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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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color: #fff; 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000><colcolor=#fff> 역사 | 이스라엘/역사, 팔레스타인/역사 | |
정치 | 이스라엘/정치, 팔레스타인/정치 | ||
외교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아랍권 관계, 벨푸어 선언, 오슬로 협정 | ||
방안 | 일국 방안, 양국 방안, 삼국 방안, 영국 방안 | ||
사상 | 시오니즘, 반시오니즘, 팔레스타인 내셔널리즘, 반이스라엘주의, 반팔레스타인주의 | ||
민족 | 이스라엘인, 팔레스타인인, 유대인, 아랍인, 하레디, 이스라엘 아랍인, 이스라엘 무슬림 | ||
관련 단체 | 이스라엘 리쿠드팔레스타인 PLO, 파타, 하마스, PIJ, PFLP, 인민당, DFLP | ||
관련 인물 | 이스라엘 골다 메이어, 이츠하크 라빈, 아리엘 샤론, 베냐민 네타냐후팔레스타인 야세르 아라파트, 마흐무드 압바스, 이스마일 하니예, 야히야 신와르 | ||
관련 사건 | 중동전쟁, 이스라엘 건국 전쟁, 나크바, 수에즈 전쟁, 6일 전쟁, 소모전(중동), 민항기 납치 및 테러(엘알 426편, 엘알 253편, 엘알 432편, 트랜스 월드 840편, PFLP 동시다발 하이재킹 사건, 사베나 571편, 엔테베 작전), 검은 9월, 뮌헨 올림픽 참사, 1973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 욤 키푸르 전쟁, 레바논 내전, 골란 고원 분쟁, 제1차 인티파다, 제2차 인티파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철수, 파타-하마스 분쟁, 가자 전쟁(2008-2009, 2012, 2014, 2021), 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 2023년 알아크사 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 ||
기타 | 서동시집 관현악단 |
2023년 알아크사 분쟁 اشتباكات الأقصى 2023 מהומות הר הבית (2023) 2023 Al-Aqsa clashes |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일부 | |||||
날짜 | 2023년 4월 5일 새벽 (UTC+3) | ||||
장소 | 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 | ||||
교전국 | |||||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 [[팔레스타인| ]][[틀:국기| ]][[틀:국기| ]] | ||||
피해규모 | |||||
없음 | 14명 부상 400명 체포 | ||||
영향 |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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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23년 알아크사 모스크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여러 차례 충돌한 사건.2.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성전산을 둘러싼 대립의 역사
1967년 6일 전쟁 이후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이후 역사적으로 요르단 왕가가 책임지는 예루살렘과 알아크사 성전 이슬람 와크프란 기관이 운영하고[1] 이스라엘 군경이 치안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어 왔다. 국제법상으론 요르단 땅이나 실효지배는 이스라엘이 하고 일상적인 운영은 요르단 왕실이 지원하는 종교기관이 책임지지만 보안과 신앙을 불문하고 종교인들의 시설 사용은 이스라엘군이 보장하는 이 기묘한 체제는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작동하였다.성전산 이중지배 체제 초기만 하더라도 이스라엘 당국도 팔레스타인과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정치적인 대립과는 별개로 당장 자국 사회도 여전히 세속주의적인 유럽 출신 유대인들이 주류였고 유대교 vs 이슬람교라는 종교적 프레임에 휘말려들기도 싫어했기 때문에[2] 성전산에서 군령을 어기고 마음대로 유대교 예배를 본 랍비를 군법처리할 만큼 팔레스타인인들의 비정치적인 종교적 권리는 보장할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아슈케나짐 중심의 세속주의적이고 좌파적이었던 초기 이스라엘 사회가 6일 전쟁 이후 막대한 영토를 흡수하고 중동 전체에서 들끓어오른 반유대주의 때문에 추방당한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출산율도 높은 미즈라힘과 이들의 영향력에 편승하는 수정주의 우파 시오니스트들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60, 70년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 당국이 억제하던 유대교 근본주의의 사회, 정치적 영향력이 늘면서 분쟁 초기에만 하더라도 팔레스타인, 아랍 세력과의 싸움과는 별개로 이슬람 성전을 헐고 거기 유대교의 예루살렘 제3성전을 재건하자는 등 처음엔 이스라엘 당국과 민간 사회에서도 헛소리로 일축하던 종교적 종말론에 기반한 주장들이 점점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결국 1990년 10월 8일 1차 인티파다가 한창이었을 때 예루살렘 제3성전 건설을 주장하는 유대인 극단주의자들이 무슬림들이 예배를 보던 알아크사 성전에 재건된 유대교 성전의 반석이 될 거란 벽돌을 안치하기 위해 시도하자 무슬림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여기 맞서 이스라엘 군경이 실탄을 발포해 17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하고 150명이 다친 1990년 성전산 학살 사건이 터지면서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는 비교적 무관하게 돌아가던 알아크사 성전이 분쟁지역화되어 버렸다.
