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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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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1. 개요2. 상세
2.1. 소장품
3. 교통편4. 역대 관장5. 역사 왜곡6. 기타

1. 개요

문화체육관광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 제67조의6(직무) 국립한글박물관(이하 "한글박물관"이라 한다)은 한글 및 한글문화 관련 유물과 자료의 수집·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 및 교류 등 한글문화의 보존, 확산 및 진흥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9 (용산동6가)에 있는 국립 박물관. 2014년 10월 9일에 개관했다. 행정조직법상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소속기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동남쪽에 있다. 애초에 중앙박물관 부지 일부를 사용해 건립한 것이다.

파주시 탄현면 통합 수장 센터가 건립 중이다. #

2. 상세

파일:국립한글박물관 로고(2014-2016).svg
2014년 개관 당시부터 2016년 정부상징으로 교체하기 전까지 사용한 로고
4층 건물이지만 전시관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곳은 2층과 3층이다. 가장 주가 되는 2층 입구 앞에 계단이 크게 설치되어 있고, 1층 입구는 옆의 쪽문에 있다. 4층은 직원을 위한 공간이고, 3층 내부에 4층행 계단이 있지만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다.

2층에 위치한 상설전시관에서는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 이두와 향찰을 쓰던 시절부터, 한글 전산화와 글꼴에 대한 논의가 있던 20-21세기 초반까지의 시기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는 전시관 내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볼 수 있고, 언문으로 천대받던 시절의 기록이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한글이 국문으로 지정되기부터 일제에 의해 조선어로 지위가 격하된 것, 한글을 지키기 위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해방 이후 한글 전산화 과정에서 발명된 송기주의 네벌식 및 공병우세벌식 타자기, 그리고 현대에서 사용되는 글꼴에 관한 이야기까지 있다.

2021년 4월 5일부터 2022년 1월 20일까지 상설전시관 개편공사를 진행하였고, 1월 21부로 재개장되었다. 재개장한 상설전시는 <훈민정음, 천년의 문자 계획>으로 전시장은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한글의 역사를 풀어낼 수 있도록 기획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한 다양한 문화재급 소장 자료와 관내외에서 새롭게 발견된 한글 자료들이 소개된다. 유가사지론(13~14세기), 선종영가집언해(1495년), 간이벽온방언해(1578년), 곤전어필(1794년), 말모이 원고(1910년대) 등의 보물 자료를 비롯해 무예제보언해(171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훈맹정음(1926년, 국가등록문화재), 송기주타자기(1934년, 국가등록문화재) 등 다양한 등록문화재들도 전시되었다. 이밖에도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쓴 한글 편지를 모아 놓은 정조 한글어찰첩과 양반 송규렴이 노비 기축이에게 쓴 한글 편지, 과부 정씨가 어사또에게 올린 한글 청원문,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가의 한글 자료, 일제 강점기 발명가 최윤선이 한글 교육을 위해 만든 조선어 철자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품은 유물들이 소개되어있다.

3층에서는 기획전시가 이루어진다. 상설전시관이 재개장한 시점에는 조선 시대와 근대의 여성들이 주로 지은 내방 가사를 다루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기획전시 관련 정보를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어린이가 신나게 놀면서 한글을 이해하고 한글로 다양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체험전시 공간인 '한글 놀이터'가 있다. '한글, 어린이가 소통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힘'을 주제로 한 공간으로 일상 속에서 어린이들이 새롭게 한글을 발견하고, 한글을 통해 가족, 친구, 이웃과 생각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며 한글문화를 스스로 창작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한글 놀이터'는 사전 예약으로 운영되며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1층에는 한글도서관이 있다. 대부분의 분야를 취급하지만 한글박물관 내에 있는 도서관인 만큼 한글 관련 자료가 가장 주를 이루고 있다. 도서관 규모도 아담한 편이고, 열람을 위한 공간이 매우 적어 장시간 활동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 박물관 별관 건물 내에 '도란도란 쉼터'라는 휴게공간이 새로 재개장하였다. 관람객 휴식공간과 어린이 독서공간을 함께 조성하여 해당 공간에서는 어린이들이 책을 읽거나 쉴 수 있다.

2층에 카페와 기념품점이 있다. 카페의 음료 가격은 시세와 비슷한 편이고, 기념품들은 다소 비싼 편이다.

2.1. 소장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분류:국립한글박물관 소장품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교통편

4. 역대 관장

5. 역사 왜곡

국립한글박물관이 유튜브에 게시하는 영상 중 대중을 대상으로 제작된 『만화로 즐기는 한글 이야기』라는 시리즈가 있다. 이 시리즈의 많은 영상은 북한 인물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친북적 논조와 민족의 고난이나 선조의 영민함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논조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논조가 단순한 편향을 넘어, 이념을 지지하기 위해 사실까지 날조하는 역사 왜곡에 이른다는 점이다. 모든 사례를 일일이 다 반박할 수는 없으니 심각한 역사 왜곡의 사례 두 가지만 살펴보자.

「원고로 남은 비운의 사전_말모이, 보물이 되다!」편에서는 미완성 사전 원고인 『말모이』가 이후 편찬되는 사전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말모이』 편찬에 참여했던 김두봉이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동참했다고 설명한다. 『말모이』는 한글학자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편찬되던 우리말 사전으로, 주시경의 요절로 인해 작업이 중단되어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김두봉은 훗날 북한의 거물 정치인이 되는 인물로, 주시경의 제자로서 『말모이』 편찬에 참여했으며, 1919년에 상해로 망명하면서 스승의 유작인 『말모이』 원고를 상당 부분 반출하였다. 그러나 영상의 설명과 다르게 김두봉은 상해로 망명한 이후 해방 이전까지 귀국한 적이 없고,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동참하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했다. 게다가 『말모이』는 『조선말 큰사전』을 포함하여 이후 편찬되는 사전의 기초가 되지 못했는데 그 원인이 김두봉에게 있다.

