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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구우일(具宇一), 구춘희(具春熙), 김창한(金昌漢) |
호 | 일정(一丁) |
출생 | 1892년 10월 23일 |
경상남도 진주군 진주면 중안동 | |
사망 | 1946년 1월 20일 (향년 53세) |
경상남도 진주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65호 |
본관 | 능성 구씨 |
가족 | 여동생 구은득 배우자 이악지 |
학력 | 진주보통학교 (졸업)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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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2년 10월 23일 경상남도 진주군 진주면 중안동에서 태어났고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면 동동에서 거주했다. 그는 1919년 2월 진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공부하던 여동생 구은득이 급병에 걸려 입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종 누이동생 이화경과 함께 3월 1일 의령을 떠나 이튿날 경성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작 아프다던 여동생은 건강해보였고, 시위 군중 속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그 전보는 오빠를 경성에서 벌어진 3.1 운동에 참여시키기 위한 꾀였던 것이다. 구여순은 여동생과 함께 독립시위에 참가한 뒤 동생으로부터 의령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자는 제의를 받고 수락한 뒤 경성에서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이종 누이 이화경에게 부탁해 그녀의 양말 속에 감추고 여동생과 함께 고향에 내려왔다.의령에 도착한 구여순은 최정학(崔正學)·전용선(田容璿)·최병규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의령군 용덕면사무소에서 제작한 뒤 의령읍 장날이던 3월 14일에 이를 배포했고, 장꾼 700여 명이 열렬히 호응했다. 이후 그는 다음날도 만세시위를 지속하다가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최정학과 함께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를 불복해 공소하면서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병합이 아직 10년이 되지 않았는데 자유의 함성을 듣고 어찌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세를 부르는 것이 보안법 위반이라고 알고 있으나 의무를 지키는 자에게 어떠한 죄가 되지 않는다고 믿고 이에 상고 취의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그대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그는 출옥 후 서울 중동학교에 재학하다가 대한적십자사에 가입했다. 그 후 1922년 상하이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난 후에, 1923년 8월 의열단에 가입했고, 12월에 국내에 잠입해 조선총독부 및 중요 관서를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경찰에 또다시 체포되었고,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8년 출옥한 그는 시베리아로 건너가 김용호·남호섭·이태수·최철용 등과 함께 반제지방단부(反帝地方團部)를 조직해 위원장으로 추대됐고, 이듬해 5월에는 의령기근구제회와 신간회 의령지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한편, 그는 비밀리에 광복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전개해 진주 지수면의 구재서(具再書)[1] 등으로부터 5000원(쌀 220석치)을 모금,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송금했다. 이후 1940년에 귀국한 그는 1941년 4월 경남 고성군 개천면에서 고려구국동지회(高麗救國同志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8.15 광복 후 김구와 더불어 신탁통치 반대 및 친일파 청산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20일 진주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구여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