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량 전쟁 | ||
장소 | ||
서량 전역 | ||
기간 | ||
215년 ~ 217년 | ||
교전세력 | 유비군 | 조조군 |
지휘관 | 유비 관우 장비 황충 위연 법정 방통 황권 장임 | 조홍 하후연 염행 장합 곽회 서황 노석 |
병력 | 3만 이상 | 3만 이상 |
피해 규모 | 피해 불명 | 2만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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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절히의 대체역사소설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에 등장하는 가공의 전쟁2. 전력
2.1. 유비군
- 유비군 2만 : 본군 1만+한중군 5천+익주군(장임) 5천[1]
- 황권군 1만
- 마초+관우 : 약 1만 추정.
2.2. 조조군
- 오환족 5천 추정
- 염행군[한수군] : 8천~1만 추정.
- 하후연군 : 8천명
- 조홍군 : 5천~1만 추정.
3. 배경
3.1. 염행의 서량 귀환
215년. 유비와 손권의 임상대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 조조는 한수의 사망이 가까워졌다는 정보를 듣고 과거 서량의 유력군벌이자 한수의 사위인 염행을 파견한다. 염행은 장안에 주둔하는 하후연 및 그 산하 장합 등의 지원을 받아 위수 이북에서 빠르게 한수의 세력을 흡수했고 이에 마초가 급히 유비에게 지원을 청하자, 유비와 제갈량은 곧장 관우를 파병해 상규와 기성을 거점으로 삼아 염행을 막게 한다.염행도 뛰어난 무장이고 장안의 하후연도 그를 지원했으나, 지난 전투를 거쳐서 친조조 파벌을 거의 다 정리하고 관우가 합세한 마초는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된지 오래였고 마초와 관우가 천수군과 상규성 일대의 민심을 붙들고 저항하자 서량 전선은 대치 상태에 빠진다. 그러기를 일 년이 지난 216년 초, 지리한 전황에 질린 조조 측에서 이민족 기병을 대거 동원해 염행을 지원하자 위수 남쪽의 조조 지지세력이 재차 거병하면서 마초와 관우도 남북을 모두 막긴 버거워진다. 이에 유비 측에서도 황권과 새로이 훈련시킨 익주병들을 북상시키면서 전장은 급격히 확대된다.
4. 진행
4.1. 유비의 출병
황권의 선발대가 출발한지 몇개월이 지난 216년 초겨울. 유비는 1만의 병력을 이끌고 한중으로 출진한다.한중에서 서량-관중으로 나가는 길은 총 다섯개가 있었지만 이 길들은 대부분 조조군이 이민족 기병을 대거 동원해서 막아버린 상태였고 어떤 길을 써서 서량에 간다 해도 당장 위수를 넘거나 조조군을 공격할 방법이 전무했다.
한중에 도착한 유비군은 추후 진군로를 두고 위수 이남에 합류하는 기산도,[3] 조조의 친족이자 측근인 하후연이 주둔한 진창성으로 가는 진창도, 장안으로 가는 자오도 중에서 어디로 향할지 논쟁을 벌인다. 어느 길을 고르더라도 명백한 해답이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장수들은 유비에게 판단을 맡겼고 유비는 원역사에 제갈량이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성과를 거둔 오장원으로 가는 야곡도를 선택해 한중군 5천까지 동원한 1만 5천 병력으로 전장에 나아간다.
야곡도를 지나서 오장원에 도착한 유비군은 원 역사의 제갈량이 그랬듯 오장원에 주둔한다. 오장원은 수만 대군이 주둔하기 충분할 정도로 넓고 지키기 쉬운 요충지로 바로 앞에 위수와 미현으로 이어지는 평야가 내려다 보여 조조군 동향 감시에도 용이했다. 그러나 조조군도 멍청이는 아니라 기동력이 뛰어난 오환족 기병 수천기를 미현에 배치해 위수 일대를 철저히 순찰하고 있었고 그런 오환 기병을 뚫기엔 1만 5천의 병력으론 부족해서 유비군은 위수를 넘을 수 없었다.
