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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7:59:57

대통령 각하 만세/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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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한민국 수립 이전3. 대한민국 성립 후 ~ 대공황4. 만주 정복 후5. 2차 대공황 후6. 식민열강 절멸전7. 전쟁 후8. 주요 국가의 상황
8.1. 아시아8.2. 유럽8.3. 아메리카8.4. 아프리카8.5. 오세아니아

1. 개요

대통령 각하 만세의 개변된 역사를 정리한 문서.

전작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가 그랬듯이 산신령이 조지원을 집어던져 시작된 스노우볼이 구르고 굴러 현실 역사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2. 대한민국 수립 이전

지리산 산신령이 조지원을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인 이지용에게 빙의시켜준다. 조지원은 한일의정서 조인 5일 전에 빙의된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어서 차라리 국운을 걸고 도박이라도 할 수 있도록 자폭 테러로 의정서 체결을 저지한다.

이후 산신령에 의해 조지원은 군관 조지원 정위에게 한 번 더 빙의당하고, 이전의 자폭 테러로 인해 일본과의 보국전쟁이 발발한 상황. 이 와중에 고종은 한성을 떠나서 평양을 거쳐 러시아로 도망가버렸고, 공격을 받은 일본군러일전쟁을 앞두고 발목이 잡혀버려 역사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조지원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모아 한성정부를 세우고 일본군을 격파한 후, 순종을 보위에 올린 후 권력을 장악, 대한제국의 13도를 점차 장악하는 한편 러일전쟁이 터지자 러시아군을 격파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자신에게 반대하는 전국의 지주들과 선비들을 때려잡고 러시아로 도망친 고종은 '정교회 사제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흑색선전을 퍼뜨리고, 내탕금을 전부 몰수하고, 버림받은 평양 진위대원들을 이용해서 그를 기소해서 이씨 왕조에 대한 민심을 나락으로 처박는다.

그렇게 민심은 전쟁 영웅 조지원에게로 쏠려 마침내 융희제에게 선양을 받게 된다. 하지만 조지원은 선양식에서 황제로 즉위하지 않고 공화정 수립을 선언했고, 국체를 대통령 중심의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으로 변경하고 선거를 통하여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3. 대한민국 성립 후 ~ 대공황

삼균주의를 통해 급속한 근대화, 서구화를 시작한 대한민국은 당장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할 수는 없었기에[1] 대신 합법적 시위와 어용파업, 국산애용운동 등으로 민족자본을 형성했고, 대통령 조지원의 사진집을 비롯한 혁명 굿즈 판매로 산업화 정책의 밑천을 얻어내고 '시위의 정석', '노조의 정석', '정당의 정석', '테러의 정석' 등 이른바 정석 시리즈[2]를 대량으로 인쇄해서 팔아먹어 혁명을 수출해 마침내 혁명의 종주국 지위를 차지한다. 이 이름값을 이용해 이웃 피식민 국가를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끌어들인 자금 역시 사실상 조지원의 비자금으로서 한국의 산업화에 유용된 듯하다. 다만 조지원에게 부정축재 등의 사치 욕구는 전혀 없어서, 한국의 산업화 후 그 국력을 이용해 주변국의 독립을 후원하고 있으니 결국은 목적대로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특히 삼균주의에서는 노동자 보호를 중시하여 조합 결성 보증[3], 의무 고용, 하루 8시간 노동, 정기 휴식, 식사 배식, 안전주의 등이 강제되었다. 초기에는 모두 같이 일해야 한다는 이유로 야근이 금지되어 있어서 더 일하고 싶은 사람은 추가로 다른 직장을 구해야 했고, 예시로 나온 여성 노동자는 봉제공장에서의 8시간 근무 후에 식모로서 추가로 일하는 정도로 여섯 자매를 먹이고 조합의 도움을 받아 모두 시집 보낼 수 있었다. 또한 요식업자 조합에서 성균관대학교 영양학 박사들의 협조를 받아 식자재 수급과 영양상태를 감안하여 한달치 식단을 짜고 공급한다. 식자재 공급이 미비할 경우 책임자 관리 하에 라면 취식이 가능하고 경사가 있을 경우(노동자 가족의 출산이나 혼인 등이 제시) 전날 요청하여 치킨을 배식받을 수도 있었다. 라면도 치킨(양념치킨 포함)도 국민들에게 맛있고 영양 많은 음식을 공급하기 위해 불철주야 고민한 조지원의 공적으로 홍보된다. 맞는 말이긴 한데...

