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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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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초기형 MSX SPC-800 MSXturboR 마쓰시타 FS-A1GT. MSX 규격의 최종 테크이다.

1. 개요2. 설명3. MSX 규격의 변천
3.1. MSX(1983)3.2. LD 게임 플레이, Pioneer PX-V603.3. MSX2(1985)3.4. MSX2+(1988)3.5. MSXturboR(1990)
3.5.1. 타카오카 NIA-2001 (1989)
3.6. MSX3(취소)3.7. 각 규격별 비교
4. MSX의 원형5. 대한민국에서의 MSX
5.1. 하드웨어5.2. 소프트웨어5.3. 출판물5.4. 홈브루 프로그래밍5.5.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MSX
6. 현재의 MSX7. 게임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983년 6월 27일 일본의 아스키(현 아스키 미디어 웍스)에서 발표한 8비트 개인용 컴퓨터의 규격. 아스키에서는 규격의 사양만을 제정했고 실제로 완제품을 생산하지는 않았으며 일종의 개방형 아키텍처 형태로 원하는 회사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도록 하였다. 1980년대 다수의 일본과 한국의 메이저 전자회사들이 MSX 표준 규격을 준수하면서 자사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MSX를 발매하였다. 자사가 완제품을 만들면서 규격을 공개한 IBM PC 호환기종보다는 3DO처럼 규격만 제시한 경우와 유사하며 MSX가 이런 방식의 원조이다. 일반적으로는 '아스키와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제안 규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아스키의 독자 규격에 가까우며 사실 여기에는 약간의 뒷사정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였다.

2. 설명

Machines with Software eXchangeability[1]의 약자로서, 일본의 아스키와 미국마이크로소프트에서 공동으로 창안한 8비트 컴퓨터의 규격이지만 미국에서는 만드는 회사가 거의 없었고, 일본, 한국(대우전자, 삼성전자, 금성사), 네덜란드(필립스)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NEC, 샤프, 후지쯔 등 기존에 독자 규격의 컴퓨터를 제작하고 있던 기업들에서는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소니, 마쓰시타, JVC 등 주로 가전 회사들이 이 규격의 컴퓨터를 만들었다. 이는 MSX의 개방형 아키텍처 규격이 가정용 컴퓨터 시장의 진입 장벽을 낮춰준 덕분이었다.

MSX와 같은 '표준 규격'의 등장에는 당시의 시대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오늘날에는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는 IBM PC에서 발전해온 소위 윈텔 규격의 컴퓨터가, 모바일 시장에서는 안드로이드가 일종의 표준 규격의 역할을 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회사 별로 다양한 하드웨어가 난립하였고 제조사가 다르면 소프트웨어의 호환성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현재의 IBM PC 호환 기종과 매킨토시,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간에 호환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인데, 그런 상황이 수십 배 쯤 심각했다고 보면 된다. 이게 일본만 그랬던 게 아니라 PC의 본산지였던 미국도 마찬가지라서 애플 II, 탠디 코퍼레이션 TRS-80, 코모도어 64, 아타리 800 등 수많은 PC들이 군웅할거 했으며 이들 역시 서로 주변장비 및 소프트웨어가 호환되지 않았다.[2][3] 심하면 같은 회사의 하드웨어끼리도 호환성이 없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을 정도[4]라서 소프트웨어 제작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저 수많은 기종에 맞춰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해야 했으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이 시절 개발자들은 대부분 어셈블리어를 사용했다. 그나마 CPU가 같으면 어셈블리어는 같지만, 입출력 포트를 건드려야 하는데 기종마다 다 제각각이었다. 이런 환경 가운데 아스키가 제창한 "제조사가 달라도 MSX 규격이라면 소프트웨어는 모두 호환된다!"라는 통일 규격 제안은 상당히 긍정적인 것이었다.

실질적인 규격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니시 카즈히코. 그가 MSX를 만든 이유는 소프트뱅크 손 마사요시와의 라이벌 의식 때문인데, 당시 일본에서 개인용 컴퓨터는 3대 PC 기업으로 불리던 NEC, 샤프, 후지쯔가 만들었으며[5], 소프트웨어의 유통은 소프트뱅크에서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마쓰시타, 소니와 같은 일본의 가전 회사들에게는 PC 사업에 발을 들여놓아 첨단 기술 회사 이미지[6]를 갖고 싶었으나 하드웨어 설계 능력이 모자랐을 뿐더러 소프트웨어도 빈약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나마 소니에서는 1983년은 발표한 독자 규격의 PC인 SMC-777를 내놓은 적이 있으나 선발 업체에 비해 극심한 소프트웨어 부족 때문에 사실상은 망한 상태였다.[7] 이런 상황에서 소프트뱅크와 라이벌 의식을 가진 아스키에서는 위 가전 회사들을 끌어들여 기존 PC 시장의 기득권을 깨려고 하였고, 둘의 알력 다툼은 MSX 규격 발표 전날 소프트뱅크가 전격적으로 MSX를 지지한다는 발표를 내면서[8] 일단은 봉합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실제적으로 규격 제정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는 않고 BASIC 인터프리터, MSX-DOS, MSX 플랜 등의 소프트웨어만을 제공했으며, 실질적인 규격은 아스키, 정확히는 니시 카즈히코의 작품이다. 애초에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에 전념하여야 한다는 방침이어서 그다지 MSX 규격에 대해 탐탁잖아 하던 것을 니시 카즈히코가 설득해서 승인 받았다고도 했다. 참고로 MSX 규격은 니시의 고유 설계는 아닌데, 이에 대한 설명은 후술하였다.

또한 니시 카즈히코는 아스키를 통해 MSX 매거진이라는 잡지도 창간해 MSX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판매를 증대시키고자 했다.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노린 셈인데, 이 잡지 또한 대성공하여 일본의 서브컬처에 큰 영향을 주었다.

PC 시장의 본산이었던 미국을 위시한 북미와 대부분의 유럽 지역에서의 MSX는 코모도어 64와 애플 II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동아시아, 남미, 소수의 유럽 국가 등지에서는 성공을 거뒀다. 네덜란드나 남미 국가가 MSX 팬덤의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도 이들 국가에서는 MSX 관련 행사가 열린다.[9]

특히 코나미에서 MSX 기종으로 그라디우스 시리즈, 메탈기어, 불새, 격돌 페넌트레이스와 같은 많은 명작 게임을 내놓아 MSX 유저들에게 그 당시의 코나미는 현재 PC 게임계의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와 비슷한 위치로 인식되었다.[10] 이 시절의 코나미는 그야말로 다른 회사와는 넘사벽이어서 스페이스 맨보우메탈기어 2 솔리드 스네이크 등의 말년작 쯤 가면 MSX로 이런 걸 할 수 있나 싶은 수준의 연출을 보여준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게임의 용량이 점차 커지면서 롬 카트리지가 아닌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는 게임들이 비중을 많이 차지하기 시작했고, 이 시기부터 이스 시리즈 등 PC-8801의 게임들의 이식이 많이 되기 시작했다. 상당수가 MSX2보다 발색수가 낮은 8801판 그래픽을 그대로 때려 박아서 MSX2의 그래픽 성능을 잘 살리지 못했지만, 이스 시리즈나 영웅전설1 등 몇몇 작품은 MSX2에 맞게 그래픽을 갈아엎어 초월이식의 경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3. MSX 규격의 변천

3.1. MSX(1983)

최초의 MSX 규격이다.[11] 최초로 출시한 상용 MSX PC는 미츠비시 전기의 ML-8000으로# 초기 출시 당시 가격은 대체로 5만엔대였으나 1984년에 카시오가 29,800엔으로 가격을 절반 가까이 후려치면서 출혈 경쟁을 시작했고 결국 소수 회사만 돈을 버는 시장이 되었다.

MSX 규격은 8비트 중에서도 그래픽 성능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MSX2 이후의 이야기로, 당초 MSX 규격은 커스텀 부품을 최소화하고 당시에 일반화된 상용 부품들을 끌어모아 낮은 가격으로 가정용 컴퓨터를 구축하는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그래픽 성능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CPU는 가장 보편적이었던 자일로그 Z80A, 사운드 칩셋은 제너럴 인스트루먼트 AY-3-8910, 그래픽 처리 칩셋(VDP)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MS9918을 사용하였는데, 이 조합은 당시에 그렇게 드문 조합이 아니었다. 세가의 게임기인 SG-1000이 이와 비슷한 조합을 가지고 있으며 MSX보다 1년 먼저 등장한 콜레코비전이나 Sord M5[12] 역시 유사한 조합을 가지고 있다.

규격에 외부에 확장 슬롯을 갖출 것을 명시하고 있는데, 확장 슬롯은 외부 장비 연결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나[13] 게임팩을 꽂는 용도로도 쓸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용도로 더 많이 쓰였다. MSX가 게임 컴퓨터라는 평가를 종종 듣는 이유일지도. 그리고 당시 컴퓨터들 중에서는 드물게 스프라이트를 하드웨어로 처리할 수 있었는데 덕분에 MSX 게임들은 동시대의 경쟁 기종들에 비해서 슈팅, 액션 등이 강세를 보이는 편이었다.[14] 스프라이트는 게임과 깊게 관련된 기능이라 아케이드 머신 또는 패미컴 같은 게임기, 게임 지향의 가정용 컴퓨터에나 들어가는 기능이었으며, 업무용 컴퓨터에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MSX와 비슷한 시대에 스프라이트 기능이 들어간 기종이라면 아타리 800과 코모도어 64가 있는데, 이들 역시 MSX와 마찬가지로 게임 지향의 가정용 컴퓨터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움직이는 사물이라는 점에서 GUI 운영 체제에 써먹을 수 있지 않겠나 싶지만, 1980년대에는 GUI 운영 체제가 돌아가는 컴퓨터가 드물었고 사물의 크기나 개수에 대해 제한이 많았던 스프라이트보다는 그런 제한이 거의 없었던 블리터[15]가 더 효율적이라서 이 기능이 들어간 아미가는 스프라이트 기능도 있음에도 불구하면서 아미가 OS에 활용한 것은 스프라이트가 아닌 블리터이다. 물론 GUI 운영 체제나 게임용으로 블리터 기능이 들어간 하드웨어가 나오는 것은 MSX보다는 그 다음 세대 정도의 이야기다.

참여한 회사 중에는 원래 컴퓨터에 관심이 있었던 히타치, 도시바, 미쓰비시[16], 새롭게 가정용 컴퓨터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한 마쓰시타, 소니, 산요전기는 물론 CASIO, 캐논, 야마하, 파이오니아, JVC, 심지어 혈압계 회사인 오므론 등 지금 생각하면 컴퓨터와 관계없어 보이는 회사들도 있는데, 이들 중에서 파이오니아는 레이저디스크 비디오 플레이어를 MSX 주변기기로 쓸 수 있게 만든 대인배스러운 물건을 내놓기도 했다. 이것으로 나온 게임이 '스타 파이터'와 '아스트론 벨트', '인터스텔라' 등. 레이저 디스크에 담긴 호화로운 동영상 배경에 오버레이로 나오는 빈약한 MSX 화면 사이에 괴리감이 심한 것으로 유명한 작품들이다. 스타 파이터 플레이 영상, 아스트론 벨트 플레이 영상, 인터스텔라 플레이 영상.[17] 또한 야마하는 전자 악기를 MSX로 제어할 수 있는 다양한 인터페이스 카트리지들을 만들어서[18] 음악 컴퓨터로 만들어 내놓았다. 기존의 시장 지배자였던 NEC, 샤프, 후지쯔 정도를 제외하면 그 시절 좀 이름 있는 일본 전자회사는 거의 모두 MSX 규격에 뛰어들었다고 보아도 좋았을 정도다.[19]

3.2. LD 게임 플레이, Pioneer PX-V60

일본판 MSX 본체의 연결 단자에 LD 게임을 플레이 가능하게 해 주는 Pioneer PX-V60을 연결하고 별매의 LD 소프트웨어를 구입하면 LD게임을 즐길 수 있다. 30여종이 발매되었고, 대표적인 것으로 타임 걸(타이토), 배드랜드(코나미) 가 있다.

3.3. MSX2(1985)

저렴한 가격과 적당히 괜찮은 성능, 다양한 소프트웨어 등으로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MSX였으나 저렴한 가격을 위해 성능을 많이 제한했으므로 여러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메모리가 최소 8KB라는 점은 메모리가 비쌌던 1983년 당시에는 저렴한 가격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사양이었으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입장에서는 불편한 점이 많았고, 해상도 역시 너무 낮았다. 특히 일본에서는 가로로 40자의 한자를 표현할 수 있는 워드 프로세서에 대한 업무용 수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동시대의 PC-8801 등이 갖추고 있던 640×200 정도의 해상도가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메모리와 비디오 메모리를 최소 64KB로 규정하고 512×212의 비트맵 그래픽스를 채용한 새로운 규격이 1985년에 등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MSX2. MSX2 규격의 발표에 따라 MSX는 저렴한 게임 컴퓨터 이미지를 벗어나 동시대의 경쟁 기종 컴퓨터들에 뒤지지 않는 사양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가 MSX의 절정기로 'MSX는 그래픽이 강하다'는 이미지가 생겨난 것도 이 MSX2 덕분이다. 동시대의 경쟁 기종인 NEC PC-8801mkIISR이나 샤프 X1Turbo 등과 비교할 때 MSX2의 그래픽 성능이 우수하기 때문. 특히 색깔 표현이 512 팔레트/16색, 혹은 256색 고정 팔레트로 동시대 기종 사이에서는 매우 앞서가는 편이었다.[23] 일본 내에서 발매된 8비트 기종 가운데 MSX2보다 그래픽 성능이 뛰어나는 기종은 후지쯔의 8비트 끝판왕 후지쯔 FM77AV 정도 밖에 없다.