4.2. 오환족
오환족 기병이 막고 있어도 어쨌든 위수는 넘어야 하는지라 방통과 법정도 고민하는 와중에 삼국시대 석사학 경력에 빛나는 유비는 오환 군주 노석이 이 시기에 신혼이라 아내를 보기 위해 멋대로 전장을 이탈했다가 처형 당하는 황당한 비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유비는 이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반드시 오환족은 허점을 보일 것이라 주장하며 매일 오환족을 관찰하게 했다. 그러기를 몇 주가 지나자 위수의 오환족 정찰병이 갑자기 배로 늘어난 것이 관측된다. 이에 유비는 결국 노석이 일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도하를 시도하라고 명령한다.
도하지는 오장원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북원으로, 이곳은 수비에 유리해서 점거만 하면 장안에서 진창성, 현친현으로 통하는 길목을 위협해 적의 보급을 끊어버릴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로 유비군 입장에선 반드시 장악해야 할 곳이었다.
곧 장비가 반대쪽인 양수 일대에서 도하를 시도하는 척 하면서 주의를 끄는 사이에 위연이 이끄는 보병들이 도하에 성공, 달려온 오환족 정찰대를 격파하고 오환왕의 부재로 오환족이 주력을 동원하지 못하는 사이 그대로 진지를 설치해버린다. 오환족의 감시를 뚫고 위수를 도하하는데 성공한 유비군 정병 4천명은 그대로 북원을 점령, 서쪽에 있는 조조군의 보급로를 끊는다.
진창성의 하후연, 현친현의 조홍 등 조조군은 당연히 상식적으로는 쉽게 뚫릴 수 없는 곳이 뚫려버렸다는 소식에 경악했고, 오환족이 배신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시간 병주 태원군에 간 오환왕 노석은 당연히 반란 생각은 전혀 없었고 아내만 데려오려했을 뿐이며 일단 아내를 챙겨서 그 다음에 조조군과 협상하면 된다는, 사실상 탈영을 한 상황에서도 이런 속편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오해를 사놓고도[4] 태원군 진양성 밖에다가 호위 500기를 대기시키고 소수로만 진양성에 들어갔다가 양습이 보낸 선비족 군대에 쫓기게 되어 죽을 위기에 놓인다.
노석이 선비기병들에게 잡히기 직전, 장비가 지휘하는 촉군기병 300기가 개입해 선비 추적대를 급습하면서 노석 일행은 가까스로 살아난다. 유비는 이 황당한 사태에 대한 미래 지식과 서량 호족인 마초에게 얻은 정보를 통해 서량에서 병주에 이르기까지의 영역에 오랜 학정과 난세로 인한 인구공백지대가 있단 사실을 깨닫고 그 곳을 루트로 삼아 장비를 보내 노석을 구한 것이다.[5]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조조군 도위를 죽여버리면서 노석은 얄짤없이 유비에게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후 병주와 관중은 배신한 오환족이 장비의 촉한군과 연합해 남하하면서 장안까지 위협당한다는 소문이 퍼지며 비상이 걸린다.
4.3. 염행의 불만 표출
서량에서는 유비군의 북원 점령으로 분위기가 뒤집힌다. 대세력인 조조가 보증하기에 염행을 따른 위수 북쪽의 호족들은 다시 줄을 갈아탈 수도 있는 분위기를 점차 드러냈고, 염행은 겁에 질려 서량병을 믿지 못하고 조조군을 호위로 달라고 청한다.그러나 열후라고 한들 조조군 내에서는 항장에 공적도 없는 염행의 입지는 낮았다.[6] 그나마 조홍이 염행에게 설득돼서 병력을 내주려던 때에 곽회가 나서서 서량인인 염행이 동향인을 불신하면 신망을 잃어 얼굴마담의 가치를 잃는다고 주장하며 훼방을 놓자 염행은 격노한다. 멱살잡이까지 간 상황에서 조홍과 장합이 뜯어말려 간신히 상황이 진정되자 곽회가 침착히 대처하면 서량인의 이반을 막을 수 있다고 염행을 설득한다.
