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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13:17:22

위빠


삼국지 팬덤

1. 개요2. 특징3. 상세4. 비판
4.1. 실질적인 통일을 이루었다는 과장4.2. 조조 과장 미화4.3. 조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축소4.4. 유비를 필요 이상으로 비판4.5. 정사 왜곡4.6. 권력 찬탈 행각에 대한 무리한 변호
5. 대표적인 위빠 미디어들6. 기타

1. 개요

삼국지위나라는 사람. 빠와는 일단은 다르지만 범위가 일부 겹친다. 오래 전부터 촉한을 좋아하는 이들과는 불구대천으로서 끝없이 갈등하고 있다.[1] 나름 3대세력의 일원인 오빠는 3인자라서 그런지 밀리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바리에이션으로 빠도 있다.

위빠의 대부분이 조조이기도 하다. 당연히 조조빠일수록 그 조위를 멸망시킨 진빠와는 거리가 더 멀어진다. 진()을 이라고 부르며 조롱하는 중. 반대로 진빠는 조조를 로 부른다. 다만 사마의는 조위의 충신설과 조위의 역적설이 둘 다 존재하는 양면적인 평가도 있는데다 위빠 자체가 명분론 집착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어서, 사마의를 싫어하는 조조빠도 있지만 능력과 패도에 꽂혀서 조조와 사마의 둘 다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사마씨 아들들[2]부터는 확실히 관심도도 떨어지기 때문에 진빠만의 영역으로 보는 편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위빠로는 조조를 숭앙한 마오쩌둥이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예전부터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21세기 들어서 일본에서 만든 삼국지 관련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위빠 성향이 상당히 묻어나 있다.[3]

2. 특징

그 근본이 조위정통론인 사람들이다.

위빠는 기본적으로 삼국지연의를 배척하는 경향과 연의는 무조건 조위를 까내린다고 생각하며, 조조에 대해 거의 신격화를 한, 삼국지 관련 창작물 삼국지 조조전이나 만화 창천항로를 아는 위빠는 대체로 이 작품을 좋아한다. 문인과 학자들로는 국내의 이문열[4], 중국 현지에서는 이중톈 교수가 대표적이고, 역사적인 인물로는 마오쩌둥이 유명하다. 참고로 셋 다 자기 분야에 있어선 나름 능력자이나 삼국지 관련 식견으로는 능력적이라고 할 순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삼국지 관련 해석이 잘못 되었다는 건 이들의 지적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성향이나 소속된 집단이 내세우는 이념의 프레임으로 삼국지를 읽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은 무엇보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고대의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왜곡의 여지도 있다. 특히 마오쩌둥&중국 공산당 류 해석이 가장 기관인데, 중국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조조가 당대에 큰 위세와 명성을 떨쳤던 능력자인건 모두가 인정해야 할 사실이지만, 이들은 조조를 무슨 봉건 잔재를 혁파하는 민중주의자니 구시대를 종언하고 새시대를 연 혁명가니 하는 식으로 근대 서구에서 만들어진 개념들을 동원해 그런 개념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고대 중국 사람인 조조를 지나치게 치켜세우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왜곡된 막시즘의 틀로 조조를 혁명가로 재구성한 중국 공산당식 해석이 중국 공산당의 불구대천의 원수라 할 수 있는 일본 극우파가 자기 멋대로 만들어낸 조조의 캐릭터성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마오쩌둥의 그림자 아래에 있는 중국 공산당이 조조를 혁명가로 추켜세우듯이, 일본 극우파들 역시 조조를 구시대를 타파하는 혁신의 상징으로 찬양한다.

과거에는 명분론 때문에 조조망탁조의, 즉 왕망이나 동탁과 동급의 악당이자 대표적인 역적으로 여겨졌으나[5], 현대에는 명분보다 실질이 중요하다는 생각, 좀 더 근본적으로는 도덕적 가치가 쇠퇴함에 따라 현세에서의 패권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진 탓이라고 보여진다. 삼국지연의로 대표되는 고전문학 전통의 권선징악적 필체자체를 고루하고 식상한 것으로 보고 싫어하여, 그러한 방식의 안티테제가 되는 조조에게 호감하는 것에 가깝다.

3. 상세

위빠의 대부분은 명분, 인의, 도덕 같은 명분론에 입각한 태도를 지양하고 실리를 지향하지는 태도를 지닌다.[6] 그러므로 삼국시대 타 국가들에 비해 실질적으로 크고 강한 국력를 기른 위나라를 찬양하자는 논리를 취한다. 허나 모든 위빠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위나라가 좋다기 보다는 단순히 명분론만을 싫어하여 위빠를 자처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은 명분론을 내세우고 촉한을 찬양하는 기존 삼국지 문화를 고리타분하다고 반감을 가져서, 그 안티테제로서 위나라를 좋아하게 된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똑같이 실리를 지향한 오나라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걸 보면 역시 근본적인 이유는 결과론적인 성공과 패권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워낙 옛날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보다는 촉한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지라, 문학 등에서 당연히 촉의 인물들이 부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위의 명장들이 촉의 명장들보다 훨씬 과소평가 되는 경우도 많고 인지도도 낮으며 조조를 희대의 역적중 하나로 비하하는 단어인 망탁조의란 사자성어도 있다. 심지어 삼국지 연극 때 조조 역의 배우가 관객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 이는 조선시대 때도 마찬가지인지라 적벽가에서도 조조군이 불탈 때 조조를 원망하며 타죽었다는 대목도 있고, 간사한 사람을 조조 간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조조를 욕으로 사용하는 기록도 많다. 전통놀이에서도 조조잡기놀이라는 것이 있을 정도, 위를 높이는 풍조가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로, 유교적인 이념이 약해지고 사회전반에 도덕보다는 이해타산을 중시하는 사회분위기에, 마오쩌둥 등 중국 권력자들의 조조 띄워주기로 인해 부쩍 증가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은 비단 삼국지연의 뿐 아니라 고전문학 전반을 대하는 현대인들의 평가의 전반적인 흐름이 그런 쪽으로 가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후술하겠지만 당시 민중들의 보편적인 정서를 골자로 해서, 나관중을 필두로 여러 문인들의 손을 거치며 거쳐 탄생한 문학이며, 당시 삼국시절을 기억하는 문인과 서민들의 보편적인 사관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를 높이려는 소위 위빠의 행각은 되려 "불의한 권력자에 대항한다"는 삼국지연의의 근본적인 사상에 대한 반발을 정당화려는 방편으로 초기기록인 진수의 삼국지 정사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이들은 역사의 고증을 문제 삼지만, 실질적으로 삼국지연의를 "이상적 민본주의"의 지향에서 "현실권력 획득"의 주제로 끌어들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7] 위빠라 불리는 이들이 정사에 집중을 쏟으면서 실제로는 삼국지연의에 대해 거의 무리수에 가까운 재해석과 재구성을 가하는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보수 계열인 경우가 많다. 헌데, 조조&조위에 대한 덕질이 보수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지금이야 그 인기가 식었을지 몰라도 한국에서 한때 조조와 조위의 인기가 상종가를 칠 때를 돌이켜 보면 진보 성향의 팬덤도 상당했다. 이는 조조라는 인물이 당대 기준으로 구체제의 모순을 청산한 개혁 성향[8]의 군웅이기에, 보는 관점에 따라선 '구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캐치프라이즈를 갖고 있는 진보 이데올로기에 친화력 있는 코드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도덕이나 인권 같은 요소는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가치이지 사회체제의 변동을 중요시 하는 구좌파 성향의 진보파에게 있어서는 부차적인 요소다. 당장 명목상 진보파인 마오쩌둥&중국 공산당이 조조를 새시대를 개창한 혁명가니 반봉건 민중주의자니 하는 식으로 찬양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치다. 이렇게 조조가 부각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진보파의 재조명과 선호를 받았던 역사적 인물들로 역성혁명론을 주창했던 맹자나 법가의 대부 한비자, 조선의 정도전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진보파가 생각하는 근대 의회 민주주의, 민중주의, 개혁, 혁명, 자유, 평등 같은 진보적인 요소들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이렇게 일부 진보파가 조조를 진보주의자로 재해석했기 때문에 유비촉한 세력 같은 경우는 구왕조인 후한을 계승한다는 기치를 들었다는 이유로, 원소는 명문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고 어떤 정책을 폈는지 제대로 확인이나 교차 검증도 하지 않고 구체제를 옹호하는 수구 꼴통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물론 서구&맑시즘식 발전사관의 하위 개념인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을 통해 고대 중국의 인물들을 논하는 건 애초에 코미디에 가깝기에 이런 평가는 부당함에 틀림없다. 그래도 굳이 사회체제의 발전을 추동하는 동인으로 생산력을 강조하는 맑시즘식 발전사관에 의거해 조조와 조위를 평가하자면 조조는 서주대학살 등 수없이 인권을 유린하는 악행을 저질러 당대 생산력[9]을 급전직하시켰고, 둔전제 등 임시방편으로 그걸 어느 정도 상쇄시키긴 했지만 그 악행을 만회할 정도가 아니었으며, 그래서 그가 개창한 새왕조인 조위는 전 왕조인 후한보다도 생산력이 아래였고 중앙의 통치력 또한 딸리는 편이기에, 조조를 생산력의 발전을 가로막는 구체제의 낡은 질서를 혁파하고 더 나은 생산력을 보여주는 새로운 체제로 사회를 견인한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구체제보다 더 낮은 생산력을 가진 체제로 사회를 퇴보시킨 반동주의자로 봐야한다고 비판하는 의견들도 있다.

4. 비판

일반적으로 위빠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대부분의 영웅찬양론자들이 그렇듯이 잘못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악행임에도 '잘못은 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라는 식으로 변호하는 것이다. 특히 굉장히 극단적인 위빠들에게 있어서 조조는 완전무결한 성웅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심한 경우 그의 명백한 실책이나 악행조차 영웅화, 신격화 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좋은 예가 그 유명한 창천항로. 이문열 삼국지에서도 조앙이 준 말을 탄 일을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영웅적인 결단'이라고 어필하는 내용이 존재한다.

