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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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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파일:The Tyranny of Merit.jpg
<colbgcolor=orange> 저자 마이클 샌델
ISBN 9791164136452
쪽수 420쪽
옮긴이 함규진
출판사 와이즈베리
국내 출간일 2020.12.01.
장르 인문학 서적

1. 개요2. 내용
2.1. 대중이 포퓰리즘을 선택하는 이유2.2. 능력주의테크노크라시2.3. 승자와 패자 나누기
2.3.1. 능력주의 교육의 문제점
2.3.1.1. '계층 이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학2.3.1.2. 완벽주의라는 상처
2.3.2. 생산자로서 의 존엄성 하락
2.4. 대안: 조건의 평등
3. 여담

[clearfix]

1. 개요

마이클 샌델의 저서. 한국어판 제목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는 의역으로,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능력주의의 폭정: 무엇이 공공선인가?)》이다.[1] 본 책은 능력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2. 내용

2.1. 대중이 포퓰리즘을 선택하는 이유

주류 정당과 집권 엘리트들은, 브렉시트트럼프 당선을 불러온 포퓰리즘 열풍이 저소득층의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세계화 - 기술 변화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이는 얼마간의 진실을 담고 있긴 하지만 포퓰리즘을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진단이라고 샌델은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불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문화적 불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불만은 단지 임금과 일자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중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럼 주류 정당들의 어떤 실책이 사람들로 하여금 포퓰리즘적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공공선(public good)을 기술관료적(technocracy; 테크노크라시)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로 정의 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2] 기술관료적 정치는 시장에 대한 믿음과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 상품과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장 주도적 세계화는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의 기준으로 정치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웃소싱, 자유무역협정, 무제한적인 자본 유동성 등에 관한 비판은 '꽉 막힌 생각'일 따름이며, 세계화 시대에 종족주의를 고집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 주도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심각하게 심화시켰다. 또한 기술관료적 통치 방식은 공적 담론을 기술 전문가들에게 맡김으로써 보통 시민들은 그 담론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 이로써 시민들은 점점 정치에서 배제되고 있고, 이에 대한 반발로 포퓰리즘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수십 년간 형성되어온 '승자와 패자에 대한 관점'의 변화이다. 왜 중산층과 저소득자들이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깔보고 있다고 느끼는지 알아야 한다. 노동계급과 중산층 유권자들이 엘리트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계기는 빈부격차에 있다. 세계화는 그 과실을 불균등하게 배분했다. 미국의 경우 70년대부터 지금껏 늘어난 국민소득 대부분이 상위 10퍼센트에게 돌아갔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오늘날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미국인은 하위 50퍼센트가 버는 것보다 더 많이 벌고 있다. 하지만 불평등의 폭발적 증가만으로는 포퓰리즘의 분노, 그 핵심을 설명할 수 없다.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불평등을 참아온 것은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즉 "기회가 평등하면 재능과 노력에 따라 누구나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수많은 통계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상승(계층 이동)은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진단한다.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난 미국인은 대개 가난한 성인이 되며 반대로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미국인은 부유한 성인이 된다. 소득 기준 하위 5분위 가정 출신자는 그 중 단 5%만이 상위 5분위에 이르렀고, 대부분은 중산층에도 이르지 못했다.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생 2/3은 소득 상위 5분위 가정 출신이다. 장학금과 기타 지원책이 후하지만, 아이비리그 대학생 가운데 하위 5분위 출신자는 4%도 되지 않는다. 하버드와 그 밖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소득 상위 1% 출신의 학생은 하위 50% 가정 출신 학생보다 많다. 그러므로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다.[3] 따라서 사회 계층 이동성은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능력주의에 대한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

현실을 떠나 능력주의가 완벽히 작동된다고 가정하더라도 도덕적 문제가 생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그 시장이 인정하는 재능에만 어마어마한 보상을 준다. 즉 인기종목에 재능 있는 사람과 비인기종목에 재능 있는 사람 간의 보상 격차는 도덕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어느 재능이 뛰어난가는 도덕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원하는 재능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똑같이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결국 시장이 정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태도의 문제로 이어진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재능의 보상은 시장에서 정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패자 또한 자신의 패배를 당연하게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 '하면 된다'라는 능력주의 윤리[4]는 승자를 오만으로, 패자를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들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핵심이 된다.

