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FFF> 장안국[1]의 국성{{{#!wiki style="margin: -15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60><tablebordercolor=#FFFFFF> 江陵 金氏 강릉 김씨 | }}} | |
관향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 ||
도시조 | 김알지 (金閼智) | ||
비조 | 태종 무열왕 (金春秋) | ||
시조 | 김주원(金周元) | ||
중시조 | 김영진(金英珍), 김영길(金英吉), 김영견(金英堅) | ||
집성촌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경기도 양주시, 김포시, 용인시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강릉시, 철원군 충청남도 당진시, 천안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 ||
경기도 장단군 황해도 안악군 평안북도 철산군 함경북도 부령군 | |||
인구 | 179,593명(20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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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前 신라의 국성으로 남북국시대의 헌창왕이 주도한 신라와의 내전 김헌창의 난을 일으켜 세운 맞대응 왕국인 장안국의 국성이다.시조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5세손 김주원이다. 따라서 김알지계에 해당하는 연원이 오래된 신라계 김씨다.[2] 현대 신라계 김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순왕을 근간으로 한 경주 김씨 및 그 분파와는 달리 신라 중대에 왕통을 이었던 무열왕의 직계 후손이다.[3] 다만 족보상으로 김주원은 무열왕의 삼남인 김문왕의 후손으로 되어 있고 더 신빙성 있는 사료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는 김주원의 후손인 김흔이 김인문의 후손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강릉 김씨는 문무왕의 후손은 아니다.
김주원은 777년에 시중이 됐고, 785년 선덕왕이 사망한 뒤 아들이 없어 여러 진골 귀족들에 의해 김주원이 왕으로 추대됐으나 정작 본인은 큰 비 때문에 수도 금성 북쪽의 알천이 범람해 건너지 못하여 화백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그 사이 왕위는 내물왕계인 상대등 김경신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그가 바로 원성왕이다. 그 후 원성왕은 김주원을 달래기 위해 명주(현 강릉시) 일대를 봉토로 주었고 후손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김주원의 윗대 세계 및 그가 받았다는 명주군왕의 작위는 사료와 교차 검증이 안 돼 불분명한데 이에 대해 자세한 건 김주원 항목 참조.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났음에도 그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아들들은 금성의 정계에 계속 남았다. 김주원의 아들로는 김종기(金宗基), 김헌창(金憲昌), 김신(金身)이 있었다.
첫째 김종기는 시중을 지내는 등 고위직을 역임했고, 김종기의 아들인 김정여(金貞茹) 또한 명원공(溟原公)으로 책봉되는 등 예우를 받았다. 또 다른 아들인 김장여(金璋如)는 시중을 역임하였다. 김정여의 아들인 김양(金陽) 또한 시중을 역임했으며 신무왕 옹립에 공을 세우고 문성왕 대에 권력을 떨치는 등 권신으로 유명했다. 김장여의 아들이자 김양의 사촌인 김흔(金昕)은 민애왕 대 대장군을 역임했으나 신무왕 옹립 때 사촌 김양과 대립하다 패배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소백산으로 들어가 승려들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후 김종기 계통은 후손이 끊긴다.
둘째 김헌창은 김헌창의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고 그 아들 김범문(金梵文)의 난이 연이어 일어났지만 실패하면서 멸족당했고 무열왕계는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족강일등).
셋째 김신의 아들은 김자사(金紫絲)였고 그 아들은 김동정(金東靖)이었으며 또 그 아들로 김영진(金英珍), 김영길(金英吉), 김영견(金英堅), 김영환(金英喚)의 4형제가 있었는데 이중 김영환을 제외한 3명의 후손이 강릉 김씨를 이어가게 되었다.
거의 강릉시, 동해시, 삼척시 등 강원도 영동 지방, 충청남도 천안시, 당진시에 많이 분포한다. 북한에도 집성촌이 많다. 서울에도 집성촌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 옆에 있는 팔판동(八判洞)이다. 강릉 김씨 집안에서 판서(判書)가 8명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4] 강릉 김씨는 조선시대에 들어 쇠락한 상태였는데 숙종조에서 영조조를 거치면서 28세 김홍주, 김홍권의 아들, 손자대에서 정승, 판서 등 고관이 한꺼번에 10명 가까이 배출되면서 가문의 위상이 높아졌다.
