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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3:50:33

10.26 사건/원인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10.26 사건
1. 개요2. 특징3. 민주화 열망 실현 시도4. 김재규-차지철 갈등설5. 미국 개입설6. 민주화 열망 및 미국의 묵인이 있었다7. 정권 반대 세력 관리 방식에 대한 이견
7.1. 분노에 의한 우발적 암살7.2. 박정희의 정권 유지 능력 퇴보7.3.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위치의 위험성
8. 장준하-김재규 밀약설9. 김영삼 지지설10. 건강 이상설11. 최태민 원인설
11.1. 그 후
1.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계획한 정변이었다?

1. 개요

10.26 사건의 원인을 정리한 문서.

2. 특징

한국 현대사 최대의 미스테리 중 하나. 김재규 본인은 민주화를 위해 박정희를 쐈다고는 하지만 한 국가, 그것도 상시 전쟁의 위험이 감돌던 70년대 한국에서 그것도 정보조작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첩보기관의 최고 수장이 거사직후 보인 여러 허술하고 의문스러운 행동들은 그의 답변만으론 명쾌하게 해석되지 않은 물음표가 존재한다. 게다가 정권의 최고핵심중 하나였으면서 '동반자'였던 김재규가 단지 민주화를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특히 피격 직후 김재규가 자신의 근거지인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본으로 달려간 것을 볼 때 이 사건을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워낙 다른 증언도 상반되기 때문에 단순 우발적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많다.

10.26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존재하지만 고려대학교 임혁백 교수의 논문 '박정희에 대한 정치학적 평가'를 참고하여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10.26 사태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개인적 쿠데타라는 견해, 미국의 사주에 의해 발생했다는 견해가 세간에서 많이 떠돈다. 미국의 사주라는 견해는 공산 진영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 미국이 한반도의 비정상적 상황을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떨어진다. 또 김재규가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는 뚜렷한 정황 역시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김재규의 개인적 쿠데타라는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김재규의 우발적 행동이라는 설과 최근에 김종필의 회고록에서 제기된 김재규가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설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10.26 사태가 김재규의 분노로 인한 우발적 행동으로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이전에 국내 정치와 국외 정치의 상황을 고려하여야 한다. 단순히 김재규의 개인적 일탈로 치부하는 것은 10.26이 가진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한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 요인에만 의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은 그 행동이 나타나기까지 많은 정치적, 사회적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 10.26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임과 동시에 유신 후반기의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취약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3. 민주화 열망 실현 시도

법정에서 김재규 본인이 한 주장.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는 박정희 정권에 염증을 느껴서 독재 종식을 위해서 박정희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전에 바로 부마항쟁이 일어나서 김재규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러 부산, 마산 지역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큰 충격을 받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이 정권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설이다.

실제 김재규는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국민에게 약속하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 역시도 김재규 개인의 주장이다. 김재규 자신도 유세 현장에서 자신이 건의했던 내용을 말하면서 박정희를 믿었다고. 그러나 약속을 어기고 유신 헌법이 선포되었고 김재규는 부하들 앞에서 박정희가 다 망쳤다고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유신이 선포된 이후 당시 3군단 연대작전 오순춘 참모는 김재규 군단장이 실제 박정희를 연금하려 모의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3군단에 순시하러 왔을 때 박정희를 연금하여 하야 성명을 내도록 강제하려 준비했다는 것. 또, 지금은 고인이 된 김수환 추기경은 유신 정권체제에서 김재규 정보부장과 대화를 하면서 박정희를 환자에까지 비유를 하는 표현에 놀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청와대에 들어와서 박정희에게 조언해 달라고 하면서 유신 체제를 바꾸는 제3의 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김재규가 과연 정말로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즉흥적으로 외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이 진행 중이다. 다만 김재규를 다룬 재판이 전두환의 압력을 받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음을 감안하면 김재규의 목적은 명확하게 규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가 받은 재판으로 목적이 명백히 규명되었다고 한다면 숱한 사법살인도 옹호될 것이다. 이것 외에도 김재규의 집안에서 '자유 민주', '대의' 등을 적은 붓글씨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이를 근거로 그가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많기 때문에 지속적인 논쟁이 진행 중이다.[1]

4. 김재규-차지철 갈등설

김재규차지철 사이의 권력 투쟁과 갈등 속에서 10.26이 발발했다는 것이며 현재 가장 유력한 설이다. 주변 인사들에 의해서 주로 증언되고 있고 드라마 제4공화국, 제5공화국, 영화 남산의 부장들 등에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된다. 김종필국무총리 역시도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차지철과의 갈등에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 전두환도 "우군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김재규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데다 군복무 시절 계급도 한참 낮았던[2]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하는것이 일상화되어 김재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거친 말투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에 대해 격분하여 이것이 10.26의 발단이 되었다는 주변인물들의 증언이 있다. 김재규가 교사 시절 아끼던 제자였고 가깝게 지냈던 이만섭국회의장 역시도 김재규와 차지철의 관계가 사건의 발단이 된 것 아닌가 추측한다고 방송이나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기도 했다.출처 이 관점에서 보면 10.26은 권력의 조화가 깨진 순간에 발생한 우발적 사고에 해당한다.

특히 유신 정권 시절에는 중앙정보부, 대통령경호실, 국군보안사령부 간에 상호 견제와 갈등이 남아있었다.출처. 김재규의 지위는 언뜻 탄탄한 듯 보였지만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의 대두로 위협받고 박정희의 신임을 잃고 있었다.

1979년 5월 중순 경, 신민당 총재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 관련된 보고를 부장에게 올리는 중정 간부회의 때 김재규는 "차지철이는 신도환을 어떻게 조종한건지 모르겠다. 신도환이 무슨 보스야? 차라리 이기택이 훨씬 낫지..." 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는 차지철이 신도환으로 하여금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 당선을 저지하고 이철승의 연임을 도모하는 공작을 펼쳤지만 신도환 계보이던 이기택이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어 이탈한 뒤 최종적으로는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실패로 돌아가자 그 책임을 모조리 중정의 무능함으로 돌린 것에 대한 신경질이었다. 당시 차지철은 경호실 내에 정보처를 신설하여 산하에 사설 정보대를 운영하고 여야 양쪽에서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국회의원들을 규합하여 중앙정보부가 해 오던 정치공작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정보는 경호실이 쥐락펴락 하고 정작 중앙정보부는 대통령경호처심부름이나 하는 신세가 됐으니 김재규로서는 상당히 불쾌하지 않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 문제와 부마 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 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하게 되고 10.26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출처 박정희는 5.16 직후부터 여러명의 측근 들에게 골고루 힘을 실어주면서 서로 충성경쟁을 시키는 '2인자 박치기'를 통해서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왔다. A가 올라온다 싶으면 B한테 힘을 약간 더 실어주고, 다시 B가 커졌다 싶으면 또다른 C와 A한테 살짝 기우는 식으로... 이러한 용인술은 절대 1인자가 될 수 없는 2인자들이 해바라기처럼 오직 자신한테만 충성하면서 서로간에 긴장감을 가지고 서로 견제하는 구도를 만들어서 정권의 기반을 탄탄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말년에 들어서는 그런 긴장감을 유지시키는데 실패하고 일방적으로 차지철에게만 무게를 실어주어 결국 갈등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재규는 위에서 언급한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 공작을 실패한 것에 대한 책임과 건강문제를 이유로[3] 박정희에게 중정부장 직 사표를 내려 했지만 반려당한 적이 있으므로 그가 권력에서 밀려나는 상황을 우려하여 10.26 사건을 일으켰다는 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출처 만약 박정희가 그 때 김재규의 사의를 받아 들였다면 김재규는 자연히 차지철과 부딪힐 일이 줄어들 것이고 10.26 자체는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5. 미국 개입설

당시 박정희와 지미 카터 대통령의 관계가 좋지 못했으므로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해서 박정희를 제거하려 했다는 설이다. 특히 이 시기에 군문에 몸 담았던 사람(간부), 군과 관계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설을 정설로 여기고 있다. 당시 한국 고위직들 중에서, 박정희가 제거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하여, CIA요원이나 미국 대사관, 주한미군 관계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은 경우들이 많이들 있었다고들 한다. 게다가, 김재규의 최후진술에서 박정희 암살의 이유로 한미동맹의 악화를 이유로 거론한 점이 의심받기도 한다. 당시 청와대 수석비서관의 증언에 의하면, 지미 카터의 방한 당시에 한국에 들어온 CIA 요원 250여명이 10.26 사태까지 국내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재희 전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지미 카터 대선 캠프에 참가했었던 리처드 홀브록이 뉴욕 타임즈 기고문에서 박정희를 제거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리처드 홀브록은 동아시아 태평양 차관보로 임명되었다.#

특히 리처드 홀브록은 박정희 암살 이후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 많이 관여하였다고 한다.
그는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를 지낸 1977~1981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한 10.26 사건 직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서 진행되는 정치일정에 깊이 관여했다.

지칠 줄 몰랐던 美외교 '해결사' 홀브룩#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미국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불거지게 한 또 한 가지 원인을 제공한 점은, 박대통령 시해 당시 동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였던 홀부룩이 시해 4년 전인 1975년 9월 뉴욕타임즈 매거진에 박 대통령 교체론을 기고한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기고가 나왔을 당시는 한미관계가 주한미군 철수정책과 미국 내의 반(反)박정희운동, 코리아 게이트, CIA 청와대 도청사건, 박정희의 핵개발계획 등으로 악화일로에 있을 때여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인 견해의 피력이었지만, 그의 이 기고문은 당시 한미관계의 전후(前後)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음모론에 연결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했다.
이밖에도, 1973년 2월 18일 미상원외교분과위원회가 발표한 장문의 한국에 관한보고 , 이른바 풀 브라이트 보고 끝부분, “··· 박 대통령 전도에 있는 것은 스스로 대통령직을 떠나든지, 사망하든지, 혁명에 의해 쓰러지든지 셋 중 하나밖에 없다”는 보고서가 1978년 3월 13일자 일본의 세계주보에 실린 점을 들 수 있다. 또 전 주한미국대사 도널드 그레그가 1976년 말 카운터스파이 12월 8일자호를 통해 “아마도 그는 임기 반쯤해서 쿠데타로 쓰러질 것이다. ··· 박 대통령 최상의 선택은 스스로 사임하는 길 밖에 없다” 고 기고한 사실 등이 이러한 미국 음모설에 원인을 제공한 요인들이었다.
그리고 전술한대로, 브라운 미국 국방장관이 카터의 친서를 소지하여 박 대통령과 회동했을 때 인권을 거론하며 공개적 언명을 하며 직접 개입에나선 것도 이러한 음모론에 일조했다. 당시 인권탄압을 명분으로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가한 것은 표면적인 이유였으며, 실제로는 박 대통령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 시도와 관련된 압박이 본질적 이유였으며, 여기서 음모설이 불거졌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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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이스틴 대사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수긍하고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직접적 개입을 한 적은 없으나 암시의 형태로, 즉 간접적 사인(끄덕임, 윙크) 등으로 김재규를 고무하여 그의 박 대통령 시해 결행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에 대해 시인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미국의 대한정책, 유라시아 연구, 2010, vol.7, no.3, 통권 18호 pp. 233-258 (26 pages)

1979년 당시에 김재규는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와, CIA 서울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를 특별히 더 자주 만났다고 한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미국 기밀해제 문서들을 검증해서 2023년에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 1: 박정희 제거공작 편을 발간했다.# 10.26 사태 한달전에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회동을 했었다고 한다. 당시 주한 미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이 1999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미국이 박정희 암살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암살에 공헌했다라고 서술했다고 한다.#