2.2. 능력주의테크노크라시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에서부터 미국 초기 공화정까지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공공문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저런 차이가 있어도 능력뿐만 아니라 '덕이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다. 공공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정치에 시민적 미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는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 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렸으며, 정부 영역에서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게 되었다. 이로써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틀어놓았다. 학력이 있는 사람들의 명예는 보상받는 돈에 비례하여 높아지는 대신에 대부분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의 명예는 반대로 추락하게 되었고, 이윽고 저소득층과 중산층 노동자들의 사회적 기여가 과소평가 되는 상황에 내던져졌다.

또한 이러한 정치경제적 관점 이전에, 기술관료적 정치인들이 말하는 '우리는 모두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는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일방적인 팩트(사실) 제시는, 시민들의 관점과 가치판단을 미리 정해버리는 기만에 해당된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진다.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다. 모이니한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의견이란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소위 '팩트'만 말하는 기술관료적 입장은 겉보기로는 잡음의 여지가 없는 가치중립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것이 매력이자 단점이 된다. 기술관료들이 말하는 '스마트 기술'과 '스마트한 규제 틀' 같은 이야기들은, 기후변화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질문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화석연료 산업의 외부효과를 억제하기 위해 민주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자연을 도구화하도록 부추긴 소비주의적 생활 태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쓰고 버리는 문화"라고 부른 그런 태도를 재고해야 할 것인가?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정부의 행동에 반대하며, '과학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정부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않은지, 특히 경제를 대규모로 뜯어고치며 특정인들의 잇속을 채우려 하는 게 아닌지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는 전문가들이 대답해야 할 과학적 질문이 아니라, 민주시민을 위한, 민주시민들이 할 수 있는, 권력, 도덕, 권위, 신뢰에 대한 질문들이다.

하지만 기술관료적 정치의 가치중립적 태도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아예 언급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도덕 가치들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이 질문에 대해 정치적 도덕적 가치들을 함께 논의하고 합의해나가며, 그래서 그 가치 판단으로 시민들이 그 사회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공론의 장을 만들어줘야 된다. 여기서 조심해야될 점은, 기술관료를 덜 뽑거나 뽑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기술관료의 말을 믿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기술관료가 사실로써 정치적 담론을 원천봉쇄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참여를 막아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이다. 즉 관료는 사실과 함께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담론도 형성되도록 도와줘야 하지,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 토론할 가치도 없다고 막아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실이 사회나 정치에 받아들여질 때는, 그 사실이 학자들의 담론을 통해 검증된 것으로만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사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는가', 또는 '시민들 각자는 이 사실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담론과 정치적 검증을 한 번 더 거쳐야 된다. 그리고 그것이 샌델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5]

2.3. 승자와 패자 나누기

2.3.1. 능력주의 교육의 문제점

2.3.1.1. '계층 이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학
능력주의가 문제라면 그 해답은 무엇인가?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한다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나의 능력만으로 성공했으니 이 정도 명예와 보상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 저 능력주의 윤리 자체를 바꾸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 바꾸기는 능력주의적 성공 개념의 핵심인 두 가지 인생 영역, 즉 '교육'과 '일' 부분에서 능력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스스로를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성공관이 되어 버렸는지 알아보는 데서 시작한다.