성전산 학살 사건 이후 알아크사 성소 자체가 분쟁거리가 되자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적, 민족적 성격이 더 강했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자체가 전례없이 종교적으로 더 과열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스라엘 유대인-팔레스타인 무슬림 양자간 관계를 씻을 수 없이 악화시키고 현대까지 내려오는 팔레스타인의 대규모 정치지형 변경을 초래한 건 1994년 유대교 근본주의자인 바룩 골드스틴[3]이 헤브론에 있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전승상 아브라함이 묏자리를 위해 땅을 산 곳에 지어졌다는 유대교와 이슬람 양측의 성소였던 교부들의 동굴에서 예배보던 팔레스타인인 29명을 학살하고 수백명에게 부상을 입힌 헤브론 학살 사건이었다. 사건 이후 당시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다스리던 이스라엘 정부는 사건의 엄중 조사와 뒷수습, 피해자 보상을 약속했으나[4] 점점 조사가 흐지부진되고 무엇보다 이스라엘 사회 각계에서 공공연하게 표출되던 범인을 영웅시하는 여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골드스틴의 묘는 지지자들에게 의해 "이스라엘 사람들과 토라, 땅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라는 영웅시하는 비문과 함께 기념지화되어 있다. 묘지가 위치한 곳은 그가 범행을 저지른 이브라힘 모스크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팔레스타인측 땅인 헤브론에 지어진 정착촌에 있는 미국 태생 이스라엘 국회의원 마이어 케헤인(Meir Kahane. 1932-1990)의 이름을 딴 기념공원에 있다. 마이어 케헤인 대표적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간 성관계와 결혼 금지, 3년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아랍인 전원 강제추방, 유프라테스강까지 대이스라엘 확장 등의 주장을 펴다가 1990년 미국에서 연설 이후 한 이집트계 미국인 청년에게 살해당했고 그가 창시한 정당 카흐는 이스라엘 자국, 미국, 캐나다, 일본 등 각국에서 테러단체로 등록되어 있다.
당시 미국의 주선 아래 이스라엘 당국과 오슬로 협정을 협상 중이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주도하던 파타는 이런 일련의 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에게 제대로 된 항의 하나 하지 못했으며 세속주의 좌파 중심 파타의 이런 무기력한 모습을 본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파타는 최소한의 종교적 자존심도 없고 이스라엘에게 인정만 받을수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상황에서 집중적인 반사이익을 얻은 건 안그래도 마침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배경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아랍 내셔널리즘을 대체하며 중동을 강타한 이슬람주의와 이를 표방하는 하마스였다.[5]
1987년에 창당된 하마스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세력의 미약함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보단 파타와의 충돌, 팔레스타인 청년들 사이 이런저런 각종 생활풍습에 '이슬람적 사회개혁' 운운하며 간섭이나 하는 지역 군벌-학생운동 기반 소수 정당에 불과했지만 헤브론 학살 이후 생긴 정치, 사회적 파급으로 인해 외적으론 일단 급격하게 성장하고 내적으론 군경 교전상대와 이스라엘 민간인의 구별을 거부하며 자살폭탄 테러를 일삼는 등 급진적으로 과격해졌다.[6] 이후 제2차 인티파다, 아라파트의 무기력한 가태연금 상태에서의 사망, PLO의 식물화, 2006년 총선과 팔레스타인 내전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변서 하마스는 결국 봉쇄된 가자 지구를 점령하고 군사력이 대표하는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에선 팔레스타인 진영 내에서 가장 주도적인 현재의 규모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반면 이를 상대하는 이스라엘 측에서도 마치 하마스가 장악해가는 팔레스타인의 모습을 거꾸로 반영하듯 스스로 근본주의화, 극단주의화가 이루어졌다.헤브론 학살 직후 이스라엘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진 대법원 조사에서도 군경의 치안유지 정책 전반은 옹호했으나 평소에 누적되어 있던 유대인 극단주의자들에게만 편향적이고 편의를 봐주는 관행 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서야 군경 중 온건파 일각, 정치인, 지식인 중심으로 이스라엘 내부의 팽배하는 근본주의를 경계하기 시작했으나 이미 하레디 특유의 높은 출산율로 인해 이스라엘 사회 내부 헤게모니 싸움에서 보수주의, 근본주의 세력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버렸다. 다음해인 1995년 팔레스타인과 평화 협상을 주도했던 라빈 총리가 바로 그 이유로 자국의 극단주의자 청년 이갈 아미르에게 암살당하고 90년대 후반 이스라엘 내부 일련의 정치지형 변화 이후 2000년 아리엘 샤론의 리쿠드당이 중간에 있었던 몇 번의 이변을 제외하고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까지 이어지는 장기집권을 하면서 이스라엘 사회와 정계의 우경화,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세력화를 고착시켰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양자간 사회, 정치지형의 변화와 이에 수반하는 충돌의 핵심적인 쐐기가 된 건 2차 인티파다의 발단이 된 2000년 가을 아리엘 샤론의 성전산 방문 사건이었다. 2001년 이스라엘 총선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샤론과 리쿠드 당은 당시 당 대변인 오피르 아쿠니스[7]의 증언에 따르면 "리쿠드 당이 집권하면 성전산의 소유권은 이스라엘에게 굳건하게 남을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정치적 스턴트로 성전산 방문을 감행했고 이후 즉시 팔레스타인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2차 인티파다가 시작되었으며 바로 다음날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던 유대인들을 공격하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종교분쟁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파일:Al Aqsa attacks timeline.jpg
