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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29 13:33:59

손권(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손권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2. 작중 행적

작중 시작 시점에서는 동오를 다스리는 거기장군.[1] 그러나 당대인들에게는 이미 사실상의 오나라 군주로 여겨지고 있다.

212년 유수구 전투가 시작되어 7만 병력을 이끌고 조조와 대치 중이었다. 유비에게 일부 빌려준 강릉 땅에 몇 배로 이자까지 붙여서 형남 전역을 돌려받을 생각이며, 유비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애당초 형남 전체가 손권이 빌려줬다는 전제 자체가 개억지라면서 분개한다. 안 그래도 열세한 전력 탓에 피 말리는 중인데 유비가 전력을 다해 돕기는커녕 입촉을 노리자 분노하지만, 유비가 21세기 역사학도였던 곽선호에게 빙의되면서 생각을 바꿔 한중을 공격해 장로를 몰아내고 한중을 점거하는데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자 안도하고 조조군에게 화살 서신으로 이를 알려 조조군을 물러나게 하는데 성공한다.

원 역사를 보면 손권이 먼저 유장을 치자고 유비에게 제안했었는데 유비가 '지금 조조와 맞서 싸우는데 같은 반조조연합인 유장을 치면 안 되고 또 유장은 자신과 동족이니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면서 군사를 동원해 길을 막고 '나는 유장을 치느니 머리 풀고 입산하겠다' 드립을 쳤었다. 그런 인간이 이제는 대놓고 유장의 통수를 치고 자기가 입촉을 하면서 손권의 통수도 같이 쳤으니 손권 입장에선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본 소설에서는 곧이어 현대인이 빙의된 유비가 당초 표면상 목적대로 유장의 구원과 장로의 정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해버렸기 때문에 그 정도로 손유동맹의 사이가 파탄나지는 않은 것으로 묘사되었고, 실제로 조조의 위공 즉위와 순욱의 자살을 손권 측에서 유비에게 알리는 식으로 동맹이 아직은 건재함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유비가 실질적으로 한중 하나만 들고 있어 여유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한동안은 기다려주고자 한다. 한중 일대가 또 형남의 기준에선 월경지이기도 하기에 누가 봐도 유비를 기다려줘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

그러나 유비가 예상보다 더 빠르게 익주를 장악해 성도 함락을 코앞에 두자 원역사보다 더 빠르게 선공을 날려 본인도 형주 파구의 후방인 육구까지 와서 지휘하고 있었으나, 예상과는 달리 유비군의 대처가 너무 빨라서 장사군의 점령이 절반뿐인 성공으로 끝나자, 단기간에 장사와 계양군까지 빼앗는 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장사의 선박을 불태워 유비군의 기동을 방해하는 한편 임상에서 대치에 들어간다.[2]

결국 유비에게 장사와 계양을 양도받긴 했으나, 손권이 원 역사대로 219년이면 분명히 배신할 것이라 확신한 유비는 이를 대비해 쇠사슬 작전을 준비한다. 인간성을 떠나서 강남 왕조는 생존을 위해 양번에 매달릴 수 밖에 없고 익주에서 형주를 지원해주는 건 장강 삽협에 가로막혀 힘들기 때문이다. 다른 때에는 제갈량이 빈틈없이 사수하니 망설이더라도 219년에 북벌이 시작되어 수비군이 줄면 (설사 유비와 아무 문제가 없었어도) 배신 가능성이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유비는 원역사의 손권을 배신자라고 생각은 하지만 손권이 죽는 순간 동오는 해체 당하는 미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기에 조조에게 조기에 멸망하지 말라고 300기의 서량 군마를 선물로 주어서 친위대의 강화를 권했다. 합비 공방전은 손권이 무려 10만 대군을 몰아 친정했으나 장료, 악진, 이전의 7천 정병에게 야습당해 손권조차 죽기살기로 겨우 도망쳤을 정도로 크게 패한 전쟁인데 하필 이 전투에서 맹활약해 손권을 구해줬던 감녕과 그 부곡들이 임상대치 과정에서 죽었기 때문에 손권이 죽을 가능성도 더 커졌기 때문이다.