설상가상으로 위빠들 중에서는 잘못된 역사적 지식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맹목적으로 조조를 신인 듯이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터무니없는 주장을 해대는 일부 무개념 위빠 때문에 조조의 위상이 더 깎여내리는 불상사가 빈번히 발생한다. 위빠, 조조빠에게는 많이 거북할지 몰라도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알아야 할게 있다. 다음에 나오는 사례들을 통해 알아보자.

4.1. 실질적인 통일을 이루었다는 과장

위빠들 중 무개념들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잘못된 주장들 중 하나가 삼국은 사실상 위나라가 통일했고 촉과 오는 듣보잡 이라거나 사실상 지방정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위나라가 위 촉 오 삼국 중 가장 막강한 국가 였던건 사실이지만, 그 당시 중화 인구의 40% 이상이, 국토 면적으로 치자면 60% 이상이 자신들만의 정권까지 수립하며 황제까지 자칭하면서 우리가 정통이고 너네는 역적이라며 수십년간 조직적인 적대 행위를 지속하는 상태를 그것들은 지방정권이고 사실상의 통일이라고 칭하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10]. 위나라는 건국이래 끊임없이 촉나라의 침공에 시달렸고 심지어 제갈량 사후에는 촉나라를 만만히 보고 흥세 전투를 일으켰다가 대차게 패배하기도 했다. 또한 오나라와는 합비 공방전을 여러번 벌였는데 물론 위나라는 매번 이겼지만 그렇다고 위나라에서 오나라를 정복하려고 일으킨 전쟁에서까지 승리하지는 못해 조비의 남정이나 석정 전투에선 오히려 위나라가 대차게 깨졌다. 결국 삼국 모두가 공격에선 승리하진 못하고 서로 방어전에서만 승리했을 뿐이었던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촉과 오는 지방정권이네 뭐네는 어울리지 않는 말로 진짜 지방정권이면 작정하고 토벌하려고 하면 토벌되어야 한다.아무리 지방정권이 날고 기어도 중앙에서 작정하고 토벌하려고 들면 토벌되거나 토벌될 수준이어야 지방정권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삼국에서도 조조가 자신이 중원을 평정해 천하가 태평하고 백성도 살만한데 무슨 도적이 있냐고 하자 이 말을 듣던 장송이 어처구니 없다는 식으로 남쪽엔 손권 북쪽엔 장로 서쪽엔 유비 이 3인이 버티고 앉아 군사가 수십만인데 어찌 태평합니까?라고 깐다. 물론 결국 위나라는 촉나라를 정복했지만 멸망하기 고작 2년 전이라 별 의미는 없다. 그때쯤이면 위나라는 거의 사마씨에게 넘어간 상황이었고[11] 정복도 등애의 엄청난 운빨이 터져서 가능했던 것이기 때문. 그리고 이 때도 위나라에는 행운이 뒤따랐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현재의 대한민국과 북한도 사실상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면적상으로는 남한보다 북한이 더 넓고(5:6) 인구상으로는 남한이 북한보다 많다.(2:1) 그리고 군사력과 경제력은 위vs촉+오 보다 훨씬 더 격차가 크다.

어차피 수십년 후 위나라가 통일하니 사실상의 통일이라고 보는 것도 역시 한계가 있다. 이런 관점을 위나라에 적용하면 위나라는 그냥 서진의 밑밥을 깔아주기 위한 막간 왕조에 불과하며, 서진 또한 어차피 오호십육국이라는 대난세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명제도 성립한다. 계승 논리도 마찬가지인데, 진나라가 위나라를 계승했듯, 위나라 또한 후한을 계승한 나라다. (=조위정통론) 진나라의 통일이 위나라의 통일과 같다면, 마찬가지로 위나라의 통일은 후한의 재통일과 같다는 명제도 성립할 수 있다. 실제로 위나라의 생산력과 인재풀은 후한말의 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게다가 후한의 주 통치지역도 하북지역이었기에 후한의 기반은 위나라가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

간혹 중국역사를 들먹이면서 '역사를 살펴보면 하북을 제패한 세력이 천하를 제패한 경우가 대부분이니 사실상 통일로 봐야한다'는 건데 이건 미래의 역사까지 끌여들여서 위나라가 통일왕조라고 지나치게 과장하는 거다. 이 논리대로라면 오호십육국 시대에 하북을 제패한 다른 국가들도 사실상의 통일왕조라고 봐줘야 하나 그 누구도 그런 주장을 하는 경우는 없다. 게다가 화북을 제패한 세력이 천하를 제패한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나 명나라국민당처럼 양쯔강 이남을 기반으로 두고 천하를 제패한 세력이나 원나라처럼 기반이 아얘 하북보다도 더 위에 있었다가 집어삼킨 사례도 존재한다. 고작 세 개의 사례를 갖고 내미냐 싶겠지만 역대 중국의 통일세력이던 진, 한, 서진, 수, 당, 송, 명, 청, 국민당, 공산당 등을 보면 10개 중 3개인 만큼 아주 적다고 볼 수만도 없다. 심지어 청나라도 실은 만주에서 성장한 세력이라 중국 안이긴 하나 그렇다고 하북에 들지는 않는다. 실질적으로 1/3은 강남에서 시작한 셈이다. 게다가 천하통일은 실패했지만 천하를 뒤엎은 항우의 경우[12] 초나라 출신이다. 강남출신이 천하를 뒤엎는건 아주 불가능한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단 항우, 한나라, 명나라, 국민당의 경우 하북을 포함해 천하가 갈기갈기 찢긴 상태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하북이 온전히 통일된 상태에서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육조시대라는 강남이 단일왕조시대였음에도(오나라 제외) 수백년에 걸쳐 결국 북조가 남조를 멸한 것과는 차이점 물론 이는 애초에 강남의 역량이 하북보다 못한 면이 더 컸다. 강남의 역량이 하북을 뛰어넘는건 송나라 때부터다.

그리고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한다는 점 때문에 위를 멸망시킨 서진을 까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실제로 사마씨가 한 일이 결국엔 위가 한나라를 찬탈한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한왕조는 400년이상 존속되면서 허수아비라고 해도 권위가 있었는데, 위의 찬탈은 결국 그 명분론을 약화시킴으로서 신하가 군주를 몰아내도 된다는 선례를 남겨 사마씨에게 찬탈의 명분을 제공했다.[13] 이런 명분의 약화는 결과적으로 황제권의 약화를 초래해 위의 헬게이트가 열리는데 일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가 통일을 이루어 새로 권위를 확립할 기회가 있었다면 모르지만 겨우 5대만에 자기들이 찬탈한 방식 그대로 당한다.[14]

이것을 모두 조비의 탓으로 돌리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일단 조조가 조비에게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켰다기 보다는 조비가 원래 개망나니 싸이코였다고 보는게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조비만 빼고 나머지 아들들은 몇가지 문제 될부분이나 능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전부 다 성격면에서는 정상이었기 때문. 그리고 조비에게도 아버지 조조가 이전에 저지른 실책들을 모두 만회하고 천하통일을 다시 실현할 기회도 충분히 있었는데, 조비 본인이 그 기회를 다 날리고 그 아들인 조예까지 덩달아 위나라를 완전히 맛이 가게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모든것이 조비탓 이라고만 볼수는 없는게 조조가 그런 아들을 가르치거나 고치려는 시도를 했다는 기록조차 없고, 원래 대로라면 인성도 좋고 정통성 면에서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첫째 조앙이 뒤를 이어야 했으나 그 조앙이 죽게 만든건 바로 조조가 추씨를 탐하다 장수에게 원한을 샀기 때문이고 이때문에 능력도 뒤떨어지고 장남이 아니라 정통성이 약한 조비가 후계자로 선정된 것이다. 그리고 능력도 없고 인성에 하자가 있는 조비를 후계자로 선정한건 조조 본인이고 조조 본인이 서주 대학살을 저지른 탓에 민심이 조조를 크게 떠났으며 적벽대전의 대패로 천하통일의 기회가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 숙적인 유비와 손권이 급성장 하게 만들어 줬다. 정리하자면 생전 조조가 여러 실책을 범했는데 그걸 수습해야 할 조비가 무능하여 그걸 수습하지 못하고 끝내 천하통일의 기회를 날려버렸고 조조보다 못한 후계자들이 위를 말아먹었다고 보면 된다.

4.2. 조조 과장 미화

이렇게 일부 무개념 위빠들은 조조를 치켜세우려다가 이 때문에 평판을 더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은데, 또 하나의 사례로 조조는 중국사 불세출의 영웅이라는 것이다. 역시 중국사와 역사 자체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발언이다. 조조에게도 여러 악행을 저지른 행적이 있는 인물이며, 딱히 시대를 초월한 업적을 남겼다고 보기도 어렵다. 능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대에 자웅을 겨뤘던 군웅들인 원소, 유비, 손권이 조조에게 무조건적으로 뒤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소, 유비, 손권 이들 모두는 명목상 환관의 손자라 명예에 있어서는 좀 흠집이 있을망정 실질적으론 당대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인 조등의 손자, 즉 '다이아 수저'인 조조보다 훨씬 더 뒤떨어진 출발선에서 시작해 그에 근접하는 위상을 얻은 당대의 군웅들이다. 원소는 권력을 잡는 방식에 있어선 평가가 갈리지만 어쨌든 명문가의 천출이라는 굴레를 뛰어넘어 생전에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인 나름대로의 실력자였으며, 유비는 말만 황족이지 실질적으론 평민이나 다름없는 위치에서 평생 자신이 내세운 한실부흥이라는 대의명분을 끝까지 밀고 나간 끝에 촉한의 황제 자리에 올랐고,[15] 손권은 군사적 재능은 출중할 망정 정치력에 있어선 바닥이었던 지방의 한미한 호족 출신인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이 물려준 덩치만 컸지 내실은 난장판이었던 손오 세력을 뛰어난 정치력을 바탕으로 수습하고 발전시키고 끝까지 보존해 구오지존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게다가 손권은 앞서 언급한 조조, 유비와 비교하면 2세대 인물이다. 대체적인 2세대 인물들이 물려받은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거나 1세대보다 못나간걸 생각해보면 자리를 지키고 발전시킨 것은 보통 능력 이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때는 한국의 삼국지 팬덤 사이에서 이문열 식 해석인 '미천한 환관의 손자라는 페널티를 극복한 입지전적 인물인 조조'라는 인식이 팽배했지만 조등의 손자라는 배경의 이처럼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장점이였다. 조조가 유언이나 유요 같은 황족계 군벌이나 당대 최고의 명문가의 적자인 원술 같은 인물들보다는 더 불리한 위치에서 출발했다는 평가는 어느 정도 맞을지 모르겠지만 원소, 유비, 손권보다 불리한 입지였다고 말하는 건 무리가 있다.

