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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13:25

숫처녀

처녀성에서 넘어옴

1. 개요2. 순결과 문화
2.1. 오해
3. 용어 문제: 처녀=숫처녀?
3.1. 조선왕조실록의 처녀 언급3.2. 서양 선교사들이 쓴 초창기 사전들
3.2.1. 그리스도교 단체들의 성경 번역과 처녀
3.3. 조선어사전과 조선말 큰사전3.4. 일본에서 처녀가 의미하는 것3.5. 20세기 하반기 이래 한국의 처녀 용례

1. 개요

언어별 명칭
한국어 숫처녀, 동정녀, 처녀
일본어 [ruby(処, ruby=しょ)][ruby(女, ruby=じょ)], バージン(ヴァージン), [ruby(生, ruby=き)][ruby(娘, ruby=むすめ)], おぼこ
영어 virgin
처녀 앞에 '더럽혀지지 않아 깨끗함'을 의미하는 접두사 '숫'이 붙어 성관계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여성을 뜻하게 되었다. 숫총각은 같은 의미지만 성별만 바꾼 표현이다. 비슷한 단어로 '동정녀'나 비속어 '아다'[1]가 있다. 숫처녀를 고집하는 이들을 유니콘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순결과 문화

역사 속에 존재했던 수많은 문화들이 숫처녀, 처녀성에 대해 단순하게는 선호, 나아가 숭배 혹은 신성시하거나, 혹은 사회 규범으로 권장하거나 강요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 본 문단은 이러한 숫처녀 기호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을 다룬다.

우선 원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진화심리학적 분석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질내사정체내수정의 특성상 자신이 자기 배 속에서 나온 자식의 친모(母)임을 확신할 수 있는 여성과는 달리 남성은 여자가 낳은 아이가 자신의 자식임을 확신할 수 없다. 그 여자가 자신 말고 다른 남성과도 성관계를 가졌을 때 자신의 정자가 아닌 다른 남성의 정자가 난자와 수정되어 아기가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비롯한 포유류 수컷은 친자에 대해 100% 확신할 수 없으며 외부 제약이나 암컷의 양심에 의존한다.

인간 아이는 홀로 생존할 수 있을 때까지 10여년 이상 정도가 걸리는데, 반드시 부모의 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가정을 지키는 동안 다른 여성과의 관계가 법적으로나 여성의 본능적 거부감으로 제한됨으로 유전자를 퍼트리기 위한 기회비용의 손실은 더욱 크게 다가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 입장에서, 여자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하여 태어난 남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착각하여 1n년 동안의 기회비용손실·시간·감정·금전적 자원을 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 싶어할 것이다.[2]

따라서 숫처녀, 처녀성, 혼전순결을 강요하는 문화의 생물학적 배경은 친자 사기 가능성이다. 남자들 입장에서는 여자가 낳은 아이가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채로 태어남을 보장받기 위해 성관계를 한번도 가지지 않은 여성을 본능적으로 선호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어져 문화적으로 확장되면서 처녀성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성적 접촉이 없는 여성을 자신의 아이를 낳게 위한 긍정적인 성적 정복의 대상으로, 그렇지 않은 여성을 부정하게 바라보는 의식이 생겨났다고 여겨진다.[3]

생물학적 원인보다는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있다. 아예 숫처녀 선호가 진화심리학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순수히 문화, 사회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약 생물학적 이유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종교, 윤리, 규범 등으로 발전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문화적인 영향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은 유효하다. 이런 접근법의 예시로는, 일부일처제와 함께 지배 집단에서 특별한 신성성이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만들어낸 풍습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또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처음'에 대한 선망으로 인해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그것과 관련된 의무가 여성에게 부여된 것뿐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현대에서 처녀성을 중시하는 정도는 그 나라 여성의 인권와 사회·경제적 현황에 따라 매우 상이하다. 대표적으로 성차별적인 문화로 여성의 경제참여를 제한하고 여성이 임신·출산의 도구 내지는 남성의 재산 취급받는 이슬람권에서는 처녀성이 여성의 매우 중요한 덕목이며 이를 지키지 않을시 명예살인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반면에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 여성의 사회 참여율이 높은 유럽북미, 동아시아, 중남미의 경우 결혼 자체를 필수로 보지 않고 결혼을 해도 숫처녀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 가능한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얼마나 존중받는지, 결혼을 하지 않고도 출산을 할 수 있는지 남성이 가지는 리스크를 여성의 경제력으로 덜어줄 수 있는지 얼마나 사회적으로 용인되는지 등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국 또한 전체적인 혼인건수는 줄었지만 맞벌이 부부 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여성의 순결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남성들 또한 늘어났다.[4]

