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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기자)

파일:조선일보 제호.svg 주필
이규태 김대중 류근일
<colbgcolor=#d7171f><colcolor=#fff> 김대중
金大中
파일:123353_148313_2430.jpg
본관 광산 김씨[1]
출생 1939년 9월 1일 ([age(1939-09-01)]세)
경기도 경성부 장교정
(現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
학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 / 학사)
병역 육군 중위 만기제대
현직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경력 조선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주필
조선일보 부사장대우 이사
조선일보 고문

1. 개요2. 생애3. 논란4. 여담5. 가족

[clearfix]

1. 개요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기자다. 조선일보의 편집국장, 주필, 고문을 역임했다.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시사저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에서 오랫동안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대단한 영항력을 보유했던 언론인이었다. 그러던 중 2005년 조사부터는 손석희 앵커에게 1위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는데, 당시 이 일은 언론계에서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만큼 당시까지 조선일보와 김대중 전 주필의 권력과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는 방증인 셈. 201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종이신문 업계가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게 되면서 조선일보의 매체 영향력 또한 과거에 비해 상당히 축소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김대중 전 주필의 존재감 또한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완연히 2선으로 후퇴한 인물이었고, 계속해서 조선일보 지면에 칼럼이 연재되었다고는 하지만, 예전처럼 주도적으로 그가 나서던 상황은 아니었다. 은퇴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거론된 점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2010년대 초중반부터는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에서의 순위 및 지목률이 크게 낮아졌으며, 급기야 2020년 조사에서는 김대중 전 주필의 이름이 아예 순위권 리스트에서도 사라졌다.[2]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명이인에 한자까지 똑같다.[3] 그러다보니 언론에 다루어질 때 항상 조선일보 김대중 혹은 김대중 주필이란 타이틀을 붙여주는 편.[4]

2. 생애

1939년 9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장교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에서 아버지 김용옥(金容玉)과 어머니 이을순(李乙順)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 일본에서 노동조합 운동에 종사했고, 이 때문에 투옥되어 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일본 제국 경찰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고초를 많이 겪었지만, 8.15 광복 후 제과업에 종사해 동대문에서 상회를 운영하며 동대문상인연합회 회장까지 역임한 꽤나 잘 나가던 사업가였다.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초등학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경상북도 금릉군(現 김천시)으로 피난하여 개령초등학교로 전학했고, 1952년 졸업했다. 이후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10회)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딱히 사법시험에 응시할 생각은 없었고 음악, 미술 등 예체능 쪽에 관심이 더 많아, 사시 공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손을 대던 광산업에 문제가 생겨 가세가 기울었고, 이 충격으로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정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져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기까지 했다. 또한 폐결핵에도 걸려 대학을 1년 유급해 졸업하게 되었다.

한편, 여타 서울법대생들이 그렇듯이 이런 최상위 엘리트들은 무조건 군대를 장교로 임관하는 경우가 흔한 일이고 김대중 역시 서울법대생답게 ROTC에 1기생으로 지원하여 장교로 임관하였고[5], 제2군단 사령부 비서실에서 영어 통역장교로 군 생활을 하였다.

1965년, 조선일보가 기자를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시험에 응시해 제8기 공채 견습기자로 입사하였다. 당시 리영희 외신부장이 지휘하던 외신부에 배치되었고, 리영희 아래서 수습기자 생활을 했다.[6] 당시 그를 지도했던 리영희는, "김대중이 가끔 토론을 할 때 뜻을 굽히지 않아 곤란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편협하고[7] 반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고 한다.[8] 리영희의 평에 따르면 '유신이 왜 잘못된 것인지 유일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기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회장의 눈에는 이 젊은이가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이후 1년 뒤에 사회부로 옮겼다.

