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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선홍의 국가대표 경력을 정리한 문서.2.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1. 1996 애틀랜타 올림픽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1] 축구 대표팀에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어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친다. 그러나 당시 최용수가 있는데 뭐하러 주전원톱을 둘이나 쓰냐? 라는 황선홍의 와일드카드 선발에 대한 반론이 있었으나 당시 올림픽대표팀 감독이던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밀어부쳤고 실제로 최용수는 본선 첫경기 가나전에서 황선홍에 밀려 결장했다. 당시 황선홍-윤정환 콤비는 최용수-윤정환 콤비와는 다른 의미로 일품이었는데 최용수-윤정환 콤비가 윤정환 패스-최용수의 파괴력있는 마무리의 구도였다면 황선홍-윤정환 콤비는 둘다 시야와 패스에 강점을 가진 선수다보니 2:1 패스 등 둘의 패스플레이를 통해 여러차례 가나 수비를 위협했었다.[2] 다만 두번째 경기인 멕시코전에서 전반 35분만에 부상으로 이원식과 교체되었고 그 여파로 마지막 경기인 이탈리아전도 결장하고 말았다. 가나와의 첫 경기에서 결승골이 된 페널티킥을 유도하는 등 플레이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부상으로 실제로 기여한바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셈.어쨌든 그 무렵까지 황선홍은 비록 미국 월드컵의 이미지 때문에 욕을 많이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에 아직 그를 능가할 만한 공격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 A매치 때마다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기에 축구팬들은 그에게 어느정도는 다음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던 건 사실이었다. 황선홍 자신에게도 그건 가장 절실했던 과제이기도 했다.
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3.1. 1988 AFC 아시안컵 카타르
1988년 11월 7일 이회택 감독이 건국대학교의 무명 선수 황선홍을 1988년 AFC 아시안컵[3] 대표팀에 발탁했을 때 엄청난 구설에 시달렸다.[4][5]이 당시 황선홍 대신 명단에서 낙마한 선수가 바로 80년대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하는 최순호였기 때문이다.
데뷔전인 한일전에서 깜짝 선발 출전해 A매치 데뷔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6]
조별리그[7] 4차전 이란전에서도 선발 출전해 추가골을 기록하며 4강 진출에 기여했다.
대회 내내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한민국의 20세기 마지막 아시안컵 준우승에 일조했다.
3.2.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이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골 잔치를 벌이며 최순호의 뒤를 잇는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각광받는다. 이때 또 다른 고려대학교의 국가대표 선수였던 홍명보와 만났고 이후 두 사람은 일생의 벗이자 1990년대 한국축구를 이끈 쌍두마차가 된다.하지만 1990년 월드컵[8]에서 대표팀이 3패로 탈락(22위)하면서 김주성과 황선홍 두 공격수가 비난을 받으면서 첫번째 시련을 겪게 된다.[9][10]
3.3. 1994 FIFA 월드컵 미국
그러나 국제무대에서의 불운은 계속됐다.
1994년 미국 월드컵, 황선홍은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 골키퍼와 일대일 기회를 놓쳐 아쉬움을 남겼다.[11]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볼리비아전에서 그는 여러 차례 기회를 잡아 슈팅을 날리지만 모두 골문을 외면하고 만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이 마지막으로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였다. 24강 조별리그 각 조 2위까지 12개 국가와 3위 중 성적이 좋은 4개 국가가 16강에 오르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1승 1무 1패로 승점 4점만[12] 올리면 16강이 유력했다. 첫 경기에서 강적 스페인과 2:2무승부로 승점 1점을 얻으며, 첫 단추를 잘 끼웠지만, 확실한 1승 상대로 여겼던 볼리비아전을 비기고 말았다.[13] 당시 조 편성은 우승후보 독일, 스페인 그리고 남미 볼리비아였다. 따라서 독일, 스페인과 최대한 비기고 볼리비아를 이기는 게 우리의 전략이었다. 물론 볼리비아도 마찬가지여서 한국-볼리비아전은 사생결단의 혈투가 됐다.[14]
몇 번의 찬스에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뜰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슛이 높이 뜨기는 했다. 이 경기에서 황선홍은 총 5번의 슛을 시도했고 이 중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때린 3개의 슛이 모두 높이 떴으며 이 중 2개는 잘 차기만 하면 들어갈 수도 있었던 찬스였다. 나머지 2개의 슈팅은 머리에 잘 맞췄지만 골키퍼 정면으로 가고 만 헤딩슛과 상대 수비의 실수로 얻어낸 딱 한 번만 더 치고 들어가면 넣을 수 있었던 GK와의 1:1 찬스였다. 이 뜬 슛들이 어찌나 강하게 인상에 남았던지[15] 경기 이후 황선홍에게는 오랫동안 이름 앞에 '똥볼', '홈런볼'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1994년의 황선홍은 단군 이래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운동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6] 온라인도 아니고 오프라인에서 2002년 아폴로 안톤 오노보다 더한 욕을 먹었으니, 이때 황선홍 선수가 받은 모욕과 협박은 지금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 거의 범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가장 유행하던 말은 "이완용 이래 최고 역적"이다.