서양인들이 보기엔 전국민이 강제노동에 투입당해 같은 시간에 같은 식사를 해야 하는 지옥 같은 전체주의 국가지만 조선 말기의 혼란기에서 벗어난 한국인들에게는 낙원이나 다름없었고, 실제로도 작중 서양 운동가들의 생각과는 달리 어른이고 아이고 하루 14~16시간씩 근무하던 당시 서양의 노동현황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노동자 친화적인 환경이다. 심지어 노동자의 휴양을 위해 국민 1천 가구마다 극장, 도서관, 체육시설을 하나씩 의무적으로 건설해야 하고 모든 노동자에게는 매월 1회 각 시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이용권이 지급되며(물론 추가로 이용하려면 유료), 온갖 예술가 조합은 물론 여행 동호회나 당시 한국에서는 드문 취미인 보드게임 동호회까지 언급되었다.

그러다 보니 '노력은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비문명적인 아시안이니 앞뒤 모르고 있을 것'이라면서 사회주의에 대해 가르쳐주려고 와 보았던 독일 사민주의자가 자신들이 추구하던 모든 노력(1일 8시간 노동, 조합 결성의 자유, 충분한 영양 공급 등)이 이미 현실화되어 있으며, 여학생이 남학생과 동등하게 대입 시험을 치를 수 있는 등 남녀평등까지 구현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열렬한 삼균주의자가 되어 한국 독립당에 입당했을 정도.

이 시기 영국이나 미국, 기타 열강의 노동환경은 빈말로 당시 자본가가 21세기 한국을 보면 빨갱이라고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으며, 노동 중에 부상을 입으면 보상 한 푼 없이 쫓겨나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노동자에게 보수와 휴식과 영양과 안전을 보장하는, '시뻘겋다 못해 적외선 영역으로 돌입 중인' 삼균주의적 노동환경은 숙련 노동자를 빠르게 대량으로 양성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그리고 작중 세계처럼 아직 자동화가 진행되지 않은 시기에 숙련 노동자의 존재는 생산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팬덤에서는 열강들과 비교해도 단위생산성이 능가하고 일본 정도는 총생산량으로도 눌러버릴 수 있지 않을까 했을 지경. 한국은 그렇게 양성한 숙련공을 통해 아직 산업화가 얼마 전진되지 않은 한만전쟁 시점에서도 손쉽게 대량의 밀폐용기와 독가스를 생산할 수 있었다.

조지원은 미래지식을 통해 곧 대공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때문에 빚 내서 한강의 기적을 노렸다가는 파산하기 딱 알맞다고 판단했다. 한 번 실패하면 빚과 이자가 쌓여 신뢰도가 떨어지기에 재도전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대기업 한두 개 만들어봤자 미국과 영국의 전통 깊은 초거대 재벌들조차 한 방에 쓸려가는 대공황의 파도를 견딜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총 직원 2천만 명짜리 거대기업을 만들어서 대공황을 견뎌내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삼균주의를 통해 매우 폐쇄적으로 구성된[4] '거대기업 대한민국'의 경제는 당시의 세계 경제 호황에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올라타야 한다는 실무진들을 한탄시켰으나 얼마 가지 않아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자 끄떡없이 견뎌내는 내구성을 과시했고, 이후 일시적인 경제 대호황에서도 다른 나라들과 달리 조지원이 도로와 철도, 지하철 등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였기에 재차 닥쳐온 2차 경제 대공황도 운 좋게 넘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조지원이 대공황의 책임을 지겠다며 하야를 선언하자, 전국적인 하야 반대 데모와 단지혈서 연설, 자살 시위까지 일어났다. 이리하여 얼마 안 가 조지원은 여론을 등에 업고 복귀하였으며, 그의 지배력은 더욱 강화된다.

또한 대공황 극복을 위해 삼균주의 초기의 의무고용제를 재발동하여 일자리를 억지로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제공하고 식사를 공급했는데 예시로 공사 현장에서 쌀이 부족하다며 대체식품으로 무료배식된 것이 소시지 피자오이피클, 옥수수 수프와 콜라였다. 노동자들은 이거 먹고 어떻게 힘을 쓰냐며 투덜거렸지만 서양에서는 미국과 경쟁하던 강국이었던 독일조차 군대 운용할 돈이 없어서 제국이 해체되기 직전에 백성들은 순무도 못 먹고 굶어죽어가는 상황이었는지라 어느 댓글은 '이게 대공황 두 번 처맞은 나라냐? 한민족 역사상 제일 잘 먹는 시대인 것 같은데?' 하며 당혹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심지어 경제 시스템도 제대로 돌아가고 있어서 돈만 있으면 부근 식당에서 밥을 사먹을 수도 있었다.

