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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7 14:15:19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파일:빈 세로 이미지.svg
장르 대체역사, 빙의
작가 간절히
출판사 KW북스
연재처 문피아
연재 기간 2024. 12. 09. ~ 연재 중

1. 개요2. 줄거리3. 연재 현황4. 특징5. 등장인물
5.1. 유비군
5.1.1. 익주5.1.2. 형남
5.2. 서량5.3. 익주(舊유장)5.4. 동오5.5. 조위
5.5.1. 조정5.5.2. 군부5.5.3. 기타
5.6. 형북
6. 개변된 역사7.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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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삼국지 대체역사물 웹소설. 작가는 간절히.

약칭은 유비쟁패.

2. 줄거리

촉빠였던 곽선호

유원지에 생긴 싱크홀에 빠져 후한 말 군웅 중 한 사람인 유비의 몸에 빙의하게 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략

강대한 조조, 견고한 기반을 가진 손권과 대결해 천하쟁패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3. 연재 현황

문피아에서 2024년 12월 9일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2025년 2월 3일부터 유료화 되었다.

4. 특징

중국 중세사 석사 학위까지 받고 대학원을 졸업한 20년 진성 촉빠 곽선호가 웹상에서 촉빠들이 위빠오빠들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상황을 한탄하다가 싱크홀에 빠져서 입촉 직전의 유비에 빙의하는 소설.[1]

유독 작중의 군주들의 행동 양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조가 말년에 찬탈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손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유비를 배신하는지, 유비가 왜 중원의 비극을 막을 가망성이 있는 인물인지를 하나의 사건이 생길 때마다 설명한다.

곽선호가 빙의한 시점은 유비가 익주 가맹현에서 한중의 장로를 친다면서 출병은 안하고 와병하는 척 군대와 물자를 모으던 건안 17년(212년)쯤 시점이다. 빙의한 곽선호는 일견 보기엔 제갈량의 융중대가 주장한 입촉이 합리적 전략 같지만 실제론 단점이 명확하다는 점을 파악하고[2][3] 입촉 대신에 유장과의 약속대로 장로의 한중을 공격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5. 등장인물

5.1. 유비군

주인공 유비의 세력권. 동오와 함께 얻은 형남 삼군에서 시작해 세력을 키운 다음 한중을 차지, 한중을 기반으로 해 다시 서량에 영향력을 뻗치고는 형남과 한중에 있는 주력군 대부분을 동원해 입촉한다. 즉 213년 기준 현재 세력권은 한중과 형남. 익주 북쪽인 파군과 서량 일대도 점령하거나, 동맹을 통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15년 기준으로 형남을 2군 분할, 익주를 정복했다.

세력으로서의 목표는 당연히 조조 격파와 한실 부흥. 이를 위해 실행중인 대전략은 제갈량이 세운 융중대. 입촉 직전의 동원력은 한중에서 2만. 형남 2군에서 3만. 익주에서 7~8만명 가량이다.[4][5] 조위 혹은 동오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3만여의 병력이 형남에 남겨졌다.

익주 정복 후 조조의 역적 짓에 저항하는 이들을 받아들여 모병군을 편성하고, 수송선을 위주로 200척이 넘는 대선을 건조해 수군 양성에도 노력하고 있다.[6]

내부 구조는 유관장 삼형제를 필두로 거병 초기, 객장 시절에 합류한 이들[7], 형주계[8], 익주계[9]로 구성된다.

5.1.1. 익주

한중을 먼저 차지하고 서량에서 마초 구원에 성공한 뒤 관우, 장비를 소환하고 위연을 한중태수로 배치한 후 입촉을 시작했다. 임상대치 이후 유장의 항복을 받아 근거지를 성도로 옮겼으나 북벌의 중심지로는 거리가 먼 성도보다는 3주를 잇는 교통 요지 한중이 적합하기에 익주가 안정화되면 다시 한중으로 치소를 옮길 예정이다.

원 역사에서 조조가 장로를 정벌한 이후 한중 백성들을 몽땅 이주시키는 바람에 유비가 점령 이후 한중을 처음부터 재개발하느라 시간과 돈이 빨려들어 형주 쪽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유비 생전에는 개발이 안 되서 제갈량 시기에 가서야 군사도시로 자리잡는데 여기서는 한중을 먼저 차지한 덕분에 즉시 전력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마초가 이끄는 반조조 군벌을 지원하거나 상용으로 넘어온 악진군을 영격하는데 유용하게 써먹었다.

입촉 직후부터 유비의 후원 아래 익주인들이 주도하는 대대적인 개발 사업이 추진되어 원 역사에선 촉한 말기에나 안정 되는 남중 지역도 일찌감치 수혜를 입을 전망이며 형주계와 익주계의 대립도 유비라는 중재자 아래 없거나 원역보다 크게 완화될 전망이다.

유비는 융중대 실행 시 한중의 수로를 이용해 상용-양양으로 이어지는 북벌을 계획하고 수군을 대거 양성한다.

5.1.2. 형남

유비가 적벽대전 이후 주유를 위시한 동오의 지원을 받아 얻은 땅. 인구가 많은 북부는 조위의 영역에 있으나, 유비가 기반을 다지고 여러 인재들을 모은 중요한 지역이다. 원 역사처럼 손유간 분란이 될 소지가 높은 땅인데 유비(곽선호)는 익주를 오롯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조조 사망에 맞춰 익주와 형주에서 동시 진격하기까지 몇년만 붙들고 있으면 된다 여기며 영영 자기 것으로 만들 생각은 최소한 217년 시점까지는 하지 않고 있다.