처녀성을 포함한 혼전순결 개념의 윤리적 의미는 천부적인 것이 아닌, 인류사에서 후대에 부여된 것이다. 혼전순결 개념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생명윤리를 끌어오기도 하는데, 생명윤리만이 목적이라면 비삽입 성교나 동성간의 성교를 보고 비판할 근거는 없게 된다. 그래서 일반인은 물론 종교인 중에서도 혼전 애무 및 유사성행위에서 혼전성교까진 윤리적 교리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개방적으로 생각하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에는 미성년자나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성이 산부인과에 가면 문란한 여자로 취급되어 욕먹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현재는 월경을 시작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아도 된다는 쪽으로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특히 숫처녀는 산부인과에 갈 필요가 없다는 과거의 편견은 크게 잘못된 인식인데, 성경험이 없어도 생리불순, 생리통, 질염 등은 종종 걸릴 수 있고 이런 질환들을 방치하면 큰 병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숫처녀의 피에 회춘이나 성병의 치유와 같은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수백년 전만 해도 치료 목적으로 숫처녀를 강간하는 일이 가끔씩 일어났고 이는 19세기 전반의 미국에서도 일어났던 성범죄다. 현재에 심지어 성관계를 통해 전염되는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다는 미신으로 유아 성폭행이 발생하는 국가가 있다고 한다. 남아공 괴담 문서로.

최근에 성적인 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20대 전반이나 10대 여자들이 SNS에 성을 판다고 게재한 글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최소 1억 대부터 최대 20억 대 사이로 다르지만 10대 여자의 경우 거의 억대의 금액을 요구하며 자신의 성을 판다고 올린 적이 있다.

니콜라스 볼핑거 교수의 연구[5]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예전과 달리 결혼 전 성관계에 대해 점점 관대해지며 동거 비율 또한 급격히 늘고 있다. 그리고 성적 개방성에 비례해 이혼률도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이혼율의 증가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상대 여성의 결혼 전 원나잇 스탠드 성관계 파트너의 수가 적을수록 이혼율이 감소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2.1. 오해

현대에는 설거지론, 레드필러 등의 등장으로 진화심리학적 분석에 힘입어 아예 '인류 역사 내내 처녀는 가장 고귀하고 가치 있는 요소였으며 여자에게 있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강점이었고 거친 애인이 둘 이상 있는 여자들은 전부 결혼시장에서 가치가 없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러나 역사적 지식과 사회학적인 탐구를 조금만 할 줄 알아도 이것은 틀린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만 따르는 짐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사시대에서 극초기 문명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당연히 모두가 평등했으므로 생물학적 본능에서 발현된 처녀에 대한 욕망이 충분히 발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한 뒤부터는, 처녀성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생겨났는데, 재산과 지위가 바로 그것이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사 곳곳에선 남녀 가릴 것 없이 상류층의 재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가 부유하고 위세있는 집안의 딸이라면, 나 이전에 누구 애를 낳았는지 따위는 전혀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6]. 여자가 가진 막대한 재산과 땅이 결혼하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데 그 어떤 남자가 마다하겠는가? 특히 혈연에 따라서 영지는 물론 국가마저도 이리저리 옮겨다니던 유럽에서는 여자가 건강에 이상 없이 자기 자식(후계자)만 낳아줄 수 있다면, 매춘부 등과 같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직업만 아니라면 이전에 이혼을 몇 번 했든 신경쓰지 않았다[7][8].

