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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18:15

연세대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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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위3. 이후4. 시위대 측의 피해 호소5. 영향6. 기타7. 참고/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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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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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8월 13일부터 20일까지 한총련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교정을 점거한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학생운동은 대중적 여론의 외면을 받고 사실상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2. 경위


범민련, 범청학련 남측본부, 한총련 등이 주축이 된 '제7차 범민족대회 추진위원회'는 광복절을 기념하여 제7차 8.15 범민족대회[1] 및 범청학련 통일대축전[2] 남측 행사를 연세대학교에서 개최하고자 했고 그 준비작업으로 '범청학련 통일선봉대'를 만들어 8월 4일부터 동/서로 나눠서 5일간 가두선전전을 전개 후 서울시내 각 대학에 분산해 있다가 15일 새벽 연세대로 집결했다.

이미 경찰 측은 8월 11일 전의경 20개 중대 2천여 명을 풀어 행사장 예정지인 연세대학교를 봉쇄하기 시작했고 대학생 4천여명이 연세대로 집결하자 다음날 양측 간 충돌이 처음 벌어졌다. 13일 김우석 내무부장관안우만 법무부장관, 안병영 교육부장관 3명은 합동담화문을 통해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이적집회로 규정하고 불법 폭력시위에 강력 대처한다는 입장을 표했고 한국자유총연맹 등 호국/안보 관련 시민사회단체들도 정부 차원의 강경 대응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경찰도 한총련의 집회가 사회 혼란 및 국민의 불안을 가중시킨다고 판단하여 조기 진압 방침을 세워 연세대 종합관 주위에 매트리스를 깔고 구급차를 대기시키는 등 사전 안전조치를 취하며 경찰력도 그쪽으로 투입했다.

예전 같았으면 한총련 지도부는 대회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꾸려고 했으나 정부의 '개량주의 국면'을 돌파하려는 심리가 강해 13일에는 통일대축전 전야제, 14일엔 개막까지 강행했다. 또 대회 전에 도종화(연세대 공대), 유세홍(조선대 치대) 등 학생 2명이 북한 평양으로 파견되어 정부와 한총련 간 긴장감은 더해갔다.

그러나 8월 14일까지 연세대에는 각지에서 2만 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연세대에 진입하지 못한 학생 1만여명은 한양대, 홍익대, 동국대 등에서 산발적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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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1990년과 1991년에 시작된 8.15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남측 행사가 각각 7회와 6회까지 이르는 동안 경찰은 그동안 시위대가 거리로 진출하는 것은 막았으나 실제 집회가 열리는 행사장(대학 내) 내로 진입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례적으로 연세대학교에서는 8월 14일 낮 들어 경찰은 연세대에 대규모 병력과 헬기를 투입해 행사장에 있던 참가 학생 3천여 명을 강제해산시켰다. 경찰측이 학생시위 과정에서 헬기를 동원한 것은 1986년 10.28 건국대학교 항쟁과 1994년 서울대에서 열린 제5차 범민족대회 이후 세 번째이다.

경찰은 2시 45분경에 학생들이 남북학생 연석회의를 강행하자 전경 51개 중대 6천여 명과 헬기 11대를 동원해 다연발 최루탄을 쏘고 공중에서 최루액을 뿌리면서 정문, 북문, 동문 쪽으로 진입작전(1차)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사수대들이 서둘러 폐타이어, 의자 등으로 쳐 놓은 바리케이드에 불을 지르고 화염병과 쇠파이프로 격렬히 저항했다. 이후 경찰은 진압작전에 나선 지 40분만인 3시 20분경에 포크레인 등 중장비와 소방차 등을 동원해 바리케이드를 제거하고 행사장인 노천극장과 이공대 대강당 등에서 해산작전을 폈다. 경찰은 이미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학생회관, 대강당 등에 대한 수색을 벌인 뒤 4시 17분경에 철수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 5천여 명은 5시 20분경부터 신촌로터리 주변에 모여 차도 3백여 미터 구간을 완전 점거하고 화염병 시위를 벌이는 등 도심 곳곳에서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는데 이 중 2천여 명은 다시 연세대로 돌아가는 등 학생 6천여 명이 시내 6개 대학에 분산해 밤샘 농성을 벌였다. 이로 인해 신촌은 물론 마포, 광화문 등 서울 강북 지역의 교통이 거의 마비될 정도였다.