그 이유는 첫번째로 북원에 있는 유비군 4천으로는 장안과의 연결을 완전히 끊을 수 없으며, 두번째는 조조의 원군이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는데, 당시 장강을 사이에 두고 동오군과 대치하는 조조군 주력이 관중의 급보를 들으면 강을 타고 예주까지 와서 관중에 40일 내외로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조군이 불리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 상황을 버틸 시간은 생각보다 짧을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예주와 유수구 일대의 수로를 그린 지도를 건네주자 염행도 진정할 수 있었다.
4.4. 진창성으로
염행이 설득되자 곽회는 이후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유비가 직접 출정한 만큼 유비군이 자신들의 주군이 위험해질 수 있는 길인 장안을 치는 모험을 할 수 없을테니 진창성을 공략할 것이 분명하다며 현친현의 조위군 주력도 진창성으로 가서 유비군을 막자고 주장한다.이런 곽회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법정과 방통은 무공현을 통해 장안을 향해 진격하는 동정과, 서쪽 진창성을 정벌해 서량을 완전히 장악하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전자는 평야에 가까운 무공현을 지나서 장안에 가야 하는데, 유비군은 위연과 장비에게 각자 정예 보병과 기병을 대부분 내준 상황이라 남은 병력으로 조조가 복속시킨 흉노 기병들이 지키는 무공현을 뚫고 장안까지 공략하기는 어려웠고, 하후연과 서황이 있는 진창성을 공격해 서량을 완전히 장악하고 조조군을 격파하는 게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쉬운 길은 아니었는데 조조라면 관중에 대군을 급파하는데 6주의 시간이면 충분한지라, 진창에서 시간을 낭비하면 좁은 지형의 특성상 양측에 포위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또 하나의 미래 지식이 있었던지라 망설이지 않고 진창성 공략을 결정한다.
그 미래 지식은 바로 유비가 진창성 공략을 결심한 그때, 유수구에 역병이 퍼져서 조조군과 손권군을 가릴 것 없이 곡소리가 끊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장 조조군만 해도 이전, 사마랑이 역병으로 죽었고 진림도 골골대고 있었으며, 악진 같은 이들도 병색을 보이기 시작했다.[7]
지휘부가 이럴진데 병사들의 상황은 더 심각해서 감염된 병사만 수천에 달했고 이런 병사들을 데리고 관중으로 갔다간 중원에도 역병이 퍼질 판이라 조조는 당장 관중에 지원군을 보낼수가 없었다. 관중의 친족들이 위태하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조조에겐 어찌 할 방법이 없었고 자신이 유비를 괜히 키웠고 화타를 죽여선 안됐다며 한탄할 뿐이었다.
결국 조조군은 서량에 있는 전력만으로 유비군에 맞서야하는 형편이었고 그 결과 유비군 1만과 황권, 마초, 관우의 거점 수비병력을 제외한 전 병력, 하후연과 서황의 병력과 현친현의 조홍이 짜낸 지원군까지 더해진 유비군과 조조군 양측은 진창성에서 결전을 벌이게 된다.
4.5. 진창 공방전
유비는 우연히도 본군의 장비와 위연이 각자 역할을 수행하는 사이 원역사에서 하후연을 상대한 황충이 남아있자 그에게 주장을 맡기고 법정과 같이 진창 공략을 명한다. 위수를 사이에 두고서 대치하는 유비군과 조조군도 모두 진창이 서량 전역의 결과를 결정지을 곳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대치중인 마초와 관우, 염행과 조홍이 정말로 거점을 비우고 달려오기는 쉽지 않았다.유비는 위수 일대에서 병력이 더 움직이는 건 어려우리라 판단하고 전투를 준비한다. 하후연과 서황의 군은 8천, 유비군은 1만 1천이었다. 진창성은 2~3천명의 병력을 넣으면 꽉 차는 작은 성이기에 하후연은 성 밖에 목책을 세우고 주력군을 배치했다. 본래 법정은 손해를 보더라도 즉시 공세에 들어갈 계획이었으나, 유비는 천천히 보루와 참호를 파면서 정석적으로 공략하라고 명한다. 정석적인 공략을 내놓는 유비에게 방통이 나서서 지금 6주 정도밖에 시간이 없는데 정석대로 가면 3주는 날리게 되고 그러면 더 시간에 쫓길 것이라 조언했으나, 유비는 그래도 신병인 익주군을 위해선 이런 시설들이 필요하다고 명하자 이를 따른다.[8]
그렇게 2~3주간 공성전 준비를 하던 유비군에 장임이 이끌고 온 익주군 5천명이 추가로 합류한다. 군재가 있는 장임은 앞으로 벌어질 진창성 공방이 서량 전역의 결과를 정한다는 걸 익주에서부터 간파하고 강행군을 해서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것이다. 이에 방통은 지금 온 익주군이 휴식할 이틀의 시간 뒤에 총공세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했고 유비는 이를 따라 이틀 후 결전을 벌이기로 한다.
