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생 및 초기
1607년 외가가 있는 충청도 옥천군에서 사옹원 봉사[1]를 지낸 송갑조(宋甲祚)와 부인 곽숙선(郭淑善)[2]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26세(이하 세는나이)가 되는 1632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1625년 도사 이덕사의 딸 이응(李應)[3]와 혼인하였으며 이 무렵 김장생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1633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여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 참봉(경릉의 관리인)이 되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직했다. 1634년 다시 봉림대군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는데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있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송시열이 쓴 편지[4] |
2. 남명 존속 시기
효종 7년 스승인 김집 사후 장문의 상소를 통해 다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청나라 오랑캐들에게 침략당해 국력이 약해졌지만 춘추대의를 지키자는 입장이었다. 옛날 고려가 송나라와 통했듯이 명나라의 잔존 세력인 남명과 통해야 민심(정확히는 사대부 민심)이 효종을 따를 것이라는 의리론이었다. 지금 보기에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의리만 강조하는 이상론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남명은 남송보다 더하게 망해버렸다.이는 다분히 식자의 명분론이었다. 상식적으로 남명 정권이 겨우 버티던 현실을 생각해보면 남명과 통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조선과 연락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남명 정권은 영력제 주유량 대에 끝났다. 한때는 운남에서 광둥까지 유지했으나 1656년(효종 7)을 끝으로 동중국해 지역을 상실했다. 최소 효종 7년 이후에는 남명과의 통교가 불가능한데 이를 송시열이 모를리는 없어 보인다. 조선의 유림들은 남명 정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지 주유랑이 죽자 사적으로 통곡하고 난리가 나서 청나라와 외교 분쟁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여기에 설령 남명이 광둥까지 점거한 시절이라 할지라도 어려웠다. 만일 청나라에 발각되면 또다시 침략당해서 어떤 상황을 맞이할지 뻔하며 병자호란보다 위험도도 높다. 남명과의 통교는 누가 봐도 미친 짓이고 그걸 모를리 없는 송시열은 당연히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았다. 사상적으로 소신이 있기에 차마 청나라에 조아리며 굽히지 않았을뿐 송시열을 비롯 유학자들의 대의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게 학자이면서 각종 정치와 행정 현안을 겸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행정 실무 각종 현안에서 현실론자였다.
3. 북벌론(1658년)
1658년(효종 9)이 되자 송준길이 조정에 자리를 잡았다. 같은 해 겨울 송시열은 효종의 부름에 응답하여 상경했고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제수하여 북벌을 맡긴다. 송시열이 북벌에 관심이 없었고 단지 명분론에 입각한 북벌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기유독대를 보면 효종이 구체적으로 북벌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라고 물으면 송시열은 "전하께서 덕을 잘 쌓으시고 학문을 익히시고..."라는 말이 나온다. 이게 성리학적인 명분론이랑 현실이 합쳐져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이다.그러나 기유독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악대설화」 후반부의 내용에는 송시열이 '양병과 양민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을 방법'을 묻는 효종의 질문에 '재력을 사치 등에 낭비하지 말고 군수로 돌리며 보오법(保伍法)을 시행하여 누락되는 민정을 없애고 3명 중 1명은 병사로 만들되 나머지 2명은 포(布)를 통해 그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도록 한다면 농민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뒤이어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기강을 세워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왕이 스스로 사심(私心)을 없애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실제 현실에서는 내수사 혁파 주장과 이어진다. 현실적으로 북벌 실행하기가 어려우니 양민(養民)을 통해 국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는 쪽으로 해석하는게 보다 가깝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위의 해석에서 나아가서 오히려 효종도 북벌을 진심으로 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왕권과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북벌을 이용했을 뿐이며 송시열은 여기에 말려서 이용당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송시열로서는 일단 북벌이라는 명분 자체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위에 언급한 신중론을 펼치는 수준에서 효종과 협력해야 했으며 이것이 바로 효종이 노린 결과라는 것이다. 효종 생전에는 효종이 북벌이라는 명분을 이용해서 송시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효종이 사망한 뒤에는 송시열이 효종의 위명과 명분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는 것이다.