사실 볼리비아전의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다른 플레이는 상당히 괜찮았다. 실제로 당시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기록한 4골 중 2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는데, 스페인전에서 문전으로 파고드는 홍명보의 패스를 수비수를 등진채 적절한 위치로 리턴해줘서 그가 서정원의 골을 도움하는데 기여했고, 후술하겠지만 독일전에서는 자신을 마크하는 수비수의 중심을 빼앗아 떨궈내는 순간적인 페인팅과 적절한 공간침투 그리고 이어진 기술적인 칩슛으로 직접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볼리비아전도 사실 골키퍼와의 두 번의 1:1은 처음 한 번은 수비수의 실책으로 먼저 골키퍼와의 1:1 상황을 맞이한 김주성이 빨리 황선홍에게 백패스로 주던가 할 거면 자기가 슈팅을 했던가 했어야 했다. 아무리 골키퍼가 잘 나와서 근접하고 골대를 바라보기 어려워도 1:1에서 슈팅을 하지 않고 백패스를 주는 것도 이상했지만 결국 슛각이 막히고 돌아서질 못해서 넘어지면서 황선홍에게 준 것이다. 물론 황선홍도 여기서 볼컨트롤을 앞으로 나가면서 잘 받았다던가 바로 골대 안으로 때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고 중앙공격수로서 해결했어야만 하지만 뒤로 컨트롤하는 바람에 수비 견제가 들어오고 하면서 슛이 실패했다. 이것은 사실 김주성과 황선홍의 공동실책으로 황선홍의 지분이 더 크다고 해야겠지만 결국 그 이유도 어쨌거나 김주성이 압박하면서 얻어낸 찬스였다는 것, 그리고 스트라이커라면 넣어줘야 한다는 그 이유뿐이다.[17] 두 번째의 1:1도 볼리비아 수비실책이었지만 볼리비아 골키퍼가 너무 잘 나왔기 때문에 황선홍이 자신감 있게 매우 잘 차야 들어가는 찬스였다. 나머지 찬스도 넣어줘야만 하는 찬스가 아니라 넣을 수도 있었던 찬스가 2개 정도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 게임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황선홍의 플레이는 슈팅이라기보다 박정배가 끊고 드리블친 뒤 백패스로 이어준 것을 서정원에게 툭 밀어주기만 해도 이 시합에서 가장 좋은 1:1 찬스가 나왔을텐데 똥트래핑으로 받고 먼거리 똥슛으로 허공에 날린 찬스다.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으며 기본적인 시야관리가 안 돼서 서정원의 쇄도를 눈치채지 못했고, 시야관리가 안 되었다 쳐도 박정배에게 2:1로 밀어주기만 해도 더 좋은 찬스였을텐데 아쉬웠던 장면과 한국이 스페인과 무승부로 승점을 기록하면서 눈이 높아져서 남미예선 3위 볼리비아를 쉽게 생각한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다음 경기인 독일전에서 0:3으로 끌려가던 후반에 추격에 불을 지핀 것은 바로 그였다. 경기 영상을 보면 그의 월드컵 사상 첫 골을 기록했음에도, 그의 표정이 대단히 어둡다. 골을 넣은 후 세레모니는 커녕 굳은 표정으로 땅을 보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영상 3분 31초에 골을 넣고도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온다.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당시의 심경을 밝히길 "왜 이제서야 들어가는 거야..."라고 생각했다고 하며 이후 홍명보가 회심의 중거리 슛을 성공하며 3:2로 따라잡은 것에서 경기가 끝나긴 했지만, 독일전 후반에는 사실 한국이 독일을 압도하고 있었다. 엄청난 무더위로 댈러스 경기장은 40도를 넘나들고 있었고, 독일은 체력이 방전상태였다. 경기가 5분만 계속됐어도 한국이 독일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평가였다.
당시 룸메이트였던 홍명보가 훗날 술회한 바로는 쏟아지던 월드컵 전부터 골에 대한 부담으로 심적부담이 상당했던데다가[18] 볼리비아전 이후로는 무자비한 비난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자다가도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후일 밝혀진 바로는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에게 "감독님, 저 이번엔 정말 잘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계속 쏟아지는 비난에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본인은 "당시에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화되어 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회상한다. 굳이 인터넷이 없어도 직접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두려워서 집 밖을 나가지 못할 정도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1998 월드컵 이후 J리그에 진출하면서 젊은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몸 관리를 더욱 철저히 했다. 모 스포츠 사이트와 이루어진 비공개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내비친 바 있는데, "난 은퇴하지 않고 반드시 한국에 다시 돌아갈 것이며, 월드컵에도 가능하다면 꼭 다시 나가고 싶다. 그래서 나를 비난했던 많은 사람에게, '당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고 은퇴할 것이다."얘기 했으며 이렇게 선수 생활에 있어서 가장 맘고생이 심했던 94 월드컵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월드컵 도전 역사상 90분 내내 풀타임으로 뛰었던 유일한 월드컵이기도 했다. 90년은 교체 출전, 2002년은 선발 출전 후 교체되거나 반대로 교체 출전 및 부상 등으로 풀타임으로 소화하지 못했고, 98 월드컵은 후술하겠지만 월드컵 직전에 큰 부상으로 출전 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기량이 절정이었던 미국 월드컵에서 정말 열심히 뛰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 더욱 한이 맺혔을 법 했다.