사회부에서 근무한 지 1년째 되던 1967년 8월, 충청남도 청양군에 위치한 구봉광산에서 광부로 일하던 양창선 씨 매몰사건 보도로 유명기자로 떠올랐다. 이후, 정치부 기자로 발탁되었고, 조선일보 공채 8기 라인의 선두로 쑥쑥 커갔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 6년 6개월간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약했고, 귀국 직후 외신부장 자리에 올랐다. 1980년 3월에는 공채 7기 선배였던 허문도를 밀어내고 사회부장 자리에 올라 앉았다. 이 일 때문에 허문도는 김대중에게 엄청난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광주시'폭도가 점령한 무정부 도시, 광주시민을 난동자, 폭도 등으로 묘사하는 기사를 보도하며해당 사진 전두환 신군부에 노골적으로 영합하였다.[9] 1981년 12월부터 1984년 8월까지 정치부장을 지냈고, 1984년 8월 출판국장으로 옮겼다. 1986년 3월에는 논설위원 겸 현대사연구소장으로 옮겼다. 이후 조선일보/오너 일가의 권유를 받아들여 연방연구위원회 특별위원 자격으로 1년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 유학을 갔다가 1987년 7월 1일 귀국해 이사대우 겸 논설주간에 발령되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대선후보 토론회 패널로 참여하였다. 이때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에게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미 정계은퇴를 약속하지 않았느냐. 말바꾸기하지 마라." "목숨을 구걸하면서 정계은퇴를 거듭 다짐한 편지가 다 있지 않느냐. 거짓말하지 마라."는 핵펀치를 날렸다.[10] 이 한방으로 인해 정치인 김대중은 단박에 '거짓말쟁이'로 이미지메이킹이 돼버렸고, 반면에 언론인 김대중은 보수진영에서 '용자', '사이다' 언론인으로 떠올랐다. 이때 두 명의 김대중이 벌인 공방은 TV 화면에 계속적으로 방영되었으며, 이로써 지지율이 상승하던 정치인 김대중의 기세는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11] 여하튼 이 때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89년 5월 25일 야전사령관 격인 편집국장, 이사로 승진해 1990년 3월 11일까지 역임했다.

1990년 3월 드디어 조선일부 주필 직에 취임했다. 김대중은 주필이 되고서 조선일보의 전권을 장악하여 조선일보 기사 전체의 논조를 설정할 권한을 가졌는데, 이것만 봐도 조선일보/오너 일가에게 얼마나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조선일보 주필로 있던 시절 조선일보의 유료부수가 200만부를 돌파했고, 90년대 종이신문 시장의 최전성기를 영위하면서 조선일보는 매체 영향력으로나 매출액으로나 황금기를 누렸다. 가구별 신문 구독률 70%의 시대에, 그 신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힘이 센 조선일보 논조의 전권을 쥐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김대중 주필이라는 언론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당연히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1998년 전무이사대우로 승진했고, 편집인 직함을 더 얻었다. 이렇듯 13년간 조선일보의 편집국장 및 주필로 있으면서 조선일보의 보수적 편집방향을 총괄하던 중 2002년 3월 주필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2003년 1월에는 편집인 직함을 떼어 변용식 편집국장에게 넘겼고, 이사 직급을 달고 워싱턴으로 갔다. 김대중 주필의 워싱턴 이동은 조선일보의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부분이었는데 같은 해 2월에는 류근일 주필이, 11월에는 안병훈 부사장이 같이 정년퇴임을 맞이했고 방우영 회장의 퇴임이 이뤄지면서 방일영 일가(정확히는 방상훈 사장)의 조선일보 지배가 확립되었기 때문. 고문직을 받고 퇴임한 이 들과 달리 정년퇴임을 앞둔 김대중을 워싱턴으로 보낸 것은 그 동안 고생하셨으니 쉬다 오시라는 뜻에 가깝다. 이후 2004년 3월에는 조선일보 부사장대우 이사로 복귀하였다가 11월에 정년퇴임하였다. 그 후로는 고문 직함으로 꾸준히 지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그는 현재 조선일보의 주식 0.5%를 소유하고 있다.

