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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유안(劉安) | |
출생 | 기원전 179년 |
사망 | 기원전 1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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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전한의 황족. 작위는 회남왕(淮南王). 사기의 '회남형산열전'에 그의 열전이 있다.한 고제 유방의 손자로 문학 등에서 조예가 깊었으나 한 무제 때 역모의 뜻을 품었다가 발각되어서 자살한다.
갈홍의 《신선전》에 따르면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자 팔공(八公)과 함께 신선이 되어 떠났으며, 한 무제는 몹시 후회하며 유안을 모함한 뇌피와 오피의 구족을 멸했다고 한다.
두부의 발명자라는 전승이 있고[1], 저작으로 《회남자》가 있는데 삼국지 시리즈를 플레이 한 적이 있는 유저라면 들어본 적 있을 아이템.
2. 몰락
유안의 휘하에는 낭중(郎中)직의 뇌피(雷被)라는 검술이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 그런데 유안의 아들 유천(劉遷)이 무술을 배운 이후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검술이 뛰어나가도 자부했는데 뇌피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고는 계속해서 대련할 것을 요구했다. 뇌피는 아무래도 섬기는 이의 아들을 상하게 할까 싶어서 거부했지만 요구가 심해지자 마지 못해 대련을 했고 결국 까불거리던 유천은 부상을 입고 말았다.뇌피는 "이대로는 죽겠구나" 싶어서 회남을 떠나 장안으로 가려 했으나 자기가 다친 것에 분노하고 있던 유천이 아버지 유안에게 이 일을 일러바쳤고 유안은 분노하며 뇌피의 낭중직을 거두고 장안으로 가지 못하게 금족령을 내려버렸다.[2] 결국 뇌피는 살기 위해 장안으로 몰래 이동해 직접 유천에 대한 고발장을 냈고 조정에서는 수춘현(壽春縣)의 현승(縣丞)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수춘의 현승은 회남왕 유안이 임명한 인물이라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고 결국 회남의 국상(國相)[3]이 직무태만을 행한 수춘의 현승을 고발했다. 결국 한무제는 회남왕 유안을 처벌하는 대신 그가 다스리는 현(縣) 중에서 2개를 삭감하는 것[4]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으나 유안은 크게 자존심이 상했는지[5] 자기 주변의 수재들을 모아 반란을 획책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어중이떠중이들의 반란 계획은 유안의 손자인 유건(劉健)이 직접 고발하면서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했고 유안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문학적으로는 뛰어났지만 군사적인 재능은 없었던 유안이 수재들을 모아놓고 계획만 주구장창 논의하다가 실패한 것을 두고 "수재들의 반역은 3년이 다 되도록 이루질 못한다(秀才造反三年不成)" 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6]
[1] 일설에 따르면 유안은 연단술을 하다가 두부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연단술에서 말하는 불사의 영약 단을 만들려 했다가 나온 것일듯. 다만 역사기록에 따르면 유안의 생존시기엔 두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훨씬 이후에 가서야 두부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므로 그냥 후대에 지어진 야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2] 당시 황제였던 한무제는 종군하고 싶은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장안으로 와서 신청하면 되며 제후왕들은 그들의 충심을 막아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3] 지역의 통치는 제후왕들이 했으나 조정에서 임명한 국상들 또한 통치에 참여하고 있었다.[4] 원래 대신들은 유안의 처벌을 요구했고 현의 삭감도 5개나 요구했으나 무제가 설득해 줄인 것이다.[5] 조정의 논의 결과를 알리러 온 중위(中尉)가 만약 자신을 선처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중위를 죽이고 반역을 일으키려고 하였다.[6] 풀이하자면 공부벌레들을 데리고 큰 일이나 위험한 일을 계획해 봐야 추진력이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