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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14:38:31

조조(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등장인물
1. 개요2. 특징3. 능력4. 작중 행적5. 평가

1. 개요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조조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본작의 메인 빌런이자 주인공의 적대자.

2. 특징

정사에 나오는 특유의 다혈질적인 성격이 잘 고증된 편이다. 관우의 다혈질적인 면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관우의 다혈질은 어린아이가 감정을 주체 못하고 있는 그대로 다 표출하는 것이라면 조조의 다혈질은 방금까지 웃으면서 친교를 나누다 돌변해 상대와 일족까지 전부 죽이고도 눈하나 깜짝 않는 섬뜩한 종류다. 오히려 사람을 죽일 때는 무척 차갑고 계산적이 되어서 그 사람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목을 쳐버린다. 다만 흥분해서 불필요한 살육을 벌이거나 직감으로는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감정이 앞서서 사고를 쳐 장기적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을 보아 다혈질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치인이면서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다보니 행동거지에 예술가적 감수성이 묻어나는데 작중 시점이 의도적으로 폭정과 살육을 저지르던 노년 시기다 보니 굉장히 잔혹하게 드러난다. 허도 데스 게임 건에 대해서 곽선호는 21세기에 데스 게임이 유행할 걸 어떻게 알고 2세기에 그걸 떠올렸냐며 시대를 앞서나간 예술 감각의 소유자는 맞다고 혀를 차면서 이를 찌라시로 유포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재미는 있어서(...) 순식간에 소문이 쫙 퍼졌고 조조는 여기에 감명을 받아 진짜 그대로 따라했다.(...)

젊은 시절부터 유비와 함께한 적이 많은 데다 유비에게 통수당한 것도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유비의 성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던 인물 중 하나이다.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지 않고 대뜸 장로를 공격해서 한중을 장악했다는 말을 듣자 이자가 정말 내가 아는 유비가 맞냐고 의문을 느끼기도 했는데 관우와 장비조차 유비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부분. 그러나 서량 전쟁 이후에는 유비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는지 유비가 전략의 성공 가망이나, 본인의 안위가 아니라 동료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고 확신해서 예측을 적중시킨다.

진군과의 대화에서 밝혀지길 조조는 한나라 자체를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보고, 순진한 유비에 비해[1][2] 자신의 찬탈은 대의가 있는 혁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수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염행을 보낸 뒤 혼자 남은 자리에서 유비가 한나라의 상징이 되었으니 때를 봐서 그 한 명만 죽이면 찬탈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다.

식자층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풍기 문란을 조성하거나, 권력이 조금이라도 흔들릴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국가가 부강해질 기회[3]를 제발로 차버리거나, 외부의 큰 적은 방관하면서 내부에선 (저항이 아닌)작은 이견 제시조차 용납하지 않는 등[4] 현대 독재자들 사이에서도 흔한 정권 보위 패턴을 보여주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미래인이자 삼국시대 석사 학위에 빛나는 곽선호가 유비에게 빙의하며 제 발등을 찍는 빌미가 된다.

위왕 즉위식을 준비하면서 드러난 내적 심리에 따르면 의외로 헌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동탁 치하에서 즉위해 당장 내일도 장담할 수 없었던 처지의 어린 헌제를 보호하고, 선제들을 몰락시킨 외척과 환관을 쓸어낸 조조 자신 같은 충신은 세상에 없다고 자부하면서 자신은 헌제가 8살에 즉위할 때부터 헌제를 봐왔으며 자신이 헌제를 키우다시피 해서 헌제가 다른 황제와 달리 30대 중반인데도 몸 건강히 살아있다는 것에 부심을 보이는데 의외로 조조의 저 말은 사실이다.

