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8:48:53

침묵하는 다수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케야키자카46의 노래에 대한 내용은 サイレントマジョリティー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tablebordercolor=#e90606> 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올해의 인물 (1960년대)
Time Person of the Year 1960's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파일:attachment/Time1960.jpg파일:attachment/time_1961.jpg파일:attachment/time_1962.jpg파일:attachment/time_1963.jpg파일:attachment/time_1964.jpg
1960
미국의 과학자들
1961
존 F. 케네디
1962
요한 23세
1963
마틴 루터 킹
1964
린든 B. 존슨
파일:Person Of The Year 1965.jpg파일:Person Of The Year 1966.jpg파일:attachment/time_1967.jpg파일:attachment/time_1968.jpg파일:attachment/time_1969.jpg
1965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1966
베이비 붐 세대
1967
린든 B. 존슨
1968
아폴로 8호 우주비행자들
1969
미국의 중산층
파일:Time_Inc_white.png
}}}}}}}}} ||

1. 개요2. 이해3. 시끄러운 소수4. 존재 여부에 관한 논쟁
4.1. 존재하지 않는다4.2. 분명히 존재한다4.3. 제3의 시각
5. 침묵하는 다수가 승리한 선거6. 시장에서의 침묵하는 다수7. 유사 사례8. 가상 매체의 사례9. 관련 문서

1. 개요

"침묵할 때, 그들은 소리치고 있다." (Cum tacent, clamant.)
키케로, 카틸리나 반박문 中 (Cicero, In Catilinam 1,8)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는 직접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는 않는 다수 대중을 의미하는 말로, 원래는 죽은 옛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죽은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

이 말은 1969년 11월 3일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한 연설로 유명해졌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목소리를 가진 소수(Vocal Minority)"와 달리 다수는 전쟁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 다만 이 말을 처음 쓴 것은 닉슨이 아니며 1967년 공화당 지지 성향의 노조 간부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이후 닉슨의 연설 작성자가 썼다. 68혁명 때 혁명이 전세계를 휩쓸었음에도 1968년 미국 대선, 1968년 프랑스 총선 등에서 보수파가 연이어 승리하며 다수의 군중이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해졌고,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어 현재는 정치적 용어로 정착했다.

1969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미국의 중산층"이지만 타임지는 해당 불특정 인물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68혁명에 반대하는 미국 교외의 전문직 종사자 중산층이 리처드 닉슨의 당선에 기여했음을 언급하였다.

2. 이해

국가 규모의 큰 민주사회에서 시위나 청원 등을 하며 열성적으로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에 비하면 소수인 경우가 많다. 어떤 서명운동에 10만 명이 동참했다면 분명 굉장히 많은 사람이 찬성하는 것이지만, 그 사회의 인구가 1,000만 명이라면 엄밀히는 1%의 뜻일 뿐이다. 침묵하는 다수는 말 그대로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의사를 가지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헌데 침묵(기권)도 하나의 권리인 건 맞는데, "침묵/기권=긍정도 부정도 안 함"을 "침묵/기권=긍정 함 or 긍정 안 함"으로 편집하면서 "봐라! 다들 찬성 or 반대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1]

이 때문에 실제 어느 쪽이 다수 대중의 뜻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쟁점이 덜 중요한 사안이면 주로 여론조사를,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면 국민투표 등을 실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현상들은 당장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로도 잘 드러난다. 민주주의는 투표로 말하는 법이기 때문.

참고할 만한 다른 용어로는 커뮤니케이션학에서 다루는 "침묵의 나선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의견이 사회적으로 다수라고 느껴지면 마음껏 그 의견을 표출하지만, 소수라고 느껴질 경우는 그냥 침묵을 지킨다는 것. 이것은 각종 여론조사 등에서 나온 결과가 실제 투표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일정 부분 설명해 준다. 어떤 집단이 실제로는 다수파인데 소수파가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스스로를 소수라고 착각하고 침묵을 지키는 경우라면, 침묵의 나선 이론과 침묵하는 다수의 논리가 교집합을 갖게 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3. 시끄러운 소수

'침묵하는 다수'가 존재하기 위한 전제로 '시끄러운 소수(vocal minority)'가 필요하다.