4. 예송논쟁과 환국
4.1. 기해예송(1659년)
송시열은 서인의 중심적 인물로서 남인의 중심적 인물인 윤선도와 기나긴 논쟁을 벌인다. 그 발단은 "예송논쟁"에서 비롯되었다.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장렬왕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나로 조정에서 논란이 일었는데 서인은 기년설, 즉 "기년복(1년)을 입으면 된다"라고 주장했고 남인은 3년설, "참죄복(3년)을 입어야 된다"라고 한 것이다. 송시열은 기년설이 명분에 맞다고 주장했다. 예송논쟁 문서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이는 왕의 정통성의 문제와 엮인 복잡한 문제였다.영의정 정태화는 '장자이든 차자이든 1년’이라는 경국대전,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르려 했지만, 윤휴는 《의례》에 따라 효종이 장남은 아니되 인조의 적통 후계자이니 3년이 맞다고 이의를 제기하였고 여러 신하들에 의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시백이 문제를 정태화에게 물었고, 정태화는 송시열에게 물어봤는데, 송시열은 4종지설(四種之說)을 꺼내든다. 4종지설은 《의례》에 적혀있는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를 4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송시열은 효종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맏아들이 아닌 중자(衆子)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의대비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효종이 인조의 친아들이기는 하나 적자가 아니라는 주장으로 왕의 정통성을 문제삼는 것이었다.[5]
4.2. 공의/사의 논쟁 (1663년~1664년)
1664년 쓴 해동건곤,존주대의[6] |
4.3. 수이강 사건 (1669년)
이경석을 교묘하게 비판한 수이강 사건도 1669년에 일어났다. 수이강 사건 항목 참조.4.4. 갑인예송(갑인환국, 1674년)
좌찬성에 올랐으나 남인은 송시열이 효종의 장지를 잘못 골랐다고 규탄했고 송시열은 낙향했다. 정계 복귀 후 우의정에 제수되었지만 남인인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다시 우의정에 제수되었고 좌의정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이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다시 자의대비가 몇년 상복을 입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불거졌다. 처음에 예조에서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보고를 올려 현종의 결재를 받았다. 그런데 송시열의 논리를 따르자면 기년복이 아니라 9개월, 즉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지적되자 예조는 현종에게 '기년복이 아니라 대공복이 맞습니다' 라고 다시 보고를 올렸는데 현종이 격노하여 예조 관료들을 파직시킨다.이에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서인 대신과 대간들은 그럼 예법에 안맞는다고 반대를 했지만 현종은 서인인 김수흥을 귀양보내고 남인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3일만에 2차 예송논쟁, 즉 갑인예송을 자신의 뜻대로 관철시켰다. 하지만 김수흥의 동생 김수항을 좌의정에 삼는 등 서인들에 대한 피바람을 일으키진 않았으니 아들 숙종과의 결정적 차이였다. 이후 현종은 두 달만에 죽음을 맞이했는데 뒤를 이은 숙종이 왕의 행장에 송시열이 행패부려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문장을 넣을 것을 지시했다. 송시열의 제자들이 차마 그럴 순 없다고 반대했다. 분노한 숙종은 서인을 모조리 내쫓고 송시열도 논의를 잘못 이끈 죄를 물어 거제로 귀양 보내 버리니 갑인환국이다.[7] 귀양 생활 중에 송시열은 청남 계통의 꾸준한 고묘 안율 요청 때문에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4.5. 경신환국(1680년)과 서인의 분열
4.5.1. 회니시비(1669년~1716년)
자세한 내용은 회니시비 문서 참고하십시오.4.5.2. 홍수의 변(1675년)
남인이 득세하자 서인은 반전을 꾀하였다. 1675년(숙종 1) 서인인 숙종의 외할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왕의 당숙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녀와 간음하여 자식을 낳았다"고 고변한 홍수의 변[8]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무고였고 오히려 김우명이 강상죄로 처벌받을 위기에 몰리자 대비인 명성왕후가 자신의 친정을 위해 소복을 입고 대전으로 들어가 자진하겠다 소동을 벌이자 결국 복창군과 복평군이 유배가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때 허목 등 남인 강경파는 대비인 명성왕후를 비판하는 장계를 올려 숙종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4.5.3. 삼복의 옥(1680년)