형주 절반 가량만 차지한 상태에서 관우, 장비, 유봉을 한중으로 소환하여 전력이 더 줄었다. 전력이 줄어든 상태에서 지리적 이점을 거머쥔 손권이 언제든 쳐들어 올 수 있고, 이걸 격파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함을 아는 유비는 최대한의 대비책을 마련한다.

거리상 동오의 대군이 닿기 전에 구원이 불가능한 장사와 계양 방어는 포기,[34] 형주 서남쪽 끝의 영릉엔 심지 굳은 등지를, 익양 끝의 임상현으로 이어지는 개울에 보루를 세워 동오의 공세를 격퇴하면서 원 역사보다 대등한 상황에서 장사, 계양군을 분할하고 후일을 대비하여 쇠사슬 작전 등을 입안했다.

5.2. 서량

관도대전에 승리한 조조 산하에서 통치되다가 마초가 이끈 관중제장의 난을 통해 독립을 원했으나 결국 패배해 조조에게 굴복한 지역. 그러나 마초가 재차 거병해 유비와 동맹을 맺고 계속되는 전투 끝에 다시 반 조조 진영으로 돌아섰다. 강력한 기병과 군사력이 강점인 땅이나 경제력이 부족하고, 이미 패배한 마초를 포기하고 조위파로 돌아선 인물들이나 한수처럼 비협조적인 군벌들이 많아 군사를 모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유비는 혹여 조조가 공세를 가해오면 무리하게 야전을 벌이지 말고, 성을 이용해 수비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면서 그동안 달려올 한중의 유비군과 협격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일단 마초는 기성에 머무는 한편 서량에서 천수군 다음가는 요충지인 상규성을 유비군에게 넘겨주며 방어 체계를 구축한다. 이후 한수가 죽고 염행이 서량으로 돌아오면서 유비가 관우를 파견했고 그 결과 위수 북쪽의 군현들은 모두 조조를 지지하게 되었지만 기성과 상규 근처의 호족들은 계속 유비와 마초를 지지하며 안정적인 기틀은 마련된 상태다.

유비군은 관우, 장비, 조운 같이 우수한 기병 지휘관들이 포진해 있음에도 기병 전력이 열세해 이를 살리기 힘들었는데 서량과 연대해 우수한 군마를 제공 받게 되면서 숨통이 틔였다. 군마 한 마리가 아쉬운 손오와의 외교에도 쏠쏠한 역할을 한다.

5.3. 익주(舊유장)

후한 13주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주. 풍족하고 크지만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낙양에서 내려온 유언의 뒤를 이어 유장이 통치하고 있다. 유장이 외부 진출을 하지 않은 데다가 폐쇄적인 곳이다보니 외부에선 이 곳의 정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장의 친위부대인 동주병은 유비가 바짝 경계할 정도로 정예병이나 익주 토병들의 전투력이나 사기는 평범하다.

유비의 공세 방식이 원역보다 훨씬 치명적으로 바뀌면서 부각되지 않았던 동주병들의 약점도 드러나고 있는데 잘 훈련되었다곤하나 결국 보병이라 기병에게 전략적 우위를 양보할 수 밖에 없고, 지방 호족군대나 이민족들과 싸워본 경험 밖에 없는 동주병 지휘관들은 대기병전, 패배 후 재수습 등 실전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갈고 닦을 수 밖에 없는 부분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하다. 원역에서야 똑같이 보병인 적과 관문 끼고 싸워 약점이 상쇄되었지만 유비가 서량에서 기병을 보충하고 기병 운용 노하우가 풍부한 숙장들을 동원해 샛길을 활용해 찌르고, 다소 위험을 감수하며 빠르고 몰아치자 이상의 약점이 두드러져 고전을 면치 못 한다.

근거지가 성도 인근이고, 그 주변에도 험한 관문이 많다보니 미묘한 관계인 익주 호족들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싸우기 보단 근거지 인근 관문에서 지키면 된다는 생각에 퇴각이란 선택지를 너무 쉽게 고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문제점.

5.4. 동오

손유동맹을 유지하는 양주의 세력. 200년대 후반부터 적벽대전-남군 공방전-유수구 전투까지 조조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이는 조조측 사정 때문에 말미암은 것인데 차근차근 찬탈 작업을 진행중인 조조는 장기간 조정을 비우거나, 적벽 이후 다시 패배해 권위가 하락하는 일을 지양해야 했다. 큰 피해 없이 명분 챙겨서 빠르게 복귀할 수 있는 WWE 상대가 필요했는데 주요 세력 중 조조의 본거지인 기주 업성에서 가장 가까우며 기병 전력이 약해 반격을 통한 전과 확대에 한계가 분명한 동오는 가장 적절한 상대였다.

과거 형주 공방전 이후 남형주의 남군 일대를 유비에게 빌려줬으나 이는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이라 언제든 마찰이 될 수 있다. 압도적인 수군 전력에 파구의 물길을 쥐고 있어 유비측은 동오가 한 번 칼자루 거꾸로 잡기로 마음 먹으면 급소에 베이고 생각해야 하는 처지. 유비는 장사와 계양군까지야 빼앗기더라도 무릉, 영릉이라도 지켜서 형익병진에 필요한 안전성을 확보하려 한다.[59]

5.5. 조위

작중 시작 시점에는 위공 즉위 이전이므로 조조군이었으나 213년 위공으로 즉위했다. 하북 4주(유,기,병,청) 서주, 예주, 낙양, 장안을 차지한 작중 최대세력. 작중 유비는 초반의 전 병력이 5만여 내외, 손권 역시 7~10만 언저리의 병력을 동원하면서 큰 부담을 느끼는데, 조조는 애당초 승부를 낼 생각도 없는 유수구 전투에만 수만의 병력을 동원하거나, 1만 정도의 병력은 가볍게 찔러보는 식으로 투입한다.[69][70]

찬탈을 위해 국내에서는 얼토당토 않은 황족 살해, 상식을 벗어난 공국 선포, 무의미한 전쟁 등 갖가지 폭거를 벌이고 있다. 유비는 원 역사 유비군이 이 시기에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승천할 수 있던 이유 중에 일부는 조조의 이런 폭주에 있다고 설명할 정도이며, 본작에서는 원역사의 거진 1.5배에 달하는 대성장을 거두어 조위의 대적자로 떠오른다.