눈에 자주 띄면 실제보다 세력이 커 보이므로, 군중심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소수파는 좀 민폐다 싶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것. 이 작전이 성공하게 되면 어느새 진짜 다수가 되어 있다는 게 이 작전의 무서운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의 개신교인 비율은 2015년 통계 기준 약 20%로(970만명) 생각보다 높지 않지만 체감상 개신교인이 많다고 느끼는 현상이 있다. 어느 도시를 가도 교회를 쉽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대한민국/사건사고에 나오듯 온갖 문제점이 화자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진짜 그렇게 느껴지는, 일종의 환청효과인 셈.

하지만 이런 시끄러운 소수는 활동을 지속할 수록 다수의 사람, 심지어 같은 편인 온건한 지지층들과도 멀어지면서 자기쪽의 이탈과 상대쪽의 단결을 불러올 수 있다. 바로 위에서 예시로 든 개신교의 신도 비율을 생각해보면 된다. 개신교불교(15%)나 가톨릭(10%)보다 신도수는 많지만, 타 종교에 비해 부정적인 인식이 높다. 개신교 내부의 온건파는 침묵하는 다수이고 강경파는 시끄러운 소수이기 때문에 비율은 높아도 시끄러운 소수처럼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침묵하는 다수'보다는 '시끄러운 소수'가 활동에 적극적인지라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며, 일부드립에서도 볼 수 있듯 관찰자의 시점에서는 결국 시끄러운 소수의 문제를 전체의 문제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4. 존재 여부에 관한 논쟁

4.1. 존재하지 않는다

침묵하는 다수의 의견이 늘 동질적이지 않고,[2] 시끄러운 소수의 의견 역시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사실 밀리는 쪽의 정신승리 기법이란 주장. 대부분의 침묵하는 다수들은 해당 사안에 대해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

독재 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자주 사용된 논리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4.2. 분명히 존재한다

침묵하는 다수는 존재하며, 이들은 생활이 있기 때문에 대낮에 거리로 몰려나오기 힘들 뿐, 혹은 괜히 시끄러운 소수와 싸우기 귀찮아하기 때문이란 주장이다.

무엇보다도, 정국이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큰 목소리를 내는 집단은 급격히 변할 수 있지만, 실제 사회를 구성하는 대중들의 입장이 그만큼 급격하게 변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침묵하는 다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침묵하는 다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례는 선거에서 모두가 A후보가 승리할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막상 투표결과 B후보가 승리하는 상황이다. 이런 경우에 많은 이들이 "나랑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A후보에 투표했는데, 어떻게 B후보가 당선된거죠?"라는 의문을 갖기도 하고, 심할 경우에는 선거가 조작되었다음모론에 빠지기까지 한다. 실제로 선거가 조작되었을 가능성보다는, 당신이 우물 안 개구리일 가능성이 더 크다.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들과 어울리는 경향이 있다. 설령 주변에 B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A후보가 반드시 당선되어야 한다며 열변을 토하는 부류의 인간이라면, 당신과 언쟁을 피하고 싶어 자신이 B후보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굳이 당신에게 밝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하자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다가 전혀 다른 결과에 충격받게 된다는 것.

"침묵하는 다수"를 유명하게 한 닉슨 자신이 1968년 대선에서 재기에 성공하며 사실상 34년간 계속되던 민주당 우위의 시대를 끝낸 것이 "침묵하는 다수"를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3]

1960년 일본에서도 안보투쟁으로 반정부 투쟁에 극에 달했던 가운데 당시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가 "국회 주변은 시끄럽지만 긴자고라쿠엔 구장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나에게는 소리없는 소리(声なき声)가 들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대다수 국민들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을 뿐 안보투쟁에 동의하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4] 안보투쟁은 기시 본인의 퇴진이 있은 뒤에야 끝났다. 그렇다고 1956년과 1958년도 참의원, 중의원 선거를 거치면서 자민당의 득표율은 50%대, 사회당의 득표율은 30%대 초반 가량으로 고착화된 구도에는 큰 변함이 없었고,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의 살해사건(도쿄 찌르기 사건) 등의 호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사회당은 공천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권을 교체할수있는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후 이촌향도 현상에 의해서 자민당의 득표율이 40%대로 내려가면서 자민당 지지자들이 일본 유권자 구성에서 더 이상 다수를 차지하지 않게 되었지만, 동시에 야권에 대한 지지세가 공명당, 공산당으로 분산되어 야당의 다당화 현상이 두드러졌고, 사회당은 이후 1993년까지 만년 야당으로 지내야만 했다.