박정희가 피격된 후 수도통합병원이 아닌 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먼저 후송되었었지만, 반미 감정을 의식해서 여지껏 숨겨왔었던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당시 소련에서도 미국이 박정희 암살의 배후라고 보았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서 미국의 정보작전을 총괄했던 제임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 사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김재규차지철의 알력은 유명했었고,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밀려나자 참지못하고 충동적으로 박정희를 죽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김재규와 별로 만난적이 없어서 김재규를 잘 모른다는 투로 증언한다. 그런데, 이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특별보좌관인 이동복의 월간조선 인터뷰 증언과 상충된다. 하우스만이 이 사건에서도 무언가 거짓말하면서 숨기는 것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하우스만은 이 사건은 이미 소상히 밝혀졌으므로, 본인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인들도 감히 박정희를 죽일 생각을 못하는데, 어떻게 미국인이 김재규를 부추겼을 수 있겠냐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아는거 말해서 뽐내지 않으면 근질거려서 도저히 못 참는 성격이라도 되는지, 사실 미묘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면서 말을 풀어놓는다. 그는 박정희 암살과 비슷한 사건으로 이승만이 미국에게 버림받게 된 사건을 언급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닉슨 독트린에 따른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겪고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월간조선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특별 보좌관이었던 이동복의 증언과 살짝 다른 부분이다. 이동복은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철수를 저지할 당시에, 김재규와 미국 군부의 하우스만이 협력했다고 증언한다.
밤 8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참모부에서 급히 유엔司 지하상황실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지난 17년간 유엔군사령관 특보로 일해 와 가끔 야간에 8군 지하벙커로 호출되곤 했었다.
당시 한국 정치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을 때였다. 8군 지하벙커에서는 가끔 8군 요원들이 모여 험악해져 가는 한국 상황을 애기하곤 했다.
10월 초 金泳三 신민당 총재의 국회제명사건이 있었고 그후 10월 중순 釜馬사태가 일어나면서 8군은 긴장하고 있었다. 부마사태가 터진 직후인 10월 17일 부산지구에는 계엄이 선포되고 있어 법률상 작전지휘권을 가진 유엔군 · 8군 사령부로서는 지하벙커를 심심찮게 이용하고 있었다.
8군 참모장, 각 참모, 주한美중앙정보국 책임자 브루스터, 그리고 8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나 등이 모여 있는 가운데 유병현 副사령관이 들어와 대통령의 죽음을 알렸다. 지하벙커를 흔드는 급보였다. 긴장감이 엄습했다. 범인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김부장은 참을성이 좀 적어 보이는 분이었다. 뒤에 나의 생각이 꼭 맞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때 나는 '참을성의 기준'을 갖고 이 엄청난 사건을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축적된 긴장감이 마지막 1분을 못 넘기고 폭발한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
당시 차지철(경호실장)과 김재규(중앙정보부장)과의 알력은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김재규는 내가 창군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시절의 육사 2기생이지만 나와는 별로 만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그는 확실히 위기한계성이 큰 사람은 아닌 듯했다. 김재규는 차지철과 정보 경쟁을 벌이도록 박대통령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으며, 그의 정보가 차지철 정보에 밀려 무시당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상당한 위기감을 갖게 된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는 이 위기감의 마지막 1분을 참지 못한 채 일을 벌인 것으로 보였다.
이 엄청난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이미 소상히 밝혀졌기 때문에 내가 새삼 말할 입장은 아니다.
기자는 내게 이렇게 물어 왔다. "김재규는 육본 벙커에서 각료들을 모아놓고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말했다는데, 간접적으로라도 이 사건에 미국이 개입된 것이 아니냐"고,
나는 단호하게 이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김재규는 박대통령과 동향인이며, 박대통령과 사관학교 동기이며, 그리고 박대통령이 직접 양육한 인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국인도 金이 박대통령을 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미국인이 김재규에게 그런 부추김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지 않은가?
물론 사건의 전말을 보면 사건의 미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한미 관계는 마치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美양원합동회의에 가서 미국 지도자를 훈계하듯 강경 연설을 한 뒤 미국 정부의 이대통령에 대한 신임이 급격히 떨어진 때와 비슷한 양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통령은 휴전 후 미국을 방문하면서 내셔널 프레스클럽, 샌프란시스코 연방클럽, 필라델피아 재향군인회, 로스앤젤레스의 세계문제협의회 등의 연설을 위해 올리버 박사에게 원고를 쓰도록 부탁했다.
올리버의 회고록에 따르면, 올리버 박사가 원고를 써 올릴 때마다 별로 고치지 않고 '좋다'고 했다.
그러나 양원합동회의 연설문은 스스로 썼다. 올리버 박사는 여러 번 사정하다시피 그 원고를 한 번만 보여 달라고 했다. 백악관 만찬 후 블레어하우스에서는 단 한 자도 고치지 않을 테니 그저 한 번만 읽어보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그 원고가 든 가방을 끌어안으며 아무 말도 않은 채 완강한 거부 태도를 보였다.
올리버의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꺾을 수 없는 고집의 표시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7월 28일 드디어 의사당에 나가 "미국이 한국에서 對공산주의 전쟁을 벌벌 떨면서 그만두게 됐다"고 비난하고 "어리석게도 휴전에 동의했다"느니 "한국이 다시 공격받기 전에 워싱턴은 소련의 기습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등의 일장 훈시를 했다.
그날 이대통령의 연설은 많은 박수를 받기는 했으나 미국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이승만과는 애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짓게 됐다.
박대통령이 78년 12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엉터리 선거'에 의해 제9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즈음 미국은 한국의 인권 문제와 민주화에 초조할 정도의 관심을 높이고 있었고 약간의 위협용으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있었다.
1979년 6월 29일 카터 美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나는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 이 카터-박대통령의 만남이 양국에 얽힌 많은 문제를 풀어 줄 것을 빌었다. 그러나 박-카터 회담에서 박대통령이 회담 시간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면서 철군의 부당성을 들어 일방적으로 미국 행정부를 공격하는 발언으로 일관해 분위기가 밝게 끝나지 못했었다. 韓 · 美의 관계가 어긋나면서 카터 대통령도 차기 선거를 위해 미국 유권자들에게 줄 선물(인권 문제 등)을 별달리 얻지 못한 채 쓸쓸히 돌아갔었다.
그 뒤 가발 공장 여종업원들을 신민당사에서 끌어낸 소위 YH사건,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제명사건 등 계속 불행한 사태가 한국에서 발생했고, 이때마다 美국무부는 '개탄한다' 등의 非외교적 용어까지 써가며 박정희 정부를 비난했었다.
물론 나는 이 고차원적인 정치 문제를 애기할 처지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내 직업 군인 생활을 송두리째 마친 입장에서 볼 때 양국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어긋나고 있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미국이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 김재규를 움직일 수 있었다거나 움직일 엄두를 낼 수 있었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17~20p


김진명은 제임스 하우스만이 10.26에 관련되어 있으며, 김재규를 1회용 소모품으로 토사구팽했다고 말한다.

미국 내에서도 박정희 암살에 미국이 개입되었다고 의심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 교수가 CIA에 박정희 암살에 관한 자료를 공개하라는 정보공개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전두환이 12.12 이후 글라이스틴 미 대사에게 10.26에 미국이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있다며 몰아붙였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주장도 당시 미국 상황을 보면 이런 초대형 사건을 계획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불과 4년 전에 쿠데타로 휘청거리던 남베트남이 완전히 공산화되어 버렸고 그 여파로 주변국들인 캄보디아라오스까지 도미노 이론을 입증이나 하듯 공산화되어 버렸다. 또 중동의 최대 친미 정권이었던 이란팔레비 왕조1979년 초 혁명으로 무너졌고 여름에는 훗날 이란-콘트라 사건의 배경 중 하나가 되기도 한 니카라과가 공산화되었다. 그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으로 CIA가 대단히 바쁠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암살은 뒷수습도 뒷수습이며 암살로 인한 갑작스러운 강력한 정권의 붕괴는 쿠데타의 완벽한 배경이 될 수 있고 이런 혼란 상황은 베트남 공화국의 재현과 한반도 공산화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런 제의를 위해선 대통령 암살 이후의 계획 또한 제공되어야 하는데, 쿠데타 이후의 행적이 일관성과 계획이 있다고 무리가 있다.

6. 민주화 열망 및 미국의 묵인이 있었다

민주화설과 미국 사주설을 결합한 가설. 일단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이기만 하면 그 다음은 미국이 어떻게든 알아서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추측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미국이 명시적으로 김재규를 사주한 것은 아니지만, 뭔가 책임을 져 줄 것처럼 잘못된 신호를 줬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김재규가 미국의 신호를 잘못 해석했거나. 이 이론은 암살 이전의 치밀한 계획 + 암살 이후의 우왕좌왕을 설명해 주는 가설이다.

실제 김재규는 1979년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과는 정기적으로 만났으며 대부분의 대화 내용은 한국의 인권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공개된 비밀 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 10.26의 주모자가 김재규라는 것을 몰랐기에 글라이스틴이 박정희 암살을 권유하거나 지시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글라이스틴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을 김재규가 암살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원래 외교적 수사라는 게 그런 식이니까.

미국의 영향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은 '암살 묵인'과 '사후 추인'을 구두 승인했을 가능성이다. 김재규의 공작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가정해 보자면 "박정희는 암살되고, 새롭게 정부가 구성된다"라는 결론이 나게 된다. 여기서 미국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이 박정희 암살과 민주화를 일종의 "반역죄"로 보고 승인을 하지 않을 것인가, 일종의 "혁명"으로 보고 승인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김재규의 암살로 만들어질 "새로운 민주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쟁점이다.

현실적으로 어느 국가 지도자암살하는 것은 아무리 초강대국 미국이라고 해도 정치적 부담이 굉장히 큰 일이다. 대놓고 쳐들어가서 체포도 한 적 있지만 그러나 김재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암살 사건을 저지른 다음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민주화를 하고, 미국은 사후에 승인을 하는 형식이라면 정치적 부담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의 신변은 미국에서 미국의 압력에 따라 민주화 정부에서 단순 살인죄에 대한 '사면' 혹은 미국이나 제3국으로 '망명'하는 형식으로 '신변 보장'을 할 수도 있다.

7. 정권 반대 세력 관리 방식에 대한 이견

민주화와 권력 다툼의 변형으로 현재 유력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김재규는 당시 정권 반대 세력 관리 방식을 놓고 박정희, 차지철과 상당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이것이 암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미 부마항쟁 1년 전인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이런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유신 독재 정권의 압도적인 관권, 금권을 등에 업은 집권 민주공화당이 제1야당 신민당에 지역구 득표율에서 오히려 뒤진 것이다. 당시 공화당은 31.7%, 신민당은 32.8%로 그 격차는 불과 1.1%p였지만, 민주화를 내세운 제1야당의 득표율이 집권당을 넘어선 건 헌정 사상 최초였다. 여기에 제3당인 민주통일당의 득표율 7.4%를 감안하면 10대 총선은 사실상 집권당의 참패였다. 지역구 당선자는 공화당이 68명으로 신민당의 61명보다 많긴 하지만 차이가 크진 않다. 박정희가 임명하는 유신정우회가 없다면 국회에서 공화당과 신민당은 사실상 박빙 상태였다.

실제 김영삼 체포 등의 야당 탄압, 민주화 요구 묵살 등에 대해서 김재규가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 그러나 박정희와 차지철은 끝까지 강경 일변도의 진압을 주장하였고, 박정희는 총기사용 진압을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을 죽였는데 우리라고 1~200만명 정도 못 죽일 것 없지 않겠냐는 소리를 했다고 김재규는 법정에서 진술했다.[4] 정리하자면 김재규가 민주화를 원했다기보다는 당시 정권 반대 세력들에 대한 관리 방식을 가지고 충돌이 일어나 살인까지 갔다는 의견이다. 자신들의 정권 반대 세력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는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 통제가 강한 국가의 권력층에서 늘 논쟁거리다. 이 논쟁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7.1. 분노에 의한 우발적 암살

실제로 차지철은 특전사 창설 멤버로 육군 중령으로 진급 후 바로 전역했지만 김재규는 박정희와 육사 동기였고[5] 실제 3군단장까지 역임했던 3성장군 출신이다. 워낙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보니 흔히들 김재규를 4성장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김재규는 예비역 중장이다. 의외로 10.26 당시 동석자 중 한 명이었던 김계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육군 대장 출신이다. 당시 참석했던 인물의 병역 사항을 살펴보면 박정희는 대장 예편, 김계원도 대장 예편, 김재규는 중장 예편, 차지철만 겨우 중령 예편이다. 그만큼 차지철과 계급차가 컸다.

