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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8:51:21

이회영

우당 이회영에서 넘어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명문가
우당 이회영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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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ddd> 성명 서훈 내역 비고
첫째
이건영
건국훈장 애족장 (1999)
이규룡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이건영의 장남
둘째
이석영
건국훈장 애국장 (1991)
이규준 건국훈장 애족장 (2008) 이석영의 장남
셋째
이철영
건국훈장 애국장 (1991)
넷째
이회영
건국훈장 독립장 (1962)
이은숙 건국훈장 애족장 (2018) 이회영의 처
이규학 대통령표창 (1982)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이회영의 차남
장해평 건국훈장 독립장 (1963) 이회영의 차녀
이규숙의 남편
이규창 건국훈장 독립장 (1968) 이회영의 3남
다섯째
이시영
(대한제국) 훈3등팔괘장 (1910)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49)
초대 부통령
이규창 건국포장 (2008) 이시영의 장남
여섯째
이호영
건국훈장 애족장 (2012)
조정구 건국훈장 애족장 (2019) 이규학의 장인
정이형 건국훈장 독립장 (1963) 이규창의 장인
신익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국민훈장 무궁화장 (1962)
매제 신재희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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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회영
李會榮 | Lee Hoe-yeong
파일:Lee Hoe-yeong.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867년 3월 17일
한성부 남부 명례방 명례동계 저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1가 1-2)
사망 1932년 11월 17일 (향년 65세)
중화민국 다롄시
(現 중국 랴오닝 성 다롄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본관 경주 이씨[1]
우당(友堂)[2]
직업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부모 부: 이유승
모: 동래 정씨[3]
형제자매 형: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동생: 이시영, 이소영, 이호영
배우자 초배: 달성 서씨 (사별)
계배: 이은숙[4] (재혼)
자녀 자: 이규룡(출)[5]
녀: 이규원(이규온?)
자: 이규학
(녀: 이규남)?
녀: 이규숙
자: 이규창
녀: 이경숙?
녀: 이현숙
(자: 이규오)?
자: 이규동
손자녀 손자: 이종찬, 이종걸
친인척 사돈: 조정구[6], 정이형[7], 신익희[8]
학력 한학 수학
종교 유교 (양명학)개신교 (감리회)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62)

1. 개요2. 생애3. 가족과 후손4. 대중매체에서5. 기타6. 같은 가문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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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과 사는 다 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세상에 풍운은 많이 일고 해와달은 사람을 급급하게 몰아붙이는데 한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교육자, 사상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다. 대대로 정승 및 판서를 배출한 소론 명문가의 6형제[A]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다섯째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다.

2. 생애

"뿌리 깊은 양반가문의 정통 유학자였지만 혁신유림의 정신으로 기득권을 버리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바지했습니다."
2019년 6월 6일 문재인 대통령 현충일 추념사 중

이회영은 선조 때 영의정 이항복의 10대손, 영조 때 좌의정 이태좌의 6대손, 영조 때 영의정 이종성의 5대손이고, 고종 때 우찬성,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유승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 한학을 배우며 자랐으나 성인이 되고 개화사상을 접하며 개신교(감리회)로 개종하였다.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누이 동생을 친정으로 불러들인 뒤 급사했다고 속이고 개가시키기도 했다. 조선 시대 여성의 덕목은 부군에 대한 절개이고 반가의 규수라면 이러한 잣대는 더욱 엄격했다. 하물며 명문가 중 명문가였던 우당의 가문이라면 상상조차할 수 없는 일인데 폐풍이라고 여기고 실제로 행동했던 우당의 선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대한제국 때 애국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신민회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훗날 만주 독립 기지 건설과 연관이 된다.