5.5.1. 조정

5.5.2. 군부

5.5.3. 기타

5.6. 형북

남양과 양번을 중심으로 조조가 차지했으나, 한중군 동쪽의 삼군(서성, 상용, 방릉)을 뜻하는 동삼군은 상용을 중심으로 지형적 이점을 통해 명목상 조조의 영토일 뿐 반자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한중의 안정성과 형주 공략을 위해 요긴한 지역으로, 장로는 유비군을 피해 상용으로 도피했고, 조조도 상용을 통해 한중을 위협하려 해서 유비 역시 상용을 중시했다. 결국 유비와 조조군의 일전 이후 암묵적으로 양다리를 걸친 중립 지대가 된다.

유비가 형주 남쪽을 문제가 되리라 알면서도[85] 유지하는 건 이 형북의 세력구도 때문이다. 형주와 중원을 가로지르는 대별산맥과 한수에는 과거 중원에서 조조를 피해 도망친 잔당들이 매우 많아 조조의 영역인데도 반 조조 여론이 드높다. 조조 역시 긴 시간을 들이거나 이들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토벌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세력이다. 형주에서 북진할 때 이들과 연결만 된다면 사기높은 대군과 현지의 민심을 거저 얻어 바로 중원의 허도, 낙양, 여남 같은 핵심지역을 위협할 수 있다. 유비는 임상대치 기간 동안 이들과 연락하는데 성공해 반 난민에 불과한 이들을 제대로 된 게릴라군으로 조직한다.

본래의 융중대가 서량에서 장안을 향한 공세였다면, 유비는 익주에서 한중을 통해 상용과 양양으로 이어지는 동북전선 공세를 계획한다.