결국 의기양양하게 벌인 합비 공방전에서 원역사와 다를 바 없이 장료와 악진에게 대패한다. 유비가 준 군마 덕에 무사히 도주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임상대치에서 별 성과가 없었던 판에, 적의 몇 배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한 합비 공방전마저 대패해 권위에 타격을 입는다. 이에 군민의 시선을 패전의 책임 소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고심하다 전사한 장군 진무의 장례식에 그가 아끼던 애첩을 순장하는 조치를 취한다.[3]

찬탈 준비에 모든 걸 건 조조는 자신에게 전권이 주어져야 할 분위기를 만드는 외부의 적으로 손권을 골라 2년에 한 번 꼴로 합비 방면으로 대군을 이끌고 대치 국면을 조성한다. 그때마다 호족들의 협력을 구하고 대군을 편성해 나가는 것이 위보다 국력이 약한 손오에는 큰 부담인데 조조 측에서는 적대적 공생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공세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라서 적벽처럼 실적으로 바꿀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다. 이는 손오 전체의 스트레스를 누적시키고, 무난히 확장을 거듭하는 유비를 향한 질투를 유발해 손유 동맹을 깨려는 조조의 계략이었는데 손권은 보기 좋게 넘어가 쳐들어오는 조조가 아니라 유비에게 질시 어린 시선을 던진다.

이는 조조가 손권의 성격을 간파하고 한 계책이었으며 실제 역사에서도, 또한 본작에서도 조조와 손권은 유수구에서 여러차례 대군을 이끌고 살벌하게 대치하면서 피를 보는 와중에도 계속 서신을 주고받는다.[4] 유비(곽선호)의 평으로는 만일 이 시기에 조조와 손권 사이의 서신을 보면 손권이 누구랑 동맹인지 헷갈릴 정도로 둘의 내적 친밀도가 높았다고 한다.

이 서신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유비군 참모들은 부친 손견이 천자를 구한다고 맹활약한 반동탁연합의 맹장이고, 형 손책은 생전 조조를 박살내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는데 손권이 아버지와 형의 유조를 어겨가며 조조 좋은 일만 시켜줄 이유가 무엇이겠냐며 아무리 그래도 배신은 안 할 거라 믿고 있지만, 유비는 모사들은 너무 매사를 '상식적으로' 보는 면이 있다고 혀를 찼다.[5]

217년 유수구 전투에서 제대로 조조군과 싸우기도 전에 전염병이 돌아 노숙, 능통이 쓰러진다. 그리고 서량 전쟁의 결과로 유비가 서량까지 조조군을 몰아내고 차지하면서 이제는 유비와의 역학 관계가 뒤집혔다.

노숙이 죽고 나서는 그에 슬퍼하면서도 내심 이제 오왕인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신하가 남지 않은 것을 기뻐하면서,[6] 후임으로 노숙 비판에 앞장섰던 엄준을 임명한다. 그리고 기존의 전략안을 버릴 것을 선언하고 때맞춰 북원 대치가 유비의 승리로 끝나 힘 관계가 뒤바뀌었음을 깨닫고 더이상 지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준이 도독 자리는 맡지 않는다고 물러나면서 여몽이 도독에 임명된다.[7] 이후 여몽에게 형남을 완전히 빼앗을 것을 명령하나, 제갈량이 철저히 경계하면서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대신 건업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내서 손권의 밀명을 모르는 서생들을 흔들면서 여론전이 불리하게 돌아간다.

유비가 왕을 칭했다는 소식에 자칭 거기장군에 불과한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먼저 태어난 조조, 유비가 좋은 작위를 싹쓸어간다며 울분을 토하는 한편 형주가 우리 땅인데 무슨 명분이 필요하냐며 장수들을 채근한다. 그러다 유비가 한중에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고 조조가 타이밍 좋게 표기장군 직을 내려주자 잔뜩 고무되어 유비가 양양에서 조조와 맞붙고 제갈량이 지원할 때 강릉을 대신 지켜준다(?)는 핑계로 배신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유비측을 방심시키기 위해 대도독 지위에서 물러나겠다는 여몽의 제안을 가납한다. 유비가 말 한필이 아쉬운 상황에서 몇 번이나 군마를 지원해주어 합비에서 살아나온 기억은 머릿속에서 지운지 오래.