3.4.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이후에도 황선홍은 국가대표팀의 붙박이 공격수로 활약한다. 예선 네팔과 경기에서 혼자 8골이나 뽑아낸 것도 이 대회. 미국 월드컵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8강 토너먼트에서 일본과 한일전을 벌였는데, 여기에서 역전골과 결승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친다. 특히 이 경기는 역대 축구 한일전 중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명승부 중 하나인데, 도하에서 대한민국을 무너뜨린 미우라의 선제골로 끌려가다가 후반전 황선홍의 절묘한 힐 패스를 받은[19] 유상철이 동점 골을 뽑아낸 후 황선홍의 헤딩 역전골, 그리고 다시 일본의 이하라 마사미가 중거리 슛으로 다시 동점, 하지만 후반 종료 직전 황선홍이 스스로 페널티킥을 얻어 내고 그가 직접 성공시키면서 경기를 3:2 승리로 이끈다. 월드컵에서의 비난을 어느 정도 씻어 내는 맹활약이었다. 다만 우즈베키스탄과의 4강전에서 결정적 오픈 찬스를 여러 차례 놓치며 0-1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건 옥에 티.그래도 대회 11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20]
3.5. 1996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당연한 소리이지만, K리그에서 반 시즌만 뛰고도 2년 연속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하고, 거기다가 48년 만의 올림픽 승리의 주역이 된 황선홍이 아시안컵 대표에 빠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황선홍은 UAE전에서 1골, 인도네시아전에서 2골, 그것도 모두 선취골을 작렬하면서 자신의 물 오른 득점감각을 전 아시아에 과시했다. 그러나 쿠웨이트와의 3차전에서 후반 막판, 쿠웨이트 수비수의 살인태클에 오른쪽 발목 인대가 파열되었고, 결국 시즌아웃 된다.[21] 그리고 황선홍이 빠진 한국은 일본이 중국을 잡아준 덕에 와일드 카드로 간신히 8강에 진출한 뒤, 이란전에서 알리 다에이에게 후반에만 5골을 허용하며 거짓말처럼 참패당했다.3.6.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1998년의 프랑스 월드컵만을 바라보며 절치부심하던 황선홍은 1997년에 또다시 무릎이 아작난다.[22] 그러나 황선홍은 오직 월드컵만을 바라보며 재활에 매달린다.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황선홍 없이 치러야 하는 상황. 하지만 국민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없는 사이 대표팀 간판 공격수 자리는 무섭게 등장한 신예 최용수가 차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7년 아시아 최종예선은 그야말로 최용수의 독무대라 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도쿄 대첩을 비롯하여 대표팀은 황선홍 없이도 승승장구하였다. 그 기간동안 황선홍은 묵묵히 재활에 전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월드컵을 두 달여 앞둔 1998년 3월 말 대표팀에 복귀한다.[23]공교롭게도 그의 복귀전은 숙명의 라이벌 일본. 도쿄대첩의 성과가 무색하게 그 당시 대표팀은 일본에 A매치 2연패 중이었다.[24] 일본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의 없는 벼랑끝 승부. 최악의 분위기 속 황선홍의 컴백. 모든 것이 그에게 맞춰진 시나리오였다. 4월 1일, 비 내리는 잠실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한일전에 선발 출전한 황선홍은 양팀이 한 골씩을 주고 받은 1:1의 스코어에서 후반 27분, 서정원의 절묘한 패스를 받아 골키퍼 가와구치와 일대일 상황을 맞이한다. 황선홍은 침착하게 공을 컨트롤 하면서 골키퍼 앞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와중에 떡진 잔디밭은 축구공이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놔두질 않았다.[25][26] 당황한 황선홍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골키퍼와 일본 수비수들과 뒤엉키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대로 슈팅 찬스가 날아가고 마는구나... 하는 순간, 혼전의 양상 속에서 누가 차 올렸는지 축구공이 위로 튀어오른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황선홍이 있는 힘껏 뛰어올라 바이시클 킥으로 축구공을 골문 쪽으로 날려버린다. 그대로 골이 된 것이다. 골을 확인한 황선홍은 본부석 쪽으로 달려오면서 몸을 날려 슬라이딩 세레모니를 하며 포효한다. 그렇게 황선홍은 그가 출전한 4번째 한일전에서 4번째 결승골을 넣으며 한일전의 사나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황선홍의 화려한 컴백으로 황선홍-최용수 투톱은 월드컵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당시 피파 랭킹 3위였던 유럽의 강호 체코와의 A매치에서 두 선수가 나란히 한 골씩을 기록하여 2:2 무승부 승점 1점을 거두기도 했으며,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은 현재 대표팀 전력의 50%를 차지하는 선수다."라 평하기도 했다.