하지만 이 역시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밤 거사하겠다"라고 말하고 박정희 사살 이후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단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6] 이후 행동의 어설픔들은 거사 직후의 당황, 거사 직전까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조차 속내를 숨겼던 내부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아니겠냔 의견도 있다. 즉, 평소 가지던 불만에 당일의 분노가 기름을 부은 것이라는 의견.

당시 차지철과 김재규의 상호 견제는 절정에 달해 있었는데 이러한 암투 속에서 박정희가 차지철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자 결국 자신이 밀렸다고 판단한 김재규가 10.26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차지철은 성격이 안하무인이라 박정희의 총애를 받자 대통령 신변 보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서서 기타 영역에까지 손을 뻗치는 월권 행위를 일삼았는데 이에 김재규를 비롯한 박정희의 측근들이 박정희에게 차지철의 월권을 경계하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는 차지철을 오히려 두둔했고, 도리어 차지철 앞에서 김재규에게 면박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차지철의 횡포는 더 심해졌고, 때문에 거사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김재규의 제자였던 이만섭이 추정한 설이기도 하다. ##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도 김재규가 거사 직전 " '대위 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7]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도 않고...'라 말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8]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면 10.26이 사전계획된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겨 충동적으로 저지른 우발적 행동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김재규가 거사 직후 자신의 본거지였던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가는 등 김재규의 행동이 계획적이라기엔 너무 어설펐기 때문이다. 김종필도 10.26의 발단은 차지철과 김재규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고 우발적으로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덧붙여서 박정희 집권기에 두루 요직을 거치면서 그렇게 박정희에게 충성하던 사람이 법정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처음부터 계획적인 혁명을 한 것마냥 민주화 투사로 둔갑하였다고 주장했다.[9]

7.2. 박정희의 정권 유지 능력 퇴보

권력구도의 측면에서 보면 대통령경호실장이 자신의 권한 밖에 있는 전횡들을 일삼아 주변의 원성을 들었던것은 박정희 정권의 말기적 징후 중 하나라고 보는 경우를 든다.

박정희는 2인자들에게 충성 경쟁을 시키는 2인자 박치기 수법이라는 것을 잘 이용하였는데 이는 정권에서 자신을 독단으로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실세 2인자의 출현을 막는 기능을 하는 동시에, 정권의 핵심인물들간에 균형을 유지해주는 절묘한 순기능도 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1974년 영부인 육영수가 피살되어 철저한 대통령 경호를 명분으로 사실상 2인자로 대두한 차지철 경호실장은 자신의 권한을 넘어선 엉뚱한 짓들을 하여 주위의 원성을 샀다. 과거에는 심복들을 철저히 경계하고 단속하였던 것을 나이가 들어 측근들을 너무 믿게 되었고 이는 이전에 보이던 심복들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나마 대통령 주변의 불화를 제어할 수 있었던, 차지철도 어쩔 수 없었던 역대 최장수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은 경질되어 주일대사로 발령보내고 후임 대통령비서실장에 김계원을 임명하였다.[10] 실제로 김정렴이 10.26 이후 급히 귀국했을 때 청와대 시절 동료들은 "당신이 청와대에 계속 남아 계셨다면 각하께서 이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는 일은 없었을텐데"라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정렴이 계속 비서실장을 맡았다면 10.26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후임자인 김계원은 1971년부터 1978년까지 오랫동안 대만대사로 나가 있었다가 갓 귀국해 국내 정국에 어두웠기에 이전의 김정렴 비서실장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이는 김재규에 동조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하여간 당시 상황은 박정희가 여전히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정국에 대한 통제력과 통찰력이 이전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었음을[11] 보여주는 의견이다.

공교롭게도 이같은 현상은 이승만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도 기본적으로는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하였는데 80대에 접어들어 평소에 자주 접견하는 자유당의 고위인사들을 무조건 신뢰하게 되었으며 특히 곽영주 경무대경찰서장(대통령경호처장)은 "부부통령"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였고 이들은 대통령의 총애를 마패로 삼아 각종 권력형 범죄를 저지르는 물의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4.19 혁명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7.3.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위치의 위험성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에서 최전선을 담당했으며 역대 중앙정보부장은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다. 하지만 박정희가 장기 집권하고 있는 한 중정부장의 막강한 권력도 시한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거대한 위치가 중정부장 개인의 일신에는 위험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등 권력을 휘두르던 중정부장들은 최종적으로 박정희의 견제를 받아 몰락하는 수순을 받았다.

특히 김형욱의 말로가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실각당한 이후 앙심을 품고 박정희가 미국 정계에 벌인 불법 로비들을 폭로했는데 이후 거짓말 같이 김형욱은 사라지고 만다. 이 암살 시점이 10.26이 있었던 같은 달 10월 초였고 몇 주뒤에 김재규는 박정희를 살해한다. 김형욱의 죽음을 보고 김재규가 자신 역시 단지 박정희의 소모품일 뿐 언젠가는 실각당하거나 처참한 말로를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고 박정희 정권에 회의를 느끼게 했다는 분석이다. 더불어 청문회 증인으로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던 김형욱을 암살했다는 사실은 김재규에게 엄청난 불안감을 안겨주었을 가능성이 크며 가뜩이나 차지철과 2인자 경쟁에서 밀린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이 김형욱 암살로 박정희가 자신을 미국에게 희생양으로 넘기며 토사구팽할거라는 불안감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8. 장준하-김재규 밀약설

한편 장준하와의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밀약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지만 평소에 장준하와 김재규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장준하의 아들인 장호권에 의하면 장준하 사후 김재규가 여러 모로 유족들을 도와줬다고 하며,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 며칠 전 김재규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다만 김재규의 행동이 장준하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주변 인물들의 증언 외에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상태다. 이런 밀약설 중에는 시인 김지하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 사이에도 쿠데타에 대한 의논이 있었으며 성공할 경우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국회의원의 1/3 이상을 자기쪽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즉, 실제로 시행 가능성을 전제로 둔 밀약이었다는 것. 이 밀약설을 주장한 사람은 김지하 본인인데, 그 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9. 김영삼 지지설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 당수 김영삼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설이다. 김재규와 김영삼 두 사람은 김녕(金寧) 김씨 문중의 종친이었고 이 점에서 야당 지도자임에도 김영삼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으며 도리어 그가 박정희 대신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지하여 10.26을 저질렀다는 주장. 다만 이는 관련자의 증언, 물적 증거가 전혀 없는 개연성, 추측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할 내용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다음에 나올 건강이상설보다는 그럴듯해 보인다.

10. 건강 이상설

중앙일보 김진 前 논설위원은 발기부전을 비롯한 건강 문제가 하나의 원인이라고 근거 없는 주장을 했다. 실제로 김재규는 간경변을 앓고 있었고 10.26 당시엔 중정부장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의 간 기능 장애로 극심한 발기부전을 앓게 되어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생겼고 이것이 10.26 같은 암살을 저지른 한가지 먼 원인이 되었다는 것. 그저 당시 김재규의 정신적 혼란에 대한 먼 원인을 추측한 것일 뿐 큰 의미는 부여하지 말자. 해당 칼럼에 대한 비판.

다만 위의 김진의 억측은 밀어두고 궁정동 연회와 관련해서 김재규의 건강 문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당시 김재규는 간경변을 앓고 있었다. 간경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간경변 환자에게 술은 독약이나 다름없다. 이런데도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으로 연회 때마다 술을 마셔야 했다. 반면에 차지철은 건강한데도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술 하나만으로는 사람을 죽일 정도로 분노하는 것이 어렵지만 이전부터 분노가 쌓인 상황에서 박정희가 독약이나 다름없는 술을 강권하는 것 때문에 분노가 폭발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술기운과 분노가 쌓이자 원래 계획한 치밀한 암살계획 대신 급작스럽게 암살을 진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주장들이 존재하며 위의 추측 중 여러 가설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매우 많다. 그만큼 김재규의 암살은 이해하기 어려운 뜻밖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차지철에 대한 적개심 등 여러가지 복잡한 심리가 뒤죽박죽 짬뽕, 극대화되어서 저지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암살이나 이후의 판단 미스도 이해는 간다. 예를 들어 유신 체제를 지속하는 박정희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전임 김형욱 부장의 암살을 지켜본 뒤 불안감을 키우던 김재규가 부마항쟁 현장을 방문하고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박정희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으나 26일 궁정동에서 차지철의 도를 지나친 무례한 행동과 술기운에 욱하는 바람에 "궁정동 안가에서 중정 직원들만으로 현장을 제압할 수 있는 지금이 기회"라는 판단을 굳히고는 아직 미완이었던 계획을 급하게 앞당겨 실행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후 김재규의 혼란스러운 행동은 아무리 계획된 암살이었더라도 자신이 수십 년 충심으로 따르던 박정희를 막상 자기 손으로 암살하고 나자, 김재규 스스로도 충격과 공황 상태에 빠져 정승화가 하자는 대로 육본에 따라가는 등 판단 미스를 거듭한 것일 수도 있다.

11. 최태민 원인설

사실은 최태민도 10.26 사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주장도 있다. 상당한 기간동안 전두환 합수부가 제시한 예정된 민중 혁명과 정권 붕괴가 촉발한 유신 권력 내부의 모순 격화와 권력 다툼으로 인한 우발적 사건 정도의 프레임에서 평가가 진행되었지만 사료가 점점 축적되고 발굴되어 '과연 당시 시민 사회의 역량이 과연 유신 정권을 몰아낼 정도로 굳건했는가? 김재규 개인의 신념과 동기가 그렇게 무시하고 축소할 만한 것인가?' 에 대한 문제 제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재평가와 재조명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하여 과거의 축소 해석을 비판하는 관점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이미 2010년대에 들어 해당 의견이 수면위로 올라오면서 갑작스러게 정치적 의도에 따라 조작되어 조직된 것은 아니다. 학술적 층위에서는 상기된 축소 해석에 대한 비판은 민주 회복이 이루어진 1990년대 초에 벌써 나타나기 시작하며, 저렇게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컨센서스가 2010년대 초 확고히 성립된다. 예로 최종적으로 10.26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는 않던 진보 성향 역사학자 서중석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이전 이미 '김재규 개인의 신념과 동기'를 10.26의 성립 배경 중 하나로 확실히 언급하고 있다.

사실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판단력이 우둔한 편이었다. 눈치 없이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밀회 문제를 자주 보고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중앙정보부 잠복이 정의감 또는 호기심으로 그녀를 밀착감시하며 보고서를 올리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용들은 정보부 내부에 삽시간에 퍼졌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가족들을 통해, 친구를 통해 사회에 전파됐다. 영부인이 저격되었을때, 박근혜는 23세였다. 이때부터 전과(범죄)가 수십 개라는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접근해 신뢰를 독점했다. "구국 봉사단"이니, "새마음 봉사단"이니 하는 것을 만들어 최태민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따라서 항간에는 아름답지 못한 소문들이 공공연하게 많이 돌았다. 실제로 2011년 당시 WikiLeaks2007년 7월 20일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미국대사본국에 보낸 보고서 내용을 폭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최태민은 러시아 제국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과 흡사한 사람이며, "한국 사회에 인성이 형성되는 나이20대 초반에 박근혜의 영혼을 통제하면서 그의 자녀들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였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위와 같은 언급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일 무렵 전국충격에 빠트려 탄핵여론에 박차를 가하게 만든 대목이기도 하다. 하여간 10·26 이후에도 박근혜는 전두환을 찾아가 최태민과 함께 두 개의 봉사단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의 명예를 위해 최태민을 동해안부대추방해 박근혜와의 접촉을 차단시켰다.

