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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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조창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2. 작중 행적
조조의 차남으로,[1] 상당한 무재를 가진 장수이기도 하다.서량 전쟁 시점엔 서른도 안 된 젊은 나이로[2] 가후와 함께 1만 병력으로 위수 남방 오장원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가후가 법정과 황충의 방어가 탄탄해 오장원을 치기 어렵다고 조언하자, 별 미련을 두지 않고 받아들이며 앞으로 있을 후계자 경쟁에서 가후를 끌어들일 기회를 엿본다. 계속 대치하던 중 조조가 공세 준비를 갑자기 취소하고 퇴각을 명하자 불만을 가지고 가후에게 말려보자고 말하나, 가후가 따르라고 명하자 별 수 없이 퇴각한다.
220년 조조 사후 북방에서 오환을 상대하던 강병들을 이끌고 업군으로 와 부친의 장례에 참가한다. 조비가 일단 정욱과 변씨의 중재로 허락은 하고, 조창도 명분이 없어서 신하로서 예를 갖춘다. 그러나 예상보다 조비 정국이 혼란스럽자 버티기만 해도 기회가 생길 거라는 생각을 갖는다. 청주병 숙청 사건이 일어날 당시 1만 단위의 청주병들이 집단 탈영한 사건인 만큼 사건이 쉽게 진압되지 않을 것이니 일단 기회를 봤다가 자신이 나서려 했지만 사마의가 단번에 몰살시켰다는 말을 듣고 실망한다.
유비의 강동 원정 소식이 들려오자 위나라 조정에서 오환 방비 병력을 일부 빼서 황하 방비를 강화하려 하지만 병력이 분산된 사이 조비가 자신을 죽이려 들 걸 우려해 이를 반대한다.
221년 유비가 절도사 체제를 시행한 후 대대적인 위나라 공격을 시작하자, 조식의 조언에 따라 유비한테 칭신한 요동의 공손씨를 막겠다면서 군사를 데리고 그쪽으로 빠져버린다. 공손씨가 수만 군사를 모아봤자 유비 본대의 위협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걸 아는 조비와 신하들은 분노했으나 명분도 옳고 직위도 높은 조창을 붙잡지 못한다. 요동 공손씨가 아무리 전술 능력이 떨어진다 해도 일단 수만 병력이 후방을 노리는 상황이라 누군가가 대신 나서야 하고, 오랫동안 유주에서 오환족을 상대로 싸워온 조창이 그 일에 가장 적임자였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생 조식과 같이 휘하 병력을 이끌고 유주로 가는데 이 시점의 조창은 자신이 왕이 될 재주도 인맥도 없음을 인정하고 조비가 유비에게 무너지면 조식을 왕으로 내세워 위나라를 재건할 계획이다.[3] 조식이 '우리가 지금 도망치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다'라고 태평하게 생각하는 걸 보고 면박을 주면서도 이런 성격 때문에 아버지(조조)가 귀여워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평한다.
강을 건너기 직전, 조비가 일을 벌인다면 도하 중을 노릴 거라 직감하고 진채를 세우기 시작하고, 이를 본 사마의와 진군이 기습은 불가함을 깨닫고 4만 대군으로 압박해온다. 동생 조식과의 설전에서 타협의 여지도 없고, 저들이 일방적으로 조창, 조식의 복종과 항복을 요구하자 결국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조창의 군재가 능하긴 해도 2만 대 4만이라는 특성상 진군, 사마의를 상대로 이기는 건 불가능했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조식을 데리고 도망치려 하지만, 조식이 자신은 남을 테니 조창 혼자 가신들을 데리고 도망치라 권하자 이를 반대하다[4] 양수가 조식을 만취시켜 납치한다.
드넓은 평야라는 점을 이용해 보병들을 버리고 오랫동안 오환족과 싸워와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들만 데리고 전력도주하고, 유주로 가는 길이 막혀 유주 국경에 남겨둔 부하들은 포기하고 청주를 통해 배 타고 요동 또는 중원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과거 원씨 형제가 요동으로 도망쳤다 공손씨에게 죽은 일을 알고 있던 조창은 이전에 유장과 손권을 살려'는' 준 전적이 있는 유비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한다.[5]
유비군에게 항복한 뒤에는 조식과 함께 업성 앞으로 와서 항복을 종용하는데, 조비가 성벽 위에 나타나서 자신들을 욕하자 몇 년간 조비에게 시달린 것에 울분이 쌓여있던 조창이 조비에게 각종 쌍욕을 퍼부어서 조비가 물러나게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전장에서 굴렀기 때문에 입이 험한 편인데 몇 년간 조비의 각종 갑질에 시달리면서 참고만 살다가 이번에 조비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 건 때문에 제대로 폭발했다고.
