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년의 SPC-1000 TV 광고.[1]
1. 개요
삼성전자가 1982년에 개발하여 1983년 발매한 8비트 개인용 컴퓨터이자 삼성전자가 1980년대에 판매했던 삼성 SPC 시리즈의 첫머리에 위치하는 기종이다. SPC는 Samsung Personal Computer의 약자.[2]당시 전두환 정권은 '1983년은 정보산업의 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당시 돈으로 10억 원의 예산을 들여 5개의 민간기업을 선정, 5천 대의 컴퓨터를 각급 학교에 납품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에 맞추어 개발된 기종들 중 하나였다. 참고로 당시의 5개 기종은 삼보전자엔지니어링(현 TG삼보)의 '트라이젬 30'(애플 II 호환 기종), 금성사(현 LG전자)의 '금성 패미콤',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의 '스포트라이트 1', 동양나이론(후의 효성컴퓨터)의 '하이콤 8', 그리고 SPC-1000이었다. 이 중 스포트라이트 1과 하이콤 8은 일찍 단종하고 1980년대 중반 쯤엔 금성 패미콤도 단종해서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SPC-1000과 애플 II 호환 컴퓨터인 트라이젬이었다.[3][4][5]
삼성전자는 당시 '한국 최초 자체 개발 개인용 컴퓨터'라며 홍보했으나, 삼보전자엔지니어링이 1980년에 내놓은 한국 최초의 상용 개인용 컴퓨터였던 SE-8001보다 2년이나 늦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엔 이미 애플 II 복제품이 세운상가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라서 엄밀히 말해 '최초'는 아니다. 또한 일본 샤프의 컴퓨터 MZ-80K[6]를 기반으로 만들어[7] 자체 개발 컴퓨터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과장광고였다. 외부 디자인 면에서는 원본인 MZ-80K보다는 SPC-1000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상위 모델인 샤프 MZ-700의 디자인과 좀더 닮았다.
후속기는 SPC-1500이다.
2. 하드웨어
대략적인 사양은 이하와 같다.- CPU: 자일로그 Z80A 4 MHz
- 메모리: ROM 32 KB/RAM 64 KB/Video RAM 6 KB
- 비디오 컨트롤러: 모토로라 68047/6847. 256×192/단색, 128×192/4색 등
- 사운드: 제너럴 인스트루먼트 AY-3-8910. 8옥타브 3채널
- 보조기억장치: 카세트테이프 레코더 내장.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장착 가능.
흔히 일본의 샤프 MZ-80 시리즈의 복제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완전한 복제품은 아니지만 샤프 MZ-80K와 그 후계기인 샤프 MZ-80B를 참조한 것은 맞다고 한다. 약간의 이식 작업으로 샤프 MZ-80 시리즈의 소프트웨어를 돌릴 수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서는(MZ-80B는 SPC-1000과 비슷한 HU-BASIC을 사용하였다.) 상당히 구조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상세한 사양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카세트테이프 레코더를 내장한 것은 샤프 MZ 시리즈의 설계를 답습한 것이다. 샤프 MZ 시리즈는 '클린 컴퓨터'라는 개념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8비트 컴퓨터로서는 드물게 BASIC 인터프리터를 내장하지 않아 카세트테이프로 BASIC 인터프리터를 로드해야 했으나, SPC-1000은 허드슨 소프트가 제작한 Hu-BASIC을 ROM에 내장하여 바로 BASIC으로 부팅할 수 있었다.[8]
샤프 MZ-80시리즈나 MSX등 대부분 8비트 I/O 포트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SPC-1000은 I/O 포트가 16비트이며 비디오 메모리 역시 I/O 메모리에 0000h~17FFh까지 1:1 대응 방식이다.
키보드의 키 뚜껑은 이중 사출 구조이며, 그덕에 위 사진과 같이 40년이 다되어 가는 데도 불구하고 키의 글자가 선명하다. 스위치는 일본 ALPS의 것을 사용했다.
3. 소프트웨어
삼성전자라는 이름빨로 꽤 팔렸지만 역시나 소프트웨어 부족을 겪었다.[9]이를 타개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정기적으로 소프트웨어 공모전을 열었다. 한국 기업 중 일찍이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인식한 삼성전자는 개인 제조 소프트웨어라도 육성해 보급하려고 했으며 그 일환으로 소프트웨어 공모전을 개최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모전 입상작들은 순수 창작 소프트웨어보다 샤프 MZ 계열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이식이 대부분이었다. 소위 누워서 떡 먹기(상금 따먹기) 수준이었다. 물론 공모전 개최 의도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갈 만 하다. 이 시절 삼성전자 공모전에 샤프 MZ 계열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출품해서 상금 따먹기를 한 사람들이 지금 한국 IT 파워 블로거들 중 꽤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잡지에서 개최한 1라인 컨테스트도 애플 II 호환 기종과 SPC-1000 BASIC을 대상으로 했다. 반면 그렇지 않았던 금성사는 그 결과 FC-100를 조기에 단종시켰다. 아무튼 삼성전자의 노력 덕에 1983년에 교육용 컴퓨터로 지정되어 도입된 5개 기종 중에서는 애플 II 호환 컴퓨터인 삼보 트라이젬을 제외하면 그나마 가장 양호했다. 애플 II, MSX 계열 만큼은 못해도 있긴 있었다.
