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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항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개조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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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청[2] 차량 내부[3]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4] 차량 내부
차량 정보
<colcolor=#0052a4> 열차 형식 광역, 도시철도 입선용 통근형 전동차
구동방식 전기 동력분산식 전동차
급전방식 직류 1500 V
교류 25000 V, 60 Hz
신호 ATS-S2
기어비 15:87
제작회사 히타치 제작소
가와사키 차량
미쓰비시 중공업
일본차량제조
킨키차량
도큐차량제조
현대정공
대우중공업
도입연도 한국철도공사: 1974 ~ 1986년
서울교통공사: 1974 ~ 1978년, 1989년 8월
운행년도 한국철도공사: 1974 ~ 2014년[5]
서울교통공사: 1974 ~ 2028년 예정[6]
편성 10량 1편성
생산량 563량
제어방식 직병렬조합 약계자 저항제어
동력장치 직류직권전동기
제동방식 발전제동 병용 전자직통 공기제동
운행노선 파일:Seoulmetro1_icon.svg 수도권 전철 1호선[7]
파일:Seoulmetro2_icon.svg 서울 지하철 2호선[8]
파일:Seoulmetro1_icon.svg 안산선[9]
차량기지 군자차량사업소 (1호선)
구로차량사업소 (1호선)
병점차량사업소 (1호선)
시흥차량사업소 (1호선)
파일:2호선 초저항 .jpg
2호선에서 운행했던 시절#[10]
대한뉴스 제 998호 - 수도권 전기철도[11]
서울교통공사 공식 소개영상

1. 개요2. 상세3. 현황4. 보존5. 도입 당시 부정부패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 저항제어방식 전동차[12]
Seoul Metro 1000 series (first generation)
KORAIL 1000 series EMU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인 서울 지하철 1호선 및 1호선과 직통하는 경원선, 경인선, 경부선을 운행하기 위해 철도청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에서 도입한 전동차이다. 국내 최초의 통근형 전동차, 국내 최초로 생산한 전동차, 국내 최초의 도시철도 대형 전동차 등 오만 가지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전동차이다. 한국 도시철도 역사의 산실이라고 볼 수 있다. 번호대로는 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저항제어 전동차,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의 일부이다.

한국철도공사(철도청) 소유분과 서울교통공사(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서울메트로) 소유분으로 나뉘지만, 두 차량은 도색과 이름, 운영 회사만 다를 뿐 성능은 동일한 차량이다.[13]

2. 상세

초저항 구동음과 육성 안내 방송(1984년 6월)[14]

당시 국내에선 전기동차 제작기술을 보유하지 않아[15], 일본 히타치사를 통해서 수입하였다.[16] 하지만 한 번에 많은 편성을 도입하게 될 경우 자금 조달이 어렵다는 문제가 있어 여러 번에 걸쳐 도입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차량 제조사들이[17] 등장하게 된다.

1974년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당시, 철도청은 일본에서 6량 21개 편성을, 서울지하철공사는 6량 10개 편성을 수입했으며, 이렇게 수입해 온 전동차를 수리, 분해, 결합 등을 하면서 쌓은 노하우로 1976년 대우중공업에서 대한민국 제조 1호기 1X15편성 전동차를 제작할 수 있었고,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다양한 열차들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18] 이후 계속 증차되어 1979년까지 총 6량 42개 편성이 도입되었다.

시운전은 1974년 4월 9일 오전 10시에 중앙선 청량리역~양평역 구간에서 이루어졌다. 1973년 6월 20일에 산업선 전철 구간이 첫 개통되었는데, 그 구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시운전 당시 기사 1
시운전 당시 기사 2
청량리~제천 간 개통 기사

처음에는 6량으로만 운행했으며, 철도청 소유 편성은 1981년부터 일부 편성에 대해 8량 증결을 거쳐 1986년 최종적으로 10량으로 증결되었다. 경원선 용산~성북 구간[19] 운행을 위한 4량 편성, 안산선 구간 운행을 위한 6량 편성도 있었다. 한편 서울지하철공사 소유 편성은 15년 동안 6량 그대로 굴리다가 1989년이 돼서야 중간차를 일괄로 반입하여 10량 1편성으로 증결했다.[20]

