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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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董景道생몰연도 불명
서진 및 전조의 인물. 자는 문박(文博). 사례 홍농군(弘農郡) 출신.
2. 생애
어릴 적부터 공부를 좋아하여 천리길을 걸어다니며 스승을 만났고, 밤낮으로 책만 읽고 외울 뿐 다른 사람과의 교류는 전혀 하지 않았다. 《춘추삼전》, 《경씨역》, 《마씨상서》, 《한시》(韓詩)를 깊이 연구해 깨달음을 얻었고, 《삼례》(三禮)의 의미를 파악하여 여러 유학자들의 논쟁이 있는 부분을 배제시키고 통설만 실어둔 《정통론》(禮通論) 을 저술하였다.[1]영평 원년(291년), 천하가 장차 혼란스러워 질 것임을 짐작하고 상낙산(商洛山)에 들어가 은거를 택했다. 옷은 나뭇잎으로 만들고, 배고픔은 나무의 열매로 해결하면서 홀로 거문고를 타고 노래하며 즐겁게 지냈다. 유연과 유총은 동경도를 여러 번 등용하려 했으나, 동경도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흉노의 한나라가 분열하고 유요가 전조를 세우자, 동경도는 산에서 나와 위예(渭汭)에 거주하였다. 유요는 동경도를 불러 태자소부, 산기상시로 삼으려 했으나, 동경도는 이를 굳게 사양하고 끝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채 위예에서 세상을 떠났다.
[1] 현재는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