허나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에 펼쳐진 중국과의 친선경기[27] 에서 황선홍은 골키퍼에게 태클을 당해 부상당하고 만다.[28]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2023년 현재도 쿵후 축구로 악명이 높지만 1998년에는 훨씬 심했다. 그래서 당시에도 중요한 평가전을 실력이 높은 팀이 아닌데다가 한국에 강한 승부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플레이가 거친 중국팀과 하다가 괜히 중요한 선수들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냐는 비난이 있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 경기에서 중국 골키퍼와의 충돌로 무릎이 박살났다. 당시 인대 끊기는 소리가 경기장에서 들렸을 정도라고 하는데 뭐 어느정도 과장이야 있었을지언정 TV화면 너머로 보는 국민들 눈에도 황선홍의 선수생명이 끝났다는 예감이 스칠정도의 살인태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 못차린 대한축구협회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기는 커녕 25년 후, 한중전 PTSD가 있는 황선홍이 감독으로 있는 U-23 대표팀 평가전 상대로 중국을 정하는 병크를 저질렀고, 결국 우려했던 대로 엄원상이 쿵후 축구에 제대로 당해 그 스승이 보는 앞에서 실려나가고 말았다.
황선홍은 22인의 엔트리에 들어 프랑스로 향했으나, 부상은 심각했다. 단 한 경기라도 뛰어보고자 무릎에 진통제를 여섯 번 맞았다. 그러나 결국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 때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황선홍을 싫어했으면, "저번 월드컵처럼 실수할까봐 무서워서 경기에 안 나오는 것 아니냐?"는 식의 비난이 있었다고 한다...[29]
프랑스 월드컵이 끝나고, 사람들은 이제 '황선홍의 월드컵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 시점에서 30세였으니 다음 월드컵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30] 그래서 그를 동정하는 사람도 많이 없었고 그는 결국 도망치듯 일본 J리그로 건너간다.[31] 하지만 그렇게 건너간 J리그에서 1999년 득점왕을 차지하며 희망을 되살리게 되었으니 절망을 안고 건너간 일본이 그에게 희망을 되살려 준 셈이 되었다.
3.7.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
거스 히딩크 박항서 스태프 핌 베어벡 · 정해성 · 김현태 · 압신 고트비 |
이렇게 불운하기만 하던 황선홍의 국가대표 커리어였고, 2002년 월드컵은 황선홍으로서는 인생 마지막 최후의 도전인 셈이었다. 더군다나 월드컵 개막 직전에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는 선언을 하였고[32] 그는 결국 2002 월드컵에서 마지막 선수 생명을 불사르게 된다.
3.7.1. 32강 D조 1차전 : vs 폴란드
프랑스 월드컵 개막을 1주일 앞두고 부상당한 지 정확히 4년이 지난 이 날 이 경기가 황선홍으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경기가 되었다. 전반 25분 경에 이을용의 낮은 크로스를 논스톱으로 골문 구석으로 차 넣어 선취골을 뽑아낸다. 당시 리버풀의 주전 골키퍼인 두덱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기술적인 골이었다. 그의 경험과 센스를 확실히 보여주었던 장면이었다.
이을용이 빈 공간으로 크로스를 했고 황선홍이 달려가며 왼발로 툭 갖다대서 방향만 바꿔놓는 것으로 골을 넣었는데, 웬만큼 슛 기술이 뛰어나지 않고서야 못 할 슛이다. 더군다나 본인의 주발인 오른발이 아닌 왼발이었고, 쇄도하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골대를 향해 몸통을 비틀어 차야 했었는데도 깔끔한 피니쉬를 보여주었다.[33] 하지만 무릎팍도사에서 황선홍은 이을용이 애매하게 줬었다고 그 상황에 대해 농반진반으로 살짝 불만을 드러냈었다. 황선홍은 곧바로 벤치에 있는 박항서 코치에게 달려가 선수들과 함께 포옹한다.[34][35] 결국 이 한 골은 폴란드전의 결승골이 되었고, 황선홍의 인생골이자 명예회복의 한 판이 되었다. 이 경기는 한국의 월드컵 역사상 첫번째 승리이다. 첫 승의 포문을 연 첫 골, 결승골을 작렬시키며 제대로 인생골을 집어 넣었다.[36] 본인과 국민의 월드컵에 대한 회한과 응어리와 동시에 풀리는 순간이었으며 이 날 경기 후반전에서는 그동안 1:1 찬스를 자주 놓쳐 홈런왕이라고 조롱받던 유상철 역시 오른발 강슛으로 쐐기골을 뽑아냄으로서 마찬가지로 그동안의 안타까움을 씻어버리는 명예회복의 한 판이 되었다. 둘다 건국대 출신의 베테랑이었다는 점이 공통점으로서 특기할만한 부분이다.