하층민의 경우는 옮겨다닐 재산이 없으니 조금 더 처녀성을 따지긴 했지만, 이 역시 전근대 시대의 한계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평민층은 평생 태어나서 자란 동네를 떠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결혼 역시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와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기에 처녀성을 굳이 진지하게 따질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평생 같은 동네에서 살았으므로 그 여자가 뭘 하고 살았는지 남자도 다 알기 때문이다. 만일 남2 여1의 삼각관계에서 남자1이 여자를 먼저 쟁취했다가 모종의 이유로 사망했다면, 남자2가 여전히 여자를 사랑하여 다시 구애한다고 했을 때 처녀성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녀가 매춘을 해서 순결을 잃은 게 아니라 이른 사별이라는 사고를 당한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맹점은, 고중세에 처녀를 현대보다 덜 따졌다고 해서 여자가 문란하게 살아도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극단적인 설거지론자들과 같은 부류와 다르게 정당한 만남과 이별 이력에 대해서 관대했다는 뜻이지 매춘부여도 부자면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맥락 때문에 처녀를 지금보다 훨씬 더 따졌을 것 같은 고중세에 도리어 덜 따지는 편이었고, 근대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처녀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내 여자는 처녀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현대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데,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이제 같은 동네의 아는 여자가 아니라 성장 과정을 본 적 없는 먼 타지의 여자를 만나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멀리서 온 타지의 여자를 만나면, 남자 입장에서는 정보의 비대칭 상황에 빠지게 된다. 여자가 이전에 매춘을 했는지, 바람을 피웠는지, 짧은 기간 동안 지나치게 많은 남성을 사귀었는지 이런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 여자를 맞았을 때 번식이 원활히 될지 안 될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최대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랜 기간 잠들어 있던 처녀에 대한 본능을 다시 깨워서 처녀를 따지게 된 것이다[9].

다만 고중세에도 마치 현대처럼 처녀를 따지는 문화권이 없었던 건 아닌데, 바로 유목민과 같은 소규모 부족 단위 사회를 구성하던 민족들이다. 이들은 혈연으로 묶인 부족 단위로 생활했기 때문에, 앞서 말한 정주민족의 하층민처럼 같은 동네의 여자와 자라서 결혼한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같은 동네의 여자가 누이뿐이므로. 따라서 외부 부족으로부터 여자를 데려와야 했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와 같은 정보의 비대칭 상황을 유발했다. 아랍 등 이러한 부족 사회적 특성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문화권들이 유독 다른 문화권에 비해 처녀성에 더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도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10].

3. 용어 문제: 처녀=숫처녀?

3.1. 조선왕조실록의 처녀 언급

조선왕조실록 디지털 번역본을 검색하면 처녀는 총 529건[11]이 제시되는데, 대다수가 왕가의 신부 간택 기사들이다. 그외 기사들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처녀를 숫처녀로 해석하면 문맥상 매우 어색해진다. 얼핏 보면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기사들이 몇 개 있긴 한데, 1551년 기사에 "처녀를 빼앗았다"는 구절이 나오지만 이는 순결을 빼앗았다가 아니라 납치를 했다는 뜻이다. 1491년 기사엔 "처녀의 유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성경험의 유무가 아니라 결혼 안 한 여성이 얼마나 되는가를 묻는 내용이다. 바로 뒤에 "시집가지 못한 연유를 물어 기록을 만들어 아뢰도록 하라"는 언급이 나온다.

서정범은 국어어원사전에서 "조선시대에는 주로 낭자(娘子)<落泉1:2>, 소저(小姐)<심청전> 등으로 쓰였다. [...] 한글 문헌(조선시대)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 우리나라 민간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았던 말이라 볼 수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處女禁婚, 處子禁婚" 등 처자라는 말과 함께 주로 왕비 간택관련 기사와 기타 기사에 수천 번 나오는 것으로 봐서 상당히 고상한 말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해설했다.