1982년, 자사의 PC를 만든 야마하로부터의 협력 요청으로, 아스키가 요구 사항을 만들고 야마하가 LSI 개발을 담당하여 1984년에 만들어진 것이 MSX2에 탑재되는 V9938로서, MSX2의 개발은 우연찮게도 야마하가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24] MSX2의 VDP인 아먀하 V9938은 원본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MS9918에 비해 게임에 관련된 기능도 강화했는데, 특히 약간 빈약했던 스프라이트 성능을 대폭 강화해 패미컴 등의 게임기에 뒤지지 않게 되었고 스크롤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였기 때문에 워드 프로세서를 위한 세로 방향으로만 기능을 넣었다. 덕분에 MSX2용으로 등장한 슈팅이나 액션 게임들은 대개가 세로 스크롤(종스크롤)이었고, 가로 스크롤(횡스크롤)은 드물었다. MSX2의 비트맵 그래픽은 MSX1의 PCG(Programmable Character Generator,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문자 생성기)에 비해 그래픽 처리량이 엄청나게 늘어나는데 반해, Z80A CPU는 너무 느려 소프트웨어 스크롤 구현이 어려웠다. 결국 예를 들면 악마성 드라큘라나 힘내라 고에몽 MSX2판은 원작인 패미컴 판에 있는 횡스크롤이 사라지고 화면을 전환하는 식으로 변경했다.

후기에는 VDP로 횡스크롤을 구현한 게임이 나오기긴 했으나 하드웨어 기능을 이용할 수 없다 보니 온갖 꼼수 테크닉을 활용해야 했다. 일단 MSX2에서 비트맵 모드로 화면을 미려하게 만들 수 있어 게임으로 가장 선호했던 화면 모드인 스크린 5 모드 대신, PCG로 화면을 구성해야 했던 스크린 4 모드를 써야 했다. 그리고 화면 표시 영역을 이동시키는 명령인 SET ADJUST 명령을 이용했다. 이는 16 픽셀까지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16 픽셀 이동 후 반드시 왼쪽 8픽셀의 정보를 지우고 오른쪽 8픽셀의 정보를 읽어들인 새로운 배경 화면을 다시 그려야 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해 횡스크롤을 구현했다. 스페이스 맨보우가 MSX2에서 동작할 때 이런 방식을 이용했다.[25] 덤으로 이런 방식의 단점은 주기적으로 오른, 왼쪽 테두리의 8픽셀 정보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른, 왼쪽 테두리를 검은 스프라이트로 가려서 화면 이동을 감추는 방법도 있었다. 사이코 월드가 이런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스프라이트 성능을 희생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26]

이러한 향상된 성능들을 갖추면서도 기존의 MSX1 소프트웨어에 대한 하위 호환성을 보장했기 때문에[27] MSX2의 보급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MSX2용 소프트웨어도 발매 초기부터 시장에 나올 수 있어 선순환이 되었다. 발매 초기에는 평균 5만엔 대 정도로 MSX1에 비해 가격이 많이 비싼 편이었는데 아예 표준 사양 모델 밖에도 옵션 규격인 JIS2 수준 한자 ROM이나 슈퍼 임포즈를 내장하고[28] 키보드 분리 및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내장[29] 등 전체적인 사양을 고급화하여 전문가 지향의 10~20만 엔 대 고가 모델도 제법 나왔다.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 모델이 바로 대우전자 X-II(CPC-400). 1987년 무렵부터는 옵션 규격의 내장보다는 칩셋 커스텀을 거친 원가 절감에 치중, 가격 하락이 상당히 이루어져서 MSX2로의 시장 이행이 가속화되어 시장에 나오는 소프트웨어도 기존의 MSX1용 소프트웨어보다 MSX2용 소프트웨어가 많을 정도로 역전되었다.

사운드는 MSX1과 기본적으로 같으나 MSX-Audio라는 옵션 규격을 마련하여 기능 강화를 꾀했다. 야마하 Y8950(야먀하 OPL YM3526에 ADPCM 코덱을 추가한 칩셋) 칩의 채용으로 2오퍼레이터 FM 사운드와 1채널 ADPCM을 제공했으나 가격이 너무 비싸서 보급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8년 마쓰시타에서 FM Pana Amusement Cartridge(FMPAC)이라는 이름으로 야먀하 OPL2 YM3812[30]의 저가판인 야마하 OPLL YM2413 칩을 채용한 사운드 확장 카트리지를 발매했는데, 성능은 MSX-Audio보다 많이 떨어지지만, 가격이 1/4 정도였기 때문에 급격하게 보급이 이루어졌고, 결국 MSX2+에 MSX-Music이라는 이름으로 옵션 규격으로 채용됐다. 표준 규격은 아니나 코나미의 커스텀 사운드칩인 SCC가 코나미제 카트리지에 탑재된 것도 비슷한 시기인 1987년부터. 상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3.4. MSX2+(1988)

MSX2 규격이 나온 지 3년이 지난 1988년에 그래픽을 더욱 강화한 MSX2+ 규격이 발표되었다. MSX'3'가 아닌 '2+'인 이유는 MSX1에서 2로 변했던 것과 달리 업그레이드의 폭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 기존 MSX2 규격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VDP가 V9938에서 V9958로 변경된 것이다. V9958은 V9938의 업그레이드 버전이기는 하나 TMS9918에서 V9938로 변경되었을 때에 비하면 업그레이드의 규모 자체는 크지 않았다. 사실상 추가된 기능은 가로 스크롤 기능과 자연화 모드(YJK 그래픽 모드)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외에는 주로 옵션이었던 규격들이 표준 규격으로 들어온 것 외에는 큰 변화점은 많지가 않다. MSX도 슬슬 저물어가는 시기여서 MSX2+에 와서는 소니, 마쓰시타, 산요전기 3사만이 남고 나머지는 모두 철수했다. 소니와 마쓰시타는 초기 MSX 시절부터 가장 큰 지분을 갖고 있었고 산요 또한 활발하게 MSX1, 2 기기들을 발매했기 때문에 MSX의 위세가 참가 기업 수만큼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MSX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가로 스크롤 기능이 추가되어 기존의 세로 스크롤 기능과 합쳐 전 방향으로 하드웨어 스크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잘나갔던 MSX2 때부터 일찌감치 이랬으면 MSX 게임의 성향이 상당히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인데[33], 안타깝게도 시기가 너무 늦은 덕에 MSX2+ 전용 게임은 동시 발매작인 '레이독 2'와 'F1 스피리트 3D 스페셜' 2작으로 끝났고 MSX2용과 2+용이 별도로 발매된 '미드 가르츠' 같은 타이틀도 있었지만 역시나 극소수여서 모처럼의 전방향 스크롤은 그다지 빛을 못봤다. 'MSX2+만을' 타깃으로 삼은 게임 숫자가 저 모양이었다는 것만 보아도 MSX2+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적이었던 MSX2 런칭 후에도 게임 시장의 주류는 상당기간 기존 인프라가 넓게 퍼진 MSX1용 게임이 주류였던 상황이 재현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2+의 상황은 MSX2 시절보다 훨씬 나빴다. 결국 MSX의 시장 수명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MSX 게임 시장의 타깃은 MSX2를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타이틀에서 MSX2/2+ 동시 지원으로 MSX2+에서 가동 시에 MSX2+의 하드웨어 스크롤이 활성화되거나 자연색 모드로 일러스트가 출력되는 케이스는 많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있다.

'자연화 모드' 기능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19,268색 표시 모드였다. 256색을 동시 표시할 수 있었던 MSX2를 아득하게 능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픽셀 단위로 색상을 지정할 수 없어 가로 4픽셀 단위로 색상을 지정하고 그 4픽셀 안에서는 밝기만을 지정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34] 색상 표현 수를 늘리면서도 비디오 메모리는 적게 사용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 덕에 기존의 256색 모드와 같이 1픽셀당 1바이트라는 용량만으로 19,268색이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수의 색상을 표현할 수 있어 잠시 이목을 끌었지만 실제로는 위와 같은 특성 때문에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실사 표현 등의 제한된 용도에만 쓰였고 게임에서 이용하기에는 픽셀 단위 표현을 할 수 없는 관계로 게임에서는 주로 오프닝/엔딩 같은 컷신에만 일부 사용되는데 그쳤다. 그나마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게임은 마왕 골베리우스 등 몇 타이틀 안되고 메인 타이틀 화면에서 자연화 이미지 한 장 정도만 보여주고 땡인 경우가 대부분. 픽셀 단위의 사물 표현이 어렵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YJK 방식과 기존의 RGB 방식(512색 중 16색 표현, 픽셀 단위 색상 지정 가능)을 혼합할 수 있는 모드도 있으나 이 경우에는 YJK의 색상 표현이 12,499색으로 줄어든다. 기존의 256색 모드도 속도나 표현의 문제로 게임보다는 비주얼 표현에만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35] 이 256색 모드의 강화버전스러운 모드라고 할수 있겠다[36]. 결론적으로는 그래픽의 강화가 있기는 있었으나 유저의 요구가 컸던 '게임 그래픽의 강화'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

옵션 규격이던 JIS 제 2수준 한자 ROM이 표준화 되어 모든 MSX2+에 구현되었다. 가끔 게임에 이 한자 ROM을 사용하는 바람에 한국산 MSX2에서는 잘 안돌아가는 게임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프린세스 메이커. 전년에 발매했던 FMPAC, 즉 MSX-Music는 옵션 규격이었지만 산요 Wavy 35와 마쓰시타 FS-A1FX를 제외한 전 기종이 MSX-Music을 내장했기 때문에 사실상 표준 규격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출시되지 않았으나 비슷한 모델이 개발되기는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한국에서의 MSX 단락 참고.

3.5. MSXturboR(1990)

1990년, 16비트 CPU로 교체한 turboR이라는 후속 규격이 발표되었으나, 제조사는 마쓰시타 한 회사만 남고 모두 철수. 이 규격의 기종은 그래서 마쓰시타 FS-A1ST와 FS-A1GT 둘 뿐이다. 이름의 R은 RISC에서 따온 것이다.

CPU는 아스키에서 설계한 Z80 호환 RISC 16비트 CPU인 R800을 사용하여 이론적으로는 기존 MSX의 무려 8배의 속도를 낼 수 있었고[38] 최소 메모리도 256KB로 4배나 커졌다. 그에 비해 VDP는 MSX2+와 똑같은 V9958, VRAM도 여전히 128KB를 장착하여 그래픽 성능이 전 세대인 MSX2+와 똑같았는데 V9958의 속도가 꽤 느려서 빠른 CPU에도 불구하고 VDP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했다. 그래픽 성능이 이미 시대에 뒤쳐져 있었기 때문에 turboR은 시장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다. 보조 기억 장치인 플로피 디스크도 이미 고밀도인 2HD 플로피 디스크를 보급하기 시작했고 하드디스크도 어느 정도 가시권 안에 들어오는 옵션이었던 시점에서 계속해서 720KB 2DD만을 고집한 점 역시 시대착오적이었다. 거기에 가격도 FS-A1GT를 기준으로 하면 99,800엔으로 가정용 컴퓨터치고는 상당한 고가여서 보급에 악영향을 주었다.[39] 게다가 소프트웨어들도 기존의 MSX2/2+ 시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는 MSX2/2+와 호환성을 유지하며 turboR의 고속 모드에만 대응하는 식으로 나왔다.

VDP에 대해 여담이 있는데, MSX3 문단에서 후술하는 바와 같이 원래는 야마하제 새 VDP를 탑재할 예정이었다가 시장 상황의 변화와 개발 지연으로 MSX3은 취소하고 그냥 MSX2+의 강화형인 MSXturboR만 내놓고 말았다는 것. 이에 의하면 MSX3이 먼저 기획되었다가 MSXturboR로 선회한 셈이다. 니시 카즈히코트위터에서 이에 대해 짧게 언급한 적이 있는데, 니시는 야먀하의 새 VDP에 V9958과의 완벽한 호환성을 원했으나 야마하 측은 이를 구현하는데 실패해서 결국 손에 쥔 것은 빠른 CPU인 R800 뿐이었고 그렇게 turboR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turboR에 와서는 S-Video 단자가 생긴 대신 카세트테이프 데이터 레코더 단자가 삭제되었다. turboR에서 규격이 변경되었다기 보다는 마쓰시타의 MSX2+ 최상위 라인이었던 FS-A1WSX의 세팅이 후속기라 할수 있는 FS-A1ST에 이어져 내려온 것인데 실질적으로 turboR 규격 기종은 마쓰시타 제품 뿐이고 카트리지형 데이터 레코더 컨트롤러같은 것도 따로 개발된 바 없으므로 결국 데이터 레코더를 쓸 수 없게 된 셈이다. [40]

명목 상이나마 옵션 규격이었던 MSX-Music은 표준 규격이 되었다. 또한 확장 카트리지로 제공되던 MSX-DOS2 역시 표준으로 탑재하였다. 별매 소프트웨어였던 GUI 그래픽 셸 프로그램 'MSX View'가 ROM에 내장되고 메인 메모리 512KB, 역시 별도 판매한 MIDI 카트리지였던 'μ · PACK'을 내장하였다.