명문대를 능력주의적 기관으로 보고, 그 목표는 '가장 재능 있는 학생을 배경 불문 모집하고 훈련 사회 지도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관점은 1940년대 하버드대 총장인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에게서 나왔다. 코넌트는 아이비리그 대학을 세습 상류층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못마땅해했다. 그런 엘리트층은 미국의 민주주의적 이상에 반한다고 믿었으며, 이 나라가 그 어느 때보다 지성과 과학에서 앞서갈 필요가 있던 당시 상황과도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코넌트는 이런 세습적 엘리트 체제를 뒤집어엎고 능력주의적 체제로 대체하려고 했다. 기존의 비민주적인 미국 엘리트들을 쫓아내고 좋은 머리, 정교한 훈련, 공적인 정신으로 찬 새로운 엘리트가 배경을 불문하고 충원되고 그들을 대신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능력주의 쿠데타를 이루기 위해 코넌트는 교과 내신성적은 보지 않고, 오직 지적 능력만을 근거로 주어지는 장학제도를 도입했다. 그가 장학생을 뽑기 위해 마련한 테스트는 미육군의 IQ 테스트와 비슷했는데, 이후 SAT(수학능력 평가시험)라는 명칭을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SAT는 전국 대학의 입학을 좌우하는 시험이 되었다. 르만은 SAT를 이렇게 표현했다. "하버드에 몇 명의 장학생을 보내는 방법 차원이 아니게 되었다. 미국 국민을 유능자와 무능자로 판별하는 인재 선별기가 되었다."

코넌트는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을 자신의 주장의 핵심이라고 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이 무계급 사회가 되는 이상을 추구했다. 코넌트는 이렇게 말했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 이동성은 '무계급 사회'라는 미국의 이상의 핵심입니다. 만약 다수의 젊은이들이 그 부모의 경제 여건에 무관하게 자기 능력을 계발할 수 있다면, 그들의 사회적 이동성은 높아질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젊은이들의 미래가 물려받은 특권이 있으냐 없느냐로 좌우된다면 사회적 이동성이라는 건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 사회 이동성의 도구가 되어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교육'이었다. "고등교육을 기회로 가는 주 관문으로 삼아야 한다. 사회적 상승의 진원지로 만들어서 사회가 유동성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회경제적 배경과 상관없이 모든 학생에게 자기 재능이 허용하는 한 성공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코넌트의 능력주의 비전을 받아들여 대부분의 미국 대학은 이를 미국 고등교육의 정신으로 정립했다. 오늘날 미국의 대학 입시는 고등학교 성적과 SAT 점수로 측정된다.

하지만 SAT는 배경과 무관한 시험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반대로 SAT 점수는 응시자 집안의 부와 매우 연관도가 높다. 소득 사다리의 단이 하나씩 높아질수록, SAT 평균점수는 올라간다.[6] 또한 SAT는 코넌트의 희망처럼 사회 이동성과 그에 따른 무계급 사회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바뀔 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입장을 바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수의 가난한 집 자식들만이 부를 얻는 데 성공했다.[7] 능력주의 고등교육은 사회 이동성의 엔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특권층 부모가 자녀에게 특권을 물려줄 좋은 기회만 제공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고등교육을 기본적인 기회의 엔진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이는 슬픈 소식일 것이다.

