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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5 16:12:55

가야본성 전시 임나일본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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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논란이 된 내용3. 진실

1. 개요

2019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이 28년 만에 가야 관련 특별 전시를 하며 일본서기의 내용을 인용하였다가 일부 시민단체의 음모론 제기와 항의를 받은 사건이다.

2. 논란이 된 내용

파일:연대표_서울전시.jpg
가야본성 서울전시에 사용된 연표[1]

파일:지도_서울전시.jpg
가야본성 서울전시에 사용된 지도[2]

해당 시민단체 일동은 가야본성의 지도에 일본서기가 인용되었으며, 이는 국립중앙박물관 내부의 식민사학자들이 폐기되었던 임나일본부설을 부활시키려는 증거라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3. 진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임나'라는 낯선 지명에 대한 오해와 일본서기의 근본적 한계를 악의적으로 이용해 선동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임나(任那)라는 명칭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가야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으로서의 '임나'는 주로 일본 기록에서 그 등장 빈도가 높으며, 특히 임나일본부설의 핵심 소재이기 때문에 현대 한국에서는 역사 왜곡과 직결된 부정적인 명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임나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 측 기록에서도 등장할 뿐더러, 유사역사학계의 주장과는 달리 명백히 가야 또는 그 맹주에 해당하는 국가[3]와 동일한 정치체로 언급된다. 따라서 임나 자체는 삼국시대 당시부터 일본의 곡해와는 무관하게 가야나 그 일대 지방을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 중 하나로 쓰였으리라 여겨진다.

당장 현존하는 사료 가운데 '임나'라는 국명을 사용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가 바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비다. 이 비문의 영락 10년(서기 400년) 기사에서 신라를 침공했던 왜군이 퇴각한 장소로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국가가 언급되는데, 여기서 '가라'는 가야의 다른 표기이므로[4] 학계에서는 이 임나가라를 오늘날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로 비정하고 있다.[5] 삼국사기에도 강수의 출신지로 임나가량(任那加良)[6]이 언급되며, 후삼국시대의 진경대사탑비문은 아예 '임나 왕족의 후손'인 진경대사가 신(新) 김씨[7]이며 김유신의 자손이라고 명시하여 임나와 금관가야를 같은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의 사서 통전에 실린 신라전에서도 "신라가 마침내 강성해져 가라(加羅)와 임나(任那)의 여러 나라를 습격해 멸망시켰으니, 모두 삼한의 땅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남제서의 가라국 하지왕 관련 기록을 참고하면 여기서 가라는 반파국(대가야), 임나는 금관국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처럼 비단 일본 측 기록에서만 임나를 가야 맹주국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므로, 이 단어의 의미를 가야 전체의 총칭으로 확대해서 쓰는 것 역시 큰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논란은 임나라는 지명의 의미와 임나일본부설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무지의 소치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일본서기는 일본 황실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저술된 역사서이기에 그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받는 기록도 많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학계의 취사와 교차검증을 통해[8] 왜곡되거나 과장된 부분을 제외하고 한국 고대사의 사료로 쓰이고 있는 문헌 중 하나다. 엄정한 사료 비판을 거쳐 허구적인 부분을 걷어낸다면 국내 사서에는 누락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9]

국내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금석문목간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 고대사를 다룬 유의미한 문헌적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외국 서적 중에서도 일본서기, 고사기 등 일본 문헌이나 한서 ~ 신당서 등 중국 문헌을 당연히 같이 연구할 수밖에 없다. 한국사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의 경우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나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없는 부분은 해외 고문헌 연구를 통해 고증된 내용이다. 그런데 위 해프닝은 이러한 사학계의 학술적 배경은 전혀 공부하지 않은 채, '일본서기는 일본의 역사서인데, 한국 고대사 전시에 일본을 들먹이다니!'라는 식으로 접근하고 만 것이다.

애시당초 가야본성 전시에 사용된 자료들을 보면 일본서기에 기록된 지명과 백제의 진출 사실만을 인용했을 뿐, 임나일본부설을 비롯한 일본서기 편찬자들의 자체적인 왜곡은 전혀 반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사서의 인용 자체를 문제시하는 유사역사학계의 이러한 이분법적 선동은 비단 이 사건에서만 그치지 않았고, 이후 전라도천년사 편찬 논란까지 일으키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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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는 한문화타임즈(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4821). 환빠 계열의 언론이다.[2] 출처는 코리아히스토리타임즈(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0). 역시 환빠 계열의 언론이다.[3] 금관국, 대가야 반파국안라국이 이에 해당한다.[4] 삼국사기 사다함 열전에 "가라는 가야라고도 한다(加羅一作加耶)"라는 대목이 있다. 야(耶)의 상고 한어 재구음이 /*laː/라는 점을 고려하면 가라와 가야 둘 다 '가라'라는 음을 달리 표기한 것인 셈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금관국의 이표기 '가락국'과도 어원을 공유한다.[5] 이덕일을 필두로 한 유사역사학계는 "왜군이면 일본 열도로 퇴각하겠지 무엇하러 가야로 퇴각하겠냐"며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광개토대왕릉비, 일본서기 등의 기록을 참고하면 4세기 후반에 백제가 왜국과도 화친하고 가야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므로, 자연스럽게 가야와 왜국도 친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대성동 고분군을 비롯한 전기 가야의 고분에서 파형동구 등 왜계 위세품이 대량으로 출토된 바 있어 양국 간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6] 여기서 가량(加良)은 가라(加羅)와 마찬가지로 가야를 가리키는 또다른 명칭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역시 '가라'라는 국명을 음차 표기한 것이다.[7] 신라의 왕성인 경주 김씨금관국 멸망 이후 신라 정계에 새로이 편입된 김해 김씨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추정된다.[8] 일본서기의 기록이 한국 사서의 기록보다 정확하다고 판단된 사례도 있다. 일례로 일본서기는 백제 무령왕부여곤지 또는 개로왕의 아들이며 461년 음력 6월 1일에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곤지의 손자이자 동성왕의 아들이고, 동성왕의 사촌인 삼근왕이 465년생이므로 무령왕의 생년이 461년일 수는 없게 된다. 이에 삼국사기의 기록을 취신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훗날 무령왕릉이 발견된 후 출토된 지석을 통해 무령왕의 생년이 462년으로 밝혀짐에 따라 일본서기의 가계 기록이 1년의 오차를 제외하면 보다 사실에 가깝다는 점이 교차검증되었다.[9] 주로 백제와 가야에 대한 기사가 많다. 현전하는 한국 사서들은 포상팔국의 난 기사를 제외하면 가야에 속한 수많은 소국들을 '가야/가라'로 퉁쳐서 부르는 경우가 많기에, 소국들을 일일이 구별해서 그 일대의 정세를 상세히 기록한 일본서기는 가야사 연구에 특히 중요한 자료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