그러나 1995년 마쓰시타는 FS-A1GT의 생산을 중단하고 컴퓨터는 DOS/V IBM PC 호환기종 일체형 컴퓨터였던 WOODY 시리즈로 전향하고, 게임 분야는 3DO에 전념하기로 결정함으로서 MSX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3.5.1. 타카오카 NIA-2001 (1989)

다만 마쓰시타가 아닌 MSXturboR 관련 제품이 하나 더 있었는데, 일본의 타카오카에서 자동차 유통 기업인 Aucnet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NIA-2001이 그것이다. MSXturboR의 규격에 거의 모든 면에서 부합하지만 PCM 오디오가 빠져 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MSXturboR이 아니고, MSX 진영에서도 이 제품을 MSX 기종으로 인정한 적도 없는 걸로 보인다. 그렇기에 MSXturboR은 마쓰시타 제품만 있다는 말은 여전히 맞는 말이다. 게다가 리테일용도 아니고 중고 자동차 경매를 위한 업무용 기기였다고. 그래서 외관도 업무용 PC에 가깝고, 관련 용도의 내장 소프트웨어를 구동하는 것으로 설계돼있어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도 내장돼있지 않다고 한다. 대신 모뎀 및 수퍼임포즈 기능을 달고 나와 용도를 짐작케 한다. 중고 자동차의 화면을 보여주고, 실시간 경매로 낙찰을 하는 온라인 경매 시스템을 1989년에 만들어낸 것이다. [41] 수퍼임포즈 기능은 레이저디스크나 위성방송으로 전송되는 양질의 중고차 사진을 재생하는 데에 사용되었다고. 그리고 이런 시스템을 매매상인에게 판매한 것도 아니라 리스 기반으로 운영했다고 했으니 여러 모로 시대를 앞서갔다 평할만 하다.

리뷰어들의 평에 따르면 내부 구조는 MSXturboR과 거의 유사하며 MSX-BASIC 4.0도 내장돼 있고, 심지어 바이오스의 기능도 거의 같으며 다만 마쓰시타의 MSXturboR에 비해 버전만 낮을 뿐이라고 한다. 이로 미루어 우연히 같은 하드웨어를 가지고 별개의 기종으로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MSX 진영과 상당 수준의 협력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래도 공식적으론 MSX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만.

태생이 이렇다보니 중고 물량이 매우 희귀하며, 남아있는 사진도 실제 중고 자동차 업체에서 굴렀을 법한 변색된 제품들 위주이다.

이 기종의 시스템 롬도 덤프되어 openMSX로 돌릴 수 있고, 게임도 구동할 수 있다. 다만 게임하라고 만든 게 아닌 기종이라서 일부 게임은 제대로 구동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일부 게임에서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지는 현상이 있다. 이는 파나소닉의 MSXturboR 제품의 경우 하위 호환성을 고려하여 Z80 모드로 자동 전환하는 기능이 있지만, 이 기종은 처음부터 그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서 Z80 모드로 자동 전환하는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기기 뒤쪽에 있는 스위치를 이용해서 수동으로 전환한다.

3.6. MSX3(취소)

MSX는 MSXturboR을 마지막으로 끝이났다. 그러나 아스키는 MSX3 규격을 내놓을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두 종류의 증언과 자료가 있다.

하나는 MSX2를 발표한 1985년 즈음 Z80과 호환하는 16비트 CPU의 Z280, VDP는 V9948(E-VDP-II), 사운드 칩은 MSX-AUDIO(야마하 Y8950)는 내용으로 MSX3을 계획했다는 것이다.[42]

또 다른 하나는 1990년까지 야마하에서 신형 VDP V9978를 개발해 탑재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43] 1985년의 구상이 5년간의 세월이 흐르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아스키에서는 코드명 TryX로 부르며 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마하 V9978의 계속되는 개발 연기로 인해 결국 V9958을 쓰고 MSXturboR로 발매한 것이다.[44] 결국 야마하도 V9978 계획을 폐기하고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MS9918과 야마하 V9958의 하위 호환 기능을 제거해 1992년에 V9990(E-VDP-III)을 내놓았는데, 그래픽 성능은 당대의 킹왕짱이었던 X68000의 뺨을 찰지게 후려치는 수준이었다. 만약 실제 탑재했더라면 상당한 성능 향상을 기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참 나중에 유럽 양덕능력자들의 가내수공업으로 GFX9000이라는 확장 카트리지를 만들고 이것을 사용한 동인 게임을 보면 확실히 당대의 아케이드 기판에 비견할 만한 그래픽 성능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22년부터 니시 카즈히코는 MSX3 계획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고 있는데, 같은 MSX3의 이름을 쓰고 있지만 취소된 MSX3와는 별개의 프로젝트이다. 기술적으로는 ARM이 기반인 듯. 다만 니시의 언급에 따르면 V9958, V9990에 대한 상위 호환성 같은 것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여 어느 정도는 취소된 MSX3의 연장선상에 새 MSX3 프로젝트를 두고 있다는 인상도 주고 있다.

3.7. 각 규격별 비교

구분 MSX1 MSX2 MSX2+ MSXturboR
<colbgcolor=#5176ff> CPU 자일로그 Z80A 상당품
(3.58MHz)
아스키 R800
(7.16MHz)
VDP TI TMS9918
상당품
야마하 V9938
(E-VDP)
야마하 V9958
(E-VDP)
사운드 제너럴 인스트루먼트 AY-3-8910 3채널 AY-3-8910 3채널
+ 야마하 OPLL YM2413 9채널
+ 8비트 PCM 코덱 1채널
RAM 8-64KB 64KB 이상 256KB 이상[45]
VRAM 16KB 64-128KB[46] 128KB
해상도 TEXT 40×24
PCG 256×192/16색
MSX1 표준 +
TEXT 80×24
BMP 256×212/16색
BMP 512×212/4색
BMP 512×212/16색*
(이상 512색 지원)
BMP 256×212/256색*
MSX2 표준 +
BMP 256×212/16색 RGB (+12,499색 YJK)
BLK 256×212/12,499색 YJK (+16/512색 RGB)
BLK 256×212/12,968색 (YJK)
참고

4. MSX의 원형

MSX 규격의 원형은 아스키 고유의 것이 아니다. 위 MSX1 문단에서 전술했듯 이미 자일로그 Z80A에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MS9918을 조합하는 기종은 Sord M5같은 선례가 있고, 세가의 SG-1000도 같은 조합이기 때문에 이런 조합 자체는 흔한 것이었지만[47] 실제로 직접적인 원형이 되는 기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미국의 회사인 '스펙트라비디오'(Spectravideo)에서 MSX와 같은 1983년에 발표한 SV-318/328. MSX 규격과 일절 호환성이 없지만 하드웨어 구성이 완전히 똑같으며 BASIC 인터프리터도 마이크로소프트의 것을 사용하고 있는 상당히 닮은 것이라서 예전부터 연관성이 의심되던 물건이었다.

나중에 나온 비화에 따르면 이렇다. 스펙트라비디오는 SV-318/328을 만들면서 설계/제조를 홍콩의 Bondwell이라는 회사에 맡겼는데, 여기에 BASIC 인터프리터 등의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제공한 회사가 마이크로소프트였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동아시아권 창구 역할을 한 회사가 바로 아스키이다. 아스키는 SV-328의 훌륭한 완성도를 보고 이를 바탕으로 아사리 판이었던 복잡한 시장을 통일할 표준 규격을 만드는 것이 어떤가 하는 아이디어를 내어 당시 제작 중이던 프로토타입을 각 가전 회사에 제시하고 참가 의견을 타진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가할 가전 회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SV-328의 사양을 바탕으로 개량하여 나온 것이 MSX1 규격이라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개발자인 니시 카즈히코 본인도 비슷한 언급을 했는데 니시의 발언에 따르면 SV-328은 또 NEC PC-6000 시리즈의 영향을 받은 모양.

MSX 규격 발표 후 반대로 스펙트라비디오에서 MSX 규격에 참가했다. 북미 지역의 유일한 MSX 규격 참가업체로 SVI-728이라는 MSX 규격의 컴퓨터를 시장에 내놓았고, IBM PC XT 호환 기종이지만 MSX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굴릴 수 있는(!) SVI-838 같은 기괴한 물건도 내놓았지만 이미 북미 시장에는 애플 II코모도어 64 등이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는 지라 결국 MSX 규격의 보급에 실패한 끝에 1988년 회사가 파산하고 시장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미국 시장에서의 MSX는 이 스펙트라비디오에서 내놓은 SVI 시리즈와 야마하의 음악 컴퓨터인 CX 시리즈(CX5M, CX5MII, CX7M)가 전부였다.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관여한 기종임에도 MSX는 미국 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컴퓨터이다.

5. 대한민국에서의 MSX

5.1. 하드웨어

한국에서도 1984년에 금성사(현 LG전자), 대우전자, 삼성전자 가전 3사가 나란히 MSX 규격의 컴퓨터를 냈고, 심지어 대우전자에서는 이듬해인 1985년에 MSX의 게임 기능만을 이용한 게임기 재믹스를 발매하기도 했다. 재믹스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대한민국 PC 업계에서 선발 주자였던 삼성전자와 금성사는 각각 SPC-1000이나 금성 패미콤이라는 독자적인 컴퓨터 제품이 있으면서도 MSX 규격에 발을 뻗은 것이었던 반면에 후발 주자인 대우전자는 DPC 시리즈(상품명 IQ-1000)로 MSX에 닥치고 올인했다. 그에 따라서 가장 많이 보급된 MSX 기종은 대우전자의 DPC 시리즈였다. 메모리 등의 사양을 다양하게 하여 여러 가격 대를 공략한 것도 대우전자 DPC 시리즈의 장점. 3사 다 MSX 규격이었으므로 소프트웨어는 서로 호환되었고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조이스틱, 프린터도 호환할 수 있었다. 한글 BIOS도 같은 것을 사용하여 한글을 사용한 데이터 호환에도 문제가 없었다. 나름대로 MSX 규격의 이상을 잘 지키면서 대한민국 도입에 성공한 편이라고 하겠다. 키보드는 당시는 기계식 키보드 뿐이라 기계식 스위치를 채택했는데, 금성은 알프스 리니어 메탈 스위치, 대우는 후타바 스위치를 사용했다.출처 참고로 대우 IQ-1000의 경우 3가지 모델로 발매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DPC-200) 스트로크가 큰 기계식 키보드였고 나머지 2가지는(DPC-100, DPC-180) 금성 FC-150 혹은 삼성 SPC-500과 비슷한 얕은 스트로크의 버튼식 키보드였다.

이렇게 매끄럽게 한국에 MSX가 3사 공통 규격으로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원조 벤처기업이었던 큐닉스(Qnix)[48]가 다리를 놓은 덕분이었다. 1983년 당시 가전 3사는 일본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던 MSX 규격 도입을 두고 각자 사내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와 기술 제휴 및 에이전트 계약을 맺고 있던 큐닉스에서 가전 3사와 접촉하면서 공통 규격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을 하여 MSX 규격 도입이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각 3사가 한글 지원을 독자 개발하지 않고 큐닉스에서 만든 한글 바이오스를 공통적으로 받아다 썼기 때문에 한글 소프트웨어도 호환성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큐닉스는 초창기 MSX 소프트웨어의 수입 및 개발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 덕에 재미나, 프로소프트, 크로바소프트 등의 불법 복제 게임회사들이 뛰어들기 전 아주 초창기 MSX 게임 카트리지를 보면 크레딧에 Qnix가 있는 게임이 일부 있다. 대체로 1983~1984년작 게임들. 물론 큐닉스도 재미나, 크로바소프트 등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로고 갈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모든 국산 MSX에는 공통적으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내장돼 있지 않았지만 본체 후방에 단자가 있어 외장형 5.25인치나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달 수 있었다.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는 초기에만 조금 쓰였고 대부분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했다. 일본산 MSX는 대부분 별도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단자가 없이 내장했거나 확장 슬롯에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인터페이스 카트리지를 꽂고 거기에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연결해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제 MSX는 보통은 본체에 확장 슬롯이 2개 달려 있었다. 그러나 국산 MSX의 경우는 확장 슬롯이 2개인 기종이 없었고 확장 슬롯 1개+전용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단자를 채용했다. 그런데 이 단자는 외형만 다를뿐 확장 슬롯의 인터페이스와 같았기 때문에, 국산에만 있던 건 아니고 일본을 제외한 외산 MSX(필립스 등)에도 종종 달려있었다. 확장 슬롯과 같은 인터페이스였기 때문에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단자에 카트리지를 연결해 주는 컨버터(일명 FRC, Front slot to Rear expansion bus Converter)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MSX에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장착한 예는 거의 없었고, 초기엔 카세트테이프도 많이 이용했지만 대부분 롬 카트리지로 교체되었다. MSX는 롬 카트리지 사용이 상당히 활성화 되어 있었는데 EPROM을 사용해 애플 II 호환 기종에서 플로피 디스크를 복사하는 것처럼 공 롬 카트리지에 게임을 복사해 주는 업체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퀵 디스크 드라이브'(QDD)라는 외부 기억 장치도 있었지만 기본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매체인 롬 카트리지에 비하면 사용하는 사람의 수가 적었다. 퀵 디스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 퀵 디스크는 플로피 디스크 보다 저렴한 가격에 데이터 레코더보다 빠른 속도를 자랑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플로피 디스크보다 느리고 용량도 적은데[49] 가격은 데이터 레코더보다 비싸다는 이야기가 되다보니 포지션이 좀 애매했다. 게다가 퀵 디스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느렸다. 초기에는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보다 많이 보급되었지만 결국 이러한 이유로 MSX2 시대쯤 가면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에 밀려나 퀵 디스크 드라이브는 보기 어려워졌다. 이렇게 생겼다.