후한 황제는 광무제부터 헌제까지 총 14명인데, 광무제(62세)-명제(42세)-장제(32세)-화제(27세)-상제(0세)-안제(31세)-전소제(불명, 200일 재위)-순제(29세)-충제(2세)-질제(8세)-환제(36세)-영제(33세)-후소제(14세)-헌제(8세 즉위)로 광무제의 즉위(25년)부터 헌제의 즉위(189년)까지 164년 동안 총 14명이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은 그렇다 쳐도 평균 수명도 매우 짧은 편이라서 50세 넘게 산 게 광무제뿐이고 40세 넘게 산 게 명제뿐이다. 전한 15명까지 포함해도 고제(52세 이상)-혜제(23세)-전소제(불명, 4년 재위)-후소제(불명, 4년 재위)-문제(46세)-경제(47세)-무제(69세)-소제(20세)-폐제(33세)-선제(43세)-원제(42세)-성제(44세)-애제(26세)-평제(15세)-정안공(20세)과 비교하면 더 두드러지는데, 전한 황제들은 그래도 과반 이상이 40대는 넘겼다. 그러나 후한의 황제들은 40대를 넘긴게 헌제 이전까지는 초대 황제 광무제와 2대 황제 명제 2명 뿐이었다는 점에서 외척과 환관으로 대표되는 후한 정계의 정치적 난맥상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5]

조조와 조비 부자는 후한 왕조의 요절 징크스의 주 원인이던 외척과 환관을 모두 죽이거나 제어하고 10대 초중반의 어린 나이에 동탁, 이각, 곽사 등으로 인해 8세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면서 전대 후한 황제들처럼 언제 요절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유협의 목숨도 보전해 주어 54세까지 살 수 있게 했다. 제위는 가져갔을지언정 황폐해진 장안에서 핍박받던 유협을 구해 부족함 없이 살게 해줬고 훗날의 사마씨처럼 목숨을 빼앗지도 않아 명제 이후 200년 만에 천수를 누린 황제로 만들어줬으니 (황후, 귀비, 자식을 잃고 마지막에는 제위도 갖다 바쳐야 했던 헌제의 의사는 어쨌든 간에) 조조 부자 입장에선 헌제를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준 것 만으로도 잘 챙겨줬다 생각할 수도 있다.

전처를 죽이고 강제로 시킨 결혼임에도 사위이기 때문에 장인으로서 헌제 생전에는 황제 자리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는 반면, 그런 자신을 비난하는 손권과 유비에 대한 분노는 매우 극심하며 가능한 한 자신이 전부 끝장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막말로 자기들도 헌제가 건업이나 성도에 가서 군사와 벼슬을 포기하라고 하면 극렬히 거부할 거면서 자신한테는 그렇게 안 한다고 역적이라고 모욕한다는 것.

사실 본작의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맞설 것을 결심한 이유는 조조가 역적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승자로 남을 경우 조조의 악행이 하나의 승리 공식으로 남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며,[6] 동오 역시 역적 소리는 명분일 뿐 최소한 그 산하의 호족인 고옹, 육손 등은 중앙 조정으로부터 강동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손권을 모시고 있다. 즉, 유비와 손권 둘 다 헌제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해서 조조에게 개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곽선호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는 것을 오히려 반길 것이라고 하는데 우선 함부로 왕을 자칭한 것에 반감을 가질 반조조 세력이 있어 저항 세력의 분열을 노릴 수 있고 또 유비가 한 고조의 현신이 된다면 이를 물리칠 자신은 시대를 뛰어넘는 영웅인 초세지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역사에서는 한중왕이 된 유비를 형주 공방전에서 물리치면서 이게 실현됐었기에 유비가 한중왕이 되는 걸 꺼리는 원인이 된다.

3. 능력

유비(곽선호)의 평가로는 능력은 삼국 군주 중 제일이나, 현재 통일보다 찬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서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망탁조의 중에서 가장 그 찬탈 수법이 창의적이고 뛰어났다고.[7] 분명 악인은 맞지만 세간의 평판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위기에, 시대에 맞서서 뚫어 보였다며 높이 평가했다. 찬탈을 위해 일부만 발휘되는 능력도 어마무시해서 작중 유비는 여론전부터 시작해 서량 정벌까지 쉼 없이 조조의 허를 찌르고 피해를 누적시키지만 조조는 그때마다 역공을 가해 유비가 원하는 바를 완벽히 달성하지 못하게 만든다.

곽선호는 조조가 사람 죽이는 걸 너무 좋아하는 데다 헌제의 칙서를 마구 뿌려 적들을 제압하는 '협천자 영제후'를 쓰는 걸 보고 후한 제국의 네크로맨서라고 까기도 했다. 자신의 의대조 스킬은 조조가 헌제의 칙서라는 네크로맨서 저주 스킬을 힐러 스킬로 치료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독자들은 유비는 유비대로 네크로맨서 같다고 평했지만.