숙종 6년 경신년에 숙종은 허적의 조부인 허잠에게 시호를 내리고 허적에게도 궤장이 수여된다. 그러나 숙종은 군부 주요 인물들을 서인 중심으로 바꾸었다. 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의 지휘관이 모두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되었다. 어영청은 김석주가 이전부터 차지하고 있었으니, 중앙군의 대부분이 서인에게 넘어간 것이다.여기에 삼복의 옥이 일어났다. 남인 허견과 서인 김석주와 동시에 친분이 있었던 정원로가 허적의 서자인 허견과 종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였다. 이 사건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김석주가 탁남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확대시켰다. 이 고변으로 허견은 능지처사, 복선군은 교수형을 당하였고 허적은 관작을 삭탈되고 곧이어 사사, 윤휴는 위리안치되는 등 남인이 대거 실각하게 되었다. 빈 자리는 서인이 대거 차지하게 되었고 이것이 경신환국이다.[9] 송시열은 경신환국으로 남인 세력이 실각하자 귀양 생활이 풀리고 영중추부사로 임명되어 조정에서 원로 대신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때 숙종과 명성왕후는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며 송시열을 구슬렸고 김수항은 나라의 대소사를 법규에 연연하지 말고 송시열에게 물어 처리하자는 의견을 올려 윤허를 받기도 했다. 이후 송시열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김석주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4.5.4. 임술옥사(임술삼고변, 1682년)
김석주, 김익훈 등이 경신환국 이후 잔존 남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꾸민 3건의 정치 공작으로 유명견과 민암의 사건은 무고로 끝났으나 허새의 사건은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세 건 모두 정치 공작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이 일에 관여된 사람 중 전익대와 김중하는 거짓 고변으로 처형되지만 김석주, 김익훈을 처분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한다.김석주는 경신환국 이후 남인 잔당을 뿌리뽑기 위해 남인측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사찰하는 한편 함정 수사를 진행한다. 김석주가 청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자 김익훈이 이를 이어받았다. 김익훈은 김환에게 남인들에 대한 함정 수사를 지시한다. 유명견과 친분이 있던 전익대를 사주하는 한편, 직접 허새에게 접근하여 역모를 부추긴다. 이때 김환은 허새에게 자신이 역모를 일으켜 복평군을 추대하려 한다, 권대운, 오정위, 민암을 비롯한 남인의 거두들이 자신과 한패라고 주장했다. 이는 역모 사건에 남인들을 엮기 위한 거짓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환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게 되어 급히 허새의 역모를 고변하게 된다. 김익훈의 고변을 시작으로 김환은 허새 등을, 김익훈은 유명견 등을, 김중하는 민암 등을 고변하였다. 관련자들에 대한 국문 과정에서 전익대가 김환에게 지시 받은 일을 실토하였고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유명견과 민암의 건은 무고로 판단되어 이와 관련된 전익대와 김중하는 처형되었고 김환은 남인이 다시 권력을 잡은 기사환국 때 참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이를 주도했던 김석주와 김익환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김석주와 김익훈은 서인의 거물들로 왕실과도 인척관계였다.[10] 이 둘은 경신환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공신에 제수되는 등 서인이 다시 집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서인 소장파에서는 '같은 죄를 범한 김환과 전익대가 다른 처벌을 받은 것은 부당하다', '허새 이외의 단순히 불만을 표출한 사람들까지 고변한 것은 무고이다' 등으로 김익훈, 김환 등을 비판하였다. 사건의 초기 송시열은 김익훈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김석주, 김만기 등과 접촉하면서 의견을 바꿔 김익훈에 대해 옹호섞인 중립으로 입장을 바꿨다.[11] 김석주의 조부 김육과 김익훈의 조부 김장생 모두 송시열의 스승이었고 김익훈은 송시열의 제자라는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익훈의 처분을 서인 소장파와 노장파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윤증이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고, 박세채가 이에 동조하면서 젊은 서인들이 맹렬하게 김익훈의 처벌을 주청하였다.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한 윤증, 남구만, 조지겸, 유득일, 유집일, 오도일, 한태동 등의 소장파들은 소론으로 갈라 져나간다.[12] 이에 대립하여 김익훈을 처벌하지 말 것을 주장한 송시열, 김만기, 김만중 형제, 김수항, 김수흥 형제, 민유중, 민정중 형제, 이단하, 이민서, 이사명 등은 노론이라 불리게 된다. 노소 분당의 이유 중 하나는 송시열에 대한 입장차도 있었다. 소론으로 분당한 이들은 당대 대학자였던 송시열이 정치 공작 사건을 비판하지 않고 옹호한 것에 실망했던 사람들이었고 노론으로 분당한 이들은 남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인데다 송시열의 제자들이 주류였다. 소론은 애초 이 일을 기획했고 김익훈을 옹호한 김석주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처벌할 것과 이 둘을 옹호한[13] 송시열 또한 처벌할 것을 주청하였다.
