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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장로회신학대학교 長老會神學大學敎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 | ||
<colbgcolor=#122954><colcolor=#ffffff> 학훈 | 경건과 학문(Pietas et Scientia) | |
교색 | PUTS BLUE PUTS GREEN PUTS BLACK | |
국가 | 대한민국 | |
분류 | 사립대학 | |
개교 | 1901년 5월 15일 | |
설립자 | Samuel A. Moffett | |
종교 | 개신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 |
총장 | 김운용관련링크 | |
주소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로5길 25-1 (광장동) | |
재적생 | <colbgcolor=#122954><colcolor=#ffffff> 학부 | 893명(2020년 4월) |
대학원 | 868명(2020년 4월) | |
신학대학원 | 909명(2020년 4월) | |
교원 | 76명(2020년 9월) | |
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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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장로회신학대학교 이니셜 로고 |
장로회신학대학교 홍보영상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개신교계 사립 대학교. 흔히 줄여서 "장신대(長神大)[1]"라고 불린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마포삼열(Samuel.A.Moffett, 1864.1.25~1939.10.24)[2]이 1901년도에 설립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속칭 평양신학교)를 전신으로 삼는다. 따라서 장로회신대는 대한민국에서 9번째로 오래된 대학교이다.[3] 마포삼열 선교사는 1901년 평양에서 김종섭, 방기창 두 사람을 데리고 자신의 사랑방에서 신학과반을 만들어 가르쳤다. 이것이 평양신학교의 모태가 되어 1903년 장로회 공의회에서 정식 인준되었고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교단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 즉 평양신학교로 시작되었다.
이 평양신학교를 전신으로 삼는 또 다른 대표적인 학교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총신대학교를 들 수 있다. 두 학교의 소속 교단이 과거에는 하나(조선예수교장로회)였으므로 평양신학교는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의 모태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설립자의 후손 및 설립자의 소속 교단인 미국장로교회(옛 미국 북장로교, 현 PCUSA)와 교류를 하고 있는 곳은 장로회신학대학교이다. 참고로 후손의 동의하에 마포삼열의 유품과 유해는 장로회신학대학교 교내에 안치되어있다. 또, 평양신학교의 학적부는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있다.
2. 특성
대한민국의 개신교 교단 중 교인 수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 참조. 개교회 및 목사의 수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 이어 2위 규모를 차지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신학을 대표하는 총회 직영 신학대학이다.1960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이 WCC 가입문제[4]로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으로 분열되며, 동시에 총회신학교(現 총신대학교)와 분열되었다.
총신대학교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정통주의에 부정적이며 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을 기반으로 하는 박형룡 목사[5]의 보수신학을 대표한다면,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설립 배경에 박형룡 목사가 있었기에 과거에는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중시했지만[6]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및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해, 칼 바르트 계열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수용[8]하는 가운데 기존의 개혁정통주의 신학이 공존[9]하는 한국 개신교 스팩트럼에서 중도(보수)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보<혁 기준으로, 고신대학교<총신대학교<장로회신학대학교<감리교신학대학교<한신대학교
예장통합 교단의 목사를 양성하는 과정인 신학대학원(M.Div)[10] 입시의 경우,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총신대학교의 신학대학원과 더불어 준고시급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재수, 삼수는 기본인 리즈 시절이 존재했다. [11]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 하락 및 넘쳐나는 목사후보생 대비 사역지의 부족 등의 이유로, 2000년대 후반부터 하락세를 보이며 2012년 지원자 1,000명선이 무너졌고, 2014년 현재 823명이 지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이어져 2022년에는 경쟁률이 4.05:1로 발표되었다. #
다만, 교단 신학생을 대부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생으로 장려하는 합동 교단[12]의 경우와 달리 통합 교단은 직영 신학교가 전국에 7개가 있고, 각 신학교 출신별로 각자 다른 컬러와 지역색을 갖고 있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전체적으로 신학생 입학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현상은 대한민국 개신교 입장에서 안타까운 점이다.
