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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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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성향
2.1. 친공에서 반공까지2.2. 민권주의 강조2.3. 문민통제 실시2.4. 국민당 강화
3. 한계4. 참고문헌5. 같이 보기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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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ang Jingwei-ism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정치인이자 중국국민당 개조파의 영수 왕징웨이의 사상이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확고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는 대신 특유의 변덕스러움과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항상 타협하려는 성향이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났으며, 정치적 비난을 받을 때 맞서는 대신 피해버리는 우유부단함도 특징이었다.[1] 왕징웨이의 이러한 성향은 너무 자주, 때때로는 너무 갑자기 발현되어 그가 뚝심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자라는 의심도 생겼고, 종종 왕징웨이 자신과 그 계파에게도 악영향을 미쳤다.

2. 성향

2.1. 친공에서 반공까지

사실 제1차 국공합작 이전 왕징웨이쑨원에게 서유기손오공을 예로 들며 공산당과 합작하면 국민당 자체가 위험해질 것이라며 합작에 반대했다. 그러나 "혁명세력의 확대를 위해 삼민주의를 따르려는 자는 모두 수용해야 한다"는 쑨원의 의지와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결국 국공합작에 찬성하게 되고, 반대파들과 논쟁하며 적극적으로 합작을 추진하게 된다.

왕징웨이는 제1차 국공합작의 당위성을 "국민혁명의 완수를 위한 민족적 일치단결"에서 찾았다. 그는 "민생주의는 사회주의이고 다른 명칭으로 공산주의이므로 즉 대동주의이다", "공산주의는 민생주의의 이상이고 민생주의는 공산의 실행이다. 양 주의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 만약 구별한다면 그것은 방법일 뿐이다"라는 등 삼민주의의 민생주의와 방법만 다를 뿐 개념은 같다고 파악했다. 이 덕에 쑨원이 죽은 이후에는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의 추천으로 광저우 국민정부의 주석까지 오르게 된다.
파일:Long live the revolutionary china_Soviet poster 1927.jpg
혁명적 중국 만세!
1927년에 제작된 소련의 포스터. 쑨원 오른쪽 위의 인물이 바로 왕징웨이이다.[2]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자 외유를 떠났고 영왕운동 덕에 1927년 다시 돌아와 우한 국민정부에 합류한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우한에 도착한 직후부터 공산당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자신이 광저우를 떠난 예전과는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 실제로 왕징웨이가 귀국한 바로 그 달인 1927년 4월부터 왕징웨이는 우한정부의 급진적인 정책을 대거 완화시켰다. 더불어 마일사변 이후에는 공산당의 과격한 민중운동과 토지혁명 방식에 점차 회의감을 느끼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장악하라는 '스탈린의 5월 지시'를 알게 되자 1차적으로 충격을 받고 국공결렬을 선언, 영한합작 중 공산당이 일으킨 광저우 폭동 때문에 자신이 큰 정치적 피해를 입고 외유를 떠나게 되자 2차 충격을 받고 공산당에게 완전히 돌아서서 반공의 입장이 된다.
우리 당이 원하지 않는 것은 거짓 민중이다. 돈을 써서 한 사람을 고용하여 손에 작은 붉은 깃발을 들고, 입에서 소리를 지르니, 이런 낡은 수작은 정말 보기에도 익숙하고 싫증이 난다. 우리 당은 결코 이렇게 민중을 속여서는 안 된다. 우리 당이 원하는 것은 민중을 위해 혁명하는 자로서 목적과 방법, 절차에 따라 민중을 이끌고 혁명에 참여하는 자이다.
1927년 10월 16일, 왕징웨이, 우한 정치분회에서 한 발표연설 中.

왕징웨이는 그 이후로도 좌파에 속했지만 반공을 꾸준히 주장했다. 장왕합작 때는 장제스와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공유하며 적극적으로 반공을 추구했고, 심지어 시안 사변으로 장제스가 선항일로 방침을 바꾼 1937년에서도 1월 18일 난징 중앙당부의 강연에서 "양외는 두 가지 일이 아닌 한 가지 일"이며 안내를 하지 않고는 양외를 할 수 없다, 공산당의 공동항일 제의에서도 "종전의 경험으로 보아 공산당을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공산당 사람들은 공산혁명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약속과 신의를 지키는 것을 봉건적 도덕으로 보는 사람들"이라며 몹시 비난했다.