더 슬픈 소식은, 능력주의 경쟁에서 승리한 대부분의 고학력자들이 자신의 성공을 자신의 배경[8] 덕택이 아닌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낸 성취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부와 명예도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당연한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것인가? 그래서 대학 학위가 없다면 명예로운 직업과 고상한 삶을 바래선 안 된다는 말인가? 우리 동료 시민 대다수는 높은 학위가 없다. 그런데 자신의 성공을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냈으며, 그러기에 '하면 된다'는 저 능력주의적 가치관, 그리고 그 가치관으로 저학력자들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해선 더 높은 대학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그들을 고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욕하는 일이다.[9] [10]
2.3.1.2. 완벽주의라는 상처
고등교육의 승자독식형 재선별[11]은 두 가지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첫째,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는 대학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한 집안 출신 자녀들을 압도적으로 많이 뽑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승자들에게도 피해를 남긴다. 별 문제나 말썽없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과거의 세습적 엘리트와 달리, 새로운 능력주의 엘리트는 힘겨운 투쟁을 거듭해야 높이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부유한 부모들은 자제들에게 명문대 입학을 위한 강력한 뒷받침을 해주고, 학생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생활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 고민, 불면과 싸우며 모의고사는 물론 공부, 체육, 예체능 실기 과외, 그 밖의 온갖 잡다한 특별활동을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겪는다. 결국 이런 능력주의적 군비 경쟁은 부유한 집안 쪽으로 전세를 기울인다. 그리고 부자 부모들이 스스로의 특권을 대물림하기 쉽게 해준다.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성취를 얻기 위해서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과도한 압박을 한다. 극성 학부모의 등장은 능력주의적 경쟁이 과열된 시기에 등장했다. 자녀가 공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부모의 책임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지게 되던 때의 시작인 것이다. 이제 아동기에 개입해 일정하게 관리를 하려는 움직임은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6~8세의 경우 1981년에 비해 1997년에는 노는 시간이 25% 감소했다. 그리고 숙제는 2배로 늘었다."

이는 능력주의로 인해 불평등이 증가하고 교육으로 인한 보상이 커진데 따른 대응이었다. 비록 여러 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결 같이 부모의 개입이 심해지긴 했으나, 가장 심했던 곳은 불평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 곳이었다. 가령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였다.[12] 심리학자 매들린 레빈은 겉으로는 성공적인 여러 유복한 가정의 10대들이 극심한 불행감, 고립감,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소한 문제에 흥분하며, 그들 다수는 우울하고, 불안하고, 분노에 차 있었다. 그들은 부모, 교사, 코치, 동료의 말에 지나치게 복종적이었으며 어려운 일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문제까지도 남들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메들린은 이들이 '풍요로움과 지나칠 정도의 부모 간섭 때문에 불행하고 깨져 버리기 쉬운 인간이 되었음'을 차차 알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심리학자들은 '일촉즉발'의 젊은이는 도시 빈민굴의 불우한 청소년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새롭게 나타난 일촉즉발의 젊은이 집단은,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집안의 아이들임을 레빈은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동연령대 중 최고 수준의 절망, 약물 의존, 불안 장애, 신체적 호소, 불행감 등을 경험한다. 연구자들이 사회경제적 스펙트럼을 통틀어 동연령대 아동들을 살펴본 결과, 가장 심각한 정신문제를 가진 아동들은 부유한 가정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 즉 그들은 동연령의 10대보다 높은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으며, 그것은 그들이 대학에 합격한 뒤에도 계속된다. 부유한 출신 젊은이들이 과도하게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답은 능력주의적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뭘 해내라', '뭘 이뤄라', '뭘 성공해라' 하며 끊임없이 떨어지는 사명. 행복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목소리다. "돈을 많이 벌어라." "그러기 위해 명문대에 들어가라."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 샌델은 그 사실을 자신의 학생들을 보고 알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고민하면서 대학 생활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며, 그 속에서 스스로와 싸우고 싸우는 일을 거듭해왔고, 심지어 그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일자리를 얻게된 이후에도 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놀랄 만큼의 많은 아이들이 정신 건강에 이상을 겪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 세대의 대학생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완벽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전염병'에 걸렸다고 말이다. 몇 년 동안이나 불안 속에 분투해온 결과 젊은이의 마음은 약하디 약한 자부심, 그리고 부모, 교사, 입학사정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냉혹한 한 마디에도 산산조각 날 자의식으로 채워져 버렸다. 토머스 쿠란과 앤드류 힐은 1989년부터 2016년까지 완벽주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사회적이고 부모의 기대에 매인 완벽주의의 증가세는 32%에 달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을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오늘날 기회의 관리자로서 대학의 역할은 아주 확고하기 때문에 도무지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능력주의 병폐가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는 오늘날, 고등교육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볼 때가 왔다. 인재 선별기를 고치기 위한 방법을 찾기위해서는, 능력주의의 두 방향으로 그 폭력적 지배를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정상에 올라서는 사람들에게는 불안증, 강박적 완벽주의, 취약한 자부심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으로서의 능력주의적 오만을 심는다. 한편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극심한 사기 저하와 함께 '나는 실패자야' 라는 심한 자책감과 굴욕감을 심는다. 이 쌍방향 폭력은 하나의 도덕적 원인을 공유한다. 능력주의의 사명인 '우리는 개인으로서 우리 운명의 책임자다'라는 도덕률이다. 내가 성공하면 오로지 내가 잘한 덕이며, 실패하면 오로지 내가 잘못한 탓이다. 개인 책임에 대한 집요한 강조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상승 추세에 대응할 연대 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13]