숙종에게도 이는 좋은 기회였다. 숙종은 권모술수에 능했고 신하들을 서로 대립시키면서 신권을 약화시키는 방법 등으로 왕권을 휘둘렀는데 이는 경신환국 이전의 청남과 탁남의 대립에서도 보여주던 것이었다. 김석주의 처분 문제는 숙종에게 서인을 분열시키기 좋은 기회였다. 숙종은 직접적인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만을 처벌하고 사건을 기획했던 사람들에 대한 처분은 신하들의 자문에 맡기고 관망하였다. 그 결과 노론은 숙종의 기대 대로 분열되어 최종적으로 소장파인 소론과 노장파인 노론으로 분당되었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여러 대신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는데 송시열은 스승의 손자이자 자신의 제자인 김익훈에 대해 "김익훈은 신의 스승되는 집안의 자손이니, 신에게는 실지로 형제의 의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난색을 표했고 실제로 좋지 않던 건강을 이유로 사직한다.
이 과정에서 김석주는 격노했다. 상소를 올려 오도일을 비롯한 소론의 젊은 수뇌부들을 공격하여 강원도 영동 지방으로 귀양보내는 한편[14] 박세채는 글만 읽던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양반이 쇠를 금이라 부르고 도적을 아들이라 일컫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이에 김수항 등 노론이 합세하여 거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석주가 51세를 일기로 급사하면서 문제는 일단락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인은 노론, 소론이 분당되긴 했어도 범 서인이라 칭할 만했는데 이후 회니시비 사건이 송시열의 제자 최신에 의해 조정 문제로까지 번지면서 노론, 소론 분쟁은 격화된다.
4.6. 기사환국(1689년)
사직 후 청주 화양동으로 내려가 학문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던 중, 숙종이 28세의 나이로 장희빈에게서 아들(훗날의 경종)을 얻었다. 경종의 탄생은 그간 아들이 없던 왕실 입장에서는 대단한 경사였으나, 숙종이 백일도 안된 후궁의 아들을 이례적으로 갑자기 무리하게 원자로 책봉하려 하면서 문제가 커진다. 이미 서인 일각에서는 장희빈과 남인 세력, 그리고 숭선군, 동평군 등이 결탁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대해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지적한 박세채, 남구만, 김만중 등을 유배시키거나 호되게 질책하면서, 장희빈을 위해선 대신을 벌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조정은, 유상운 등을 중심으로 '전하의 나이도 젊은데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숙종을 만류하려 했지만 숙종은 막무가내였고 아들에게 원자의 명호가 내려지며 장희빈이 이때 희빈에 봉해진다. 그런데 송시열이 송나라 신종이 철종을 열 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두었다가, 신종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해 태자로 삼은 예를 들면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숙종은 격노했고 이를 계획적으로 공론화한다.[15] 조정은 "다 정해진 마당에 부당하긴 해도 속셈이 있었겠습니까?"라는 태도를 보였으나[16] 숙종은 "이 자식이 군주를 무시해서 그런거다. 놔두면 군주를 무시하는 무리가 잇달아 생길거다."라면서 계획대로 걸려든 송시열을 삭탈 관직하여 문외출송한다. 그리고 승정원과 대신, 대간들을 갈아치우면서 남인으로 정권을 바꾼다. 당시 숙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이를 이미 종묘에 다 고한 상황이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숙종이 바라던 바였다.[18] 남인 대간은 숙종에게 적극 협조하며 상대방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송시열의 목숨을 요구했고, 우선 송시열의 애제자이자 전 영상 김수항이 사사된다.