다만 한강은 빠졌다가는 익사보다 중독으로 죽을 만큼 오염되었고 도시의 경관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이거야 런던 스모그 사건이나 템스강의 오염, 80년대 한국의 환경오염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급격히 산업화하는 국가라면 다 겪는 일이기 마련이지만 그보다도 좀 더 심한지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회색 사각형 콘크리트 건물에 장식이라고는 없는 가구들이 들어찼고 건물 앞에 세워놓은 가로수마저 대량생산한 것처럼 똑같다고. 리하르트 조르게는 한국을 방문하여 역세권에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저택이 아니라 노동자를 위한 집단주택이 있다는 점을 높이 샀지만, 먼저 머물고 있으면서 한국의 삭막한 풍경에 학을 떼어버린 동료 정보요원과 마찬가지로 미적인 면에 대해서는 눈을 감기로 했다.

4. 만주 정복 후

동시기 중국은 독가스를 누렇게 쌓일 정도로 퍼부어대고 아편 먹인 병사들을 밀어넣는 내전 중. 반면 만주는 한국의 산업화를 지원하기 위한 거대한 식량생산단지로 개조되었다. 밀과 옥수수, 콩과 유제품은 물론 돼지묵의 인기로 돼지 농가들까지 육성된 덕분에 대공황 중에도 식량은 충분하고 전기도 들어오고 경공업 공장도 돌아가는 등 한국의 만주 점령(공식적으로는 만주 독립) 당시 도망쳤던 중국인들이 돌아오려 할 정도로 체제경쟁에서 승리했다. 중국발 난민들은 낡은 어선 따위로 한국 쪽으로도 침투하려 들고 있어서 한국 해양경찰들이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경고 후 조준사격 및 격파사격으로 사살하는 방식으로 저지하고 있으나 그것조차 뚫고 들어온다. 물론 그렇게 들어와봤자 매우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한국이라 흔히 체포되어 인적이 드문 작은 사회를 골라 최소한의 인권도 보호받지 못하는 노예 신세로 공급되었다. 예시로 나온 지역은 2014년 신안 염전 노예 사건으로 유명한 신안.

만주인들은 30여년에 걸친 삼균주의 교육에 의해 중국과는 별개의 민족주의와 우월주의를 완성하여 만주 지도부는 '청결 의식조차 없는 저 야만인들을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고민이고 일반인들은 처음에는 중국인들을 불쌍하게 여겼지만 부대껴 보니 '더럽고, 게으르고, 난폭하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마누라 패는 것과 싸움박질밖에 없는, 아무리 보살펴주어도 은혜라고는 모르는' 꼴인지라 혐오하게 되었다. 만주와 화북을 통일하자는 국민투표가 부결되었을 정도.

동시에 만주인들은 한국에 대해 인종적, 문화적인 열패감과 동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인이 포함된 예맥계 인종을 육체적, 정신적, 문화적으로 최상위에 두고 서양인과 일본인은 원숭이 취급하는 삼균주의적 인종의식이 차츰차츰 스며들고 있으며 이것에 이상함을 느끼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도 다른 모두가 환호하는지라 불이익을 입을까 두려워 입다물고 있다.