이에 경찰측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로부터 전경을 증원하여 총병력 5만여명[4]이 되었고 8월 15일 10시 30분경부터 2차 진입작전을 시작했는데 이때 최루액 3천리터와 헬기 12대 불도저 등 중장비를 동원하여 정문을 뜯어내고 진입을 시작하였다. 11시 45분경부터는 서문으로도 진입에 성공하며 학생들을 압박하였으나 정문과 서문의 운동장을 중심으로 대치하면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했다. 8월 15일 야간에는 서치라이트와 조명탄을 쏘며 3차 진입을 시도하였는데 야간 진압은 대형 참사의 위험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에도 하지 않는 이례적인 작전이었다.[5]

경찰측의 강력한 진입 시도에 한총련 측은 15일 오후 모든 일정 종료와 다음날 8월 16일 행사(거리 집회)에 대한 취소를 선포하고 참가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같은 날 청와대에서는 김광일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주재로 수석비서관회의를 열어 폭력행위자 등을 전원 구속해 엄중 사법처리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날 고위 당직자 회의에서 내무부장관 김우석은 "한총련이 5.18 관련자의 최고형 선고, 국가보안법 철폐, 북-미 평화협정 등을 이슈로 불법폭력시위를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며 한총련 관련 수배자들을 전부 검거해서 한총련을 와해시킨다고 밝혔으며 "앞으로 이적행위자와 불법폭력 시위자는 전원 검거해 의법조치하겠다."라고 한 뒤 입체진압기술을 개발해내 폭력시위에 대한 진압능력을 높이겠다며 강경 일변도로 치닫게 되었다.

8월 16일 19시부터 경찰전경 110개 중대 1만 3천명으로 외곽을 봉쇄 후 50개 중대 6천여명의 전경과 경찰특공대 36명, 조명차 4대, 조명탄 4천여발, 그물 60개, 고가사다리 2개 등의 병력과 장비로 4차 진입을 시도하여 학생회관과 서문 운동장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외신 등 언론이 지켜보는 상태에서 야간 진압은 포기하고 8월 17일 0시를 기해 연세대 내에서 퇴각했다. 날이 새고 같은 날 11시 30분부터 헬기 7대로 최루액을 뿌리면서 전경 100여개 중대 1만 2천명이 5차 진입 작업을 시작하여 이 때부터 대부분의 학생은 이과대와 종합관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대해 박병언 당시 서총련 의장 겸 연세대 총학생회장[6]은 "농성까지는 정말 생각치 못해 준비도 못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며, 설사 해산하고 싶어도 경찰 봉쇄로 그럴 수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학생측은 계속해서 안전귀가를 요구하고 시민단체들은 음식물과 약품 및 여성용품들의 전달을 요구했으나 경찰측은 이를 거부하고 단전/단수 의사까지 표명하면서 의료단체의 방문도 제지하였다. 이어 최병국 대검찰청 공안부장은 기자회견에서 "한총련이 그 동안 계속해 온 친북, 이적활동이 국가안전과 사회질서 유지 차원에서 용인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하며 이 사태를 주도한 한총련 간부들에 대해 모두 사법처리하여 한총련 자체를 와해시키겠다고 방침을 밝혔다. 이전까지는 대학생들이 과격 시위를 할 때마다 정부가 주동자 검거와 배후세력 차단을 위한 강경 방침을 거듭 발표해 왔지만 학생회 조직 자체의 무력화를 목표로 사법처리 방침이 결정된 전례는 없었다. 같은 날 경찰은 고려대 등 한총련 본부 및 지역총련 사무실이 있는 8개 대학에 압수수색을 실시했으며 연세대 측도 정부-학생 간 중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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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부터는 시민단체와 학부모들의 안전귀가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지만 경찰은 이들도 모두 연행하면서 단전/단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연세대 측에서 실험 기자재 등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같은 날 안병영 교육부장관은 학생들과 연세대에서 1차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학생 측이 연세대의 1차 중재안을 거부했고 시위대 중 학생 15명이 탈진/자수로 이탈하여 경찰에 연행되었다.

