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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1 21:03:32

장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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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전량 6대 국왕
장요령 | 張耀靈
출생 344년
전량 양주 안정군 오씨현
(現 간쑤성 핑량시)
사망 355년(향년 12세)
재위기간 6대 국왕
353년 ~ 3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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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성씨 장(張)
요령(耀靈)
부모 부친 장중화
모친 배왕후
형제자매 2남 ?녀 중 장남
자녀 없음
원서(元舒)
시호 전량: 애공(哀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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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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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량의 제6대 군주.

자는 원서(元舒)였으며, 재위 기간은 대략 1개월 남짓으로 매우 짧았다.

2. 생애

353년 10월, 장중화가 병에 걸리자 좌장사 마급(馬岌)을 보내 장남 장요령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형 장조로 하여금 세자를 보좌하도록 했다. 다음달인 11월에 장중화의 병이 악화되어 오늘내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중화는 손수 조서를 써서 주천태수로 좌천되어 있었던 명장 사애를 위장군으로 삼고, 중앙으로 불러 조정의 정무를 맡기려고 했지만 서형(庶兄) 장조가 장중화의 총신인 조장, 위집 등과 결탁해 조서를 중간에서 빼돌렸다. 사애가 끝내 오지 않자 장중화는 어쩔 수 없이 장조, 조장, 위집 등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승하했다. 어린 세자 장요령은 부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후 대사마, 호강교위, 양주자사, 서평공을 자칭하고, 보정대신인 백부 장조에게 지절을 내려 도독중외제군사, 무군대장군에 임명했다.

353년 12월, 조장과 위집 등은 대신들을 모은 뒤, 천하가 혼란하니 연장자가 군주에 올라야 한다며 장요령을 폐위하고 장조를 옹립할 것을 건의했다. 사전에 장조와 내통한 왕태후 마씨까지 나서서 장요령 폐위에 앞장섰고, 결국 장요령은 왕위를 빼앗긴 후 양녕후(涼寧侯)로 강등되었다.

355년 7월, 조카 장요령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장조가 패악질을 일삼자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분노했는데, 특히 하주자사 장관(張瓘)이 장조를 매우 혐오했다. 장조 역시 이를 알고 장예태수(張掖太守) 소부로 하여금 하주를 관리하도록 하고, 장관에겐 포한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부장 역췌(易揣)와 장령에게 13,000여 명의 군사를 주어 장관의 군대를 습격하게 하자, 장관은 폭발하여 역췌를 무찌르고 자신의 본거지였던 하주로 가 소부까지 살해한 다음 반란을 일으켰다.(장관의 난) 장관은 전량 각지에 격문을 뿌려 장조를 다시 후작으로 끌어내리고, 폐왕 장요령을 옹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8월에 장관과 그에게 동조한 대신들이 장요령을 모셔오려고 했으나 장조가 선수를 쳐서 양추호(楊秋胡)를 보내 장요령을 궁중 동쪽 정원으로 납치해버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양추호는 장조의 명령에 따라 12살이었던 장요령의 허리를 반으로 접어 죽이고, 사체를 모래구덩이에 숨겼다. 조카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은 장조는 장요령에게 애공(哀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3. 둘러보기

전량의 역대 국왕
5대 세종 환왕 장중화 6대 애공 장요령 7대 위왕 장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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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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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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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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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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