3.2. 서양 선교사들이 쓴 초창기 사전들

그럼에도 서양 선교사들이 만든 근대 조선어사전들은 처녀를 수록했다. 천주교파리 외방전교회가 1880년에 낸 한불자전은 "당시 서구인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한국어) 이중어사전"[12]인데, 이 책은 처녀를 "어린 소녀; 12~17세 정도인 소녀, 어린 소녀, 젊은 사람(Petite fille; fille vers l'âge de 12 à 17 ans, jeune fille, jeune personne)"[13]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동정과 동녀(童女)도 실려 있는데, 동정은 "숫처녀, 순결(Vierge, virginité)"[14], 동녀는 "숫처녀, 결혼 안 한 여자(Vierge, femme qui ne s'est jamais mariée)"[15]라고 설명했다.

"최초의 한영사전"[16]인 한영자전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1890년에 출간했다. 이 책은 한영, 영한 이렇게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에서 처녀를 "젊은 미혼여성, 젊은 여자 (12살~17살)(A young unmarried lady, a young woman. (from twelve to seventeen yrs.))"[17]이라고 정의했다. 한불자전과 공통점이 많지만 미혼이라는 단서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영한 파트에서 숫처녀인 virgin을 "처녀, 새악시"[18]라 설명하며 한불자전엔 없던 의미를 처녀에 부여했다. 게다가 미혼여성인 miss를 "새악시, 처녀"[19]로, girl을 "계집아이, 처녀"[20]로 정의해서 처녀의 의미를 더욱 모호하게 한다.

제임스 게일이 1897년에 낸 한영자전은 "선교사들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활용되어 근대 한국어 어휘의 정리와 학습에 큰 역할을 했다".[21] 이 사전은 처녀를 "숫처녀; 아가씨; 소녀(A virgin; a maiden; a girl)"[22]라고 정의해서 아예 처녀의 제1 의미를 성경험과 관련지었다. 반면에 규수는 "소녀; 아가씨(A girl; a maid)"[23]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동정을 "숫처녀, 독신(virgin, celibate)"[24]이라고 해설했다.

이렇듯 서양 선교사들의 사전들은 처녀를 제각기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언더우드의 사전은 서술이 일관적이지 않다. 흥미롭게도 숫처녀를 뜻하는 영어 virgin의 어원인 라틴어 virgo는 결혼 적령기에 있는 소녀와 숫처녀를 동시에 의미했다.[25] 따라서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언어 관습을 조선어에 투영했거나, "결혼 안 한 여자라면 성경험이 없어야 한다"는 당시의 당위를 담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상단에서 언급했듯 조선왕조실록의 간택 관련 기사에 주로 나올 정도로 당시에 처녀는 쓰임새가 제한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보이는 용례는 명확히 처녀가 미혼여성을 의미함을 증명한다. 게다가 하단에서 볼 수 있듯, 선교사들의 사전보다 더 정교하고 학술적인 근대 사전들은 처녀를 미혼여성으로만 정의했다.

3.2.1. 그리스도교 단체들의 성경 번역과 처녀

상단에서 살펴봤듯 초창기 한국어사전을 집필한 주체는 서양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런데 차후의 한국어사전 개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한불자전과 제임스 게일의 한영자전은 각각 천주교와 개신교 성서 번역의 기초적 작업의 성격을 가졌다.[26]

이런 맥락에서 서양 선교단체들이 성모 마리아와 관련하여 어떤 한자어를 선택했는가를 고찰하면 흥미로운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성모 마리아 문서를 확인하면 알 수 있듯, 관점에 따라 성모를 결혼 안 한 젊은 여성으로도 숫처녀로도 해석할 수 있다.