이렇듯 조조의 능력이 당대 최고였다고 확실하게 단언하기 힘든 마당에 중국사 전체로 보면 조조도 다른 황제들과 크게 다를 것 없다. 중국사 전체로 보면 조조 이상의 업적을 남긴 영웅들도 생각보다 많다. 한고제, 광무제, 송무제, 수문제, 당태종, 송태조, 영락제 등은 모두 조조 못지않는 군사적 실적을 보였으며, 중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운 인물들이다. 군주로써의 업적만 따지면 진시황, 한고제, 한문제, 한무제, 송태종, 홍무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대상은 더 늘어난다. 당장 진시황과의 비교만 해도 그가 확립한 군현제는 이후 중국 왕조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도량형 통일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조조의 업적이라고 해봐야 40년 만에 폐지되는 둔전제 정도다. 그러나 둔전제 마저도 종전에 존재하던 것을 그냥 개량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따지자면 진시황의 군현제도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라 말할 수가 있으나 진시황의 군현제는 종전의 진나라에서만 적용되던 것을 전국적으로 실시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고 군현제 빼고도 6국 정복과 흉노 축출과 오르도스 지방 회복, 도량형 통일, 화폐 통일, 정국거 건설과 도강언 증축 등등 다른 것들도 많다. 같은 압제자라고 해도 업적의 차이는 넘사벽 수준이다.

이렇게 조조를 위엄쩌는 개혁가, 천재라면서 빨아주지만 애초에 정책들의 자세한 내막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둔전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파고들자면, 이것이 유효한 제도임은 맞고, 이를 시행한 조조의 정치적 능력 또한 출중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둔전제 자체가 임시방편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이것을 시대를 초월한 업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16] 일부 위빠들은 이것이 후대의 제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수/당 시대의 기본 토지제도인 균전제는 이와 직접적인 관계를 찾아볼 수 없는데, 기본적으로 둔전제와 균전제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균전제의 근본은 차라리 주나라의 정전제에서 찾는게 더 나을 지경이다.

또한 도겸은 조조보다 일찍 비슷한 제도를 시행한 것으로 추정되며 큰 성과를 거뒀고, 공손찬도 원소에게 쫓겨난 후 둔전을 행한 바 있으며 유우는 이런 제도 없이도 척박한 유주를 단기간에 안정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즉, 조조의 정치적 능력과 둔전제가 동시대의 다른 정책이나 정치가에 비해 압도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차라리 조조를 어필하자면 하북을 제패한 것을 두고 다른 군웅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게 더 나은데 이것도 관도대전에서 허유의 배신 장합의 투항등 여러가지 운이 겹친거고 그전까지는 원소가 일방적으로 조조군을 몰아 붙이고 있었고 관도대전 이후에도 원소의 세력은 조조보다 우위에 있으면 있었지 밀리지도 않았는데 원소의 이른 죽음과 형제간의 불화등 안에서 내분이 발생하였고 그런 와중에도 원씨 형제에게 호응하거나 손내미는 세력도 제법 되었고 이과정에서 조조도 여러번 위기를 겪었고 원담과 원상이 일시적으로나마 연합하자[17] 정말 조조를 허도까지 쫒아내고 고간의 반란으로 죽을뻔 하기도 하는등 한동안 잡음이 끊이질 않았고 절대 순탄하게 하북을 제패한게 아니고 운이 따라줘서 가능했던 일이라 오로지 조조의 능력으로 얻어낸 결과라고 보기엔 비약이 너무 심하다.

구현령 또한 조조의 실력주의, 실용주의의 대표 아이콘으로 여기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기본적으로 천거제에서 크게 벗어난 제도가 아니다. 따라서 이 또한 유력자들의 자리 나눠먹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18] 애초에 실력이라는 것도 측정할 장치가 없는 이상, 호족세력들에게 거추장스러운 제약만 해제해 준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관직을 차지한 인물들은 위나라를 뒤엎고 부패한 문벌귀족층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난세에 효나 청렴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의견이 있는데, 조앙이 효자가 아니었으면 조조는 장수한테 죽었다. 무엇보다 이후 청렴이 결여된 문벌귀족들은 밑도 끝도 없는 탐욕에 빠지게 된다. 서진시대 문벌귀족들의 행적을 보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전의 후한 말이 조금 나아보일 지경이다.

게다가 실용주의적, 실력주의적 용인술을 활용한 다른 군주가 유비였다. 유비는 아예 허정을 두고 실력은 없는데 허명만 높다며 기용하지 않으려 했으며, 자신을 혐오하던 유파도 그 실력을 꿰뚫어보고 끝까지 쫓아가 기용했다. 물론 조조도 인재등용에 있어서 실력주의, 실용주의를 말로만 한건 아니다. 적대세력이라 해도 자신에게 항복하고 필요하다 싶으면 얼마든지 기용하는 대인배적인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조조의 주 측근들은 이래저래 혈연이나 지연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특히 군부의 핵심은 친족인 조씨와 하후씨가 꽉 잡고 있어 오자양장들도 최고위직에 오르지 못하고 전선에 있어야 했다. 유비가 황제에 오른 뒤 마초와 장비에게 표기장군, 거기장군이라는 최고위 관직을 준 것과는 대조적. 뭐 그렇게 따지자만 유비 세력에서도 미방, 마속 같은 실책도 있었지만 적어도 미방과 마속은 그정도로 높은 관직을 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조조에게 등용된 인물들 중 사마의나 기타 인물들의 2세들의 모습을 보면 충(忠)이 결여된 채 자신들의 이익만 탐하며 결과적으로 조위의 수명을 단축시켰으니 장기적으로 조조에게도 해가 된 셈. 결론적으로 조조의 구현령이 진정한 의미에서 실력에 의한 관리 등용 제도가 등장하는 것은 수/당 시대에 이르러야 정립된다. 더하여 구현령도 조조 맘대로라서 공융의 경우 불효죄로 처형해 후대에 "불인불효라며 불효죄로 처형한건 뭔 심보냐?" 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래 봬도 천하의 절반 이상을 꿀꺽했던 위나라는 황실의 권위가 약했지만 촉나라를 보면 위나라보다 나쁘다 할 게 딱히 없어서 촉나라는 삼국 중 황제의 권력이 가장 강했고 유선은 무려 41년이라는 한무제 이래 최대의 재위기간을 자랑한다. 재상들의 권력이 세긴 했어도 정작 그 재상들의 권력 또한 황제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던만큼 유선을 잘 받들어모시며 일은 잘 했다.[19] 다만 오나라의 경우는 삼국 중 호족의 권력이 가장 강해서 황제의 권력이 약했다.[20]

종종 게임으로 삼국지를 접한 사람들이 중원 한가운데서 시작해서 사방에서 두들겨맞는 위치에서 승리했다면서 추켜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과정을 모르고 결과만 본 것에 가깝다. 위치만 보면 조조가 주위에 적이 많이 생기기 쉬운 위치였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주위 세력이 항상 조조에게 적대적인 것도 아니었고 그들과 한번에 싸운 것은 더욱 아니었다. 조조의 시작은 친원소 군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소의 부하 수준이었으며 위기 때마다 원소의 도움을 받은적이 많다. 원술, 여포, 장수 등 중원의 여러 세력과 돌아가며 싸웠으며 원소와는 주위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싸울 수 있었다. 정리하면 중원에서 여러 적대적인 세력을 상대로 버티면서 세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조조는 본인의 처세술에 더해 행운도 잘 따라주면서 중원에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적만 만들고 이들을 처리해가며 세력을 키우고 난세의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제대로 아는 진정한 위빠로서 조조를 높게 평가하려면 이러한 판을 짠 조조의 처세술과 판단력, 대인배스러운 면모,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위기 대처 능력을 높게 쳐주는 게 맞다. 애초 조조와 비슷한 신세였던 군벌들이 조조 말고도 여럿 있었지만 유비와 손권 빼고는 살아남지 못한걸 보면 이것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또한 당해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다 쳐도 해당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러 세력에 두들겨맞고도 살아남은 것은 유비도 매우 강한 편이다. 오히려 유비는 기반도 조조보다 약했고 훨씬 늦게 갖춰진데다 원소같은 든든한 뒷배도 없어[21] 여러 세력과 맞서기에 불리한 입지였다

이 외에도 조조의 호조제 역시도 한계점이 있는데 호조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단위로 비단 등을 바치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는 한나라 시절의 사람 당 세금을 매기는 인두세가 아닌 집 단위로 세금을 때려버려 사람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중앙정부의 통제가 약해졌다는 것과 화폐경제 시절이던 한나라와는 달리 화폐경제를 살려내지 못하고 실물경제로 회귀했다는 건데 그럼 조조의 라이벌이었던 유비와 손권은 화폐개혁에 성공하고 자체적인 화폐를 제작해 사용했다. 심지어 촉한의 화폐는 제한적이지만 손오에서도 쓰였을 정도 이를 감안해 보면 과연 조조가 시대를 뛰어넘는 개혁자였는지는 분명 논란이 있을 수도 있다.[22]

4.3. 조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축소

안타깝게도 위빠들 중에는 이렇게 극단적이고 지나치게 조조를 좋아하며 왜곡된 역사의식을 가진 이들이 꽤나 많다. 그러나 여기서도 좀 더 악질적인 부류는 그의 만행인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의 서주 대학살, 관도대전에서 보여준 원소군 포로 8만명 생매장, 순욱, 모개, 최염 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부분 등을 인정하지 않고, 미화시키거나 포장하거나 외면하는 태도를 보인다. 시대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고 있을 당시의 사람들이나 식자들도 분명 조조군의 이런 만행을 인간 말종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서주대학살만은 정사 삼국지를 지은 진수도 실드치지 않았다. 서진의 관리인 그조차 이를 실드치지 못했을 정도면 서주대학살이 얼마나 개망나니 짓인지 짐작케 한다. '서진은 위나라를 뒤엎었으니 명분에서 좋은 거 아니야?' 싶겠지만 서진의 시조인 사마의는 적어도 죽을 때까지 조위를 섬기던 인물이었고 조조에게 등용되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즉 조조를 까면 깔수록 그 밑에서 일했던 사마의도 덩달아 까이는 거다.

