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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2-04 21:00:16

위빠


삼국지 팬덤

1. 개요2. 특징3. 상세4. 비판
4.1. 실질적인 통일을 이루었다는 과장4.2. 조조 과장4.3. 조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축소4.4. 유비를 필요 이상으로 비판4.5. 정사 왜곡
5. 기타

1. 개요

삼국지위나라는 사람. 빠와는 일단은 다르지만 범위가 일부 겹친다. 오래 전부터 촉한을 좋아하는 이들과는 불구대천으로서 끝없이 갈등하고 있다.[1] 나름 3대세력의 일원인 오빠는 3인자라서 그런지 밀리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바리에이션으로 빠도 있다.

위빠의 대부분이 조조이기도 하다. 당연히 조조빠일수록 그 조위를 멸망시킨 진빠와는 거리가 더 멀어진다. 진()을 이라고 부르며 조롱하는 중. 반대로 진빠는 조조를 로 부른다.[2] 다만 사마의는 조위의 충신설과 조위의 역적설이 둘 다 존재하는 양면적인 평가도 있는데다 위빠 자체가 명분론 집착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어서, 위나라를 선호하면서 사마의도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사마씨 아들들[3]부터는 확실히 관심도도 떨어지기 때문에 진빠만의 영역으로 보는 편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위빠로는 조조를 숭앙한 마오쩌둥이 있다.#[4] 한편 일본에서는 예전부터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21세기 들어서 일본에서 만든 삼국지 관련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위빠 성향이 상당히 묻어나 있다.[5]

2. 특징

그 근본이 조위정통론인 사람들이다.

삼국지 관련 창작물 삼국지 조조전이나 만화 창천항로를 아는 위빠는 대체로 이 작품을 좋아한다. 문인과 학자들로는 국내의 이문열[6], 중국 현지에서는 이중톈 교수가 대표적이고, 역사적인 인물로는 마오쩌둥이 유명하다.

과거에는 명분론 때문에 조조왕망이나 동탁과 동급의 악당이자 대표적인 역적으로 여겨졌으나[7][8] 현대에는 명분보다 실질이 중요하다는 생각, 좀 더 근본적으로는 도덕적 가치가 쇠퇴함에 따라 현세에서의 패권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진 탓이라고 보여진다. 삼국지연의로 대표되는 고전문학 전통의 권선징악적 필체자체를 고루하고 식상한 것으로 보고 싫어하여, 그러한 방식의 안티테제가 되는 조조에게 호감하는 것에 가깝다.