당시 일본의 통근, 근교형 전동차의 사양을 적당히 섞어서 한국 사정에 맞게 부분 변형해 투입되었다. 101계를 필두로 도입된 전형적인 일본식 통근형 전동차의 4도어 형식 8개 출입문과 3-7-7-7-3 형태의 좌석 배치, 슬라이딩 방식의 미닫이 객실 간 출입문이 적용되어 있고, 마일드 스틸 차체와 직병렬조합 약계자 저항제어, SELD 제동 또한 전형적인 일본 국철 전동차의 영향을 받아 설계되었으나 고속주행에 조금 더 적합한 설계가 이루어져 있다.[21]

한동안 국내에서 운용되는 유일하게 관통형 전면부를 가진 열차였다. 원래 서울 지하철의 계획은 여러 편성의 전동차를 병결하여 운행하려고 했다. 이는 러시 아워 시간대에는 전동차 여러 편성을 붙여 많은 승객을 나르고, 평시에는 단편성으로만 운행해서 배차 운영을 유연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지하철이라는 물건이 너무 신기하였고, 지하철의 장점이 너무 부각되면서 예상했던 것에 비해 상당량의 승객이 넘칠 정도로 늘어나서 1980년대에 10량으로 증결했고 병결은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22] 원래 자주 열어 줄 계획이 있던 문이었던지라, 나중에 밀폐가 잘 안 되어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문제점이 있었다.

냉/난방 시설은 상당히 떨어진 편이었다. 1989년 서울지하철공사 중간차 반입분을 제외한 모든 전동차가 도입 당시 에어컨 없이 모두 선풍기만 존재했고, 이는 당시의 극심한 혼잡률과 함께 여름철 지하철 통근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었다. 심지어 팬터그래프가 설치된 일부 노약자 좌석 에는 구조 특정상 선풍기 조차 없었다.[23][24] 당시 신문에 심심하면 냉방화 요구가 기사나 독자 기고란에 올라올 정도였다. 결국 1987년부터 차내 냉방 장치를 에어컨으로 개조하는 사업이 진행되어 대부분의 열차들에 에어컨이 달렸다.[25] 개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개조 차량은 냉방 성능이 매우 열악했으며, 일부 차량에서는 에어컨에서 나오는 냉각수가 열차 내부에 떨어지는 등의 문제도 발생하였다. 게다가 저항제어 차량 특성 상 가감속시 엄청난 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지하 구간의 찜통 더위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특히 냉방공조기가 설치된 천정 부분만 구조 특정상 에어컨이 없었다. 따라서 초기 개조 차량은 선풍기를 완전히 제거하고 에어컨만 있었으나, 개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못하자 후기 개조 차량에는 에어컨과 보조 냉방으로 선풍기를 추가로 달았다.[26][27] 상부에 냉방 공조박스를 설치 하면서 기존의 선풍기가 설치되었던 흡입구를 제거하고 선풍기와 연결된 구멍을 봉쇄하였다. 여담으로 펜터그래프가 설치된 일부 노약자 좌석 에는 구조 특정상 선풍기 박스가 돌출되었다.

겨울에도 혼잡하고 사람이 많은데다 저항차 열 때문에 의외로 안 추웠다고 하나, 사람이 없을 한산한 시간대엔 추웠다고 한다.[28]

한국의 철도에서 최초로 자동 승강문을 탑재한 열차이다. 2번째는 새마을호.