1822년에 나온 마쉬만-라싸르역은 최초로 한문으로 완역한 성경이자 처녀(處女)를 처음 사용한 한문성경이기도 하다. 처녀란 단어는 이 책의 구약 이사야서(7:14)에 등장한다.[27] 무엇보다 1852년에 출판된 대표본 신약을 기점으로 처녀를 쓰는 성경들이 등장하게 된다.[28] 사실 한문성경과 중국어성경에서는 처녀뿐 아니라 동녀, 동신자, 동정녀, 정녀, 규녀 같이 다양한 낱말들이 쓰였지만[29], 구약, 신약 상관없이 대부분 동녀(童女) 및 처녀로 번역했다.[30] 하지만 동녀 사용량이 훨씬 많다. 특히 20세기 이후의 성경들이 더욱 그런 상황이라서 사실상 중국어성경은 동녀로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31]

한국어로 된 현재의 가톨릭 성경은 동정녀를, 개신교 성경들은 처녀와 동정녀를 함께 쓰고 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들은 한문성경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며 탄생했다. 1887년에 나온 예수성교전서는 최초로 간행된 한글성서[32]인데, 로스와 매킨타이어 번역팀은 상술한 대표본 신약을 많이 참조했고, 결국 처녀를 번역어로 사용하게 되었다.[33] 그리고 구역의 신약(1900년)과 그 교정본(1904년)도 처녀를 채택했다.[34] 게다가 한영자전에서 처녀를 숫처녀로 해석했던 제임스 게일이 1925년에 이원모와 함께 펴낸 신역신구약전서도 처녀를 사용했다.[35]

3.3. 조선어사전과 조선말 큰사전

20세기의 선구자적 한국어사전들은 처녀에 성경험이 없다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1920년에 펴낸 조선어사전은 처녀를 색시의 동의어라고 설명하고 있다.[36] 그리고 색시는 미혼인 여자(未婚の女子)로, 규수, 규합, 처녀, 처자와 비슷한 말이라고 보충설명하고 있다.[37]

한글학회가 1957년에 완간한 조선말 큰사전은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인 국어사전의 역할을 하였[고] [...] 남북 두 체제의 국어사전의 발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38] 이 사전 역시 처녀를 성경험과 연결하지 않았다. 여기서 처녀는 "시집 갈 나이는 되고 아직 혼인을 지내지 아니한 계집아이"를 의미한다.[39] 한글학회의 사전 소개글에서 드러나듯 조선말 큰사전은 조선총독부의 조선어사전은 물론이고 게일의 한영자전도 참고했지만, 처녀를 virgin으로 정의한 게일의 논지를 따르지 않았다.

3.4. 일본에서 처녀가 의미하는 것

일본의 일본어사전들은 처녀[40]를 이중적으로 해설한다. 예컨대 쇼가쿠칸 디지털 다이지센은 처녀를 "미혼여성. 성교한 경험이 없는 여성. 숫처녀"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실질적으로 처녀란 단어를 성경험이 없는 여성으로만 이해하며[41], 그 반댓말로 비처녀라는 표현을 쓴다.(일본 위키백과 処女 문서) 게다가 일본에선 처음을 뜻하는 접두사로도 처녀를 쓴다.

그런데 사회학자인 무타 카즈에는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처녀는 문자 그대로 집에 있는 미혼여성을 가리켰지만 이후 의미변화가 일어났다는 결론을 내렸다.[42]

1910년대에서 1920년대 사이에 여성지에서 전개된 "처녀 논쟁"을 살펴보면, 저 시기에 일본에서 처녀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가 자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이쿠타 하나요(生田花世)가 1915년에 "저는 처녀를 버리고 사랑을 얻었습니다"나 "저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처녀라는 몸을 자신이 버린다는 것" 같은 표현을 썼는데, 이를 통해 당시에 처녀를 버린다는 말이 첫 성교를 한다는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43]