8월 18일까지 검/경은 54명을 구속하고 시위가담자 1천 7백여명을 연행한 뒤 시위 가담 정도를 분류했다. 연행자 숫자로만 보면 이는 1986년 건대항쟁 당시 검거된 1,526명을 훌쩍 뛰어넘은 수다. 이후 검찰은 지난달 말부터 이미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된 정명기 의장 등 한총련 간부 36명을 조속히 검거하기 위해 전담 검거반을 보강키로 하는 등 한총련 와해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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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9일 연세대학교에는 해양경찰의 해양헬기가 등장했다. 강력한 프로펠러 바람으로 종합관과 이과대 옥상에 있던 학생들을 위협하며 대량의 최루액을 계속해서 쏟아부었다. 같은 날 이수성 총리는 주동자/극렬시위자 엄단 및 단순가담자 관용을 요지로 한 담화를 발표했고 박일용 경찰청장은 이 날 "시위대에 대한 총기 사용"을 검토한다고 언급했으며 김수한 국회의장은 <월간조선> 9월호 인터뷰에서 대통령 중임제 개헌의 지론을 발표했다.

8월 20일 4시 20분부터 경찰은 병력 배치를 시작하여 5시 50분부터 종합관에 전경 16개 중대 2천여명을 투입했다. 최루탄을 난사하며 진입하여 종합관 1층에서는 5시 56분경부터 화재가 발생하는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7] 학생들은 화재로 인해 저항을 포기하고 7시 37분 종합관 진압이 종료되었지만 종합관 진압 중 시위 진압에 참가했던 김종희 일경(당시 20세)[8]이 시위대가 던진 보도블럭 원판에 맞아 중태에 빠졌고 결국 이틀 뒤에 병상에서 사망했다.

반면 이과대는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화염병, 돌, 의자 등을 던지면서 학생들이 격렬히 저항했고 학생 2천여명은 10시경 한총련 기자회견을 틈타 건물 뒷산을 타고 달아났으나 이 중 1천 43명이 연희동 주택가 등지에서 연행되었다.[9]



8월 20일에 연행된 학생은 3,499명이며 8월 12일부터 20일까지는 총 5,848명을 연행하여 총 462명을 구속하고 3,341명을 불구속입건, 373명을 즉심에 넘기고 1,672명을 훈방했다. 구속자 462명 중 진압작전 이전에 구속된 사람이 93명, 진압 당시 연행자 중 구속된 사람이 369명이었다.

3. 이후

사태가 끝난 뒤인 10월 29일에 기소된 학생들 444명 중 110명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려 이중 51명에 대해 징역 3년에서 8개월에 이르는 실형이 선고되었고 혐의가 가벼운 나머지 59명은 징역 1년 6개월~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검찰의 공소 내용을 사실로 인정하면서 "공권력이 적(북한)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불허했다면 이에 순응해야 마땅한데도 폭력시위를 강행한 피고인들의 행동은 국가/사회질서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11월 5일에 열린 공판에서 기소된 36명 중 16명은 징역 2년 6개월~1년의 실형을, 단순 가담자 21명은 징역 1년 6개월~1년과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받았고 7일에는 기소된 시위 참가자 54명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이 가운데 32명 중 14명은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죄 등이 적용되어 법정에서 징역 3년~1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나머지 단순 가담자 18명은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의장이었던 정명기는 수뇌부들과 함께 수배 대상에 올랐다가 1997년 7월 23일에 검거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고 2002년 만기 출소하였다.

이 외에도 전경련과 경총, 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5단체 실무자들은 8월 22일에 회담을 가지면서 연세대 사태에 가담한 학생들의 취업을 제한하는 기준에 합의했다. 이 합의안에 따르면 불법 시위로 구속된 적이 있는 사람은 취업 자체를 제한하고 시위 때문에 불구속 입건된 적이 있거나 즉심에 회부됐던 사람도 채용 시험에서 성적을 감점하도록 하는 방안이었는데 이러한 조치가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 중 하나인 '직업 선택의 자유'와 '국민의 평등권'을 제한하여 이들을 '잠재적 사회 불만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된 데다 강제성이 없어서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실제로 9월 5일에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측은 신원조회를 통해 한총련 관련 학생들을 가려내 취업에서 불합격시키도록 하는 방침을 만들어 논란을 빚었다.