2.1. 경건회 및 사경회
장로회신학대학교에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11시 15분부터[13] 주당 4회의 채플이 있다. 출석의 30%이상 결석[14][15]시 하루 종일 성경을 읽는 '성경 통독'을 이수해야만 다음학기에 학업을 이어서 할 수 있다. 타 신학교[16]나 종교적 학교와 다른점이 있다면 채플의 횟수일 것이다. 전술한 대로 채플이 한 주에 4회인데, 야사에 의하면 먼저 라이벌(?)격인 총신대학교에서 채플을 주당 4회로 늘렸다고 한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교수진이 주당 4회로 채플을 늘림으로써 전국에서 유이하게 주당 4회나 예배를 드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고.생활관 사생을 대상으로는 화~금요일 오전 6시에 새벽경건회가 진행된다. 시간은 찬송, 기도, 설교 등까지 해서 평균 30분 가량이며, 그 이후에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기도하고 흩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10회 이상 결석 시 퇴사조치될 수 있으므로 기숙사 학생들은 주의해야 한다.
또한 학기에 한 번(3월, 9월)에 사경회가 진행된다. 이는 학교 혹은 외부 장소에서 실시되며, 2박 3일 동안 예배, 성경공부, 특강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학교나 외부 장소에서 열리는 교회 수련회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편할 듯.
3. 역사
관련 문서: 총신대학교/역사, 한신대학교
역대 총장. 2016년부터 2020년까지 21대 총장으로 기독교와 문화(기독교윤리) 전공의 임성빈 교수가 재직하였다. 임성빈 교수는 본교 학부-신학대학원을 모두 졸업한 최초의 총장으로 내부승격이 되어 21대 총장으로 선출 되었다. 2021년 현재 임성빈 총장의 연임이 부결되어 이를 수습하기위해 이사회는 설교학과 예배학 전공이자 신학대학원장에 재임 중인 김운용 교수를 총장직무대행에 임명하였다.
3.1. 해방 전 역사
초창기에는 각 장로회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평양에 가서 가르쳤고, 학생들은 1달 공부하고 3달 목회하는 방법으로 1년에 3달 공부하여, 5년간 수업하는 제도로 운영되었다.1907년 6월 길선주, 한석진, 이기풍 등 7인의 첫 졸업생이 나오게 되었고 그해 9월에 독(립)노회가 창설되어, 이분들이 한국 장로교회의 첫 목사들로서 안수되었다. 1912년에는 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중국 산둥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여 해외 선교의 시작이 이루어졌다.
1919년 기미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본교 출신 목사들 여러분도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 학생들도 다수 이 운동의 선두에 나서 활동함으로써, 여러 학생들이 체포되어 학교가 일시 휴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의 갖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의연히 그 임무를 수행해 왔으나,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안이 총회장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되므로, 신학교는 이에 동참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무기휴교 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신학교가 문을 닫자, 목사 양성을 중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총회는 친일하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1940년 평양에 '평양신학교'를 세우고, 채필근 목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에서는 김대현 장로가 중심이 되어, 김재준 목사를 교수로 '조선신학교'[17]가 설립되었다.
한국의 신정통주의는 장공 김재준(1901-1987) 목사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면서 도입되었으며, 조선신학교의 교수로 오게된 것이 이후 조선신학교의 성향과 발전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경 비평을 학문적으로 도입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김재준과 몇몇 비교적 진보적인 신학을 하던 목사들이 이 학교의 교수가 되면서 이 학교의 신학교육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게 되었고 이에 대해 기존 교단의 적지않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그래도 이러한 내분은 어차피 일제가 아예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조선 장로교를 다른 종파들과 모두 합쳐 일본 기독교에 흡수시켜버리려는 의도 때문에 이때까지는 딱히 표면화되지 않았다.