1910년 8월 국권이 강탈당하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동년 12월 30일 이회영 6형제[A]와 가족, 해방시킨 노비까지 약 60명이 압록강을 향해 한양을 떠나기까지 전 재산을 급하게 처분하여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때 마련한 자금은 당시 돈으로 약 40만 원이었다. 당시 민족계 은행 3개(천일은행, 한성은행, 한일은행)의 납입자본금이 32만 5천 원이었으니 이회영 일가가 처분한 재산은 최소한 은행 3개를 설립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1969년 월간 신동아에서는 이를 600억 원[11]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이것조차 이회영 일가가 소유했던 토지의 실질 가치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수치이다. 왕현종 연세대 교수의 <우당 이회영 일가 독립운동 재산 조사사업>(2011)에 의하면 이회영 일가가 처분한 토지는 대부분이 둘째 이석영의 소유였다. 처분한 토지[12]가 726필지에 266만 8335평[13]이다. 2015년 공시지가2조 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실거래가는 개별공시지가의 2~4배이므로 이마저도 과소평가된 것이다.[14]

이후 현지의 한인 단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15] 건립에 참여했고 국내, 연해주, 상하이 등의 독립운동 조직에도 다수 참여하였다. 서간도 지역 한인 단체는 사실상 이회영 일가의 재력으로 유지된 셈이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이에 영향을 받은 이회영은 동지들과 의논하여 고종의 7번째 해외 망명을 시도하였다. 그는 차남 이규학(李圭鶴)을 고종의 조카딸인 조계진(趙季珍)[16]과 결혼시키고 이를 기화로 궁궐에 출입하였다. 고종에게 망명 의사를 타진하고 승낙까지 받았으며 이때 전 내무 대신 민영달[17]이 망명자금으로 5만 원을 지원하였다. 베이징에 있던 동생 이시영은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여 망명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일제의 독살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대개 무장 투쟁파들이 그렇듯 초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내부 분열시 조정 역을 맡은 적도 있으나 1921년 노선 불만의 문제로 합류하였다. 이후 만인의 자유와 권리를 외치는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여 남화 연맹 등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체를 결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이회영 자신은 임시정부 수립을 처음부터 회의적으로 봤다. 그 까닭은 임시정부 같은 조직이 있으면 대통령이니 국무총리니 하면서 지위를 놓고 독립운동가들이 감투 싸움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결국 사실이 되어 버렸다. 1920년대 후반부터 아나키즘 활동을 본격화하였으며 백정기 등과 함께 항일구국연맹, 흑색공포단 등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만주 지역의 독립군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는데 김좌진과 면담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며 반응은 좋지 않게 보는 편이었다고 한다. 1932년 만주에서 활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좋은 반응을 보였다.

이회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중국 다롄 지역에 거점을 만들려 했으나 밀정들이 이회영이 다롄에 온다는 사실을 미리 일본 영사관에 알려서 체포당했고 결국 4일만에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이후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1913~2005)이 아버지를 죽게 한 밀정들을 추적한 끝에 이규서와 연충열이라는 사람들이 이회영이 다롄으로 간다는 사실을 밀고한 밀정들임을 밝혀냈다. 이규서는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의 차남이었고, 연충렬은 연미당의 동생이자 엄항섭의 처남이었다. 이규서는 이규창 입장에서는 사촌지간이었던 것. 이규창은 용서하지 않고 이규서와 연충열을 처단하였다. 이때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다물단 활동을 하다가 이미 암살당한 상태였다. 이규준은 한평우(1894~1982)와 사이에서 이온숙(1912-1984), 이숙온(1914-1994), 이우숙(李又淑, 1917-?) 등 3명의 딸을 두었다는 것이 2021년 알려진 바 있다. 이종찬은 이규준의 첫째 딸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존재조차 몰랐다고 한다.

이회영의 재산은 독립운동 8년만에 바닥나 아들 이규창의 자서전에 따르면 "일주일에 3번 을 하면 운수가 대통"이라고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하니 국외 독립운동이란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 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졌다. 참고로 중국 정부로부터 항일 혁명의 영웅으로 훈장을 받았다.