...김시환(金始煥)은 한미한 집에서 일어나 높은 지위에 이르렀는데, 그의 아우 김시혁(金始㷜), 김시형(金始炯)과 함께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한 집에서 열 사람이 급제하여 포홀(袍笏)[5] 이 상(床)에 가득하였으나, 몸가짐이 성실하고 근신하며 집에서는 우애하고 화목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만석군(萬石君)의 풍모가 있다고 일컬었다...
영조실록, 전 판서 김시환의 졸기#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강릉 김씨였던 김시습이 반기를 들자, 멸족을 면하기 위해 한성(서울)에서 동래(부산)로 피신한 김시습의 후손들 또한 부산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훗날 김시습이 생육신으로 추앙받으면서 복권이 이루어졌지만, 한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래에 계속 머물렀던 것. 그 후손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고, 현재 동래구에 있는 충렬사에 배향되어 있다. 본관인 강릉이나 강원도가 아닌 서울과 부산에 강릉김씨가 많은 이유다.영조실록, 전 판서 김시환의 졸기#
지리적인 이유로 강원도, 경기도, 경북까지는 제법 많은 수가 있지만 경남에서는 희성에 속한다. 강릉시에서 김씨라고 하면 약 80%의 확률로 강릉 김씨이다. 그러니까 80%의 확률로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다.
후삼국시대 명주(현 강원도 강릉시)의 호족 왕순식이 명주를 근거지로 삼았던 정황상 김주원의 후손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강릉 김씨였을 것이란 추측이 거의 정설처럼 퍼져 있는데 삼국사기나 고려사를 비롯한 정식 사서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나 기록이 전혀 없다. 원래는 그냥 이름인 순식으로만 등장하며 후에 왕건에게 신뢰의 증표로 개성 왕씨를 하사받아(사성정책) 왕순식이 되었다고만 되어 있다. 그의 가족인 아버지 허명, 아들 장명의 경우도 김씨로 등장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왕순식과 김주원의 관계는 엄밀히는 불명. 이는 순식과 같은 명주 지방 호족이자 김주원의 후손이라고 고려사 왕백 열전에 확실히 기록된 김예(金乂)의 사례와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예 역시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왕씨 성을 받고 왕예가 되었다.[6] 김예와 순식은 같은 명주의 호족이었으므로 어떻게든 관련은 있었을 가능성이 높긴 한데 적어도 순식이 김씨라고 표기된 사례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왕순식이 강릉 일대에 계속 거주하면서 그 후손들이 잘 살고 잘 먹으면서 세력을 불렸을 텐데, 고려 멸망 이후 다시 성을 새로 만들거나 원래 성으로 바꿨다고 했을 때 강릉 김씨나 강릉 최씨 정도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다른 성씨의 후보도 딱히 없다.
2. 항렬표
홀수 세손은 항렬자를 이름의 앞에 쓰고, 짝수 세손은 항렬자를 이름의 뒤에 쓰는 게 대부분이다.[7]]대수 | 항렬자 | 지지 | 대수 | 항렬자 | 십간 | 대수 | 항렬자 | 오행 | ||
33세 | 학(學) | 子 | 45세 | 만(萬) | 甲 | 55세 | 종(鍾) | 金 | ||
34세 | 병(秉) | 丑 | 46세 | 구(九) | 乙 | 56세 | 수(洙) | 水 | ||
35세 | 연(演) | 寅 | 47세 | 명(命) | 丙 | 57세 | 상(相) | 木 | ||
36세 | 경(卿) | 卯 | 48세 | 녕(寧) | 丁 | 58세 | 용(容) | 火 | ||
37세 | 진(振) | 辰 | 49세 | 무(茂) | 戊 | 59세 | 재(在) | 土 | ||