3.2. 해방 후 역사
광복이 되어 장로교 내 각 파벌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신학교 분열이 표면화되었다. 특히 조선신학과 신학적인면과 파벌적인면 모두에서 반대되던 (후)평양신학교가 이북에 위치하여[18] 남북분단의 와중에 사라지고 장로교 총회에서 정식으로 인가받은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라고는 조선신학교가 유일하게 존재하게 되면서[19] 목회자 교육내용을 둘러싸고 신학적(교리적)/헤게모니적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심지어 신사참배에 끝까지 저항하던 옥중성도들을 스스로 내치는 바람에 이들이 예장고신으로 독립하고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여 광복한 지 몇 해 되지도 않아 명분을 상당수 잃은 상태였다. 이러한 장로교 내부 교파 간 갈등은 더욱 커져 결국 1947년 (후)평양신학교 출신 학생 51명이 대구에서 열린 제 33회 총회에 서울에 새로이 완전한 장로교 정통신학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이에 대해 김재준은 그해 7월에 총회에서 자신의 신학관을 명확히 밝혔지만 1948년에 총회의 요청을 받은 박형룡 목사가 이를 검토한 결과에 대해 장로교의 교리에 어긋난다며 매우 부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20]
박형룡의 의견을 받아들인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위해 김재준을 1년간 해외로 유학보내고 조선신학교에 보수주의(근본주의) 교수들을 대거 수혈하는 방안을 내놓지만 이 방안에 대해 조선신학교에서 거세게 반발함으로써 사실상 이 개조안은 무효화된다. 때문에 결국 총회 산하 신학대책위원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포기하는 대신 그해(1948년) 5월에 보수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를 새로이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에 따라 결국 그해 6월, 박형룡를 임시교장으로하여 서울 남산에 새로이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했고, 이것이 1949년 35회 총회에서 인가 받게되면서 장로교 내부 분열이 가시화된다.
한편 이 난리 중에도 1947년에는 문교부로부터 정규대학으로 인가받는다. 그리고 재단법인 한신학원 인가와 함께 조선신학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이 난리를 피우는 도중에 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신학대학은 부산으로 피난하여 교육을 계속한다. 1951년에 36회 총회에서 서로 교육하는 신학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신학교의 양립에 의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두 신학교의 직영을 전부 취소하고 대신 총회직영의 새로운 신학교를 대구에 세우자며, 사실상 두 학교를 합친 새로운 학교를 만들자는 방안을 내놓고 그 해 9월에 총신대학교가 설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명칭과 교수진이 남산에 있던 장로회신학교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고, 총회에서 내놓은 두 학교 결합을 위한 소위 '합동 7원칙'에서 요구한 "신한 교육을 순복음부의에 기초해서"한다던가 중요과목을 7인의 선교사 교수에게 맡긴다던가, 신학교 현직원의 총사퇴 등등의 안은 조선신학대학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므로, 조선신학대학 측에서는 당연히 불복했다.[21] 이때 학교 이름도 현재 한신대학교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는 한국신학대학교라는 이름으로 갈아버린다.[22] [23]
이 이후로는 각 대학은 서로 독립된 상태였으며, 1953년에 결국 한신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리되었다.
1953년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대구광역시에서 시작하여 후에 서울로 옮겨오게 되었다. 서울로 옮겨온 총회신학교는 남산의 옛날 조선 신궁 자리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이 자리가 적산이었으므로,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아, 교사를 짓자고 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돈 3,000천만 환을 사기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교회일치운동을 지지하는 측과 이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 분쟁을 계속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 싸움으로 결국 1959년 대전에서 모인 제44차 총회에서 총회신학교가 두 파로 나뉘어, 에큐메니칼 측은 서울 광진구 광장동 353번지 1만 9천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교사를 짓고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새 출발을 하였고 N.A.E 측, 즉 교회일치운동을 반대하는 측은 사당동에 교사를 짓고, 옛 이름 그대로 '총회신학교'[24] 출발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교는 1961년 문교부로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대학'으로 대학 인가를 받았으며, 1966년 대학원 설립, 1973년에는 '장로회신학대학'으로 개명하고, 1976년부터 미국 San Francisco 신학교와 목회학 박사과정을 공동으로 개설하였다. 1980년에는 신학대학원(M.Div.)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92년에는 지금까지 San Francisco 신학교와 공동으로 실시하던 목회학 박사과정을 중지하고, 1992년에 시카고에 있는 McCormick 신학교와 공동으로 이 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1993년부터는 '장로회신학대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3년에는 교육부로부터 '세계선교대학원'이, 1995년 10월에는 교육부로부터 '교역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이, 1996년 11월에는 '교회음악대학원'이, 2001년 7월에는 '교역대학원'을 폐지하고, '목회전문대학원(목회신학석사과정, 목회학박사과정)'이 설립인가를 받았다.
