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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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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제3대 국왕
에드워드 6세
Edward VI
<nopad> 파일:잉글랜드의에드워드6세.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에드워드 6세
(Edward VI)
출생 1537년 10월 12일
잉글랜드 왕국 미들섹스 햄프턴 코트 궁전
사망 1553년 7월 6일 (향년 15세)
잉글랜드 왕국 그리니치 궁전
재위기간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왕
1547년 1월 28일 ~ 1553년 7월 6일
서명 파일:에드워드 6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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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에드워드 튜더
(Edward Tudor)
아버지 헨리 8세
어머니 제인 시모어
장례식 1553년 8월 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
종교 성공회
문장 파일:잉글랜드 국장(1509-1554).svg
Dieu et mon droit
하느님과 나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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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재위3. 조상4. 기타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8세의 적자.[1]

적법한 왕위계승권자(아들)를 간절히 원하던 헨리 8세가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에게서 얻은 귀하디 귀한 아들이다. 튜더 왕가에 자손이 귀했던 데다가 당시 영아 사망률도 매우 높았기 때문에, 헨리 8세가 무척이나 아끼고 보호했다. 당대 잉글랜드의 유일무이한 왕자이자 왕태자라는 신분과 더불어 헨리 8세와 가정교사들로부터 체계적인 제왕학 교육을 받아둔 덕분에 또래보다 훨씬 뛰어난 총명함과 영특함을 가진 다재다능하고 교양과 지성을 겸비한 엄친아였다. 이 때문에 젊었을 때의 아버지와 달리 사냥에 참가한 적이 드물다고.

헨리 8세가 에드워드 6세를 얻었을 때는 당시 기준으로 너무 늦어서 손주를 봐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인 40대 후반이었다. 헨리 8세가 55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에드워드 6세는 고작 9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나 15살 때 요절. 통치기간은 길지 못했다.[2]

그가 선천적으로 병약해서 요절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라 한다. 오히려 당대 기록에 의하면 태어날 때부터 건강했으며 자라날 때 잔병치레도 거의 없는 매우 건강한 체질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키도 크고 튼튼했다는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다만 갑작스럽게 병에 걸리더니 6개월간 증세가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렀고, 사망 당시에 16살 생일도 지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병약해서 죽었다는 식으로 와전된 듯하다.[3]

2. 재위

즉위했을 당시 고작 9세로 나이가 워낙 어렸기 때문에 외삼촌인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가 섭정을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6세는 보통 나이 어린 군주들과 달리 즉위 당시 불과 9세의 나이였음에도 매우 총명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소년 군주였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런 에드워드 6세의 지성을 두고 요시야 왕[4]이 나타났다며 기대가 높았다.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에게 라틴어히브리어, 그리스어를 사사했는데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성격적으로는 엄격하고 냉정해서 거의 웃지도 않았다고. 아버지의 마지막 왕비이자 계모 캐서린 파는 에드워드 6세를 따뜻하고 자상하게 돌봐주고 보살펴서 에드워드 6세는 캐서린 파를 무척 존경하며 잘 따랐다. 부왕이 죽은 이후에도 캐서린이 궁전을 떠날 때 정중한 감사 인사를 남기며 왕대비처럼 예우했으며 캐서린 파는 소꿉친구이자 국왕의 넷째 외삼촌인 토마스 시모어와 재혼하여 국왕의 외숙모가 되었다.[5]

에드워드 6세의 큰 외삼촌 에드워드 시모어는 군사적으로 유능하여 헨리 8세 시대에 공을 세운 바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유능한 편은 아니었다. 동생 토머스 시모어와도 사이가 안 좋은 데다가 헨리 8세 시절 닥치고 버로우 타던 여러 야심가들은 시모어 가문이 독주하는데 대해 이를 갈고 있었다. 외삼촌들이 벌인 정쟁에 끼인 에드워드는 두 외삼촌 모두에게 넌더리를 냈다.

특히 성격이 불같고 노골적인 야심가였던 넷째 외삼촌 토머스 시모어는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와 재혼하여 아이까지 있었는데도 캐서린이 데리고 온 의붓딸이자 당시 메리 공주에 이은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잉글랜드의 둘뿐인 장공주 중 하나였던 엘리자베스 1세(선왕 헨리 8세계비 앤 불린의 딸)와 결혼해 왕위에 접근해 보고자[6] 그녀에게 추파를 던진다. 이 일이 발각당하자 한때 결혼이 파탄나기 직전까지 치닫게 된다. 에드워드 6세는 권력에 눈이 멀어 그토록 사랑하던 계모이자 외숙모인 캐서린 파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작은누나 엘리자베스까지 추근거린 넷째 외삼촌을 불신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는 캐서린 사후에도 정신 못 차리고 어린 왕을 납치하는 미친 짓을 저지르다가 체포되었으며 이 일로 완전히 폭발한 에드워드 6세에 의해 실각당하고 반역죄로 처형을 당한다.