4. 시위대 측의 피해 호소

1996년 8월에 당시 한총련 임시 부대변인이 성추행 사건을 언급한 걸 시작으로 10월 9일 서울경찰청에 대한 내무위 국정감사에서 추미애 국민회의 의원은 인권운동사랑방 측에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면서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이때 추 의원은 해당 녹음자료를 근거로 "당시 피해 여학생들은 면담을 통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추행과 성적 모욕을 당했다고 밝혔다."면서 학생들이 주장한 각종 성폭력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

10월 10일에는 신한국당과 새정치국민회의는 전날 국감에서 추미애 의원이 제기한 경찰의 한총련 여학생 성추행 의혹 발언을 둘러싸고 공방전을 벌였다. 이 날 이홍구 대표 주재로 열린 고위 당직자 회의에서 신한국당 측은 김철 대변인을 통해 "추 의원의 발언은 친북 폭력시위로 인해 경찰이 죽고 다친 한총련 사태에 대한 국민들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한다는 점에서 균형을 잃었다."면서 "전형적인 친북분자들의 사법 투쟁으로 이용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모든 것을 떠나 적나라하게 질문하는 것이 품위에도 문제가 된다."며 이에 대응했다. 이에 국민회의는 박선숙 부대변인을 통해 "품위와 폭로주의를 주장하며 진상 규명보다 사실을 은폐하려는 여당이 우리 당을 비난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라며 "여당은 피해 여학생들의 인권보다 품위와 체면이 중요하냐"며 따졌다. 이어 박 부대변인은 "여당이 경찰의 명예를 지키려면 당장 조사소위에 응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한편, 한국여성단체연합 역시 이날 국민회의에 진상을 문의한 뒤 내무위에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10월 15일에 국회 내무위의 경찰청 감사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추미애, 유선호, 정균환, 이기문 의원 등은 전의 서울지방경찰청 국감에 이어 연세대 시위 진압과 수사 과정에서의 인권침해 사례를 다시 거론했다. 그러나 이에 강성재 의원 등의 신한국당 의원들은 추 의원의 서울경찰청 감사 당시 발언에 대해 의원의 품위 문제 등을 거론하며 야당의 공세에 맞섰다. 이때 추 의원이 먼저 박일룡 경찰청장에게 "우리나라에 시국사건 피의자에 대해 성추행과 인권유린을 해야 한다는 지침이나 관행이 있느냐"는 질문을 했으나 박 청장은 "없다"고 했고 이어 추 의원은 '연행 과정에서 성추행을 목격한 기자가 경찰관을 붙들고 소속이 어디냐고 따지는 등 항의를 했다'는 내용이 실린 기자협회보를 내보이면서 "그 때 경찰청장으로써 경고를 하거나 주의환기만 시켰어도 성추행 사태는 없었을 텐데 그런 경고나 주의환기시킨 사실이 있냐?"고 추궁했다.

이때 유선호 의원도 "한총련 강경진압 비상대책위원회가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에서 당시 연행된 학생 108명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폭행 86건, 성추행 41건, 부상 21건, 폭언 63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및 정신적 후유증 10여건 등 모두 290건의 인권침해 사례가 있다."고 했고 정균환 의원도 당시 경찰이 남모씨 등 7명의 건장한 학생들을 강제로 승합차에 태워 연행한 뒤 쇠파이프를 억지로 붙잡게 하고 채증사진을 찍게 하는 등의 인권침해 사례를 언급하면서 진상을 밝힐 것을 촉구했다.

이재오 당시 신한국당 의원은 추 의원의 발언에 대해 평양방송의 녹취록 내용을 인용하여 북한이 왜곡한 유언비어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일부 정치권이 한총련 사태를 왜곡시키고 공권력을 약화시켜 이적 세력을 도와주고 있다"고 반박했으며 박일룡 경찰청장도 전경 성추행설은 제대로 조사한다고 언급하면서 한총련의 심리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언했다. 이날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20여 명의 여성단체 회원들은 경찰청 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출처(한겨레) 당시 MBC 뉴스데스크 자료 KBS 자료

11월 21일 피해자 7명이 박일룡 경찰청장과 당시 현장 책임자, 진압에 참가한 전경 등을 업무상 위력에 대한 성추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데 이어 1997년 1월 30일 피해자 5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나 국민들의 무관심과 언론의 외면, 경찰의 수사 비협조와 검찰의 무성의한 수사로 인해 결국 3월 29일 검찰은 해당 사건에 대해 일괄 무혐의로 결론내고 말았다. 검찰 측이 밝힌 이유로는 피의자들을 특정할 수 없으며 당시 제출된 자료를 조사한 결과 증거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의 피해 여학생들과 한국여성단체연합 측이 반박의견을 내고 서울고등검찰에 재항고까지 냈으나 11월 29일에 이마저도 기각되었다. 무혐의 처리 과정에서 제대로 된 진상 규명조차 없이 종결시킨 것도 비판의 소지가 남는다. 이 사건은 1999년에 발간된 <한국여성인권운동사>에서도 다루어졌다.