210년대 들어서는 노골적으로 찬탈 행보를 전개하는데, 낙양과 업에서 찬탈을 위한 정치를 하는 한편 본인이 대군을 가지고 있을 정당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키는데 그 주 대상은 주로 손권이 이끌고 있으며 장강을 끼고 있는 탓에 대치 이상의 행동은 하기 힘든 동오다. 만일 유비의 입촉 시기에 한중의 장로를 무너뜨린 조조가 그대로 익주까지 왔다면 유비의 입촉은 실패했을 테지만, 그러면 조조도 죽을 때까지 전쟁을 이어가야 했기에 유비를 치지 않았던 것이다.

가후의 판단 역시 유비와 비슷한데, 유비는 분명 미래에 조위를 위협할 인물이지만 역으로 그가 버티고 있기에 조위는 내부의 잠재적 반역분자들을 색출할 수 있다고 한다. 유비가 빠르게 강해지는 걸 알지만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남중국의 역량을 최대한 뽑아내도 북중국을 차지한 자신을 넘을 수는 없음을 알기에 방치하며 정치와 명분작에 몰두하는 것. 호족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익주의 비단을 구매해 사치 풍조를 조장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문제는 유비가 자신이 알던 유비가 아니라 미래인이 빙의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다 알고 있어서 조조 자신의 행위가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읽히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건 조조가 아닌 당대인 어느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작중 묘사에 따르면 조조의 제일 무서운 점은 동시대의 "상식"이 의미가 없는 존재라서 당대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이놈의 "상식"에 사로잡혀 조조를 못 따라간다는 것으로, 21세기 사람이 빙의한 유비(곽선호)만이 "상식"을 무시하고 조조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손권의 배신이 비상식적이라는 이유로 내로라하는 책사들이 예상 못한 반면 유비(곽선호)는 그 "상식" 때문에 예상 못한 거라고 평하기도 했다. 전간기아돌프 히틀러의 도박수에 내로라하는 외교관들이 죄다 휘둘린 걸 생각하면 될 듯하다.

다만 유비(곽선호)도 본인이 미래인이긴 하지만 당장 조조와 정면대결해서 이기긴 힘듦을 잘 알고 있어서 미래인이기에 알고 있는 조조의 사망 시기에 찔러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럼에도 북중국 내의 반 조조 파벌이나, 유비 본인의 수명도 생각하면 조조가 죽기 전에 승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게 딜레마.

작중 초반 시점의 조조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명의 압박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무리수를 남발해서라도 행동을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유비의 성장을 내버려둔 것도 한나라의 잔존 세력들을 끌어올린 뒤 한꺼번에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사안을 자신의 직감에 따라 처리한다. 조조가 누구를 죽일 때도 특유의 직감에 따라 죽이는데, 여백사나 화타처럼 가끔 빗나가기도 하지만 9할은 맞기 때문에 그냥 밀어붙인다고 한다. 정욱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아무리 이의를 제기해도 특유의 촉이 일어나지 않아서 뭘 말해도 내버려둔다고. 단순히 살인뿐만 아니라 위험을 피하는 것부터 정답을 찾아내는 것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특유의 촉으로 성공시켰다고 한다. 장남인 조비가 아니라 3남인 조식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것도 이 촉 때문이었고, 손권에게는 이 촉 때문에 매우 친근감을 느껴서(...) 굉장한 신뢰가 느껴진다며 정신적인 아들 취급까지 한다. 조조의 아들들 중에서 이 직감을 그나마 물려받은 사람은 조식뿐이지만, 조식은 본질이 온화해서 그 직감의 방향성이 반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조조처럼 쓰지는 못한다.

남양 결전에서 마초를 엿먹일 때 한 본인의 회상에 따르면, 적벽대전의 일이 PTSD가 되어 그 이후 대규모의 수군을 다룰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본인 전문도 아니니 어쩔 수 없지만.

4. 작중 행적

소설 시작 시점인 213년에 이미 북중국을 거의 통일한[8] 중원 최대의 세력가로 유비와는 긴 인연으로 유비와 몇 번이나 싸우면서도 좌장군으로 제수해 유비가 기반을 닦을 계기를 세워준 것도 조조다.