흉한 말이 돌 때마다 김재규 부장은 쓴 말을 해야 한다면서 자주 보고를 했고, 그럴 때마다 대통령은 짜증을 냈다. “애미 없이 그거라도 마음 붙이고 지내는 가엾은 애를 왜 자꾸 건드리느냐.” 말년의 박 대통령은 점점 외로워졌다. 청와대의 야당으로 불릴정도로 쓴소리와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아내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위에서 언급한 "정권유지능력의 퇴보" 문단에 나와있듯이 2인자가 지나치게 부상하는 것을 방지하고 심복들간에 상호견제를 하는 방법으로 정권을 지탱하던 박정희의 통치력이 약화되는데 큰 영향력이 끼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사적인 대화를 나눌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차지철 대통령경호처장 뿐이었다. 이를 믿고 차지철은 "각하"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자기보다 아래라는 태도로 대하여 주변의 모든 이들이 매우 싫어하였다. 하필 이때 대통령은 경호실장이라는 특성상 가장 많이 대화를 주고받게 되면서 차지철에 대한 주변의 많은 불만과 우려를 접하고도 이를 대수롭지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김재규 부장은 그의 형제들이 이권과 관련한 비리들을 저질러 대통령으로부터 ‘경고 친서’를 받기까지 했다. ‘경고 친서’는 옳지 못한 일을 한 공무원에게 대통령이 친필로 쓴 경고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다음 인사이동에서 김재규 부장이 탈락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한마디로 차지철 자신의 고유권한을 넘어서는 온갖 월권과 박근혜의 잘못된 행동을 다스리지 않는 대통령에 대한 김재규와 김계원의 충성심이 사라지고, 이는 대통령을 자주 면회하는 고위공무원들도 이들과 같은 감정을 지니게되어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나날이 쌓여갔다. 측근의 대부분이 으로 돌아선 셈이다.

대중적 층위에서는 당시 김재규항소했을 시 밝힌 동기가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재조명을 받고 있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民情首席)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읍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은 일이 있었읍니다. 중정본부에서 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김재규가 쓴 옥중수기에도 관련 내용이 나온다. #
***음력 12월 11일**

대통령 일가의 횡포

1.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관여치 말라는 노여움을 샀다).
2. 육사의 명예제도와 지만생도
- 백광현 고검검사가 조사를 담당함(당시 6국장)
- 김근수 중정제6국장이 사실 전모를 파악하고 있음.
참고. 최의민의 전화도청으로 최가 일일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사실(기록을 국장 소지 보관중)

*상기 내용은 혁명과 직접.간접으로 관계가 있으나 일절 언급치 않았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일이라서. 돕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간단히 여기에 기록하고 자세한 것은 후일 백 검사와 김근수 국장이 조사결과.

당시 김재규 변호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는 10.26 관련 책을 썼었는데, 신동아와 인터뷰를 했고 그게 2005년 12월호에 실렸다. 당시 김재규가 최태민을 주목했다는 점을 역시 증언하고 있다.
그는 김재규가 우발범이거나 패륜아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체제 회복에 나선 확신범 내지 양심범일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김재규를 몇 번 접견하면서 우발범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지잖아요. 꾸며서 말하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어요."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재규는 큰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 이런 일들이 '대통령이나 박근혜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조사 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여러 가지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해요. 박정희는 영부인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다고 해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改惡)'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
신동아 2005년 12월 #

이호 객원기자는 2005년 10.26 사건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던 김계원과 인터뷰를 했고 이것은 이코노미스트 811호(2005.10.31)에 실렸다.#, #

묻는 사람이 이호 기자고 답변하는 사람이 김계원이다.
「김계원:
그게 이제 (잠시 망설이다가) 차지철하고 김재규 최태민 때문에 많이 싸웠습니다. 최태민 아시죠? 다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두 사람이 싸운 걸 나중에 보면 최태민 때문이야. 차지철이 최태민을 앞세우고 박근혜양을 너무 업고 다니니까. 그러면 김재규가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 그러거든? 근혜양은 그때 어머니는 없고 외로운 그런 때인데. 근혜양은 자기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해야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왜 자꾸 나서서 그러느냐,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이 소리가 최태민을 통해 많이 들어가거든요. 최태민이 근혜양 앞에서 자꾸 알랑거리면서. 그러니까 근혜양은 어렵게 만든 놈이 다 최태민이야! 그래서 저놈을 때려잡아라, 그래 가지고 박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친 일이 있죠."

기자: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직접 불러 혼을 냈다는 말씀 아닙니까.

김계원:
예. 이건 내가 들어가기 전 얘기입니다. 내가 비서실장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비서실장이 돼 내가 김재규에게 '뭐가 제일 문제냐' 그랬더니 '큰 영애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그래요. 그게 뭐냐 했더니, 최태민 문제다 그래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최태민씨가 청와대 드나드는 것은 경호실 문제 아닙니까?

김계원:
뭐 본론으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는 건데, 최태민이 문제 있다는 걸 김재규가 얘기해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치고 막 이랬거든요. 나도 비서실장 하면서 중정이나 각 정보기관에서 올라오는 정보 보고서를 보니까 이건 뭐... 최태민이 그놈하고 관계가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요.
(최태민이) 나쁜 놈이야. 근데 근혜양은 이게 중앙정보부에서 모함해 그런 거다, 최태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정보부에서 모략을 해 자기 아버지 생각을 흐려 놓느냐고 하면서 오해가 생겼어요.

그런데 대통령한테 혼나고 나서는 최태민이 청와대에 못 들어왔죠. 또 근혜양한테는 못 나가게 했어요. 외출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근혜양이 밖으로 나가니까 그건 경호실 문제지. 그래서 박 대통령께 내가 한 번 물어봤어. 이 문제는 내가 청와대 들어오기 전에 있었고 김재규를 통해 주로 들은 얘기니까. 그걸 확인하려고 비서실장 된 뒤에 박 대통령한테 물어봤어.

'각하. 요즘도 최태민이 근혜양과 만났습니까.' 내가 그랬거든. 그랬더니 '아니야. 그놈의 자식 내가 아주 그냥 혼내놨어. 요즘은 근혜도 자주 못 나가. 자주 나가지 말라고 그랬어.' 이러시잖아요. 그러니까 대통령께서도 자식이지만 속이 아프고 하시겠는데 내가 직접 확인한 거니까.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청와대 출입을 못하게 됐는데 왜 최태민 때문에 차지철과 김재규가 다투게 됩니까.

김계원:
그 구국여성봉사단인가 뭔가가 집회를 청와대에서 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 멤버가 한 200여 명 된다고 들었는데 재벌들이 그 모인 멤버가 되는 것을 굉장히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청와대에서 그 모임을 한 번 하면 말이야, 재벌들이 큰 뭐나 된 것처럼 으스대고 이런 판이거든. 그걸 정보부에서 다 보거든. 문제가 된다 이거지. 그런데 출입증은 경호실에서 발행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또 싸움이 되고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지요. 김재규는 못하게 하고 차지철은 왜 막느냐 하고. 그래서 차지철은 김재규가 청와대 들어오는 것까지 막거든? 대통령한테 보고할까봐.

기자:
중정부장이 대통령한테 긴급 보고도 할 수 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가 들어오는 것조차 막았다는 겁니까.

김계원:
그래서 내가 청와대 간 뒤로 얼마 후에 김재규가 나에게 '실장이, 실장님도 과거에 청와대 들어오는 게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자네가 청와대 들어와 대통령께 보고드리는데 그렇게 들어오는 것이 어렵단 말이냐'내가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아유. 지금 저 차지철이란 놈이 어떻게 제한하는지, 왜 들어가느냐, 뭣 때문에 들어가느냐, 빠르다, 늦아, 시간이 길다.' 자꾸 자기 하는 일에 제동을 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아. 정보부장은 국가 유사시에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대통령을 못 만난다니 말이 되느냐, 난 어떨 때 새벽 1시에 가 대통령 주무시는 걸 깨워 보고드린 일도 있어' 그래서 경호실장이 하는 일을 내가 도중에 막을 순 없으니까 '자네가 정 급한 일로 들어와야 되는데 들어오기 어려울 때는 비서실장 만나러 온다'고 전화하라고 했어요. 비서실장이 오라고 하면 그건 누구도 못 막거든. 그래서 내가 한 네댓 번 바로 넣어준 일이 있어요 대통령한테. 차지철이가 그랬다고 글쎄. 그러니 김재규하고 안 싸워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차지철이 그토록 김재규를 막고, 김재규는 가까우니까 실장님한테 얘기하고, 그러면 결국 근혜양에게 실장님이 오해받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김계원:
그것만큼은 사실일 겁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정보부하고 쉬 틀어졌던 것이 김재규가 최태민 일로 자꾸 여러 가지 귀찮게 했는데, 그러니까 김재규는 김계원 사람이다, 왜냐하면 김재규가 나하고 가까웠고, 뭐든지 나한테 얘기하고 그랬거든. 김재규가 해군하고 같이 술 먹고 오다 차가 전복돼 거의 죽게 됐을 때 내가 언덕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걸 업고 와 살린 그런 인연이 있어요.

그래서 김재규가 그랬죠. 자기가 세상에 은인이 세 사람 있는데 하나는 박 대통령, 하나는 고 이종찬 국방부 장관, 그 다음에 김계원이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여태까지 박근혜가 아무 지장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됐는데 이게 자꾸, 김재규가 정보부장 되더니 브레이크가 걸리거든. 그러니 이건 틀림없이 김계원 지시다, 그런데다 큰 영애가 볼 때는 김재규가 하는 일이 김계원이 정보부장 할 때 하고 똑같구나, 그렇게 느껴질 거 아니겠어요?

기자:
실장님하고 근혜양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겠습니다.

김계원:
또 하나는 최태민이 대통령한테 혼나고 그 후에 내가 최태민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비서질장 밑에 큰 영애 전속 비서실을 만들어야겠다 싶어 대통령한테 '각하 비서실을 개편해야겠습니다. 영부인이 안 계시지만 큰 영애가 영부인 역할을 하고 있으니 공식 비서를 하나 따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재가받았어요. 그런 다음 내가 큰 영애에게 '비서를 따로 하나 두려고 그러는데 누가 좋겠습니까, 추천할 사람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좋아하면서 그때 구로공단 책임자로 있던 최명헌씨를 지명해요.

근데 그 사람이 또 최태민과 가까워요. 아주 곤란해 다른 이유를 대고 다른 사람을 말해 보라고 했어요. 그랬으니 큰 영애가 나를 좋게 생각했겠어요?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 최필립 비서관이라고, 우리 비서실에 있던 사람인데 걜 지명하더구먼. 그래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랬더니 걜 예뻐해요, 큰 영애가. 아 그런데 나중에 보니 최필립도 최태민을 아는 거야. 난 몰랐지 첨엔. 어떻게 이상하게, 최씨 세 사람이 그렇게 합쳐 움직여, 나 참"」

조갑제 기자는 월간조선 2006년 2월호에서 역시 김계원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여기서 최태민 문제가 이야기에 나타난다.#

기자:
얼마 전 金실장께서 차지철과 김재규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대통령의 큰 딸인 槿惠씨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원인』이라고 말씀하신 게 한 주간지에 실렸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김계원:
자꾸 차지철이 김재규가 하는 일에 제동을 거는데, 그중 하나가 박근혜와 崔太敏(최태민) 목사 문제였습니다. 최태민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청와대로)비난이 꽤 많이 들어왔어요. 결국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 구국봉사단 총재였던 최태민이 재벌 사람을 불러 돈을 모으는데… (액수가) 꽤 큽니다.

박근혜씨가 앞서서 돕기 때문에 김재규가 朴대통령에게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 「朴대통령이 딸 얘기만 듣는다」고 해요

기자:
당시 朴槿惠씨를 시집보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나요.

김계원:
朴대통령께 두어 번 말씀드린 일이 있어요. 그런데 한번은 朴대통령께서 최태민 얘기를 했어요.「최태민이라고 있는데 金실장 알아?」 그래요. >제가 알 수 없죠.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목사라고 하던데요」 하니, 「글쎄 목사라고 하는데 진짜인지 뭔지 모르겠어. 내가 불러 親鞫(친국)을 했는데, 요즘은 덜 만나는 모양인데」 그래요

기자:
최태민을 직접 불러 친국을 했다는 겁니까.

김계원:
네, 朴 대통령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김재규에게 사실이냐고 물으니 「親鞫을 했다」고 해요. 꿇어 앉혀서... 그런데 그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최태민의 청와대 출입을 방조해 놓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불만이 높았어요.

김재규는 자기 나름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 차지철이 볼 때는 김재규가 옆에서 자꾸 자기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니, 둘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고 봅니다. 김재규는 자연 청와대 출입이 어려워지게 된 겁니다

기자:
朴槿惠씨도 朴 대통령에게 김재규를 많이 비난했겠네요.