6. 개변된 역사

7. 평가

전작 '강감찬 천지를 껴안다'의 실패로 절치부심하던 간절히가 비장의 수로 '유비 빙의'를 선택했다는 평가가 많다. 간절히 작가의 경우엔 그 동안의 삼국지물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선택한 적은 많았어도 이렇게 삼국 군주 중 하나인 유비 같은 거물을 주인공으로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92] 어쨌든 이 덕분인지 연재 15화만에 선작 1100명을 넘고 유료화 첫날 구매수 1000을 찍는 등 초반부터 화제는 제법 끌어 유지하는 중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작품과 비교해도 유비가 워낙에 경박하고 격식없는 말투를 사용해서 원 역사 유비의 출생(유협 출신)에 현대 젊은이 곽선호의 영혼이 빙의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너무 어색하다는 불평이 있다. 속으로 하는 거야 현대인 특이라 봐도 되니 상관이 없는데 양부의 고모를 대할 때처럼 대놓고 그러는 경우가 많다보니 문제로 삼는 것. 사실 이는 백이잇 시절부터 제기되는 작가의 고질적인 문제기도 하다. 결국 양부 고모 파트는 유비가 정중하게 말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1] 박사 못 딴 것에 자격지심이 있는지 임상대치 중에 박사였으면 또렷한 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2] 유비가 유표 사후에 형주 장악에 실패하였고, 적벽대전에선 주역이 아닌 객장으로 참여하면서 손권에게서 남군을 빌리는 형식으로 형남 장악을 시작하면서 시작부터 꼬여버린 상태였는데, 입촉 과정에서 의인으로 소문난 유비의 평판이 크게 깎인데다 3년간 파촉 장악에 집중하느라 위-오 전쟁, 위-서량 전쟁 등 천하의 대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한 시점에 관여할 수 없었으며 유비가 파촉을 점령한 직후 위가 장로가 차지하고 있던 한중과 파동을 점령해버리고, 기껏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한 형남 4군 중 3군은 익양대치로 오에게 양보하는 등 여러모로 손해를 많이 봤다. 인재 시점에서도 손해인 게 유비를 따라 입촉을 보좌하던 책사 방통이 전사함에 따라 형주를 방어하던 제갈량과 장비를 불러들여야 해서 형주를 관우 1명에게 맡겨야 했고, 한중공방전의 주역으로 맹활약한 황충과 법정도 220년에 죽기에 210년대 초반에 3년이나 되는 시간을 파촉을 차지하는 일에 낭비할 수 없다.[3] 사실 일단 큰 틀에서는 제갈량의 전략도 어느 정도 따른 것이긴 하다. 제갈량은 익주와 형주를 아우르고 서쪽의 융족(혹은 양주 군벌 마초)와 접촉하면서 관중으로 유비가 진격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 대전략 자체는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 사실 그렇기 때문에 원 역사에서도 방통이 바로 유장 참수작전으로 입촉에 드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자고 제안했는데, 문제는 유비가 그걸 거부하고 벌인 익주 정벌전쟁에 시간을 너무 끌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익주에서 유비군을 관찰한 여대가 유비군이 대패해 백제성으로 도망갔다는 증언을 하는 등 유비 본인이 익주의 군사적 역량을 잘못 재는 실수를 한 것이다. 주인공이 이 점을 대놓고 지적하면서 원 역사 유비의 선택을 까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정한 것이나 유비의 군사적 능력이 대놓고 별로라는 서술한 것으로 보면 간절히 작가 역시 유비가 굳이 방통의 중책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실책이라고 보는 것으로 보인다.[4] 중원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있는 조조군 수뇌부에서도 이제 유비는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사실 익주와 한중도 점령된지 얼마 안된지라 개발도 제대로 안된 참인데도 이런 말이 나온 것.[5] 다만 조조는 유비의 세력은 과거 원소에 비견할만하나, 인구밀집지대가 많은 하북에 비하면 그 최대치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려면 엄청난 행정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평가했다.[6] 원래 융중대는 익주 방면에서는 서량-장안으로 이어지는 공세를 주장하나, 본작에서는 서량을 이미 유비의 동맹인 마초가 차지했고, 유비가 할거와 세력 확장보다 본래 목표인 조조 격파에 더 무게를 두기에, 중원의 핵심 지역을 바로 칠 수 있도록 좀 더 공세 방향이 북동쪽으로 바뀌었다. 작품 외적으로 생각하면 이전작 내마속에서 옹양주-장안-홍농-낙양순으로 북벌을 진행했기에 중복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7] 조운, 진도, 간손미 등[8] 제갈량, 방통, 황충, 위연 등.[9] 황권, 법정, 장송 등.[10] 바로 물에 걸어두면 삭아서 매년 수천근의 쇠를 녹여 새로 갈아 끼워야 할 뿐 아니라 오가 뻔히 알고 대비할 게 뻔하니 몰래 만들어서 잘 보관하고 있게 했다. 219년에 호우가 발생하고 북진해야 할 상황이 오면 자동으로 어디에 써야 할 지 알게 되니까.[11] 병호제는 병사의 질, 소집 속도에선 징병제보다 압도적이나 노예병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처우가 열악했다. 로마처럼 일정 기간 지나면 전역 시켜서 토지를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땅뙈기 약간 던져주는 것 말고는 보상은 일절 없는데 복무는 죽거나, 늙어서 쓸모없어질 때까지 종신토록 이어지고 자기 대에 끝나는 게 아니라 대대손손 물려 내려가야 하며 탈영시 일가족 전체를 연좌제로 처벌했다. 이토록 열악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적으로 기피 대상, 멸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병호에 속한 자들이 상층부에 반감을 가지는 일이 늘어났다.