적벽에서 함께 싸운 유비보다 맞붙은 조조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는데 이게 유비가 빙의 전에 인성질한 것도 있지만 원래 강대한 조조가 계속 잘 나가는 걸 막을 능력은 없으니 비굴하게 숙이고 한때 자기보다 아래였던 유비가 자기보다 잘 나가게 되는 건 못 참아서 어떻게든 걸어 넘어뜨리려는 심보 탓도 크다.

남양의 결전이 다가오자 지금이라도 강릉을 쳐야 한다며 성급히 움직이려는 걸 여몽과 고옹이 가까스로 뜯어 말린다. 이후 어느 정도 진정된 손권에게 유비가 남양에서 패하면 그때 전력이 비게 될 형주를 우리가 지킨다는 명분으로 비집고 들어가자는 여몽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익주까지 자기 땅이 되리라는 생각에 신나 한다.[8]

조조가 신아현 전투 이후로 219년 초반에 여남의 만총까지 형주로 이동시키면서, 조위의 동오 방어선이 상당히 약해졌는데도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 제갈량도 동오의 배신 의도를 확신하게 된다.

219년 가을 장마로 양번이 위험해지자, 사마의는 강하군을 손권에게 뺏기더라도 일단 문빙을 빼서 양번을 막자는 의견을 낸다. 그러나 조조는 그랬다가 손권이 형남의 욕심을 잃고, 북진할 거라면서 이를 기각한다.[9]

실제로 장마 소식을 들은 손권은 잠깐이나마 형남 침공 계획을 접고 조조를 쳐야하나 고민하지만 결국 오랜기간 갈망해온 형남이란 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형남 침공을 결의하나 여몽의 반대에 부딪혀 그와 설전을 벌이던 찰나 전령이 전해온 우금군 전멸 소식에 멘탈이 작살난다. 한동안 전전긍긍하며 향방을 주시하다 어떻게든 손권을 끌어들어야 했던 조조에게 대장군 관직을 제수받아 한껏 고무된 채로 조유 양측의 힘이 완전히 빠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고 양양성이 촉한군 손에 떨어졌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이제는 유비를 쳐야한다는 여몽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를 대도독으로 삼고 서성, 정봉, 반장, 주연을 부장으로 삼은 5만명의 군사를 일으켜 강릉으로 진군 할 것을 명한다.

3. 기타

간절히 작가의 전작인 아! 내가 마속이다에서 노년의 모습으로 나오던 인물인데 상대적으로 젊은 편인[10] 본작에서도 어째 젊은 시절이라도 성격이 나빠 보인다는 평을 듣는다. 유비의 평가로는 악행을 저질렀더라도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정면으로 도전해 꺾는 당당한 간웅인 조조와 달리 리스크 감수하기 싫어서 뜸들이고 간을 보다 나중에 슬그머니 조조가 걸었던 길을 답습해서 품격이 떨어진다고. 심지어 매체에서 묘사되지 않던 순장 고증까지 나와서 더 비판을 받았다. 손권이 오래 살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손권이 오래 살기는 했다고 평한 독자도 있다.

의형이나 마찬가지인 주유, 자신에게 충성한 노숙과 여몽에게도 마음 속에선 늘 그들을 의심하고 불편히 여기는 것으로 나온다. 그들의 충성심과 능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조조같은 절대적인 전제군주가 되고 싶은 손권에겐 겁먹지 않고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중신들의 존재 자체가 불편한 것. 주유와 노숙급의 배경이 없이 밑에서부터 올라온 여몽은 이 점을 잘 알고 손권의 심사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피치 못하게 '손권 맘에 들지 않는' 의견을 내야 할 때는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나 반면 대호족 출신으로 떠받들어지는데 익숙한 육손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11]

별개로 강동 호족들의 충성심은 매우 확고한데, 진한시대 이래 늘 중앙 조정에게 수난을 당해온 강동 독립정권의 군주이기 때문이다. 할거를 위한 기반 마련을 위해서라면 비겁한 짓도 주저않으며 다소 모험적일 정도로 개발 정책에 진심인 손권과, 중원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후한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강동 호족들의 의사 합의로 손씨 정권이 유지되는 것.[12]

회차가 거듭되면서 점점 혐성을 쌓고 있다가 오촉동맹 편을 기점으로 한수를 능가하는 극혐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그나마 고옹과 여몽이 말려서 당장 선을 안넘었다 뿐이지 원역사에서도 쳤었던 뒷통수를 치지 못해 안달이 난 수준으로 서술되다보니 독자들은 위나라보다 오나라가 먼저 망하기를 간절히 빌고 있다. 사실 굳이 강동을 정벌할 필요 없이 강하만 유비측이 빼앗아도 형주로 들어가는 물길이 막혀서 손가락만 빠는 신세가 되긴 한다.