일본의 침략을 목전에 두고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할 때도 당과 여론의 등쌀에 마지못해 국공합작에 동의하긴 했으나 1937년 2월 22일 외교부의 기념행사에서 "공산당을 용납하는 일은 후환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 눈앞의 어려움만을 해결하려는 것"이라고 말했고 3월 말에도 "양외와 안내는 한 가지 일"이라는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등 여전히 공산당을 불신했다. 이후 왕징웨이 공작에 포섭되어 충칭을 탈출했을 때도 장제스는 그가 단순히 공산당과의 합작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정도였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없었던 국가적 위기에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은 채 공산당과의 합작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혼자 떠나 당과 국가를 돌보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 혁명당원이 할 행동이 아니지 않은가? 비통하고 안타깝다. 오로지 자성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란다."
중일전쟁 중인 1938년 12월 21일, 장제스의 일기, 윈난성룽윈에게서 왕징웨이의 충칭 이탈 소식을 들은 후.

이후에도 왕징웨이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고, 그가 스스로 일본에 투항한 이유를 설명할 때도 그의 반공에 대한 입장이 드러나게 된다.
지금의 장제스의 병력으로는, 일본에 저항하기에 부족할 뿐만 아니라, 공산당도 통제할 수 없다. 지금의 장제스의 환경으로는, 공산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대로면 온 나라와 민족이 장제스를 따라 공산당을 위해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다.
1939년 7월 9일, 왕징웨이, <중일관계에 대한 나의 기본개념과 진보적 목표> 中.

2.2. 민권주의 강조

왕징웨이의 민주주의는 1929년 3월 11일 난징 당중앙이 독점한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 개최에 반대한다는 선언문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 글에서 왕징웨이는 민주 세력 육성과 당의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고 이후 그의 사상에서 핵심이 된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유럽과 미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소수의 부르주아의 이익만 대변할 뿐 대다수 국민의 의견은 무시한다며 반대했고,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결국 일당독재만을 낳을 뿐이라며 반대했다. 민주주의 축에도 끼지 않는 이탈리아 파시즘에 반대한 것은 물론이다. 왕징웨이는 "억압받는 인민 대다수를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정의하고 정치, 경제적인 기회 균등을 추구했으나 서방 민주주의의 이론과 제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등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소련과 러시아의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공산당 독재에 불과하고, 사실은 스탈린 한 사람의 독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소위 파시스트당 독재란 사실은 무솔리니 한 사람의 독재일 뿐이다. (중략) 이 괴물들은 민주세력이 충분치 않은 사회에서 뚫고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단 민주세력이 양성되면 이런 괴물은 절대 없을 것이다.
1931년 5월 1일, 왕징웨이, <어떻게 연합할 것인가> 中.

왕징웨이는 민주세력의 주체로 '생산자 계급'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 "생산자 계급"이란 농민, 노동자와 같은 '물질적 생산자'뿐만 아니라 지식인, 학생 및 다양한 직업군의 '정신적 생산자'도 포함되어 광범위하게 정의된, 한마디로 "억압받는 사람의 대다수"였다. 여기서 명시적으로 제외된 유일한 부문은 '독점 기업'이었으며, 왕징웨이는 봉건세력의 탄압을 받는 생산자 계급만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를 주창할 것이고, 이러한 성향 덕에 중국 정치에서 민주세력을 이룰 것이라 말했다.
생산자 계급의 주된 요구는 생산활동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부패와 폭력은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고 활동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없애기 때문에 이들은 부패와 폭력에 단호히 반대한다. 따라서 개인의 권리와 관해서는, (생산자 계급은) 최소한 생명과 재산의 안전이 법에 따라 보장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정부 구조에 관해서는, (정부의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의 권한을 법률로 제한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정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왕징웨이.