요즘에는 거의 쓰이지 않지만 과거에는 CD나 DVD에 데이터를 기록하는 과정을 일컬어 '굽는다'라는 표현이 일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굽는다'는 표현이 MSX 시절에도 있었다. ROM을 기록하거나 재기록할 때 영어로 'burn a ROM'이라는 관용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국과 서유럽에서 시작된 용어가 한국에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MSX 시절, 게임을 복사할 때 쓰는 ROM으로 EPROM을 사용했고 롬 기록기(ROM writer)로 게임을 무단 복제해서 판매했는데 그 시절에도 통용되던 용어였다.

놀랍게도 MSX는 오락실에도 설치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아케이드 기판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들여놓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훗날 슈퍼 패미컴, 메가 드라이브 같은 게임기에 타이머를 달아 동전을 투입해 시간제로 운영하던 형태의 원조이다. 어찌보면 '일정 금액으로 일정 시간 컴퓨터를 임대하여 사용한다'는 개념은 오늘날의 PC방과도 맥락이 닿아있다. 오락실에 설치된 것은 거의 상당수가 대우 DPC 시리즈였으며, 금성사 FC-80도 어느 정도는 보였고, 삼성전자 SPC-800은 매우 보기 힘들었다. 실제 MSX1 시절 보급율이 대우-금성-삼성 순서였던 것도 관련이 있을 듯.[50] 재믹스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게임을 할 때에도 키보드 입력이 필요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인지[51] 재미있게도 아케이드 캐비넷에 조이스틱만 노출시킨 형태가 아니고 컴퓨터 본체의 키보드 부분이 직접 드러나게 설치를 해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방향키는 키보드 우측에 있다보니 컴퓨터 방향키에 익숙하지 않은 유저들은 양손을 서로 교차시켜서(...) 왼손으로 캐릭터 조작을, 오른손으로 버튼 조작을 하려 하는 경우도 있었다.

MSX2로 넘어오자마자 3사 중 삼성전자와 금성사는 MSX 노선을 완전히 포기하였고[52] 유일하게 남은 대우전자에서 1986년 IQ-2000(모델명 CPC-300)이라는 명칭으로 MSX2 규격의 컴퓨터를 발매하였다. IQ-2000은 남미, 아랍에도 교육용 컴퓨터로 다수 수출되어 인터넷에서 MSX 관련 정보를 수집하다 보면 IQ-2000에 대해 다루는 남미, 아랍쪽 글이 의외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MSX 시장의 끝물에는 대우전자에서 일부 게임을 정식 수입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서 재미나 등에서 판매한 복제팩에 비해 비싸 팔리지 않았고 대우전자 측에서도 MSX가 점점 몰락해 가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지면 광고를 요란하게 때린 데 비해 카트리지의 출고량 자체가 극히 적어 실제로 대우전자 정품팩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1987년 대우전자에서 마지막으로 발매한 8비트 컴퓨터 X-II(모델명 CPC-400/S)는 키보드 분리 데스크톱 PC 외형에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내장, 미려한 완성형 명조체 한글[53]/한자, 동영상 캡처 기능(!),[54] 비싼 가격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복각판을 제외하면 사실상 한국산 MSX의 최종 테크였다. 1985년 MSX2가 발매되었을 당시 일본에서는 경쟁기종들이었던 PC-8801, 샤프 X1turbo, MZ-2500 등과 마찬가지로 '보다 PC 다운' 외형(분리형 키보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내장)을 한 고가형 라인(대표적으로 소니 HitBit F700, JVC HC-95 등)들이 제법 나왔었다가 87년께 쯤에는 거의 사라지고 일체형 모델이 다시 일본 MSX 시장의 주류가 되는데 이 시기 일본 고가형 라인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기종으로 보기도 한다. 디지타이즈/슈퍼임포즈 기능 내장 역시 이 시기 고가 라인의 유행이었다.

1987년 발매 당시 정가는 CPC-400이 65만원, CPC-400S가 78만원이었다. 이는 CPC-300의 2배 이상에 육박하는 가격으로 당시 물가를 고려하면 매우 고가였다. 다만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1개를 내장하고 있었는데, 이를 단품 외장형으로 사려면 거의 30만원에 가까운 추가 지출을 요구했기 때문에,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반드시 사용한다는 조건으로는 CPC-400이 CPC-300보다 비싸다고 할 수 없었으며 디자인이나 공간 활용 등 모든 면에서 X-II의 압승이었다. X-II를 살 수 있는 예산을 가진 사람이 이를 마다하고 굳이 IQ-2000을 고를 만한 상황으로는 모니터 대신 TV를 사용하여 X-II의 디자인과 어울리지 않거나, 흰색 모니터를 보유중이라 외관 색상이 맞지 않을 때 정도인데 X-II를 살만한 예산이 되는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할 일이 없어서.. 요컨대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반드시 사용한다는 조건하에서는 둘 중에서는 CPC-400이 사실상 무조건 나았기 때문에 파업 등으로 물량이 없는 경우[55], 외부 기억장치가 필요없거나 관련 내용에 무지했던 경우, 그리고 MSX가 정말 갖고 싶었으나 예산이 부족했던 경우에나 구기종을 샀다. 전술했듯 IQ-2000+외장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조합의 가격은 X-II 본체 가격과 비교하면 약간 싼 정도여서 예산이 부족해서 IQ-2000을 샀다면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사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X-II 발매 이후에 IQ-2000이 바로 단종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공존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밖에도 완성형 명조체 한글인 한글 3.0은 그래픽 모드와 더럽게 느린 스크린 9(단, WIDTH 64 이하로 설정해야한다)에서만 쓸수 있다는 한계는 있지만 SPC-1500에 비견할 만한 미려한 글꼴로 호평을 받았다. 다만 한글의 출력 속도 면에서는 기존의 조합형인 한글 2.0과 별 차이가 없었으므로 결국 빠른 한글 출력을 위해서는 정내권씨의 램상주 한글이나 SAS 한글카드 같은 애드온 소프트웨어가 필요했던 것은 IQ-2000과 마찬가지. 분리형 키보드에 블랙 바디를 채용한 미려한 하우징도 당시로서는 꽤 평이 좋았다.

거의 끝물이던 1988년에 X-II를 구입하려다 마침 대우전자 파업으로 구하지 못해 IQ-2000을 사고 '피눈물"을 쏟은 매니아들이 있다. 이게 왜 피눈물이냐 하면, 얼마 안 가 정부가 16비트 컴퓨터를 교육용으로 지정하면서, 100만원 대 후반에서 슬슬 내려가던 16비트 컴퓨터 IBM PC 호환기종의 가격이 폭락해 훨씬 빠르고 용량 큰 IBM XT가 본체+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기준으로 IQ-2000기반 컴퓨터와 별 차이가 없게 됐기 때문이다.[56] 학교 컴퓨터부에서 바로 외면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는데, 그렇다고 X-II처럼 최종 테크 자부심이나 하드웨어 차별성이 있지도 않았으니... 그래서 2010년대 기준으로는 수집가들이 보유한 제품도 대부분 X-II이고 IQ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보기 어렵다.

어차피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었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1989년 7월 4일에 각급 학교의 교육용 PC 사업의 기종 선정 과정에서 16비트 PC가 선정되고 8비트 PC가 탈락하면서 한순간에 몰락하자, 대우전자를 포함한 PC 메이커들이 적극적으로 8비트 PC에 대한 보상 판매를 실시하며 기존 보급 물량도 빠르게 사라져갔다. 역설적으로 게임기였던 재믹스만이 대격변의 혼란에서도 살아남았지만 이것도 삼성 겜보이와 대만산 패미클론의 대히트로 내리막길을 걷다가[57] 1991년 삼성 수퍼겜보이, 현대 슈퍼컴보이를 중심으로 하는 16비트 게임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함과 동시에 결정타를 입으면서 시장 수명을 다했다.

한편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우전자에서도 MSX2+를 개발하였으나 시장성 문제로 출시 계획을 무기한 연기해 결국 출시가 되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X-II를 업그레이드하러 대우전자를 방문한 유저에게 엔지니어가 MSX3 규격 후보 시제품을 보여주었다는 루머도 있었는데, 게이머즈 2020년 4월호에 실린 전 대우전자 엔지니어 강병균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사실이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원래 개발하기로 한 것은 MSX2의 성능 강화 모델인 가칭 MSX3으로, CPU와 VDP를 Z80B과 V9958으로 업그레이드하였으며 기기 오른쪽에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장착하였고 한글 처리에 최대한 VDP를 이용하여 표시 속도를 향상하는 등의 개선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재믹스 터보도 마찬가지로 성능 강화 모델로 기획되었기 때문에 Z80B과 V9958을 이용할 수 있었던 듯 하다. 자세한 내용은 '아이큐 2000'과 '재믹스'를 만든 대우 MSX의 아버지를 만나다.를 참조하자.

5.2. 소프트웨어

MSX는 기본적으로 MSX BASIC을 내장하고 있으며, 운영 체제로 MSX-DOS가 있었고 워드 프로세서, PC통신, 그래픽 편집, 프로그래밍 등 일반 PC로 하는 일은 거의 다 할 수 있었던 명실상부한 개인용 컴퓨터지만 확장 카트리지 슬롯에 롬 카트리지를 꽂을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그 특성을 활용한 재믹스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MSX 호환 게임기가 나왔던 탓에 당대에는 반쯤은 게임기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게임 성능이나 소프트웨어의 다양성은 당대 한국 컴퓨터 기종 중에서 가장 앞섰다. 사실 현재의 PC들도 이걸 가지고 게임 밖에 안하는 사람들한테는 말 그대로 게임기이니 이러한 맥락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애플 II는 '개인이 소지하고 사용하는 컴퓨터'라는 관점에서 시작했지만 MSX는 가전 제품의 연장선 상으로 출발했다. 실제로 MSX 규격에 참가했던 업체들은 기성 컴퓨터 기업들이 아니라 소니, 산요전기, 마쓰시타와 같은 가전 기업들이었다. 애플 II의 개방성과 조잡한(...) 기본 성능은 많은 확장 카드와 소프트웨어 개발로 이어졌지만, MSX는 애플 II와 같은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당대에 애플 수준에 이른 PC가 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미국에서 쏟아진 다양한 애플 II 실용 소프트웨어는 한국에도 유입되었고 한국 개발자들에게도 이러한 성향은 영향을 미쳐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를 쓴 가정 신문 출판 소프트웨어 '독립신문'이나 워드 프로세서 '중앙한글' 등이 나와 유저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MSX의 실용 소프트웨어는 교육용 컴퓨터 선정에 대비한 CAI/CAE 소프트웨어 개발 정도에 쓰였고, 일찍 보급된 학교에서는 성적 처리에 활용한 정도였다.

물론 소프트웨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플 II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있을 만큼은 있었지만 한국 MSX 환경이 이를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는 관점이 옳을 듯 싶다.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에는 '디스크 BASIC'이라 부르는 BASIC 인터프리터가 내장되어 있었고 공식 운영 체제로 MSX-DOS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뿐더러 꽤 많은 소프트웨어가 나와 있었다. MSX-DOS는 나중에 아스키에서 MSX-DOS2까지 나왔고 툴 디스크까지 하면 MS-DOS와 비슷했지만, MSX가 게임용으로 주로 쓰였던 데다 정품 패키지에 세트로 들어있는 확장 카트리지가 필수적이어서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MSX-DOS용으로는 MSX 플랜(멀티플랜의 MSX 이식 버전) 같은 스프레드시트나 dBase II 같은 DBMS, M80 어셈블러[58] 볼랜드의 터보파스칼 3.0, MSX-C, PROLOG, FORTRAN, COBOL 같은 다양한 언어의 컴파일러 등 CP/M의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MSX로 이식했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16비트 컴퓨터로 먼저 접한 사람이 대다수이며 나중에 MSX로 이런 소프트웨어들이 다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왕년의 MSX 유저도 종종 있다.

그러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본체보다 비싼 가격 탓에 한국에서는 보급률 자체가 낮아 MSX-DOS 환경은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 3.5인치 일체형 2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39만 8천원으로 IQ-2000 본체 가격 34만 5천원보다 비쌌다. 심지어 IQ-1000 시판 시기에 나온 5.25인치 2D만 지원하는 싱글 외장형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49만 9천원, 더블 외장형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무려 79만 9천원이었다!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너무 비싸서 데이터 레코더, 퀵 디스크 드라이브 같은 저속 미디어를 울며 겨자 먹기로 사용하거나, 심지어 종이에 출력한 기계어를 한 땀 한 땀 직접 입력하는 눈물겨운 노가다를 하는 유저들도 많았다. 애플 II의 경우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가격이 MSX의 그것보다 훨씬 쌌기 때문에 비교적 많이 보급되었다. 원인은 MSX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양면을 읽을 수 있도록 헤드를 하나만 구성한 것과 다르게 애플 II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좀 더 저렴하게 헤드를 하나만 구성해 단면만 읽을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MSX의 업무용 환경의 한계점은 나름대로 극복하려는 시도도 없지는 않았으나 결국 시장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못했다.

