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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2:09:51

니시하라 차관



1. 개요2. 배경3. 전개4. 협정 내용5. 결과 및 영향6. 참고문헌

1. 개요

1917년에서 1918년 사이 중화민국일본 제국 간의 일련의 공개 및 비밀 차관에 대한 일반 용어. 중화민국 정부는 니시하라 카메조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1억 4500만엔에 달하는 거액의 차관을 빌렸다. 중화민국 정부는 이 차관을 얻기 위해 철도 건설, 삼림 벌채 및 광산과 같은 일련의 이권을 일본에 내주기로 했다. 그러나 니시하라 차관을 주도한 북양군벌은 국가의 주권을 일본에게 팔아넘긴 매국 정권이라는 비난에 시달리다가 몇년 후 붕괴되면서, 일본은 차관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하는 등 별다른 이득을 거두지 못했다.

2. 배경

1910년대, 일본은 유럽과 미국간의 국제 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시켰고 뒤이은 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에 가담해 영국, 프랑스 등에 대규모 전쟁물자를 지원해주면서 막대한 무역수지를 챙겼다. 그 결과 일본은 거액의 잉여 자본을 축적시켰고, 일본 자본가들은 세계 최대의 시장 중 하나인 중국에 잉여 자본을 투자하길 원했다. 이에 1915년 1월, 일본 제국의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은 위안스카이 총통에게 21개조 요구를 강요했다.

중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요구 내용을 외부에 흘려 열강을 끌어들이려 했고 일본은 미국, 영국 등이 크게 반발하자 5월 7일 5호 항목을 뺀 나머지 조항을 수락하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할 거라고 협박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서구 열강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정신 없느라 도움을 받기도 힘들고 중국이 일본에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해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5월 9일 승낙했다. 그러자 중국 국민들은 정부를 비난하며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손해가 막심해지자, 일본은 정책 방향을 바꿔 노골적인 이권 침탈 보다는 차관을 제공하는 것으로 중국인들의 불만을 잠재우면서 이권 침탈을 점진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이 무렵, 중국의 정세는 아주 복잡했다.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황제를 칭했으나 이에 반발한 차이어, 량치차오, 리례쥔, 탕지야오 등이 그해 12월 25일 호국전쟁을 개시하자 이를 막지 못하고 1916년 3월에 칭제를 취소했다가 얼마안가 병사했다. 그후 위안스카이의 부하였던 돤치루이펑궈장 등이 제각기 파벌을 만들어 권력 투쟁을 벌였다. 그 중 북양 정권의 핵심 권력을 장악한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는 경쟁자들을 물리쳐 진정한 중국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외채를 제대로 갚음으로서 국제사회가 자신의 정권을 인정하게 만들려 했다. 그런 그에게 거액의 차관을 빌려주겠다는 일본의 제안은 실로 귀가 솔깃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해관계가 일치한 양자는 1916년 10월부터 차관 협상을 개시했다.

3. 전개

1916년에 출범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쇼다 가즈에(勝田主計) 조선은행 총재를 대장대신으로 임명했다. 쇼다는 중국의 발권은행인 교통은행이 과도한 정부 대출로 발권 여력을 상실한 채 파산당할 지경에 놓인 점을 주목했다. 그는 이 은행이 파산하면 조선과 대만의 화폐제도와 경제도 타격을 입으니 교통은행을 돕는 것이 조선은행과 대만은행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조선은행과 대만은행은 교통은행에게 각각 500만엔을 대출했다. 두 은행의 대출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후 다른 대화(對華) 지원사업에도 계속 자금을 대출해줬다.

돤치루이는 이러한 일본의 호의적인 태도에 반색했다. 1916년 10월 초, 그는 "중국은 농업, 산업 및 산업의 가치를 열거해야하며, 중국과 일본이 함계 주최하는 회의를 염으로서 일본과 대화해야 한다. 일본은 중국을 돕고 일본 또한 이로 인해 이득을 얻는다. 이러한 지원이 없다면, 중일 양국의 목적을 달성하긴 어려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12월, 일본의 사업가 니시하라 카메조는 정부의 지령을 받고 북양정권과 접촉하여 소위 "중일간의 긴밀한 협력"을 논의했다.