이는 그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실리적인 관점에서 봐도 학살을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고 아무 이득도 되지 않았다. 도겸 세력의 황폐화, 백성들의 불신, 치안 악화를 유도하기에 학살이 유효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일부 있다. 물론 위급한 상황에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군웅은 백성들이 꺼리게 되고 신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도대체 자신들을 참혹하게 학살한 군웅은 어떻게 생각할까? 결과적으로 조조는 당대는 물론 후대 백성들에게까지 미움을 사게 되고, 조조를 피해 남하한 인재와 백성들이 촉나라(촉한)와 오나라의 밑거름 중 하나가 된다. 조조를 피해 남하한 인재들은 형주, 양주 등에 정착하게 되고 모두 유비와 손권이 나눠먹는다. 그렇게 내려온 인물들이 듣보잡이면 또 모를까 천하삼분지계를 구상해 끝까지 위나라의 천하통일을 방해한 명재상 제갈량과 유비의 물주인 미축, 제갈량의 형제이자 당대의 걸물이었던 제갈근, 오나라의 제갈량 포지션에 적벽대전의 주역인 노숙도 서주 출신이다. 행보 역시 제갈량은 조조의 회유를 몇 번이나 받았음에도 완강히 거부했으며, 미축은 유비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갈아넣었고, 노숙은 오나라 내부에서 화친론 역시 꽤나 나왔음에도 유비까지 끌어들이며 강경론을 고집하여 끝내 적벽대전을 성사시켰다. 이들이 가진 조조에 대한 거부감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장소같은 예외도 있기는 한데 장소마저도 세력차가 너무 심해서 어쩔수 없이 항복을 주장한것이고 오나라 건국에는 기여를 했고 적벽대전 이후엔 항복에 관한건 입도 뻥끗 안했으니 뭐...

관도의 포로학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포로 관리가 어려워서 어쩔 수 없었다, 식량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옹호하는데 이런 위빠들은 이중잣대로 관우가 우금의 군대를 포로로 잡고 식량이 부족해서 오나라의 식량창고를 턴건 '관털'이니 신의를 저버린 개망나니 관우 운운하면서 열심히 까댄다. 포로 학살이 식량 도둑질보다 낫다는 것인가? 물론 조조는 적군인 원소군을 죽였고 관우가 턴 상관의 창고는 오나라만의 소유가 아닌 유비의 영역인 영릉에 속하는 곳을 오나라와 나눠서 관리한 것이다. 그리고 설령 도둑질이라도 규모 자체는 차라리 도둑질학살보다 훨씬 낫고 또한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 대부분이 자기들 아쉬울 땐 시대기준으로 따지자면서 그 시대 기준으로 최악의 천인공노할 죄악인 조조의 '역적질'과 역사상 최악의 범죄 유형인 집단학살에 대해선 일언반구 말이 없는 것도 특이사항이다. 위빠들은 전형적인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마인드를 가진 집단이다. 조조는 충신은 커녕 역적 중의 대역적이었다. 역적질의 강도로 오죽하면 동탁이나 왕망과 함께 엮였을까. 괜히 망탁조의라고 엮인게 아니다.

조조가 천하통일을 눈앞에 뒀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저항에 부딪혔던 것을 이런 악명때문에 생긴 부작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조조의 형주 침공 당시 10만 피난민이 유비를 따라간 사건이 조조에 대한 공포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23][24] 일부 위빠들은 유비가 방패로 쓰려고 피난민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는 가당찮은 억지를 부리기도 하지만, 당시 소수의 유비군에게는 가능하지도 않고 이익도 없는 행동이다.

'위'빠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조조 개인에 대한 빠질에 가깝다. 조비, 조예만 해도 호감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조예 이후로는 사실상 아웃 오브 안중인데, 조비는 뭘 제대로 한 것도 없고 조예는 다 잘했는데 말년에 맛이 갔고 위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 뒤의 황제들은 대체 뭔 죄인가? 이런 경우 서진과 사마의를 배신자라며, 혹은 조조가 다 해놓은 것에 숟가락만 얹었다며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사마의를 능력자라고 좋아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일률적인 판단은 불가능하지만 전자의 경우에 비해 이쪽이 소수다.

위나라를 좋아하는 사람중에서는 순욱에 대해서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그럼에도 순욱의 죽음을 가지고 조조를 까는 행동이 적다. 심지어 순욱을 삼국지 최고의 모사라 추앙하고 조조보다도 더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을정도. 까더라도 약한 비판정도다.

조조의 변덕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이유로 조조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조조가 일부러 팀킬하는 보스가 아니고 다 이유가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유야 있는데 자기에게 거슬리거나 패권에 방해된다는 이유였다. 공융, 양수야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고는 하지만[25] 모개나 최염은 그야말로 억울하게 죽었다.

일설에는 큰 병을 앓고난 후 궁예와 칼리굴라처럼 거슬리는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데[26], 그 전에도 조조는 사람 여럿 죽인 인물이다. 당장에 여백사를 죽인 일도 거병 이전의 일이다. 이 이유로 화타를 위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며 비난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치료하려 했던 화타는 억울할 듯.
조조는 여색을 많이 탐했고, 이로 인해 일을 그르친 적도 있다. 그 중에 압권이 추씨를 불러다가 놀다가 전위조앙, 조안민을 잃고 정씨가 떠나기까지 한 일. 그리고 이 일은 나비효과로 위나라의 후계자 다툼을 불러왔다. 이 특성은 아들인 조비에게 이어진다. 이 추씨 일 때문에 정씨가 떠나간건 조조 자신조차도 후회해 어떻게든 정씨를 다시 불러올려다가 실패하고, 끝내 포기했음에도 결국 죽을때가 다가오자 조조는 "사람에게 영혼이란게 있다면, 내 맏아들 조앙이 '아버지, 제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뭐라 해야 할 지..." 라고 말할 정도나 되는 한으로 맺혔다.

4.4. 유비를 필요 이상으로 비판

정말 심한 경우, '"조조는 칭제하지 않았으니 사실 한나라의 충신이다.'", "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칭제에 급급한 유비가 진짜 역적이다."[27][28]는 주장까지 들고 나오면서 명분과 실리 둘 다 챙기려는 움직임까지도 보이고 있다. 당연히 충신이란 타이틀은 고작 칭제만 하지 않았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황제를 조조가 쓴 조서에 도장만 찍는 기계로 만들고 황제의 부탁도 무시하며 동귀비와 그 일가를 잔혹하게 살해하며, 복황후와 그 일가를 멸족시킨 사람이 역적이 아닐리가.[29] 그냥 후궁을 죽인 사례는 얼마든지 있지만 동귀비는 그 당시 헌제의 아이를 임신한 임산부였고 조조의 힘이 크지 않았으면 반대파로부터 "황제폐하의 씨를 죽인 역적"이라며 반격받을 소지가 많았다. 심지어 동귀비는 황제인 헌제가 직접 살려주라고 했으나 조조가 그걸 씹고 죽여버렸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황명을 어기고 멋대로 죽인 것으로 보통 상황이라면 이것만으로도 역적인증이다. 만일 헌제에게 조조를 숙청할 만큼의 힘만 있었다면 조조는 감히 그런 짓을 하지도 못했고, 만약 기어이 그런 짓을 했다면 대가로 삼족이 멸해졌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폐위되지도 않은 현위 황후를 죽인 막장은 정말 드물다. 그 동탁마저도 하태후를 시해할 때 최소한 '시어머니인 동태후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내세워 나름의 명분을 만든후 유폐시켜 죽였다.

그리고 위왕[30]의 자리에 오른 것도 엄밀히 말해서 역적 행각이나 다름없는 게, 한고조 유방은 이미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을 칭하면 천하가 모두 공격해야 한다'고 제도적으로 못박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조 이후의 실력자들이 찬탈의 예비 단계로 왕에 책봉되는 테크트리를 그대로 탄 것을 보면 확인사살 수준. 거기다가 조조와 위나라를 제외하면 당대의 그 누구도 유비를 역적이라고 생각치 않았고 어쨌든 유비도 같은 유씨기에 유방의 유지를 어기지 않은것이 되며 오히려 유방의 뜻을 거스른건 바로 조조와 위나라다.
또한 유비의 칭제를 한나라에 대한 역적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나라의 충신'을 자처하면서 조비의 찬탈을 인정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비에게 남은 선택은 헌제를 조비의 손아귀에서 탈출시키거나 황족인 자신이 직접 칭제를 통해 황통을 잇는 방법뿐이다. 세력비의 차이도 있고 헌제를 조비에게서 구출하기는 거의 불가능했기에 결국 유비에게는 칭제를 하는 방법 외에는 유씨 한나라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헌제를 복위시키지도 않고 유비가 한중왕에 머무는 건 최악의 선택이다. '조위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위나라 황제를 섬기겠다.'는 의미니까.[31]

거기에 헌제를 명목상 황제로 칭하고 위나라를 정벌한 후 헌제를 실질적인 황제로 돌려놓는 것도 방법을지 모르나 헌제의 신변이 확보된 것도 아닐뿐더러 헌제는 위나라에서 내린 산양공 자리를 순순히 받았기에 별 실효없는 짓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관직 등이 낮은 사람을 관직 등이 높은 사람보다 아래로 보았다. 즉 유비에게는 아무리 그래도 헌제가 있으니 내가 제위에 오르기는 좀 그렇다며 사실상 조비를 천자로 인정해 한나라가 그냥 완전히 망하게 하는거나 헌제를 모셔와 옹립한다는 성공하면 대박일지는 모르나 성공률이 매우 낮은 방식을 택하는 것보다는[32]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안전하면서도 또 망한 한나라의 대를 자기 대에서 다시 잇는다는 어찌보면 명분과 실리 둘 다 얻는 방식이 더 나았을 것이다. 실제로 광무제도 한나라의 그저그런 황실 후예에서 새 한나라 황제가 되어 자기 대로 한나라를 이어갔다.[33][34]