조조와의 관계도 여러 번 묘사되는데, 조조와의 내적 친밀감을 '상호 간'에 느끼고 있다. 조조의 손 중모 같은 아들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한 온갖 서신에 쓰인 칭찬은 단순히 유비와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이간질이 아니라 진심으로 손권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이다. 작중에서는 후계자인 조비가 여러모로 눈에 차지 않는데다가, 직감이 가리키는 후보인 조식조차 평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 조조가 정말로 자기 자식들이 손권 정도만 했어도 걱정이 없었을 거라고 한탄까지 한다.


[1] 손권의 오왕 즉위는 221년. 오황제 즉위는 229년이다.[2] 이때 유비의 마인드는 협상에 응하려는 생각과 별개로 이 임상대치에서 손권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어 후에 재차 배신할 때 망설이게 만들 계획이다. 또한 215년이라서 곧 조조가 2차 유수구 전투를 벌일 시점이 다가오기에 손권, 노숙, 여몽 셋 다 계속 형주에 있을 수는 없다.[3] 이 일화는 정사에 기록된 실화로 후대 역사가인 손성이 임금이 할 행동이 아니라며 비판하기도 했는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 충격 받은 독자가 많다.[4] 손권에 대한 평가 중 유명한 조조의 칭찬인 "아들을 낳으려면 손중모 같아야지, 유경승(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 같구나!" 라는 말도 이 시기에 나온 말이다.[5] 그나마 유비의 모사들 중에서 손권의 진면모를 일부라도 알고 있는 것이 제갈량뿐인데, 제갈량은 형 제갈근을 통해 동오 조정의 분위기를 짐작하는데다 형주를 지켜내야 하는 입장이다보니 손권이 분명히 배신을 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6] 주유와 노숙은 손권이 어릴 적부터 손씨와 강동에 헌신해온 공신이자 대호족인 데다가 권위를 대물림했기에 둘이 대놓고 반대하면 손권도 무시할 수 없었다.[7] 엄준을 도독에 임명하려던 사유를 제외하면 모두 원 역사에서의 행보 그대로이다.[8] 완성에서 위촉이 전력 격돌하는 상황이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합비와 수춘을 삼킬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지만 강동 정권의 할거만 생각하면 지키기 힘든 합비-수춘보다 양번이 더 필요한 곳이긴 하다. 무엇보다 형남은 유비가 가로챈 자기 땅이라는 인식이 너무 확고했다.[9] 사실 손권 입장에서도 유비가 점유한 형남을 얻은 후에도 장강 방어선의 안정화를 위해 양번이나 강하를 탐낼 여지가 크기에, 강하를 비우면 손권이 선후관계를 뒤집고 강하부터 노린다는 선택지가 생긴다. 강하를 빼앗기게 된다면 조조 입장에서는 기껏 손권의 관심을 합비에서 형주로 돌려놓고 마지막 오판으로 계략을 실패하게 되는 셈이라 문빙을 빼지 못하는 것이다.[10] 182년생이므로 작품시작 시점인 213년에는 32세, 218년에도 38세로 아직 40을 안 넘었다.[11]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이 손책에게 해를 입는 일은 있었지만 그게 육손 본인의 처지를 어렵게 만들거나 하진 않았기 때문. 상급자의 미묘한 심기를 살피고 대처하는 법을 배울 기회도, 필요성도 없었다. 작가의 전작인 내마속에서도 육손은 혼자 손권의 성격에 대해 착각하다 마속(빙의)의 계략에 넘어가 손권에게 갑질을 당하고 나서야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화병으로 죽는 인물로 묘사된다.[12] 이 부분은 자신의 악행을 천하안정을 위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조조 정권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