이 외의 인권침해 사례들은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소식지 1996년 9월호를 참고할 것. 이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측이 1996년 12월 2일부터 인권침해에 대한 집단 손해배상소송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피해 당사자[10]들이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했고 이 중 일부는 배상 판결을 받았다.

5.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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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건국대학교에서 있었던 건대항쟁의 재현으로 토끼몰이식 진압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1986년 건대항쟁은 폭압적인 전두환 군사 독재에 맞섰다면 1996년 연대사태는 문민정부와 맞섰다는 차이점이 있다. 운동권의 대처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10년 전 건대항쟁 당시 NL 세력은 말뿐인 대중노선으로 인해 실패한 후 '군부 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로 방향을 틀어 이듬해 6월 항쟁 때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지만 연대사태는 실패 이후 어떠한 반성도, 평가도 없었다. 당시 한총련 의장 정명기(전남대)는 모든 책임을 정부 탓으로 돌렸고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임기 말 레임덕[11]과 이듬해 터질 IMF 경제위기 속에서 문민정부는 공안몰이로 정국 돌파를 시도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대학교를 점거하고 사망자와 실명자 4명이 나왔으며 그들의 폭력적인 면이 실시간으로 TV에 집중 중계되어 한총련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호의가 떠났다.

대학가에 개인주의가 퍼지기 시작하고 신세대 혹은 X세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면서 전두환 정권 시기의 군사 조직 같은 위계 질서를 지닌 운동권 조직은 점점 학생사회에서도 외면받게 되었고[12] 탈권위가 진행되던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운동권 조직과 학생운동 조직 내부에서도 '우리 안의 파시즘과 싸워야 한다'며 오래된 습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불거지기도 했지만 일부에 그쳤고 오히려 학생운동단체 내에서 전업 활동가 조직의 입김이 거세지는 폐단이 계속 이어졌다. 결국 연세대 사태가 터지고 나자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커진 상황에 처한 것이다.

또 원래 통일운동이라는 것이 운동권 여러 정파 중에서도 특히 NL 계열에서 주로 행하는 것이고 범민족대회,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등은 본질적으로 당시 한총련의 주류였던 NL 계열의 전유물이여서 비 NL 계열, 즉 PD 계열이나 21세기 등 타 정파의 참여율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물론 연세대 사태 당시도 마찬가지.[13] 그렇기 때문에 연세대 사태 이후 다수였던 NL 계열과 비 NL 계열은 크게 반목하게 되었다. 연세대 사태 이전부터 행사 참여 문제로 분열 양상이 있었고 한총련 주도 행사 때문에 학생운동이 탄압받으면서 도매금으로 같이 망하게 되니까 더욱 반발이 컸다. 결국 학생운동의 몰락에 일조하였다.

결국 국민들의 반응은 "쟤들 아직도 지들끼리 80년대에 살고 있음?" 정도로 싸늘하게 변했다. 8월 18일 MBC 여론조사 결과 72.5%의 국민들이 단호한 대처를 지지했고 80%의 국민들이 시위가 정당하지 않다고 의견을 표했다. 특히 나중에 알려진 한총련 지도부의 기만적인 행태[14]는 그나마 남아 있던 지지자들마저도 싸그리 정리하면서 한총련과 학생운동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만 이 사건 이후에도 사회의 부조리에 눈 뜬 학생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빨갱이 혹은 과격 폭력 집단 등으로 지상파에서 매도당하는 것을 겪은 후 더더욱 '의지를 불태운' 경우가 심심찮게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해 이석 구타살인 사건으로 한총련 쇄신 논쟁이 크게 일었고 그 해 말에 이적단체로 지정되면서 시망...