사양 자체가 업무용으로 활용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는데, 일단 한글 처리에 약점이 많았다. 우선 해상도가 낮다 보니 텍스트 화면에서 뿌려줄 수 있는 한글이 16×12~20×12문자 정도. 한글은 세로로 8~12×16 픽셀을 점유하다보니 4~6×8 픽셀을 사용하는 알파벳에 비해 화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을 수밖에 없고 표시할 수 있는 글씨 수가 적었다. 이 점은 애플 II도 마찬가지긴 했다. 텍스트 모드에서의 한글 처리는 빠르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나마 봐줄 만은 했는데 글꼴 모양은 그리 보기 좋지 않았다[59]. IQ-2000/X-II에서는 높은 해상도에 비교적 미려한 글꼴을 보여주는 스크린 9 모드가 추가되었으나 보기에는 텍스트 모드처럼 보이지만 대우전자가 스크린 6 고해상도 그래픽 모드에 인터레이스 모드를 조합하여 독자적으로 만든 거라 당대의 16비트 PC와 비슷한 80×24문자 표시를 구현할 수는 있었으나 그것을 대가로 매우 느린 속도를 감수해야 했다.[60] 정말로 토나올 정도로 느린데다 인터레이스 모드의 특성상 화면이 빠르게 깜빡거리는 것은 덤. 이렇다 보니 대우에서 만든 한글 워드 프로세서에서도 이 모드를 사용하지 않고 스크린 7 그래픽 모드(512×212/16컬러)에서 40x12행으로 한글 바이오스를 통해 한글을 그려서 출력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스크린 9의 느린 속도보다는 나았지만 이것도 원활하게 문서를 작성하기엔 조금 느렸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해주는 SAS 한글 카드도 나오긴 했지만 보급률은 높지 않았다.

나중에 정내권씨의 한글 램 상주 소프트웨어가 나왔는데 엄청 빨라서 당시 16비트 IBM PC의 한글 출력 속도에 비견할 정도였다. 느린 걸로 악명 높은 세로 스크롤도 VDP를 사용한 하드웨어 방식[61]으로 개선해 매우 빨라졌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정부가 IBM PC 호환 기종 컴퓨터 보급으로 길을 정한 이후라 대세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MSX용 프린터와 모뎀, 마우스, 플로터 등도 나왔고 나중에는 교육용으로 로고 언어를 조합해 간단한 프로그래밍으로 동작시키는 하드웨어 키트도 나왔지만 무척 비쌌기 때문에, 사용자 대부분은 컴퓨터 기본으로 포함된 조이스틱과 카세트테이프 데이터 레코더, 그리고 롬 카트리지로 판매한 학습용, 게임용, 시스템 유틸리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사용하는 선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겨우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추가하는 정도였다. 덕분에 이런 하드웨어를 사용하는 BBS나 PC 통신, 개인 출판 소프트웨어와 워드 프로세서, 그래픽 프로그램은 소개되어도 인기를 끌지 못했다. 소프트웨어 유통 상의 문제와 함께 다양한 주변 기기가 비쌌던 이유로 MSX의 용도를 게임기 내지 BASIC 언어 교육용으로 한정시켰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MSX는 반쯤 게임기 취급을 당했다.

게임 성능이 뛰어났던 기종이니만큼 MSX로 국산 게임을 만들려는 시도도 당연히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1987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변변한 게임 회사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던 시대여서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있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혼자, 혹은 두세 명이 모여 게임을 만들고 이걸 단골 소프트웨어 가게[62]에 가져가 사장님의 도움을 받아 퍼블리싱...같은 오늘날로 치면 인디게임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대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MSX로 자체 제작 게임을 가장 많이 내놓은 곳은 역시 재미나였고 FA 소프트, 으뜸 소프트, 프로 소프트, 토피아 등 MSX 게임을 복돌이 유통했던 업체들은 1988~1989년쯤 되면 자기네 이름 달고 나오는 게임이 한두 개 씩은 있었다. 재미나의 작품에 대해서는 문서를 참고하기 바라며, 그 밖에 유명한 작품은 토피아의 '대마성', 으뜸 소프트의 '악마지대', 미키소프트의 '꾀돌이(게임)' 등이 있었으나 어느 것이나 밀려 들어오는 일본제 게임에 다 묻혔다.

5.3. 출판물

MSX 관련 서적은 주로 일본 서적을 번역해 출판했다. 아스키의 MSX 어셈블리어 코드[63]도 나왔고, 'MSX2 테크니컬 핸드북' 같은 명저가 해적판(...)으로 번역되어 나오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당시 여건 상 번역의 질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지경사 같은 어린이 서적 전문 출판사에서도 MSX 서적을 내놨는데 주로 BASIC, BASIC+기계어 코드 조합, 순수 기계어로 제작한 게임의 코드를 실은 책들이었다. 당시의 IT 꿈나무(...)들은 이런 책을 보면서 직접 코드를 입력해서 게임을 즐기고는 했다.

또한, 전집 학습만화 중 '컴퓨터' 나 '마이컴' 편, 혹은 어린이용 컴퓨터 학습만화 등 중에서 일본 책을 번역한 것들 중에는 MSX를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들이 많았다. 얄궂게도, 수명이 긴 책이라는 특성상,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시간차, MSX가 한국에서 먼저 쇠퇴한 것 등의 원인으로 인해 MSX는 이미 이전 세대 어른들의 추억이 되었고 어린이들은 IBM PC를 접하면서 성장하고 있는데 호환되지 않는 명령어나 키보드 구조 등을 언급하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한국 MSX 문화에 영향을 크게 준 잡지라면 현재도 나오고 있는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와 1998년에 폐간된 '월간 마이컴'의 전신인 '월간 컴퓨터학습'을 들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는 아예 애플과 MSX로 나누는 방식으로 편집했다. 컴퓨터학습도 당시의 8비트 PC를 다룬 종합 잡지로서 MSX를 비중있게 다루어 MSX 사용자들의 필독서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1989년 7월 4일에 교육용 PC 사업으로 16비트 IBM PC 호환 기종으로 결정되면서 마이크로소프트웨어는 지면을 IBM PC 중심으로 개편하였고[64] 컴퓨터학습은 1990년 '마이컴'으로 제호를 바꾸면서 16비트 PC를 중심으로 지면을 전면 개편하고 애플/MSX의 8비트 지면은 크게 축소했다가 결국 1990년대 중반 폐간되었다. SPC는 제호가 바뀌자 마자 내다 버렸다 컴퓨터학습을 출판했던 민컴에서는 MSX 프로그래밍 기법을 담은 서적인 'MSX 파워업 테크닉'과 '테크뱅크'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일본 서적들에 못지 않은 알찬 내용으로 MSX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65]

MSX만을 다루는 잡지인 'MSX와의 만남'이라는 잡지가 1988년부터 나왔는데, 가격은 저렴했지만 지면도 적고 편집 수준도 열악했다. 좀 가혹하게 말하면 아마추어의 동인 출판물 수준으로 스태프 중에 전문 출판인이 없었던 것 같다. 기사 내용도 일본 잡지 기사의 번역물이 많았고 심지어는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나 컴퓨터학습 등 타 잡지의 기사를 무단 전재한 사례까지 있었지만 저작권 개념이 빈약했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덕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 필진의 부족을 독자 투고로 메우는(...) 빈곤하고도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독자 투고가 의외로 알찬 정보를 많이 제공했다. 독자 투고가 알찼던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웨어나 컴퓨터학습도 비슷하긴 했지만 이쪽은 독자 투고의 비중 자체가 매우 높았던 덕에 전문성을 지닌 앞의 두 잡지와는 또 다른 독특한 동인스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2021년 'MSX & 재믹스 퍼펙트 카탈로그'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20년 일본의 게임 개발자 겸 도서 작가 마에다 히로유키(前田尋之) 씨가 출간한 MSX 퍼펙트 카탈로그(MSXパーフェクトカタログ)라는 책을 번역한 것으로, MSX 기종 컴퓨터에 관한 내용과 함께, MSX 원년인 1983년부터 MSX가 완전히 사양길에 접어든 1994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발매된 1,400종의 MSX 소프트웨어(대부분은 게임)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어 번역본에는 추가로 IQ-2000 등 한국에 발매된 MSX 기종 컴퓨터들의 관한 내용과 한글화된 일본산 MSX 게임과 한국에서 만들어져서 발매된 MSX 게임에 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MSX & 재믹스 퍼펙트 카탈로그, MSXパーフェクトカタログ (일본어 원서)

5.4. 홈브루 프로그래밍

개인 단위의 아마추어 프로그래밍은 상술한 대로 BASIC, BASIC+기계어 코드, 또는 순수 기계어 방식이었는데, 기계어 난이도가 워낙 높다보니 프로그래밍 좀 한다는 IT 꿈나무들은 대부분 BASIC을 위주로 사용했다. BASIC으로 유저들이 만든 게임이나 유틸리티 프로그램들은 국내에서는 컴퓨터학습이나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일본에서는 MSX FAN이나 MSX 매거진, I/O 같은 잡지에 소스 리스트를 투고하는 형식으로 공개되었다. 이렇게 잡지 투고란에 실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싶은 사람들은 BASIC 소스를 보고 직접 코드를 타이핑해서(!) 사용하고는 했다. 일본에서는 이런 잡지투고 소프트웨어를 모으거나 별도의 기획으로 단행본을 내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런 단행본이 국내에 해적판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국산 MSX에는 없는 CALL KANJI 같은 명령이나 月火水木金土日 문자를 보고 멘붕하는 것은 덤

초기에는 주로 순수 BASIC 위주의 프로그램이 투고되었지만 속도 문제 및 상용 프로그램과의 품질 차이 등의 한계를 겪은 일부 유저들은 어셈블리어를 배워서 BASIC 코드에 속도가 필요한 부분에 기계어 코드를 혼합하여[66] 구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정도가 거의 학생 유저로서는 한계치였다. Z80 어셈블리어만으로 코딩을 해서 투고를 해서 어셈블리어 소스리스트를 공개하는 실력자도 아주 없진 않았지만 그 정도 실력이 있는 유저는 잡지 투고에서도 눈에 띄는 실력자 내지 준필진급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 이런 괴수 사람들이 모여서 냈던 책이 당시 MSX 유저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MSX 파워업 테크닉이다.

고급 언어 프로그래밍도 쉬운 것이 아닌데 굳이 왜 불지옥 난이도인 기계어까지 동원해야 했는가 하면, MSX 기종에서 채택한 BASIC은 기본적으로 인터프리터 방식이라 당시의 컴퓨팅 파워로는 속도가 많이 느렸기 때문이다. 요즘에야 인터프리터 언어로도 충분히 실용적인 성능이 나오는 시대가 된지 오래지만 꼴랑 3.58MHz의 Z80A에서는 번역과정에서 생기는 오버헤드의 비중이 매우 컸다. 당시에는 MSX(를 포함한 대부분의 8bit PC) 환경에서의 고급언어에 대한 정보 자체가 별로 없어서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고급언어 환경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건 아니어서 MSX-DOS에서 이미 CP/M용으로 나와있는 C나 PASCAL, LOGO, FORTH, FORTAN, COBOL 같은 고급언어 컴파일러를 그대로 돌릴 수 있었고 아예 MSX로 새로 만들어진 컴파일러도 제법 나와 있어 정보와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면 고급 언어를 사용할 수 있긴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일단 컴파일러를 구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고 그 이전에 본체 가격과 맞먹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필수적이라는 것부터가 엄청난 진입장벽이었다. 게다가 부자라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갖추고 컴파일러를 구했다손 쳐도 당시 컴파일러의 한계와 Z80의 느린 성능으로 인해 생성하는 코드의 최적화면에서는 어셈블리어로 직접 짜는 것에 비해 오버헤드가 좀 있어 퍼포먼스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성능이나 개발환경을 고려하면 선택지는 어셈블리어 뿐인데 역시나 고급언어들에 비해 낫다는 것이지 어셈블러도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없이는 접근성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67] 보조기억장치가 잘해봐야 데이터 레코더 뿐인 학생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핸드어셈블[68] 밖에 없었다. 그래서 개인 프로젝트 수준의 게임에서는 끔찍하게 느린 대신 접근성이 좋은 BASIC으로 프론트엔드 및 기계어를 읽어들이는 부분을 구현하고, 나머지 부분은 기계어로 작업하는 것이 그나마 접근성도 살리고 속도 문제도 덜 겪는 방법이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속도를 요구하는 부분만 C++로 만들고 나머지는 Python이나 Ruby 같은 고생산성 언어로 빠르게 만들어 합치는 것으로 속도와 생산성을 다 챙기는 것과 비슷한 접근법이다.

하지만, 어셈블리어 그 자체부터가 저수준 언어라서 하드웨어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하고 기본적으로 구사하기 매우 어려운 언어인데 요즘처럼 통합 개발 환경이나 디버거 같은 게 있던 시절도 아니라 이걸 핸드어셈블하고 디버깅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보니 대다수의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프로그래밍 꿈나무들은 BASIC의 느린 속도를 감수하고 그 속도 안에서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만족하거나 잡지에 실린 끝없는 기계어 코드를 하릴없이 입력하고 있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타가 없기를 바라면서.(...) 옛날 잡지에 수십 페이지에 걸쳐 깨알 같은 16진수 코드(덤프리스트)들이 줄줄이 실렸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69] 어셈블리어 소스리스트를 학습 차원에서 같이 실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지면상 그냥 기계어로 어셈블한 결과물인 덤프리스트만 실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입력할 때 생긴 오타는 눈알이 빠져라 검토해서 근성으로 찾으면 되고, BASIC 코드가 잘못된 것은 손수 디버깅하면 되었지만, 기계어 코드에 원 저작자가 놓친 버그가 있거나 인쇄 자체에 오탈자가 있는 경우는 답이 없었다.(...) 당시는 출판 과정도 지금처럼 DTP가 아니라 편집자가 손으로 하던 시절이고, 편집자가 보기에도 기계어 코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숫자의 나열일 뿐이라 헷갈리기가 쉬워서 소스 코드중에 일부가 누락되거나 오탈자가 나는 일이 매우 흔했다. 심지어는 몇 페이지가 통째로 누락되었는데도 알아챈 사람이 거의 없었던 일도 있었다. 아무튼 수일에 걸쳐 손수 입력한 코드가 말을 듣지 않을 때의 절망감은 지금으로서는 비슷한 예를 상상하기도 어렵다. 어렵게 빌린 초레어 절판 도서를 열심히 읽고 있었는데 결말 부분이 찢겨져나간 것을 뒤늦게 발견했을 때 정도? 체크섬 등을 도입해 문제를 완화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사람의 입력에 의존하는 이상 문제를 근본적으로 방지하기는 어려웠다.