3.7.2. 32강 D조 2차전 : vs 미국
미국전은 황선홍은 여전히 좋은 활약을 보여줬지만 결과적으로 여러 모로 아쉬운 경기였다. 이상하게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전방 공격수인 설기현은 뭘 잘못 먹었는지 계속 똥볼만 죽어라 날려댔고,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 캐스터는 이를 비난하느라 바빴다. 황선홍은 미국월드컵때 자신의 모습과 닮아 보였는지 계속 설기현을 독려했다. 하지만 전반 중반에 미국 선수와의 충돌로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투혼을 살려 붕대를 두르고[37][38] 그대로 경기에 임했으며 심지어는 머리를 다친 그 상태로 헤딩까지 했다. 그리고 전반 막판에는 페널티킥을 그가 직접 얻어내기까지 했다. 물론 결과는 이을용의 실축으로 끝났지만 후반전 들어 안정환으로 교체되어 그라운드에서 물러났는데, 관중들은 30대 중반 노장의 투혼에 기립박수로 화답하였다.참고로 이 경기가 A매치 99경기째였는데 다음 포르투갈전에 출전하면 100경기 출전으로 센추리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다.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한다고 밝혔기 때문에 만약 포르투갈전에 출전하지 못하고 한국도 16강에 못 올라간다면 그걸로 A매치 100경기 출전은 무산될수도 있는 상황. 히딩크 감독의 자서전에 의하면 당시 히딩크 감독도 박항서 코치를 통해 황선홍이 포르투갈전에 출전하면 센추리클럽에 가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선수의 출장 기록이 경기보다 중요할 순 없다며 황선홍이 스타팅에서 제외된 원래 계획을 고수했고 그가 뛰어야 되는 상황이 생겨야만 투입하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사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월드컵이라는 중요한 대회에서 그것도 한국 최초의 2라운드 진출이 결정되느냐 마느냐 하는 경기에 한 선수의 출장기록을 배려해 원래 계획을 수정할 정신나간 감독이 있을까? 더욱이 그 선수가 지금 한창 잘나가는 최전성기 선수라면 또 모를까 팀선수단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최고 연장자인데다가 더욱이 이 당시 황선홍은 과거 많이 다쳤던 무릎을 비롯해서 여러가지 이유로 진통제를 맞아가면서 뛰고 있는 상황인데다가 더욱이 눈까지 찢어진 상태에서는 아무리 황선홍이 당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NO.1스트라이커라고 해도 감독 입장에서는 솔직히 그런 선수를 선발에 기용하는 짓을 할 수가 없다. 더욱이 상대는 다른 팀도 아니고 몸싸움이 격렬하며 당시에는 월드컵을 우승할 수 있는 강력한 우승후보 중에 하나로도 손꼽히던 유럽팀인 포르투갈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만전한 상태가 아닌 상황에서 황선홍을 기용하는 것이 더더욱 어려울 수 밖에는 없기에 저런 것이다.[39][40]
아무튼 황선홍은 포르투갈과의 경기에 출전하진 않았지만, 대한민국팀은 박지성의 결승골에 힘입어 포르투갈을 1:0으로 격파하는 이변을 만들었고 조 1위로 16강에 안착할 수 있었다. 황선홍은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 교체로 출전하여 A매치 100경기에 출장하면서 센추리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
3.7.3. 16강전 : vs 이탈리아
이탈리아전은 후반 한 골차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교체투입되었고, 후반 막판 절묘한 2대1 패스로 설기현의 동점골에 기여했다.연장 전반 11분에서는 수비벽을 쌓고 점프하는 선수들 밑으로 허를 찔러 깔아 찬 절묘한 프리킥을 보여 주기도 했다. 잔루이지 부폰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골도 가능했다. 사실 프리킥이 수비수 밑으로 통과하여 골대쪽으로 향하는 순간 골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다.[41] 그야말로 부폰이었으니까 막은 슛이었다. 이 프리킥이 의도하고 찬 게 아니라는 말도 있었으나 당시 코치였던 최진한의 인터뷰에서 J리그에서도 그렇게 몇 번 그런식으로 찬 적이 있어서 일부러 노리고 찬 것이라고 좀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걸로 봐선 원래 의도한 바가 맞다. 외부링크 의도하고 찬 게 아니라는 말은 남자의 자격에서 유상철이 황선홍한테 한 농담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이런 변칙적인 프리킥으로 2018년 월드컵에서 콜롬비아가 일본에 동점골을 넣은 적이 있다. 요즘은 이런 슛을 방지하기 위해 수비벽 뒤에 한 선수가 일자로 누워있기도 한다.