1917년 7월, 장훈복벽을 진압하고 중화민국 국무총리에 재취임한 돤치루이는 기존의 중화민국은 이미 복벽으로 망했다는 <민국재조론>을 주장하면서 장쉰이 해산해버린 구 국회와 약법을 복구하길 거부했다. 이에 쑨원이 남방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손잡고 호법운동을 일으켜 광동에 정부를 수립하자 돤치루이는 펑궈장을 비롯한 직예군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방에 대한 무력통일 정책을 결정했다. 이 정책을 이루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했지만 당시 북양정권의 재정은 지극히 열악했으므로 해외로부터 자금을 대출받아야 했다. 또한 돤치루이는 중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한다고 보고 독일 등 동맹국에게 전쟁을 선포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호의를 얻으려면 선전포고로 그쳐서는 안 되고 중국군을 파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중국군의 무장 상태는 형편없으니 최신식으로 무장해야 했고, 그러자면 역시 해외의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에 돤치루이는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들이고 그 대가로 상당한 이권을 일본에게 양도하기로 결정하고 일본과 차관 협정을 체결했다.

4. 협정 내용

1. 교통은행은 중국 정부의 담보로 보하이 철도 채권을 통해 5백만 엔을 대출한다. (1917년 1월 20일 서명)
2. 교통 은행은 중국 정부의 국채로 보증된 2천만 엔을 차용한다. (1917년 9월 28일 서명)
3. 중국 국가 기지의 모든 재산과 소득의 보증을 통해 케이블 전신 채권으로 2000만 엔을 차용한다. (1918년 4월 30일 서명)
4. 길림성 철도 건설을 준비하기 위해 1000만 엔을 차용하는 대가로 중국 정부의 채권을 할인 처리한다. (1918년 6월 30일 서명)
5. 길림성과 흑룡강 산림 및 금광에 관한 소득을 넘기는 대가로 3000만엔을 대출한다. (1918년 8월 2일 서명)
6. 만주-몽골 철도 건설을 준비하기 위해 2000만엔을 차용하는 대가로 중국 정부의 채권을 할인된 기준으로 처리한다. (1918년 9월 28일 서명)
7. 고창-장시 철도 건설 준비를 위해 2000만엔을 차용하는 대가로 중국 정부의 채권을 할인된 기준으로 처리한다. (1918년 9월 28일)
8. 전쟁 참가 비용 마련을 위해 2000만엔을 차용하는 대가로 중국 정부의 채권을 할인된 기준으로 처리하며 전쟁 종결 후 동일한 조건하에서 새 할인권이 교환된다. (1918년 9월 28일 서명)

상기 여덟 건의 대출은 총 1억 4500만엔에 달한다.

5. 결과 및 영향

니시하라 차관은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경제적인 목적하에 대출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중 90% 이상이 그 목적에 쓰이지 않고 북양정부의 군사비 지출 및 국내외 채무상환에 사용되었다. 북양정부의 재정총장 차오루린(曹汝霖)은 북양정부의 군사비 및 정부 지출비로 한달에 2000만 위안이 사용된 반면에 군사비로 사용될 재정 수입은 1200만 위안 미만에 그치며 나머지 800만 위안은 대출로 마련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장쭝창 또한 차입금이 종종 정부에 의해 우회되었다고 고백되었으며 이 차입금은 군비로 인해 사라지기 일쑤였다. 심지어 호법전쟁 당시 길림성 독군 멍언위안은 돤치루이의 비서장 쉬수정으로부터 니시하라 차관 중 1천만 엔을 지급받았다.

