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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29:30

호법운동

護法運動
Constitutional Protection Movement
민국 2년부터 5년에 이르는 동안 국내에 있어서의 혁명전쟁은 일괄하여 위안스카이 토벌을 위한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국 5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국내의 혁명전쟁은 호법투쟁이라는 명칭으로 일괄할 수 있다. 위안스카이는 죽었으나 위안스카이가 남긴 제도는 그와 함께 죽지 않았다. 따라서 민국의 변란은 이 때문에 그칠 사이가 없으리라는 것은 일반인이 모두 생각한 바였으나, 과연 1년도 못가 약법이 폐기되고, 국회를 해산하는 화가 재발되었으나, 복벽 반대의 운동이 이러나 민국은 아슬아슬하게 그 명맥을 이어왔다. 복벽의 변은 10여일 만에 평정되었으나 훼법의 변은 더욱더 심하게 일어나서 나는 호법을 천하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혁명사, 쑨원

1. 개요2. 배경3. 1차 호법운동4. 2차 호법운동5. 결과6. 참고문헌7. 관련문서
7.1. 인물7.2. 사건

1. 개요

1913년부터 1922년, 혹은 1923년까지 1912년의 민국원년에 발표된 중화민국 임시 약법 체제를 회복하기 위한 쑨원과 혁명당의 약법 복구 운동을 말한다. 호법투쟁이라고도 한다.

2. 배경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성립된 난징 임시정부는 1912년을 민국 원년으로 선포하고 임시 약법을 선포하여 중화민국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임시대총통 위안스카이는 절대적인 권력을 원했기 때문에 민주적인 임시 약법에 불만이 많았다. 위안스카이는 1913년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의 폭거를 저질렀으며 국회에서 천단헌법이라 불리는 민주적인 헌법 제정에 나서자 계축전쟁을 빌미로 국민당을 난당으로 몰아 해산하고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했다.

국회를 해산한 위안스카이는 이를 대체하기 위한 참정원, 입법원을 개설하고 어용기관으로 삼았다. 1914년 5월 1일 중화민국 약법이라 불리는 신약법이 발표되어 위안스카이의 절대적인 권력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여기에서도 만족을 하지 못하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결국 분노한 량치차오, 차이어 등 진보당과 서남의 군벌들이 위안스카이를 타도하기 위해 호국전쟁을 일으켰고 전국이 이에 호응하면서 위안스카이는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대총통 자리를 부총통인 리위안훙에게 물려준 후 사망했다. 북양정부는 신약법 체제의 존속을 희망했지만 남방의 군무원이 단호하게 임시 약법의 회복과 국회 부활을 요구함에 따라 돤치루이와 리위안훙이 이를 수용하여 임시 약법 체제의 복구를 선포했고 남방도 만족하여 7월 14일 군무원을 해체했다.

1916년 8월 1일 국회가 다시 개막하면서 중국의 민주주의는 회복되는 했다.

3. 1차 호법운동

하지만 회복된 중화민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위협을 받게 되었다. 대리총통 리위안훙과 국무총리 돤치루이의 알력이 심해지면서 부원지쟁, 여단지쟁이라 불리는 정쟁이 계속되었고 돤치루이는 1차 세계대전 참전과 복벽 문제를 들먹이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국회와 리위안훙을 제거하려고 했다. 돤치루이가 리위안훙을 몰아내기 위해 손을 잡은 것이 장쉰이었는데 장쉰은 예전부터 청나라의 복고를 꿈꾸던 강경한 복벽주의자였다.

1917년 돤치루이가 대독선전안을 가결하지 않는 국회의 해산을 요구하자 리위안훙은 도리어 돤치루이를 경질했다. 화가 난 돤치루이는 리위안훙 타도를 위해 각 성의 독립을 선포하게 했다. 겁이 난 리위안훙은 장쉰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장쉰은 이 부름에 응답하는 척 하더니 국회를 해산하고 약법을 폐기해버리고 장훈복벽을 일으켜버렸다. 이에 돤치루이는 리위안훙과 손잡고 장쉰을 12일만에 토벌했지만 정작 장쉰이 없애버린 임시 약법과 국회를 회복하지는 않았다.

이에 쑨원과 혁명당원들은 북방 정부에 적대적인 서남군벌들에게 의탁,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였고 남북간의 갈등은 호법전쟁으로 폭발했지만 서남군벌들이 쑨원을 축출하고 북양정부와 화친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자세한 것은 1차 호법운동호법전쟁 문서 참조.

4. 2차 호법운동

광저우를 떠난 쑨원은 호법을 혁명 목표로 삼고 1920년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했다. 이후 천중밍계계군벌 루룽팅을 광동에서 몰아내고 쑨원을 초빙하여 2차 군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1920년 11월 28일 쑨원이 다시 광저우에 도착하였고 2차 호법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쑨원이 시급한 북벌을 주장한 반면, 연성자치론자인 천중밍은 양광을 개발하여 지역적인 안정화가 시급하다고 보고 있었다. 천중밍은 원래부터 쑨원의 혁명노선에 동조하지 않고 황싱의 구사연구회에 가담하는 등 쑨원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쑨원이 천중밍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북벌에 나서려 하자 1922년 반란을 일으켜 쑨원을 축출해버렸다. 이를 영풍함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결국 쑨원의 2차 호법운동도 실패로 돌아갔다.

5. 결과

1922년 2차 군정부마저 실패로 돌아가고 직예군벌들이 6월 11일 리위안훙을 대총통에 추대, 익우사, 민우사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1922년 8월 1일 구국회 복구를 선언함에 따라 사실상 호법운동은 끝났고 그 명맥조차 1923년 6월 리위안훙 사퇴 이후 10월, 차오쿤회선 사건 이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결국 쑨원은 호법투쟁이 아니라 독자적인 군사력을 길러 군벌들을 토벌하는 북벌을 꿈꾸게 되고 1923년 광저우에 대원수부를 설립, 1924년 1차 국공합작을 하여 북방을 도모하게 되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25년 간암으로 사망한다.

쑨원 사후 국민당은 장제스의 영도 하에 1926년과 국민당의 1차 북벌,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을 감행하여 중국통일을 완수하고 훈정을 실시하게 된다.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7.1. 인물

7.2.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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