이후에도 30만 대군이 업성을 공격할 때 아예 자청해서 남문 공격에 나서서 맹렬하게 싸워서 뚫어버렸다. 본인 왈 원담처럼 형제를 배신해서 내응해놓고 다른 생각하다가 죽고 싶진 않기에 철저하게 나섰고, 결과적으로 위군 병졸들이 사기가 떨어진 덕에 군공을 세운다.
헌목황후 조씨의 추대로 유비가 황제에 오른 후 즉위 기념 대사면령 대상에 포함되어 사면된다. 다만 유비는 후일 유관장 등이 사라지고 세대교체가 되고 나면 분명 이를 약점 삼아 조창 조식 형제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고 걱정한다. 에필로그에서는 유비 사후 어떻게 되었는지 나오지 않으나, 다음 세대 군주가 원역사에서 유하기로 소문난 유선인데다 냉철한 편인 제갈량 등도 유비의 뜻을 어기면서 조창, 조식을 굳이 죽여야 할 이유는 그들이 반란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없기 때문에 괜한 짓만 하지 않았다면 평온하게 수명을 다했을 것이다.
3. 기타
조조의 자식들 중 가장 우수한 무재를 가진 걸로 평가되는 인물이나 형과 다름없이 한계는 명확하다. 조조가 서량 전쟁에서 북원 대치 중 퇴각할 때도 전혀 그 의도를 짐작하지 못했고 하북 조위가 청주병의 몰살로 조위가 원정 동력을 상실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또 조조의 아들 아니랄까 봐 이 인간도 성격이 좋지 않은 묘사가 많다.그래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동생을 대신 내세우려 하는 등 조비보다는 인성 문제가 덜한 편이다. 탁월한 직감을 가진 조조가 조비를 후계자로 정한 뒤에도 조창의 군권을 유지시킨 건 이런 조창의 면모를 고려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번 정이 들면 꽤 잘 챙겨주는 편이고 나름 책임감이 강한 편이다.
성깔은 조비만큼은 아니어도 조조를 닮아서, 자신들의 운명이 원씨 형제처럼 되었단 생각에 심란해하던 동생 조식과는 달리 유비에게 전향한 이후에는 아주 적극적으로 조비를 공격하며 복수에 성공했다. 물론 본인도 전향해놓고 공도 못 세우고 어물쩍 거리면 나중에 찍소리도 못하고 처리당할 거라는 위기감 때문이었다고. 유비가 황제가 된 뒤 조창과 조식을 연좌하지 않고 풀어준 명분도 조창과 조식의 공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창의 판단은 현명했다고 봐야 한다. 조진도 조창과 조식을 보고 조씨 가문이 아주 망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1] 조조가 유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조앙과 조삭이 일찍 죽어서 조창의 실질적인 순번이 4남에서 차남으로 올랐다.[2] 조창의 생몰년도는 정확하진 않으나 187년~191년 사이로 추정된다.[3] 그러면서 과거 원소의 차남 원희가 이복동생 원상을 끝까지 따라갔다는 점에서 불길한 데자뷰를 느끼기도 했다. 아무 능력도 없이 따라가기만 원희와 달리 조창은 군사적 능력은 확실했다는 차이가 있지만.[4] 사적으로 함께하며 정이 든 것도 있고, 조조 생전 후계자에 일체 거론되지 않은 조창과 달리 조식은 조조가 오랫동안 후계자로 간을 보던 인물이라 그나마 정통성이 있었다. 위나라를 위해 죽기에는 형인 조비에 대한 분노가 너무 컸다.[5]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바인 블러드후프가 처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마가타 그림토템의 쿠데타를 막기에 역부족인데 아군인 호드는 믿을 수 없거나 믿기에는 세력이 약한 종족들 투성이라 결국 '믿을 수 없는 아군'보다 '명예로운 적'인 제이나 프라우드무어에게 의탁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