그 외에 이릉대전을 유비의 무능함에 대한 증명이며 국력을 말아먹은 개삽질이라며 유비를 욕하면서도, 조조적벽대전의 참패에 대해선 입을 다무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조조가 이끌고 있던 병력을 감안하면 말아먹은 병력에 있어선 당연히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입은 피해보다 훨씬 더 했을 적벽대전의 참패로 조조는 사실상 중원 평정의 기회를 놓쳤다. 적벽 대전 패배 이후, 융중대는 본격 실현이 되었고, 형주와 강동을 모두 독립된 세력으로 가져가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다. 적벽대전에서 패배했어도 조조의 기둥이 뽑히진 않았다고 애써 쉴드를 치는데, 형주에서 유종의 항복을 받아서 기세등등하고 강대하던 그 조조의 세력이 다시 북쪽으로 쫓겨날 정도였고, 이후 조인은 형주에서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유비와 주유의 연합군에게 두들겨맞아야 했다. 위빠들은 이릉대전은 기둥이 통째로 뽑힐 정도의 참사였다고 과장하지만 이릉대전 이후에도 제갈량, 조운, 등지, 위연 등의 나라를 유지할만한 인재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제갈량이 이릉대전 이후 불과 4년만에 유선의 후계구도를 안정화 시키고,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병력을 집결하며, 북벌을 시도하는 일을 해낸데는 제갈량 본인의 대단함도 있지만 그전에 유비가 촉 지역을 안정시키고 정치체계를 갖춰놓은 것 또한 크게 작용했다. 위빠들 주장대로 이릉대전의 참패로 촉나라의 기둥이 뽑혔다면 그 후로도 40년 넘게 나라가 유지된 것은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다. 심지어 촉나라는 그 40여년동안 여러번 북벌을 시도하기까지 했다.[39] 반대로 위나라는 앞서 보았듯 3국중 가장 탄탄한 기반을 갖고도 조비 시절에는 명목상 자국 아래였던[40] 오왕 손권이 장악한 강남에 집적거렸다가 쓴맛만 봤고 조예 시절에는 오왕 손권이 스스로 제위에 올라 그나며 명목상 자국 영토라 할 수 있던 오나라가 떨어져나가고 제갈량의 북벌을 막는데만 전념해야 했으며 조방 시절에는 흥세 전투에서는 참패를 당했고 조환 시절, 그것도 멸망 직전이 되어서야 엄청난 운빨로 촉나라를 집어삼킬 정도로 실적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그나마도 서진의 태조가 된 사마소가 촉한 정벌의 공으로 진공과 진왕이 되어 사실상 서진을 세웠기 때문에 서진 스스로도 진나라는 촉한을 정벌하면서 세워진 왕조라는 소리를 했고, 이게 후일의 촉한정통론과도 연결된다. 즉, 실제로 위나라가 촉한을 제대로 멸망시킨게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한나라의 정통인 촉한을 사마씨의 서진이 멸망시켰기 때문에 진나라가 세워진거니 조위는 정통이 아니다라는 논리로서 발전한 것이다.

4.5. 정사 왜곡

또한 무개념 위빠들 중 또다른 일부는 무분별하게 정사드립을 남발하려는 경향도 있는데, 이들의 경우 정사에 대해 어설프게 주워듣거나 그냥 그 존재만 알 뿐, 실제 정사 삼국지를 읽은적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단순히 연의에 맞춰서 촉한정통론을 따르며 유비, 제갈량을 극찬하기보다는 정사 운운하면서 조조를 찬양하고 유비, 제갈량 등을 까는게 더 있어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확인도 거치지 않은채 "그건 연의에서 촉한 띄워주려고." 혹은 "위를 폄하하려고 창작된 거다"를 입에 달고 다닌다. 특히 이들의 자주 보이는 주장은 "정사에서 유비는 무능하고 음흉한 위선자였다",[41] "반대로 조조는 정정당당하고 솔직한 사람이다", "연의가 부풀려서 그렇지 정사에서 제갈량은 그냥 정치 잘하는 문관일 뿐이다." 등이다. 하지만 유비의 위선적이고 무능한 이미지는 정사가 아닌 연의 때문에 생긴 것이며[42] 권모술수에서 조조가 한 수 위라는 점은 정사에서의 평가다. 제갈량의 경우, 연의에서 군사적 능력을 요괴에 가까운 모습으로 만들긴 했지만[43] 그러나 정사에서 제갈량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은 어불성설로 오히려 정사의 저자인 진수와 주석을 붙인 배송지 모두 제갈량의 능력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내렸다.

90년도에는 특히 심해서 제갈량은 그냥 정치인일뿐이었고, 군사적 능력은 형편없다고 폄하하고 유비는 그저 무능한 자라고 까내리면서 조조를 위대한 영웅으로 치켜올렸다. 이 때 같이 치켜올린 것이 곽가. 그리고 자신들은 정사 위주로 안다며 연의나 보면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괴상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는데 2000년도 초까지도 이런 성향이 심했지만, 정작 정사에서 조조의 악행들이 발굴되고, 곽가는 정사로 인해 천재참모의 이미지 자체가 연의로 인한 거품이라는 것이 밝혀져 곽푸치노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장 나무위키 역사만 봐도 촉한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만 편향적일 정도의 표현으로, 촉한을 비하 수준으로 까내린 위빠들의 흔적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문열 삼국지 등이 이러한 경향이 심하다. 삼국전투기처럼 자기 입맛에 맞는 자료만 취사 선택하고 거기에 자기 창작과 뇌피셜을 끼워넣는 식으로 악질적인 왜곡을 행하는 경우도 존재한다.[44]

최근에는 이런식의 무개념 위빠들이 늘어나다보니 이에 대한 안티테제격 촉빠들도 많아지고 있다. 특히 소설가 황석영은 이문열이 조장한 위정통론에 정면으로 맞서 삼국지연의의 원전 주제의식을 그대로 반영하여 삼국지를 번역해냈다. 황석영의 촉한정통론은 기존의 유교적 관념 외에도 그 시대를 겪고 기억하는 민중의 관점으로 삼국지연의를 조망하여 10대 3의 실재와 허구에서, 역사와 다른 3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식의 반영이라고 표명했다. 즉, 나관중이나 후대의 모종강 모두 민중들의 사관을 받아들여 삼국지연의를 쓴 것이지, 그들만의 작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지연의는 원래부터 부당한 권력자들에 대한 항거,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민초들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려던 염원이 담긴 책이었다.

특히나 재상의 활약이 돋보이는게 촉나라의 특징인데 이 재상에 있던 제갈량이 정치만 잘 하는 인간이었다면 제갈량 생전의 그 여러번의 북벌들은 뭐란 말인가? "그건 나라를 짜내서 한 수준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도 촉나라는 몇번이고 북벌을 해도 자국의 역량이 바닥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위나라의 침공인 흥세 전투에서 승리하기까지 했다. 이게 제갈량 사후 10여년 뒤의 일이긴 하나 그 사이에도 촉나라는 꾸준히 북벌을 시도했음을 생각해보면 제갈량은 촉나라의 현실에 어느정도 맞게 북벌을 했고 그 북벌의 규모나 수준이 그정도라는 것을 보면 촉나라의 역량도 그래도 제법 되었고 그 역량을 끌어낸 제갈량의 능력은 부정할 수가 없다. 당장에 촉한 이후에 파촉지역에 등장한 왕조들은 하나같이 촉한처럼 큰 역량을 보이지 못했다.

또한 제갈량의 북벌에 대해 마치 민중을 짜내서 무리한 전쟁을 하는, 마치 북한같은 악덕 정치가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 제갈량의 북벌이 궁극적으로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벌 실패가 '나라의 병력과 자원을 끌고 나가 말아먹고 온 것'으로 보면 큰 오산이다. 제갈량은 무인이라기보단 나라를 운영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총력전(보통 회전이라고 부리는 것)을 벌이기보다는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다가 실익이 없을 것 같으면 포기하는 식의 북벌을 행한다. 실제로 2차 북벌 당시 진창성 함락이 좌절되자 곧바로 철수하고 빠르게 북벌을 정리한다. 추가로 북벌의 목적인 '조위 토벌'은 달성하지 못할 지언정 음평이나 무도 등 요충지를 점령해 조위를 압박하는 등 일부 성과를 보기도 했다. 제갈량은 유비에 대한 충성과 한 황실 부흥을 시도한 명분 면에서만 높이 평가받는게 아니라, 한정된 자원과 국력을 지닌 소국인 촉한을 안정적이고 부강하게 이끈 현실 정치인으로서도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나라를 무리하게 짜내서 택도 없는 전쟁을 하던 이상에 미친 전쟁광이 아니었다.

실제 북벌과정을 살펴보면 이 점이 더욱 명확해지는데, 일단 227년 시작된 1차북벌인 가정 전투 당시 잘 나가던 촉군이 마속의 뻘짓으로 참패하고 실패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2차 북벌을 보면 상황이 좀 다른데, 228년 11월에 후출사표를 올리고 12월에 신관을 통과, 진창을 20일간 공격하다가 조위의 구원군이 오자 바로 퇴각한다. 그리고 그 다음달인 229년 1월에 3차 북벌이 이뤄지며, 위에 언급된 무도, 음평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둔다. 즉 2차 북벌은 아무리봐도 국지전에 불과하며 별다른 피해도 없었고, 여기까지 보면 1차 북벌은 실패, 3차 북벌은 성과가 있었다.

231년에 일어난 4차 북벌인 노성 전투의 경우 사마의와 제갈량이 서로 오래간 대치했으나, 큰 규모의 교전은 없었고 오히려 교전했을때 제갈량이 위군을 대파하고 전리품을 챙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장마로 인해 병량 수송이 곤란해지는 것을 곤란해한 촉군은 퇴각하며, 사마의가 장합에게 무리한 추격을 명령했다가 장합이 전사한다. 보다시피 여기에서도 큰 피해나 패배는 없었다.