당시의 잡지나 단행본에서 게임 소스를 실었던 목적 중 하나는 실력있는 다른 사람의 코드를 따라 입력해보고 스스로 내용을 수정해가며 프로그래밍 실력을 늘리라는 의도였지만 BASIC이나 어셈블리어 소스리스트가 아닌 기계어 덤프리스트를 보고 기계어 코드를 입력하는 것만으로는 프로그래밍 실력이 늘 수가 없다. 16진수로 적혀있는 개개의 코드가 하는 일을 알기도 어려울뿐더러, 이 코드가 일정하게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을 반복적으로 입력해봐야 인간이 패턴을 인지하고 학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람의 언어와 사고를 가능한한 따라가려고 한 BASIC과 같은 고수준 언어는 설명을 통해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기도 하고 보다 보면 반복되는 패턴이 눈에 익게 되지만 기계어는 애초에 기본 지식이나 별도의 설명 없이는 봐도 이게 무슨 명령어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을 뿐더러, 컴퓨터 내부 구조에 대한 지식까지 요구하기 때문에 기계어 코드를 실은 잡지 기사들도 어떻게 그 코드가 나왔는지는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했다. 굳이 이 코드가 하는 일을 알고 싶다면 디스어셈블러를 돌려서 원래의 어셈블리어 코드로 복원하고[70] 소스를 분석하는 것이지만 일단 디스어셈블러가 필요하다는 문제부터가 있고 그 정도까지의 실력에 다다르는 것 부터가 진입장벽이 꽤나 높은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저들은 덤프리스트를 입력해서 결과물만 얻는 수준에서 만족했다.

물론 굳이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역시 게임 때문. 게임은 하고 싶은데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고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비싸고 카세트테이프는 복제가 쉽지 않으니[71] 남은 건 빌린 잡지의 코드를 근성으로 입력하는 것 뿐이었다. 당시 이런 경험을 한 8비트 컴퓨터 유저들은 거의 대부분 보조 기억 장치(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데이터 레코더 등)는 없었던 MSX 유저들이었다. 애플 II의 경우 본체에는 기본으로 보조 기억 장치는 없지만 MSX와 달리 일단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단면이었고, 세운상가대만 출신의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저렴한 호환 제품을 다수 내놓은 덕분에 거의 MSX용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1/3값으로 쌌던 관계로 대부분의 사용자가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갖추고 있었다. 애플 II도 데이터 레코더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에 밀려 거의 사용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SPC-1000/1500의 경우는 아예 데이터 레코더가 본체에 내장되어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열심히 MSX 프로그래밍에 매진하던 IT 꿈나무들이 교육용 PC가 16비트 IBM PC 호환기종으로 선정되고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기본으로 달고 나오자 상당수가 프로그래밍을 접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X-II가 출시되고 MSX-DOS와 플로피 디스크가 흔해진 시점에서는 비록 대부분 불법 복제였지만 컴파일러도 흔해진 관계로 C등의 고급 언어 구사자들이 조금씩 늘어났고[72], 이들은 IBM PC 호환 기종으로 대세가 바뀐 이후에도 큰 문제없이 프로그래밍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BASIC을 사용하던 유저들도 IBM PC 호환기종MS-DOS 환경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었던 GW-BASIC을 통해 BASIC 프로그래밍을 근근히 이어가곤 했지만[73] GW-BASIC은 인터프리터 자체보다도 IBM PC 호환기종의 한계 때문에 MSX BASIC에 비해 게임 프로그래밍에는 쓸 게 못됐다. IBM PC XT 호환기의 CPU인 8088의 깡성능이 MSX의 Z80 CPU에는 비할바가 아니라 MSX BASIC보다는 훨씬 빨랐지만 그래도 느리긴 매한가지고 사무용 지향이었던 IBM PC의 한계로 스프라이트 기능은 커녕 기본적인 그래픽, 사운드 관련 함수들에도 한계가 커서 게임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초기에는 이걸로라도 그럴듯한 게임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도 있고 잡지 투고도 어느 정도는 있었으나 결국 문법상 유사성이 있고 컴파일러를 갖추어 속도면에서도 우월한 QuickBASIC으로 옮겨타서 구조적 프로그래밍을 접하고, 이 지식을 바탕으로 1990년대 들어 주류로 올라서기 시작한 C 언어를 배워 옮겨가는 테크를 타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쪽에는 'MSX 베이식 군'(MSXべーしっ君)이라는 BASIC 컴파일러도 있어서 제법 사용되었으나 국내에는 들어오지 않아 당시에는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반적인 컴파일러처럼 바이너리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MSX BASIC으로 작성한 코드를 그대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는데 요즘으로 치면 JIT 비슷한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MSX 베이직군 롬 카트리지을 꽂고 BASIC 코드를 실행하는 것만으로 고속화가 되는 신박했던 물건. 다만 모든 명령이 컴파일에서 호환되는 게 아니다보니 베이식 군으로 고속화할 부분은 CALL TURBO ON 이라는 명령으로 명시해주고 고속화할 수 없는 영역은 CALL TURBO OFF로 선언해서 기존의 MSX BASIC 인터프리터로 해석하고 하는 번거로운 방법을 거쳤다고 한다. 아무래도 제대로 만든 기계어 코드에 비하면 느렸지만 기존의 MSX BASIC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라서 일본에서 MSX로 홈브루 프로그래밍을 하는 유저들 사이에서는 꽤 인기가 있었다. 일부 MSX 기종의 경우 이 베이식 군 컴파일러를 내장한 경우도 있었을 정도. MSX BASIC vs 베이식 군 vs 어셈블리어 속도 비교 영상

5.5.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MSX

5.5.1. 대우전자

MSX1 규격의 DPC 라인업(DPC-100, DPC-180, DPC-200)과 CPC 라인업(CPC-200), MSX2 규격의 CPC 라인업(CPC-300, CPC-300E, CPC-400, CPC-400S)이 있다. DPC 라인업은 '아이큐 1000'으로 불렸고, MSX2 규격의 CPC 라인업 중 CPC-300은 '아이큐 2000', CPC-400은 'X-II'로 불렸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우전자의 MSX 컴퓨터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그 외에도 대우전자는 위에서 설명한 재믹스 시리즈, 코보(MSX2 기반 유아용 컴퓨터) 등 MSX 기반의 파생 기종도 여럿 발표하였다. 해당 기종에 대한 설명은 링크된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5.5.2. LG전자(당시 금성사)

5.5.3. 삼성전자

6. 현재의 MSX

현재는 완전히 단종되었지만, 일부에서 장잉취미로 나름 현대의 기술을 적용하면서 즐기고 있다. 예를 들면 메모리 카드를 대용량 디스크처럼 이용하는 CF-IDE나 MMC/SD, OPL4 사운드를 지원하는 MoonSound, V9990을 탑재하여 아케이드 기판급의 그래픽을 구현하는 GFX9000 등이 있다.

나름의 사용자층이 오래도록 유지되었던 만큼 MSX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도 많았고, 개중에는 니시 카즈히코도 있었다. MSX와는 전혀 연관 없는 키리쿠와 마녀게임보이 컬러판 게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숨겨진 개발자 메시지를 읽어보면, 니시 카즈히코가 2001년 4월 네덜란드 MSX 미팅에서 자신의 MSX 호환 컴퓨터 프로젝트[77]를 발표한 것에 감사를 표하며 MSX3를 꿈꾸는 개발자가 있었다.

2003년부터 아마추어 MSX 게임 개발 콘테스트를 MSXdev라는 곳에서 주최하고있다. 매년 수 많은 MSX 게임이 새로 개발되어 참가하는데, 생각보다 양질의 게임들이 많으므로 한 번 해보는 것도 좋다. 게임은 모두 공개되어 있고 온라인에서 바로 플레이할 수도 있다. 여담으로 이 콘테스트는 매년 참가 게임의 기준을 변경해서, MSX1 최소사양에서 동작하도록 하는 요구사항을 넣거나 또는 추가 하드웨어(위에서 언급된 V9990 같은)까지 다 허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MSX1 호환 게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퀄리티의 게임이 나오기도 한다.

2007년에는 FPGA 기술을 이용하여 원칩에 MSX의 모든 기능을 때려넣은 MSX 키트인 '1칩 MSX'가 발매되기도 하였다.(1Chip MSX Wiki) 말하자면 일종의 하드웨어 에뮬레이터. 이것도 사연이 좀 있는 물건인데, 꽤 오래 전부터 일본의 MSX 동인인 '츠지카와 카즈히로'라는 사람이 PLD를 기반으로 개발하고 있던 ESE-MSX System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ESE-MSX System의 최종판인 3판의 설계를 바탕으로 아스키가 라이선스를 허용하여 합법성을 획득하고 D4 엔터프라이즈를 통해 실물을 발매한 것이 이 1칩 MSX. 기본적으로 MSX2 사양이지만 FPGA의 특성상 칩의 설계를 재프로그래밍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차후 MSX2+/turboR도 지원할 수 있다. 실제로 2012년, 스페인의 개발자 KdL이 실제로 MSX2+를 지원하는 업데이트를 발표했다.[78] turboR까지는 원칩 MSX에 쓰인 FPGA칩(Altera Cyclone)의 게이트 수 제약 때문에 현실적으로 조금 어렵다는 개발자의 발언이 있었다는 듯. 이 키트를 재프로그래밍 해서 다른 기종(샤프 MZ-700)을 구현한 사례도 있다. FPGA의 특성상 만들 능력만 된다면 칩이 지원하는 게이트 수 범위 안에서 어떤 하드웨어든 구현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판매 당시에도 광고 문구에 '당신만의 MSX3를 만들 수 있다'는 문구가 있었는데 아주 거짓말은 아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원칩 MSX의 원본 격인 ESE-MSX System의 VHDL 소스와 하드웨어 설계는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클론도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OCMC(One Chip MSX Clone)과 재믹스 네오가 대표적인 프로젝트. 재믹스 네오에 대해서는 재믹스 문서를 참조.

재믹스 네오를 네오팀에서 'IQ3000 큐티'라는 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관련 자료는 팬 사이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베이스는 재믹스 네오와 같은 ESE-MSX System3+KDL 펌웨어 기반이다. 스피커 및 키보드 내장형이며 RGB 모니터 혹은 LCD 등을 연결할 수 있는 커넥터도 내장되어 있다.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커넥터도 IQ2000과 같은 형태로 내장되어 있고, Zemmix Neo에서 파생된 모델이므로 주사선 생성 기능이 기본 내장되어 있다. 본인들의 말로는 키보드 내장형 MSX로는 세계 최소형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바이오스에도 대대적인 수정을 가하여 한글과 일본어가 동시에 지원되어 어떤 면에서는 실기 MSX보다 언어 호환성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한글용 프로그램과 일본어용 프로그램이 동시에 지원)

러시아의 개발사 'AGE Labs'에서도 2011년에 복각버전 MSX인 'GR8BIT'라는 제품을 제작했다.(#) 컴퓨터 하드웨어 학습용 키트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1칩 MSX에 비해 좀더 본격적인 것이 특징. 메인보드와 CPU 보드, IO 보드 등이 분리되어있으며 메인보드는 ATX 규격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일반 PC용 케이스와 전원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는 VDP가 V9938이라 MSX2 규격에 맞추어져있으나 일부 MSX2+와 호환되는 부분이 있으며 VDP를 V9958로 바꾸면 완전히 호환할 수 있다고 한다.

에뮬레이터도 잘 돌아간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에뮬레이터는 blueMSX로 상당한 호환성과 다양한 하드웨어 에뮬레이션을 제공한다. SDL 기반의 멀티 플랫폼으로 제작되는 에뮬레이터인 openMSX 역시 완성도가 높고 다양한 플랫폼을 지원하는 것이 장점이지만 인터페이스가 약간 불편해서 윈도 환경에서는 blueMSX보다는 덜 쓰이는 편이다. Marat Fayzullin이라는 개발자가 1994년부터 제작하고 있는 전통의 에뮬레이터인 fMSX 역시 유명하다. 안드로이드에서 구동되는 MSX 에뮬레이터도 있는데, 우선 fMSX의 안드로이드 포팅버전이 있고 blueMSX를 베이스로 개발한 MSX.emu라는 에뮬레이터도 있다. MSX.emu 쪽은 유료 앱이고, fMSX 쪽은 유료판과 무료판[79]이 있다. openMSX도 안드로이드에서 무료 앱으로 존재한다. 이외에도 paraMSX도 있다. MSX 개발자(!)들의 일반적인 평가로는 Z80 및 V9938/58에 대한 타이밍 정확도(Accuracy)는 openMSX가 훨씬 정교하며, 2024년 현재까지도 활발히 개발되는 거의 유일한 MSX 에뮬레이터로써 MSX 에뮬레이터를 고려할 때 먼저 openMSX부터 고려해보는 것이 추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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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PC 본체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키보드와 본체를 일체화 시키는 제품이 간혹 출현하고 있는데(#, #), 이런 제품들이 MSX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MSX를 접하지 못한 세대들은 노트북에서 화면을 떼서 쓰는 것이 아닌 노트북에서 화면을 버리고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키보드 일체형 PC는 코모도어 64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동세대 8비트 PC에는 흔한 형태였지만, 한국에서 저런 형태의 PC로 제일 유명했던 것은 역시 MSX일 것이다. 한국에서 동세대를 양분한 애플II 계열 역시 일체형이기는 했으나, 모니터를 올릴 수 있는 넓적한 본체 앞에 키보드가 튀어나온 형태라서 모습이 달랐다.