여기에는 SPC-1000의 설계 사상, 정확히는 샤프 MZ-80의 설계 사상 또한 컸다. 사진을 보듯 SPC-1000은 데이터 레코더(카세트테이프 저장장치)가 장착되었는데 당시의 다른 모든 기종들은 이것이 없어서 보통의 카세트 덱을 사용해야 했다.[10] 그런데 그 때만 해도 컴퓨터 가격이 대한민국 경제사정 대비 비싸서 일반 가정에서는 엄청 희소하다 보니 소위 컴퓨터를 잘 하는 PC키드들은 전시장이나 학교 등의 PC에서 프로그램을 만드는게 일반적이였는데, 당연 이런 PC들은 전시장 문 닫을때[11] 혹은 하교시 전원을 끄고 퇴실해야 되는데 데이터 레코더가 없는 기종 같으면 여태까지 짠 프로그램을 모두 날려야 했지만 SPC-1000 같으면 내장된 레코더에 가져온 테이프를 넣고 저장한 후, 다음에 다시 방문할 때 이어서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 있었다.[12] 지금이야 별것 아니게 보이지만 당시로는 아마추어들의 자작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서 하늘과 땅 차이 정도의 매우 큰 차이이다.[13]
당시 광고에서 한국에서 인기이던 애플 II, MSX 호환 PC를 겨냥하여 SPC-1000은 순수 한국 개발 컴퓨터라는 점과 교육용 소프트웨어가 풍부하다는 점을 강조했었다.[14] 특히 Hu-BASIC은 성능이 좋았는데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애플 II+의 Applesoft BASIC이나 MSX BASIC보다 더 좋았다. 심지어 16비트 시대의 IBM PC 호환 기종의 GW BASIC보다도 좋다. 다른데서 찾아볼 수 없는 Hu-BASIC의 독보적인 기능이 하나 있는데, 명령어를 약자로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터프리터 형식이 그렇듯 프로그램은 전부 아스키 코드 문자열로 이루어져 있기에 나중에 읽기는 힘들더라도 명령어를 약자로 입력할 수 있다는 것은 프로그램 크기를 줄여주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당연하지만, 상술한 1라인 컨테스트에서도 그 장점은 빛을 발했다.
당시 유통된 게임의 상당수는 일본의 8비트 컴퓨터인 NEC PC-6001로 나온 게임들을 이식한 것이었다. SPC-1000의 기반 컴퓨터로 알려진 샤프 MZ-80과 NEC PC-6001은 그래픽 특성이 꽤 다른데, SPC-1000 게임들, 특히 컬러 모드로 나오는 게임들은 NEC PC-6001에서 이식한 것이 대부분이고 화면도 6001 버전 그대로여서, SPC-1000도 FC-100 처럼 PC-6001의 그래픽스 설계를 일부 차용해온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일부 게임은 MSX용 게임을 이식한 것도 있었는데 비교적 이식 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SPC-1000에서 MSX와 같은 256×192 해상도를 사용하려면 단색 모드만 사용이 가능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게임이 단색이 되었다. 덕분에 아이템이 색상으로 구분되어 있는 더 캐슬 같은 게임은 실행이 곤란하다.
소프트웨어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소프트박스와 VDP 유니트라는 하드웨어가 개발되기도 했다. MSX와 CPU, PSG 등의 핵심부품이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MSX의 VDP인 TMS9918A를 내장하여 MSX 소프트웨어를 약간의 수정만으로 이식해서 쓸 수 있게 만든 기기로 게임 성능이 뛰어난 MSX 소프트웨어를 MSX와 똑같은 그래픽으로 가져다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에 꽤 인기있던 주변 기기였다. 소프트박스에서는 VDP 유니트용으로 나온 게임을 실행할 수 없었지만 VDP 유니트에서는 소프트박스용으로 나온 게임을 실행할 수 있어서 VDP 유니트 쪽이 더 인기가 좋았다. 후속기인 SPC-1500에는 MSX용 카트리지도 사용할 수 있는 외장형 VDP 유니트(일명 롬팩 유니트)가 나오기도 했다.