이틀이 지나자 유비군은 진창을 향해 공세를 개시한다. 유비군은 1만 6천으로 두배에 달했기에 결전에서 수적 우세를 기반으로 조조군을 밀어붙이지만 하후연과 서황은 이를 능숙하게 막아내는 한편 오히려 서황이 나서서 익주군에게 역공까지 감행할 정도로 잘 싸웠다. 그러나 유비군도 미리 익주군에게 서황이나 하후연의 기습을 방비하기 위해 화공을 준비시키는 등 약점을 보완한 상태였기에 어느쪽도 밀리지 않았다. 이에 유비는 때마침 전해진 유수구 역병 소식을 조조군에게 알려 그들을 동요시키고자 한다.
유수구 역병 소식이 조조군에 전해지는 동시에 조조의 밀서도 하후연에게 도착하는데 내용 자체는 내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올테니 식사를 준비하라는 긍정적 내용이지만 하후연과 서황은 그 서한의 진의를 깨닫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9] 그래도 더 버티는 것 외에는 답이 없던 서황과 하후연은 밀서를 진영에 돌려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끈질기게 버틴다.
이후 공방전이 계속 이어지던 와중에 조홍과 대치중이던 관우와 황권이 위수를 타고 진창성에 도착하면서 승부의 추는 유비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10]
[1] 강행군을 따라가지 못 해 낙오된 병력까지 합하면 7~8천이나 이들의 합류 여부가 불분명하다.[한수군] [3] 천수군에 가깝기 때문에 바로 마초, 황권과 합류할 수 있다.[4] 사실 오해가 없었더라도 노석이 저지른 건 명백한 탈영이라 처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특히 본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유비군이 위수를 넘어 조조군의 보급을 끊어버렸으니 즉결처형 당해도 할 말 없는 죄다.[5] 서량은 동탁, 이각, 곽사가 통치하고 이후 관중제장의 난까지 거치면서 붕괴해버렸고, 병주는 최대치 백만에 달한다는 설이 있던 삼국시대 최대 도적단체인 흑산적들의 본거지였다. 그래서 태원군이나 일부 현들이 아니면 인구가 너무 적어서 기병 500기가 병주의 치소인 태원군으로 향하는 걸 막을 사람이 없었고, 유비도 이걸 알고 있어서 장비를 보냈던 것.[6] 그래서 조홍보다 직위가 낮은 장합이 그를 응대했다.[7] 실제로 이 시기에 삼국지하면 떠오르는 조조나 손권 측 인재들이 많이 죽었다. 상술된 이전, 사마랑, 진림은 물론이거니와 건안칠자 중 하나인 왕찬도 이때 죽었으며 손권 측에서도 노숙, 능통, 동습이 사망했고(다만 동습은 역병으로 병사한 게 아닌 사고사로 죽었다.) 병색을 보인다고 언급된 악진 역시 1년 뒤인 218년에 죽음을 맞는다.[8] 사실 유비도 조조가 유수구 역병에 제대로 물려서 당장 원군을 못 보낸다는걸 알고 있었기에 정석적인 공략을 하라 명할 수 있었다.[9] 조조가 진짜 거의 도착했으면 밀서를 먼저 보내기 보단 기병부터 보내서 적진 후방을 흔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기미도 없는데 대뜸 밀서만 왔으니 조조가 당장 못 오는 건 기정사실이라 좌절감이 들 수 밖에 없는 것.[10] 현친현의 조홍도 진창성에 병력을 보내려 했다는 묘사가 있는데 유비군이 먼저 전장에 도착했다는 건 위수를 둔 수전에서 조조군이 유비군에게 졌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