[12] 본래 역사에서도 방통은 유비의 의견에 다른 의견을 내기보다는 군말없이 충성하는 측이었으나, 익주 정벌을 두고서는 유장의 장수들을 꺾고 부성에서 술에 취해 기뻐하는 유비를 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만을 보이는거 아닙니까?' 라고 불평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등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유비가 방통에게 화를 냈다가 다시 불러들이면서 봉합되긴 했다.[13] 방통이 입촉을 찬성했단 기록도 있지만 본래 방통의 상책은 정병만을 모아서 성도를 기습해 제압하는 것인데 유비는 이를 거부하고 백수관 등의 성도 주변부터 차례대로 제압하는 중책을 썼다. 방통 입장에선 속전속결하자는 상책도 이미지 관리, 도박수라는 이유로 거절하고는 시간 걸리는 중책을 채택하더니, 아직 끝난 것도 아닌 마당에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즉 입촉 찬성이든 반대든 간에 자기의 상책이 채택되지 않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던 것.[14] 물론 이는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공법인 기산도를 택했을 뿐, 방통이 생각하는 상책은 익주에서 4~5개월 더 시간을 들여서 5만 이상 대군을 단번에 동원해 여러 진군로에서 동시에 공격해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조가 융족 등의 이민족을 대거 징병해서 먼저 가 있던 관우와 마초를 밀어붙이는 바람에 겨우 2만 내외의 병력만이 준비된 상황이라 상책을 쓸 수 없어서 기산도를 선택한 것.[15] 유비-손권 동맹 파탄에 누가 더 큰 책임이 있냐는 논쟁은 지금까지도 큰 떡밥거리긴 하지만 일단 형주 사령관으로서 손권에 대한 관우의 대처가 결코 현명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16] 악진과의 교전 묘사를 보면 중년을 훨씬 넘긴 관우는 적진을 한참 휘저으면서도 쌩쌩한데 부하들이 먼저 지쳐서 돌격력이 약해진다.[17] 작중 유비는 이를 '우당탕탕'이란 수식어로 정리한다.[18] 유장이 동주병을 전부 성도 주변으로 물려서 외곽 지역엔 정예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다.[19] 이 고민의 가장 큰 이유가 된 것도 관우였다. 만일 관우가 번성 공방전 당시 우금과 3만 위군 포로를 무리하게 돌보지 않고 전부 죽였더라면 번성의 조인과 서황 등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지만, 관우는 끝까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패배했다.[20] 당연히 무장인 장비가 서예사의 위인인 종요를 능가할 순 없지만 자신만의 개성있는 필체 + 일찍이 만인지적으로 조위와 손오 양쪽에서 인정받은 장군의 글씨라는 점에서 화제성은 충분했다. 이후에 종요가 장비의 사본을 보고 난 후의 반응을 보면 이런저런 단서 빼도 달필 소리 들을 수준은 되는 모양.[21] 실제로 법정의 계책에 관우가 대놓고 면박을 주자 앞장서서 분위기를 수습한게 장비였다.[22] 물론 유비는 그 보군 2천을 기성의 난을 틈타 잠입시켜 마초의 가족을 구출할 계획이어서 사양했다.[23] 원역사에서도 위연은 한중을 수비하는 독한중(督漢中)으로 발탁되었다.[24] 정확히 말하면 주창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정사에서 언급되긴 하지만 단순히 부장이라 나오지 이름은 안나온 탓에 주창이란 인물 자체는 정사에서는 허구 취급 받는다.[25] 다만 이에 대해선 이름 그 자체 때문에 못 쓴거 아니냐는 드립도 있다.[26] 다만 정사에서도 유비를 설득할 때 일부러 화살비 속으로 걸어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깡이 없는 건 아니다.[27] 물론 본인도 이것이 상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방통과 마찬가지로 5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해 여러곳에서 들이치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고 있으나 조조의 발빠른 대처 덕에 대군 동원이 불가능해지면서 차선책으로 진창도를 제안한 것이다.[28] 실제 역사상으로도 한번 물길을 타고 내려가면 다시 군대를 되돌리기 쉽지 않아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각된 상용점령작전을 기획한 사람인 만큼 어느 정도 이런 기책이나 도박을 즐기는 성격으로 작가가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29] 형주 사람들은 수로의 주권을 지키지 못하면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한다고 한다. 미방과 부사인도 비슷했을 것이며 혹여 싸우고 싶었어도 아래 병사들 사기가 다 떨어진 마당에 뭘 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30] 실제 역사에서도 213년, 마초가 기성을 공격할 때 장로는 양앙을 대장으로 삼아 마초를 돕게 했고 마초가 기성을 점령하자 그의 명령대로 위강 등 위나라의 관리들을 죽인다.[31] 유언과 동주병들이 들어온 이후, 중앙에 세금은 안 내고, 그들의 갑질로 인해 시장도 사라져서 물자가 거의 익주 안에서만 고이고 쌓였다. 때문에 익주민들은 100배 가치의 화폐가 발행되어도 연 단위로 쓸 식량을 창고에 쟁여둔 상태라 물가가 그렇게 폭등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32] 사실 그렇다고 조조에게 도망칠 만한 상황도 아닌 게 이미 한 번 형주에서 조조 밑에 들어갔다가 조조가 적벽대전 이후 유비군과 동오군이 밀고 들어오는 형남 4군을 복속시키라고 강제로 파견하는 바람에 그대로 다시 도망자가 되었다. 즉 대놓고 버려진 셈이니 조조한테 돌아가기도 애매했던 셈.[33] 원 역사에서는 아예 남진하는 조조군의 진입로에 토성을 쌓아버리는 대공사로 조조의 기를 죽였으나, 본작에서처럼 한중군민들이 경계를 유지하지 못한 탓에 패했다.