3. 가족과 후손

파일:FB_IMG_1474743381308.jpg
앞줄 오른편 말년의 이회영.

본래 이회영 일가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후손으로 부친 이유승이조판서, 우찬성, 중추원일등의관, 궁내부특진관 등을 지냈을 정도였기에 한일병합을 지지하거나 묵인할 경우 일제에게서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었다. 이 부분을 잘라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실로 엄청난 대인 집안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서구권에는 칼레의 여섯 시민이 있다면 한국에는 '이회영과 그의 여섯 형제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제인 둘째 이석영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유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대 최고 갑부였던 사람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마석) 모란공원묘원을 지나 서울양양고속도로 인근에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동대문부터 80리'라고 했는데 서울 나들이를 갈 때 '동대문에 당도해서야 남의 땅을 밞았다'고 했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중랑구 및 경기도 구리시, 남양주시 정도가 그의 땅이었을 것이다. 이석영 은 1934년 74세의 나이로 굶어 죽었다.[18]

그와 그의 6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중 5명이 옥사하거나 아사하였다. 이회영은 만주에서 항일에 대한 계획을 세운 뒤 다롄으로 이동하려다가 상하이 밀정에게 걸려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19] 바로 아래 동생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부통령이 되는 성재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살아서 조국의 광복을 보고 귀국했다. 여동생인 경주 이씨는 해공 신익희의 형인 독립운동가 신재희에게 시집갔으며 이회영의 조카들도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달성 서씨와 1885년에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달성 서씨가 죽은 후 1908년에 한산 이씨 이은숙과 재혼하여 2남 3녀를 낳았다. 이은숙은 이회영이 사망했을 때 영전에 조사를 써서 올렸는데 내용이 절절하여 종종 회자되고는 하는 명문이며 광복 후 '서간도시종기'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 수기를 쓰기도 했다.

달성 서씨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이규학(李圭鶴, 1896~1973) 역시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협력하며 독립운동을 했는데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피난시키는 일을 맡았고 이후로도 충칭상하이를 오가며 연락 업무를 맡았다. 사후인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규학의 부인 조계진(趙季珍)은 풍양 조씨 조정구(趙鼎九, 1860~1926)의 장녀로 흥선대원군의 외손녀이자 고종의 조카딸이기도 하다. 그녀는 직접적인 의열 활동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비밀 연락 요원으로 활동했다. 부친 조정구는 관직이 판돈녕사사[20]에 이르렀지만 일제의 조선귀족 남작 작위 수여를 거부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평정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규학의 넷째 아들이 전 국회의원이자 김대중 정부 때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이다.

이회영의 자녀들 중 이은숙과의 사이에서 난 3남 이규창[21] 역시 흑색공포단에 가담하여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상술한 대로 아버지를 일제에 밀고한 밀정인 사촌을 처단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제에 제공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밀정들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고 국내에 잠입해 밀정 이용로를 처단했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 13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 안에서도 일제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몰래 만들어 배포하다가 발각되어 4년간 독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광복을 맞이해 석방되게 되며 공로로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이외에 차녀 이규숙의 남편인 장해평(莊海平)[22]도 독립운동가였으며 이규창의 장인인 정이형은 정의부 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4남이자 막내 아들은 이규동[23]으로 그의 장남이 변호사 겸 5선 국회의원이종걸이다.

4. 대중매체에서

5. 기타

파일:-14.0420-80신교동 우당기념관.jpg

6. 같은 가문의 인물

※ 독립명문가[28] 이회영 6형제[29]는 선조 때 영의정 이항복의 차남 이정남의 9대손이다. 이회영의 형 이석영의 양부이기도 한 고종 때의 영의정 이유원 역시 이정남의 후손이다. 을사삼흉 이하영은 이항복의 장남 이성남의 9대손이다. 같은 가문의 일원임에도 동시대에 극과 극의 행보를 보였다. 족보에서는 이하영의 증조부 이흥혁 및 그 후손을 모두 삭제하였다.[30]