게다가 조선일보 논설주간 류근일은 8월 17일자 칼럼 <이번만은 책임져야>에서 "선진 강대국이란 나라에서 평화적인 시위자가 다치는 일도 없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전경이 쇠파이프에 얻어터지는 꼴 봤는가, 그랬다가는 온몸이 벌집이 돼도 옆에서 감히 찍소리 한마디 못 지르는 것이 선진국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학생운동권 세력은 더 악화 일로를 걸었고 언론도 한겨레를 제외하고 비난 일변도의 보도를 한 데다 정부 정책이 강경 일변도로 변하여[15] 그 해 12월에 있었던 안기부법[16]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 사건을 전후해 전국의 대학가나 기차역, 지하철역 등지에 경찰들이 상주하여 불심검문을 함으로써 일반 대학생과 시민들의 불편함이 더욱 커져만 갔다.

여름방학 기간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연세대학교는 교내 시설 파손 피해가 상당했다.[17] 종합관은 당시 교양 수업 및 문과대 전공 수업용으로 사용되는 건물인데, 내부가 상당 부분 불타고 파손되어서 복구가 완료되기까지 수년간 교양 수업 강의실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사실 당장 그것 이전에 검찰의 사건 현장이었기 때문에 출입 자체가 한동안 금지되어 있었다.

좀 더 설명하면 이 사태가 마무리된 것이 8월 20일이므로 2학기 개강일인 9월 1일까지 열흘 정도 앞둔 상황인지라 이대로라면 수업 진행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미 수강신청이 마무리된 이후라 강의 시간 변경시 전교생의 시간표가 모조리 뒤집히게 되므로 큰 혼란이 생길 것은 뻔한 일이었다. 개강 직전에 수십 개의 강의실이 위치한 건물을 졸지에 통째로 못 쓰게 되었으므로 2학기 개강 자체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불행 중 천만다행으로 당시 연세대엔 상경대의 신축 건물(대우관)이 막 완공되어 여름방학 중 이사간 직후라 경영관(현 백양관)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학교측에선 이 건물의 활용계획을 전면 보류하고 교수연구실로 쓰던 곳까지 단 일주일만에 벽을 뜯고 대충 페인트칠만 한 뒤 칠판을 거는 임시 공사를 벌여서 일반 강의실의 강의를 겨우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형강의실에 잡혀 있던 교양강의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학교에 있는 거의 모든 대형 강의실의 공강시간에 마구잡이로 쑤셔넣었고 그래도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시간에는 대강당에서까지 나무판 받치고 필기하면서까지 교양 강의가 간신히 진행되었다. 참고로 연세대학교 대강당은 채플 수업만 열리는 곳인데 애시당초 강의실 목적으로 쓰는 곳이 아닌지라 의자 옆에 달린 간이책상조차도 없다. 그래서 수백명이 들어가는 대강당에 달랑 100명 남짓이 옹기종기 모여서 수업을 듣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자주 연출되었다고 한다.

이후 '종합관을 복구하지 않고 이념 교육장으로 남겨야 한다[18] vs. 복구해야 한다'는 공방이 학교와 학생 사이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문과대는 강의실 피난 생활 때문에 교수나 학생들의 불편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 공방은 단순히 이념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화장실 문제였다. 피난 생활을 하던 경영관은 남초 현상이 심한 예전의 전공 특성에 맞게 지었기 때문에 남자 화장실에 비해 여자 화장실의 수도 적었고 비좁았지만 그곳을 정반대로 여초 현상이 심한 과가 많은 문과대가 쓰게 되면서 쉬는 시간마다 여자 화장실 앞은 늘 용변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십명의 여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루는 광경이 연출되곤 했다. 결과적으로 교내 시설이 완전히 복구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1998년도 2학기부터 종합관 사용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정부에서 시위현장 보존을 위해 새로운 종합관을 건설하는 데 국비를 지원하였고 현재의 위당관이 건설됐다. 1990년대 초반부터 문과대는 공간 부족을 호소하면서 상경대처럼 새로운 건물을 확보할 엄두는 못 내고 그저 종합관의 전용을 주장했는데 이 사태 이후 본의 아니게 신건물을 얻게 된 셈이 되었다.

