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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07:48:05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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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f0000,#7f0000><colcolor=gold,gold> 설립자 <colbgcolor=#fff,#1f2023><colcolor=#181818,#e5e5e5>이냐시오 데 로욜라 · 니콜라스 데 보바디야 · 디에고 라이네스 · 시망 호드리게스 · 알폰소 살메론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피에르 파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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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Francisco Javier
파일:프란치스코하비에르.pn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본명 프란치스코 야추 아스필리쿠에타[1]
(Frantzisko Jatsu Azpilikueta)
프란시스코 데 하소 이 아스필리쿠에타[2]
(Francisco de Jasso y Azpilicueta)
출생 1506년 4월 7일
나바라 왕국 하비에르
사망 1552년 12월 3일 (향년 46세)
명나라 장먼시 상촨다오
학력 파리 대학교[3] (신학 / 학사)
파리 대학교[4] (신학 / 석사)
직업 성직자(사제)
종교 가톨릭
소속 예수회
사제 수품 1537년 6월 24일
베네치아 공화국
빈첸초 네구산티 주교 주례
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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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성인명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언어별 명칭]
라틴어: 프란치스쿠스 크사베리우스
(Franciscus Xaverius)
영어: 프란시스 제이비어
(Francis Xavier)
스페인어: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Francisco Javier)
바스크어: 프란치스코 사비에르코아
(Frantzisko Xabierkoa)
포르투갈어: 프란시스쿠 사비에르
(Francisco Xavier)
프랑스어: 프랑수아 그자비에
(François Xavier)
독일어: 프란츠 크사버
(Franz Xaver)
이탈리아어: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Francesco Saverio)
일본어: 후란시스코 자비에루
(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중국어: 팡지 사우뤠
(方濟·沙勿略)
시복 1619년 10월 25일
교황령 성 베드로 대성당
교황 바오로 5세 주례
시성 1622년 3월 12일
교황령 성 베드로 대성당
교황 그레고리오 15세 주례
상징물 수단, 십자가
축일 12월 3일
수호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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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3. 생애4. 여담5. 대중 매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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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천국으로 보내거나 지옥으로 보내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분께서 저의 주님이시기에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스페인사제이자 선교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 디에고 라이네스 등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했고, 인도일본아시아가톨릭을 전파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가톨릭, 성공회, 그리고 루터교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12월 3일.

2. 명칭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국 천주교외국 성인명 등의 한글표기에 따라 교회 라틴어 표기와 스페인어 표기를 혼용한 방식이며 이전에는 중국어 팡지거(方濟各 / 方济各 / Fāngjìgè)와 이탈리아어 사베리오(Saverio)를 혼용한 표기인 '방지거 사베리오'라고도 했다.[5] 하비에르바스크어 에체베리아(etxeberria)에서 유래한 것으로 '새로운 집'을 뜻하며 성인이 태어난 출신지를 가리키는데, 향후 일반적인 남자 이름으로 쓰이는 자비에르의 어원이 된다. 세례명으로 사용할 경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로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나 'F. 하비에르'로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3. 생애