5. 2차 대공황 후

한국군은 조지원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가장 선진적인 교리를 가장 먼저 채용하는 선진적인 군대가 되었다. 일본군으로부터 한성을 방위하려던 민병대는 그렇다쳐도 초반 중국군에게 독가스를 퍼부어대던 후진적인 군대가 독일에서도 포기한 전차를 들여와 꾸준한 연구와 개량 끝에 다음 전쟁에서는 세계 최초의 전격전을 선보였으며, 복엽기의 시대에 조지원의 명령에 따라 꾸준하게 금속제 단엽기를 연구한 공군은 대마도 상공에서의 일본과의 대치에서는 기동성이 부족하여 거의 장난감 취급을 당했었으나, 만주에서 다칭유전을 발견하여 산유국이 된 덕분에 연료 걱정을 떨구고 2차 대공황 시기에 들어서자 대출력 엔진을 개발하는 데 성공, 고속 중장갑 중화력의 에너지 파이팅(타치 위브+붐앤줌)으로 일본의 중국 파견군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또한 해군 역시 독일이 포기하다시피 했던 잠수함을 카를 되니츠 등 군사고문과 함께 받아와 연구개량 끝에 세계 최초의 잠수함대를 보유하여 반억지로 떼어낸 대마도 일대에서 작전하거나 중국 연안에 기뢰를 부설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미국으로부터 다수의 전함과 항공모함을 도입하는 등 확실한 열강급의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팬덤에서는 군사교리를 매번 바꿔가며 대성공한 군대인지라 교리가 고일 걱정은 없겠는데, 반대로 아직 증명되지 않은 너무 급진적인 교리를 도입했다가 털리지 않을까 농담삼아 걱정할 지경. 이러한 강군을 기반으로 한국은 발해연방을 건국해 만주를 사실상 합병하고 몽골 등 주변국을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그 후로도 꾸준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국령 인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피식민 국가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며 삼균주의와 한국 독립당의 영향력을 퍼트리고 있다.

그러는 동안 미국과 독일 간의 경제전쟁으로 인해 촉발된 대공황과 그 극복을 위해 과잉 투자된 자본이 가져온 대호황, 결과적으로 1936년 1월 13일, 2차 경제 대공황에 의해 자본주의 열강들은 거의 붕괴한다.

독일 제국은 우크라이나, 발트,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의 동방제후국들이 연이어 무너지며 국경에는 수십 만의 난민이 몰려들고 민간 경제의 70%가 증발하며 베를린에서 10만 명의 공산주의 폭동이 일어나는 총체적 난국 상태가 되었다. 결국에는 어디서 반란이, 어디서 혁명이 일어나도 아무것도 못하고 무조건 협상하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수아 드 라 로크가 페탱 원수의 군부 독재를 끝내고 삼균주의 짝퉁스러운 협동주의, 전체주의적 정권이 들어섰다.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에서도 호황을 즐기던 자본가와 주식투자자들이 비처럼 뛰어내리고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 맥아더의 폭압적 계엄정부가 대통령을 협박하여 독재정권을 수립하였고 그에 협력해 노조와 빨갱이와 흑인과 KKK를 수만 명 쏴죽이고 수십만 명 잡아 처넣던 FBI존 에드거 후버 국장이 질려버렸을 지경. 여기에 더해 조지원은 미국에 남미산 코카인을 퍼부어 아예 주저앉혀버리려 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붕괴해가는 중에 조지원은 290화에서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와 존 F. 케네디의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를 사전표절한 연설로 소련인들의, 그리고 전 세계 독립운동가와 자유주의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5] 소련의 지도부도 오만하기 그지없는 레프 트로츠키를 제외하고 블라디미르 레닌, 니콜라이 부하린, 이오시프 스탈린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를 비롯한 대다수가 조지원에게 홀라당 넘어가버렸으며, 전 세계의 혁명론자와 낭만주의자 치고 이 연설에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6. 식민열강 절멸전

이후 서울에서의 열병식에서 조지원은 서양과 일본에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하고 장제스와 협력해 장강을 넘어 일본 지나파견군을 몰아붙인다. 일본은 한국이 약조를 깨고 장강을 넘은 것에 분노해 한국을 직접 공격하려 했으나 작중에서는 그나마 제정신으로 묘사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쟁 전에 연료를 비축하자며 한 달만 기다리자고 시간을 끌었는데, 그러자 추분으로 일본군 장병들이 고향에 내려간 틈을 타 한국이 먼저 일본에 기습을 가했다.[6][7] 구레 진수부를 비롯한 주요 시설에 폭발물을 가득 채운 유조선[8]을 밀어넣어 전술핵 수준의 자폭으로 마비시키고, 거리가 먼 요코스카 해군 진수부에는 잠수함 백여 척을 동원해 확산탄두 로켓을 퍼부어 지상을 포격하는가 하면, 공수부대와 해병대로 규슈의 주요 군시설을 점거했다. 이후로는 규슈를 발판삼아 일본 전역에 기뢰고엽제와 병원균과 폴로늄을 뿌려대어 '제발 항복하게 해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굶길 작정이다.