2.3.2. 생산자로서 의 존엄성 하락

능력주의 시대는 노동자들에게 악랄한 상처를 입히고 있다. 시험 점수를 잘 따고 대입 시험에서 성공한 사람들만을 일방적으로 칭송하면서부터,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들을 시궁창에 빠뜨렸다. 그것은 저학력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하는 일은 돈 잘 버는 전문직업인들의 일에 비해 시장에서 별 가치가 없어요." 그것은 시장이 승자에게 퍼붓는 과도한 보상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비대졸 노동자에게 한없는 굴욕감을 선사한다. 뒤쳐진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번영하는 동안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달았다. 이는 트럼프에게 몰표를 가져다 주었다.

샌델은 저학력 중년 백인 노동계급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저학력 백인 중년의 '절망 끝의 죽음'[14]은 1990년에서 2017년 사이 3배 증가했다. 케이스와 디튼은 '절망 끝의 죽음' 사례의 증가는 학사학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예외 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빈곤에 따른 불행이 아니며, 학력이 모자란 사람이 능력주의 사회에서 특별히 고통스럽게 겪는, 명예와 보상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저학력이라고 무시하거나 주변의 눈치를 보게 해서는 안된다는 통찰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인권을 향상시키고자 함은 맞는 방향이나, 그것을 함에 있어서 엘리트 지식인들이 백인 노동계급에게 백인의 특권을 들먹이며 비아냥거리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백인 특권'을 말하는 비난은 오히려 저학력 백인들에게 무력감과 울분을 심어주게 된다. 소수자의 인권을 챙기는 데에 있어서 비소수자를 비난하는 식으로 그들의 명예를 떨어뜨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은 다만 소득이 없다는 데서 나오지 않으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일 없다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는 동료 시민들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게 만든다. 즉 이들이 원하는 것은 사회적 인정을 받는 것이며,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고 가치를 두는 일을 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좌파 정당들은 저학력자의 지지를 얻고 우파 정당들은 고학력자의 지지를 얻어왔다. 하지만 능력주의 시대에 이 패턴은 뒤집혔다. 오늘날 고학력자들은 중도좌파 정당에 투표하며, 저학력자들은 우파 정당에 투표한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15]는 이런 패턴 역전이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놀랄 만큼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능력주의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엘리트에 대한 저학력 유권자들의 지지를 줄어들게 만든다. 엘리트들이 능력주의를 외치며 뛰어난 학점만이 불평등의 해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저학력자의 사회적 기여를 폄하하여 저학력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부추기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학력자를 정치에서 효과적으로 배제한다. 정치에서 배제된 불만은 저학력자들을 포퓰리즘적 선택으로 내몰게 한다.