이후 연장 후반 5분 설기현의 크로스를 받아 헤딩슛을 시도했지만 부폰의 정면으로 가서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러나 폼은 이때까지 출전한 월드컵 경기 중 가장 좋았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활발하면서 노련한 움직임으로 팀의 활력을 불어넣어줬고 연장 후반 막판에 이영표의 크로스때 절묘한 위치 선정으로 문전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3.7.4. 8강전 : vs 스페인
연장전에서 교체투입되어 연장 후반 4분 이천수의 크로스를 받아 단독 슛팅 찬스를 잡았지만 슈팅 자세가 무너지며 수비수 벽에 가로막혔다.
스페인전에서는 승부차기 1번 키커로 나섰다. 경험 많은 베테랑이어서 히딩크가 1번으로 세웠는데, 결국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다. 골키퍼 카시야스가 방향을 잘 잡았지만 겨드랑이 사이로 공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다행히 골이 되었다.[42] 황선홍이 훗날 밝히기를, 그 킥은 제대로 차지 못한 실패한 킥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5번 홍명보까지 골을 성공시키면서 한국은 사상 초유의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한다. 4강이 확정되는 순간 황선홍과 홍명보가 힘껏 포옹하는 장면은 한국축구사에 영원히 기록될 명장면이다.
3.7.5. 4강전 : vs 독일
독일 전에도 출전했으나 후반 9분{54분}에 안정환과 교체되어 나왔다. 우리나라는 선전했으나 아쉽게도 0:1로 석패해 결승전이 열리는 요코하마행에 실패하였다.3.7.6. 2002년 11월 20일 A매치 평가전 브라질전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홍명보와 함께 은퇴 경기에 출전했다. 우리나라는 결국 호나우지뉴에게 페널티킥 실점하여 2:3으로 석패했고, 황선홍은 홍명보와 함께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그동안 불운과 좌절도 많았지만 대한민국 축구선수로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화려하게 선수생활을 마무리 할 수 있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던 선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1]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2] 당시의 경험 때문인지 황선홍은 현역시절 호흡이 잘 맞는 선수로 윤정환을 여러차례 꼽기도 했었다.[3] 10개국(10강) 본선 진출 대회[4] 당시 황선홍은 청소년 대표팀 경력도 한 번 없던 그야말로 무명 대학선수일 뿐이었다.[5] 이회택은 이미 용문고 1학년 시절부터 황선홍을 점찍어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회택이 한양대 감독을 하던 시절 용문고 3학년 선수를 뽑기로 하고 관전하던 도중 눈에 띄었다고. 이후에 한양대로 입학하기로 했던 그 3학년 선수가 사정상 한양대가 아닌 다른 학교로 진학하지 않으면 다른 여러 선수가 피해를 보게 되어서 이회택은 알았으니까 대신 황선홍을 달라고 했는데 잘해서 3학년인 줄 알았던 황선홍이 1학년이었다고 한다.[6] 참고로 황선홍은 현역시절 일본과의 A매치에 총 4경기 출전해서 5골을 넣었다. (도움도 몇 개 있다.) 더 놀라운 것은 4경기 모두 결승골을 넣었다는 점.[7] 10강 조별리그[8]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9] 90년대에는 대표팀에 대한 비난이 공격수에게만 집중되는 경향이었다. 수비수나 미드필더, 또는 전술에 대한 감독 책임보다는 오로지 공격수만을 비난했고 황선홍은 항상 그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10] 다만 황선홍은 조별 예선 첫 경기 벨기에전만 선발로 나왔을 뿐 나머지 2경기는 교체로 뛰었다.[11] 하지만 이때 비판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공격수가 한번 찬스를 놓치는건 옛날에도 비일비재 했고 극적으로 비겨서 묻혀버렸지만 볼리비아전 이후로 스페인전 일대일이 다시 재조명 되었다.[12] 승=3점. 무=1점.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우리의 월드컵 본선 전략이었다. 최대한 비기기. 단, 승리시 승점 3점이 주어진 것은 1994년 월드컵부터다. 그전까지는 승리시 승점 2점.[13] 그러나, 당시 볼리비아는 남미예선 홈고지대에서 브라질을 2:0 승, 우루과이를 3:1로 승리하고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남미예선 3위로 통과하여 24강 본선 94월드컵에 진출했고, 93에콰도르 코파에서 콜롬비아와 1:1, 멕시코(초청국)와 0:0 각각 무승부로 승점 기록과 95우루과이 코파에서 미국(초청국)을 1:0으로 이기고, 칠레와 2:2무승부 승점 1점을 기록하며 8강 8위까지 기록하며 97년 피파랭킹 18위와 97코파 준우승을 기록할 정도로 볼리비아 최전성기 시절이었다.