현대의 CPLD, FPGA 등을 이용한 다양한 주변기기가 개발되어 현재는 (제약은 있지만) 동영상, mp3, FLAC도 재생할 수 있다. MP3 재생 영상# 물론 MSX의 CPU는 MP3를 재생할 수 없는 성능이기 때문에 MP3 코덱이 내장된 확장 카트리지(동영상의 경우 MPX라는 카트리지)를 이용한 것이다.

2023년에는 IoT용 컴퓨터로 'MSX0 Stack'이라는 제품이 나왔다. ESP32 마이크로컨트롤러를 사용한 M5Stack을 기반으로 MSX 에뮬레이터와 MSX C, BASIC 컴파일러 등의 개발환경, 게임 2종을 수록한 제품이다. 개발에는 니시 카즈히코도 참여하였다. 발매는 D4 엔터프라이즈 # 이와 별개로 니시 카즈히코는 새로운 MSX3 구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2022년부터 SNS나 언론을 통해 간혹 언급되는 내용에 따르면 ARM/젯슨 나노 기반인 듯 하며# 스탠드 얼론 버전 외에 기존 MSX의 확장장비로 사용할 수 있는 버전 등도 구상하고 있는 모양이다. 4gamer 인터뷰

7. 게임

MSX/게임 목록 참조.