유비가 유장을 배신할 것이라 생각해 신경 쓰지 않고 손권을 제압하려 유수구 전투를 벌였으나, 도중에 유비가 뜬금없이 한중을 제압하고 서량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동오군에 의해 전달되자[9] 그 돗자리 장수가 서주에서 자신을 배신했듯이 유장을 배신할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정반대로 움직였다며 정말 유비 본인이 맞냐고 광분하다가 결국 철수한다.

이후 원 역사대로 유수구 전투에서 손권 상대로 별 다른 실익은 못 거둔 채 213년 기주 인근의 10여개 군을 하사받고 위 공국을 세워 위공이 된다. 말이 공작이지 기주 10개 군은 군사 경제적으로 중원의 핵심 지역이기도 하고 일반적인 왕공작의 봉작 영역을 한참 넘어선 범위라 조조의 위공 즉위는 사실상 한실을 찬탈하겠다는 예고나 다름 없었다. 비유를 하자면 큰 공을 세운 장군이 수원, 화성, 성남, 군포, 안양, 오산, 용인, 평택, 여주, 안성이라는 경기도 대부분을 자기의 땅으로 만든 꼴이라고. 실제로 이후 선양으로 가는 길을 여는 찬탈자들이 이런식으로 왕공작을 받아 선양을 받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요순의 선양과정을 따른다는 명분작을 하지만 이에 대해 유비가 요순의 선양과정이 순탄한게 아니라 정치적 암투가 있었다는 내용을 담은 죽서기년을 발굴해 퍼뜨리는 바람에 공들이던 여론조작이 방해받게 되자 이를 간다.

자신에게 가장 거슬리는 손권과 유비의 동맹에 균열을 내기 위해 일부러 유비는 내버려두고 부족한 병력으로 유비와 대치중인 하후연을 반쯤 내버리다시피 하는 반면 손권 쪽으로는 격년제로 대군을 끌고 가 대치하는 식으로 부담을 주면서 원망을 유비 쪽으로 돌리게끔 조치를 취하고 있다.

한편 내부에서는 편집증 증상을 강하게 드러내며 역심 없이 충실히 봉직하고 있던 최염과 모개를 차례로 숙청하고 교사직을 지난날 서원팔교위보다 더 폭넓게 운용해 중신을 밀착 감시한다. 그나마 감시라도 해주며 살려두는 업성의 신하들은 양호한 축이고 한실에 가까운 허도의 중신들은 죄다 죽여버릴 생각이라 처음부터 감시조차 하지 않고 있다.[10] 또한 전한 시기에 너무 잔인하다고 폐지된 육형(코,귀,생식기를 자르거나 낙인을 새기는 형)을 부활시켜서 공포 분위기는 조성하면서 노동력을 보존하는 악독한 방식을 생각해내지만 왕랑이 이를 반대하며 당장은 계획을 접는다.[11]

이후 가볍게 대치 상태만 유지하다 여차하면 신속히 후퇴하려 했던 유수구 전선에서 역병이 돌아 이전, 사마랑, 진림, 왕찬 등이 연달아 급사하고 본대 병력이 통째로 발이 묶이자 당황하면서 자신이 유비를 괜히 키운 것이 아닌가, 화타를 괜히 죽였다며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결국 서량을 지킬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장수들에게 밀서를 보내 해결책을 알려주는데 그 방법이란 접촉 가능한 친조조파 호족들을 전부 다 죽여버리는 것. 말이 좋아 친조조파지 박쥐처럼 왔다갔다할 뿐으로 지금 당장 조조군을 따르지만 곧 배신할 이들을 선수쳐서 제거해 유비에게 협력할 현지 세력을 일소, 유비가 서량의 호구와 민생을 빠르게 장악하는 걸 막아버린 것이다.[12][13] 토호들을 제거하고 확보한 위수 북쪽의 호구를 병주로 옮기는 한편 역병을 피한 군사들을 이끌고 동관을 향해 진군한다.

이어지는 북원-오장원 대치에서 직접 북원의 유비군 방어선을 순찰하는데 이전 서주, 여남 시절과 달리 틈이 없는 방어선을 보고 유비의 성장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자 이를 간다. 이후 장비와 마초가 자신을 잡기 위해 출격하자 이를 예상했다는 듯 허저와 조진을 출격시켜 가뿐히 막아낸다.