또한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며,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일찍이 로버트 케네디[16]는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우애, 공동체, 공동의 애국심 등 우리 문명의 이런 중대한 가치들은 단지 함께 물건을 사고 소비한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런 가치들은 수준 있는 급여를 받으며 존경 받는 직업 생활을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 직업은 개인이 그의 지역사회에, 그의 가정에, 그의 나라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직업입니다. '나는 이 나라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있어요. 나는 이 위대한 공적 모험의 참여자예요'라고."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힘을 합쳐서 이런 도덕적 유대관계를 뜯어내 버렸다. 그들이 뿌려 놓은 글로벌 보급 체인, 자본의 흐름,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체성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2.4. 대안: 조건의 평등

'기회의 평등'[17]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기회의 평등=능력주의 / 결과의 평등=공산주의)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각각의 직업에 사회적 존경이 부여될 수 있도록 그 직업의 의미와 역량을 계발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타협할 수 있는 정보를 널리 보급하고 공유하며, 동료 시민들과 우리의 공적 문제에 대해 함께 숙의할 수 있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조건의 평등은 사회적 이동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교육이 모든 계층과 직업에 널리 퍼져 있는 데서 나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18]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있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19] 이는 활기찬 공동의 삶을 영위하는 조건이다.

우리 정치공동체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에 대해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 [20] [21]

동료 시민들과 어떻게 정의롭고 좋은 사회를 구현할지 논의하며, 각자가 시민의 미덕을 기르고, 정치 공동체는 가치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정치 공동체는 시민들이 공공 의제에 관해 깊이 생각해서 충분히 의논하게 하고, 토론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게끔 하여, 합의에 도달하게 하는 민주적 절차과정의 영역과 사안들을 제시한다. (시장의 가치가 아니라) 그 일의 노력이 향하는, '목표의 도덕적-시민적 중요성'을 판단하여, 일을 하는 사람에게 사회에 기여하는 가치를 주고, 동료 시민으로부터 사회적 인정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일은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22]

조건의 평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마이클 샌델. 24분 54초부터 나온다. #
Now, what i mean by equality of condition is not that everyone must have the same income and wealth but there does need to be broad democratic access to sources of learning to the culture and to a way of being that enables everyone whatever their walk in life to stand with their head up to look their fellow citizens in the eye as democratic equals to deliberate about the common good to feel a stake in the common life.

지금, 내가 말하는 '조건의 평등'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임금과 부를 가져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계층일지라도 공공의 삶 속에서 이해관계를 공감하며 공동선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민주주의적인 평등의 눈으로 고개를 들고 서서 동료 시민들을 바라 볼 수 있는 존재 방식과 문화를 배우는 것에 대해, 충분한 민주주의적 접촉 기회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의 직업과 학력에 대해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조건의 평등이 필요하고, 조건의 평등이란, 다른 계층의 사람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에 우리가 얼마나 평등하게 접근하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뉴스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부딪치는 그런 장소들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샌델이 주장하는 바이다. 부자와 빈자와 중산층들이 함께 부딪칠 수 있는 광장같은 곳에서, 노숙자가 있는 것을 보기만 하더라도 시민들은 빈자에 대한 생각을 할 기회가 생긴다. 다른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치면 그들의 생각을 자연스레 알게 되고, 한번이라도 얘기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 여기서 토론의 기회를 만들어 나가는 그런 대중 기획들이 만들어지거나, 또는 갖갖이 주장들이 펼쳐지는 집회들을 마주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다. 따라서 계층과 상관없이 부딪칠 수 있는 그런 공간인 대중 교통, 광장, 공립 학교 같은 곳이 많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사립 학교나 전용 VIP 룸 같이 '부자는 부자들만 갈 수 있는 공간에서만 살아간다'면 부자는 빈자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는 부자대로 놀고 빈자는 빈자대로 노는 상황'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해치는 길이 된다고 샌델은 말하고 있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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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yranny of merit | Michael Sandel (한글 자막 있음)