김계원:
그렇죠. 자연 그렇게 될게 아닙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감시하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니…

기자:
최태민이 기업체 회장에게 일종의 압력을 넣어 돈을 많이 모은다」는 보고가 청와대로 올라온 거죠.

김계원
그때 잘못한 일이 있는데, 최○○이라고 있어요. 그 친구가 청와대 비서로 있었는데, 제가 판단을 잘못해서 朴 대통령에게 「槿惠양이 영부인 일을 하고 있으니 그를 보좌하는 비서관을 두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어요. 대통령께서 「글쎄...」 이러시면서 「누가 좋겠냐」고 묻길래 「槿惠양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 의전수석인 최광수 이야기가 「최○○이 담당하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추천하지 않았겠어요? 최씨 몇이 몰리게 된 것이지요』

기자:
최○○은 최태민과 가까워졌겠네요.

김계원:
그렇죠. 제가 생각한 것과 영 달라지게 됐어요.

기자:
참 이상한 게 그전의 朴 대통령 같으면 최태민을 잡아넣었을 텐데.

김계원:
한 번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하시던데요
조갑제는 박정희가 최태민을 잡아넣을텐데라고 의문을 품지만 김계원 전 비서실장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라고 답변하고 있다.

김계원 전 비서실장에 따르면 김재규의 감정엔 분명히 최태민-박근혜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 김계원 전 비서실장은 박정희-차지철-김재규 사이를 지켜봤으니 상당히 믿을 만한 증언이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이 증언들은 2005~2006년에 한 것이다.

더욱이 김계원 비서실장의 주장만이 아니라 최태민을 증오하다시피 한 김재규의 태도가 사건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게 된다. #

1979년 11월의 합수본부기록에도 김재규의 증오가 드러난다. 다음은 기록에 나타난 정보부 수사 파트 K국장의 진술.
<김 부장은 "최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증오를 표시했다. 새마음봉사단의 부총재(총재 박근혜)인 사이비 목사 최가 사기죄횡령죄 등 비위 사실로 퇴임한 후에도 계속 막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 기업체 사장들을 운영위원으로 선임하고 성금을 뜯어내는 등 새마음운동 취지를 흐리게 해서 계속 동향을 감시하라는 김부장의 지시를 받았다. 79년 내사 결과 최의 이권 개입, 여자 봉사단원과의 추문 등 비위 사실을 탐지하여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한 바 그렇게 말했다.>
동아일보, 1992.08.29. 남산의 부장들 (107) 10.26의 서막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강경파와 온건파 간 권력투쟁론" 프레임을 비판한다. 이것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이란 의견이다. #
동아일보, 1992.08.29. 남산의 부장들 (107) 10.26의 서막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강경파와 온건파 간 권력투쟁론" 프레임을 비판한다. 이것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이란 의견이다. #

김재규가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그런 정치 문제보다도 1977년 봄 중앙정보부가 내사해서 작성한 "큰 영애와 최태민에 관한 종합보고서"때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이 내사 결과를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건의하자 박정희가 "정보부가 이런 것까지 내사하나?"라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당사자인 큰 영애 박근혜 씨와 최태민,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와 수사국장인 백 모씨를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른바 "친국"을 벌였다. 박근혜 씨와 최태민은 세간에 떠도는 풍문과 중앙정보부의 내사가 음해라면서 강력히 항변했다. 지금 같으면 특별검사에 맡겨 수사해서 규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자녀 관련 문제였지만 박정희의 친국으로 그 근거가 밝혀지지 못한 채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능력을 고려할 때 내사까지 해서 박정희에게 직보할 정도였으니 이는 당시에 심각한 내용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해당 보고서는 당연히 중앙정보부의 기밀자료 존안실에 보관돼 있다. 박근혜 후보가 유력한 대권주자이기 때문에 법률에 의한 정보청구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10.26사건의 원인에 대해 지금도 웬만한 학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집권층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권력 투쟁을 꼽는 것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갇힌 결과다. 무엇보다도 전두환 합수부는 훗날 대법원이 판결한 내란 집단과 동질적 조직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수사결과 발표란 실체적 진실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역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4년 전에 분석한 내용이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끼춰맞춘 내용은 아니다. 김재홍 교수에 따르면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권력투쟁'이 '전두환 합수부의 프레임'이며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11.1. 그 후

최태민 부분은 과거부터 증언과 기사를 통해 조금씩 제기되어 오기는 했지만 문제는 최태민과 관련된 내용 자체가 그동안 찌라시 취급을 받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2016년에 들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재조명되었다.

김재규의 이런 판단을 했다는 내용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보도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 헤럴드경제, 2016-10-26 13:02, 37년전 김재규 "박근혜-최태민 관계, 박정희에 건의해도 소용없었다" #

* SBS CNBC, 2016-10-26 11:27, [직설] 현대판 수렴청정... 최태민·최순실, 그들은 누구인가 #

* 한겨레, 2016-10-26 17:35, 1979년 박정희와 2016년 박근혜... 부녀 대통령의 10월 26일 #

그리고 김재규가 차지철 상대로 권력을 압박당한 계기는 바로 최태민 사건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된 최태민 관련 인터뷰를 다시 확인해 보자.
그게 이제 (잠시 망설이다가) 차지철하고 김재규 최태민 때문에 많이 싸웠습니다. 최태민 아시죠? 다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두 사람이 싸운 걸 나중에 보면 최태민 때문이야. 차지철이 최태민을 앞세우고 박근혜양을 너무 업고 다니니까. 그러면 김재규가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 그러거든? 근혜양은 그때 어머니는 없고 외로운 그런 때인데. 근혜양은 자기가 퍼스트 레이디로 활동해야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왜 자꾸 나서서 그러느냐,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이 소리가 최태민을 통해 많이 들어가거든요. 최태민이 근혜양 앞에서 자꾸 알랑거리면서. 그러니까 근혜양은 어렵게 만든 놈이 다 최태민이야! 그래서 저놈을 때려잡아라, 그래 가지고 박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친 일이 있죠."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직접 불러 혼을 냈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 이건 내가 들어가기 전 얘기입니다. 내가 비서실장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비서실장이 돼 내가 김재규에게 '뭐가 제일 문제냐' 그랬더니 '큰 영애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그래요. 그게 뭐냐 했더니, 최태민 문제다 그래요.

(중간생략 - 글쓴이)

최태민씨가 청와대 드나드는 것은 경호실 문제 아닙니까?

뭐 본론으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는 건데, 최태민이 문제 있다는 걸 김재규가 얘기해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치고 막 이랬거든요. 나도 비서실장 하면서 중정이나 각 정보기관에서 올라오는 정보 보고서를 보니까 이건 뭐... 최태민이 그놈하고 관계가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요. (최태민이) 나쁜 놈이야. 근데 근혜양은 이게 중앙정보부에서 모함해 그런 거다, 최태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정보부에서 모략을 해 자기 아버지 생각을 흐려 놓느냐고 하면서 오해가 생겼어요.

그런데 대통령한테 혼나고 나서는 최태민이 청와대에 못 들어왔죠. 또 근혜양한테는 못 나가게 했어요. 외출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근혜양이 밖으로 나가니까 그건 경호실 문제지. 그래서 박 대통령께 내가 한 번 물어봤어. 이 문제는 내가 청와대 들어오기 전에 있었고 김재규를 통해 주로 들은 얘기니까. 그걸 확인하려고 비서실장 된 뒤에 박 대통령한테 물어봤어.
​> 각하. 요즘도 최태민이 근혜양과 만났습니까.' 내가 그랬거든. 그랬더니 '아니야. 그놈의 자식 내가 아주 그냥 혼내놨어. 요즘은 근혜도 자주 못 나가. 자주 나가지 말라고 그랬어.' 이러시잖아요. 그러니까 대통령께서도 자식이지만 속이 아프고 하시겠는데 내가 직접 확인한 거니까.

(중간생략 - 글쓴이)

청와대 출입을 못하게 됐는데 왜 최태민 때문에 차지철과 김재규가 다투게 됩니까?
​> 그 구국여성봉사단인가 뭔가가 집회를 청와대에서 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 멤버가 한 200여 명 된다고 들었는데 재벌들이 그 모인 멤버가 되는 것을 굉장히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청와대에서 그 모임을 한 번 하면 말이야, 재벌들이 큰 뭐나 된 것처럼 으스대고 이런 판이거든. 그걸 정보부에서 다 보거든. 문제가 된다 이거지. 그런데 출입증은 경호실에서 발행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또 싸움이 되고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지요. 김재규는 못하게 하고 차치철은 왜 막느냐 하고. 그래서 차지철은 김재규가 청와대 들어오는 것까지 막거든? 대통령한테 보고할까봐.

(중간생략 - 글쓴이)

차지철이 그토록 김재규를 막고, 김재규는 가까우니까 실장님한테 얘기하고, 그러면 결국 근혜양에게 실장님이 오해받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것만큼은 사실일 겁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정보부하고 쉬 틀어졌던 것이 김재규가 최태민 일로 자꾸 여러 가지 귀찮게 했는데, 그러니까 김재규는 김계원 사람이다, 왜냐하면 김재규가 나하고 가까웠고, 뭐든지 나한테 얘기하고 그랬거든. 김재규가 해군하고 같이 술 먹고 오다 차가 전복돼 거의 죽게 됐을 때 내가 언덕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걸 업고 와 살린 그런 인연이 있어요.

그래서 김재규가 그랬죠. 자기가 세상에 은인이 세 사람 있는데 하나는 박 대통령, 하나는 고 이종찬(1916) 국방부 장관, 그 다음에 김계원이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여태까지 박근혜가 아무 지장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됐는데 이게 자꾸, 김재규가 정보부장 되더니 브레이크가 걸리거든. 그러니 이건 틀림없이 김계원 지시다, 그런데다 큰 영애가 볼 때는 김재규가 하는 일이 김계원이 정보부장 할 때 하고 똑같구나, 그렇게 느껴질 거 아니겠어요?

그 때문에 이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최태민은 김재규와 차지철 대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됐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의 '큰 영애와 최태민 내사보고서 '박정희의 역린' 건드려

강경파와 온건파 간 권력투쟁론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불과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그런 정치문제보다도 1977년 봄 중앙정보부가 내사해서 작성한 "큰 영애와 최태민에 관한 종합보고서"때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이 내사 결과를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건의하자 박정희가 "정보부가 이런 것까지 내사하나?"라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래도 박정희는 당사자인 큰 영애 박근혜 씨와 최태민,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와 수사국장인 백 모씨를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른바 '친국'을 벌였다. 박근혜 씨와 최태민은 세간에 떠도는 풍문과 중앙정보부의 내사가 음해라면서 강력히 항변했다. 지금 같으면 특검에 맡겨 수사해서 규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자녀관련 문제였지만 박정희의 친국으로 그 근거가 밝혀지지 못한 채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중정의 능력을 고려할 때 내사까지 해서 박정희에게 직보할 정도였으니 이는 그렇게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사보고서는 중정의 문서이니 만큼 당연히 중정의 기밀자료 존안실에 보관돼 있다. 박근혜 후보가 유력한 대선 주자이기 때문에 법률에 의한 정보청구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2012.10.26 #

최태민을 원인으로 지적한 날짜에 주목. 박근혜 게이트와 전혀 무관한 시기에도 이미 지적당할 정도로 최태민은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권력을 압박당한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리고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권력을 압박당하는 상황이었다고 주변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1.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계획한 정변이었다?

대법원 1980. 5. 20. 선고 80도306 판결 [(가)내란목적살인,(나)내란수괴미수,(다)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라)증거은닉,(마)살인(변경된죄명)] [전원합의체판결집(형2),49]
피의자신문조서(제1회) 김재규 진술서
김재규 등 피고인 8명에 대한 대통령시해사건 공소장 전문
"김재규의 범행동기는 계획적으로 보기엔 너무 엉터리고... 우발적으로 보기엔 치밀합니다.”
제5공화국 - 이학봉[12]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영향으로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위하여 정변을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이 날로 힘을 얻고있다. 그러나 검찰 조사 당시 김재규가 진술한 증언을 바탕으로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위하여 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최고권력자가 되기 위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주장에 의하면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것은 김재규 본인이 소요사태 수습에 대한 무능함을 드러냈고 본인과 형제들의 부정부패를 박정희가 알고 있었기에 자리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불안했던 점과 자신이 차지철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지만 박정희가 차지철을 신뢰하고 감싸는 행태에서 분노를 느꼈던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처음에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으로 차지철만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차지철을 죽이면 김재규 본인도 사형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결국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동시에 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후 김재규는 자신이 스스로 정권을 잡지 않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을 알았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직접 정권을 잡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김재규는 대통령과 차지철을 살해하고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잡으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 부마항쟁 이후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매우 커지고 이런 소요가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등 5대 도시로 확산되면 경제가 침체되고 박정희 정권이 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때 거사를 실행하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0.26 사건을 사전에 계획하여 실행했다는 것이다.