조지원이 일본에 제시한 항복 요구 조건은 제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뿐 아니라 모든 해외 식민지를 포기하고 천황 포함 모든 화족을 전범재판에 회부하는 등 일본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강경한 것이었다. 일부러 일본이 항복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후 혼슈에 갇혀서 한국의 전략폭격과 세균전, 방사능물질 공격으로 썩어 문드러져가는, 그 이시이 시로가 환멸을 느낄 정도의 생지옥이 된 일본이 십수화에 걸쳐 자세히도 묘사되었으며, 일본 군부는 공군은 밀려도 해군을 재정비하기만 하면 육해군은 지지 않는다고 기세를 올렸지만, 이윽고 조지원이 진짜로 일본인을 말살할 작정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경악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일제 수뇌부는 더 이상 못 버티고 결전하러 나오는가 싶더니 연합함대와 함께 미국으로 도주해버렸다. 일본 제국은 멸망하고 일본합중국이 세워졌으며 오키나와, 홋카이도, 규슈, 간토에는 국가판무관부가 설치되어 한국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민간인 피해는 이후 석조전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지도자들 앞에서 인류연합 선언을 할 때 세계대전 희생자가 1억이라 언급하면서 추가 서술된 바에 따르면 무려 6000만 사망, 남은 인구는 2000만 명, 독소전쟁에서의 소련인 사망자 수인 2700만의 두 배 이상이다![9]

이후 대한민국은 여세를 몰아서 함대와 병력을 동남아로 파견해 식민지들을 해방시킨다. 한편 유보트 함대는 호주를 대상으로 무제한 유보트 작전을 실행하고 더 나아가 브리즈번에 로켓 폭격을 가했다. 사실 호주는 자원이 자급자족되던 곳이라서 세계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대한민국이 통상파괴전으로 말려 죽이기 어렵고, 한다 해도 영국에서 냅다 군대가 달려올 게 불 보듯 뻔하니 작전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이쪽 세계관 자체가 대공황을 2연타로 얻어맞고 후술하듯 유럽 국가들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데다 동남아,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에서 서구 열강에게 저항하거나 파벌이 다른 독립군끼리 독가스 날리며 총으로 쏴 죽이는 혼돈 그 자체인 데다가 종주국인 영국과의 연계가 끊어진데다 그 넓은 중국을 남방계니 북방계니 하며 서로 인종차별해가면서 군벌들끼리 싸우는 수라장을 만들고 일본을 멸망시키고 있는 한국군에 저항하여 살고 있는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키고 끝까지 버티며 저항할 용기를 분쇄하기는 충분했다.

결국 호주마저 항복하고 호주와 뉴질랜드의 백인들은 그대로 발해연방의 인질이 되어 약 1000만 명 가까이 되는 오세아니아의 백인들이 전부 난민으로 전락하여 남아공, 캐나다를 비롯한 다른 유럽계 국가들로 전부 쫓겨나게 되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도 국가판무관부가 세워져 홋카이도와 류큐처럼 지배권이 원주민들에게 넘어갔고, 한국은 아프리카 대륙으로 피난 가는 백인들 틈바구니에 첩자들을 잡입시켜 아프리카 대륙에도 독립운동과 혁명을 확산하려고 하고 있다. 그 후, 영국의 항복으로 독립을 쟁취한 인도는 이슬람교도들을 추방하고, 소련은 중동을 침략하여 순식간에 석권한다.

이 시점에서 유럽은 그나마 온전한 나라가 프랑스와 이탈리아 정도밖에 안 남았을 정도로 망가졌는데, 독일 제국은 소련군의 공세 속에서 그 많던 영토를 다 잃고 쪼그라들다가 프랑스의 배신으로 결정타를 맞고 결국 패망, 카이저와 정부가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기껏 망명한 영국도 식민지 보전은 고사하고 본토를 다스릴 역량조차 사멸한 상태. 케이프타운을 잃으면서 남아프리카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런던 버킹엄 궁전에까지 시위대와 반군의 로켓탄이 날아들어 그 윈스턴 처칠이 다 포기했을 정도. 독일을 밀어버린 소련도 전사자가 수백만에 달하고 국민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등 내부역량이 임계점 근처까지 치달은 상태였다.