파일:attachment/rubensxavier.jpg
{{{#fff,#fff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6]조선 사람으로 여겨지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안토니오 꼬레아가 아닐까 추측한다.) 그림 중간에 보이는 노란 도포를 입고 이상한 모양의 망건을 쓴 인물이 조선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외에도 이 그림에는 일본인이나 아프리카인, 멕시코인 등 다양한 인종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하비에르의 행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은 아니고, 하비에르가 기적을 베풀어서 이교도의 우상들이 무너지고 복음을 얻은 신자들의 병이 낫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
(Wunder des hl. Franz Xaver)
페테르 파울 루벤스 作, 빈 미술사 박물관
}}}
본명은 바스크어로 프란치스코 야추 아스필리쿠에타(Frantzisko Jatsu Azpilikueta). 원래는 바스크 지방 귀족인 요아네스 야추(Joanes Jatsu)의 아들이었지만 집안은 이미 가세가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선견지명이 있던 아버지에 의해 고등교육을 받고 유학을 가며 선진적인 시각을 키웠고, 그 당시까지만 해도 출세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킬 생각을 했지 선교사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런 도중에 만난 사람이 예수회의 창설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 그에게 감화받은 하비에르는 말 그대로 종교에 홀딱 빠져 일신 영달을 버리고 선교사가 되어 인도, 동남아 등지에 변변한 지원 없이 선교 사목을 시작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던 중 말라카에서 죄를 짓고 해외로 추방되어 있던 일본인 야지로[7]를 만나, 그에게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반드시 그 땅에 선교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1549년, 폭풍우를 뚫고 일본에 도착한 그는 사쓰마국/오스미국(가고시마), 히라도 섬, 나가토국/스오국(야마구치) 등을 전전하며 전도하여 나가토국의 다이묘오우치 요시타카에게 화승총을 선물하고 선교 허락을 받아내[8] 당시 폐건물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절간인 다이도우지를 기증받아 교회로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본토가 오닌의 난 이후로 사정이 난리 법석인지라 여유있게 전도를 하지 못했고[9] 결국 실패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이도우지에서 전도를 시작한 뒤로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많았던 모양. 그 뒤로 일본에서 선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수인계를 후배 선교사들에게 확실히 하고 갔다. 그 가운데는 전도하고 설교할 때 사제들이 유럽에서 입는 사제복 대신 일본 승려들이 입는 납의와 가사를 입고 하는 것도 있었는데, 같은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명에서 사제복 대신 유학자도포를 입고 유교 교리에 맞추어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해가며 전도하려 한 것과 같은 일종의 '현지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10]

이 첫 일본 선교에서 4명의 일본인 청년에게 세례성사를 주었는데, 이 중 베르나르도(일본명 불명)는 인도를 거쳐 로마까지 건너가 일본 최초의 유럽 유학생이 되었다. 총명하고 신앙심이 깊어 현지 예수회 수사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고[11], 교황 바오로 4세를 알현하기도 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장기간의 여행으로 지친 나머지 병을 얻어 1557년 포르투갈에서 사망했다.

1551년, 중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위해 출발했지만 진입하지 못하고, 광둥항 앞의 상촨다오 섬(上川岛)[12][13]에서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는 향년 46세. 사후 그곳에 묻혔다가 1553년 3월 22일 말라카로 이장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11일 인도의 고아로 옮겨졌다. 1637년 12월 2일, 부패하지 않은 그의 유해는 유리로 만들어진 관에 안치되었다. 그의 유해 중 오른쪽 발가락들은 유해에서 분리되어 성유물로 각국에 보관되어 있다.

4. 여담

흔히 일본인도사도로 칭해지며, 외국 선교의 수호성인이다. 서강대학교에서는 예수회 인물이나 가톨릭 성인의 이름의 특징에서 건물 이름을 따오는데, 예전 문과대 건물 이름의 정식 명칭이 하비에르관이었다. 외국 선교의 수호성인이라는 점에서 주로 영문과(영미문화계)나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및 중국문화계가 구비된 건물 이름을 차용한 듯하다. 지금은 문과대는 2011년에 완공된 정하상관으로 모두 이전하였고, 법학전문대학원과 지식융합학부가 하비에르관을 이용하고 있다. 보통 Xavier의 앞글자를 따서 X관이라 부른다. 2013년에는 정하상관 옆에 프란치스코관이 완공되었다.

동명의 이름을 딴 프랑스외국인학교하비에르 국제학교(Lycée International Xavier)가 있다. 프랑스 교육사도직을 목표로 구성된 사도생활단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회가 1980년대 한국에 진출하여 2002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서 학교를 시작했다. 2006년 종로구 구기동에 교사가 신축되어 이전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축일인 12월 3일개교기념일이다.

2021년 3월 미얀마 군부의 민중 시위대를 향한 무력진압 전면에서 용감하게 나선 앤 로사 누 따웅(Ann Rosa Nu Thawng)수녀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수녀회(Sister of St. Francis Xavier) 소속이며,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회(St. Francis Xavier's Apostolic Community)와는 무관하다.

