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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0:15:29

민족 말살 통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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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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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b31c31> 상징 국기(일장기) · 국가(기미가요)
시대 1910년대(무단 통치)
1920년대~1930년대 초반(문화 통치)
1930년대 중반 ~1945년(민족 말살 통치)
통치기관 조선총독부(청사)
언어 일본어 · 조선어
정치 조선 주둔 일본군 · 일본 제국 경찰 · 토지 조사 사업 · 산미증식계획 · 민의창달 · 북선개척사업 · 농공병진 · 남면북양 · 농촌진흥운동 · 국가총동원법 · 전시증세령 · 내선일체 · 창씨개명 · 황국신민서사 암송 · 궁성요배 · 신사참배 · 정오묵도 · 가미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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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조선사편수회 · 식량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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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
2.1. 배경2.2. 정책
3. 결과4. 관련 문서

1. 개요

민족 말살 통치기()는 일본 제국무단 통치, 문화 통치에 이어 식민지 조선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여 일본인에 동화시켜 중일전쟁제2차 세계 대전 중 하나인 태평양 전쟁에 협력하도록 민족 말살을 시키고자 했던 시기이다. 1937년(중일전쟁)부터 1945년(8.15 광복)까지 시행되었다. 간이학교가 이 시기에 생겼다.

용어 자체만 보았을 때는 ‘민족 말살’이 마치 한민족을 몰살한다는 어감이라 홀로코스트킬링필드마냥 한반도에서 시행된 제노사이드처럼 느껴지지만, 여기서의 민족 말살은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확히는 ‘민족 정체성 말살 통치기‘ 혹은 줄여서 ‘민족성 말살 통치기‘.

2. 내용

2.1. 배경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붕괴되고, 대공황으로 인한 타개책으로 만주사변이 일어나는 등 일본 내부의 정치적 분위기가 일본군 군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자 식민지 조선에서의 정책도 이전과는 다르게 바뀌게 된다. 특히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의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의 확보가 중요해진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을 본국과 다르게 보면 동원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게 되고, 이러한 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일본인화 시킬 이유가 생겨버린 것이라 보면 되겠다.

1936년 조선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 때부터 본격적으로 해당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이후 중일전쟁으로 인한 여러 문제점들도 더해지게 되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중 가장 최악의 시기로 진입했다고 보면 되겠다.

일제는 만주 사변(1931)에 이어 중일 전쟁(1937), 태평양 전쟁(1941)으로 침략 전쟁을 확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여하였다. 또한 세계는 경제 공황 등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이 증폭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대외 침략 전쟁을 주장하는 군부의 쿠데타로 군국주의 체제가 등장하였다.

2.2. 정책

3. 결과

아마 식민 통치가 그대로 계속되었더라면 일본 제국이 원하던 그림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유사 시점에 단행된 소련의 대일 참전으로 결정적,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일본 제국이 동월 15일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하게 되면서 식민지였던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4. 관련 문서



[1] '일본인의 직접적 조상인 야요이인한반도 남부에 적어도 수백년간 머무르다가 소수의 한국어족 사용자와 같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서 당시 일본 열도의 원주민이었던 조몬인피가 섞여 야마토 민족 일본인이 탄생했고, 한반도에 남은 야요이인은 한민족에 흡수됐다'는 것이 현재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다만 당시 일제가 정말 이런 의미로 조상이 같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말살시켜 일본인에 동화시키고 보다 쉽게 통치하기 위한 의도로 주장한 것이다.[2] 특이한건 전후에 일본은 역으로 일본인과 한국인의 관련성을 최대한 거부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들은 조몬인이 일본인의 직계 조상이며 도래인은 소수가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유전자상으로 조몬인에 가까운 후손은 류큐인아이누로 여겨지고 있으며 도래인이야말로 현대 일본인의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다.(현대 일본인에서 유전적으로 도래인의 비율이 87~97%로 여겨진다.)[3] 창씨개명은 대단히 악질적으로 이뤄졌기에 이 시대에 창씨개명 안 한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창씨개명을 했다고 모두가 친일파로 여겨지진 않는다. 재밌는건 이렇게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이뤄져서 도저히 하지 않을 수 없다보니 그 반발로 기괴한 방식으로 창씨개명을 해 엿을 먹이는 사례가 등장했다. 야인시대에도 나오는 구로다 규이치도 대표적인 사례.[4]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언어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일본어 강습 강화와 한국어 교육 사이를 오락가락하였다. 1930년대 말에서야 농촌 소학교, 일본어 강습회 및 야학을 통한 본격적인 일본어 교육책을 펼쳤지만, 낮은 교육 인프라와 고작 270시간 짜리의 강습회 시간, 조선총독부의 의지 부족 등으로 수업 효율은 바닥을 기었다.(참고: Tsuzuki Tsuguo, 〈일제 시대 야학 및 학술강습회에서 실시된 일본어 강습〉) 근본적으로 말해서, '교육 인프라는 낮은데 신민 의식은 심어놓고 싶다'는 발상부터가 놀부심보였다(…). 학교가 많아야 민족주의이든 내선일체이든 뭘 배우는 법이다.[5] 당시 국어로 불린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은 학생에게 강제로 준 패. 해당 패를 가진 학생에게 갖가지 불이익을 주어 강제로 일본어를 사용하게끔 강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