분열된 미국 역시 그야말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접어든 지 오래. 국명도 아예 미연합국으로 바뀌어버린 채 대놓고 마약을 유통하는 마피아가 감옥에서 풀려나와 보안관이 되어 치안을 담당하고 있고, 창문만 내다 보아도 어디선가 총성과 비명소리가 들려오며 교수형당한 시민들의 시체가 가로수에 끝도없이 매달려 있는 등 지옥도가 펼쳐졌다. 천룡인이나 다름없는 미국의 국회의원과 관료들은 대놓고 마약을 하면서 유색인종성노예로 삼는 등 정부도 방탕에 빠진지 오래이다.

본토에서 하와이로 도망쳤던 일본 연합함대의 잔당들은 마지막으로 한국 해군에 결전을 걸지만, 전함이 주력인 연합함대는 항공모함과 잠수함이 주력인 한국 함대를 상대로 함포 한번 제대로 쏴 보지 못한 채 몰살당한다. 어차피 한국은 일본군 잔당의 항복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만약 생포한다면 모조리 다 고문이나 생체실험의 재료로 쓸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도 용케 살아있었던 천황 부부 역시 타고 있던 포경선이 어뢰를 네 발이나 맞으면서 폭사한다.

그 와중에 발해연방은 오래전부터 연구하던 원자폭탄을 드디어 완성한다. 그런데 소련과의 주도권 싸움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고 박헌영의 고려공산당이 소련에 핵무기 설계도를 빼돌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발련의 경쟁자를 만들어선 안 된다고 모스크바에 핵을 투하하였다. 이 결정을 내릴 때 "난 처음부터 공산당이 싫었어. 구역질 나는 빨갱이 새끼들. 핵의 화염으로 모조리 정화해주마."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조지원의 대사와 지문마저 맛이 가서 북한 방송 같은 찬미체가 되어 있는 것이 압권.[10] 이 핵폭탄을 떨어뜨린 날이 또 노동절이라, 모스크바에선 기념식을 하느라 엄청난 수의 인파가 한데 모여 있었다. 이 핵폭격으로 트로츠키, 부하린 등 수뇌부와 모스크바 시민들이 몰살당하고 소련은 사실상 멸망한다. 이때 현재와 같은 탄도탄이 없던 시대라 기념식에 참가한 소련기로 위장한 폭격기에 싣고 가서 떨어트렸는데, 아무리 소련과 우호적이라고 해도 중요한 기념식 전에 위장한 폭격기가 침투하기까지 하는 것도 그렇고 암만 노동절이라 수뇌부 대다수가 모여있었다고 해도 소련의 수도에 핵폭격 한 번 가한 걸로 그 큰 나라가 멸망에 이를 정도로 만일의 사건에 대비한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다고 상정한 것도 무리수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

그로부터 나흘 뒤, 조지원은 전 세계에 방송되는 TV 연설을 통해 자신이 모스크바에 핵공격을 했다는 사실을 대놓고 공표하며, "이제부터는 대한이 온 인류의 유일한 법을 만들 것이고, 이 법을 어기는 국가나 감히 대한의 전유물인 핵폭탄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국가는 핵폭격이라는 징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선포한다.[11] 그리고 자신이 허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모스크바에 이어 레닌그라드, 스베르들롭스크, 카잔, 키예프, 파리, 낭트, 마드리드, 리스본, 브뤼셀, 암스테르담, 나폴리, 밀라노유럽의 대도시들을 연속적으로 핵폭격한다. 이후에는 탄도탄 개발을 완료하여 핵폭격도 훨씬 자유로워졌다.

7. 전쟁 후

대한민국은 세계의 유일한 국제법으로 군림하게 되었고 삼균주의 진영 국가는 포스트 조지원 시대를 대비한다. 조지원은 혁명의 현신이나 다름없는 공정한 판결자이니 믿을 수 있지만 조지원이 아닌 다른 사람이 권력과 핵무기를 쥐고도 자신들을 공정하게 대해 줄 것인지는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각국 지도자들은 아예 한국의 일부가 되면 지방홀대 정도는 있을지 몰라도 설마 핵폭격은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세계의 절대적 강자로 떠오른 한국의 폭주를 견제하기 위해) 삼균주의 진영의 80여 개국이 대한민국에 합병을 요청한다.