왕징웨이는 민주주의를 위한 세 가지 조치, 지방자치 실시, 국민회의 소집, 임시약법의 공포를 주장했다. 먼저 지방자치는 쑨원의 교리에서도 중요한 요소였으며 지방자치를 통해 민주세력을 육성시킬 수 있기 때문에 "민주세력을 육성하려면 먼저 지방자치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단계에서 선거권, 소환권, 발의권, 국민투표권의 '인민의 4대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훈련시키며 이를 위해 국민을 직업별로 '직업단체'라는 대중조직을 조직해 지역의회 설립 준비를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직업단체가 자신이 사는 지역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기에 문제를 가장 잘 반영하여 지역 발전을 촉진할 수 있으며, 국민들을 직업별로 묶었기에 군벌과 같은 해로운 세력들이 지방에 간섭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러한 대중조직이 다른 계급과의 투쟁에 휘말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하며 그래야만 지방자치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국민회의 소집 또한 쑨원의 주장에서 나왔다. 왕징웨이는 쑨원이 1923년 10월 북상하여 북양정부와 가진 협상에서 국민회의 소집을 요구한 것은 "군벌을 제거하기 위한 민주세력의 결집"을 위함이었다며 마찬가지로 쑨원의 가르침에 따라 대중 조직에서 국민회의 대표를 선출하고 국민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중국의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군벌을 타도하는 두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훈정 시기 임시약법의 공포는, 1930년 4월부터 나타났으며 역시 쑨원에 기초했다. 왕징웨이는 약법이 없다면 국민들의 정치적 권리 또한 보장되지 못하며, 정치적 권리가 없다면 시민권 또한 공허할 뿐이라며 훈정은 "정치적 권리가 국민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시기"가 아니라 "국민들이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시기"라고 설명했다. 또한 중국의 혼란은 임시약법이 반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그는 소원대로 중원대전 중인 1930년 11월 임시약법인 태원약법의 초안을 작성해 1930년 12월 27일 공개하였다. 무엇보다 왕징웨이는 임시약법의 공포가 정치권력의 실질적인 국민이양을 보장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1928년부터 중국국민당군사력으로 나라를 통일했다. 그 이후로 인민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고 정치권력은 분열되고 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이유는 임시약법이 공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의 자유과 권리는 전혀 보장되지 않고 있다. 약법이 없기 때문에 중앙의 권력과 지방의 권력의 경계가 모호하게 된다. 이 두 가지 결함은 국내의 격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1930년 10월 27일, 왕징웨이, 베이핑에서 열린 당대회에서.[4]

이 시기 왕징웨이는 민주주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다른 인사들에게 삼민주의에서 다른 두 원칙(민생주의, 민족주의)를 무시한다고 비판받았는데, 여기에 왕징웨이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삼민주의 전체를 실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나 특정한 때와 특정한 상황에서는 삼민주의 중 어느 부분을 먼저 실현해야 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오늘날 정치에서 나라와 인민에게 가장 해로운 것은 공산주의 일당독재와 장제스의 일인독재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반대하기 위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다. 우리는 삼민주의 전체를 바탕으로 (현 정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먼저 옹호하는 것이다. 이는 전체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특정 질병에 특정 처방을 내리는 의학적 치료와 같다.
1931년 7월 3일, 왕징웨이, 광저우에서 당원들에게 한 연설.

왕징웨이는 자신의 민주주의 이론을 반장의 무기로도 사용하였으며, 때문에 장제스를 끌어내리기 위한 전쟁인 중원대전제1차 양광사변에 그의 민주적 요소가 깊게 드러났다.

2.3. 문민통제 실시

왕징웨이는 중국 민주세력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가 바로 군벌임을 인식했다. 따라서 중국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위해 당의 군대 통제를 강력히 주장했고, 이러한 생각은 1930년 5월~6월 사이에 나온 3개의 기사에 반영되었다.