3. 상세

위빠의 대부분은 명분, 인의, 도덕 같은 명분론에 입각한 태도를 지양하고 실리를 지향하지는 태도를 지닌다.[9] 그러므로 삼국시대 타 국가들에 비해 실질적으로 크고 강한 국력를 기른 위나라를 찬양하자는 논리를 취한다. 허나 모든 위빠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위나라가 좋다기 보다는 단순히 명분론만을 싫어하여 위빠를 자처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은 명분론을 내세우고 촉한을 찬양하는 기존 삼국지 문화를 고리타분하다고 반감을 가져서, 그 안티테제로서 위나라를 좋아하게 된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똑같이 실리를 지향한 오나라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걸 보면 역시 근본적인 이유는 결과론적인 성공과 패권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워낙 옛날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보다는 촉한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지라, 문학 등에서 당연히 촉의 인물들이 부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위의 명장들이 촉의 명장들보다 훨씬 과소평가 되는 경우도 많고 인지도도 낮으며 조조를 희대의 역적중 하나로 비하하는 단어인 망탁조의란 사자성어도 있다. 심지어 삼국지 연극 때 조조 역의 배우가 관객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 이는 조선시대 때도 마찬가지인지라 적벽가에서도 조조군이 불탈 때 조조를 원망하며 타죽었다는 대목도 있고, 간사한 사람을 조조 간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조조를 욕으로 사용하는 기록도 많다. 전통놀이에서도 조조잡기놀이라는 것이 있을 정도, 위를 높이는 풍조가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로, 유교적인 이념이 약해지고 사회전반에 도덕보다는 이해타산을 중시하는 사회분위기에, 마오쩌둥 등 중국 권력자들의 조조 띄워주기로 인해 부쩍 증가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은 비단 삼국지연의 뿐 아니라 고전문학 전반을 대하는 현대인들의 평가의 전반적인 흐름이 그런 쪽으로 가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후술하겠지만 당시 민중들의 보편적인 정서를 골자로 해서, 나관중을 필두로 여러 문인들의 손을 거치며 거쳐 탄생한 문학이며, 당시 삼국시절을 기억하는 문인과 서민들의 보편적인 사관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를 높이려는 소위 위빠의 행각은 되려 "불의한 권력자에 대항한다"는 삼국지연의의 근본적인 사상에 대한 반발을 정당화려는 방편으로 초기기록인 진수의 삼국지 정사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이들은 역사의 고증을 문제 삼지만, 실질적으로 삼국지연의를 "이상적 민본주의"의 지향에서 "현실권력 획득"의 주제로 끌어들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10] 위빠라 불리는 이들이 정사에 집중을 쏟으면서 실제로는 삼국지연의에 대해 거의 무리수에 가까운 재해석과 재구성을 가하는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보수 계열인 경우가 많다. 헌데, 조조&조위에 대한 덕질이 보수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지금이야 그 인기가 식었을지 몰라도 한국에서 한때 조조와 조위의 인기가 상종가를 칠 때를 돌이켜 보면 진보 성향의 팬덤도 상당했다. 이는 조조라는 인물이 당대 기준으로 구체제의 모순을 청산한 개혁 성향[11]의 군웅이기에, 보는 관점에 따라선 '구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캐치프라이즈를 갖고 있는 진보 이데올로기에 친화력 있는 코드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도덕이나 인권 같은 요소는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가치이지 사회체제의 변동을 중요시 하는 구좌파 성향의 진보파에게 있어서는 부차적인 요소다. 당장 명목상 진보파인 마오쩌둥&중국 공산당이 조조를 새시대를 개창한 혁명가니 반봉건 민중주의자니 하는 식으로 찬양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치다. 이렇게 조조가 부각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진보파의 재조명과 선호를 받았던 역사적 인물들로 역성혁명론을 주창했던 맹자나 법가의 대부 한비자, 조선의 정도전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진보파가 생각하는 근대 의회 민주주의, 민중주의, 개혁, 혁명, 자유, 평등 같은 진보적인 요소들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이렇게 일부 진보파가 조조를 진보주의자로 재해석했기 때문에 유비촉한 세력 같은 경우는 구왕조인 후한을 계승한다는 기치를 들었다는 이유로, 원소는 명문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고 어떤 정책을 폈는지 제대로 확인이나 교차 검증도 하지 않고 구체제를 옹호하는 수구 꼴통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물론 서구&맑시즘식 발전사관의 하위 개념인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을 통해 고대 중국의 인물들을 논하는 건 애초에 코미디에 가깝기에 이런 평가는 부당함에 틀림없으며 서주 대학살 같은 악행을 저질렀으나, 둔전제 등 임시방편으로 그걸 어느 정도 상쇄시키긴 했으며 동탁일파 때문에 초토화 된 낙양과 장안을 복구했다.

4. 비판

위빠는 조조 개인에 대한 빠심이 심하여 일부 팬덤 사이에서는 조조의 악행을 어쩔 수 없다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조조가 비판받는 이유는 다 있다

4.1. 실질적인 통일을 이루었다는 과장

삼국지 팬덤에서 위빠 측 일부가 자주 주장하는 내용 중 하나는 "위나라는 실질적으로 천하를 통일한 세력"이며, 촉한과 오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지방 정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위나라가 인구·국토 면적에서 가장 컸던 것은 사실이며, 후한 말의 기반을 가장 많이 이어받아 생산력과 인재 면에서도 우위를 점했다는 점도 인정된다.
그러나 이 주장을 '사실상 통일'로 보는 데는 몇 가지 반론이 제기된다.