큰 외삼촌 에드워드 시모어는 동생 토머스보다는 비교적 냉철했지만 얼마 안 가 그 역시 분수도 모른 채 점점 올라가는 권력욕을 누르지 못하고 동생과 같은 어리석은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에드워드 시모어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생기자, 조카인 어린 왕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왕을 윈저 성으로 데려가서 사실상 감금한다. 에드워드 6세는 토마스 시모어 때와 마찬가지로 노골적인 분노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외삼촌을 지지하지 않음을 천명함으로써 사실상 에드워드 시모어마저 실각시켰고, 끝내 실각당한 에드워드 시모어는 몰락하게 된다. 이후 그는 농민 반란을 강경하게 진압하지 않아서 젠트리들에게 인기를 잃고, 결국 정적이던 노섬벌랜드 백작 존 더들리가 잉글랜드 내부 가톨릭 세력[7]과 손잡고 시모어를 탄핵하여 권력을 잃고 체포되어 처형당하게 된다. 처형 문서에는 물론 에드워드 6세가 서명했다. 후반 통치는 스스로를 노섬벌랜드 공작으로 봉한 존 더들리의 치세로 이어진다. 존 더들리는 헨리 7세 시절 가혹한 징세관으로 민심을 잃은 죄로(?) 헨리 8세에 의해 민심 수습 차원의 희생양으로서 참수당한 에드먼드 더들리의 장남이며 그의 아들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총애받은 로버트 더들리다.

하여튼 존 더들리는 에드워드 6세가 사경을 헤맬 때 메리 공주의 즉위를 방해하며 제인 그레이를 옹립했다가, 반격을 받고 메리 공주가 여왕으로 즉위한지 1주일 만에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이복누나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와는 생전에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가 20년 넘게 차이 나던 엄마뻘 큰누나 메리와 특히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다만 종교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당시 칼뱅주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복음주의 계열 입장에선 모범생이었지만 메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한 번은 둘이 이 문제로 싸우다가 둘 다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는데, 직후 에드워드는 메리에게 "내가 누나에게 갖고 있는 애정을 시험하려 하지 말라"고 차갑게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독실한 칼뱅주의 성향 복음주의자였고 자신과 성향이 맞았던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잉글랜드 국교회를 체계화하고 안정화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자신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가톨릭 신자인 누나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아 잉글랜드 교회를 다시 로마 교황 휘하로 되돌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후 에드워드 6세는 갑작스레 병[8]에 걸려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이 확실시되자 왕위 승계 문서를 수정하여 메리를 왕위 계승권자에서 제외하면서,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도 제외하고 한때 결혼 상대로 고려되었던 친척 제인 그레이에게[9] 왕위를 넘기기로 한다. 이러한 왕위 계승권 교란은 결국 에드워드 6세 사후 엄청난 분란을 낳게 된다.

좌우지간 에드워드 6세가 죽고나서 사후 왕위를 둘러싸고 메리 1세의 추종자와 제인 그레이를 여왕으로 내세운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세력이 충돌했지만, 이미 종교를 떠나 정통성에서 심각하게 밀렸기 때문에 존 더들리 내부 진영에서 이탈자가 속출했다. 결국 노섬벌랜드 공작 더들리가 뒤늦게(?) 메리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존 더들리는 메리가 즉위한지 1주일 만에 체포되어 자신의 잔당 세력 대부분과 함께 처형되었다.[10]