왕징웨이는 군대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치장교와 정치교육 제도를 복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군대의 군령권과 군정권을 분리하여 군대의 훈련과 군사전략과 같은 군령권은 지휘관에게, 군대동원과 같은 군정권은 당 중앙이 완벽히 통제해야 하며 이를 어긴 군 지휘관들은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군벌끼리의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물론 이러한 조치만으로는 군대를 당 휘하에 둘 수 없었다. 왕징웨이도 이를 알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병사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현재 억압하고 있는, 그래서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 당을 따르고 국민혁명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생산자 계층'에서 군인을 모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군대를 인민과 통합하고 "정치적 정당성은 인민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한 정치교육도 주장했다. 군대와 인민의 소통을 이룩하여 국민들이 군대에게 의견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하며 군인들의 생활조건도 일반 인민들만큼 여의치 않다는 것을 인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공감 요소들을 통해 군대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고, 진정으로 "당의 군대"와 "국민의 군대"로 변모하기를 바랬다. 이러한 조치로 왕징웨이는 중국 정치에서 군벌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2.4. 국민당 강화

우리가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지방자치를 실시하며, 정치영역의 민주화를 실현한다고 해서, 당의 통치원칙이나 당의 국가재건원칙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1931년 7월, 왕징웨이, 광저우에서 당원들에게 한 연설.

무엇보다도, 문민통제와 민주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국민당을 강화하고 이 강화된 국민당이 실시하는 통치가 필수적이었다. 그의 당 통치에 대한 설명은 1929년 11월 20일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방법>에서 이러한 생각이 처음 등장했고 이후 여러 저술에서 상세히 설명되었다.

먼저, 혁명의 성공은 당의 힘에 달려있었다. 왕징웨이는 당은 억압받는 인민을 대표하며 혼란스런 중국에서 유일하게 인민을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당이 없다면 혁명도 이루어질 수 없고, 지방자치 역시 국민들은 참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흐지부지될 수 있으며 인민들끼리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 농촌에 남은 봉건사상과 그 잔재들로 인해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만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 난징 중앙의 권위주의적인 통치로 인해 당의 통치는 민권의 축소만을 가져올 뿐이라고 반박하는 인물들도 많았다. 왕징웨이는 난징 중앙당이 민권을 억압한 것은 맞지만, 난징 지도부의 통치는 가짜이며 진정한 당은 민권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훈정의 성공 여부는 국민에게 정치권력이 부여되는지에 따라 결정되며, 겉으로는 국민의 권리가 신장되면 당의 권력은 약화되는게 당연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민의 권리가 높아지면 더 많은 국민들은 당을 지지하게 되고, 당은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니 그것이 훈정의 목표이며, 당의 통치와 국민의 권리는 모순되지 않고 상호보완적이라고 설명했다. 왕징웨이는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중국국민당의 이념과 정책은 국민의 필요에 따라 쑨원이 작성한 것이다. 진정으로 쑨원의 가르침을 따르고 당의 이념과 정책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면, 우리 당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국민들은 훈정기 동안 고통을 덜어주고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당의 지도를 기꺼이 따를 뿐만 아니라, 여전히 헌정기에도 우리 당을 지지하고 중화민국을 지킬 것이다.
왕징웨이.

물론 그는 당의 권력 남용 또한 경계하였기 때문에 당의 권력 제한 또한 주장했다. 그는 "당은 국민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 안에 있다", "당은 정부를 감독할 뿐 정부의 권력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등을 내세웠다. 또한 당과 정부의 권한이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아 당이 정부를 대신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당 규칙을 새로 정립할 것을 요구했고 사법원의 독립 및 당의 이념과 정책을 침해하지 않는 조건에서의 집회, 출판, 언론의 자유 보장, 정책에 관한 국민들의 자유로운 토론, 정책에 대한 국민의 감독과 비판을 허용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당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막기를 원했다.
당은 민중 안에 있는 것이지, 민중 위에 있는 것이 아니며, 민중 밖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1930년 1월 11일, 왕징웨이, <당 통치의 의의> 中.

2.4.1. 민주집중제 복원

왕징웨이는 1929년 10월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 당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보를 보냈다.
당의 조직은 원래 민주집중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이를 개인독재로 대체한 이후 당의 정신은 완전히 부식되었다. 이제 당의 상하 계층과 당원과 당 사이의 적절한 관계를 개혁하기 위해 당원들의 의사가 자유롭게 표현되고 결의와 규율이 의심할 여지 없이 준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당이 일치단결하여 행동하고 전체 당 업무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요컨대 당의 조직과 규율을 재정립하지 않는다면 당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할 것이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1927년 10월, 왕징웨이, 귀국한 직후 동지들에게 보낸 당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