1979.10.27. 김재규 심문조서 및 10.28. 김재규 자필진술서(수사기록66-71쪽)에는 김재규가 쓴 범행 동기가 나타나 있다.
“본인은 76.12.4.부터 정보부장으로 근무해 왔다. 정국이 시끄럽고, 야당의 활동이 날로 적극화돼 가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본인의 수습방안이 실패를 반복하여 무능함이 노출됐다. 본인 및 형제 등의 이권개입과 비위가 노출되어 대통령으로부터 경고친서를 받아 놓고 있었다. 군 후배이자 연하의 차지철이 너무 오만방자하여 수차에 걸쳐 수모를 당했고, 대통령은 이런 차지철만 편애했다. 이런 사유로 79.4월 경부터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하고 군부의 지지를 받아 직접 집권하려고 결심했다. 그 후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곧 있을 대통령의 중요 인사 단행에 본인이 포함될 것이라는 데 대해 불안을 느꼈다. 10.19. 부산지역 소요사태를 관찰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컸다. 이런 소요가 서울 대구 등 5대 도시로 확산되면 경제가 침체되고 현정권이 끝장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에 거사를 하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본인은 10.26. 만찬기회가 결행의 적기라고 생각하게 됐다.
실제로 당시 언론들은 개각과 당직개편 계획을 보도했다. 여당은 경화정국 타개를 위한 방안을 논의했으며 정부-여당의 개편을 통해 국민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방법도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국수습 민심일신 위해 개각.여권 개편설

11월 17일 검사(법조인) 중령 전창열과 검찰서기 4갑 서윤석이 참여한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에서는 김재규는 다음과 같은 매우 상세한 자백을 내놓았다
문: 범행의 구체적인 계획은 언제부터 어떻게 세웠나요?
답: 본인은 금년 4월경부터 대통령 각하를 시해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각하께 궁정동 중앙정보부 식당 ‘가동’에서 만찬을 하시는 기회를 이용 시해하려고 마음을 먹고 이번 거사와 같이 3군 참모총장을 이용하려고 각하께서 도착하는 시간과 약30분 간격으로 본관집무실에서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고 불러놓았는데 당시에는 대통령 각하의 주변경호가 삼엄하다고 판단되어 거사에 성공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각 총장들을 김학호 실장으로 하여금 대신 저녁 대접케 하였는 바 본인이 각하와 만찬을 끝내고 돌아오니 그때까지도 각 군 총장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본인이 연희동 소재 명불상 음식점에서 술을 대접하고 끝낸 일이 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최근 일련의 정치사태가 경화된 정국으로 발전하여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또한 10월19일 본인이 대통령 각하의 명에 따라 ‘부산지역의 소요사태’를 관찰하려고 다녀왔던 바, 소요사태의 성격이 일반인 숫자가 월등한 것으로 보아 이는 서민의 조세정책에 대한 저항 및 정부불신임에 기인한 민란이라고 판단되었고 이것은 조속한 시일 내에 진정되지 않을 것이고 5대도시(서울 대구 등)로 확산되어 현 정권이 국내적으로 한계점에 이른 것이라고 판단되었고
국외적으로는 미국을 위시한 우방 국가들이 유신체제를 非민주적이라고 평가하므로 대외의존적인 한국경제가 여러 가지로 난관에 봉착할 것으로 판단, 지금이 거사의 적기로서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는 식당밖에도 경호차가 2대 정도 대기하고 경호관 숫자도 7~8명 정도여서 경비가 삼엄하였으나 최근에는 밖에 경호차도 대기치 않고 경호관도 4~5명 정도여서 경비가 허술하므로 더욱 용이하였고 궁정도 소재 위 식당은 전부 본인의 심복인 경비원들이 경계를 담당하는 중정자체 시설이므로 거사에 용이한 점 등을 감안, 범행 장소로 선택하였고 대통령과 차지철은 본인이 직접 시해하기로 하고 수행경호관들은 중앙정보부 비서실 직원인 본인의 심복으로 처치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대통령과 차지철을 본인이 직접 하지 않으면 실패할 염려가 있고(심정변화로) 또한 다른 직원들은 접근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 시해후의 범행구상 내용은 언제부터 어떻게 구상하였나요?
답: 본인은 금년 4월경부터 보안유지를 위하여 단독으로 구상하여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조시대 이래 2人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골똘히 구상했습니다. 그 내용은 대통령 각하를 시해한 후 우선 늘 참석하는 김계원 실장에게는 보안을 유지시키고 현장목격자로서 동조자로 확보하고 현장부근에 군 실력자를 유인 대기시켜 놓고 거사 직후 본인의 거사 목적과 의도를 설득 또는 협박하여 끌어들이고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계엄사령관을 조종하여 사태를 장악하고 계엄사령부를 서서히 군사혁명 위원회로 전화시키어 국민혁명으로 이끌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단시일내에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기존정당을 해체시키고 집행기관인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은 본인이, 부위원장은 육군참모총장으로 하여 군인들로만 구성하고 이를 감독하기 위하여 혁명회의를 설치 구성함에 있어서는 본인이 의장이 되고 국무총리는 부의장으로 하고 혁명위원은 관구사령관급 이상의 육군주요지휘관, 함대사령관급 이상의 해군주요지휘관 작전사령관급 이상의 공군주요지휘관 도지사급 이상의 각료전원으로 하고 다시 在京지구에 재직하는 사람은 상임의원으로 지방에 재직하는 사람은 비상임 의원으로 구성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혁명회의는 입법과 행정을 관장하고 부설기구로서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그 산하에 설치하되 혁명검찰부는 군민합동으로 참신한 검사와 군검찰관으로 구성하고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 있는 장관급으로 구성하여 유신헌법 기초에 참여한 자. 5·16혁명 주체로 권력 주변에서 치부한 자 및 악덕기업 및 특혜 재벌 등 비 동조 세력을 처단하고 재산을 국고에 환수한 후 본인의 거사목적과 의도를 국민에게 널리 홍보하여 국민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헌법기초위원회를 설치하여 국민이 원하는 헌법만을 연구 작성케 하여 국민투표에 회부하므로서 확정시킨 후에 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육군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를 사고현장 부근에 부른 이유는?
답: 처음부터 거사 후에 이용할 목적으로 유인 하였는 바 거사 후에 곧바로 와서 육군총장을 곁에 두고 데리고 다니면서 딴 생각을 못하게 계속 접촉을 유지하면서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령관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게 되므로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시키고 본인이 직접 사태의 진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미리 불러놓는 것이고 김정섭은 대통령과의 만찬관계로 본인이 직접 육군총장을 대접할 수 없으므로 그 공간을 메꾸기 위하여 본인의 대리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국내사태를 해설해 주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문: 만약에 상대방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답: 거사 후에 설득을 하여 혁명의 동조세력으로 이끌고 말을 듣지 않으면 협박 또는 감금을 해서 본인의 의도한 바대로 쫓아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바짝 붙어 따라다니며 감시를 한 것이고 우선은 사실을 속인 것입니다.
문: 식당정원에서 김계원 실장과의 대화 중 차지철을 제거한다고 제의한데 대하여 김실장이 반대하였다면?
답: 본인은 "그냥 농담이오" 하고 얼버무리고 또한 대통령 시해 현장에서 함께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문: 왜 대통령을 시해하였나요?
답: 본인은 중앙정보부장직에 있으면서 현 유신체제와 이를 방호하기 위한 긴급조치의 맹점과 부작용에 관하여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철폐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순리적인 방법으로는 안 되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하여야 하는데 현 체제는 강한 체제이므로 권력의 핵인 대통령을 살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거행하였습니다.
문: 그렇다면 왜 차실장까지 살해하였나요?
답: 본인이 거사를 하기 위하여는 장해자인 차지철과 수행경호관들과 함께 처리하여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또한 항상 차지철이 강경한 발언과 월권적 행동으로 농간을 부리어 본인이 각하에게 드린 건의가 좌절로 돌아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함께 제거하였습니다.
문: 그런 순수한 목적이라면 대통령만을 제거하고 현장에서 자살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지 않나요?
답: 물론 본인의 목적을 문서로 남겨 놓고 위와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본인이 살아남아야만 대통령 제거 이후의 혼란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뒷설거지를 하고 본인의 구상대로 통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 각하로부터 야단을 맞은 사실이 있나요?
답: 근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사태 수습에 있어서 중앙정보부장의 직책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수습책을 건의하였지만 최근에 들어 자주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통령 각하로부터 질책을 당한 것은 사실이나 본인이 무능력하다고 각하께서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형제간의 이권개입 문제에 개입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금년 4월경 각하의 개인 서신으로 “계씨인 김항규가 사업상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는데 주의하라는” 내용의 경고를 받은 바 있기는 합니다만 당시 중정 감찰실장인 김학호 소장으로 하여금 김항규의 비위사실 및 경위를 재조사하여 각하에게 보고 해명한 사실이 있으나 별것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또한 요직 개편설 문제는 사실 무근입니다
문: 전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답: 차지철이 본연의 업무인 경호업무 외에 월권을 하여 정치문제 등 광범한 업무에 관여하고 의견 및 주장에 있어서 본인과는 정반대로 강경일변도였으므로 못마땅하게 늘 생각한 것은 사실이고 차지철이 군 후배이고 연하자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또는 연장자에게 오만불손하고 방자한 행동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으나 본인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문: 대통령 시해 후의 정국혼란을 수습하고 주도권을 장악할 적임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였습니까?
답: 기존의 정치인 중 여당권에서는 대통령감이라고 생각되었던 인사는 전부 부정부패에 관련되어 있어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었고 야당권에서는 김대중이는 사상적인 하자가 있어서 곤란하고 김영삼 의원은 일응 출마는 할 수 있지만. 그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고 이철승 의원은 당 자체에서 사꾸라시 하므로 국민의 지지기반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통령 시해 후의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적임자는 우선 본인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과도기적 단계를 일정기간 지나 사태를 수습한 후에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려고 한 바 대통령 출마후보자는 일응 최규하 국무총리나 태완선 유정회 의장 등을 꼽을 수 있고 본인도 상황에 따라서 출마여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이번 거사를 위한 동조세력 규합은 어떤 방식으로 하려고 하였나요?
답: 별도의 조직을 활용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기존체제의 조직을 설득 내지는 협박을 통하여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중앙정보부 조직은 본인이 약 3년간 정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부하들이 본인의 의도를 잘 받들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무력은 없지만 전국적인 광범위한 조직이고 군 조직은 본인이 오랫동안 몸 바쳐 왔기 때문에 본인이 의도한 바의 혁명목적을 제일 먼저 동조할 것으로 생각하였고 평상시에도 본인은 군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주 접촉과 노력은 하였으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안문제가 있어서 의도를 노출시키거나 거사에 가담하라고 권유한 사실은 없습니다.
문: 대통령을 시해한 후 어떠한 방법으로 범행을 은폐하려고 하였나요?
답: 궁정동 소재 중정식당은 중정자체의 시설임을 주장하여 비상 국무회의의 결의 하에 따라 그날 밤으로 본인이 평소부터 신임하던 안전국장 김근수 등 안전국요원으로 하여금 궁정동 현장에 보내어 궁정동 소재 보안을 유지시키고 사건현장은 안전국 요원이 조사 중이라는 구실로 일체 비밀로 하고 본인이 의도하는 혁명이 성공단계로 접어든다고 판단될 때 국민 앞에 진상을 발표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이번 범행이 실패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답: 결국은 보안이 유지되지 않고 가장 믿었던 김계원 실장이 너무 빨리 변심을 하였기 때문에 본인의 의도와 목적이 채 관철될 시간여유가 없어 중도에서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김재규를 취조한 이학봉은 김재규와 잘 아는 사이였다. 왜냐하면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이었을 때 보안사에서 수사계장으로 브리핑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학봉은 부산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운전병한테서 박정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급히 사령부로 가니 수사관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김재규가 내일 새벽이면 새 세상이 와서 다 잡혀갈 놈들이 나를 조사한다고 큰소리치니까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학봉은 사태를 일단 "혁명적 상황"으로 판단하고 어떤 부대가 서울로 쳐들어올지를 빨리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새벽 1시에 직접 조사실에서 김재규를 만났다.