조지원은 종신집권이 될 우려가 있다며 민국 50년(서력 1955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당시 연설은 "대통령 업무를 중지한다. 금일 정오부터."라고 샤를 드골의 퇴임 연설을 표절했다. 은퇴 후 지리산을 찾은 조지원은 산신령을 만나 질책을 듣고 몸이 진토가 될 때까지 썩어가는 고통을 겪으리라는 선고를 받지만, 조지원은 이 나라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라 대답하고, 그 말대로 조지원은 민국 55년(서력 1960년) 사망하여 국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영면한 후 시신이 유리관 안에 엠버밍되어 영원히 대한민국을 지켜보는 결말을 맞이한다.

8. 주요 국가의 상황

8.1. 아시아

식민지 지배를 받다가 열강에서 독립을 쟁취하는 등, 한국의 폭주로 인한 수혜를 제대로 입었다. 일본중국 빼고. 중국은 그나마 정부라도 존재하지만 일본은 작정하고 말려죽이려는 한국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완전히 붕괴해 버렸다.

8.2. 유럽

원 역사의 승자들이자 현대에도 세계의 주요 국가들이지만 폭통 세계에서는 아일랜드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멸망하거나 역으로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8.3. 아메리카

8.4.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열강들에게서 독립하는 등 한국의 폭주로 인한 수혜를 크게 입었다.

8.5. 오세아니아



[1] 다만 대한민국의 국력이 크게 오른 후엔 개정했다.[2] 이에는 단순히 시위하고 파업하고 테러하는 방법만 기재한 것이 아니라 시위를 극단화시키려는 프락치를 잡아내고 파업이 장기화되었을 때 노조원들의 생업을 배려하는 법, 인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 테러를 해서는 안 되는 표적을 구분하는 법, 정부와 지지자 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을 선정하는 방법 등 평화적인 방법론도 풍부하였으며, 이것이 모두 통하지 않는 경우 '반란의 정석'으로 이어지는, 말하자면 '독립 교과서'였다.[3] 물론 조지원이 필요할 때 동원하는 어용조합이다.[4] 현실에서 이런 케이스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었다. 매우 폐쇄주의적이었던 당대 소련 경제는 대공황 시기에도 타격받지 않고 오히려 고성장을 하고 있었다.[5] 전작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도 킹 목사의 연설을 표절해먹었었다.[6] 한국은 조지원 주도로 농업 기계화를 추구하였기에 농번기에도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7] 소설적 허용. 작중 대한민국이 만주를 식량생산단지로 개조해서 서북에서 육로로 피난 온 한인들을 때려넣고 서해안으로 도망쳐오던 한인들을 노예로 부려 간척 사업을 벌이고 중국에서도 물자를 착취하는 등 상당히 부유해졌다고는 하지만 당장 천하의 미국조차도 수확철에는 콘 벨트 등의 지역에서는 징집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농번기에 전쟁은 부담이 된다. 이는 상술했듯 농번기에 한국을 공격한 6.25 전쟁의 변주이다.[8] 현실에서 군이 비슷한 공격을 한 사례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코만도와 해군이 합작한 채리엇 작전(Operation Chariot)이 있다. 미국으로부터 공여받은 구형 구축함의 선두부에 폭약을 채워넣고 프랑스 생나제르의 드라이 도크에 들이받아 수문을 날려버림으로써 당시 북해에서 큰 위협이었던 독일의 전함 티르피츠가 정비받을 수 있는 도크를 제거해 작전할 수 없게 만들었다.[9] 이들도 말이 생존자이지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 병자까지 감안한다면 몸을 멀쩡히 가눌 수 있는 인구는 사실상 1000만도 채 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10] 극중에서 조지원은 자유 대한이라는 명칭을 자주 강조했으며 소련과 동맹을 맺었음에도 '빨갱이 패거리 취급 받고 싶지는 않은데'라고 중얼거리는 등 심리적으로 항상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복선이 깔려 있었다.[11] 척수반사 가상역사, 통칭 '핵범석 어장'이라 불리는 AA작품에서는 핵확산 금지조약이 없었는데, 미리 협의한 4개국(해동-동남아에 위치한 한국계 입헌군주 연합왕국-, 미국, 이슬람 러시아-중동에 위치한 이름만 러시아인 아랍계 이슬람 국가, 유럽쪽엔 소비에트 러시아가 따로 있다.-, 유련)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에서 핵개발 징후가 발견되면 그냥 핵폭격할 작정이라 그랬다고. 본작과 묘한 공통점을 느끼게 한다.[12] 화북과 서북을 차지한 북경정부, 중원의 나머지 부분을 차지한 우창정부.[13] 이로 보아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어쩌면 웨일스까지)도 떨어져나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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