3. 현황

파일:111편성-2.jpg
개조저항 전동차

개조되지 않은 초저항의 경우 2000년대 초중반 모두 퇴역 절차를 밟았다. 서울지하철공사의 초저항은 2002년 10월, 한국철도공사(철도청)의 초저항은 2004년 7월을 끝으로 퇴역했다.
파일:FB_IMG_1689501773640.jpg파일:1631498562492.jpg
<rowcolor=#fff> 행선 표시기 개조 및 사명변경 대수선 전 행선 표시기 개조 및 사명변경 대수선 후

현재도 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VVVF 전동차에 드문드문 짬뽕편성으로 들어가 있다. 객차 중 이질적인 무광 질감에 낙창식 차창을 달고 있다면 100% 초저항 차량이다. 현재 해당 차량은 모두 불연재 개조가 되어있다. 110편성에 편입된 1610호는 접이식 의자 시범 사업으로 개조된 적도 있다. 또한 일부 편성을 개조 후 개조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달리고 있다.
파일:1000013032.jpg
<rowcolor=#fff> 내부 모습

반면 한국철도공사 소속의 초저항 부수 객차는 2014년 8월 30일을 끝으로 운행을 종료하면서 사실상 은퇴했다. 편성 단위로 도입된 초저항이 모두 은퇴한 지 딱 10년 후에 부수 객차조차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4. 보존

파일:class_1000.jpg
신정차량사업소에 동태보존 중인 舊 101편성 (1002호)[29]

현재 서울교통공사는 6량 1개 편성을 기증의 목적으로 2호선 신정차량기지에 보존하는 중이며, 전용 유치 공간을 마련했을 정도로 이 차량에 대해 각별하다.[30]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보관 및 관리 상태가 퇴역 당시의 상태와 거의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31], 지금은 박물관에 보존 중인 한국철도공사 차량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라고 한다. 2014년경 신정지선 열차(구 245편성)의 출입문 도색 크랙 문제로 출입문 한 짝을 2호선 열차와 교체했는데, 도색을 전부 들어내고 열차 색에 맞게 재도색을 했기 때문에 이럴거면 뭐 하러 문짝을 바꿨냐는 말이 있다. 2023년 현재는 2호선 개조저항 전동차가 전량 폐차됨에 따라 출입문도 원상복구되었다. 이 외에도 노후화에 따라 간간이 도색이 벗겨지고 있는데, 적당한 시기마다 재도색을 진행하고 있다.

여담으로 일부 열차는 출입문이 순정부품이 아닌 1989년 부수객차 버전인 민무늬 스테인레스 실내마감으로 교체하였다.[32]
파일:수도권 전기동차.jpg
철도박물관에 보존 중인 1X01 (1001호) TC칸[33]

한편 한국철도공사는 1976년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한 전동차 2량(1115호, 1315호)과 일본제 최초 도입분 1량(1001호)을 철도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철도박물관에 1001호 전동차를 전시하기까지 철도 동호인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철도청은 1X01편성을 1998년 12월에 퇴역시켰는데, 철도박물관 보존의 목적으로 선두차 1001호와 동력차인 1301호 2량을 해체에서 제외시키고, 2001년까지 구로기지에 유치시켰다. 철도박물관에 보내려고 할 의지가 없지는 않았으나, 철도박물관 부지의 문제와 영 좋지 않은 차 상태 때문에 이도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2년에 최초 국산 전동차인 1X15편성이 퇴역하면서 철도청은 보존 중이었던 1001호와 1301호를 대전정비창으로 옮겨 해체를 시작하고[34] 1115호와 1315호를 1001호와 1301호로 차번을 수정하여 전시하였다.[35] 이 소식을 들은 동호인들은 철도청 홈페이지에 거세게 항의하였고, 결국 다시 철도청 구도색으로 재도색한 채로 1001호의 보존이 이루어진 것이다. #

유일하게 출입문이 순정부품 그대로 유지되있으나, 하부는 부식방지 목적상 스테인레스판을 덧붙였다. 초기 냉방 개조 상태이므로 에어컨만 있고 선풍기는 없다.

2019년 7월 말경에 1001호 전면부 상단 중앙에 열차의 목적지를 표시하는 롤지 행선기누군가가 기계째로 빼 버린 상태다. 비어 있는 상태를 채우기 위해 2021년 3월에 모조품을 설치하여 외관만 복원한 상태이다.

