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 ||||
김대중 | → | 류근일 | → | 강천석 |
柳根一
1938년 1월 30일[1] ~ ([age(1938-01-30)]세)
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 본관은 진주(晉州)[2].조선일보의 주필을 지냈다. 김대중 전 조선일보 주필과 함께 조선일보의 극단적 우경화의 주역이자, 한국의 극단적인 보수, 우익, 반공주의 성향의 언론인으로 꼽힌다.
정년퇴직 이후 조선일보 주필 자리를 내려놓은 뒤, 극우 성향의 언론으로 분류되는 뉴데일리의 주필을 지냈다. 요새도 간간히 몇몇 매체에 칼럼을 쓴다.
2. 생애
2.1. 언론인 경력 초기의 진보 성향
1938년 1월 30일 경기도 경성부에서 아버지 류응호(柳應浩, 1911. 6. 24 ~ 1994. 1. 30)와 어머니 파평 윤씨 윤수현(尹水賢, 1913. 4. 14 ~ 2005. 5. 3)[3]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류응호는 야마가타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음운학자로, 경성제국대학 강사로 있으면서 조선어학연구회[4]에 참여하여 학술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를 하다가 제2대 총선에 좌파계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정치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남로당 소속이라고 체포되었고, 조선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서울대학교 자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가 이후 전선이 밀리는 와중에 월북했다.[5]남한에 남겨진 류근일은 1956년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신진회라는 이름의 독서회를 조직했는데, 교내 동인지에 "전체 무산대중은 단결하자"든가 "새로운 형태의 조국을 만들자"를 운운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필화를 입는다. 무죄판결이 나 처벌은 면했으나, 이 일로 이름을 크게 떨치고(?) 4.19 혁명 후 민통학련 대의원총회 의장으로 취임하여 남북학생회담을 주장하였는데,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혁명재판소에 넘겨져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1968년 출소했다.
이후 아버지의 친구였던 홍진기가 그를 중앙일보 기자로 채용하면서 언론계에 발을 내딛었다. 이 시기 류근일은 정권과는 거리를 두면서도 과거의 급진적인 모습을 많이 버렸는데, 감옥 생활 도중에 딱히 회심이나 사상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은 없고, 류근일 본인은 "나는 원래 극좌가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 것" 정도로 얘기하고 있다. 실제로 학생 당시 국가보안법 재판이 무죄가 나온 이유는 소련의 볼셰비키의 사상이 아닌 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한 것이며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인되는 범위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후 민청학련 사건에 휘말려 또다시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고초를 겪었으며, 그 후로는 더이상 필화에 엮이는 일은 없었다. 1981년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선우휘의 제안을 받고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겨갔다.
2.2. 보수 언론인으로 전향 및 조선일보 우경화의 주역
198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6]를 취득했다.민주화 이후로도 노태우 정부 때까지 정부로부터 감시를 받았던 일이 폭로되기도 했지만, 노태우 정부 시기 이후 김영삼 정부 즈음 부터는 이전의 시절과는 다르게 논조가 점점 확연히 극단화 되고, 우경화 되어갔다.
조선일보에서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논설위원실장을 맡았고, 1994년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7]를 취득했다. 그 뒤 승진해서 1996년부터 2002년까지는 논설주간을 맡았고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주필을 맡고 정년퇴직했다. 후임 주필인 강천석이 논설주간에서 승진하기 전까지 주필은 공석이었다. 이후 2008년까지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칼럼을 연재했으나 본인의 의지로 고문직 퇴임과 함께 연재를 마쳤다.
이후 뉴라이트 운동에 몸을 담으면서 극우 논객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고, 심지어 극우 성향의 매체인 뉴데일리의 논설고문까지 역임한다. 이후로도 조선일보에 간간이 칼럼을 연재하면서 국정교과서에 찬성하는 등 논조면에서도 매우 보수 우익적인 색을 드러냈다. 그나마 당시 경향신문에서 논조의 다양화를 꾀한다고 류근일을 섭외했던 일은 상당한 아이러니였다.
2.3. 이후
2009년 3월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 대우교수로 부임해 '정치커뮤니케이션' 강의를 담당했다.3. 여담
- 동시대에 조선일보의 우경화를 이끈 김대중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고 속마음을 터놓고 말할정도로 좋았다. 류근일은 김대중을 "그 놈은 못 된 놈이다."라고 혹평했지만 반어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 전임 주필인 김대중은 본래 조선일보 출신이었다가 주필을 맡았지만 류근일은 외부인사 출신으로 주필을 맡은 케이스이다.
- 탈모인인데, 엄청나게 어색하고 티가 많이 나는 가발을 쓰고 다닌다.
- 1992년 대선 때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후보를 두고, "당선가능성이 부족한 변수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정주영 변수>라는 칼럼을 써 현대그룹과 조선일보가 대판 싸우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머리 끝까지 열이 받은 현대그룹은 조선일보에 대한 광고를 중단했다. 정주영 후보 측에서는 자회사인 문화일보를 통해 열심히 언론플레이에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 탈북 교수 김현식의 증언에 따르면, 류근일의 부친 류응호는 김일성대학 교무처장까지 올랐으나, 김대를 방문한 외국인들과 통역없이 대화했다는 혐의로 평양사범대학 평교원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8월 종파사건 이후 1959년 말에 반당종파분자들을 쓸어버린다는 이유로 온 식구들과 함께 평양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60년대에 류근일이 남한에서 학생운동 거물이 되자 허겁지겁 부교수 직함을 주고 평양사범대학 교수로 다시 데려와서 고급 아파트와 자동차를 받고 복권되었다. 하지만 이미 시골에서 하도 고생을 하고 와서 노망기까지 와서 제대로 강습은 하지 못하는 판이었고 1994년에 뇌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류근일은 자기 아버지의 효용가치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적절한 시기에 돌아가신 것 같다고 씁쓸하게 말한 바가 있다. 북한에 있는 이복 여동생은 평양의대 교수로 배치되었으나 아버지 사망 이후 이혼당하고 하방되었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1] 음력 1937년 12월 29일.[2] 이류계 북부령공파 33세 근(根) 항렬.[3] 윤태중(尹泰重)의 딸이다.[4] 1931년 창립된 학술단체로, 조선어학회와는 다르다. 한글 맞춤법 통일 과정에서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기를 주장했다.[5] 류응호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있다가 숙청되었으나 김형직사범대학 교수로 복귀하여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6] 석사 학위 논문 : 1950年代 後半의 國家와 헤게머니 鬪爭 : 進步黨 理念에 對한 하나의 視角(1950년대 후반의 국가와 헤게머니 투쟁 : 진보당 이념에 대한 하나의 시각).[7] 박사 학위 논문 : 制度外的(제도외적) 반대세력의 형성과정과 반대활동의 전개과정에 대한 연구 : 60~70년대 비통상적 정치참여 사례들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