현재로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미지는 '숭실대학교 신학대학'이다.[25] 실제로 숭실대가 학부 과정에 기독교학과를 개설했지만 신학대학원을 개설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장로회신학대학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사가 되려는 숭대생들이 흔히들 장신대 신대원으로 진학하다보니 이런 인식이 굳어졌다. 다만 숭실대와는 교단만 같고 법인이 분리되어 있다.
학령인구가 줄어들어서 목사를 지망하는 신입생도 꾸준히 줄어들자 장신대를 중심으로 전국의 예장 통합 계열 신학대학을 모두 통폐합할 것이라는 예측도 심심찮게 나온다. 하지만 각 노회 별로 신학대학을 갖고 있는 형태라서 법인이 분리되어 있고, 각 신학대학 소재지의 지역 사회가 통폐합에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조속한 통폐합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23학년도 신학대학원 입시 결과(주요 교단 신대원 중 유일한 신입생 100% 충원)나 교단의 규모(교인 수 1 위), 학교의 인지도 등의 여러 지표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그리 통폐합이 절실하지 않다.
뿌리가 같은 총신대학교와 함께 개신교계 신학과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갖고있는 특성상 장신대는 학교 자체적으로는 통폐합이 그리 절실하지 않다. 특히 소규모 종합대학으로 변하고 있는 총신대에 비해 장신대는 종합대학화도 전혀 진행되지 않았는데, 연세대, 숭실대, 서울여대 등의 예장통합에 소속하거나 인준한 종합대학, 전문대학이 많기 때문에 정말 학교의 존폐를 고민할 정도의 위기가 닥쳐버린다면 다른 예장통합의 종합대학 혹은 전문대학과 통폐합해서 종합대학으로 변한다는 선택지도 널려있기 때문이다.
개신교계를 전혀 모르는 타대학 훌리건들은 장신대의 입시와 위상을 모르고 장신대를 너무 낮잡아보는 경향이 강한데[26] 애초에 이 대학은 내신이나 수능 점수로 판단하는게 아니라 목사를 얼마나 많이 배출하는지, 교단의 인프라가 얼마나 큰지로 판단되며, 그러한 점에서 총신대와 함께 위상이 높은 대학이다.
4. 주변 교통편
4.1. 버스
- 장신대앞(05-581/05-595)[27] : 서울 버스 광진01
- 광나루역(서울 05-171/05-170, 경기 74-043/74-044) : 서울 버스 130, 서울 버스 370, 서울 버스 N30, 경기광주 버스 9301
- 광진청소년수련관(74-053)[28] : 경기광주 버스 13, 경기광주 버스 13-2, 경기광주 버스 1113, 경기광주 버스 1113-1, 경기광주 버스 1113-2
- 워커힐아파트.광장동, 워커힐입구(74-049)/워커힐아파트앞(74-048)/광나루우편취급국(05-299)[29] : 서울 버스 2227, 남양주 버스 1, 의정부 버스 1-1, 남양주 버스 1-4, 남양주 버스 9(-1), 구리 버스 15, 남양주 버스 23, 남양주 버스 91, 구리 버스 92, 구리 버스 93, 구리 버스 95, 구리 버스 96, 남양주 버스 97, 양평 버스 2000-1
4.2. 지하철역
5. 개설 과정
5.1. 학부
국방부 지정 군종목사 지원 가능 신학대학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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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 감리교 대학 ■ 구세군 대학 ■ 성결교 대학 ■ 오순절 대학 ■ 장로교 대학 ■ 침례교 대학 □ 초교파 대학 | |||||
후보생은 종교 계열 학과만 지원 가능 (신학과, 기독교학과, 기독교교육과, 교회음악과 등) 요원은 35세까지 M.Div를 졸업하고 목사고시를 통과해야 지원가능 예비군 군종목사는 동원령 발동 혹은 전시상황시 40세 이하의 목회자가 가능 |
- 신학과(Th.B)[30]
- 기독교교육과(B.A)
- 교회음악학과(B.M)
5.2. 대학원
5.2.1. 석사
- 신학대학원(M.Div)[31][32]
- 일반대학원(Th.M, M.A, M.M, M.P.S)
- 목회전문대학원(Th.M in Min)
- 세계선교대학원(Th.M in Miss, M.A)
- 교역대학원(Th.M in Min)
- 교육대학원(M.A in Ch.Ed)
- 교회음악대학원(M.C.M)
5.2.2. 박사
- 일반대학원(Ph.D)
- 목회전문대학원(Th.D in Min, D.Min)
6. 관련 문서