5. 도입 당시 부정부패

1호선 개통 당시 일본 회사에서 차량을 도입하기로 계약을 맺었는데, 이 때 한국 측에서 일본제 전동차를 정가의 2배 이상이라는 바가지 가격[36]에 사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대신 일본 기업들은 이 수익금 중 일부를 바가지 계약에 대한 댓가로 비밀리에 한국측 관계자에게 환급(리베이트)을 해줬고 환급된 만큼을 민주공화당, 대통령 박정희와 당 재정위원장 김성곤그대로 꿀꺽해버렸다. 이 때 리베이트로 넘어온 자금이 250만 달러로 현재 한화 가치로 172억원정도 한다. 그리고 한국에선 앞으로 잘 봐달라는 의미에서 정치자금성 뇌물 130만 달러를 일본측에 돌려줬다.



한국에서는 언론통제와 입막음으로 이 서울지하철 스캔들이 은폐되었고, 정작 이 사건이 가장 크게 정국을 뒤흔든건 일본이었다. 사건 4년 뒤 박정희와 갈등을 빚고 망명을 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이 부정부패 스캔들을 일본 측에 내부고발해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 큰 부정부패 사건이어서 정국이 뒤집어졌는데, 일본 국회에서 국정조사를 실시해 불법적인 계약과 서울지하철 차관 리베이트, 서울지하철 전동차 구매 리베이트 등이 밝혀졌다. 당시 일본의 거물 정치인으로서 총리도 지냈던 기시 노부스케가 한국측이 보낸 뇌물 130만 달러에 연루되어 있었는데, 이 스캔들로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은 기시의 당 내 입지는 좁아들었고 결국 자민당 내 기시의 파벌이 쇠퇴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만다. 기시는 2년도 못 가 자기 라인의 거두 후쿠다 다케오가 힘을 못피고 당에서 버려지는 모습을 보고 결국 정치계를 은퇴하게 된다.

한편 동일한 시기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미 의원 로비 폭로 등으로 코리아게이트 사태가 촉발되자 미국 정부는 한국 군사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해 뒷조사를 하는데 이 때 서울지하철 리베이트 사건 역시 수사대상에 제대로 걸려든다. 미국 정부는 일본과 한국이 체이스 맨해튼, 마린 미드랜드 등 미국 은행들을 돈 세탁용으로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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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일본의 철도 동호인들이 좋아하는 한국의 열차 중 하나이기도 했다. 도쿄 지하철 5000계나 이듬해 도입된 도큐 8500계와 매우 흡사한 식빵형 전두부를 지녔으며 그 외에도 일본 국철 101계, 103계, 301계 등과도 비슷한 상자형 전두부 모양과 내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115계 개조해서 비슷하게 만들어 놨더라