첫째, 촉한과 오는 각각 독자적인 황제를 세우고 수십 년간 위나라와 대등한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인구 40% 이상, 국토 60% 이상이 위나라 밖에서 별도의 정권을 형성한 상황에서 이를 단순 지방 정권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이다. 실제로 위나라는 제갈량의 북벌로 지속적인 압박을 받았고, 제갈량 사후에도 흥세 전투에서 촉군에게 패배한 적이 있다. 오나라와의 합비 공방전에서는 위가 여러 차례 승리했으나, 조비의 남정이나 석정 전투처럼 오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삼국은 서로 침공보다는 방어전에서 주로 승리하는 구도를 유지했다.

둘째, 위나라가 촉한을 정복한 것은 263년으로, 멸망(265년) 직전의 일이며 사마씨가 이미 실권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등애의 기습 성공 등 우연적 요소도 컸다는 해석이 있다.

셋째, '위나라 통일 = 사실상 통일' 논리를 적용하면 서진 역시 오호십육국 난세의 서막에 불과하거나, 후한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위나라는 후한을 계승한 정통성을 주장했듯, 서진도 위를 계승했다. 또한 중국 역사에서 하북(화북) 제패 세력이 천하를 통일한 경우가 많았지만, 명나라·남송처럼 양쯔강 이남 기반 세력, 원·청처럼 다른 지역 기반 세력이 통일한 사례도 존재한다. 따라서 하북 중심 논리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삼국 시대를 '위나라 중심 통일기'로 보느냐, '세 정권의 장기 대립기'로 보느냐는 해석 차이이며, 정사 기록과 연의의 관점 차이, 각자가 중시하는 기준(실리·영토 vs 명분·지속성)에 따라 평가가 갈린다

4.2. 조조 과장

조조의 능력이 출중한 것은 사실이나,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던 유비와 손권 역시 각기 다른 강점을 가진 인물들로 평가받는다. 특히 가문 배경을 고려할 때, 당대 최고 권력자 중 하나였던 조등의 후손으로서 비교적 탄탄한 기반을 가졌던 조조와 달리, 유비와 손권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출발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비: 몰락한 황족의 후예라는 상징적 자산 외에는 실질적인 기반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실 부흥'이라는 일관된 명분을 통해 인재를 모으고 끝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는 단순한 행운이 아닌 고도의 정치력과 인내의 결과로 해석된다.

손권: 손견과 손책이 닦아놓은 기반을 물려받은 2세대 지도자이나, 당시 불안정했던 강동의 호족 세력을 결속시키고 수성(守成)을 넘어 제국을 건설했다는 점에서 경영 능력을 높게 평가받는다. 많은 2세대 군주들이 수성에 실패했던 전례를 고려하면 손권의 정치적 역량은 결코 조조에 뒤처진다고 보기 어렵다.

조조보다 시작은 나빴으나 결과는 좋은 인물 또한 존재한 한고제 유방, 광무제 유수, 홍무제 주원장 등은 조조에 비견되거나 그 이상의 군사적·정치적 성취를 거둔 인물들로 거론된다. 특히 진시황의 군현제 확립이나 당 태종의 치세 등은 중국사에 끼친 영향력 면에서 조조의 업적을 상회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물론 각 영웅이 처했던 시대 상황과 초기 자본의 차이가 있으므로 단순 비교는 신중해야 하나, 조조만을 독보적인 존재로 치켜세우는 편향된 시각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4.3. 조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축소

소수 조조 옹호론자들 가운데는 서주에서의 대규모 학살이나 관도대전 이후의 포로 처형 문제를 축소하거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만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정사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조차 특별히 두둔하지 않았을 정도로, 당대 기준에서도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행위들이다.

특히 서주에서의 학살은 군사적·정치적 실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장기적으로 조조 세력에게 유리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로 인해 조조에 대한 반감과 공포가 확산되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인재와 백성들이 남쪽으로 이동해 유비나 손권 세력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제갈량, 미축같은 서주 출신 인물들의 행보를 보면, 조조에 대한 거리감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관도대전 이후의 포로 처형 역시 “관리와 식량 문제 때문에 불가피했다”는 설명이 제시되곤 하지만, 같은 기준을 다른 인물들의 행동에는 훨씬 엄격하게 적용하는 경우도 있어 형평성 논란이 따른다. 설령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대규모 포로 처형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비판적인 시각이 유지되고 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하면, 조조가 천하 통일 직전까지 갔음에도 강한 저항에 부딪힌 배경 중 하나로, 그의 강경한 통치와 잦은 강압적 조치들이 누적된 부작용을 지적하는 견해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4.4. 유비를 필요 이상으로 비판

일부에서는 “조조는 칭제하지 않았으므로 한나라의 충신이다”, “반대로 유비야말로 헌제가 살아 있었음에도 칭제했으니 역적이다”라는 식의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여러 문제점이 지적된다.