[1] 제목에 '공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진 않기 때문에, 제대로된 번역명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굳이 공정을 넣어 의역하자면,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2] 《공정하다는 착각》 p.45[3] 미국에서는 제법 오랫동안 이야기가 되어오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재산, 정보, 인맥을 다 쥐고 있는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가 오직 능력만 갖고서 그걸 이긴단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단 식의 이야기다.[4] 능력주의 윤리란, 능력주의에서 승자가 자신의 승리를 당연히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자신의 성공은 온전히 자기 능력으로만 이룬 것이다'라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하지만 이 윤리를 믿는 사람들도 자신의 재능을 높게 평가해 주는 사회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이 성공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성공은 그의 가족과 그가 속한 공동체에 빚지고 있다. 그 사회, 그 가족에 태어난 것은 결코 그의 노력이나 선택에 달려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것은 전적으로 '운(luck)'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5] 더 자세한 내용은 유발 하라리와 샌델의 토론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샌델이 유발 하라리를 설득하기 위해서 강의식으로 질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6] Andre M. Perry, "Students Need More Than an SAT Adversity Score, They Need a Boost in Wealth." The Hechinger Report, May 17, 2019.[7] 《공정하다는 착각》 p.261[8] 이 배경(집안, 지역, 시대 등)은 '운'으로 결정된다.[9] 《공정하다는 착각》 p.267[10] 여기서 샌델 교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바로 추첨제를 통한 대학 입시. 수만 명에 달하는 대학 입학 지원자들 중에서 학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거나, 동료와 문제가 있을 것 같다고 판단되는 학생들을 제외한 뒤, 남은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추첨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에 최종적으로 입학하게 되는 학생들도 본인의 능력이 아닌 운에 따라 입학한 것이 되므로 오만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부와 학력의 세습을 피하기 위해 부모가 고졸인 학생들을 우선 선발할 수도 있다.[11] re-sorting: 고소득 가정의 학생들이 가장 경쟁률이 높은 대학을 찾기 시작하면서, 대학간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현상. 한국으로 치면, '대학 줄세우기' 정도가 되겠다.[12] 《공정하다는 착각》 p.280[13] 《공정하다는 착각》 p.287[14] Deaths of Despair: 자살, 약물 과용, 알코올성 간질환 등, 자신의 삶을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불러들인 죽음을 말한다.[15] 문제작 21세기 자본의 저자.[16]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17] 능력주의가 말하는 기회의 평등이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학자인 존 롤스가 주장한 개념이다. 존 롤스는 차등의 조건하에서 능력주의를 인정했다. 즉 능력주의를 통한 이익은 최소수혜자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평등주의적 관점을 지향한 것이다. 따라서 존 롤스는 '한계가 있는 능력주의'를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로버트 노직의 자유지상주의는 능력주의 그 자체라고 보면 된다.)[18] 능력주의로 상징되는 '아이비리그'를 말한다.[19] 《공정하다는 착각》 p.300 에 나온다. 능력주의적 선별이 망쳐버린, 그래서 잃어버린 미국 사회의 '평등'의 유형은, 지성과 교육이 모든 계층과 직업에 널리 퍼져 있는 데서 나온다는 것. 샌델은 이것을 시민교육과 연결시켜 말하고 있다. 즉 조건의 평등에서 '평등'이란 시민들이 '정치적 사회적 토론'을 할 수 있는 시민교육에 달려 있는 것이다.[20]조건의 평등은 여러 계층이 만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하는 데서 시작된다. '공론의 장'을 확보하고 시민들이 거기에서 토론하고 타협하는 것을 배우는 것. 그것이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21] "우리 정치 공동체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 그리고 이것이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는 말은 샌델의 다른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2012)》에서도 거의 똑같은 문장으로 나온다. 그것도 책의 제일 마지막 결론부에서 말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에서도 책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말이다. 아마 이 말이 샌델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22] 《공정하다는 착각》의 말미(p.352)에 소비주의적 공동선과 대비되는 시민적 공동선을 강조하고 있다. 시민적 공동선은 같은 책 p.324 에 나온다. 여기서 샌델은, '돈을 얼마나 벌고 쓰느냐'는 '소비자의 역할'에 가치를 두지 말고, 우리 사회에 생산자로서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23] 학교와 직업이 결정되는 순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