2015년에는 도널드 트럼프가 이 단어를 이용하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당하다시피 하는 일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그래서 침묵하고 있었다는 트럼프 지지자의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대선 결과는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인단에서 승리했으나, 국민투표에서는 민주당 후보 힐러리가 앞섰기 때문에 트럼프의 대선 승리를 침묵하는 다수 때문이라고 보기 힘들다. 결국 투표를 하지 않았던 민주당 지지층과 중도층이 반트럼프로 총결집해서 트럼프를 낙선시켰다.

이는 번역의 차이기도 한데, majority를 다수로만 번역하면, 또다른 뜻인 주류를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침묵하는 다수에 드는 사람들은 이 논의가 활발한 투표율이 낮은 직접민주주의 국가(ex: 미국, 한국 등)에서 가장 인구수가 많고, 정치/사회적으로 다수인 덕에 주류의 지위를 차지하는, 예를 들면 중장년층, 중산층, (서구 한정) 백인 같은 분류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침묵하고 있어도 한 가정의 가장이고 한 사회의 주류기 때문에 정치적인 힘을 가질수 있기 때문에 투표라는 국민 공통의 참정권 및 여러가지의 참정 수단을 동원하여 정치를 그들의 성향에 맞게 흘러가게 할 수 있는 것.

나무위키도 '침묵하는 다수'의 적절한 예시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일반적인 통념과 같이, 나무위키에서 문서를 사유화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문서에 개인적인 시각을 떡칠해가며 사유화를 하더라도 대다수의 유저들은 문서 하나하나에 신경쓸 여력이 없고, 잘못된 정보가 계속 돌아오는 것을 (롤백) 토론으로 제지하기 위해 개인적인 시간을 쏟아부어봤자 보통 스스로가 딱히 얻는 게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유자가 신고 기능까지 악용하면 다수자들 개인이 더 피곤해진다. 그러나 누군가가 결국 사유화된 문서에 토론을 열고 총대를 매기 시작하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렇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토론 현장에 한마디씩 덧붙이며 문서 사유화를 비난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4.3. 제3의 시각

하지만 이런 주장의 맹점으로서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정치적 무관심층이 많을 경우 "결국 침묵하는 다수도 관심 없는 진짜 다수에 비하면 소수가 아닌가"라는 비판을 얻을 수 있다.[5]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투표로 보증되지만 무조건적인 투표만능주의(51% 독재)에 빠지면 곤란하다는 이야기. 또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이 아닌 것 역시 당연한 이야기다.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에서 "군중에 의거한 논증"을 참고.

침묵하는 다수 집단은 항상 시끄러운 소수 집단과 서로 적대적이거나 상반되는 입장을 갖는 건 아니다. 물론 목소리를 크게 내는 소수집단이 사회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용한 다수들이 그 소수에 반대할 것이라는 보장 역시 없다.

이런 면에서 침묵하는 다수라는 개념은 겉보기에 드러나는 집단의 구성이 반드시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배후집단의 구성과 일치하지는 않음을 지적하는 개념으로 제한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침묵하는 다수가 승리한 선거

6. 시장에서의 침묵하는 다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선민사상/문화 콘텐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미연시가 팔리지 않게 된 3가지 이유

침묵하는 다수와 시끄러운 소수는 시장에도 존재한다. 기업이 시끄러운 소수의 요구를 무리하게 수용하려다가 침묵하는 다수를 외면하는 바람에 망하는 경우가 있다.

업계 측에서는 시끄러운 소수의 입장을 다수의 입장으로 착각하고 시끄러운 소수의 요구를 수용한 적 있는데, 그렇게 시끄러운 소수의 요구에 응했다고 해서 딱히 이들이 매출을 높여주는 것도 아니다.[6] 반대로 다수의 소비자들은 등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프로불편러들의 요구보다는 게임의 매출을 책임져주는 유저들과의 소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게임 회사들은 이들의 비난을 무시 및 묵살하고 있다. 클로저스 성우 교체 논란과 데스티니 차일드 송미나 사건이 그 예. 메갈리아를 옹호한 이유로 성우와 원화가를 해고하자 메갈리아는 단체로 항의했지만, 이들의 보이콧 및 항의는 클로저스와 데스티니 차일드 어느 쪽에도 타격이 전혀 없었다.[7]

위의 경우와는 다르게, 게임회사 측에서 소수의 하드코어 게이머의 요구에 응하다가 다수의 일반 게이머, 뉴비들을 놓치는 바람에 망하는 경우도 있다. 진짜 다수의 의견을 따랐지만 도리어 잠재적인 다수를 무시하여 미래의 이득을 놓친 것이다. 리듬 게임대전 격투 게임이 그 예.