이듬해인 232년부터 234년까지 제갈량은 농업을 장려하고 병사들을 조련하며 식량을 비축하고 북벌을 준비한다. 충분한 준비를 끝낸 끝에 단행한 것이 바로 오장원 전투이며, 이때도 위군으로 인해 촉군의 기동이 막히자 둔전을 실시하고 백성들과 함께 평화롭게 생활하며 식량을 생산했다. 백일간 대치하던 도중 제갈량이 과로와 병으로 쓰러져 죽고나서 촉군이 퇴각한 것이다.[45]

위 과정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제갈량의 북벌 중 패배하고 퇴각했으며, 큰 피해를 입은 것은 1차 북벌 뿐이다. 그 외 북벌은 전부 대치가 길어지거나 성과를 거두고 나면 퇴각한 것 뿐이며, 사실 '북벌'이란 이름이 붙었기에 실패라고 규정하는 것이지 국지전 측면에서 보면 그 과정에서 촉한의 영향력이 조금씩 넓어졌기에 (1차를 제외하면) 실패라고 잘라 말하기도 힘들다. 물론 전쟁 자체가 물자를 많이 소모하는 행위이지만, 제갈량은 4차북벌 당시 보리를 수확하거나 5차 북벌 당시 둔전으로 자체 식량 생산을 하면서 버티곤 했고, 2차 북벌 당시처럼 본국에서 가져온 병량으로만 버틸 때는 단기전(20일)만 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리고 3차 북벌처럼 장기 원정을 간 이후엔 3년에 가까운 휴식기를 통해 국력을 회복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그 과정에서 관개 시설과 기반 시설을 보수, 신축하는 과정을 거쳤다.

북벌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기록을 보면 제갈량의 북벌이 무리했다거나, 나라를 쥐어짜고 국력을 소모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기간동안 나라의 경제를 정비했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애초에 제갈량이 죽은 후 백성들이 그를 위한 제사를 자발적으로 지냈다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나라를 잘 다스렸는지 알 수 있다.[46][47]

4.6. 권력 찬탈 행각에 대한 무리한 변호

조위의 약점인 찬탈 행각에 대하여 어떻게든 쉴드치려고 하는데... 문제는 논리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나라는 이미 썩었으니 망할 때도 됐다'면서 조위의 찬탈을 정당화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조가 어쨌든 헌제를 지켜줬다면서 충신이라고 치켜올리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위의 천하는 조조 스스로의 힘으로 정벌해서 얻은 것인데 왜 한나라에게 돌려줘야 하냐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조위는 정당한 역성혁명을 했으니 조조는 한나라의 충신이다'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로 정리된다.
물론 당시 한나라는 썩을대로 썩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는 한 황실의 부흥을 기치로 내건 유비 세력도 한나라에 문제가 있다는 점만은 인정해서 촉과를 시행하는 등 기존의 한나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조위가 잘 했다면 여말선초의 고려가 조선으로 교체된 것 정도의 평가를 받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정통성 없으면 어떠냐 나라만 살리면 그만이지 수준의 평가를 받을 수는 있었을 것이라는 거다. 실제로 여말선초 시기의 조선도 건국과정에서 문제가 없던건 아니었지만 워낙에 고려가 푹 썩었고 조선 전반기에는 고려 후반기보다는 제대로 굴러간 편이기에 조선의 건국과정과 건국 후 일들에 대한 비판은 있어도 조선 건국 자체에 대한 비판은 전무하다고 봐도 좋다.

문제는 조위에는 권력 찬탈하면 어떻냐 나라만 잘 이끌면 그만이지도 안 통한다. 조조-조비만 해도 인격이 문제가 있었고 여러 잘못을 저질렀는데 이게 보통 잘못이 아니라 조조의 잘못은 위나라의 천하통일을 가로막은 수준이며 조비의 잘못은 위나라가 허무하게 사마씨에게 무너진 단초를 제공한 수준이다. 그나마 조예는 잘 하나 싶더니 제갈량 사후 긴장이 풀어져 암군화되고 조방은 뭘 해보기도 전에 폐위되고 조모는 뭘 해보려다가 암살당하고 그 다음대인 조환때는 완전히 나라가 망한다.
이 과정에서 조위가 특별히 잘한 것은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후한 시절의 부정부패를 바로잡는 노력과 결과가 부족했다. 조위가 그나마 성공을 거둔건 후한처럼 외척과 환관이 날뛰지 못하게 했고 종친들이 나대지 못하게 한 건데 이게 수준이 심해서 외척, 환관, 종친이 안 날뛰는 것까지는 좋았는데[48] 그 공백을 죄다 귀족들이 채워버려 귀족들이 강성해져 왕조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조위의 방패막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후한 말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나라가 어지러워졌고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외척과 환관을 억제한건 좋았으나 결과는 나빴다는 것이 흠.
그 외에는 둔전제, 구현령 등을 보듯 거의 임시방편이었다.구현령은 후에 천거제와 결합해 구품관인법으로 되지만 구품관인법도 향거리선제처럼 문제가 아주 없는 제도가 아니었고 그 외의 대책들도 임시방편에 더 심한 것은 조조는 생전에 이것들을 제도화할 생각은 없고 오로지 자신의 재량에 따라 운영했다. 하지만 조조야 능력이 있었으니 자신의 재량만으로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후대의 인물들을 보면 조조보다 나았다고 할 수 없는 인물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조위가 남긴 유산은 별로 없다. 후대에 등장하는 북위의 균전제가 북위에서 갈라진 북주, 그리고 북주와 수를 지나 등장한 당나라에서도 시행되고 신라, 일본 등에서도 당나라와 비슷하게 시행된 것과 비교하면 조위 말에는 사실상 폐지되다시피한 둔전제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그나마 남긴게 있다면 그 둔전제로 둔전제는 비록 폐지되었지만 이후 둔전을 운영한 국가에는 그래도 영향을 주기는 했다.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찬탈로 건국된 위나라는 똑같이 권력찬탈을 통해 멸망한다. 반드시 그렇다는 확증은 없지만 서진의 시조인 사마의가 조조 때부터 조씨를 섬겨온 것을 감안하면 사마씨의 찬탈이 조씨의 찬탈과 연관이 아주 없다고 확정할 수도 없다.

5. 대표적인 위빠 미디어들

6. 기타

일부 지식이 얕은 위빠는 촉장들이 연의에서 모두 과장되었다고 까다가 정사 삼국지에서 하후돈의 군공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 당황한다. 하지만 이미 각종 삼국지 커뮤니티에서의 하후돈은 그저... 요즘은 전투 외에 다른 측면에서 재평가되어 행보관취급을 받기에 요즘은 이런 일이 없다. 다행인가? 이는 연의에서 하후돈을 맹장 이미지로 왜곡한 것이 원흉이며, 또한 정사에서는 하후돈의 군공보다 인품과 학식에 더 후한 평가를 주느라 한중에서 싸운 것과 같은 군사적 활약을 기록하지 않은 점도 있다.[51] 그러나 결정적으로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당대의 사서로 인정받고 있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소설이다. 그러므로 정사에 하후돈의 군공이 없는 것을 문제삼을 일이 아니라 하후돈의 군공이 연의에서 과장되게 부풀려진 점을 문제삼아야 할 일이다. 아마 나관중이 촉나라와 라이벌임을 의식할 수 있게 하후돈을 맹장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연의와 정사의 차이에 대해 더 자세한 사항은 이곳이곳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삼국지덕후들 중에서 상당히 많이 보이는 편인데, 일본의 삼국지 창작물에서는 주로 위빠 성향 작품이 많이 보인다. 창천항로, 삼국지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 등.[52] 또한 일본인이 쓴 삼국지 관련 서적들을 봐도 대부분 조조나 위나라에 우호적 평가를 내리는 서적이 많다. 그 외 조조를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에 대입해서 묘사하는 해석도 종종 나타나는 편. 보통 일본에서 노부나가는 '새 시대를 연 혁명아, 마왕, 초인' 이미지로 많이 묘사되는데, 조조에 이런 이미지를 대입해서 묘사하는 경우가 꽤 보인다.[53]