90년대 이후 각각 하마스, 리쿠드당의 정치적 부상과 장기집권이 상징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자체의 종교적 격화는 결국 2010년대를 거쳐 알아크사 성전 자체가 바로 그 종교적 상징성 때문에 주기적인 물리적 충돌 장소가 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유대인 근본주의자들은 갈수록 진지하게 현존하는 이슬람 성소를 파괴하고 유대교 제3성전 건설을 주장하며 이슬람 성전에 땅밟기를 시도하고 이스라엘 당국은 팔이 자꾸 안으로 굽는 식으로 대응함에 따라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폭동으로 대응하면 이스라엘 군경은 물리적으로 제압하고 결국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로 하여금 하마스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단체가 자양분으로 성장하는 게 작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그 중심에 있는 알아크사 성소의 실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내부가 이렇게 서로 같이 종교적 극단주의에 빠지는 와중에 바깥 세계에선 경제, 사회 정치 분위기가 각자도생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냉전 시대에는 팔레스타인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범아랍 내셔널리즘은 사담 후세인, 아사드 일가 같은 지역 독재자들의 있으면 좋은 이데올로기 장식물로 변했고 파타가 몰락한 후 하마스와 더 가깝던 글로벌 지하디즘, 이슬람 근본주의도 9.11 테러,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유럽 난민 사태 같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와하비즘의 본고장인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마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서방의 눈치를 봐야할 만큼 세계적으로 인식이 험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으로 나머지 아랍 & 이슬람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던 연결고리는 하나둘씩 약해지기 시작했으며 2020년대 들어와서는 급기야 UAE를 비롯한 경제적 영향력이 강한 부유한 걸프 산유국들이 이스라엘과 정식 수교를 맺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외부 지역 강국 중 가장 안정적인 지원세력이었던 이란도 2022년 이란 시위가 보여주듯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으니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입장에선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의 난민캠프를 전전하며 학살이나 당하던 1970년대~80년대보다 더한 고립 위기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의 이슬람 성소 공격과 여기에 호응한 이스라엘 군대의 공조는 절박한 하마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유용한 새로운 건수였다. 아무리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부유한 걸프 오일머니 왕정들이 실리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과 관계를 트기 시작해도 다른 곳도 아닌 이슬람 전체 제3성소란 곳을 이스라엘이 공격하는 걸 방치하는 건 특히 바다 건너 시아파 이란과 중동 전체의 지정학적 패권을 둘러싼 대립이 나날이 험악해지던 사우디와 걸프 왕정들에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내외적 양쪽의 여파를 불러올 수 있었다. 이 점을 노리고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알아크사 성소 침범이 국제 이슈로 떠오르게끔 일부러 강경대응하기 시작했고 결국 2023년 10월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테러 공격도 '알 아크사 홍수 작전'으로 명명하여 스스로 그 정점을 찍고자 했다.
3. 상세
2023년 4월 유대인들이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양을 희생하는 행사를 진행하려고 계획한 것이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라마단 기간과 기독교인들의 부활절 기간과 겹치면서 여러 차례 충돌이 있었다.4월 5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경찰이 팔레스타인인 400명을 체포하는 등 갈등이 격화되었다. 사태 발발 직후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 9기를 쏘았고 4월 6일에는 레바논에서도 하마스 레바논 지부로 추정되는 단체가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이스라엘군이 발표했다.#
하필이면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의 권력욕으로 인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시선 돌리기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안 그래도 악화일로를 걷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파탄나 사실상 곧 전쟁이 터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까지 번졌으며 결국 몇 개월 후 하마스의 공격을 계기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1] 와크(وقف, Waqf)는 아랍어로 주로 종교기관에게 증여하는 일종의 부동산 선물을 뜻한다.[2] 당장 당시 이스라엘 건국 주류 세대였던 아슈케나짐 노동시오니스트 전반이 종교적 가치엔 크게 애착이 없고 현실적으로도 워낙 이스라엘이 숫적 열세인지라 이스라엘 베두인이나 이스라엘 아랍인 등 배경이나 종교는 달라도 이스라엘 국가에 협조할 생각만 있으면 다양한 민족을 포용할 필요가 있었다.[3] 직업은 의사였고 미국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총기난사 이전에도 극우 랍비인 마이어 케헤인의 추종자였으며 아랍인 환자는 치료해 주질 않았다고 한다(당시 기사).[4] 골드스틴은 현장에서 범행 중에 화난 군중의 반격에 의해 피살되었고, 거주하던 정착촌에 세워진 그의 무덤은 극우 유대인들이 참배하러 다닌다.[5] *[6] *1994년 헤브론 학살을 기점으로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경군에 대한 공격이 미친듯이 폭증했다.[7] 현 이스라엘 기술과학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