돤치루이는 대출을 얻기 위해 국가의 많은 이권을 넘기는 걸 주저하지 않았고 일본은 차입을 통해 중국에 대한 정치, 경제, 및 군사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양자의 이해 관계 일치에 따라 일본이 1년 8개월 동안 북양정부에게 지원한 금액은 2억 4000만엔에 달했고 그중 1억 4500만엔은 조선은행을 비롯한 특수 은행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양자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니시하라 차관은 원대한 목표에 비해 법적 근거가 약했다. 이것은 특정 군벌을 지원하려는 일본의 명백한 내정간섭이었고, 일본 정부 내에서도 공식 외교 라인을 제치고 비선 조직을 통해 추진되는 차관 사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으며 일본 재계와 금융게에서는 "조선은행이 탈선했다."고 비난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쑨원은 돤치루이가 국회와 약법 복구를 거부하자 랴오중카이, 허샹닝, 주집신, 장빙린(章炳麟) 등을 이끌고 7월 17일에 광저우로 이동해 광동독군 진병흔과 광동성장 주경란의 환영을 받았다. 쑨원은 환영대회에서 호법운동을 전개할 것을 호소했고 마침내 1917년 9월 18일, 돤치루이가 쑨원 체포령을 하달하고 남방을 공격하면서 호법전쟁이 발발했다. 1917년 말, 호남-사천 전선에서 북양군이 패배하면서 돤치루이는 패배에 책임을 지고 하야하고 북양군벌의 원로 왕스전이 국무총리에 올라 평화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돤치루이의 측근 쉬수정 등이 차오쿤, 우페이푸, 장쭤린 등을 회유하여 다시 전쟁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한 탓에 왕스전 내각은 붕괴되고 돤치루이가 다시 집권했다. 결국 호법전쟁은 돤치루이가 끌어들인 차오쿤과 장쭤린 모두 돤치루이와 사이가 악화되어 발을 빼면서 흐지부지해졌다.

일찍이 돤치루이는 차오쿤이나 장쭤린을 부총통으로 삼겠으며 남방을 정벌하여 얻은 전리품과 군비를 나눠주겠다는 약속으로 이들과 동맹을 맺었으나 호법전쟁 자체가 흐지부지해지면서 나눠줄 땅뙈기도 없었고 남북평화를 위해 남방 인사에게 부총통 자리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됨에 따라 약속한 부총통 자리를 주기도 어려웠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북양군벌의 한 가족이라는 느슨한 연대가 있었던 직예군벌과 안휘군벌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돤치루이는 무력통일 정책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알자 참전군을 조직, 1차 세계대전 참전을 이유로 북방에서의 패권이라도 확실히 쥐고자 했으나 그의 무리한 행동에 여러 군벌들이 격노하고 5.4운동 이후 민심도 악화되었다. 결국 봉천군벌직예군벌이 연합하여 안휘군벌에 대항하였고 돤치루이는 1920년 7월 안직전쟁에서 패하자 결국 하야했다.

돤치루이 정권이 이리도 허무하게 무너지면서 일본 정부가 중국에 제공한 총 2억4000만 엔 규모의 자금 중 회수한 것은 500만 엔에 불과했다. 일본 제국의회는 이 막심한 손해를 끼친 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했고 결국 데라우치 정권은 붕괴되었다. 그후 1928년 7월 19일 국민정부가 1896년 체결한 청일통상항해조약과 1903년의 추가통상조약이 만기를 넘겼으니 파기하겠다고 일본에 통보하자, 일본은 11월에 니시하라 차관을 승인하고 관세수입을 담보로 채권을 상환한다면 관세자주권을 인정하겠다고 밝히며 어떻게든 차관을 회수하려 애를 썼다. 이에 국민정부는 관세수입 중 500만 위안을 담보로 한다는 타협책을 내놓아 일본 정부의 동의를 얻어냈고, 마침내 1929년 6월 3일에 일본 제국이 국민정부를 승인하고 1930년 5월 관세자주권 문제에 합의하여 중일신관세협정을 체결했다.

6.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