[14] 여담으로 볼리비아전 당시 주심이 무슨 생각인지 전반전에 5분, 후반전에 8분, 합쳐서 무려 13분의 추가시간을 주었다. 이 경기의 여파로 FIFA에서 추가시간에 관한 규정을 만들면서 현재와 같이 주심의 재량권을 제한하고 대회 주최 측에서 추가시간을 공지하는 방식이 도입된다.[15] 심지어 이 경기는 스페인전의 선전으로 기대가 커진 국민들이 최초의 월드컵 1승을 달성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경기였다.[16] 인터넷이 활성화된 지금, 선수들의 외적인 논란으로 욕을 먹은 선수들도 많지만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운동선수는 국가대표 경기에서 큰 실책을 한 선수다.[17] 말하자면 압박까지를 포함하면 김주성의 나이스플레이지만 김주성의 압박 성공 이후 플레이는 김주성이나 황선홍이나였다.[18] 국민 상당수가 그를 첫골을 넣을 선수로 지명했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국민들도 황선홍을 상당히 믿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19] 당시 방송을 보면 신문선이 한정국의 힐 패스라고 하지만 이는 그가 착각한 것이다.[20] 아시안게임 11골은 역대 단일 대회 최다 골로,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21] 골때리는 건 심판이 그 장면에서 퇴장이나 경고는 커녕 파울조차 주지않았다는 것. 당시 경기를 보면 분노한 고정운이 바로 보복태클을 들어가고 또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박종환이 흥분해서 "저거! 저거!"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22] 1997년 5월, 발목부상 후유증으로 오른쪽 십자인대가 파열되었다. 당시 황선홍은 리그, 국가대표, 상기한 올림픽대표 와일드카드까지 96년 한해에만 60여 경기를 뛰며 혹사당한데다가 상술했다시피 아시안컵 쿠웨이트전에서 후반 막판 상대 수비수의 살인태클에 오른 발목 인대까지 부분파열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한 채 곧장 차범근호에 소집되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3월 7일~9일에 열린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준결승전과 결승전까지 출전했다. 이러니 무릎이 폭8할 수 밖에 없었으며 아무튼 1997년에 파열된 그 무릎은 1992년 십자인대와 연골이 파열되었던 바로 그 오른쪽 무릎이었다. 그리고 이후 굉장히 아끼는 후배는 몇년 뒤 그보다 더 심한 혹사를 당하게 된다.[23] 프로경기에는 97년 10월에 복귀했다. 하지만 부상후유증을 완전히 떨치지 못해 출장과 결장을 반복하며 몸상태와 경기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24] 잠실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최종예선 2차전에서의 0:2패배, 그리고 98년 초에 벌어진 다이너스티컵에서의 패배.[25] 당시 잠실 주경기장은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녹색물감을 뿌리는 편법을 쓸 정도로 잔디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다른 경기장에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당시에는 월드컵 경기장들이 건설되기 전이었고 축구를 할 수 있는 대부분 경기장의 상태 특히 잔디의 상태가 매우 별로였다. 실제 K리그의 경우 아예 흙바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경기하기 일쑤였고 그나마 포항축구전용구장이나 광양축구전용구장은 예외라고 할 수 있었으나 여기는 수용인원이 적어서 국가대표 경기에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한국이 그나마 제대로 된 잔디에서 축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월드컵 경기장들의 건설 이후라고 봐도 무방하다.[26] 이후 J리그에 진출했던 모선수는 잔디상태가 양호한 J리그의 경우 패스가 들어올 때 다음 동작을 미리 생각하는데, K리그의 경우 대부분 잔디상태가 좋지 않아 다음 동작이고 뭐고 일단 볼을 제대로 트래핑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27] 1998년 축구협회가 얼마나 정신 나간 집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에 야간 경기를 잡았다. 실전 대비라고 설명하기 힘든, 약체 중국과 경기를 잡은 것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당시 축구협회의 병크는 월드컵 대회 도중 차범근 감독을 경질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축구협회가 얼마나 정신나간 집단인지는 25년 후 제대로 드러나게 된다.[28] 이 경기를 계기로 한국 축구팬은 한중전만 열리면 부상 트라우마에 시달린다.[29] 프랑스 월드컵 당시 2인 1실로 숙소를 사용 했는데 당시 황선홍의 룸메이트가 이동국이었다. 