[34]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조조의 위왕 즉위로 인해 폭발한 반조조 인사들이 형주를 통해 유비군과 협력하면 손해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역사에서 익양대치 이후 동오는 더욱 관우를 경계할 정도로, 유비군의 기세는 매서웠다.[35] 감녕이 항장 출신이란 딱지 떼어내고 오에서 확고한 위상을 점유하는 건 합비에서 손권을 구하고, 유수구 전투에서 특공으로 손권의 체면을 크게 올려준 다음부터다. 이때까지의 감녕은 쓸만한 돌격대장 정도의 위상이었다.[36] 제갈량은 서주 낭야에서 굴러들어와 황씨와의 혼맥을 통해 형주의 호족, 명사들과 줄을 만들었고, 방통은 남군 출신 토박이다. 방통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입촉 이전 유비의 인재풀의 다수를 차지한 남양, 양양 출신들 사이에서 제갈량이 우뚝 서긴 쉽지 않았다.[37] 유비도 이에 대해 굴릴만한 장수가 많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며 속으로 미안해했다.[38] 유비는 가는 길에 무장을 하고 여비를 넉넉히 쓰라고 돈많은 비단 장수로 위장시켰는데, 유비의 서량 개입에 의한 나비 효과로 인해 서량과 조조 세력권의 치안이 생각보다 나빴기 때문에 도적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39] 파구에서 내려오는 수로가 유비쪽에 압도적으로 불리해 당대의 명장 누굴 데려와도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는 구도라 거리상 동오에 가까운 장사와 계양은 포기하는 걸 상정하고, 남쪽 구석에 있어 구원이 가능한 영릉을 지켜내는 데 집중하기로 한 것. 원 역사의 영릉태수 학보는 어찌어찌 버티나 싶더니 여몽의 블러핑에 넘어가 항복해버렸다.[40] 배송지의 기록으론 10만. 작중에선 5만 내외로 서술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전근대 병력 서술이 늘 그렇듯이 이 당시 10만을 호왈십만으로 본듯 하다.[41] 비록 적인 양부가 계속 호족의 지원을 받아 밀렸지만, 양부의 친척 일곱이 참살당하고 양부도 죽기 직전에 살아남는 혈전이었다.[42] 뛰어난 학력과 가문, 소수민족의 핏줄까지 가졌다. 마초는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며 강족의 피가 섞여 이민족들과도 연줄이 있었고, 무엇보다 군재도 뛰어났다. 만일 동관대전에서 이겼다면 적벽에서 이긴 손권처럼 군주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 다만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까지 되며 승승장구했지만 마초는 그렇게 되지 못했기에 실패한 버락 오바마라 한 것.[43] 마초는 역사에서 거병 와중에 갑자기 병주목을 자칭한 일이 있었는데 본래부터 조조의 방어라인을 우회해 병주를 통해 장안을 칠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44] 사실 양부 입장에서는 기성 전투에서 일족이 몰살당하다시피 했는데 이제 와서 일족을 다 죽인 마초와 화해하라는 것도 말이 안되는 소리긴 하다. 애초부터 양부는 조예 시절까지 조위에 충성하면서 조예에게 온갖 충언을 아까지 않았던 골수 친조조파-조위 충신이기도 하니 일찍부터 한실에 대한 기대는 버렸다고도 볼 수 있다.[45] 원 역사의 양부는 조예 시기 구경에 오를 정도로 출세하나, 끝내 조예가 자신의 충언을 무시하자 홧병으로 죽는다. 즉, 여기서는 조예가 즉위하기도 전에 죽었으니 원역사보다 빨리 죽은 셈.[46] 왜 그렇게 되냐면 양부 고모의 논리대로 조조가 충신이라면 헌제가 외척인 동승에게 몰래 조조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의대조 사건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 원역사에서는 마초가 이를 알지 못해 그냥 말없이 죽여버리지만 여기서는 의대조 사건의 당사자인 유비가 있다보니 완벽하게 카운터를 쳐서 양부의 고모를 데꿀멍 상태로 만들어버렸다.[47] 원역사보다 1년 빨리 침공이 벌어졌다.[48] 사실 둘의 사이를 일반적인 사위와 장인으로 보기 힘든 것이 한수와 반목하던 염행을 한수가 반강제로 화해 겸 붙들기 위해서 자기 딸을 줘서 사위로 만든 것이다. 염행은 결혼은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에게 항복해 도망쳐버렸고, 이 때 한수의 딸을 데려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49] 명분은 사위로서 장인의 조문을 가는 것.[50] 명목상으론 8천명에 달하는 한수의 세력을 흡수했지만, 그들은 전부 한수 밑에 있던 호족의 사병일 뿐, 염행이 믿을 직속병은 조조에게 항복할 때 전부 분해되었다.[51] 유장의 선대인 유언이 자사를 목으로 바꿀것을 영제에게 건의하고 익주목으로 임명받았던 것을 계승한 것이다.[52] 이 동주병은 유언이 익주에 몰려든 난민들을 이용해 만든 정병으로 타 군벌들의 정병에 지지않는 강병이었다고 한다. 수도 최소 3만~5만에 달해 누구라도 얕보기 어려운 전력이었다. 원역사에선 이 동주병들이 유비를 막아서느라 유비 옆에 방통, 법정 같은 우수한 참모가 있었고 유장의 세력을 알음알음 사전에 강탈했음에도 연 단위로 고전했다.[53] 동주병이 전원 보병이고 높은 사기와 별개로 천단위 정예 기병과 싸워본 경험은 없다는 걸 감안하면 성도에 남은 병력 3만을 전부 내보내 영격하고, 낙성 방면으로 합류시키게 상책이었다. 낙성이 뚫려 성도 인근의 경작지들이 다 넘어가면 성도성만 쥐고 있어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54] 이걸 본 장송은 자신이 없었어도 유장은 알아서 망했을 거라며 어이없어한다.[55] 물론 정말 이긴다는 확신은 없었으나, 황권은 이대로는 익주 지방세력이 무력하게 무너질 게 뻔하다고 짐작하고 있기에 자기 목을 걸고 허장성세를 부린 것이다. 다만 유비도 황권에게 동주병 주력군을 맡기면 1만 명 정도의 유비군으로는 못 버틴다 확신할 정도니 2만의 유비군이라도 치열한 혈전을 벌일 수 있었을 것이다.[56] 물론 이때 낙오된 병력이 많아 합류에 성공한 건 5천 정도였으나 지금 당장 추가 군사가 필요했던 유비에게는 나중에 올 7~8천 보다는 당장 있는 5천이 더 중요했기에 칭찬을 들은 것.