먼저 조조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헌제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황제의 권한을 크게 제약했고, 궁정 내 사건(동귀비·복황후 사건 등)에서 보듯 황실 인사에 대한 처분 역시 조조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평가가 많다. 이 점에서 단순히 ‘칭제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조조를 충신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또한 조조가 위왕에 오른 것 역시 한 고조가 제시한 “유씨가 아닌 자의 칭왕 금지” 원칙과 충돌한다는 지적이 있다. 후대에 조위 정권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실권자가 먼저 왕에 책봉된 뒤 황제 자리에 오르는 사례가 반복된 점을 고려하면, 이를 찬탈의 전 단계로 해석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한편 유비의 칭제를 한나라에 대한 반역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위나라 측의 논리에 따르면 헌제의 선양으로 정통성이 위에 넘어갔으므로 유비와 손권의 칭제는 모두 ‘역’이 된다. 반면 촉한 측의 논리에서는 그 선양이 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며, 헌제가 이미 사망했다고 인식된 상황에서 황통을 이을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유비의 즉위는 한 황실의 계승을 표방한 것이라는 해석이 제기된다.

실제로 당시에는 “황제는 한 명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강했고, 위·촉·오 삼국은 각각 서로 다른 논리로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위는 선양을 근거로, 촉은 혈통 계승과 찬탈 무효론을 근거로, 오는 ‘황제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논리로 칭제를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헌제의 선양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정통성 판단이 달라지며, 어느 쪽이 더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해석이 갈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유비의 칭제는 단순한 권력욕의 표현이라기보다 당시 정치적·명분적 환경 속에서 선택된 하나의 해법으로 볼 여지도 있으며, 동시에 조조를 단순히 ‘충신’으로 규정하는 해석 역시 많은 논쟁점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5. 정사 왜곡

일부 팬덤이나 독자층에서는 ‘정사’를 근거로 조조를 높게 평가하고 유비·제갈량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다만 이런 담론 가운데는 실제 정사 『삼국지』의 서술을 충분히 검토하기보다는, “연의는 미화, 정사는 냉정”이라는 도식에 의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예컨대 “정사에서 유비는 무능하고 위선적이다”, “조조는 정직하고 솔직한 인물이다”, “제갈량은 정치만 잘한 문관에 불과하다”와 같은 평가가 종종 제기되지만, 이는 정사의 실제 서술과는 거리가 있다는 반론도 많다. 유비의 ‘위선적 이미지’는 오히려 연의의 서사적 연출에서 강화된 측면이 크다는 견해가 있으며, 반대로 조조가 권모술수에 능했다는 평가는 정사에서도 확인된다.

제갈량의 경우, 연의에서 군사적 능력이 과장된 측면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사에서 그의 능력이 낮게 평가된 것은 아니다. 정사의 저자인 진수와 주석을 단 배송지 모두 제갈량의 정치·군사적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정사 기준으로 보면 제갈량은 별것 아니다”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990년대 이후 일부 대중 담론에서는 조조를 영웅적으로 재평가하고, 유비와 제갈량을 상대적으로 폄하하는 해석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곽가 역시 ‘천재 참모’ 이미지로 크게 부각되었으나, 이후 정사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이미지가 과장되었다는 평가도 함께 제기되었다.

제갈량의 북벌에 대해서도 “국력을 무리하게 소모한 전쟁”이라는 평가가 있으나, 실제 기록을 보면 모든 원정이 동일한 성격의 총력전이었던 것은 아니다. 1차 북벌(가정 전투)의 실패는 분명한 타격이었지만, 이후 원정들 가운데는 국지적 성과를 거두거나, 상황이 불리해지자 비교적 빠르게 철수한 사례도 있다. 또한 3차 북벌 이후에는 장기간의 정비 기간을 두어 국력을 회복하고 내정을 정비한 기록도 확인된다.