2020년 3월 31일부로 조선일보 고문직에서도 물러나게 되었으나, 김대중 칼럼은 계속 지면에 연재하고 있다. 과거 이규태, 류근일 고문이 5년간 고문 직함을 달았는데 김대중은 15년 반이라는 긴 세월동안 고문 직함을 유지한 것을 보면 그가 조선일보에서 미친 영향력을 알 수 있다.

3. 논란

4. 여담

유감스럽게도 김 주필님은 그간 자신의 위상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고 그에 따른 권력을 즐기는 데에만 몰두해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겠죠. 이해합니다. 당신이 세상을 우습게 볼만 합니다. 저는 정말 이해합니다. 그간 아무도 당신을, 조선일보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진보적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까지도 말입니다. 그들은 외국에서 수입된 좌파 이론이나 갖고 떠들 뿐 조선일보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조선일보와의 적대적 공존 관계를 통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 지경이니 김 주필님의 간이 크게 부어 있다고 해도 전 놀라지 않을 겁니다. - 강준만, 월간 <인물과 사상>, 1998년 12월 호
"그들(수습기자 6명)은 머리가 좋았던 만큼, 외신부에 들어와서 접하게 되는 세계정세와 인류사적인 변혁과 사건들에 대응해 이해하는 속도가 무척 빨랐어요. 그 세대들을 어려서부터 교육하고 세뇌했던 병적인 반공주의 사상도 나의 시각교정·의식수정 노력에 의해서 놀랄 만큼 교정되어 곧 정상적 가치판단을 하게 됐다, 그랬는데 그 가운데 김대중 군은 사사건건 반공주의만 고집하는 거예요. 베트남 전쟁, 중국 혁명[18], 제3세계 인민들의 진보적 운동에서 도도한 시대정신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김대중 군만은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그 낡은 비이성적인 극우반공주의자라는 의식의 틀을 깨질 못하더라고. 나는 다른 견습기자들은 잘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우수한 저널리스트가 되겠지만, 김대중 군만은 어렵겠다고 실망했어. 그런데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될 것으로 믿었던 기자들은 1974년에 일어난 언론자유투쟁 때 앞장섰다가 다 쫓겨났어. 반대로 도저히 구제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던 그 김대중 기자만은 그대로 남아서 논설주간이 되고, 주필이 되고, 한국 여론을 쥐고 흔드는 막강한 <조선일보>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더군." - 리영희, 임헌영, <대화>, 2005