38세 | 기(起) | 巳 | 50세 | 기(紀) | 己 | 60세 | 호(鎬) | 金 | ||
39세 | 남(南) | 午 | 51세 | 유(庾) | 庚 | 61세 | 순(淳) | 水 | ||
40세 | 래(來) | 未 | 52세 | 재(宰) | 辛 | 62세 | 식(植) | 木 | ||
41세 | 동(東) | 申 | 53세 | 성(聖) | 壬 | 63세 | 환(煥) | 火 | ||
42세 | 유(猷) | 酉 | 54세 | 규(揆) | 癸 | 64세 | 희(喜) | 土 | ||
43세 | 성(成) | 戌 | ||||||||
44세 | 현(玄) | 亥 |
3. 인물
이름 | 생몰년도 | 파 | 비고 |
1~35세 | |||
김주원(周元) | ? ~ 780? | 시조 | 1세, 명주의 왕 |
김헌창(憲昌) | ? ~ 822 | 2세, 장안국의 왕 | |
김양(陽) | 808 ~ 857 | 4세, 신라공신 | |
김견술(堅述) | ? ~ ? | 한림공파 | 6세, 고려배향공신 |
김상기(上琦) | ? ~ ? | 한림공 만호공파 | 9세, 고려배향공신 |
김인존(仁存) | ? ~ 1127 | 한림공 만호공파 | 10세, 고려배향공신 |
김시습(時習) | 1435 ~ 1493 | 한림공 청간공파 | 23세, 생육신 |
김첨경(添慶) | 25세, 예조판서 | ||
김시환(始煥)[8] | 1661 ~ 1739 | 29세, 판돈녕부사 | |
김시혁(始㷜)[9] | 1676 ~ 1750 | 29세, 판돈녕부사 | |
김시형(始炯)[10] | 1681 ~ 1750 | 29세, 판의금부사 | |
김시영(始煐)[11] | 1694 ~ ? | 29세, 한성부판윤 | |
김상규(尙奎)[12] | 1682 ~ 1736 | 30세, 대사성 | |
김상익(尙翼)[13] | 1698 ~ 1771 | 30세, 예조판서 | |
김상중(尙重)[14] | 1700 ~ ? | 30세, 형조판서 | |
김상철(尙喆)[15] | 1712 ~ 1791 | 30세, 영의정 | |
김상집(尙集)[16] | 1723 ~ ? | 30세, 예조판서 | |
36세 | |||
김해경(海卿)[17] | 1910 ~ 1937 | 불명 | 소설가, 시인 |
37세 | |||
김진구(振九) | 1906 ~ 1987 | 대보공 평의공 감찰공파 | 국회의원 |
김진만(振晩) | 1918 ~ 2006 | 대보공 평의공 감찰공파 | 국회의원 |
김진선(振兟) | 1918 ~ | 대보공 평의공 회정공파 | 강원도지사 |
김진영(振榮) | 1935 ~ 2020 | 불명 | 야구선수 |
38세 | |||
김인기(寅起) | 1922 ~ 1997 | 태사공 부정공 참판공 사월파 | 국회의원 |
김문기(文起) | 1932 ~ 2021 | 태사공 부정공 보진재공파 | 기업인 |
김윤기(允起) | 1942 ~ | 한림공 모암공 고양파 | 건설교통부장관 |
김준기(俊起) | 1944 ~ | 대보공 평의공 감찰공파 | 기업인 |
김대기(大起) | 1947 ~ | 대보공 평의공 감찰공파 | 기업인 |
김택기(敬起) | 1950 ~ | 대보공 평의공 감찰공파 | 국회의원 |
김풍기(豊氣) | 1961 ~ | 불명 | 야구선수 |
김흥기(興起) | 1918 ~ 2012 | 한림공 청간공 위촌파 | 국회의원 |
김경기(敬起) | 1968 ~ | 불명 | 야구선수 |
39세 | |||
김주남(周南) | 1931 ~ 2009 | 옥가파 망상댁 | 건설부장관 |
김남일(南一) | 1977~ | 한림공 부정공 상주파 | 축구인 |
김남주(南珠) | 1971 ~ | 불명 | 배우 |
김남길(南佶) | 1980 ~ | 불명 | 배우 |
김남준(南俊) | 1994 ~ | 한림공 모암공 참판공파 | 가수 |
김남혁(南赫) | 1997 ~ | 한림공 부승공 고양파 | 인터넷 방송인 |
김고은(高銀) | 1991 ~ | 한림공 설담제공 피제파 | 배우 |
40세 | |||
김금래(錦來) | 1952 ~ | 불명 | 여성가족부장관 |
김광래(光來) | 1960 ~ | 태사공 부정공 임경당공파 | 교수 |
김기래 | 1964 ~ | 불명 | 정치인 |
김학래(學來) | 1954 ~ | 불명 | 코미디언 |
김별아 | 1969 ~ | 대보공 평의공 절도공파 | 소설가 |
김성래(聲來) | 1961 ~ | 불명 | 야구선수 |
김래원(來沅) | 1981 ~ | 한림공파 | 배우 |