- 2015 개정 교육과정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논란 : 장로회신학대학교는 국내 신학대학교 중 최초로 역사신학(교회사) 교수들이 국정 교과서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대학 동아리연합회, 신학대학원 학우회에서도 공식적으로 국정 교과서 반대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현재도 학내에서 국정 교과서와 관련하여 찬반토론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며, 특별히 신약학 김철홍 교수의 국정 교과서 찬성 견해 개진 후 다양한 의견 표출이 이뤄지고 있다.[33]
- 복음주의
- 신정통주의
- 성서무오설
- 축자영감설
- 성서해석학
- WCC
- 유신론적 진화론 VS 창조과학
[1] 전국 각지(서울장신대학교, 부산장신대학교, 한일장신대학교)에 '장신대'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학교들이 있다. 이 학교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산하 7개 직영 신학대학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와 같은 교단 소속이다. 하지만 이들은 장로회 통합교단 소속의 신학대학라는 뜻에서 장신대라는 이름이 학교 명칭에 들어가있는 것일 뿐, 모두 엄연히 다른 별개의 대학교이다. 재단도 각각 다르다. 보통 그냥 "장신대"라고만 부를 때는 '장로회신학대학교'를 가리킨다.[2] 숭의여학교도 설립했고, 숭실학교 교장도 지냈다. 모두 평양에서 세워진 개신교 미션스쿨이다.[3] 성균관대, 가톨릭대, 연세대, 배재대, 이화여대, 감신대, 숭실대, 계명대 다음으로 대학교 중 개교일이 오래되었다.[4] 이 문제는 사실 좀 더 복잡한 이면과 이해관계가 얽혀있지만 표면적으만 보았을 때에는 WCC 가입에 찬성하는 노선이 통합측, 반대하는 노선이 합동측의 기원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통합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신학적 노선을 띠고 있으며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5] 근본주의 개신교 신학자로도 유명하다.[6] 여기에 어떤 이들이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이 현재도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지지한다고 적었으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상 학계에서 저 두 가지 설은 이미 아웃오브 안중인데다가 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서학 수업에서는 성서비평학을 교수에 따라 정도 차이는 있어도 기본 성서연구 방법론으로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일단 장신대 성서학 교수들이 나온 학교들(케임브리지, 에딘버러, 프린스턴 신학교 등등)부터 성서비평연구방법론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학교들이다. 다만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소속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내부에는 여전히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교회들도 있다. 학교보다도 목회 현장의 스펙트럼이 더 넓은 게 통합측인지라...[7] 어떤 사람들은 한경직 목사의 중립적 영성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그분은 너무도 중립을 좋아하셔서 군부독재시절에 전두환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조찬기도를 했다. 별로 자랑할 것은 못된다는 뜻.[8] 칼 바르트 연구자인 김명용 박사가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9] 장 칼뱅과 마르틴 부처 등 종교개혁자들에 관한 연구로 손꼽히는 박경수 교수, 최윤배 교수 등 칼뱅주의 신학자들도 엄연히 강단에 있다.[10] Master of Divinity의 약자로 우리말로는 교역학 석사 또는 목회학 석사로 번역할 수 있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정통 개신교 정규 신학 학제에서는 무조건 이 학위 과정에 입문해야 정식 목사후보생으로 인정받는다. 목사가 되는 것도 꽤 어려운 과정이다.