소위 정사 기반임을 내세우는 작품인 창천항로조차도 "맹장 하후돈"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작품들의 묘사는 삼국지연의에 안티테제를 자처하는 일이 많은 위빠들조차도 결국 삼국지연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코에이삼국지 시리즈 팬들에게는 아무리 위빠라도 위나라로 플레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한다. 삼국지의 여러 이벤트들이 위나라에게 너무 유리하게 돌아가는 데다가 뛰어난 능력치의 문, 무관들이 너무 많은터라[54] 위나라 선택시 난이도가 급격하게 하락해서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게임이 초면인 사람이 아닌 한 차라리 다른 약소국가나 적당한 촉이나 오를 선택해서 플레이하게 되며, 어떤 시리즈에서든 190년 시나리오를 제외하면[55] 사실상의 최종보스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상으로 틀린 것은 없고 실제로 인재도 풍부했고 국력도 가장 강했다.[56] 그래서 위나라 플레이어는 이 게임을 처음 해보는 사람 아니면 게임을 날로 먹는 사도세력 이라고 하며, 실제 위빠들도 조조세력으로 게임을 진행했다가 너무 쉬워서 촉빠로 전향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물론 촉도 엄백호(...) 등에 비하면 매우 쉬운 편이지만[57] 일부 시리즈를 제외하면 노가다를 얼마나 해야 하느냐에 따라 세력의 난이도가 결정되는지라 그래도 가장 적당한 촉과 오가 선호된다.
[1] 그 시초를 조위정통론 vs 촉한정통론으로 본다면 거의 1800년간 싸우고 있는 셈이다.[2]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3] 실제로 황석영이 2000년대 중반에 삼국지를 번역할 때 서문에서도 조조와 위나라를 높이는 경향은 일본에서 두드러진다고 언급하며, 이는 현세에서의 패권을 중시하는 풍조가 조장한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4] 그가 쓴 이문열 평역 삼국지로 100만부를 판매해 국내 위빠들을 굉장히 많이 양성시켰다.[5] 조조의 만행은 오늘날로 치면 총리나 장관에 해당하는 인물이 대통령의 직임을 월권, 공갈협박하고, 자신이 퇴임한 후에는 자식을 통해 아예 강제 하야를 시킨 것과 다름 없다. 이것은 왕-국민으로 주권의 대상만 바뀌었지 정당하게 주어진 권력을 마음대로 빼앗는 전형적인 역적의 면모이다.[6] 하다못해 명분을 중요시하더라도 실리보다는 덜 중요시하는 정도이다.[7] 현실에서는 강경 발언 등으로 사이다 이미지를 만들어 지지를 얻는 포퓰리즘으로 집권한 스트롱맨들이 나타났는데 2020년대 기준으로 탄핵되거나 연임에 실패하거나 아예 암살된 아베 등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 체계의 스트롱맨 지도자들은 대부분 정치무대의 뒷편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8] 그러나 이마저도 과장된 평가고, 무엇보다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근대 서구식 개념을 고대 사람인 조조에게 뒤집어 씌우는 격이니 어폐까지 있다.[9] 고대 농경 사회에선 인구가 곧 생산력이다. 따라서 당대 수많은 인명을 학살했던 조조는 도덕적 평가를 떠나서 생산력을 바닥으로 추락시켜 민중을 도탄에 빠트린 원흉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당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인물은 동탁, 이각, 곽사, 공손찬 등등이 있지만 주 단위로 학살을 저질렀던 인물은 조조가 유일하다.[10] 신라나 고려의 삼국통일은 뭐냐고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경우는 좀 다른 이야기다. 이 둘의 경우는 통일 시기 놓친 영토나 인구가 같은 계통의 민족이 정권을 세우면서 차지하지 않고, 타 계통의 민족들에게 넘어간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즉, 남아있는 동종 계통의 민족국가 중 사실상 유일하고 자기가 정복한 국가의 영토와 인구, 문화를 흡수했기 때문에 통일국가로 부르는 것이다. 심지어 전자는 통일 이후 넘어간 북쪽 영토에서 발해가 세워짐에 따라 통일 시대가 아닌 남북국 시대로 바꿔 부르는 추세로 변화하였다.[11] 위나라는 고평릉 사변을 계기로 249년에 조씨에서 사마씨로 권력이 완전히 넘어간 상태로 조씨황가는 껍데기에 불과한 상태였다. 또한 조모의 친위 쿠데타도 실패로 끝나서 즉 삼국의 황가 중에 가장 먼저 망한거나 다름이 없다. 또한 이때 다른 황가들은 촉한은 유선이 황호한테 정사는 맡기는 했어도 허수아비 황제는 절대 아니었다. 오나라도 손휴가 손침 일당을 멸족시키고 황권을 회복한 상태였다.[12] 항우도 천하통일을 못했다기보단 안한것에 더 가깝다.[13] 특히 위나라의 계승 과정에서의 문제점 중 하나는 명분을 무시해도 너무 지나치게 무시했다. 황제가 총애하는 동귀비, 황제의 황후 복황후, 황제의 자식들 등등을 다 죽였는데 이런데도 새 왕조의 왕가의 권위가 높기를 바란다면 터무니없는 욕심이다. 그리고 실제로 조위에서는 아예 황제인 조모가 백주대낮에 살해됨으로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14] 심지어 조비가 찬탈할때 그 자리에 있었던 여동생 헌목황후 조씨는 조모가 살해당할 때까지 살아 있었다.[15] 물론 이는 자기 아들인 조비가 헌제에게서 선양받아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영향이 크다. 유비 역시도 헌제 재위시에는 황제에는 못 앉고 한중왕까지가 다였다. 다만 애초에 별다른 업적이 없던 조비가 선양받을 수 있었던 계기가 조조가 황제의 자식을 임신한 후궁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거나 전통을 깨고 이성왕에 오르면서 안 그래도 한 왕실의 권위를 바닥까지 떨어뜨린 것 때문이다. 즉 조비가 한 황실을 직접적으로 없앴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준비작업을 다 해놓은게 조조인 셈. 조조는 자신을 천자가 되지 않고 이들을 위해 밑작업을 해놓은 주 문왕에 스스로 비유했을 정도였으며, 실제로 조비가 선양을 바로 받을 수 있게 모든 준비를 해놓았다. 실제 찬탈을 하지 않았음에도 망탁조의로 불리는게 괜히 그러는게 아니다.[16] 실제로 둔전제는 조조 사후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둔전제의 개인 소유를 금지했음에도 호족들이 소유하기도 하고 둔전에서의 세율이 5~60%로 원최 빡세기도 했다.[17] 일시적인 이유는 조조가 허도로 퇴각하고 전쟁이 잠시 끝나자 원상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업에 계속 머물고 있던 원담에 대한 병력 증원과 무기의 지원을 중단했는데, 이는 더 이상의 문제를 만들지 말고 얌전히 청주로 돌아가라는 종용에 가까웠지만, 원담은 이 행동에 크게 분노했고 이때 곽도, 신평은 원소가 생전 원담을 폐출시킨 것이 모두 심배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며 원상의 배후에 있던 심배를 비난했고, 원담은 이를 명분삼아 업성의 외문에서 원상을 습격하면서 형제관계는 또다시 파탄나고 만다.[18] 물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다. 당장에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부터가 호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한나라를 되살려냈을만큼 한나라 자체에서는 호족들의 세력이 컸다. 여기에 동한 말 개판 5분전으로 돌입하면서 그 세력이 더 세진건 덤. 때문에 조조가 아니더라도 여타 군벌들 혹은 후일 촉나라와 오나라를 건국하는 유비와 손권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런 호족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19] 당장 제갈량이 가지고있던 엄청난 권력도 유비의 유언을 들은 탁고대신에다 유비에게 임명받은 상국이라는 벼슬 덕분이었고 제갈량의 북벌도 "선황제의 유언을 받든다."라는 명분이 있었기에 강하게 밀고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촉한에서 재상들의 권력은 전부 황제에게서 빌린 것이었다.[20] 제갈각이 실패 한 번으로 훅 가버린걸로 황제의 권력이 강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갈씨는 원래 서주에 살다가 서주대학살 쯤에 형주로 이주했었던 가문이다. 애초에 강동에 기반을 둔 가문이 아니여서 강동 기반의 대호족들에 비할바가 아니었다.[21] 엄밀히 말하면 나중에 생기긴 했다. 바로 조조. 유비한테 좌장군과 예주목 직위를 줬으며 특히 좌장군은 유비가 한중왕이 될 때까지 아주 잘 써먹었다.[22] 물론 그것만으로 조조가 완전 맹탕인건 절대 아니다. 후한말에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떨어져 후한이 끝내는 시점쯤 되면 말이 후한이지 조조, 유비, 손권이 나라를 갈라먹다시피했고 그나마 조조의 영역에서도 지방 호족들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적어도 인두세를 그대로 다시 적용하여 경제를 살리는건 하늘의 별따기 수준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조처럼 천하의 일부를 차지한 유비와 손권은 성공한 일을 조조는 실패한 건 조조도 전지전능한 능력자라는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23] 이것은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조조가 서주에서 대학살을 벌인 것과 손오와의 접경 지역에 있는 10만호의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려다가 오히려 그들은 손오로 귀순해버린 것은 사서에 적혀있다. 형주에 제갈량같은 서주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기에 그 내용을 토대로 보면 적어도 백성들이 조조에게 우호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24] 일각에서는 이 백성들이 서주대학살 당시 서주에서 형주로 피신한 사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럼 더더욱 조조를 기피하는 것도 당연하다.[25] 그나마도 공융의 경우에는 이 일을 두고 후대에서 조조를 깔 정도로 평이 좋지가 않다.[26] 정확히는 의학자인 화타가 머리를 갈라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이후부터였다. 다만 머리 갈라 수술은 연의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고 실제로는 조조의 병이 불치병이라서, 혹은 조조가 그의 사상과 맞지 않아 치료를 거부하다 투옥되어 죽은 것으로 나온다.[27] 당연하지만 유비가 칭제했을 당시 조조는 죽고 없었지만 그 아들 조비는 칭제도 아닌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해 있었다.[28] 사실 이는 피장파장도 아닌게 조비와 유비의 칭제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조비는 멀쩡한 황제를 협박해 제위를 찬탈해 한나라를 멸망시켰고, 유비는 한나라가 이미 망하고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한나라를 세웠다. 어떻게 이미 없는 나라에 대해 역적이 된단 말인가? 유비가 역적이란 논리가 성립하려면 위나라에 대한 역적이라고 봐야하는데, 유비와 조위는 애초부터 적이었다. 촉한정통론을 배제하고 본다고 해도 유비의 촉한 건국은 근본적으로 실패한 한나라 부흥운동이지, 한나라의 제위를 강탈한 조비나 한나라가 아직 있는데 칭제한 원술과는 다르다.[29] 동씨와 복씨 일가가 몰살당한 이유가 헌제가 이들과 조조를 암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조조가 진짜 충신이었다면 헌제가 암살을 시도할 리가 없으며, 황제가 신하를 암살하려다가 들켜서 황후가 살려달라며 울고불고 하는데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거늘"이라고 체념하는 것 자체가 황제의 권위가 살아있다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애초에 삼국시대를 역사로 남긴 기록인 정사 삼국지는 위-진을 정통으로 봐 조조를 태조로 기록하며, 왕침의 위서처럼 조조나 조비를 미화하는 기록들도 많은 와중에 대중들이 천년 넘게 조조를 역적으로 봤다는 게 이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다. '삼국지연의 때문에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반대 케이스로 관우는 송나라 때부터 관왕의 칭호를 얻으며 민간의 영웅이었었고, 당시 유비 측은 영웅화하고 조조는 악역으로 그리던 만담가들의 화본이 삼국지평화, 정사의 기록과 저 만담들을 차용해 소설로 엮은 것이 바로 삼국지연의다.