5. 최후
하지만 숙종은 '송시열은 죽여 마땅하긴 해도 절도에 안치했으면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잠시 물러서더니 인현왕후 폐위를 문제삼아서 반대하는 소론 신하 박태보, 오두인 등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해 사실상 때려 죽이고[19] 남인들의 반대까지 잠재워버린 다음에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는다. 그리고 마침내 송시열이 목표로 지정된다.중전 폐비 문제로 유배를 갔다가 다시 명을 받고 상경 중이던 송시열은 국문을 받는 대신 금부도사를 내려보내 사사하라는 처분을 받게 되었다.[20] 결국 송시열은 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한다.[21]
평생을 정치가로 살면서 학자로 살았던 것을 반영하듯 그가 사약을 들이키면서[22][23]죽기 전 제자들에게 "천지만물이 생긴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길은 오직 직(直)자 한 자뿐이니, 이것은 공맹(孔孟) 이래 전해 온 것이다"와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론)을 주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죽기 전 손자에게 자기가 쓴 상소를 나중에 올리라고도 했다. 그의 관은 널빤지로 덧대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효종의 관에 널빤지를 대게 만든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1] 임금의 음식물을 관장하는 종8품의 하급 관리.[2] 선산 곽씨(善山郭氏)[3] 한산 이씨(韓山李氏)[4] 1654년 3월 20일 족형(族兄)인 심지원(沈之源;1593-1662)에게 쓴 편지로 추정되며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5]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신편한국사[6] 해동(조선)의 땅과 하늘은 주나라의 정신을 존중하는 큰 뜻을 갖는다[7] 송시열은 귀양 중에도 학문을 연구하며 학식을 전파하였고 제자들이 그를 기려 세운 반곡서원이 거제에 남아있다.[8] 홍수(紅袖)는 원래 붉은 소매라는 뜻으로 궁녀들이 입는 옷의 소매가 붉기 때문에 비유적으로 궁녀를 가리킨다.[9]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신편한국사[10] 김석주는 김육의 손자이자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의 사촌오빠였다. 김익훈은 김장생의 손자이자 김집의 조카였다. 또한 숙종의 비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와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저자 김만중 형제의 삼촌이었다.[11]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9년(1683년) 2월 2일[12] 그러나 유득일, 유집일 등은 후에 노론으로 전향한다.[13] 김석주는 스승의 손자일 뿐더러 생명의 은인이었다. 경신환국 시기 삼복의 옥을 고변하여 보사공신 1등에 제수되었다. 이 일로 남인이 몰락하여 송시열과 그 제자들의 목숨이 살아났다.[14] 숙종이 김화로 보내려고 했는데 김석주가 너무 가깝다며 영동의 아홉 고을 중 하나로 정하자고 했다.[15] 송시열이 언급한 송나라 신종은 첫째부터 다섯째 자식들이 모두 어린 나이에 죽는 바람에 결국 6남인 철종이 뒤를 잇게 되었다. 따라서 숙종에게 자식이 아직 하나뿐이고 장성하지도 않았는데 미리부터 원자를 책봉할 이유가 없다는 시기상조론이다. 물론 중전의 소생이 아닌 이유도 크겠지만 어느 누구도 거론하지 않았는데 굳이 송나라의 고사 중에 찾아내서 상소를 올린 건 그만큼 송시열이 원자 책봉 문제에 대해 완곡한 반대의사를 피력한 것이다[16] 사실 숙종이 파놓은 함정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다들 숙종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두둔하진 못하고 적당히 말리면서 숙종이 벌이는 생쇼를 방관할 뿐이었다.