3.5. 20세기 하반기 이래 한국의 처녀 용례

20세기 하반기 이래 한국에서 처녀 자체를 숫처녀로 쓰는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김승옥이 1977년에 발표한 서울의 달빛 0장에 아내가 혼전 성경험이 많아서 처녀가 아니었다고 주인공이 비난하는 구절이 나온다. KBS가 1981년에 방송한 8시에 만납시다에서 혼전순결을 놓고 일반인들을 인터뷰했을 때 "여성이 결혼 전까지 순결을 지키는 처녀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성들이 등장한다. 이렇듯 조선말 큰사전이 나온 1950년대 이후 한국에서 처녀의 의미가 확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표준국어대사전처럼 조선말 큰사전을 잇는 대표 사전들도 처녀에 숫처녀란 의미가 있음을 명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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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진실게임 256회 스크린샷(2005.01.2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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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게임 238회(2004년 8월 27일 방송) 진실게임 256회(2005년 1월 21일 방송) 진실게임 266회(2005년 4월 1일 방송)
다만 한국에서는 명백히 성행위가 화제로 오른 특수한 상황에 한해서만 처녀를 숫처녀로 이해했다. 실제로 한국의 화자들은 일반적인 발화 상황에선 결혼 안 한 여성이라는 의미로 처녀를 사용했다. 상단의 자료들은 진실게임의 방송분들에서 딴 스크린샷인데, 일반인 출연자들의 호칭에 처녀가 들어가 있다. 해당 방영분들에선 어떠한 부연 설명이나 특정한 맥락을 제시하지 않고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출연자들을 처녀를 붙여서 부른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성경험 여부는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파의 인기방송에서 괜한 오해를 살 염려 없이 젊은 여성들을 처녀라고 부를 수 있었다.

2001년에 방영된 일본 드라마 파이팅 걸에 이 처녀란 단어를 둘러싼 한일 간의 오해를 반영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한국인인 아미(윤손하 분)는 결혼 여부를 알기 위해 일본 여성 쇼코(아마미 유키 분)에게 "처녀세요?"라고 물었다 분위기를 급랭시킨다.

2020년대에도 처녀는 일반적으로 숫처녀란 의미로 잘 쓰이지 않는다. 네이버 뉴스에서 검색 가능한 기사들을 분석해 보면 이 점이 명확해진다. 2022년 12월을 지정하여 처녀를 입력하면 총 696건[44]이 제시된다. 이중 처녀 단독이 아닌 합성어 처녀자리가 나오는 별자리 운세 기사가 396건으로 가장 많은 검색 수치를 차지했다. 그리고 미혼여성으로 쓰인 처녀가 나오는 기사는 총 278건이었다. 반면에 숫처녀란 의미로 처녀를 사용한 기사는 3건에 불과했다.[45] 다만 처녀를 통해 성모 마리아를 지칭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관련 기사들을 숫처녀의 용례로 간주하면 10건[46]을 추가할 수 있다. 끝으로 처음이란 뜻인 일본식 접두사(처녀출전, 처녀비행 등등)로 처녀를 언급한 기사는 총 9건이었다.

예외적으로 간혹 처녀작, 처녀성 등의 용어가 한때 관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일본쪽의 용어가 유입되어 정착된 사례로서 한국의 숫처녀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마저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은 아니고 점점 사어가 되는 추세이다.

이렇듯 여전히 일반적으로 처녀는 미혼을 전제로 하여 젊은 여성을 무난하게 부르는 명칭으로 쓰인다. 그런데 과거에 비해 처녀란 단어를 단독으로 언어생활에서 사용하는 빈도가 떨어진 상황이다. 무엇보다 젊은 세대들이 구어체에서 "저기요"와 "선생님"이라는 변칙 2인칭 표현을 독점적으로 입에 담다 보니 처녀를 2인칭 명칭으로 쓰는 사례가 극단적으로 감소하였다.

