 이 당시 대표팀에 이천수, 최태욱, 박지성 등이 있었는데 불구하고 말이다.[11] 윗 표의 첫 경기였던 북한과의 친선경기는 2002년 9월 7일이다. 무려 아시안게임 첫 경기를 불과 20일 남겨둔 시점에야 첫 실전 경기를 치른 것이다.[12] 당연히 굉장히 어색해진 두 사람은 서로 말도 하지 않다 히딩크가 넒은데서 보겠다며 슬쩍 자리를 비켜줬다. 박항서 감독이 2019년 베트남 대표팀을 이끌고 중국 대표팀을 지휘하던 히딩크와 17년만에 재회했을때 눈물까지 쏟으며 반가워 한걸 보면 이 일로 앙금이 남은건 아니지만 자칫 크게 틀어질 수도 있었다.[13] 아마 아시안게임에 전념해서 면제 받으라고 사전에 캐어해 줬으면 멘탈과 경기력이 터져나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다만 2004년부터 보여준 이동국의 한결 성숙해진 플레이를 보면 이때 아픔을 겪은 만큼 한층 성장한 건 분명하다. K리그에서 해트트릭도 상무에서 처음 해냈다. 2006년 월드컵 때는 대표팀 모두가 이동국의 부재를 아쉬워 했을 정도니...[14] 아시안 게임 동메달 입상은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동메달 이후 12년 만이었다. 게다가 1990년 대회는 국가대표팀이 나선 A매치 경기였고, 1990년 이후로 1998년까지 메달권까지 못 가봤다는 점을 감안하면 U-23팀으로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낸 것은 나쁘지 않은 성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필 대회 직전에 자국에서 치른 월드컵에서 세계 4위라는 대업적을 이뤄내서 기대치가 올라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시아 3위 성적은 초라해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 대회에서 축구를 뺀 야구, 배구, 농구 등 타 구기 종목은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비교적 시기가 좋지 않았다.[15] FC 코리아는 15년 이상 지난 이 시기를 가지고 축협의 실체가 이렇다며 마치 지금도 이런 것 마냥 욕하는 어이 없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16] 울산에서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면 김승규를 입대시킬 계획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김영광이 있는 이상 김승규를 빨리 군대 보내는 쪽이 이득이라고 판단한 듯.[17] 최근 기록이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으로 자그만치 22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막내는 최성국이나 이 쪽은 승부조작으로 선수 생활을 2011년 이후로 영구제명되어 접었고, 그 다음으로 어린 김두현은 2019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다 2023년에는 수석코치 신분으로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감독대행까지 한 사람이다. 즉, 박항서가 대한축구협회에서 지도자를 할 때 지도했던 선수들은 한 사람도 현역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오래 흘렀단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