7. 관련 문서



[1] 붉은색 열차는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현 서울교통공사)소속, 파란색 열차는 철도청(현 한국철도공사)소속이다.[2]한국철도공사[3] 말년의 내부는 이러하며, 1990년대삼각형 손잡이로 교체를 하였다.[4] 현 서울교통공사의 전신 서울메트로, 현재는 서울교통공사로 바뀌었다.[5] 개조 없는 초저항은 2004년 7월 퇴역했다.[6] 정확히는 개조 후 개조저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다니고 있다. 개조 안된 초저항은 2002년 말 퇴역했다.[7] 경부선, 경인선, 경원선, 서울 지하철 1호선 구간[8] 1980년대 초반[9] 1990년대 초반까지[10] 위 사진에 나오는 109편성(1018호)은 1980년 11~12월경에 찍힌 사진이다.[11] 대한뉴스 아나운서가 말미에 "우리의 국가적인 슬픔 속"을 언급했는데 개통 당일, 육영수 피살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12] (ultra)저항이 아니라 (first)저항으로, 말 그대로 최초로 도입되었다는 뜻이다.[13] 이 사례는 21년뒤 반복되는데 바로 서울지하철공사 4000호대 1 차분과 성능이 비슷한 철도청 3000호대가 도입된다.[14] 한 일본인이 한국 방문 당시 직접 녹음한 것이다. 당시 새마을호 등도 녹음했으나 안타깝게도 녹음본들을 찾지 못했다. 해당 구간은 군포역명학역 구간으로 금정역은 이 당시에 없었다. 금정역은 안산선이 개통한 1988년에 개통하였다. 당시에도 자동 안내 방송은 있었는데 그때는 녹음된 테이프를 승무원이 조작하여 송출하였다. 허나 저 운행 계통의 안내 방송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육성으로 한 것이다.[15] 증기 기관차객차, 화차 제작 기술이 유일했다.[16] 일본 차량중 주로 레퍼런스 모델로 회자되는게 103계 전동차이다.[17] 일본차량제조, 가와사키 차량, 킨키차량, 도큐차량제조, 히타치 제작소[18] 훗날 현대정공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의 철도차량 제조사업부를 인수 합병하고 현대로템으로 분리되면서 축척된 노하우로 철도 차량을 제작하고 있다.[19] 이 구간은 한때 디젤동차로도 굴렸었다.[20] 이중에서 1989년산 중간차를 제외한 다른 부수차들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전량 퇴역하는데, 여기서 남은 1989년산 객차 중 소수는 신형 차량에 부수차로 재조성하고 이외에 남은 부수차들을 개조해서 재조성한게 바로 개조저항이다.[21] 의외로 그 당시 차량들 중에서는 고스펙이다. 당시 일본 국철의 통근형, 근교형 전동차의 최고 속도는 100km/h였다. 사철 차량들도 대부분이 최고 속도가 100-110km/h정도였다.[22] 지하철 개통 후 1980년대 말까지 서울의 지하철은 러시아워 기준 250%~300%의 혼잡률을 매우 흔하게 기록하던 때이다. 참고로 현재 서울 지하철에서 가장 혼잡한 2호선 사당~방배 구간의 러시아워 때의 혼잡률이 224% 정도이므로 250%~300% 정도이면 엄청난 수치임을 짐작할 수 있다.[23] 사실 초저항 선풍기는 단순히 선풍기만 설치된게 아니라 공기 흡입구도 같이 설치 되있다. 외부 천장에 납작한 원통이 설치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24] 그런데 팬터그래프와 전기제어 장치가 설치된 부분은 당연히 흡입구와 선풍기를 함께 설치할 수 없었다. 초저항의 실내를 보면 일부 노약자 석 천정이 약간 납작하게 내려 앉은 모습 이였는데 그곳이 바로 팬터그래프와 전기제어 장치가 설치된 부분이다.[25] 1993년경에 모든 차량에 에어컨 설치가 완료되었다.[26] 제조 업체에 따라 팬형 선풍기와 에어컨형 선풍기가 있었다.[27] 여담으로 서울교통공사의 초퍼제어 열차도 초기형은 에어컨만 있있으나 후기형은 보조 냉방장치를 추가하였다.[28] 그래도 저항제어 특유의 열로 인해 그나마 나았다고 한다. 애초에 저항제어 방식 자체가 에너지 일부를 열로 갖다버리는 것이기 때문.[29] 당시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편성이 0~9대로 표기하지 않았고 100x와 100y가 짝을 이루는 체계였으며 때문에 1001~1002호가 101편성이었다. 참고로 해당 편성은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현 서울교통공사) 소속이며, 일본 히타치제작소 제작 차량이다.[30] 신정차량사업소 Y7유치선에 유치 중이다.[31] 주간제어기를 장착하면 운행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다만 혹시 모를 문제 때문에 2000년대 중반에 선로 이전을 했을 때 다른 기관차가 타력운행을 했다.[32] 초저항 현역 당시 출입문 도색 크랙 문제로 교체된 경우나 10량화 이후 기관실이 딸린 전두부 2량을 제외한 8량 편성이 1989년 부수객차로 이루어져서 이를 통일하기 위해 교체된 경우가 있었다.[33] 철도청 소속[34] 이 과정에서 1301호 전동차와 1115호의 반대편 선두차인 1015호, 동력차 1515호가 완전히 해체되었다.[35] 1115호에 115를 지우고 001을 붙여 놓았는데 자세히 보면 15라는 자국이 있었다.[36] 1972년 당초 도입가액 84억엔이지만,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118억엔으로 상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