당의 조직과 규율을 재정립하고 강화하기 위해선 먼저 민주집중제 복원이 필요했다. 민주집중제 체제는 1924년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채택된 체제로, 볼셰비키를 모델로 했다. 그는 민주집중제를 먼저 회복해야 다른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1930년 5월 24일에 쓴 글 <답장>에서 그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로 제시된 집단지도체제는, 왕징웨이는 당 내 최고지도자를 갖는 것은 곧 독재자를 갖는 것과 다름없으며 이는 곧 당에 불만과 분열을 가져올 것이었다. 그는 집단지도체제를 통해 전체 당 지도부의 의견을 반영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불만과 분열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두 번째로는 상하위 계층 당원들 간의 소통이 제시되었다. 그는 하위 당원의 말을 무시하는 상위 당원, 하위 당원의 말만 듣는 상위 당원을 모두 비판하며 민주집중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하위층의 의견은 상위층에게 전달되어야 하며 동시에 하위층은 상위층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당의 민주집중제 복구는 곧 당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며, 민주집중제 정당은 당 구성원의 의지로 무장한 집단이므로 어느 개인 독재자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로써 당의 명성과 권력을 높이는 것은 물론 군대에서까지 충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정부와 민중은 서로 의지하는 것이 그 본질이고 정부는 인민에게 충성을 다하며, 인민은 정부를 신뢰하는 것이 그 활동이다. 정부는 민중의 기반이 없으면 민주정치를 확립할 수 없고, 독재정치도 확립할 수 없다.
1937년 1월 22일, 왕징웨이, <민주정치에 대하여> 中.

3. 한계

왕징웨이주의는 "국민당 강화"와 "민주세력의 발전"으로 크게 요약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계점도 분명히 존재했다. 우선 민주주의를 위해 왕징웨이가 내세운 지방자치 실시, 국민회의 개최, 임시약법 반포의 세 원칙은 모두 쑨원의 이론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왕징웨이는 쑨원의 여러 개념을 민주주의 이론으로 종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쑨원의 이론을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물론 쑨원의 틀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더욱이 왕징웨이는 민주집중제 복원을 통해 국민당 강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것이 너무 지나쳐 "민주집중제만 복원되면 당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국민당의 문제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는 시각도 있었다. 이런 이론적 부족함은 다른 개조파 정객들도 인식하고 있었고, 때문에 구멍위를 필두로 한 여러 좌파 이론가들은 홍콩에서 왕징웨이의 이론을 보조하는 여러 기사를 출판해야 했다. 이들은 국민당 강화를 위해서는 당의 민주화와 민주집중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왕징웨이의 생각에 동의하는 한편,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아고 여기고 당원들의 사회활동 참여, 정기적인 당원 평가, 당내의 계파를 없애고 국민당의 통일된 이념 구축 등의 생각을 덧붙였다.

지방자치 또한 군벌들의 영향력으로 애초에 실현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천궁보는 1930년 말까지 중국에 '지방자치'의 '지'자도 보이지 않자 왕징웨이가 중국 민주주의 건설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했을 수도 있다고 회고록에 적었으며, 여러 좌파 인사들은 애초에 개조파 운동이 반장을 위해 군벌의 도움을 받은 마당에 당을 내세워 군벌을 통제하자는 이론은 이루어질 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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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징웨이는 일생 동안 이러한 이유로 3번이나 사퇴하여 유럽으로 외유를 떠났다. 배경한 교수는 왕징웨이의 이러한 모습을 '낭만적 혁명가' 성향이라고 설명했다.[2] 중앙에서 시계방향으로 쑨원, 펑위샹, 탕핑산, 왕징웨이, 유진 첸. 왼쪽 아래에는 중국공산당 창당인인 리다자오가 있다.[3] 왕징웨이는 스스로 우한에 도착한 후 곧바로 공산당의 전횡에 근본적인 회의를 표시하는 입장으로 바뀌였으며, 우한정부의 영역에서 전개된 대다수의 민중운동을 공산당이 주도하던 것을 깨달았지만 곧바로 분공을 하지 못한 것은 당시 한창 진행중이던 북벌을 가로막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4] 한편 난징 중앙은 "최근 공포된 여러 법령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 "쑨원의 가르침이 일종의 임시약법이다"라며 훈정시기에는 임시약법을 제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왕징웨이는 동의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