한편 진압이 끝난 직후인 8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시위 현장을 직접 둘러봤는데 건물 외벽에 학생들이 스프레이로 써 놓은 각종 구호가 이북 방송의 내용과 똑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연세대 관계자가 김영삼에 대한 민망한 말은 미리 지웠다는 아부를 했다고 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또 학교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던지라 이 해의 정기교류전은 연세대학교가 고려대학교에게 양해를 구하여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1996년 11월에 있었던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졸업을 미룬 비운동권 후보가 운동권 후보들을 누르고 전 단과대 1위, 과반수 득표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NL계가 전국 대학 총학생회의 48%를 차지하면서 절대 과반을 확보했던 1995년보다 크게 쇠퇴하고 말았으며 1997년 한총련 출범식 과정에서 전경 1명이[19] 죽고 이석 치사 사건 같은 프락치 오인 살해사건 및 '강원대 자주대오 사건', '동아대 자주대오 사건'[20] 같은 공안사건까지 벌어지면서 NL 내 자주대오의 세가 크게 약화되었으며 결국 한총련 자체가 이적단체로 지정되면서 한총련은 사실상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범민족대회를 주도한 범민련도 그 해에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결되었다. 대법원 1998. 5. 15. 선고 98도495 판결, 대법원 1997. 5. 16. 선고 96도2696 판결

강위원 한총련 5기 위원장은 한겨레 연재물 <NL현대사>에서 "사태 20년이 지난 이후 어느 운동권 출신도 연대사태에 대해 심포지엄도, 토론도 없고 술자리에서 말을 하길 꺼리고 있으며, 이는 끔찍한 패배라서 입에 담길 꺼리기 기피하는 측면도 있지만,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밝혔고 박병언 변호사도 '학생운동권이 왜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는가'를 되돌아보기 위해 사태 몇 년 뒤 한총련 후배들에게도 그때의 사건을 얘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현대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교수는 1996년 8월 22일자 경향신문 '정동칼럼'에 <광복절의 비극>이라는 칼럼을 발표하여 정부의 단호한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촉구했다. 반면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은 8월 24일자 칼럼에 <세금을 내야 하나>라는 칼럼을 발표해 사태 초기부터 강경대응을 하지 못한 문민정부를 단호히 비판했다.
사태가 끝난 1996년 11월에 국가안전기획부가 전국의 일선 고등학교 교장들과 교사들을 상대로 안보/이념교육을 실시한 데 이어 그해 12월부터 서울시교육청은 서울시내 각 고등학교에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총련, 그들은 누구인가?> 등 한총련의 폭력성과 북한의 실상 등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보내 이를 관람하고 감상문을 제출하도록 요구한 바 있었다. 참조.

그리고 같은 시기 몇몇 예비군 훈련장에서도 안기부 외곽단체인 '남북문제연구소' 명의로 제작된 <한총련의 실체>라는 비디오를 상영했는데 비디오 내용 중 당시 구속된 몇몇 시위 학생들에 대해 폭력시위 건에 '증거 불충분'이라고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판사들을 '좌익 동조자'로 매도하는 내용이 문제시되어 대법원 측이 국방부에 문제 장면 삭제 등 시정조치를 내릴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방부 측은 "문제의 홍보물을 제작한 사실이 없고 일선 부대에 공식 배포하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이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측은 안기부에 테이프 제작에 대한 정보 공개를 요청했다.

서울경찰청의 특수기동대가 이 사건을 계기로 처음 창설되었다. 실제로 이들은 화염병 등을 사용하는 폭력시위에 대응하기 위해 경찰특공대 위탁교육을 받았으며 건물 농성 제압 등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거의 대부분의 중대가 흑카바[21]를 입고 다니는 등 단셋[22]과 함께 폭력시위의 히든카드로 취급받았으나 2000년대 들어 제5기동단으로 명칭이 변경되며 평범한 부대가 되었다.

6. 기타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해변에서》 2000년판 내용 중 중국-대만 얘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뜬금없이 연세대 사태 관련 영상이 나온다.

연세대 사태에 참여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자식 걱정 때문에 연세대 주변에 서서 망연자실 지켜보거나 경찰 측에 너무 심하게 진압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거나 따지는 모습이 잡히기도 했다.