물론 위의 논리대로라면 매출을 책임져주는 유저들을 포함한 침묵하는 다수가 논란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오히려 비난이 불편러의 의견으로 받아들여져 묵살될수도 있다는 의미도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슈타인즈 게이트나 우마무스메로, 이 두 게임은 국내에서 발작하기 딱 좋은 사례인 극우 논란, 일러레 페미 논란이 있는 게임들이지만, 이 사실로 인해 난리가 난 것도 아니고, 국내의 흥행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도 못했다.

7. 유사 사례

특정 계층이나 집단 내에서 소속 인물 중 '소수'가 저지른 사건사고나 도덕적 해이가 외부에 알려졌을 때, 제 3자들은 이들에 대해서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의 계층이나 집단 내에서 그 '소수'가 저지른 사건사고에 대해 '다수'가 침묵으로 일관할 경우 제3자들은 이들 계층이나 집단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사실상 암묵적으로 그들을 두둔하는 것이다' 식의 판단을 하게 되고, 이들 계층이나 집단의 이미지 악화로 이어진다. 이걸 잘 볼 수 있는 게 바로 나라 망신이다. 한 나라의 국민이 벌인 사건 때문에 타국에 민폐를 끼치면 그 나라의 이미지가 나빠지지만, 그것이 그 나라의 진짜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게 핵심이다.

8. 가상 매체의 사례

9. 관련 문서



[1] 한마디로 어떤 사안에 대해 긍정을 주장하는 쪽이던 부정을 주장하는 쪽이던 양쪽에서 똑같이 써먹을 수 있다는 것.[2] 즉, 천만 명 중에서 서명운동에 동참한 사람이 10만 명이라면 분명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남은 990만 명이 해당 서명운동에 대한 반대파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3] 다만 리처드 닉슨의 사례의 경우에는 1968년 대선에서 험프리와 득표율 차가 1%도 안났기 때문에 이 예시에 들기에는 다소 부적절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닉슨보다도 더욱 강경하게 베트남전쟁을 지지하고 68혁명과 인종투쟁에 반대한 조지 월리스가 무려 14%를 득표했기에 둘의 표를 합치면 58%로 험프리의 42%보다 확고한 우위에 있다. 월리스의 지지층도 남부 교외에 사는 저학력자 중산층이었는데, 월리스는 이러한 자신의 지지층을 "일반적인 미국인"이라고 불렀다.[4] 이에 대해 안보투쟁을 추진하던 시민들은 '소리 없는 소리 모임'(声なき声の会)을 결성해 기시의 발언을 비꼬았다.[5] 쉽게 말해 투표율이 60%보다 낮으면 가장 높은 비율의 유권자는 어느 정당도 아닌 무당파라는 건 당연지사.[6] 서브컬쳐계에서 시끄러운 소수에 해당하는 프로불편러페미니스트, SJW 등은 제작자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어깃장 놓는 게 특기긴 하지만, 그들 입맛에 최대한 맞춘 작품을 내줘도 별로 잘 질러주지 않는다. 이들은 그냥 자기 눈에 보이는 불쾌한 걸 치우고 싶은 심리검열을 이용해 영향력을 설파하는 데 맛들린 엉터리 교조주의에 심취해 있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 그렇기에 그냥 자기들 맘에 안 드는 걸 후러치는 건 잘해도, 작품이 이들의 의견을 수용한다고 해도 '당연히 그래야지 뭘 세삼스럽게?'하는 수준의 반응만 보일 뿐이다. 정말 질러주는 사람이 있어도 결국 소수고, 그들만의 리그 내에서 좀 반짝 했다가 결국 외면받는 경우가 다수. 오히려 이들 입맛에 다 맞춰주다가 나오는 결과물은 그들마저도 외면할 정도로 틀에 박혀 있고 매력도 부족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장경제 한정으로 시끄러운 소수가 외면당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시장경제는 무조건 금전적인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데 아무리 목소리가 커봐야 매출에 영향이 없으면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시장 논리에 미숙하고 역사가 짧은 게임 계열 컨텐츠에 침묵하는 다수가 무시당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7] 두 게임 모두 사건 이후로 비판을 받으며 하락세인 게임들이긴 하지만, 게임 회사 자체의 문제일 뿐이지 워마드 논란과는 일절 관계가 없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