[11] 보통 300명 정원에 1,500~1,600명 정도는 기본으로 응시했다. 학부부터 신학을 공부하게끔 되어있는 독일과 달리,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신학학제는 신학대학원 지원자가 학부 시절 다양한 전공을 공부하고 진학하는 것을 격려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신학대학원생들은 신학대학 외에도 일반대학교 출신들이 많다. 즉,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학의 문을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응시생들 중 간혹 10수생도 보이는 등, 불굴의 의지를 지닌 용자들이 생겨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12] 합동에는 교단신학교로 총신대학교와 칼빈대학교, 대신대학교, 광신대학교 네 개의 신학교가 있고, 각 학교마다 석사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그러나 교단의 정서상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가장 높게 치는 편이다. 이 부분이 통합과 많이 다르다.[13] 개강감사예배나 종감감사예배와 같이 특별한 날에는 10시 30분에 시작하기도 한다.[14] 우스갯 소리로 '째플'이라고도 한다[15] 2019년부터 25%->30%로 바뀌었다[16] 총신대학교 제외[17] 현재의 한신대학교의 전신이다.[18] 평안도세력과 경기중부세력간의 세력, 파벌문제가 낳은 병크다. 평안도의 평양신학교에 경쟁의 의미로 경기의 조선신학교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19] 1946년 6월 12일 남한지역 장로교회 노회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남부총회로 모여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조선신학교를 직영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얼마간 장로교의 인정을 받은 정식 목회자 양성기관은 조선신학교 뿐이었다.[20] 박형룡은 보고서에서 김재준의 주장이 교회를 능욕하는 내용이라고 비판했고, 이게 장로교 총회가 조선신학교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었다.[21] 명분은 총회 진행방식 및 새로운 신학교 설립의 불법성[22] 1951년 4월 28일에 일어난 일이다.[23] 글에 따라 이미 총회신학교가 세워진 후인 1952년에 교명을 바꿨다고 설명하는 곳도 있으나 한신대학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연혁에는 1951년의 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24] 지금의 총신대학교이다.[25] 총신대도 마찬가지로 일반 대중들에게는 같은 예장 합동 소속인 중부대학교와 엮인다. 다만 총신대가 중부대보다 인지도가 높은 경우라서 중부대가 '총신대 종합대학'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26] 이는 총신대도 마찬가지다.[27] 학교 아래 CU 인근[28] 강변역행만 정차[29] 학교에서 도보 10분 소요[30] 학부생의 경우 일정 수준 (평점 4.3 만점에 3.3 학점 이상)에 도달하고 그 외 몇가지 조건에 충족(TEPS 500점 등...)하면 신학대학원에 무시험 진학이 가능한 특전이 있다. 이는 기독교교육과의 경우도 같으며, 교회음악과의 경우만 조금 다른데 교회음악대학원 졸업이 필수이며 1년에 3명만이 가능한 전형이다.[31] 보통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들어가기 어려운 과정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이 과정이다. 단, 신학대학원 학위는 정식 교육부 인가 학위이기는 하지만 목회자 양성과정에서 있는 특별학위이기에 학술 석사로 인정을 해 주는 곳도 있고 전문석사로만 취급하는 곳도 있다.[32] 예를 들어서 일반대학원의 신학박사 학위를 위해서는 일반대학원의 신학석사 학위가 필요하고 목회학 석사 학위로는 진학이 불가능하다.[33] 재밌는 건, 박근혜가 10.26 사건 다음해인 1980년 본대학교 교육대학원(M.A.C.E) 과정에 입학했었다는 것. 관련기사. 이 사실을 밝힌 김철홍 당시 장신대 교수는 박근혜는 입학하자마자 등교거부를 당해 1개월만에 자퇴하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