[30] 보통 선양으로 건국된 통일왕조들의 국명들은 왕으로 책봉되었을 때의 봉국의 명칭을 그대로 이어서 사용한 것이다. 예를 들면 서진의 진은 사마소가 진왕으로 책봉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31] 유비의 한중왕 작위는 명목상으로 한나라부터 받은 작위이다. 유비는 한중왕으로 오를 당시 '미리 왕 자리에 오르고 황제께 승인받겠다'는 의미로 한중왕표를 보냈다. 물론 위왕 조조가 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라 승인해줄리가 없기에 승인 과정은 생략하고 오르기만 했지만, 유비는 조조와 달리 한의 후예란 정통성이 있었고 조조는 한 황실의 정통을 깨고 황족이 아닌데도 왕 자리에 오른 것에 대한 반발 여론이 있었기에 유비의 한중왕 등극은 널리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한나라의 제위는 선위를 통해 위나라로 넘어가며 모든 권한이 위나라로 넘어갔기 때문에, '한나라의 제후 한중왕 유비'는 자동적으로 위나라의 제후로 넘어가게 된다.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조비의 신하라 자처하게 되고, 반조조 세력의 대표였던 유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거의 잃게 된다. 반면 아직 힘이 부족했던 손권은 칭신했다가 이후 칭제하게 된다. 유비와 손권이 적벽대전 당시 사실상 동등한 동맹이었음에도 정사 삼국지에 '태조가 유비와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게 이 때문이다. 유비는 당시에도 이후에도 계속해서 조조에 노골적으로 적대했기에 조조를 적대한 (즉 사관 입장에선 '태조가 충심으로 모시던 한 황실에 반기를 일으킨') 주동자가 유비라고 본 것.[32] 헌제를 모셔온 다음 선양을 무효화하면 조비는 선양받아 즉위한 군주가 아닌 단지 찬탈, 심지어는 황제를 자칭하는 수준밖에 더 안된다. 하지만 헌제에게 그런걸 할 의사가 있고 없고를 떠나 헌제를 모셔온다는 것부터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게 실질적인 득이 있는지도 의문이고[33] 사실 광무제는 처음부터 자기가 황제가 된 것도 아니고 형과 함께 거병하면서 혈통 면에서 더 정통성이 있었던 경시제를 내세웠다가 뒤통수를 맞아 형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34] 사실 광무제 유수와 유비는 혈통 면에서 크게 다를게 없었다. 광무제는 전한 6대 경제의 7남인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이고, 유비는 경제의 9남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 즉 유비와 광무제의 조상은 형제였다. (물론 유비가 훨씬 후대 인물이므로 황실 피가 더 옅단 차이는 있지만) 전한 말기 당시엔 유수 역시 유비와 마찬가지로 끗발 없는 방계 황족에 불과했고, 그 아버지 유흠은 남돈현령에 불과했다. 방계 황족이 세웠음에도 국성이 같고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했기 때문에 한나라가 다시 일어난 것으로 평가받으며, 한나라의 16대 황제로 평가받는다. 즉, 유수와 유비는 명분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촉한이 지방정권에 그쳐서 누가 정통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는 것이지, 만약 유비나 촉한이 천하를 통일했다면 당연히 한나라를 이은 것으로 평가받고 유비는 한의 30대 황제로 남았을 것이다.[35] 이 때 헌제는 아직 살아있었지만 선양 이후 헌제가 시해당했다는 소문이 촉한에 퍼졌으며, 유비는 상복을 입고 이 사실을 공표했다. 물론 위나라에 있던 인물들조차 일부 헌제가 시해당했다고 알고 있었기에 유비가 진짜로 헌제가 죽었다고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사실을 알았겠지만.[36] 심지어 한중왕은 한 황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칭하고 헌제에게 표를 올리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만약 칭제하지 않고 조위 황실을 정통으로 인정한다면 조비에게 표를 올려 인정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37] 강압적이라곤 하나 정식으로 선양한 이상 정통성이 넘어가는게 맞다 vs 찬탈이므로 무효이다.[38] 참고로 촉한 조위 정통론과 달리 손오정통론이 없는 것은 헌제에게 선양도 받지 않았고 혈통도 이어지지 않은 오나라는 명분상으로 가장 약한데다 압도적인 세력을 구축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막말로 손권의 칭제 명분은 이제 한나라도 멸망했고 '황제를 자칭하는 역적놈들 뿐이라 황제자리가 비어있으니 제가 황제하겠습니다'인데, 사실 손권이야말로 황제를 자칭할 만한 명분이 가장 약하다. 하다못해 전국옥새라도 들고 칭제한 원술보다도 명분이 부족하다.[39] 다만 여파가 없는건 아니다. 확실한 것은 이릉대전은 촉나라의 2세대가 될 인재들 다수를 저세상 보낸 참사였고 때문에 촉한은 관우 장비로 대표되는 입촉 이전부터 유비를 따랐던 1세대 장군들이 이릉대전 이전에 대부분 죽은 상황에서 그나마 남은 2세대 인재들을 싹싹 긁어모으고 그것도 모자라 항장 출신인 왕평과 강유마저 중용해야 했다. 특히 강유는 227년에야 촉한에 귀순한 인물로 이 때는 이미 유비도 죽은 뒤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촉한의 3인자격인 자리까지 올랐다. 보통 국가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인데 이는 결국 촉한에 인재난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40] 삼국지연의의 '좌자' 라는 인물이 나온 파트의 시작에 손권이 조조에게 공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진짜로 손권은 228년까지는 오왕이라고 칭했을 뿐 오나라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41] 실제로 조조와는 달리 유비는 정사든 연의든 학살한 흔적은 없다.[42] "유비의 후덕함을 나타내려 했으나 오히려 위선자처럼 되어버렸다." 고 루쉰은 평가한다.[43] 역시 노신의 평가. 하지만 노신은 알려졌다시피 정치사상에 있어 유가를 몹시 싫어했던 사람이라서, 이것을 마냥 정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44] 그나마 삼국전투기는 그 후 작가 최훈 본인이 자료를 추가적으로 수집하면서 생각이 변했는지 작품 중후반부 시기부터는 촉나라에 우호적인 묘사도 자주 집어넣는 등의 전개를 보이면서 어느 정도 논란이 줄어들었다. 단 현재까지도 초반부의 위빠 전개는 비판받는다.[45] 이를 두고 위서에서는 촉군의 군량이 다하고 형세가 불리해져 도망가던 중 제갈량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고 적었지만, 위에 언급했다시피 당시 기록을 보면 형세가 대등한 상태에서 서로 대치중이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배송지는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 어쨌거나 위서를 포함한 어떤 사서에서도 촉군의 피해가 컸다는 기록은 없다. 제갈량 본전에 따르면 사마의는 촉군이 남기고 간 영루와 처소를 방문했으며, 촉군 진영에서 도서와 양곡을 많이 노획했다고 하니 퇴각하면서 물자를 많이 포기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말은 촉군에 버리고 갈만한 물자가 많이 있었다는 뜻이니, 군량이 떨어져 불리했다는 위서의 서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46] 백성들 사이에서 이런 제사가 빈번하게 이뤄지자 촉한 조정의 신하 무리들이 유선에게 상소를 올려 사당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유선이 263년에 이에 동의하면서 첫 무후사가 만들어진다. 촉서에 따르면 제갈량이 죽자 도처에서 사당 세울 것을 청했으나 조정이 거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자 신하들이 다시 표를 올렸다고 한다.[47] 촉까들은 종종 삼국지연의가 촉한 측의 인물들을 미화했고, 이로 인해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정반대이다. 촉한의 인물들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가 높았기에 당대부터 위에 언급된 제갈량에 대한 제사처럼 이들이 추앙받았고,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공연들로 통해서 고착된 이미지를 기반으로 쓰여진 작품이 후대의 삼국지평화, 연의 등인 것이다.[48] 물론 조방 시절에 조상이 날뛴걸 보면 이마저도 완전히 성공한건 아니다.[49] 정확히는 6, 8만 타 시리즈일 경우 거기서 거기라서 의외로 빠가 없다.[참고] 비록 타 세력에게 어느정도 까일망정 백성들에게 만큼은 큰 지지를 받았고 아예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겠다며 전투중 백성들이 의용군으로 나올 정도였으며 조조가 손을 뻗자 백성들이 오니라고 기겁을 하면서 유비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꿈까지 꿨을 정도로 백성들은 조조를 두려워 했으며 유비에 대한 지지를 하는 구도였으나 8에서는 조조가 죽은후 길가의 백성들조차 조조를 애도한다는 식으로 나와서 인심까지 조조를 따르는꼴이 되어버려 졸지에 유비는 조조의 하위호환이 되어버렸다.[51] 사실 눈에 띄는 군공이 없다는 이유로 하후돈을 지나치게 폄훼하는 것도 좀 그런게, 정사에서도 하후돈은 조조의 후방을 지키는 2인자이자 정치인 역할로 조위 건국의 1등공신이다. 조조는 거병 이후 꾸준히 하후돈에게 중역을 맡겼다. 황제국이 된 위의 초대 대장군도 바로 하후돈이었다. 사실 초창기부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일을 많이 맡았던 하후돈이 진짜 능력이 없는 장군이었다면 조조가 그토록 승승장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하후돈은 맹장은 아니었더라도 다른 여러 방면에서 공이 큰 인물이었으므로, 위빠들의 만행에 대한 반발로 폐급 똥별로 폄훼되기엔 억울한 인물이다. 제갈량이 소설과 달리 신출귀몰한 전략가보단 명재상이자 정치가, 행정가였던 것처럼, 하후돈 역시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라도 정치 및 행정 면에서 군부의 거물로 조위 건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이다.[52] 일본에서 비교적 초기에 만들어진 삼국지 관련 미디어믹스와 오늘날에 나오는 미디어믹스를 비교하면 확실하게 손바닥을 뒤집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제의식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다. 카츠마타 토모하루 삼국지창천항로를 비교해보자.[53] 물론 '개혁자 조조' 이미지는 한국의 고우영 삼국지에서도 묘사된 바 있지만, 고우영 삼국지는 일본의 위빠 창작물처럼 조조를 무슨 완벽한 '초인'이나 '새 시대를 연 초월자' 수준으로 묘사하지 않는다.[54] 조조 본인은 모든 능력치가 거의 만땅이고 무력만 다소 모자란 수준으로 매 시리즈마다 능력치 총합 1위를 마크하는 장수다. 오죽하면 깡패같이 강하다고 조건달이라고 부를까.[55] 아직 본격적으로 인재가 모인 것도 아니고 옆동네가 넘사벽으로 강한 점도 있다. 반동탁 연합은 무시하자 자동으로 진행하면 조조가 옆동네한테 먹히는 경우가 다반사. 다만 유저가 잡을 경우 초반만 잘 버텨내면 마찬가지로 답이 없다.[56] 다만 역사적으로는 외부 세력과의 분쟁으로 촉이나 오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게임상에는 외부 세력이 거의 등장하지 않으므로 실제 역사보다 더 강한 셈이다.[57] 특히 영웅집결 같은 시나리오는 위촉오 셋이 가장 깡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