김지민(智珉) | 1984 ~ | 대보공 평의공 감찰공파 | 코미디언 |
김종래(鐘來) | 1989 ~ 2022 | 한림공 삼괴당공 목천파 | 유튜버 |
김승래(Barber)(承來) | 1990 ~ | 월봉공파 | 미용사 |
김승래(承來) | 1995 ~ | 대보공 평의공 절도공파 | 프로게이머 |
김정은(定恩) | 1999 ~ | 불명 | 가수 |
41세 | |||
김동현(東賢) | 1994 ~ | 한림공 충순공 동래파 | 가수 |
김동호(東浩) | 1966 ~ | 한림공 송오공 참봉공파 | 군인 |
42세 | |||
김유연(猷然) | 2001 ~ | 한림공파 | 가수 |
김현유(玹猷) | 1976 ~ | 태사공 부정공 임경당공파 | 기업인 |
43세 | |||
김원길(元吉) | 1943 ~ 2021 | 한림공 모암공 현감공파 | 보건복지부장관 |
김지래(智來) | 1979 ~ | 한림공 모암공 참판공파 | 기업인 |
김남두(南斗) | 1978~ | 참의공파 | 변호사(김포) |
4. 후 강릉 김씨
경순왕의 6남 김건을 시조로 하는 분파. 김건의 어머니는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이다. 김건을 시조로 하는 다른 본관으로는 강서 김씨, 청주 김씨, 홍주 김씨 등이 있다.5. 분적
가평 김씨 시조 김계공(金繼恭)이 본 문중의 시조 김주원의 23세손이다. 200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7,524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 되었다.[1] 김헌창이 신라에 반란을 일으키며 세운 나라.[2] 이를, “범 경주 김씨계”라 칭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성씨로는 연안 김씨, 광산 김씨, 신 안동 김씨, 안동 권씨 등이 있다.[3] 경주 김씨 및 그 분파는 모두 경순왕계로 강릉 김씨와는 기원이 같은 별개의 성씨라 할 수 있다. 프랑스 왕국의 카페 왕조 - 발루아 왕조 - 부르봉 왕조의 경우도 모두 기원은 같지만 먼 친척 관계인 별개의 가문으로 친다.[4] 팔판동의 유래를 보면 단순히 판서 8명이 모여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이것이 강릉 김씨 집안의 판서 8명인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이를 사실로 전제하고 따져보면 정확히 판서 8명은 아니지만 정승, 판서급의 인물 8명을 찾을 수 있다. 즉 판돈녕부사, 예조·공조판서를 지낸 김시환, 판돈녕부사 김시혁, 판의금부사, 호조·병조판서를 지낸 김시형, 한성판윤 김시영, 예조판서 김상익, 공조판서 김상중, 이조·호조·병조·형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낸 김상철, 예조·병조·공조판서 김상집 등 8명이다. 판돈녕부사, 판의금부사는 돈녕부, 의금부의 종1품 판사(判事)로 정2품 판서(判書)보다 고위직이다. 한성판윤(漢城判尹)은 정2품으로 판서와 품계가 같다. 6조 판서와 의정부의 좌·우참찬, 한성판윤 등을 합쳐 9경(九卿)이라 부른다.[5] 도포와 홀. 곧 조복(朝服).[6] 고려에서 왕씨를 사성받은 사람들은 고려 멸망 이후 본래 성으로 복성했다. 초기 조선은 왕씨를 숙청했는데 사성 왕씨까지 그럴 필요는 당연히 없었기 때문.[7] 다만 34세의 경우는 항렬자가 앞에 오며, 여성인 경우에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 [[http://www.gnkim.kr/bbs/content.php?co_id=gangneungkim6_06]|#][8] 김홍주(金弘柱)의 장남.[9] 김홍주(金弘柱)의 3남.[10] 김홍주(金弘柱)의 5남.[11] 김홍권(金弘權)의 장남. 김득원(金得元)의 장남이 김홍주이고, 5남이 김홍권이다.[12] 김시환(金始煥)의 장남.[13] 김시환(金始煥)의 3남.[14] 김시현(金始炫)의 장남.[15] 김시혁(金始㷜)의 장남.[16] 김시영(金始煐)의 장남.[17] 본명보다는 필명인 이상(李箱)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