[17] '종묘사직에 고한다'는 것은 선대 임금과 왕비들을 모신 사당인 종묘와 조선의 지신(地神)과 오곡의 신을 모신 사직에 제사를 지내며 고한다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헌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고 국민에게 공포하는 것과 같거나 그 이상으로 엄중한 정치적 행위이다. 따라서 종묘사직에 고하기 전에 떠드는 것은 어떻게든 허용되더라도, 이미 고한 후에는 별수 없다. 물론 숙종의 행위가 독단적이었고 국통을 따지는 유학자들은 넘어갈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숙종에게 알면서도 당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8] 실록에서는 송시열에 대한 반박상소로 한명제는 한장제를, 송진종은 송인종을 서자 출신이지만 적자처럼 키워서 즉위시켰는데 왜 뜬금없이 후대의 송나라 신종의 사례를 끌어들어오냐는 비난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경우는 극소수일 뿐이고 나라의 근본인 유교적 측면에서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고서야 용납될 수 없는 경우였다.[19] 단 이때 기록을 보면 박태보와 오두인의 절개와 의리를 강조한 걸 보면 서인 측의 윤색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박태보와 오두인은 소론이였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박태보의 아버지는 송시열의 흑역사인 이경석에 대해 쪼잔한 면을 비판한 박세당이고, 아버지 윤선거의 조서 때문에 갈라진 옛 제자 윤증의 외조카가 된다. 친외숙은 소론의 영수이고 친우였던 송준길의 제자인 남구만이고 다만 윤증은 박세당의 셋째형의 처남이고 후사가 없자 박태보가 양자로 들어갔다. 서인내에선 정적인 소론의 친족과 아들이지만 송시열이 박태보의 장렬한 죽음에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 것이라고 가족과 제자들에게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노론이나 남인편을 들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박태보는 아버지 박세당보다 더 깐깐하고 대쪽같아서 정적이 많았다. 살아있다면 송시열과 노론을 아버지보다 강도 높게 비판했을 것이고 남인들을 처벌할 것을 주청했을 것이다. 저 정도에 죽어서 노, 소론 망라해 충신이라 불러서 다행이지 만약에 아버지인 박세당보다 오래 살았으면 사문난적 낙인이 아니라 노론과 남인들로부터 간흉, 흉물이라 멸시받았을 것이다.[20] 이 처분에 대해 남인들이 복수심에 불타서 조사도 없이 그냥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차피 송시열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80 넘은 노인이자 상대 당의 영수라는 것에 대한 배려로 마지막에 갈 때 국문을 당하는 것만은 피하게 해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송시열의 존재감을 생각하면 후자일지도 모른다.[21] 참고로 이때 사약을 1사발이나 마셨는데도 죽지 않자 관례대로 금부도사가 송시열을 활줄로 교살해야 했는데 80세가 넘은 노론의 거두를 차마 그렇게 죽일 순 없었던 금부도사가 송시열에게 부디 사약을 마셔서 조용히 죽어달라고 읍소까지 하였다. 송시열도 이런 금부도사가 가여웠던지 직접 칼로 입에 상처를 낸 후에 사약을 3사발 정도 더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22] 참고로 송시열은 사약을 3번이나 마시고 나서야 죽었다. 흠좀무. 보통 사약을 먹고 바로 죽지 않으면 활줄로 목을 졸라 죽이는데, 송시열은 노론의 거두인 만큼 목졸라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약을 세 번이나 먹인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사사된 사람들 중의 절반 가량은 사약이 통하지 않아 활줄로 교살되었다.[23] 참고로 송시열이 사약이 바로 안 들은 이유는 생전에 요료법을 해서 독이 쌓였는데 이걸 중화시킨 게 무려 사약의 주 재료 중 하나인 비소(비상)였기 때문. 즉 체질상 사약을 생으로 먹으면 죽을 리가 없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