지방의 경우 게임 및 소프트웨어를 구할 방법이 없었으며, 월간 잡지에 소개되는 게임의 소스 코드를 직접 입력해 실행하는 방법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잡지사를 직접 방문해서 운 좋게 마음씨 좋은 직원을 만나면 과월호에 소개된 프로그램을 카세트테이프에 복사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로 테이프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더블 카세트 덱을 이용해 테이프에서 테이프로 복사하는 식이라 귀가 후 돌려보면 노이즈 때문에 오류가 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BASIC 소스 코드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인데 반해 소스가 16진 기계어로만 몇 페이지 올라오면 주말에 아는 친구들 불러서 돌아가며 키보드로 입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타가 가장 문제였지만[15] 이후 각 라인의 합계를 우측에 표시해주는 체크섬 기능이 생기면서 오타 확인이 훨씬 쉬워지기도 했다.
4. 모델
- SPC-1000 : 메인 모델
- SPC-1100 : 교육용(학교) 시장 납품용 모델. 초기형은 프린터 포트가 삭제되어 있고 후기형은 SPC-1000과 이름만 다르고 완전히 동일한 모델이었다고 한다.
- SPC-1000A : 데이터 레코더에서 오디오 출력을 하는 기능 및 볼륨 조절 기능 추가. SPC-1500에서 내세운 '말하는 컴퓨터' 콘셉트의 원조격이다.
당시 컴퓨터 학습에 SPC-1000에 간단한 BASIC 프로그램으로 1000A처럼 오디오 출력이 가능하게 하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다.
좀더 상세한 리비전은 이 블로그를 참조하기 바란다.
5. 토막 상식
- 삼성 SPC 시리즈는 최초 개발 모델이자 플래그십 역할을 했던 1000외에도 몇 종류가 더 있었는데 전부 해외 컴퓨터들의 복제품이었다. SPC-300[16]은 영국 싱클레어 ZX81, SPC-500은 일본 Sord M5의 복제품[17]이었고, SPC-650은 싱클레어 ZX 스펙트럼의 위탁생산 제품을 내수로도 판매한것, SPC-800은 MSX1 규격 기종이다.
- 그런데 재미난 것은 같은 시기 경쟁사였던 금성 패미콤 시리즈도 라인업이 비슷한데, FC-30이 싱클레어 ZX81, FC-150이 Sord M5의 복제품이었고, FC-80이 MSX1 규격이다. 삼성전자와 금성사는 모델명과 복제품을 거의 비슷하게 구성한 것이다. 다만 금성 패미콤의 FC-100은 최초 개발 제품으로 산요전기 PHC-25를 참고했으며, ZX 스펙트럼 복제품은 없다. SPC-300과 FC-30, 그리고 SPC-500과 FC-150은 심지어 일부 호환성도 있었다. 명령어 철자는 일부 다르지만 BASIC의 경우 카세트테이프에 저장한 프로그램은 서로 잘 돌아갔다. 아쉽게도 롬팩이나 기계어 프로그램까지는 호환이 안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키보드조차 방식이 서로 같았다.
- SASCOM-80이라는 이름의 프로토타입으로 보이는 기종이 있었다고 한다. 신문 기사외에 상세한 정보가 밝혀진 적이 없어서 이 제품의 기술정보에 대해서는 불명. 같이 소개된 SASCOM-X의 경우 삼성물산이 자체 개발했다고 한다.
- 위키백과 SPC-1000 항목에 개발관련 인물들과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 MySPC, SPCEMUL, eSPC1000 등 몇몇 에뮬레이터가 있다. 그밖에는 MESS와 통합된 이후의 MAME에서도 SPC-1000 에뮬레이션을 제공하고 있다.
- 웹어셈블리 에뮬레이터를 통해서 웹에서 바로 SPC-1000 소프트웨어를 실행해볼 수 있다.