요절한 데다가 재위 기간 동안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헨리 8세나 이복 누나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에 비해 존재감이 미미하다. 하지만 헨리 8세를 많이 닮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헨리 8세가 가톨릭에서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켜 잉글랜드 교회를 만들고 잉글랜드 내 교황 노릇까지 겸임하며, 몇 번씩이나 아내를 갈아치우고 재혼하는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얻은 외아들이어서 워낙 오냐오냐 애지중지 자란 탓에 아버지처럼 오만하고 안하무인이었다고 한다. 또한 철들기 전부터 적장남이자 고명아들인 자신을 무척 아낀 아버지 헨리 8세로부터 철저한 제왕학 교육을 받아둔 덕분에 일찍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에 걸맞게 언어와 학문에 다재다능함과 총명함을 보였다. 원래부터 아버지를 닮아 웃음기 없이 냉정하고 엄격해도 자신에게 잘해주는 타인에게는 나름대로 인정도 베푸는 성격이었지만 왕위에 오르고 본격적인 친정을 시작하고 나서는 큰누나 메리와의 종교적 갈등, 자신을 수중에 두어 실권을 쥐려는 외삼촌들과 권신들이 벌이는 정쟁 속에서 왕위를 지키기 위해 점점 인간불신이 커지고 잔인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급기야 분수도 모르고 국왕인 자신을 대놓고 납치 및 감금한 외삼촌들을 반역죄를 이유로 속전속결로 처형시키고 큰외숙모 앤 시모어마저 런던 탑에 투옥시키는 결단력도 보였다. 이러한 면모로 인해 헨리의 세 적자들 중 작은누나 엘리자베스 1세와 더불어 능력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헨리 8세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평가된다.

당시의 성격 그대로 자라 오래 왕위를 지켰으면 "아버지를 능가하는" 왕이 되었을 거라는 평가도 있는데,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분석이다. 결국 에드워드 6세와 제인 그레이 사후에 이복 누나들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가 차례로 왕위에 올라 잉글랜드를 넘어 영국과 세계사에 길이 남을 존재감과 업적을 남긴 군주가 되었다.

3.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에드워드 6세
(Edward VI)
<colbgcolor=#fff3e4,#331c00> 헨리 8세
(Henry VIII)
<colbgcolor=#ffffe4,#323300> 헨리 7세
(Henry VII)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
마거릿 보퍼트[11]
(Lady Margaret Beaufort)
요크의 엘리자베스
(Elizabeth of York)
에드워드 4세
(Edward IV)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제인 시모어
(Jane Seymour)
존 시모어
(John Seymour)
존 시모어
(John Seymour)
엘리자베스 대럴
(Elizabeth Darrell)
마저리 웬트워스
(Margery Wentworth)
헨리 웬트워스
(Henry Wentworth)
앤 세이
(Anne Say)

4. 기타


[1] 적자이지만 장자는 아니다. 누나만 둘 있는 아들이기에 당연히 장자일 것 같지만, 헨리 8세는 에드워드 이전에 헨리 피츠로이라는 서자를 두었다.[2] 단, 재위기간은 의외로 그 뒤를 이은 이복누나인 메리 1세보다 조금 길다. 5년간 재위했던 메리보다 1년 긴 6년간 재위했다.[3] 반면 즉위 초에 권력욕에 미친 두 외삼촌들을 처형하고 큰외숙모를 투옥시킨 일화가 있기 때문에 (비록 두 외삼촌들이 처형당한 후이긴 하지만) 외삼촌들처럼 권력욕에 미친 누군가가 독살했을 것이라는 음모론이 종종 제기되기도 한다.[4] 성경에서 구약시대 유대 왕국 소년왕인데 신앙심과 지성을 모두 갖추었다.[5] 생후 12일 만에 생모 제인 시모어산욕열로 일찍 요절한 바람에 에드워드 6세는 친모와의 추억이나 유대가 하나도 없었고 아버지가 뒤이어 결혼한 클레베의 앤캐서린 하워드는 각각 6개월 만에 혼인무효화, 결혼 2년 만에 불륜이 발각되어 처형되었기 때문에 추억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6] 본래 시모어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메리에게 접근해보았으나 이미 장성한 성인이었던 메리는 진작에 토마스 시모어의 시커먼 속마음을 단칼에 파악하고 손절해버렸다.[7] 헨리 8세 시절 수장령과 반역법으로 가톨릭 자체는 불법화되었지만 로마수위권만 부정하는 선에서 국교회 내부의 다수의 전통주의 세력 또는 지하에 잔존한 소수의 가톨릭 복원 세력, 잉글랜드인이면 당연히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이기 때문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칼뱅주의에서 가톨릭 성향까지.[8] 에드워드 6세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병이 어떤 병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결핵, 폐렴 등 여러 설이 있다. 출생 시 노출된 매독균에 의한 신경매독이라는 설도 있다.[9]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공주의 외손녀로 에드워드 본인의 오촌 조카.[10] 이때 왕위엔 전혀 관심도 없었지만 욕심많은 어른들에게 휘말려 괜히 여왕으로 옹립된 제인 그레이 또한 처형되었다.[11] 에드워드 3세의 현손녀이자 곤트의 존의 증손녀.[12] 헨리 8세의 누나 마거릿 튜더의 친손녀.[13] 재세례파는 다른 개신교와도 완전히 이질적인 교리 때문에 유럽 어디에서나 박해받았다.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