다만 일본 서브컬처를 즐기는 한국 오타쿠들은 일본문화의 영향으로 처녀를 숫처녀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검의 처녀 명칭 논란이 대표적 사례. 일본 서브컬처는 여성의 순결 유무에 민감한 편으로 비처녀 논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난다. 실질적으로 '처녀=숫처녀'로만 접할 경험은 일본산 서브컬쳐와 AV가 아닌 이상 없다. 다만 이러한 사례가 한국 서브컬쳐에도 침투하여 웹소설 등에서 쓰이며 정보오염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2020년대 기준으로 보통 이러한 국산 서브컬쳐를 즐기는 계층은 일본 서브컬쳐 팬층과 겹치니 큰 차이는 없는 편이다. 실질적으로 어휘력, 문해력 문제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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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어 新='아타라시이'에서 유래했다는 추측이 유력[2] 남성들이 결혼할 생각이 없는 원나잇이나 성매매 등을 통해 만난 여성에게는 처녀성을 원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책임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3] 생물학적으로 보면 번식 경쟁이 심하다는 점이 마이너스 요소이다.[4] 어디까지나 맞벌이가 전제화가 되며 선진국에서도 여성을 별개의 주체로 보며 여성에게 경제적인 책임을 지게하는것이 일반화 되어있다. 그만큼 싱글맘 비율이 높기도 하다.[5] Counterintuitive Trends in the Link Between Premarital Sex and Marital Stability, Nicholas H. Wolfinger[6] 상식적으로 처녀가 그렇게 고귀하고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가치였으면 귀족들부터가 눈에 불을 켜고 처녀만 찾아다녔을 텐데, 정작 실제로는 다른 모든 조건이 같을 때만 처녀를 골랐다. 거대한 영지를 가진 부유한 과부 백작 부인과 그냥 시골 기사의 숫처녀 딸 중에 신붓감을 고르라면 백이면 백 귀족 남자들은 전부 부유한 과부를 골랐다.[7] 물론 여기에는 유럽이 동아시아와 달리 로마 멸망 이후 벨 에포크 때까지, 무려 1400여 년에 달하는 긴 기간 동안 동아시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전쟁이 잦았던 환경 또한 한몫했다. 한 번 전쟁이 끝나면 기본 100년 이상은 평화를 유지하던 동아시아와는 달리 유럽은 어제 휴전협정하고도 다음날 다시 쳐들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과부를 신부 후보에서 전부 빼버린다면 여자가 남아나질 않는다.[8] 조선처럼 아예 국가 차원에서 과부의 재혼을 금지하는 국가도 있긴 했는데, 정작 당대를 살았던 이들은 수구 꼰대를 제외하곤 아무도 이런 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전근대에는 인구가 곧 국력이고 생산성인데, 짝만 새로 지어주면 그 인구를 늘려줄 수 있는 젊은 과부를 그냥 놀린다는 것은 심각한 자원 낭비다. 이런 기형적인 법을 가진 국가가 조선 말고는 없을 정도에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제시한 조건 중 과부의 재혼 허가가 괜히 있었던 것이 아니다.[9] 물론 여자가 처녀인지 아닌지는 당사자와 그 주변인이 제공하는 정보 외에는 알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인데, 이 때문에 아예 사고로 남편, 애인 등을 잃었거나 연애 초기에는 본성을 숨기다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고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남자와 헤어진 여자까지도 모두 묶어서 매춘부 취급을 하는 남자들이 나타났다. 이전에 애인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왜 헤어졌는지(=정당한 이별 사유였는지) 전부 따지기 힘들기 때문에, 그냥 남자와 접점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전부 거부하는 것이다.[10] 물론 유목민의 후손이라고 해서 모두 그렇지는 않다. 이슬람권의 지나치게 낮은 여성인권은 낮은 교육 수준 및 무력이 중시되는 불안정한 정세와 낮은 소득 수준 등등 여러 요인이 역사적 배경과 함께 겹쳐 나타난 것이다.[11] 처녀라고 번역했지만 간혹 원문 한자가 室女, 處子인 경우도 있다.[12] 고가연(2015), 한영자전(1890) 분석연구,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 2[13]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1880), 한불자전(Dictionnaire coréen-français), Yokohama: C. Lévy Imprimeur-Libraire, p. 597[14]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1880), 한불자전(Dictionnaire coréen-français), Yokohama: C. Lévy Imprimeur-Libraire, p. 492[15]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1880), 한불자전(Dictionnaire