김재규는 이학봉을 알아보면서 "자네가 수사책임자야?"라고 말하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학봉이 김재규한테 "사령관님 왜 그러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김재규가 "이미 판은 끝났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게 나라를 위한 거야"라고 대답했다. 이학봉은 속이 바삭바삭 탔다. 분명히 거사에 동원되는 부대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중앙정보부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전두환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김재규가 자꾸만 동문서답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본 김재규는 이학봉에게 "그러지 말고 전두환 불러줘"라고 계속 부탁했지만. 이학봉은 "저도 뭔가 알아야 가서 말씀드리고 오시라고 할 게 아닙니까?"라고 대답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당시 김재규를 취조한 이학봉은 훗날 인터뷰에서 김재규는 잔재주를 부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은 우둔한 편이라 말했으며, 말을 들어보니 거사 전에 워낙 여러 가지 공상에 빠지다 보니까 실행계획이 너무 빈약했던 것 같다고 평가하며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겼다.
"김재규는 자기가 대통령을 하면 박정희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야당 탄압을 늦추고 민주주의를 하면 미국 대통령 카터와의 불화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였죠. 그리고 경제문제는 박정희 대통령같이 기업인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면 계속 문제없이 굴러간다는 사고였어요.
그리고 이상한 건 김재규가 우리보다 한 세대 위의 사람이라 그런지 미신을 많이 믿는 것 같았어요. 남산의 하얏트 호텔 아래 유명한 풍수쟁이가 있었죠. 그 사람이 김재규의 아버지를 이장하면서 앞으로 그 집안에 왕이 나온다고 했어요. 김재규는 그걸 믿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김재규는 거사가 있으면 미국이 동조할 거라고 계산한 것 같았어요.
그게 오판이었죠. 제가 김재규에게 ‘어떻게 그렇게 치밀하지 못한 거사 준비를 했느냐’고 뭐라고 했죠. 그랬더니 하는 말이 ‘대통령을 죽이는 거사를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현장에 있던 측근 몇 명에게 실행 순간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참모총장 정승화만 옆에 와 있게 해서 동조하는 모습으로만 보이게 하면 된다는 거였죠. 계엄령을 선포하고 비상기구를 만들고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는 거예요.
내가 김재규보고 ‘대통령을 죽이면 그 치명적인 도덕성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랬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김재규가 그건 적당히 얼마든지 다르게 꾸며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아마도 은폐나 조작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거 같았어요."
‘팩션’- 엄 변호사의 못다한 이야기 10·26과 김재규 그리고 어떤 진실 ③
그러던 중 김재는 수사관들이 상황 파악을 위해 켜 놓은 라디오에서 새벽 4시 10분께 '정승화 계엄사령관 임명 소식을 듣고 돌연 손뼉을 치면서 떠들어댔다고 전두환 회고록에 적혀 있다.# 허화평은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요청으로 범행 현장 인근에 있었고 사건 직후 육본으로 동행한 사실을 그때서야 수사관들이 알게 됐다고 한다. 이후 김재규는 계엄사령관 임명 사실을 전해 들은 뒤 안도한 듯 조사관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사실을 줄줄이 털어놓았다는 것이다.[13] 이때부터 3단계 혁명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이 술술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이학봉의 증언에 의하면 11월 8일. 김재규는 구체적인 “3단계 혁명 계획”을 실토했다.# 제1단계는 정승화를 시해현장에 유인,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군이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제2단계는 정승화로 하여금 군주도 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동원케 하여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케 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 정승화가 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김재규의 이 3단계 혁명계획은 매우 정교하게 진술됐다.

중앙정보부에 남아 있을 요원들을 연행하여 남산에 수용시키고 사건 현장만 조사하게 했다. 이후 현장증거를 인멸시키고 중정 간부를 소집하여 자신의 범행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고 안전국장이 진상을 조사하고 있다고만 알리게 할 계획이었다. 또 정승화 육군총장을 설득 또는 협박하여 혁명위원회를 발족시켜 국민이 납득, 호응할 수 있게 홍보하고 ‘10.26 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전환했다. 또한 정부 조직을 최대로 활용, 참여의식을 갖게 했다. 혁명위원회 의장은 김재규 본인이 하며 부의장은 국무총리, 위원장은 정승화와 상의하여 총장 또는 국방장관으로 하고, 위원은 전 각료, 각군 총장, 군사령관, 군단장, 관구사령관, 해군함대사령관, 공군작전사령관, 각 도지사로 한다. 위원은 상임위원과 비상임위원으로 한다.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검찰부는 군민 합동으로 참신한 검사 및 검찰관으로 임명하며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 있는 장성급으로 구성하고, 반혁명분자를 제거한다. 이후 빠른 시일 내에 김재규는 직접 대통령에 출마하여 집권하고자 했다. 김재규는 정보부장으로 근무하며 국내외 정보를 분석해 보니 우리나라에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없고, 나의 권한을 최대로 활용하면 대통령 시해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으며 중정의 조직력과 권한으로 군부의 세력을 장악할 수 있어, 스스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재규의 인맥은 대단했다. 정승화는 김재규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된 사람, 육군특수전사령부라는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있던 정병주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을 할 때 대대장으로 시작해 줄곧 인연을 맺어 온 사람, 수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3사령관인 이건영은 김재규가 정보부장일 때 차장으로 데리고 있다가 다시 3군사령관으로 내보낸 심복이었다 심지어 김재규는 이들과 상당히 자주 만나며 친분을 쌓아왔기에 당시 사실상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군맥이라면 자신이 쿠데타를 실행했을 때 동조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11월 8일, 이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구상해 왔다는 '3단계 혁명계획'을 실토했다. 제1단계는 정승화를 시해현장에 유인해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군이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제2단계는 정승화로 하여금 군 주도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동원케 하여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케 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 정승화가 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재규의 계획은 거의 들어맞았는데 김계원은 만찬 직전에 김재규에게서 박정희차지철을 죽일 거란 말을 들었으나 그의 말에 암묵적으로 동조했고,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만찬에 참석했다.[14] 김재규가 한 "형님 그놈을 해치워 버릴까요? 뒷일을 책임져 주시오.”라는 엄청난 말에 김계원이 선뜻 동의한 것은 차지철만이 아니라 박정희까지도 해치우겠다는 의도에 동의한 것이고 김재규가 언젠가는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는 데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는 해석이라는 주장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게 무슨 말이오? 경호실장을 죽이겠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설명해 보시오!"라며 크게 놀랐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차지철을 해치워 버리겠다"는 말이 국가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말 그대로 암살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는 주장도 있다.[15] 또 김계원은 박정희 살해 당시 밖으로 나간 것은 자신도 김재규에게 살해될까봐 두려워서였다고 증언했으며 법정에서 박정희 살해 후 김재규가 보안을 유지해 달라는 말에 "알았소"라고 이야기한 것은 '그때 김재규가 총을 들고 살기가 등등하여 그 장소를 모면하기 위하여 '알았어'라고 한 것뿐이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자 김계원은 자신도 살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김재규가 이 정도 일을 벌이려면 그에 맞는 지지세력이 있거나 치밀한 계획이 있다고 생각하여 김재규의 지시대로 박정희의 시신을 처리하고 사건현장 은폐에 동조하며 청와대를 통제했다.

한편 정승화가 10.26 사건 당시에 보여준 행동은 상당히 논란이 많다. 일단 10.26 사건 당시 피살 현장에서 매우 가까이[16] 있으면서도 김재규의 암살 시도를 눈치채지 못한 채 함께 차를 타고 육본으로 이동하였다. 또 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전성각 육군 소장에게 명령을 내려 수경사 병력을 장악하고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게다가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점이 정승화 전 육삼총장 공소장을 보면 함께 차를 타고 서울후암동소재 병무청 앞을 통과할 즈음에 김재규가 사탕같은 껌(네모난 계피 껌) 1개를 주어 이를 받아먹으려다가 그 속에 약물이 들어있어 김재규에게 이용당하지 않을까 의심하여 껌을 슬그머니 바닥에 버렸으며,[17] 상황 수습을 위해 정승화가 전군에 비상발령을 하고, 계엄군의 서울 진주를 위해 육군 ○○부대의 출동을 지시한 뒤에 대통령 시해범인이 측근이라면 청와대 내부의 소행인지 또는 김재규의 소행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수경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부대에 이상 없느냐, 병력은 모두 장악하고 있느냐"라고 물어보자 '아무 이상없다'는 대답을 듣고 청와대 내부의 소행은 아니고 김재규의 범행임을 확신하게 됐다. 그러나 김재규는 현직 중앙부장으로서 막강한 조직과 권력이 있고 그 배후에 상당한 추종세력이 관련되었을 것이며, 대통령 시해 후 나라의 실권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이에 동조하는 것만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믿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에도 박정희가 저격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긴 채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박정희가 죽었으며 자세한 경위는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보라면서 사건 경위를 축소하여 보고하였고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경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는 등 김재규의 정권장악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나 김계원의 실토로 10.26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라는 지시도[18] 정승화가 사실상 김재규와 한패였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정승화는 자신의 재판과 자서전에서 밝히기를 자신은 김재규와 친한 지인이 아니라 1979년 2월 총장 취임 당시에 처음 식사를 했을 정도로 서먹서먹한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시해 사건 당시에 총소리를 듣긴 했으나 그 총소리가 먼 곳에서 난 총소리로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김재규가 피 묻은 셔츠를 입은 채로 자신에게 오고 나서야 그 총소리가 청와대에서 난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재규와 같이 차를 탄 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라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김재규는 "저도 정신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정승화는 김재규가 난장판이 된 만찬장에서 빠져나온 것뿐이라 판단하여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하며 박정희를 암살한 범인을 추론해 보니 청와대 같이 경호가 엄중한 곳에서 외부인이 대통령을 저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했고, 이에 청와대 경호를 맡고 있는 차지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즉, 정승화는 평소 차지철의 행보와[19] 여러 정황을 보아 범인이 차지철이라고 오판하여 수경사 병력을 장악해 차지철을 제압하려 했다는 것이다.[20] 또한 정승화 입장에서는 통치권자 유고상황에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범인이 누구인가보다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과 계엄선포 문제 등 사후조치문제가 더욱 시급하고 중요했기에 범인 색출이 우선순위가 아니였다. 그리고 김계원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어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했을 때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라는 말은 1997년 무죄 판결 당시 이 지시를 당시 김재규가 막강한 중앙정보부장이었기 때문에 조심해서 다루라는 뜻이었을 뿐 별다른 의미는 없었으며, 오히려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에게 조사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정승화는 전두환이 아닌 김진기 헌병감에게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다.