[57] 단순히 황권과 장임이 유비에게 투항할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며 이들이 유비를 물리치는 것을 더 걱정했다. 이들이 유비를 물리치면 그 공을 명분삼아 익주의 군권 자체를 가져갈 텐데 외부인으로서 성도 인근의 기름진 토지를 차지하고 토착 세력과 알력을 빚어온 동주병, 그 동주병의 주인인 유장 입장에선 침략이나 그거나 다를 게 없었다.[58] 유비가 장송에게 단순히 안부 편지를 보내는 방식이었지만 어쨌든 경계 대상 1호인 유비와 서신을 주고받은 것이니 황권은 이 기회에 장송을 조지고자 했다. 그러나 장송이 진짜 내통을 했다면 이렇게 대놓고 편지를 주고 받겠냐며 반박하자 황권도 아무 말을 못했고 일단 사형은 피한 채 옥에 수감된다. 이마저도 유비가 양회와 고패를 풀어주면서 유장에게 해명하는 서신을 보낸 덕에 곧장 석방된다.[59] 장사, 계양군을 넘겨주는 선택지도 쉬운 게 아니다. 이 2군이 개발이 덜 된 무릉, 영릉과 달리 이때부터 형남의 곡창지대로 활용되고 있었고 여기를 내줘버리면서 형주에서의 북진이 보급 부담으로 힘들어졌다. 파구를 점거하고 있는 동오가 이쪽으로 들어가는 지원군을 손쉽게 차단하고 순식간에 대군으로 밀어버릴 수 있어 정말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었다.[60] 손권의 오왕 즉위는 221년. 오황제 즉위는 229년이다.[61] 실제 역사를 보면, 손권이 먼저 유장을 치자고 유비에게 제안했었는데 유비가 '지금 조조와 맞싸우는데 같은 반조조연합인 유장을 치면 안 되고 또 유장은 자신과 동족이니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면서 군사를 동원해 길을 막고 '나는 유장을 치느니 머리 풀고 입산하겠다' 드립을 쳤었다. 그런 인간이 이제는 대놓고 유장의 통수를 치고 자기가 입촉을 하면서 손권의 통수도 같이 쳤으니 손권 입장에선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62] 또한 215년이라서 곧 조조가 2차 유수구 전투를 벌일 시점이 다가오기에 손권, 노숙, 여몽 셋 다 계속 형주에 있을 수는 없다.[63] 인간성을 떠나서 강남 왕조는 생존을 위해 양번에 매달릴 수 밖에 없고 익주에서 형주를 지원해주는 건 장강 삽협에 가로막혀 힘들기 때문이다. 다른 때에는 제갈량이 빈틈없이 사수하니 망설이더라도 219년에 북벌이 시작되어 수비군이 줄면 (설사 유비와 아무 문제가 없었어도)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다.[64] 손권이 무려 10만 대군을 몰아 친정했으나 장료, 악진, 이전의 7천 정병에게 야습당해 손권조차 죽기살기로 겨우 도망쳤을 정도로 크게 패한 전쟁이다. 감녕이 중용받는 것도 이 전투와 이후 유수구 전투에서 용장의 면모를 보여준 덕이었는데 하필 감녕과 그 부곡들이 죽었으니 손권이 죽을 가능성이 더 커진 셈이다.[65] 유비군 참모들은 부친 손견이 천자를 구한다고 맹활약한 반동탁연합의 맹장이고, 형 손책은 생전 조조를 박살내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는데 손권이 아버지와 형의 유조를 어겨가며 조조 좋은 일만 시켜줄 이유가 무엇이겠냐며 아무리 그래도 배신은 안 할 거라 믿고 있다.[66] 실제 역사에서도 손권이 나중에 주유, 노숙, 여몽, 육손 등의 도독들을 평가한 바가 있었는데 노숙이 여러 부분에서 잘한게 많으나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줘서 통수를 맞은 건 실책이라고 평가하여 주노여육 네 도독 중 가장 평가가 낮았다. 물론 노숙도 할 말이 있는데 작중에서도 언급되지만 강동과 형주를 잇는 장강 수로가 동오에 압도적으로 유리해서 막강한 수군으로 언제든 손쉽게 찔러 내려갈 수 있었고 수군이 약한 유비측은 여기 대응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호구라서 그냥 넘겨준 게 아닌 것.[67] 유비가 장사, 계양쪽을 양보할 생각이 있는 것과 별도로 아직 익주를 떨어뜨리지도 못한 상황에서 영토를 할양해버리면 아랫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뻔히 알면서 강짜를 놓은 것.[68] 원 역사보다 입촉이 빨리 진행되어 임상대치 역시 익양대치보다 빨리 진행되었을 터라 감녕이 분투했을 2차 합비 공방전이나 유수구 전투는 물론 (원 역사에서는 익양대치 이전이었던) 환성 전투조차 벌어지지 않아서 감녕의 활약상이 상당히 줄어들어버렸기 때문.[69] 또한 본인들의 부담은 최소화되는 이민족 징발도 적극적으로 행해서 본군은 2,3만 정도만 동원하고도 서량에서 4~5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한 유비군을 수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70] 유비는 이를 두고 후일 중원이 흔들리면 감당 못할 짓을 벌인다고 평한다. 조조의 업적 중 대표적인 것이 이민족 토벌로 인한 국경 안정인데, 본인의 공을 덮고 있는 것.[71] 말이 공작이지 기주 10개 군은 군사경제적으로 핵심지역이기도 하고 일반적인 왕공작의 봉작 영역을 한참 넘어서서 사실상 한실을 찬탈하겠다는 예고나 다름 없었다. 비유를 하자면 큰 공을 세운 장군이 수원, 화성, 성남, 군포, 안양, 오산, 용인, 평택, 여주, 안성이라는 경기도 대부분을 자기의 땅으로 만든 꼴이라고. 실제로 이후 선양으로 가는 길을 여는 찬탈자들이 이런식으로 왕공작을 받아 선양을 받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기도 했다.[72] 진군과의 대화로 유비는 그저 십상시 때문에 한실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나 조조는 당시 황제인 영제가 어떤 패악질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봤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조 시점의 판단일 뿐 유비도 영제-헌제 시기에 한실이 패악질을 저지른 죄업이 있다는 건 인식하고 있었다.[73] 유엽이 제안한 서량-형남 정벌. 