coréen-français), Yokohama: C. Lévy Imprimeur-Libraire, p. 490[16] 고가연(2015), 한영자전(1890) 분석연구,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 2[17] Underwood, Horace Grant(1890), 한영자전(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Vol. 1, Yokohama: Kelly & Walsh, p. 185[18] Underwood, Horace Grant(1890), 한영자전(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Vol. 2, Yokohama: Kelly & Walsh, p. 280[19] Underwood, Horace Grant(1890), 한영자전(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Vol. 2, Yokohama: Kelly & Walsh, p. 172[20] Underwood, Horace Grant(1890), 한영자전(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Vol. 2, Yokohama: Kelly & Walsh, p. 119[21] 안예리(2021), 근대 한국어와 게일의 한영자전, 기독교사상, 2021년(10), p. 65[22] Gale, James Scarth(1897), 한영자전(Korean English dictionary), Yokohama: Kelly & Walsh, p. 804[23] Gale, James Scarth(1897), 한영자전(Korean English dictionary), Yokohama: Kelly & Walsh, p. 297[24] Gale, James Scarth(1897), 한영자전(Korean English dictionary), Yokohama: Kelly & Walsh, p. 676[25] Glare, Peter Geoffrey William 편(2012), Oxford Latin Dictiona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 2283[26] 안예리(2021), 근대 한국어와 게일의 한영자전, 기독교사상, 2021년(10), p. 89[27] 이환진(2017), 마태복음 1:23의 동정녀와 처녀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성경원문연구, 41, p. 88[28] 이환진(2017), 마태복음 1:23의 동정녀와 처녀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성경원문연구, 41, p. 84[29] 이환진(2017), 마태복음 1:23의 동정녀와 처녀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성경원문연구, 41, p. 82[30] 이환진(2017), 마태복음 1:23의 동정녀와 처녀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성경원문연구, 41, p. 80[31] 이환진(2017), 마태복음 1:23의 동정녀와 처녀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성경원문연구, 41, p. 81[3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예수성교전서 항목[33] 이환진(2017), 마태복음 1:23의 동정녀와 처녀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성경원문연구, 41, p. 78[34] 이환진(2017), 마태복음 1:23의 동정녀와 처녀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성경원문연구, 41, p. 78[35] 이환진(2017), 마태복음 1:23의 동정녀와 처녀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성경원문연구, 41, p. 76[36] 朝鮮總督府 편(1920), 朝鮮語辞典, 京城: 大和商會, p. 813[37] 朝鮮總督府 편(1920), 朝鮮語辞典, 京城: 大和商會, p. 461[38] 박용규(2016), 조선말 큰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미, 기록인, 35, p. 77[39] 한글학회 편(1957), 조선말 큰사전, 서울: 을유문화사, p. 2956[40] 한자 표기는 인데, 処는 의 일본식 약자이다.[41] 그밖에 영어 virgin을 받아 들인 バージン(ヴァージン)도 쓰고 있고, 속어로 (오보코)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미통(未通)이라는 표현은 <만엽집>에서도 문증(文證, 어떤 단어나 언어 형태가 기존의 문헌 속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음이 밝혀짐.)되는 유서 깊은 것으로, 정을 통한 적이 없다는 의미이다.[42] 牟田和恵(1992), 戦略としての女. 明治・大正の女の言説をめぐって, 思想, 812, p. 224[43] 平川景子(1997), 処女会組織化の理念. セクシュアリティの装置, 明治大学社会教育主事課程年報, p. 51[44] 2023년 1월 1일에 검색한 결과이다. 본문이 아니라 링크에서 처녀를 언급하는 기사 1건은 제외했다.[45] 기사1, 기사2, 기사3[46] 기사1, 기사2, 기사3, 기사4, 기사5, 기사6, 기사7, 기사8, 기사9, 기사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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