그러나 김재규와 정승화는 사건 현장에서 같이 차를 타고 와서 육본의 상황을 진두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둘이 마치 한 패인 것처럼 보였고, 다른 장관들이 이들의 눈치를 본 것은 사실로 보인다. 실제로 김계원이 김재규가 살해범이라는 것을 증언할 당시에 정승화는 "김 비서실장이 내가 김재규와 공모한 줄로 알고 눈치만 보고 있다가 그게 아닌 걸 알고서는 은밀히 내게 얘기한 것이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주변사람들 눈에는 김재규와 정승화가 마치 한패였던 것처럼 보였던 것.#

이러한 정황 때문에 수사를 맡은 이학봉 당시 중령은 전두환에게 김계원, 정승화 두 사람을 구속하여 수사해야겠다고 건의할 정도였다. 수사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김계원이 김재규의 범행에 동조한 것 같다고 판단했으며 정승화가 시해사건 현장 부근에 김재규의 초대로 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10.26 사건 직후 김재규가 단독범인지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전두환과 합수부 수사관들은 일단 정승화와 김계원을 공범으로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전두환은 이학봉에게 "김계원 실장은 구속수사해라, 그러나 정승화는 어제 계엄사령관이 됐다, 그러니까 함부로 할 수 없다. 지금부터 극비리에 내사를 더해봐라"라 지시했다. 훗날 전두환은 5·18 사건공판기록에서 이학봉 중령이 "육군총장이 대통령이 돌아갔다는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시신수습과 범인색출을 한 흔적이 없다, 청와대를 포위시켰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보고를 받고 정보부장과 대통령비서실장, 육군참모총장이 공모한 조직적인 내란이며 비록 계획은 실패했지만 정승화를 구속하면 배후세력에 의해서 또 다른 내란행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체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

이러한 이유로 정승화는 10.26 사건 후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직책에 있으면서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에게 약점을 잡혔고 전두환의 월권행위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당하고 말았다. 이후 전두환은 정승화가 김재규에게 이용 혹은 동조한 사실을 이용하여 정승화를 체포시키고 최규하를 하야시키는 쿠데타를 일으키며 권력을 잡았고 정승화를 사실상 김재규와 한패로 몰아 처벌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김재규와 한패가 아니였기에 하나회는 정승화와 김재규와의 연관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내란죄가 아니라 내란방조죄라는 이상한 혐의를 겨우 엮어 처벌했다.[21]

한편 대한민국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국무회의는 청와대에서 최규하 총리에 의해 열렸어야 하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김계원한테 전해 들어서 알고 있는 최규하는 경호실에 명령을 내려 대통령 시해의 현장부터 확보하라는 지시부터 내렸어야 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김재규가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김재규의 의도대로 국무회의를 국방부에서 열었다. 한마디로 최규하는 김재규가 정권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김재규의 뜻에 동조하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이는 김계원의 생전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신현확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오기 전까지 최규하 총리를 비롯한 장관들 중 진상을 밝히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내각이 완전히 무력화된 상황이었기에 김재규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김재규가 상황을 주도했다. 김재규가 이끄는 중앙정보부, 김계원이 이끄는 청와대, 정승화가 이끄는 60만 육군이 단합했던 것처럼 보였던 당시의 상황은 누가봐도 막강했으며 실제로 김재규의 쿠데타는 거의 성공직전처럼 보였다. 그러나 계엄선포를 해야한다는 김재규의 주장에 국무위원들이 반발하면서 김계원이 김재규의 배후에 친위 세력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배신을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만약 김계원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김재규가 주도하는 새로운 정부가 국가를 좌지우지 했을 것이다.

즉, 제2단계까지 성공적이었고 3단계까지 성공할 찰나에 김계원의 배신으로 정승화와 노재현이 진실을 알게 되어 김재규가 체포되고 박정희 살해를 순순히 인정함으로써 물거품이 됐다는 것이다.

허화평은 2019년 10월 25일 인터뷰에서 "김재규는 합수부 조사 때는 (범행을) 자책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를 민주 투사로 생각하는 변호인단이 구성돼 활동하면서 법정에서 수차례 진술(자필 진술서나 조사 과정의 발언)을 바꿨다"라고 말하며 그가 절대로 민주주의를 위한 거사를 행한 것이 아니라 주장했다. 그리고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전두환은 김재규를 "처세에 능하고 관운이 좋아 권력의 그늘에서 18년간 온갖 특권을 누린 사람"으로 평가하면서 "김재규의 언동에서는 자신의 평생 은인인 박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나 충성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충격이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일각에서는 만약에 김재규가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더라도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김재규는 스스로 대통령을 죽인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정권을 넘기려 하지 않고 스스로 최고 자리에 올라 정권을 잡았을 것이며 김재규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는 대통령을 시해한 살인자라는 비난과 자신을 총애한 박정희를 죽인 배신자라는 비난에 시달렸을 것이다. 결국 이런 비난 여론을 억압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아주 가혹한 독재자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며 김재규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YH 사건 당시 김재규의 태도에 대한 증언을 예로 든다.

1979.11.18. 계엄군법회의에서 김정섭은 YH사건과 김재규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했다.
“1979.8.9.10:00시경, YH회사 200여명이 회사 내 문제를 해결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서 발단이 됐습니다. 8.10.10:00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제해산을 결의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면 그물망, 매트리스 등의 안전장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함으로 며칠간 연기하자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김재규 부장의 강행 지시로 안전대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8.11.02:00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다.”
이어서 김정섭은 김재규가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에 대해 박대통령보다 더더욱 강경한 탄압 수단인 긴급조치10호를 건의했다가 대통령에 의해 거절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1979. 8월 중순 경, YH사건의 후유증과 도시산업선교회 및 카톨릭 농민회의 등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청와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때 김재규 부장은 ‘긴급조치 9호는 칼날이 무딥니다. 아주 강한 10호를 주십시오’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10월 하순경, CPX기간 중 B-1방카에서 같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에도 김재규 부장은 ‘각하, 긴급조치 10호를 주십시오. 그래야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하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각하는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정국수습이 되겠느냐, 당분간 9호를 가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라고 지시하셨고, 그 후 10호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1979.11.9. 계엄군법회의에서 있었던 김계원의 진술과 일치한다. 이어서 김재규의 범행동기를 물었을 때 김정섭은 이렇게 대답했다.
“부산 계엄사태로 부산에 다녀온 김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부산에 가보니 300만 시민 중 70% 이상은 유신에 호의적이더라. 시가와 항만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30% 이하의 반대세력은 행정기관이 잘만 선도하면 회복될 것 같더라.’ 김재규는 소영웅주의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으로 그를 따를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1979.11.9. 계엄군법회의에서 김계원은 위 김정섭의 진술을 뒷받침해주는 보다 제세한 진술을 했다.
“1979.8.10. 10:00경 YH 노무자 200여명이 신민당 당사에 집결, 계속취업을 요구했습니다. 배후에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고, 장차 노동계와 종교계가 합세, 강력한 대정부 투쟁 세력으로 진전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수습대책을 논하기 위해 8.10.10:00경 청와대 제 사무실에서 김재규, 류혁인 정무1수석, 고건 정무2수석, 김정섭 등이 모여 논의를 했습니다. 중론이 나왔는데 그것은 보사부장관이나 노동청장이 신민당사에 가서 해명과 시책을 설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정부 고위 관리가 신민당사에 가서 사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전례가 될 것이다. 금일 중으로 경찰을 투입해 강제해산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그날 야간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을 시킨 바 있습니다.”
또 이 계엄군법회의에서 김계원은 긴급조치 10호에 대해서도 진술했는데 그 진술 내용은 김정섭의 진술과 일치했다. 김재규는 긴급조치 9호보다 더 강한 10호를 강구했고 박 대통령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예를 들어 김계원과 김정섭 두 사람이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들이 현실과 일치하고 그 진술 내용들은 한결같이 김재규가 박대통령보다 오히려 훨씬 강경하고 탄압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하며 김재규가 만약 정권을 잡았다면 박정희보다도 더욱 잔혹하고 엄격한 독재정권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은 일화라고 주장한다.




[1] 자유나 민주, 대의라는 단어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주장하는 가치였다. 박정희의 여당 이름도 민주공화당이었으니...[2] 김재규는 1924년생에 중장으로 전역했고 1934년생인 차지철은 중령을 달고 군복을 벗었다.[3] 당시 김재규의 지병인 간경변은 심각한 수준까지 악화된 상태였다. 그래서 거사 실패 후 재판을 받을 때 "나는 사형당하지 않더라도 얼마 못가 죽을 목숨"이라고 변호인과 가족들에게 털어놓기도 했다.[4] 그러나 이 캄보디아 이야기는동조세력이 없어 순식간에 체포된 김재규 일방의 주장이라 사실로 단정짓기에는 굉장히 무리가 많다.[5] 박정희는 훗날 육사가 되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생이었고 김재규도 이곳 2기생이었다.[6] 하지만 분노라는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특히 당일 삽교천과 관련하여 분노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 있었기에 더 분노설이 지지받기도 한다.[7] 차지철은 사실 중령으로 전역했다. 하지만 대위 신분으로 5.16에 참여해서 초고속으로 중령까지 진급한 후에 전역해서 곧바로 국회의원이 되었기 때문에 김재규 입장에서 보면 기껏해야 대위나 달고 있던 놈이 운좋아서 벼락출세했다고 여길만 하다.[8] 사실 이 둘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두환까지 끼어서 알고 보면 셋이 서로 속으로는 갈등이 매우 심한 상태였는데, 다만 전두환은 두 사람과는 달리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꾹 눌러 참았다고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아무리 보안사령관이라지만 그때의 전두환은 소장을 경호차장에 준장을 차장보로 둘 만큼 기세등등했던 경호실장 차지철, 부총리급(국정원장이 장관급이 된 건 국민의 정부부터였고 그전의 중정부장 - 안기부장은 부총리급이었다.) 중정부장 김재규에 비해 끗발이 달렸다.[9] 김종필은 10.26이 계획적인 거사라면 상태가 불량한 총을 사용할 리가 있겠냐며 그 사건은 우발적인 것임이 틀림없다고 단언했는데 이에 대해 김계원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김재규의 총기는 불량이 아니었으나 본인이 김재규의 총격을 방해하는 과정에서 내구성에 문제가 생겨 격발 이상이 발생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 하지만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 밤 거사하겠다"고 말하고 박정희 암살 이후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행동의 어설픔들은 거사 직후의 당황, 거사 직전까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조차 속내를 숨겼던 내부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아니겠냐는 의견도 있다.[10] 1977년 도입한 부가가치세 신설을 주도했는데 이듬해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신민당+무소속의 득표에 밀리는 결과가 나오고 이에 경악한 공화당은 부가세 도입을 주도한 김정렴, 남덕우 등의 경제팀에 책임을 돌려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12월 개각을 단행하여 대대적인 인사교체를 하였다.[11] 즉, 이 시기에 박정희는 권력구도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정권 내부에서의 정치적 감각이 둔해졌다는 견해.[12] 실제로 이 말은 당시 보안사의 수사관 백동림이 했지만 드라마 상에서는 이학봉의 의견으로 각색되었다.[13] 이학봉 당시 수사국장은 이를 전두환에게 즉각 보고했고 수사관들은 정승화와 김재규의 공모에 대한 심증을 굳히게 됐다고 주장했다.[14] 훗날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김계원이 자신의 말에 동조했기에 살려뒀다고 이야기했으며, 만약 동조하지 않았으면 물론 농담이요라고 말한 뒤 박정희, 차지철과 함께 죽여 버릴 것이었다고 털어놓았다.[15] 이 견해는 다름 아닌 10.26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대법원 1980. 5. 20., 선고, 80도306)에서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대법관 등이 제기한 소수의견에 나타나 있다. 양병호 당시 대법관의 소수의견을 그대로 인용한다. "(김재규의)"해치워 버린다"라는 말이 깡패사회도 아닌 피고인들과 같은 국가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죽여없앤다는 뜻의 말로는 도저히 새겨들어지지 아니한다 할 것이고 피고인(김계원)이 위 T(차지철)를 암살하겠다는 것인 정을 인식하였다고 인정할만한 자료는 보여지지 아니한다."[16] 약 50m 정도[17]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는 사탕 대신 껌을 준다.[18] 전두환은 정승화가 김재규를 체포하라 했을 때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라는 말로 정승화와 김재규가 공범이라는 것에 확신을 얻었다고 주장하며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정승화를 사실상 김재규와 권력을 찬탈하려했다는 혐의를 씌웠다.[19] 정승화는 차지철은 야심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차지철은 경호실 상황실에 육군 예하사단에까지 직통전화를 연결하여 지휘관들을 제멋대로 부릴 정도였으며 군에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는 중이었다. 게다가 권력이 날로 막강해지자 군 일부 장성들이 차지철에게 찾아가 아부를 했을 정도였기에 이 사건이 단지 차지철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배후에 군 지휘관들이 개입된 심각한 사태라고 판단했다.[20] 이는 264일의 쿠데타 25페이지에서도 확인 가능하다.[21] 물론 민주화 이후에는 무죄로 판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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