오장원 전투 역시 장기 대치 끝에 제갈량의 병사로 종료되었으며, 사서들 사이에서도 촉군의 형세가 일방적으로 붕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전반적인 북벌 과정을 보면, 제갈량의 전략은 제한된 자원 속에서 점진적으로 압박을 시도하고, 무리하다고 판단되면 철수하는 방식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제갈량의 북벌을 단순히 “국력을 탕진한 무모한 전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소국의 현실 속에서 일정한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지닌 군사·정치적 시도로 평가해야 한다는 견해도 설득력을 가진다. 실제로 그의 사후에도 민간에서 자발적인 제사가 이어졌다는 기록은, 그가 단순한 이념적 상징을 넘어 현실 정치가로서도 일정한 신뢰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되기도 한다.

5. 기타

조위의 찬탈 행각에 대해서는 아직도 호불호가 갈린다.

물론 당시 한나라는 썩을대로 썩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는 한 황실의 부흥을 기치로 내건 유비 세력도 한나라에 문제가 있다는 점만은 인정해서 촉과를 시행하는 등 기존의 한나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내기도 했다.

누군가는 조위의 찬탈시작으로 인해 황제의 대한 생각이 달라져서 팔왕의 난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다른쪽에서는 어처피 조조가 아니었어도 사람이란 욕망의 생물이라 언젠가는 반드시 찬탈이 일어났다고 한다


일본의 삼국지덕후들 중에서 상당히 많이 보이는 편인데, 일본의 삼국지 창작물에서는 주로 위빠 성향 작품이 많이 보인다. 창천항로, 삼국지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 등.[12] 또한 일본인이 쓴 삼국지 관련 서적들을 봐도 대부분 조조나 위나라에 우호적 평가를 내리는 서적이 많다. 그 외 조조를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에 대입해서 묘사하는 해석도 종종 나타나는 편. 보통 일본에서 노부나가는 '새 시대를 연 혁명아, 마왕, 초인' 이미지로 많이 묘사되는데, 조조에 이런 이미지를 대입해서 묘사하는 경우가 꽤 보인다.[13]

소위 정사 기반임을 내세우는 작품인 창천항로조차도 "맹장 하후돈"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작품들의 묘사는 삼국지연의에 안티테제를 자처하는 일이 많은 위빠들조차도 결국 삼국지연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코에이삼국지 시리즈 팬들에게는 아무리 위빠라도 위나라로 플레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한다. 삼국지의 여러 이벤트들이 위나라에게 너무 유리하게 돌아가는 데다가 뛰어난 능력치의 문, 무관들이 너무 많은터라[14] 위나라 선택시 난이도가 급격하게 하락해서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게임이 초면인 사람이 아닌 한 차라리 다른 약소국가나 적당한 촉이나 오를 선택해서 플레이하게 되며, 어떤 시리즈에서든 190년 시나리오를 제외하면[15] 사실상의 최종보스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상으로 틀린 것은 없고 실제로 인재도 풍부했고 국력도 가장 강했다.[16] 그래서 위나라 플레이어는 이 게임을 처음 해보는 사람 아니면 게임을 날로 먹는 사도세력 이라고 하며, 실제 위빠들도 조조세력으로 게임을 진행했다가 너무 쉬워서 촉빠로 전향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물론 촉도 엄백호(...) 등에 비하면 매우 쉬운 편이지만[17] 일부 시리즈를 제외하면 노가다를 얼마나 해야 하느냐에 따라 세력의 난이도가 결정되는지라 그래도 가장 적당한 촉과 오가 선호된다.