서량은 현지 호족들이 여전히 눈치 게임하는 가운데 마초는 간신히 기성과 상규성만 확보한 상태라 조조의 대군이 도착하면 단숨에 저울이 기우는 형국이었으며, 형주는 남쪽만 유비 소유인 상태에서 2번에 걸쳐 군사를 차출해 익주로 보낸지라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쳐내려 가면 어느 정도 버티더라도 결국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74] 후한에서 50을 넘긴 황제는 군웅에서 시작한 초대 황제 광무제와 헌제 2명 뿐이다. 40으로 내려도 2대 황제 명제 한 명 추가될 뿐이다. 장성해서 즉위한 황제도 3대 장제가 마지막이다. 아무리 의학 수준이 낮은 고대라지만 황제가 14명인데 정상적으로 국가라면 나올 수 없는 수치다. 외척과 환관으로 대표되는 후한 정치의 난맥상이 그만큼 심각했다는 거고 조조와 조비 부자는 외척과 환관을 모두 죽이거나 제어하여 유협의 목숨도 보전해 주어 54세까지 살 수 있게 했다. 제위는 가져갔을 지언정 황폐해진 장안에서 핍박받던 유협을 구해 부족함 없이 살게해줬고 사마씨처럼 목숨을 빼앗지도 않아 명제 이후 200년만에 천수를 누린 황제로 만들어줬으니 (황후, 귀비, 자식을 잃고 제위도 가져다 바친 헌제의 의사는 어떠했든간에)조조 부자 입장에선 잘 챙겨줬다 할 수도 있다.[75] 막말로 자기들도 헌제가 말릉이나 성도에 가서 군사와 벼슬을 포기하라고 하면 극렬히 거부할 거면서 자신한테는 그렇게 안한다고 역적이라고 모욕한다는 것. 사실 본작의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맞설 것을 결심한 이유는 조조가 역적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승자로 남을 경우 조조의 악행이 하나의 승리 공식으로 남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동오 역시 역적 소리는 명분일 뿐 최소한 그 산하의 호족인 고옹, 육손 등은 중앙 조정에서 강동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손권을 모시고 있다.[76] 원소는 살인마이며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헌제가 제명에 못 죽었을거라며 진심으로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원소의 맹진학살보다 더 거대한 스케일로 벌어진 서주대학살에 대해선 조금도 죄책감이 없다.[77] 사실 이 부분은 본 소설의 시계열이 좀 꼬인 상태인데 본래 순욱의 자결은 한창 조조의 위공 즉위 논의가 진행되던 212년에 있었던 일이고 조조의 위공 즉위는 213년에 있었던 일이다. 아마도 이 세계관에서는 소식이 뒤늦게 전달됐거나, 혹은 조조가 위공을 칭하자 순욱이 그제서야 죽은 듯 하다.[78] 여기서 대놓고 유비를 추켜세웠다간 유비 소속 출신이던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져 모가지가 날아갈 판이니 어쩔 수 없긴 했다.[79] 관우는 변수가 적은 힘 승부, 단일전장에서는 강하나, 변수가 많고 분산되는 전장에서는 약한데 하필 형주가 딱 이런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 조조군은 이통, 문빙 등의 우수한 지휘관을 대거 동원했다.[80] 원역사에서도 유수구 전투 1년 뒤인 218년에 사망한다.[81] 보통 조등의 양아들이자 조조의 친아버지 조숭이 본디 하후씨였는데 조등에게 입양되었다고 알려져 있어서 하후연이 조조의 사촌동생 정도로 여기지는 경우가 많은데, 패현 조씨와 하후씨가 가까운 사이는 맞았지만 정말 조숭-조조 가문과 하후씨의 관계가 혈연 관계 였는지 어땠는지는 지금도 설이 분분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조숭 문서 참고.[82] 유비는 이를 보고 역시 군웅할거의 시대를 살아남은 자 다운 담력이라고 평가했다.[83] 사실 조홍도 염행, 곽회, 장합이라는 상당히 화려한 포진을 갖추기는 했으나, 수군으로 싸우게 되면 촉한의 수군 에이스를 맡은 둘을 이기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84] 제갈량에게 귀부한 호족 진거는 과거 형주자사 유표 밑에 있던 왕찬의 죽음을 근거로 들면서 유비 세력에게 귀부한다고 둘러댔다.[85] 원 역사에서도 방통 등은 형주는 익주와 교통도 불편하고 관리도 안되니 포기하자는 의견을 냈었다.[86] 그래도 실 역사에서는 동주계의 유력인물인 방희를 상대로 파군쪽을 두고 자웅을 겨룰 만큼 장로는 유장에게 있어서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유장 시기엔 파군 일대는 장로 측 인사가 더 많았다고 할 정도.[87] 한황실의 충신을 자처하는 이상 유비는 조조가 내리는 각지의 군벌 토벌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이들도 객관적으로 보면 자기 마음대로 장군이며 왕을 자칭하는 역도들이기 때문.[88] 죽서기년에는 요순시대의 선양이 상당한 정쟁을 거쳤음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89] 유비군은 관우가 이끄는 수백명(최정예 오환돌기는 고작 수십) 외엔 정예병이 없어서 처음 돌격에서 악진을 잡지 못 한 이상 결정타를 입힐 수 없었고, 조조군은 정예병의 규모에서 우위를 가졌으나 병력 규모는 유비군과 대동소이해 적이 방어로 일관하는 이상 뚫어내기 힘들었다. 모험을 할 수도 있지만 산으로 둘러쌓인 상용의 지형 특성상 모험이 실패하면 퇴각 시 리스크가 너무 크다.[90] 지방 소군벌에 불과한 자신들의 사병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 거대 군벌 군대를 이길 자신은 없고, 양측 모두 병사들이 약탈을 하지 못하게 단속하고는 있었지만 군대가 머무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의 생산 활동이 완전히 막혀버려 졸지에 말라가고 있어서 관망할 수도 없는 참이었다. 그래서 신의가 저것들은 대체 언제까지 싸울 거나며 한탄하기도 했다.[91] 오히려 황권을 대표로 해서 대놓고 유비를 쳐야된다고 주장하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우유부단한 유장 덕에 유비가 대처할 시간을 벌었다.[92] 삼국지 관련 작품이 4개(연중 포함)인데, 처음 두개의 작품은 아예 가상인물이었고 실존인물도 마속과 간옹(연중작인 삼국지: 신도부터 시작하는 교주생활의 주인공)으로 거물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는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