5. 대중 매체

일본에서도 유명한 덕분에 그 시대를 무대로 한 일본의 작품 등에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전국 란스자비에르, 전국 바사라 시리즈자비 등. 개그성 등장으로는 수도자 특유의 삭발 때문에 주로 대머리, 그것도 옆과 뒤만 머리가 남고 정수리는 벗겨진 형태의 대머리를 개그포인트로 잡는 형태로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14]

한편, 일부 역덕들은 이냐시오 데 로욜라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한다. 개신교 목회자인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김상근 교수가 10여년의 연구와 답사를 바탕으로 저술한 <아시아 선교의 개척자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는 이냐시오가 고향 출신 유학생을 도와주느라 학교 주변에서 얼쩡거린다는 소식을 들은 높으신 분들이 미소년을 노리는 페도필리아가 아닌지 우려했다면서도 이냐시오가 훗날 하비에르를 아시아에 보낸 후 그를 떠올리며 "하비에르야말로 그가 ‘주물렀던 어느 밀가루 반죽보다 더 딱딱했던’ 인물이라고 평했다"는 의미심장한(...) 서술을 덧붙였다. 저자는 오랜 연구와 철저한 사료 검증으로 서술한 문구였겠으나 그 쪽의 시선으로 보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석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게...

6. 관련 문서



[1] 바스크어식 본명.[2] 스페인어식 본명.[3] 콜레주 생트바르브에서 재학.[4] 동일한 콜레주에서 재학.[5] 대표적으로 1947년 4월에 창설된 성 방지거 사베리오회(현 한국가톨릭의사협회의 전신)가 있으며 대한성공회에서는 여전히 사베리오라는 표기를 사용해 '프란시스 사베리오'로 지칭한다.[6] 재밌는 뒷이야기가 있는데, 이 그림에는[7]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은 일본인 천주교 신자이다. 무역업자였다고 하나 해적이라는 설도 있다. 하비에르가 일본을 떠난 뒤의 행적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다시 해적일을 하다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고, 가고시마에서 비밀 선교활동을 했다는 설도 있다.[8] 처음에 오우치 요시타카를 찾았을 때는 항해로 먼길 오느라 지저분한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뭔가 예물도 없이 빈손으로 오우치 요시타카를 만나고 그 자리에서 대뜸 "당신은 너무 사치스럽고 방탕하게 살고 있다. 사치와 방탕은 하느님이 경계하시는 죄악이다"라며 대놓고 비방을 해서 분노한 요시타카에 의해 전도는 말도 못 꺼내고 쫓겨났는데, 이래저래 일본 안에서 구르고 뛰고 하면서 일본의 예법이나 풍속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서는 깔끔한 옷을 구해 입고 요시타카를 만나 화승총이나 자명종, 유리 주전자 같은 서양에서 가져온 물품을 바치고 정중하게 전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때서야 요시타카는 하비에르에게 기독교 전도를 허락하고 당시에는 폐찰되어 있던 다이도우지 절간 건물을 내주었다고 한다.[9] 당장 하비에르에게 전도를 허락한 오우치 요시타카도 하비에르가 오고 2년 뒤에 다이네이지의 변으로 횡사했다.[10] 선교사 경력으로 치면 마테오 리치가 후배다.[11] 당시는 비백인 인종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부터 논쟁거리인 시대였다.(바야돌리드 논쟁 참조)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서 온 일본인이 유창한 신앙고백을 하니 놀랐던 것이다.[12] 섬 이름 자체가 성요한의 포르투갈어식 발음을 음차한 것이다.[13] 현재 광둥성 장먼시 타이산시 상촨다오[14] 예를 들면 GTO에서 오니즈카가 교장의 이름을 기억 못해서 '자비에르'라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하비에르의 일본식 표기이다.[15] 등장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케치 미츠히데, 오다 노부나가 3인방이 서로 으르렁 거리고 있을 때 나와서 셋을 총으로 제압해버린 뒤 문 닫고 들어가긴 했다.[16] 마치 모노노케 히메에서 나병환자들이 개량한 철포 같은 형태.[17] 해석하자면 ‘예수회의 하비에르’.[18] 서양인처럼 분장한 일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