[1] 그 시초를 조위정통론 vs 촉한정통론으로 본다면 거의 1800년간 싸우고 있는 셈이다.[2] 다만 이 별명 자체는 그냥 언어유희에 가까운 편이라, '속 좁은 조조의 모습' 등을 언급할 때 자주 쓰이는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굳이 조조를 까지 않더라도 최근 삼국지 팬덤 사이에서 두루두루 많이 쓰기는 하며, 오히려 세대 차이에 따라 갈리는 느낌도 있다. 웬만큼 강성 위빠가 아니고서야 조조가 능력은 출중할지언정 도덕적이지는 않은 사람이라는 것까지 부정하는 경우는 드물어서 한 번씩 위빠조차 자학 개그를 치는 경우도 많고.[3]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4] 물론 그렇다고 유비를 까내린 건 아니고 유비에 대해서도 상당히 고평가했다.[5] 실제로 황석영이 2000년대 중반에 삼국지를 번역할 때 서문에서도 조조와 위나라를 높이는 경향은 일본에서 두드러진다고 언급하며, 이는 현세에서의 패권을 중시하는 풍조가 조장한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6] 그가 쓴 이문열 평역 삼국지로 100만부를 판매해 국내 위빠들을 굉장히 많이 양성시켰다.[7] 조조의 만행은 오늘날로 치면 총리나 장관에 해당하는 인물이 대통령의 직임을 월권, 공갈협박하고, 자신이 퇴임한 후에는 자식을 통해 아예 강제 하야를 시킨 것과 다름 없다. 이것은 왕-국민으로 주권의 대상만 바뀌었지 정당하게 주어진 권력을 마음대로 빼앗는 전형적인 역적의 면모이다.[8] 단 옛날에도 무조건 싫어했다고 생각하는건 오해인게 청나라 시절 조익(赵翼)이라는 역사학자는 "조조는 한나라가 혼란할 때 한나라와 교체했으나 사마의는 위나라가 강성할 때 위나라를 힘으로 찬탈했으니 엄연히 다르다" 라고 하거나 모종강은 조조는 왕자들을 해치고 황후를 죽였으나 사마의는 단지 어질지 못한 자인 조상만을 해친거라 엄연히 사마의와 조조는 다르다고 말할 정도로 조조에 대한 평가는 옛날부터 크게 엇갈렸다.[9] 하다못해 명분을 중요시하더라도 실리보다는 덜 중요시하는 정도이다.[10] 현실에서는 강경 발언 등으로 사이다 이미지를 만들어 지지를 얻는 포퓰리즘으로 집권한 스트롱맨들이 나타났는데 2020년대 기준으로 탄핵되거나 연임에 실패하거나 아예 암살된 아베 등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 체계의 스트롱맨 지도자들은 대부분 정치무대의 뒷편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11] 그러나 이마저도 과장된 평가고, 무엇보다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근대 서구식 개념을 고대 사람인 조조에게 뒤집어 씌우는 격이니 어폐까지 있다.[12] 일본에서 비교적 초기에 만들어진 삼국지 관련 미디어믹스와 오늘날에 나오는 미디어믹스를 비교하면 확실하게 손바닥을 뒤집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제의식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다. 카츠마타 토모하루 삼국지창천항로를 비교해보자.[13] 물론 '개혁자 조조' 이미지는 한국의 고우영 삼국지에서도 묘사된 바 있지만, 고우영 삼국지는 일본의 위빠 창작물처럼 조조를 무슨 완벽한 '초인'이나 '새 시대를 연 초월자' 수준으로 묘사하지 않는다.[14] 조조 본인은 모든 능력치가 거의 만땅이고 무력만 다소 모자란 수준으로 매 시리즈마다 능력치 총합 1위를 마크하는 장수다. 오죽하면 깡패같이 강하다고 조건달이라고 부를까.[15] 아직 본격적으로 인재가 모인 것도 아니고 옆동네가 넘사벽으로 강한 점도 있다. 반동탁 연합은 무시하자 자동으로 진행하면 조조가 옆동네한테 먹히는 경우가 다반사. 다만 유저가 잡을 경우 초반만 잘 버텨내면 마찬가지로 답이 없다.[16] 다만 역사적으로는 외부 세력과의 분쟁으로 촉이나 오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게임상에는 외부 세력이 거의 등장하지 않으므로 실제 역사보다 더 강한 셈이다.[17] 특히 영웅집결 같은 시나리오는 위촉오 셋이 가장 깡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