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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рест пропагандиста (선동가 체포). 일리야 레핀의 1892년 작품 |
1. 개요
대중들에게로 가십쇼! 거기에 당신의 삶이, 당신의 투쟁이, 당신의 이성이 있습니다! 민중들에게 자기 자신을 섬기는 법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줍시다!
브나로드 운동 잡지 전진!(Вперё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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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나 러시아 사상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어휘로, 인민 즉 전통적 농민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정치이념 및 사상을 지향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한국어로는 '인민주의자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것이다.
나로드니키는 근대 러시아 계몽운동을 시작으로 하는 이들로 본래는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일으켜 이들의 계몽을 통한 차르체제의 전복이였으나 반대로 농민이 차르를 더욱 더 옹호하자 이에 낙담하여 허무주의에 영향을 받아 테러주의적 활동과 계몽주의적 활동을 동시에 이어가는 존재였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대대적 탄압을 받고 자취를 감추다가 사회혁명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탄생했다. 하지만 사회혁명당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러시아 공화국에 대한 의견차이로 분열되었고 볼셰비키와 연대하며 노동공화국을 목표로 하던 좌파 나로드니키(좌파 사회혁명당)과 시장경제와 자영농 성장과 농노의 해방을 애기한 사회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우파 나로드니키(기존 사회혁명당)으로 나뉘게된다.
근대적 포퓰리즘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미국의 진보주의 운동과 연관 있는 세계 최초 (근대적)'포퓰리스트' 정당인 미국의 인민당이 스스로 '포퓰리스트'를 자처했는데 그 포퓰리스트는 바로 러시아의 농본주의적 운동인 나로드니키에서 유래한 것이다.
2. 역사
나로드니키의 역사는 1848년 혁명과 큰 연관이 있다. 알렉산드르 게르첸(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е́рцен)과 같은 이들이 나로드니키의 시작인데 이들은 러시아의 발달되지 못한 면과 아직 구시대적인(아직 자유주의조차 퍼지지도 않은) 면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발전에 고민하고 있었던 시기였다.하지만 1848년 혁명으로 자유주의가 한차례 몰락하면서 이들은 자유주의가 먼저 퍼지고 자본주의가 좀 더 발달하고 사회주의를 애기하는 것은 곧 혁명의 재림으로 생각하여 러시아 상황에 맞는, 즉 미르 공동체가 정립되어 있는 러시아의 맞는 러시아식 사회주의를 애기하니 그게 바로 나로드니키의 시작이다.
이들은 아직 러시아에서 성장하지 못한 노동자가 아닌 농노에 초점을 맞춰 농민 자치, 농촌의 직접민주화, 농노제 폐지, 그리고 민주주의의 도입을 애기하며 농촌 사회주의로 알려젔고 이후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Никола́й Гаври́лович Черныше́вский)가 단순히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적 잔재인 자본주의를 완전히 몰아내여 집단생산, 집단분배, 국가의 협동조합화를 통해 국가를 농민들의 공동체로 대체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완성이다.로 나로드니키 이론을 발전시키며 근대적 나로드니키의 입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 초기 나로드니키에는 수많은 성향이 존재했고 개중에는 체르니솁스키에 반대하여 자유주의와 농촌의 자립을 가능하다고 믿던 개량주의파, 그 둘의 양립은 혁명적으로 차르제를 타파해야만 가능하다고 말하던 혁명적 자유주의파, 미하일 바쿠닌과 같은 아나키스트들도 존재하던 사상이라기 보단 일종의 계몽운동에 가깝던 시기였다.
자유주의를 외치던 이오시프 카블리츠(Ио́сиф Ива́нович Ка́блиц)등은 입헌민주당으로 흘러갔고 혁명적 자유주의자들은 초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중도파를 꾀챘으며 이들은 이후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해 사회민주노동당의 틀을 잡았다.
이후 이들이 각자의 방향을 정해가며 나로드니키는 하나의 단일된 사상체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860년대 초반에 생긴 나로드니키 비밀결사 조직 토지와 자유(Земля и Воля)는 혁명적 투쟁을 위해 적극적인 계몽활동, 선전활동을 일삼았으며 농노제의 즉각적 폐지와 토지를 농민에게 배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미하일 바쿠닌과 기존 혁명적 나로드니키의 영향을 받아 미르와 노동조합이 국가의 근본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였으며 분권화된 연방제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농민, 대장장이들을 위해 그들의 일을 배우고 그들에게 다가가 혁명을 추동하며 러시아 최초의 시위인 카잔 시위(Казанская демонстрация)를 이끄는 등 활발할 활동을 이루었으나 농민들이 예상보다 적극적으로 차르에 헌신적이였던 것과 차르의 잔학적인 행동에 실망하여 허무주의적 테러의 방향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테러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다. 테러의 방법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다시 돌아가 계몽활동에 전념해야한다고 주장하던 이들은 흑토 재분배단(Чёрный передел)을 꾸렸고 북부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이끌던 강경한 테러주의적 혁명가들은 '인민의 의지(Народная воля)'를 꾸리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지만 인민의 의지가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하며 곧 나로드니키 전체가 탄압당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후 1902년 사회혁명당이 창설되며 강경한 혁명파 나로드니키가 뭉치게되었고 온건파 나로드니키는 인민사회당 또는 노동자 인민 사회당(Трудовая народно-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이라고 불리는 도시 지식인의 계몽주의 정당을 1905년에 창설하여 개량주의적 성격을 띄우게 되었다.
둘 다 1907년의 두마 강제 해산으로 해산되었다가 2월 혁명이후 다시 재건, 인민 사회당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트루도비키와 협력하였고 사회혁명당은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지지건을 두고 분열하여 급진적 좌파 나로드니키가 분열하여 좌파 사회혁명당을 세우며 분열하였다.
이후 행적은 사회혁명당 항목 참조
3. 의의
러시아 제국에서 서유럽으로 망명한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사상을 인민주의의 시초로 보고 있는데, 게르첸은 당시 유행하던 공산주의 사상을 러시아의 상황에 맞게 해석, 적용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평등주의적인 농민 공동체 미르를 바탕으로 바로 사회주의로 넘어갈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인민주의는 범슬라브주의자 사상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는데, 이들에게 있어서 인민주의는 공산주의 혁명 같은 정치 투쟁 사상을 의미하기보다는 '민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민중문화를 존중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문화운동 체제'로 해석될 때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