[1] 광고에서 나오는 '퍼스컴'이라는 표현은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를 일본식으로 줄인 말인 パソコン(파소콘)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당시 한국 컴퓨터 산업의 근원이 어디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표현인데, 이는 당시에 일본 서적들을 무단복제해 출판한 것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컴퓨터는 물론 대다수의 분야, 특히 전문 취미 분야에서의 서적들은 거의 전부 일본 서적들을 무단 번역해 출판했는데 그러다 보니 일본식 고유명사를 그대로 번역했다. 여담으로 1990년대 초반까지 널리 사용되다가 'PC'에 밀려 오늘날은 쓰이지 않는다. 1984년의 495,000원은 소비자 물가 지수를 이용해 환산하면 2021년 기준 177만 원에 해당된다.[2] SPC라는 이름 자체는 이후 16비트로 넘어간 IBM PC 호환기종들에도 붙었다. 대략 1990년대 중반까지 사용되었다.[3] 트라이젬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애플 II 호환 컴퓨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삼보컴퓨터는 애플 II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만들려 했다. 그 때문에 세운상가제 애플 II 클론보다 호환성이 떨어지며, 그럼에도 5개 기업에 들었다는 이유로 세운상가제 클론보다 가격도 많이 비싸면서 그들보다 특별히 품질이 우수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영세한 세운상가 공방이 하기 힘든 교육 기관이나 기업 같은 대규모 납품에 주력했고, 일반인 대상 판매는 일찍 포기했다.[4] 애플 II, SPC-1000과 함께 한국 초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3강 중 한축이었던 대우전자의 IQ-1000은 당시에 이 리스트에 들어있지 않은 후발 주자였다. 대우전자는 1983년에 대한전선을 인수하다 보니 새로운 카테고리의 제품 출시가 늦었기 때문이다. VCR의 경우도 삼성전자, 금성사보다 늦게 출시했고 PC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의 MSX 출시는 교육용 컴퓨터 보급이 실시된 다음해인 1984년에야 이루어졌다. 해당 계획이 1년이라도 늦추어졌다면 보급기종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5] 효성컴퓨터는 하이콤 8을 단종시키고 애플 II 호환 기종인 PC-8000을 출시했다. 그러나 효성컴퓨터는 세운상가제 애플 II 호환 컴퓨터와 차별화를 두고 기업 납품에 주력하기 위해 애플 II 옵션 카드인 CP/M 카드(즉 Z80 CPU 카드) 등을 기본으로 내장하고 16비트 PC와 같은 키보드 별도 형식의 제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가격이 비싸졌고 일반인들에게 인지도가 약하다. 그렇다고 기업 상대로 별로 팔리지 않았는데 그무렵부터 기업들에게 IBM PC XT 호환 기종이 인기였기 때문이다.[6] 1978년 샤프가 시판한 초창기의 8비트 컴퓨터. 일본의 초기 컴퓨터 개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종이라 2015년에는 일본 국립과학박물관에서 당대의 라이벌기였던 NEC PC-8001과 함께 중요 과학 기술사 자료로 지정하기도 했다.[7] 심지어 MZ-80 입문서 성격의 일본 만화책 역시 표절해서 SPC-1000용으로 출판했을 정도다. 해당 만화의 도작자는 박동파 작가, 출판사는 중앙일보였다.[8] 정확히는 클린 컴퓨터 개념과 ROM 내장 개념의 장점만을 취했다. 즉 ROM에 BASIC을 내장했으나 부팅시 이를 RAM에 복사, 즉 카세트테이프 대신 ROM에서 로드하는 개념이였다. 당연 로드 시의 속도가 카세트테이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라서 그냥 ROM으로 부팅된 것과 동일한 사용감인 것과 동시에 RAM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RAM 안의 내용을 마음대로 기계어를 이용, 인터프리터를, 심지어 문자 집합까지 개조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클린 컴퓨터 개념까지 충족했다. 당시 기준 개발자에게는 최적의 환경인 셈.[9] 지금이야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이지만 1980년대에는 금성사(현 LG전자)와 대등한 입지에서 경쟁하였으며 세계 전자 회사로서는 듣보잡이던 시대이다.[10]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당시 매우 비싼 물건으로 전시장에 장착되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이 '매우 드문 것' 또한 애플 II에 한했다. (MSX는 엄청나게 희소했다가 1987년 이후에야 전시장에서 보였고 타 기종은 전혀 볼 수 없었다.)[11] 전시장이다 보니 한 사람이 독점할 수도 없다. 기껏해야 한두 시간 정도[12] 타 기종 가지고 이를 하려면 녹음기까지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워크맨류의 개인용 휴대 녹음기는 유선으로 따로 연결하면서 노이즈 등 때문에 Load/Save 등에서 에러가 나는게 다반사에, 전시장 등 공공 PC 같으면 PC가 놓여진 위치에 따라 3.5파이 선으로 연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13] 당장 1984년 제1회 퍼스널 컴퓨터 경진 대회(지금의 정보올림피아드) 경시 부문 최고상(대통령상)은 SPC-1000 기종으로 출전한 학생이 차지했다.[14] 출시 시기는 MSX보다 많이 빠르지만 이후 MSX가 등장하자 저 위에 소개한 점을 강조.[15] 기계어였기 때문에 1글자라도 오타가 나면 오류 메시지가 뜨는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폭주할 수도 있었다. 체크섬이 있으면 그걸 보고, 없으면 소스 코드 전체를 일일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오타가 나면 대부분은 실행시에 그냥 그대로 멎는 선에서 끝나지만 가끔은 화면 출력이 깨진다거나 하는 재미있는(?) 현상도 볼 수 있었다.[16] 원판과 외관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이 제품은 싱클레어로 부터 정식으로 기술제휴를 해서 생산한 제품이었다.#[17] 외관은 Sord M5 보다 토미 퓨타에 더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