5.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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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산 김씨 '중(中)'자 항렬이다.[2] 지명도가 1% 미만이 나왔는지 10위권 리스트에도 들지 못했다.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 결과 리스트에서 김대중 전 주필의 이름이 없어진 것.[3] 다만 본관은 광산 김씨로, 김 전 대통령의 본관은 김해 김씨다. 또 김대중 대통령은 한 번 개명한 이름이다. 또 야구선수 김대중과도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다.[4] 정치 성향은 김 전 대통령과 전혀 다른 보수 우익 반공주의를 지향한다.[5] 서울대 학군단은 국내에 최초로 창설된 학군단이며 한 때 준장이 학군단장을 맡았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6] 훗날 리영희는 김대중 논설위원에 대하여 "그는 내가 일구어낸 최고의 성과이자 최악의 상처다."라고 평하였다.[7] 중국의 대하무협소설 의천도룡기에 나오는 고려인 천건남의 이미지와 흡사하기도 하다. 물론 의천도룡기의 집필 시기인 1961년과 김대중의 조선일보 입사 시기가 맞지 않기 때문에, 선배 언론인으로 실력이 쟁쟁했던 선우휘리영희 쪽이 어느 정도 캐릭터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지만, 김대중 주필이 장수하면서 오랫동안 활동해왔기 때문에 인상은 이쪽이 더 깊게 박히는 것이다.[8] 김대중의 이후 행보를 보면 대단히 수구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리영희의 사상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김대중과 일하던 시기 리영희가 가진 수정주의적 사고관도 편협하기 짝이 없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후일 후회하긴 하지만, 당시 리영희는 문화대혁명과 마오주의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던 인물이었다.[9] 당시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제로 인해 상당수의 기자들이 이런 식으로 영합하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반면 이에 굴하지 않고 싸운 언론인들도 소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언론통폐합, 보도지침땡전뉴스 문서로.[10] 김대중이 사형선고 사건 당시 자기를 죽이려 한 전두환에게서 빠져 나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썼던 거짓 편지를 갖고서 전후 맥락(콘텍스트 context)을 몽땅 삭제한 채 계속 '약속해놓고 안 지켰다' '다시는 정치 안 한다 해놓고 거짓말한다'고 몰아세웠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은 훗날 1986년 11월에, 직선제 개헌이 된다면 대통령 불출마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적이 있다. 물론 그 얘기를 뒤집고 1년 뒤 대선에 출마했다. 한참 지난 10년전 일도 아니고 바로 작년에 불출마를 선언한 사람이 대선 토론회에 나와있으니 충분히 토론회에서 할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악의에 가득찬 질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11] 단, 지지율이 상승 추세였다 하더라도 당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보다는 김영삼 대통령이 더 지지율도 높았고, 여론조사에서도 김대중, 노태우 후보를 서울에서 여유있게 이기고 있음이 CIA보고서에 나와 있다.[12] 반면 현재 김대중과 함께 대표적인 극우파 언론인으로 분류되는 조갑제는 당시 반쯤 목숨 걸고 직접 광주에 현장취재를 다녀왔고, 제대로 된 르포기사를 썼다. 조갑제는 적어도 1980년대 당시까지는 반정부 성향국제신문 기자였다.[13] 출처 : 윤덕한,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14] 출처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 :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15] 하지만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문제인 것이 김대중과 류근일 두 원로는 서로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정도로 친한 사이다. 따라서 저런 평가는 반어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16] 김대중 대통령이 평민당 총재이던 시절부터 대통령 당선 이후까지, 사실상의 언론 창구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무소불위의 언론 권력을 자랑하던 김대중 주필을 어떻게든 설득해 내기 위해 박지원 실장이 김대중 주필을 거의 매일 만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김대중 주필 기자 50주년 기념 칼럼에 실리기도 했다.#[17] 이 때문에 그 다음날인 27일까지 여러 언론에서 해당 기사를 정정하는 관련 보도를 냈으며, 또한 JTBC 뉴스룸도 팩트체크 코너에서 해당 내용을 다루기도 했다.[18] 단, 이는 리영희의 오류였다. 문화대혁명을 옹호한 그의 전력은 평생의 흑역사로 남았고, 그 스스로도 한정된 정보로 인한 오류였다고 시인하고 사과한 적이 있다.[19] 조선일보 사이트에 가입 후 오랫동안 고정적으로 활동하는 유저들은 당연히 보수 정당과의 일체감이 강력한 충성도 높은 강성 보수 지지층인데, 이 유저들이 김대중 전 주필이 가끔 보수 정당을 비판하는 칼럼을 쓸 때마다 그를 비난하는 댓글을 꽤나 달곤 했기 때문.[20] 야구선수 김선우와는 동명이인인데 우연히도 김선우 선수의 아버지 이름도 김대중(金大中)이다.[21]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워싱턴 대학교 교육심리학 석사·박사.[22] 책 내용만 보면 평범한 기러기 아빠가 직장을 그만두고 소박한 인생을 사는 이야기이지만, 정작 저자가 금수저라는 배경을 알게 되면 '낚였다'라는 감상이 든다. 사실, 저자의 배경을 모르고 읽었더라도 이미 40세에 내 집 마련을 하고 주택담보대출까지 다 갚았다는 대목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 부전자전이라고, 문장은 매우 유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