당시 투입됐던 전의경들의 수기나 증언들을 들어보면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 1개 중대가 갔는데 돌아올 땐 20명만 복귀하고 나머지 인원은 전부 병원행이었다던가 위에 전술했듯 경찰서에서 서류 작성하는 보직이었는데 갑자기 입어 보지도 못했던 진압복과 방패를 주고 경찰버스에 태웠다던가...[23] 게다가 여름의 절정인 8월 중순이었던 데다 전국에서 몰려든 시위대 + 경찰들의 인파와 열기 때문에 아스팔트가 흐물흐물 녹아 기동화에 쩍쩍 들러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나우누리 통신망에 있던 한총련 CUG(폐쇄이용자그룹)이 경찰의 압수수색 영장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는데 당시 경찰이 나우누리 본사로 들어가 압수수색하던 도중 컴맹인 한 경찰이 "한총련 방이 몇호실이야?"라고 하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PC통신이 막 보급되던 시기의 흔적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민호는 이 사태로 인해 서울에서 붙잡힌 2002년까지 수배생활을 해야 했고(출처) 한총련 중앙집행위원장이었던 허현준은 사태 후 2년간 도피하다가 1997년 이후 북한의 절망적인 상황과 탈북민들의 진술을 접한 걸 계기로 '북한민주화운동'에 몸담으면서 NL 사상을 버렸다. 주간동아 기사

7. 참고/관련 자료



[1] 범민련 탄생 몇달 전인 1990년 8월부터 시작하여 1999년까지 총 10회에 걸쳐 진행되었던 행사.[2] 범청학련 결성 1년 전인 1991년부터 시작되어 2000년까지 총 10회에 걸쳐 개최했다.[주의] 의경이 인질로 잡혀서 폭행당하는 장면이 있으니 주의 바람[4] 확실한 집계는 아니다. 다만 당시 의경으로 진압에 투입됐던 군필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교통중대나 행정보조 같은 시위진압을 하곤 거리가 먼 소위 꿀보직 의경들까지 죄다 긁어모아서 잡탕 중대를 만들어 투입시켰다고 한다. 아마 그해 여름 서울에 전국의 의경이 다 모였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5] 야간진압은 위험도도 높아서 앞선 1994년 5차 범민족대회에서 야간 진압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도 있었다.[6]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7] 하마터면 2009년 용산 참사와 같은 일이 똑같은 이유로 일어날 뻔했다.[8] 1976년생[9] 학생들은 민주화투쟁 시기처럼 시민들이 도와주고 숨겨줄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각 가정이 문을 잠그고 받아 주지 않는 바람에 주택 옥상과 골목으로 도망다니다가 붙잡혔다.[10] 개중에는 한총련과 무관한데도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시위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피해를 입은 학생과 시민들도 있었다.[11] 갤럽의 직무수행 긍정 평가 4년차 3분기 34%[12] 홍치산(이창기)의 시집 <10분 사랑> 중 '희망을 보았네'라는 시가 이를 대변한다.[13] 당시 비 NL 계열은 서강대에서 자기들만의 집회를 하고 있었다.[14] 많은 학생들이 마지막까지 싸우다 구속되었지만 정작 한총련 지도부는 사수대의 도움을 받고 종합관 뒤의 창문을 통해 내려와 건물 뒤의 담을 넘어 연대 서문 방향인 연희동 방면으로 도주하였다.[15] 계명대에서 학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위에 경찰이 영장도 없이 무차별 검거하거나 서울내 대학 압수수색 과정에서 <남북의 창>의 방송영상 등을 녹화한 것까지 '이적표현물'로 규정하여 학생 운동권 등지에서 '공권력 남용'이라며 반발이 거셌다.[16] 1994년 개정 당시 폐지된 불고지죄와 찬양고무죄 수사 조항을 추가시키고자 했다.[17] 피해 물목 중에는 천문학과 광물 관련 자료와 샘플도 있었다. 엄청난 가치를 가진 운석 조각이 메테오 스트라이크 전경 잡는 1회용 투석으로 던져진 후(...) 영영 실종되었다는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다.[18] 1969년 전공투 야스다 강당 사건이 일어난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도 시위 당시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19] 페퍼포그에 치여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20] 1999년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음.[21] 백골단이 입고다니는 자켓의 검은색 버전. 훗날 교통중대로 재편된 79중대만 일반적인 방석복을 입고 다녔다.[22] 이들이 극렬 시위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본 사건 이후였다. 이전까지는 주요 국내외 인사들 앞에서 진압전술을 선보이는 시범부대에 가까운 성격이었다.[23] 이를 두고 7단위 출동이라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찰서마다 임시편성된 부대가 'XX7중대' 같은 번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 교통과나 유치장, 5분타격대(112타격대) 등 방순대를 제외한 경찰서 내의 모든 전의경들을 끌어다 모은 형태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수한 진압능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본문과 같은 큰 상황이 터졌을 때, 시설 전담중대마저 상황대비에 끌려나가면 그 자리를 보충하는 식으로 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