1927년 국내의 한글학자들은 사전 편찬을 재개하기 위해 이윤재를 상해로 보내 사전 편찬 경험이 있는 김두봉을 초청하고, 김두봉이 반출한 『말모이』 원고를 인수하여 새로 편찬하는 사전의 기초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김두봉은 국내로 귀국하지도 않았고 원고를 빌려주지도 않았으며 그 뒤의 김두봉의 행동은 힐난받을 만한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게 김두봉은 이윤재에게 당시 큰 돈이었던 200원을 보내면 원고를 정리해서 보내겠다고 제안한다. 맨손으로 귀국한 이윤재는 김두봉의 말을 믿고 출판업자 이중건으로부터 200원을 기부받아 김두봉에게 보냈다. 그러나 김두봉은 약속과 다르게 원고를 보내지 않았고 원고를 손질해서 완성시키지도 않았다. 도리어 동생을 통해 사전 편찬의 의욕을 꺾는 납득하기 어려운 훈시를 전보로 보내왔다.
사전원고 정리는 장구한 시일을 요하는 것이니 그것보다도 신 철자법을 속히 보급시키는 것이 중요하니 대중이 많이 읽는 서적을 신 철자법으로 많이 박아내는 것이 가장 첩경이다.[1]
김두봉의 이 행위는 능력도 없이 원고를 혼자 완성하려는 개인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주시경의 유작인 말모이는 다른 사전의 기초가 되는 일도 없이 미완성 상태로 방기되었다. 이와 함께 열악한 환경에서 사전 편찬을 재개한 한글학자들은 혼란과 경제적 부담을 겪었다. 이윤재가 김두봉에게 보낸 200원은 결과적으로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일본 제국이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가는 근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돈을 보낸 당사자인 이윤재는 일제에게 집중적인 고문을 받고 결국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의 사전편찬을 다루는 다양한 문헌[2][3][4]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인데도 한글박물관 측은 북측 인사를 미화하기 위해 『말모이』와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김두봉의 귀국과 사전 편찬 사업 합류라는 허구로 대체했다.

「철자법 논쟁_주시경파 vs 박승빈파」편에서는 일제가 일관되게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 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주시경파의 조선어 학회가 발표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박승빈 중심의 반대에 직면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영상과 달리 일제강점기 중반에는 '문화통치'라는 유화책을 실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이 시기에 주시경파는 탄압을 당한 게 아니라 조선총독부에 협력하여 영상의 주제인 철자법 논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이다. 박승빈파가 본격적으로 주시경파에 반발하기 시작한 것은 주시경파가 참여하여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언문 철자법」 때문이지, 주시경파가 독자적으로 발표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 때문이 아니다.

1930년 최현배, 권덕규, 심의린 등 주시경파 학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사업에 참여했고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 산하 각급 학교가 사용하는 조선어 교재에 주시경식 철자법이 보급되었다. 이는 철자법 논쟁에서 주시경파에게 큰 우위를 가져다주었고, 위기의식을 느낀 박승빈파의 이러한 불균형 속에서 본격적인 반대를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로 1931년에 박승빈파는 주시경파의 조선어학회에 대항해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32년에는 동아일보가 개최한 한글 토론회에서는 양파가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이는 모두 1933년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발표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주목할 점으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총독부의 사업에 참가한 주시경파를 비난하는 평가가 있었다.
하여간 한글運動도 現實에 잇어 우리의 思想을 기록하는 統一된 道具를 使用하여야 하겟다는 意味에서 무엇보담도 焦眉의 急務에 잇는 것인즉 蛙鷸이 相爭하고 同志가 相賊하다가 그쫓아 아무 解決된 事業이 없이 남의집웅아레 뫃여서 그 政治的 背景밑에 비로소 改正綴字法을 定하얏다는 것도 우습다란 羞耻다.
(현대어) 하여간 한글운동도 현실에서 우리의 생각을 적는데 통일된 도구를 써야 한다는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다. 개구리와 도요새가 서로 싸우고 동지들이 서로 해치는 사이에 아무 해결된 일도 없었다. 남의 지붕아래에 모여서 남의 정치적 배경 아래에서야 비로소 개정철자법을 정했다는 것은 우습고 부끄러운 일이다.
金台俊, 「硏究者的 態度에서」, 『東光』, 1932.04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맞춤법을 정립한 주시경파가 조선총독부의 사업에 참여하여 철자법 논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불편할 수 있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글박물관이 일제가 일관적으로 민족 말살을 시도했다고 거짓 서술을 하거나 박승빈파의 반대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불편한 사실을 감추기 위한 역사 왜곡이다.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부의 학술기관이 지배계층의 이념을 선전하며 국민을 '계몽'하는 것에 긍정적인 면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말까지 일삼는 것만은 학자로서의 양심을 배반하면서까지 주권자를 기만하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6. 기타


[1] 정인승, 「제29화 조선어학회 사건(13)」, 『중앙일보』, 1972.12.05에서 재인용[2] 정인승, 「한글 운동과 이윤재 선생」, 『나라사랑』, 제13집, 외솔회, 1973.12[3] 박용규, 『우리말·우리역사 보급의 거목 이윤재』, 역사공간, 2016.12[4] 정재환, 『나라말이 사라진 날』, 생각정원, 20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