8. 관련 문서



[1] 발매 당시에는 Microsoft Super eXtended, MicroSoft X(cross) compatible 등의 이설이 있었고, 한때는 실제로 그것들 중 몇 가지가 공식적인 약칭이었지만 현재 MSX 어소시에이션에서 인정하는 공식 약칭은 니시 카즈히코의 발언에 따라 Machines with Software eXchangeability 뿐이다. 1985년 니시 카즈히코의 발언에 따르면, 원래 MSX는 MX 미사일에서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소프트웨어 호환 기계 따위는 나중에 지은 말이라고.[2] www.oldcomputers.net 사이트에 가 보면 1970~1980년대에 등장한 수십 종류 PC들의 향연을 볼 수 있다. 당연 여기 나온 기종끼리 소프트웨어가 전혀 호환되지 않았다. 게다가 당대에 나온 모든 PC를 언급한 것도 아니다.[3] 단적으로, 같은 5.25인치 플로피디스크를 쓴다고 하더라도 각 회사의 컴퓨터별로 디스크 드라이브가 별도인 것은 물론이고, 포맷하는 방식 자체가 아예 달라서 한 컴퓨터에서 사용한 데이터는 다른 방식의 컴퓨터에서 읽을 수 없었다.[4] 일단 NECPC-8801PC-9801이나 코모도어의 코모도어 64와 아미가처럼 세대나 목표 시장이 다르면 같은 회사 제품이라도 호환성이 없는 게 당연했을 정도였다. 좀 심한 경우로 샤프전자의 MZ시리즈와 X1시리즈는 같은 가정용 8비트 컴퓨터에 CPU까지 같은 주제에 사업부가 다르다는 이유로 호환성이 없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금성 패미콤과 삼성 퍼스컴의 동시대 발매된 모든 라인업이 전부 호환되지 않는다. 1983년 정부가 PC 보급 사업을 벌리면서 5개사를 선정했는데 그 5개사의 PC가 전부 제각각이며 서로 호환되지 않았다.[5] NEC, 후지쯔는 PC 이전부터 메인프레임과 산업용 미니 컴퓨터를 만들던 회사였고, 샤프는 그 시절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정신이 매우 강한 회사였다. 이 밖에도 메인프레임과 산업용 미니 컴퓨터를 만들던 히타치 또한 일찌기 자체 아키텍처의 PC를 만들었지만 점유율은 위 3사보다 낮았다.[6] 1982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컴퓨터가 선정되었듯이 당시에는 컴퓨터 붐이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었다.[7] 소니는 1984년 SMC-777에 컬러 팔레트 기능을 기본으로 탑재하는 등으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표현능력을 가진 SMC-777C를 출시했지만 이마저도 극심한 소프트웨어 부족이 발목을 잡아 망했고, 이후 소니는 MSX에 집중하게 되었다.[8] 실은 이 날 상호간 회동을 가져 니시 카즈히코가 하드웨어 규격을 공개하고 로열티를 별도로 받지 않기로 양보한 덕분에 나온 결과였다.[9] PC 문화는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시작했고, 이후 일본에 상륙한 뒤,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로 전파되었는데, 일부 유럽 국가들은 저 아시아 4국가 보다 늦게 PC 문화가 전파되었다. 그러다 보니 PC 문화가 자생적이었던 영국, 프랑스, 독일을 제외한 유럽 국가(특히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의 경우는 일본에서 들어온 MSX가 그들의 첫 PC 문화이다. 물론 경제력이 한국, 대만, 싱가폴, 홍콩 보다 앞섰던 관계로 기기의 보급 및 문화의 정착은 훨씬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프랑스의 톰슨에서도, 네덜란드의 필립스에서도 MSX 기종을 선보였다. 한국의 경우, 1983년에 이를 정부 주도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첫 PC 도입부터 PC 문화 발전에의 시기가 유례없이 빨랐는데, 이게 예외적인 경우.[10] MSX2+ 규격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MSX에서 점차 손을 떼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11] 그냥 MSX라고 하면 원래 이 초대 규격을 가리키지만 MSX 시리즈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므로 후대의 규격들과의 구분을 위해서 MSX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2] 이 기종을 금성사가 라이선스해서 발매한 것이 금성 패미콤 FC-150이고 삼성전자는 이것을 약간 손 봐서 SPC-500을 발매했다. 한화그룹 계열사였던 고려씨스템에서 내놓은 타미컴도 이 제품이다.[13] 디스크 드라이브 연결 포트와 배선이 똑같았다. 일본산 MSX의 경우는 그냥 아예 별도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포트를 마련해 놓지 않고 확장 슬롯을 2개 마련해 놓고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인터페이스 확장 슬롯 1개를 꽂아 쓰게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4] 다만 MSX1의 스프라이트는 1장당 투명색과 단색의 2색 밖에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배경을 세세하게 표현한 게임(ex: 컴파일걸케이브, 자낙 등)들은 스프라이트가 배경에 묻혀서 잘 안 보이는 경우도 있었고 스프라이트 표현 개수도 화면당 32개, 가로 라인으로 4개까지로 한계가 커서 표현에 제약이 컸다. 이 부분을 잘 처리하는 것이 좋은 게임 디자인의 요건이었다.[15] Blitter. 하드웨어가 직접 개입하여 적은 부하로 움직이는 사물을 표시한다는 점에서는 스프라이트와 비슷하지만 블리터의 경우는 VRAM상 빠른 블럭 전송을 통해 빠르게 사물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움직이는 사물을 별도의 메모리에 두고 출력할 때 합성하는 스프라이트와는 원리가 다르다.[16] 히타치는 전술한 대로 PC 3대장 다음으로 PC에 적극적인 회사였으나 주 타겟 시장이 기업용 고성능 제품이어서 가정용 시장에서는 좀 약했다. 도시바는 PASOPIA라는 자체 기종이 있긴 했으나 점유율은 상기 4개사(3대장+히타치)보다 약했다. 미쓰비시는 이미 대형 컴퓨터 사업을 하고 있었으나 PC 사업은 MSX가 처음이다.[17] 이런 게임 구조는 몇 년 뒤는 메가 CD실피드가 그대로 답습했다.[18] 심지어 파이프오르간을 MSX로 제어하기까지 했다![19] NEC, 샤프는 MSX에 무관심했지만 후지쯔는 FM-X라는 MSX기종을 만들어 살짝 발을 담그기는 했다. # 물론 적극적으로 판매하지는 않았고 그냥 발만 담근 상태. 여담으로 브라질 기업 'SHARP'에서 MSX를 만든 일은 있는데, 일본의 샤프와는 전혀 무관한 회사다.[20] Z80은 호환되는 CPU가 종종 있는데, 이런 것도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 실례로 일부 MSX 기종 중에는 히타치의 Z80 상당품인 HD64180을 탑재한 경우가 있다.[21] 기종별로 TMS9918A, 9928A, 9929A 등을 쓰기도 하였다.[22] 일종의 패턴을 미리 정의해 놓고 이를 화면에 덮어서 표현하는 방식. MSX에서는 각각의 패턴은 8×8 크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화면에 8×8 단위 위치에 표시하도록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이용할 수 있는 패턴의 수로 화면을 모두 덮을 수 있어서 비트맵에 가깝게 이용할 수도 있다. 다만 가로 8픽셀 단위로 팔레트에서 2색만 선택할 수 있는 제한이 있다. 이로 인해 생기는 제한은 여기 참고. MSX BASIC 등을 이용해서 스크린 2 모드로 진입 후 아무 색이나 선택해 도형을 그리고 다른 색을 선택해 그 위에 도형을 또 그려 보면 제1색으로 그려진 도형의 일부분에 제2색이 전염(?)되어 표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다 보니 MSX로 이미지를 그릴 때는 이 특성을 머릿속에 담아 두고 그려 나가야 하며 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그래픽은 'MSX스러운' 독특한 느낌이 있다.[23] IBM PC 호환 기종의 EGA보다는 확실히 좋았고 VGA보다는 좀 못하거나 경우에 따라 비슷한 정도다. VDP로 스프라이트 처리 등의 도움을 받으면 게임용으로는 VGA를 단 IBM PC 호환 기종보다 좋았다고 했을 정도.[24] 이 때문인지 야마하의 후기 MSX1 모델 중 일부가 V9938을 탑재하고 있다. V9938의 기능을 활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TI의 칩을 자사 칩으로 대체해서 시험한 것으로 보인다.[25] 그러나 이 게임이 VDP에 횡스크롤 기능이 있는 MSX2+를 감지할 경우 이런 꼼수가 아닌 하드웨어 횡스크롤을 사용한다.[26] 사이코 월드를 보면 캐릭터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운데 총알은 뚝뚝 끊기는 듯한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총알을 스프라이트가 아닌 PCG 방식의 일반 그래픽으로 처리해야 했던 결과.[27] 극히 드물지만 호환이 되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있기는 하다. 약간의 조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MSX2에서도 호환이 되도록 조정해 재발매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28] 이 기능 덕에 단종 이후에도 비디오 자막 작업 기기로서 오래 살아남았다.[29] 당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상당히 비싼 주변 기기였다.[30] 애드리브 카드에 쓰인 것으로 유명하다.[31] TMS9918의 성능 개량 버전. TMS9918과 상위 호환성을 갖춘다. 여담이지만 원조 TMS9918과 야마하의 커스텀 버전인 V99x8 시리즈는 미묘하게 색감이 다르다. TMS9918 쪽이 약간 채도가 낮아 부드러워 보이고 야마하 쪽은 선명한 원색이라는 느낌.
파일:MSX1 and MSX2 basic palette comparison.png
위쪽이 원조 TMS9918이 사용된 MSX1의 16색, 아래쪽이 야마하의 V99x8이 사용된 MSX2의 16색이다.
[32] 실제로는 VRAM 이 128KB 인 경우가 사실상 표준이었고, 64KB 는 극히 일부의 특수 기종을 제외하면 없었다. 따라서 거의 모든 MSX2 용 게임이 128KB 의 VRAM 을 필요로 한다. VRAM 128KB 모델에서는 SCREEN 5-6에서 4개의 비디오 페이지와 SCREEN 7-8에서 2개의 비디오 페이지를 지원하지만, VRAM 64KB 모델에서는 SCREEN 5-6에서 2개의 비디오 페이지만 지원하고 SCREEN 7-8은 아예 지원하지 않는다.[33] 아마도 패미컴과 같은 비슷한 성능의 게임기와 같은 방향을 걸었을 것이다.[34] 사람의 눈이 색상보다 밝기에 민감한 것을 이용한 것이며 오늘날 영상 처리의 기본인 방식이다. 특히 MPEG의 4:1:1이 YJK와 유사한 배열을 하고 있다.[35] 아예 게임에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스 1, 이카리 등이 256색 모드로 제작된 케이스[36] 실제 게임에 사용된 드물고 특이한 케이스로는 아보가도 파워즈에서 1999년 발매한 Windows용 에로게 종말을 보내는 법의 2001년작 MSX 이식판이 있다.[37] 예외적으로 워드 프로세서 내장 기종인 마쓰시타 FS-A1WX, FS-A1WSX는 규격 외품인 Z80B 5.38MHz를 사용하였다. 평소에는 3.58MHz로 동작하지만 내장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할 때는 5.38MHz로 동작하여 빠른 속도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MSX2용 워드 프로세서들을 굴려보면 알겠지만 대체로 입력 후 반응이 상당히 느리기 때문에 취한 대책. 참고로 재믹스 터보도 Z80B를 달았기 때문에 고속 모드를 지원한다.[38] CPU의 클럭은 2배 밖에 상승하지 않았으나 8비트 호환 모드 사용 시 기존 Z80 대비 클럭 당 처리 능력(IPC) 향상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최대 10배까지 속도 차이가 나는 명령어가 있다고도 한다.[39] 물론 풀셋을 갖추면 30만엔을 넘어가는 X68000 같은 놈도 있었고 10만엔을 넘는 컴퓨터는 드물지 않았지만 MSX가 원래 3만엔대에서 출발한 가정용 컴퓨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비싸진 것이다. 전 세대였던 MSX2+의 경우 대부분 69,800엔 선.[40] 후술할 파생기종(?)인 NIA-2001에도 데이터 레코더단자가 없다.[41] 이는 월드 와이드 웹의 등장보다 1년 정도 빠른 것이다. 인터넷 기반 온라인 경매 시스템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95년이다.[42] "니시 카즈히코 Special Interview 차기 MSX의 전모 유비쿼터스 MSX 초점", MSX MAGAZINE 영구 보존판 2, 아스키[43] 출처에 따라서는 V9998로도 부르고 있으나 기억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사람들은 계획이 취소되기 전의 시제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신빙성은 없다.[44] 출처1: "초고속 컴파일러 MSX BASIC군 터보와 R800의 비밀! 키시오카 카즈야×스즈키 히토시", MSX MAGAZINE 영구 보존판 2, 아스키, 출처2: MSX · FAN 매거진 1995년 2월호, 도쿠마쇼텐 인터미디어[45] 파나소닉 FS-A1ST 256KB, 파나소닉 FS-A1GT 512KB.[46] MSX2의 최소 VRAM 규격은 64KB였지만, 실제로 64KB VRAM을 탑재한 기기는 극소수였고 거의 대부분이 128KB VRAM을 탑재하였고, 그래서 MSX2용 게임의 대부분은 128KB VRAM이 탑재된 기기에 맞춰 개발되었다.[47] Sord M5 게임들SG-1000 게임들을 보면 MSX1과 색상이 똑같음을 알 수가 있는데, MSX1에 사용된 것과 똑같은 VDP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MS9918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48] 1997년 외환 위기때 부도를 맞았던 그 큐닉스 컴퓨터 맞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의 설립이전 마이크로소프트랑 제휴를 맺은적도 있다.[49] MSX2부터는 128KB 이상인 게임들이 즐비하다 보니 퀵 디스크로는 게임을 즐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3.5인치 플로피 디스크가 저렴해지면서 퀵 디스크는 빠르게 도태되었다.[50] 당시 삼성은 자체 기종인 SPC-1000 쪽의 사업에 더 치중했다. MSX 규격인 SPC-800은 부업(...) 수준으로 하다가 곧 접었다.[51] 합팩 형태로 여러 가지 게임 중에 하나를 고르게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때 게임 선택을 키보드로 하게 되어있기도..[52] 금성사는 이미 1985년 봄부터 IBM PC 호환기종인 '마이티' 시리즈에 주력하게 되면서 개인용 8비트인 패미콤 시리즈를 단종시킨 상태였다. 삼성전자도 금성사가 업무용 16비트 컴퓨터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같은 해부터 그럭저럭 잘 나가던 SPC-1000 라인을 제외한 나머지 8비트 라인업은 모두 단종시킨 상태였다. SPC-1000 마저도 1986년 여름에 단종된다.[53] CPC-300(IQ-2000)에서는 조합형 고딕체 한글만을 지원했다. 참고로 완성형 한글이라고 해도 PC 쪽의 KS C-5601 코드와는 다른 것이고 한글 코드는 2바이트 상용 조합형과 호환성이 있다. 2바이트 조합형을 채용했던 CPC-300의 한글 바이오스 2.0 버전과 호환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54] 당연히 컴퓨터에 동영상을 저장하는 기능은 아니고, 슈퍼 임포즈/디지타이즈 기능이라고 영상을 입력하면 배경으로 표시되고 여기에 자막 등 그래픽을 추가하여 출력하는 기능. 이것을 아날로그 영상 장비(VTR 등)를 사용해서 다시 녹화하는 것이다. 원래 MSX2 사양에 옵션으로 제공되는 것인데 CPC-400S에서는 이 기능을 내장하였다. CPC-400에서는 옵션 보드를 추가해 사용할 수 있었다. 일부 업소나 유선 방송 등에서는 이것을 비디오 자막기 용도로 활용하기도 하였다.[55] X-II가 발매된 1987년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있던 해였다. 이 영향으로 노동쟁의가 증가하는 추세는 이듬해인 1988년까지 계속되었고 대우전자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56] 단, 여기서의 우월한 성능이라는 것은 업무용에 한한다. 게임용으로는 기본형으로도 미려한 컬러 그래픽과 화음이 나오는 MSX가 확실히 우위였기 때문에, 명색이 16비트라는 녀석이 왜 8비트만도 못한 삑삑거리는 소리와 흑백 화면만 보여주는 건지 의문을 갖는 사람도 많았다(초창기 16비트 교육용 PC는 256KB램, 약 600×400 해상도의 단색 비디오 카드,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1개에 12인치 이하의 녹색 단색 모니터 조합이었고, 마우스조차 따로 구입해 달아야 했다). 물론 1993~1994년쯤 되면 고해상도에 하드웨어 가속 기능이 들어간 비디오 카드와 사운드 블라스터 호환 사운드 카드가 대중화하면서 게임 성능도 따라잡혔지만, 1992년까지만 해도 단색 모니터에 애드립 카드조차 달지 않은 사양을 교육용으로 팔았다. 80386 CPU+80387 FPU+SVGA+no sound card = CAD용 컴퓨터로 인식되던 시절.[57] 다만 삼성 겜보이가 SG-1000 기반인 기기라 MSX 소프트웨어를 하위호환격으로 실행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 MSX 소프트웨어 팩 만은 재미나 같은 곳에서 호환되도록 개조해서 판매 유통되었다.[58]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인텔 8080용 어셈블러. 원래 CP/M에서 쓰던 건데 MSX-DOS가 CP/M과의 호환성이 있는 관계로 MSX에서도 많이 쓰였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별도의 에디터가 필요없이 MSX BASIC에서 주석문 형태로 코드를 작성하고 어셈블러를 할 수 있었던 MAD80(Monitor Assembler Disassembler의 두문자를 딴 이름이다. 당시 조선대학생이었던 유동균씨가 제작했다.)을 더 많이 사용했다.[59] 어찌 보면 오늘날의 탈네모꼴 글꼴과 비슷한 자형인데, 의도적으로 이렇게 만든게 아니라 기술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자형이다.[60] 여담이지만 대우전자 측과 어떻게 이야기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MSX2+ 규격에서는 호환성을 위해서 대우의 독자적인 확장 기능이었던 SCREEN 9 부분을 비워놨다. MSX2+의 추가 스크린 모드는 10, 11, 12이며 MSX BASIC에서 SCREEN 9를 쳐보면 그냥 에러 처리가 된다.[61] 기존 방식이 스크롤할 부분을 모두 비디오램을 이동시키는 것인데 반해, VDP의 기능을 사용하면 고속 영역 복사가 되고, 커서가 화면 맨 아래로 내려가거나 맨 위로 올라간 뒤의 화면 전체 스크롤 업, 다운은 그냥 화면 자체를 롤 업, 다운하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62] 당시에는 정품 소프트웨어 유통망이 없다시피...가 아니라 그냥 없어서 지역마다 있는 소프트웨어 가게에서 대량의 소프트웨어를 구비해 두고 이를 일정 액수를 받고 플로피 디스크에 복사를 해 주는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었다. 복돌문화의 출발점[63] 핸드 어셈블부터 시작한다. 맨 뒷 부분에 콘웨이의 생명 게임 코드가 실려 있다.[64] 사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의 16비트 중심으로의 개편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65] 해당 도서의 저자들은 당시 중3~고1 정도의 학생들. 한국 MSX 초기부터 MSX를 다뤄서 이 분야에 도가 텄다. 자료조차 빈약했던 시절에 정말 하나하나 맨땅에 헤딩하면서 알아낸 것들. 참고로 당시 이보다 더 연령 대가 높은 매니아들은 주로 PC 입문을 애플 II로 했기 때문에 MSX는 좀 약한 편이다. 동시기 민컴은 애플 II로도 비슷한 성격의 책을 출간 예정이였는데 저자가 고3인 관계로 제때 내지 못했다고.[66] MSX BASIC에는 특정 주소에 직접 기계어 코드를 때려넣는 POKE 명령어와 특정 주소의 메모리값을 변수로 읽어오는 PEEK라는 명령어가 있어 별도의 프로그램 없이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기계어를 다룰 수 있다. 다른 8비트 PC의 BASIC에도 대부분 비슷한 기능이 있다.[67] MSX에서 가장 메이저한 어셈블러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M80 어셈블러의 경우에는 MSX-DOS 환경이 필수적이었다. 국내에서 많이 쓰인 어셈블러/모니터 툴인 MAD80이나 일본에서 쓰인 MSX Self Assembler 같은 어셈블러들이 BASIC에서 주석문 형태로 어셈블리어 코드를 작성해서 어셈블하는 형식을 취한 것은 별도의 텍스트 에디터 없이 입력할 수 있다는 편의성 때문도 있지만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사용할 수 없는 환경을 고려한 것도 있었다. 여담으로 MSX는 애플II나 SPC-1000/1500과 달리 기계어 모니터도 내장되어있지 않았다.[68] 말 그대로 현행 PC의 어셈블러가 하는 일을 손으로 하는 것이다. 일단 어셈블리어로 니모닉 코드를 종이에(!) 쓴다 → 인스트럭션 테이블을 보면서 니모닉 코드에 해당하는 기계어 코드를 찾아 1:1 변환한다. → 완성된 기계어 코드를 PC에 입력한다. 라는 고행이다. 이것을 자동화한 것이 폰 노이만 선생이 컴퓨터님의 자원을 쓸데없는데 낭비한다고 까셨던 어셈블러. 어셈블리어는 기계어와 1:1 대응되니 패턴만 이해하면 작업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단순 반복 노동이기에 매우 지루하고 실수하기 쉬운 작업이었고, 더 큰 문제는 MSX에는 기계어 디버거가 없어서 문제 발생 시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긴 코드를 작성하려면 매우 고된 작업이 되지만 상술한 BASIC 코드에 기계어 코드를 일부 섞는 경우에는 코드 내용이 길지 않았던 관계로 간단하게 핸드 어셈블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69] 여담이지만 소프트뱅크손정의가 처음 출판했던 책이 이런 기계어 코드들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포켓컴퓨터 라이브러리'였다. 당시 출판을 처음 시도하였던 그는 출판 계약을 따내는 과정에서 이런 코드들을 보여주며 설득을 해야 했다. 후술하듯 기계어 코드는 이해할 수 없는 숫자의 나열로만 보이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출판 계약을 따내기엔 매우 힘들었으나, '앞으로 컴퓨터가 대세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여 결국 출판 계약을 따내는 것에 성공하게 된다.[70] 디컴파일과 달리 어셈블리어는 기계어와 1:1 관계이므로 디스어셈블을 하면 거의 완전한 원래 어셈블리어 코드를 얻을 수 있다.[71] 개인이 쉽게 쓸만한 디지털 방식의 복제기는 없었다. 음악용 더블 데크 카세트 플레이어를 이용할 수는 있었으나 아날로그 음질 열화 때문에 몇 차례 반복하면 인식률이 크게 떨어졌고, 애초에 더블 데크 카세트 플레이어 자체가 비싸서 보유하고 있는 가정집이 많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테이프에서 데이터를 PC로 읽어들이고 이를 새 테이프에 다시 저장하는 것 정도인데 테이프 단위로 통째로 복제할 방법이 없어서 일일이 세션별로 노가다를 해야 했다.[72] 사실 MSX 시절에 고급언어라면 C보다는 파스칼(프로그래밍 언어) 구사자가 많았고 파스칼로 만든 MSX-DOS용 툴들도 종종 있었다. 당시의 대세였던 볼랜드 터보 파스칼도 MSX-DOS(정확히는 CP/M)로 포팅이 되어 있었다. C 컴파일러도 HITECH-C나 아스키에서 나온 MSX-C 등이 있긴 했지만 아직은 C보다는 파스칼의 영향력이 클 때라 터보 파스칼에 비하면 사용자가 매우 적었다.[73] 본래 오리지널 IBM PC는 MSX나 애플 II처럼 BIOS ROM에 내장된 BASIC 인터프리터가 있어서 MS-DOS 같은 별도의 운영 체제 없이 BIOS에 내장된 BASIC 인터프리터를 곧바로 구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환기종에서는 라이선스 문제로 이 ROM BASIC이 빠져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를 보완해주는 것이 MS-DOS상에서 굴릴 수 있는 BASIC 인터프리터였던 GW-BASIC이었다. 기능은 ROM에 박혀있느냐 외부의 인터프리터를 RAM에 적재하느냐의 차이를 제외하면 거기서 거기.[74] 이는 삼성전자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FC-100이나 애플 호환기종용으로 널리 쓰였던 금성사의 12인치 모노크롬 모니터(SE-8001 문서의 사진에 있는 모니터가 바로 이 기종이다) 역시 TV 금형을 재활용하였음에도 스피커를 제외하여 생산되었던 바 있다.[75] MSX 외길을 걸었던 대우전자는 당연히 처음부터 모니터에 스피커를 내장하여 출시했으니 이런 문제가 없었고, MSX 보급의 영향으로 추후 타사의 8비트 PC용 모니터도 스피커를 내장하는 쪽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76] 12인치급 모노크롬 모니터도 십만원 전후의 금액이었기에 결코 만만한 제품이 아니었고, MSX1 출시 후 본격 보급되었던 14인치급 컬러모니터는 아예 MSX1 본체 가격보다 조금 더 비싼 30만원 중반대 가격의 제품이었다.[77] 메시지의 내용을 따오자면 ARM9, 드림캐스트의 GPU를 사용하고, MSX2 하드웨어 에뮬레이터가 내장되고 USB 2.0 포트 4개와 무선 네트워크 인터페이스 등이 장착되는 원칩 컴퓨터 구상이었다고 한다.[78]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하고 있다. 트위터[79] 무료판은 FD 파일 교체 기능이 없는 등 일부 제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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