같은 공격수라고 선배에게 노하우 좀 전수 받으라고 같이 한방에 몰아 넣은 것이데 경기도 뛰지 못하고 한국팀의 대패를 지켜봐야 했던 황선홍은 하루종일 한숨만 쉬고 괴로워 했다. 당시 18세던 이동국은 대선배가 침울해 있으니 방에 있기도 부담스러워 숙소 뒷편에 나가 계속 공을 찻다고 한다. 그게 차범근 눈에 띄어서 네덜란드와의 2차전 교체 엔트리에 포함 되었고 후반전에 교체 투입되어 18세의 나이로 월드컵에 데뷔하게 된다.[30] 부상이 많았던데다가 당시는 지금보다 평균선수생명이 짧았다.[31] 당시 재기여부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한 세레소 오사카 측에서 입단테스트를 겸한 6개월의 굴욕적인 계약을 제의했음에도 일본으로 떠났다. 득점왕이 된 것은 괜찮은 활약으로 계약을 연장한 이듬해다.[32] 축구선수로, 그것도 공격수로는 환갑에 가까운 만 33세의 나이였고 선수생활 내내 달고 다녔던 여러 부상때문에 경기를 풀타임으로 뛸 체력은 부족했고, 대회 내내 안정환과 번갈아가며 원톱 역할을 맡았다. 대회 종료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무릎 컨디션 악화로 대회 중에 두 차례나 진통제를 맞아야 했다. 폴란드전도 진통제의 힘으로 겨우 출장했고, 미국전 이후 또다시 진통제를 맞고 휴식을 취하느라 그리고 전술상의 문제로 조별리그 포르투갈전을 출장하지 못했다. 터키전도 출전하려 했으나 주치의가 ‘한번 더 진통제를 맞으면 부작용이 심각할 수 있다’고 출장을 만류하였으며, 히딩크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일 수도 있는 국가대표 경기이기에 원하면 출전시켜 주겠다고 했으나 황선홍 본인이 후배들의 출장기회를 생각해 출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히딩크 감독은 대회 내내 황선홍을 전적으로 신뢰했다.[33] 월드컵 이후 이을용의 수기에 의하면, 그 상황에서 크로스를 차면서 마음속으로 "형, 트래핑 하지말고 원바운드 되면 바로 때려!" 라고 생각하면서 올렸는데, 황선홍은 아예 원바운드 조차도 없이 발리슛을 바로 때려버렸다면서 황선홍을 칭찬했다.[34] 히딩크는 황선홍이 자기에게 달려오는 줄 알고 기다렸는데 박항서에게 안기는 걸 보고 약간 서운했다고 훗날 술회했다. 실제로 히딩크는 황선홍이 박항서에게 안기자 무안한 듯 등만 몇 번 두드리고 끝났다.[35] 참고로 2002맴버들은 농담조로 이때 박항서에게 안긴 것 때문에 남은 경기 주전에서 안정환에게 밀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후술한 미국전 머리부상 때문이다.[36] 이 날, 경기가 끝나자마자 아내 정지원씨는 황선홍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와 목을 당겨 끌어안으며 이렇게 기쁜날은 처음이라며 울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게 가장 가까이에서 남편이 고생만 하는 걸 오랫동안 지켜봐오다가 그걸 모두 날려버릴 한방을 통쾌하게 터뜨렸으니..[37] 머리에 씌우는 걸로 빠르게 응급처치가 가능한 그물붕대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당시 치료를 맡았던 최주영 의무팀장이 붕대를 두르고 뛰는 모습을 보여줘 다른 선수들의 투지를 불태우기 위해 일부러 붕대를 사용했다고 한다. 근데 붕대를 감는 사이, 10명으로 뛰던 우리 대표팀은 골을 먹어버렸다. 그 와중에 방송중에 관중석에 있던 황선홍의 딸 황현진 양(당시 9살)이 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는데, 자기 아버지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38] 다만 2012년 최주영 의무팀장의 인터뷰에선 그물붕대가 있었음에도, 당황해서 기존에 사용하던 탄력붕대를 꺼내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39] 더욱이 2002년 당시의 포르투갈이 루이스 피구를 중심으로 하는 포르투갈 역사상 가장 강한 시절인 황금세대로 평가 받던 시절인 대다가 더욱이 첫 경기 미국전에서의 패배 때문에 포르투갈이 여유를 부릴 수 없던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감독으로서는 당연히 부상 중인 황선홍을 기용하는 짓을 할 수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40] 반례로 카타르 월드컵 당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대한민국과의 조별리그 3차전에 출전했다가, 자기 기록 욕심만 부리다가 찬스를 모조리 말아먹고 망신만 당한 채 교체된 바 있다. 그나마 포르투갈이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했지만, 호날두의 개인 욕심은 팀워크를 좀먹으며 준결승 진출 실패의 원인이 됐다.[41] 비슷하게 이번 경기에서 차두리의 오버헤드킥도 매우 근거리에서 워낙 강하게 제대로 들어가서 맞는 순간 골이라고 직감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이 킥은 부폰이 잘 막았다기보단 너무 제대로 맞아서 부폰 정면으로 가버렸다.[42] 참고로 황선홍의 킥이 이날 승부차기에서 유일하게 카시야스에게 방향을 읽힌 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