: 독립유공자[31], : 친일반민족행위자



[1] 이항복의 10대손. 중시조 35세 ○영(榮) 항렬.[2] 호를 풀이하자면 '벗들의 모임터'이다.[3] 고종 때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순조(鄭順朝, 1810 ~ ?)의 딸. 정순조는 동래 정씨 문익공파로 중시조 29세이다.[4] 한산 이씨 이덕규의 외동딸.[5] 형 이건영의 양자로 출계.[6] 차남 이규학의 장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2019).[7] 3남 이규창의 장인.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1963).[8] 매제(막내여동생의 남편) 신재희의 동생.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1962).[A] 보통 6형제로 알려져 있으나 요절한 이소영까지 포함하면 7형제이다.[A] 보통 6형제로 알려져 있으나 요절한 이소영까지 포함하면 7형제이다.[11] 1969년 가치로 600억 원이다. 쌀 가격을 비교하여 환산한 듯하다.[12] 이석영이 양부인 영의정 이유원에게서 상속받은 땅은 현재의 양주시, 남양주시 일대이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유원은 양주에서 서울로 오는데 80리 길을 남의 땅을 밟지 않을 만큼 광대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회영 일가의 땅 중에는 현재 전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싸다는 명동 일대가 포함되어 있다. 정확히는 명동성당 건너편 YWCA 회관 북쪽이다. 명동 일대의 땅은 처분하지도 못한 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를 거쳐 남의 땅이 되어 버렸다.[13] 약 882만㎡.[14] 2015년 전국 땅값은 경실련 추정으로 약 8400조 원이다.# 이회영 일가의 토지 실거래가를 5조 원으로 추산할 때 이는 전국 토지 가격의 약 0.06%를 차지한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도 이회영 일가의 전 재산을 5조 원으로 추산한 바 있다.#[15] 후의 신흥무관학교이며, 현재는 경희대학교이다.[16] 흥선대원군의 외손녀로서 풍양 조씨 조정구의 딸이다. 조정구는 종1품 판돈녕사사까지 지낸 고위관료로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가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수여하자 민영달과 마찬가지로 거부하였다. 고종이 승하하자 임시정부 평정관을 지내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17] 본관은 여흥 민씨. 각조 판서를 지내고, 1894년 김홍집 내각에서 내무아문 대신을 지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가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수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18] 이 가문의 재산이 짐작이 안 된다면 이 분들보다 돈이 훨씬 적었던 민영휘친일 행각의 결과를 살펴보면 된다. 현재 친일한 민영휘의 재산이 아직도 대한민국에 많이 남아 있다.[19] 형인 이건영과 이철영은 병으로 사망했고 이시영을 제외한 다른 동생 1명은 소식이 끊겼다가 일가족과 함께 일본군에게 몰살당했다는 비고가 전해졌다. 만주로 떠난 뒤 소식이 행방불명되고 이후 신문 기사를 통해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신문 기사 내용이 "만주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다가 군경에 검문을 받고 수감된 뒤에 창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한 이상한 노인" 이후 자결을 했다는 내용은 조작이었고 사실은 배에서 내릴 때 체포가 돼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만주의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셨다.[20] 종1품 판돈녕부사를 개칭한 것이다.[21] 초명은 이규호였다.[22] 이칭으로 기준(麒俊), 남용무(南容武), 이계백(李啓白) 등이 있다.[23] 초명은 이규석이었다. 이회영이 사망했을 당시 6세였다. 1926년 2월 2일 생으로 2014년 3월 12일 작고.[24]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윤두수 역,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최동열 기자 역.