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3 00:4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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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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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번 | → | 구윤 (1986) | → | 이현택 (1987~199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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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현태 (1986) | → | 구윤 (1987~1993.6.29.) | → | 감병훈 (1994~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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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천 (1986~1992) | → | 구윤 (1993.6.30.~1994) | → | 도명진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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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윤 具潤 | Koo Yoon |
출생 | 1963년 6월 18일 ([age(1963-06-18)]세)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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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경북고 - 중앙대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 입단 | 1986년 1차 지명 (삼성)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 (1986~1993) 태평양 돌핀스 (1993~1994) |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관련 문서
[clearfix]전 삼성 라이온즈, 태평양 돌핀스 소속 외야수.
2. 선수 경력
경북고 시절 성준, 류중일, 문병권, 홍순호, 조광덕 등과 함께 1981년 경북고의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이 활약으로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게 된다. 강견으로 투수로도 활약하기도 했다. 다만 대학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 했다고 한다.
1986년 1차 지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활약으로 큰 기대를 모았으나, 부상으로 인해 빛을 발하지 못한 케이스. 주로 백업 외야수로 활동하였으나, 1988년 장효조의 이적 이후에는 준주전급으로 활약하였다. 우익수로 훌륭한 활약을 한 이종두의 포지션 경쟁자로, 어깨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아 이종두를 밀어내고 우익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다만 잘 나갈만 하면 찾아오는 부상이 결국 그의 선수 생명을 갉아 먹고 말았다. 실제로 1990년 개막전에서 슬라이딩을 하다가 온 무릎 부상 이후 91년까지 뛴 경기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 이후 1993년 태평양 돌핀스로 현금 트레이드되었으나 별다른 활약없이 1994년까지 활동하다가 방출되면서 커리어를 마쳤다.
3. 플레이 스타일
수비에 있어서는 신언호, 김형석과 함께 강견으로 손꼽히는 우익수였다. 타격에서 커리어하이였던 1989년에는 괜찮은 갭파워로 2루타를 양산하는 중장거리 유형의 타자로 분류되었다. 선구안이 나쁜 편은 아니나 꽤 적극적인 타격을 했던 타자로, 커리어 삼진률이 29%에 달한다. 덕분에 1993년에는 KBO 리그 기록인 8연타석 삼진이라는 불명예 기록도 갖게 된다.4.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