[25] 여담으로 안재모와 정동환은 야인시대에서는 각각 인터뷰어와 기자로 출연해서 정동환이 맡은 최동열 기자가 김두한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모습으로 나왔는데 이 작품에서는 정반대로 정동환이 맡은 이회영이라는 미스테리한 인물을 안재모가 맡은 일본인 기자 기무라 준페이가 추적하는 모습으로 나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26] 이회영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의 개교 110주년 기념일이기도 하다.[27] 현재 서울시가 추신하는 남산 곤돌라 건설 계획에 따른 결정으로 전해진다.[28] 이회영 일가는 명문가의 후손으로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그 공로로 광복 후 일가에서 건국훈장·건국포장 13명을 배출하였다. 건국훈장(12명) :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등 6형제,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이건영의 장남 이규룡(생부는 이회영),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 이회영의 차남 이규학·3남 이규창, 이회영의 사위 장해평(이규숙의 남편). 건국포장(1명) : 이시영의 장남 이규창(초명은 이규봉). 사돈인 조정구, 정이형, 신익희도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독립장·대한민국장을 받았으므로 이들까지 포함하면 16명이 된다.[29] 요절한 이소영을 제외하고 흔히 이회영 6형제로 칭한다.[30] 이흥혁부터 삭제한 것은 이하영의 후광으로 증조부 이흥혁은 비서승, 조부 이응효는 의정부참찬, 부친 이유수는 내부대신으로 추증되어 이하영의 친일행적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31] 광복 후 건국훈장, 건국포장 등을 받은 인물들만 포함함. 기타 독립운동가들은 포함하지 않았음.[32] 郞廳. 일반적으로 정3품 이상 당상관에 비교하여 종3품 당하관 이하의 관원을 지칭하나, 좁은 의미로는 6조의 정5품 정랑 또는 종6품 좌랑을 지칭한다. 또한 비변사, 경리청, 준천사 등 일부 관청에는 낭청 자체가 종6품~정7품의 관직 명칭이다.[33] 부(府)를 관할하던 종2품 지방 장관직. 경주·평양·전주·영흥·함흥·의주·강화·광주 등 8곳의 부가 있었다. 부윤은 절제사(節制使)를 겸직하였다.[34] 참판은 6조의 장관인 판서를 보좌하는 종2품 차관직이다. 각 조의 중요 사무는 판서, 참판, 참의가 합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상당한 발언권이 있었다.[35] 조부는 이세필의 3남 충청감사 이형좌(李衡左), 부친은 이조판서 이종백(李宗白)이다. 이세필의 장남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에게 입양되었다.[36] 이복동생. 일찍 사망.[37] 이복동생.[38] 형 이건영의 양자로 출계.[39] 풍양 조씨 조계진(趙季珍)과 결혼. 판돈녕사사 조정구(趙鼎九, 1860~1926)의 장녀이자 흥선대원군의 외손녀이며 고종의 조카딸이기도 하다. 조정구는 일제가 강제로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수여했지만 끝내 거부하였고 임시정부 평정관으로도 활동했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40] 이규온? 반남 박씨 박창서와 결혼.[41] 독립운동가 장해평(장기준)과 결혼.[42] 초명은 '이규호'였다고 함. 부인은 하동 정씨 정문경으로 정이형(鄭伊衡, 1897~1956)의 장녀이다. 정이형은 일제강점기 때 대한통의부 제5중대장, 정의부 사령부관, 고려혁명단 위원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43] 초명이 '이규석'이었다고 함.[44] 생부는 이회영.[45] 초명은 '이규봉'.[46] 초명은 '이규홍'.[47] 이세필의 차남 이정좌의 5대손.[48] 이세필의 7대손. 증조부는 이흥혁(李興赫), 조부는 증 의정부 참찬 이응효(李膺孝), 부친은 증 내부대신 이유수(李裕脩).[49] 李準榮.[50] 協辦. 각부 대신(大臣)의 하위직. 갑오개혁 이전에 각조 판서(判書)를 보좌하던 참판(參判)과 유사함.[51] 이규원은 종2품까지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리는 일)되었다.[52] 찬시(贊侍). 한일병합 이후 일제가 이왕직(李王職)에 개설한 시종과 같은 관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