유비가 풍등에 써보낸 맹덕전을 보고는 유언비어라며 분개하는 모사들의 반응과는 상반되게, 꼭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읽은 것처럼 써낸 내용에 경악하고, 사마의의 반응을 보고 이걸로 내부의 반란분자들이 더 숨어버릴 것을 알고는 분노한다. 결국 자신의 대계를 유비가 더 방해하기 전에 재빨리 퇴각하면서 판정패 한다.

218년 가후와 장천의 대화 소식을 듣고 장천을 문초해보겠다는 노홍을 제지하면서 비록 장수-장천 부자에 대한 압박이 자신이 시킨 일이 아닌 조비의 독단이지만 조앙을 죽인 이와 그 아들이 대상이라서 일부러 방치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장천이 부르짖은 가후의 꾀를 쓴 자들은 모두 끝이 좋지 못했다는 말에 찝찝함을 느끼며 뒤이어 전해진 유비의 왕 등극 소식에 처음에는 기뻐했으나 그가 칭한 왕호가 촉한왕임을 알고 초세지걸이 되고자 꾸민 일이 꼬였음을 직감해 답답함을 느낀다.

유비가 한중으로 군마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에 장안을 예측한 참모들과 달리 양양으로 올 것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주요 제장들을 양양에 집결시킨다. 조조가 아는 유비는 자신을 믿고 봉기한 이들을 버릴 수 없기에 남양으로 올 수 밖에 없다는 것. 결전에 나서기 전 내부단합을 위해 쓰임이 다 한 노홍, 조달을 처리하기 위해 고유에게 그간 수집해온 둘의 죄상을 고하게 하고 일족까지 몰살한다. 토사구팽이라며 악다구니를 쓰는 둘에게 하고 싶은 말 전부 하게 하면서 눈 하나 꿈쩍 않는, 도리어 태연하게 지난날 죽은 군량관의 일을 거론하며 이렇게 될 줄 몰랐냐고 되묻는 간웅의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한중에 집결한 유비군 선봉대가 출병하기 직전 손권에게 표기장군 직을 내려 유비를 배신하도록 획책한다. 왕을 칭했고, 공식적으로도 좌장군인 유비와 달리 자칭 거기장군에 불과해 질투와 아니꼬움을 감추지 못하던 손권은 반색하며 유비의 뒤를 찌르는 계획에 탄력을 붙인다. 손권이 완전히 조조 손아귀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14]

유비의 형북 진군과 후음의 난 소식을 접하고 다른 신하들이 동요할 때도 이를 유비를 끝장낼 기회라며 좋아한다. 이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어서도 한 몫 했는데 상용군의 물살 특성상 유비군은 퇴각이 힘든데 조조군은 낙양부터 남양군까지 고속도로가 뚫린것과 마찬가지라 쾌속 진군으로 퇴로를 차단해 결전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이 지향하던 유교적 사상인 충효에 대해 혐오하는 모양새를 보인다.[15] 이후 조홍, 장합, 곽회, 전예 등을 남하시켜 유비를 토벌하라 명한다.

조홍의 패전을 듣고도 크게 당황한 기색 없이 보고서를 통해 전황을 즉시 파악한다. 부하들 앞에서 여유를 보이려는 의도에서인지 자신이면 승리의 향방을 좌우한 좌익에 직접 섰을 텐데 유비는 그러지 못했다고 비웃는다. 이후 조홍에게 완성을 포위하라고 지시하면서[16] 우금과 만총을 원군으로 보내려 하는데 그러면 중원과 여남이 비게되지만 조조는 그곳에 있는 반조조세력을 뿌리 뽑을 계획이라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할 기회라고 보고 위의 계획을 강행한다.

조조의 계획은 성공적이라 유비는 남양에 갇혀서 조조의 대군의 지속적인 공세로 조금씩 밀려났고, 219년 가을이 된다. 결국 유비를 돕기 위해서 경기와 위황이 허창에서 거병했으나 조조가 철저히 배치한 700명의 황궁 호위대와 둔전병 제도로 인해 결국 실패하고 업성으로 끌려온다. 조조는 위 조정에서 중용하려 했더니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알고 내심 놀라며 생각해 보니 이들 정도는 되어야 반란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직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남양에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경기와 위황처럼 신분 높은 명사를 처형하면 중원의 민심이 남양의 유비한테 쏠려 부정적인 의미로의 나비효과가 일어날 거라는 직감이 일어나 남양에서 유비군을 격퇴한 뒤에 처형하려 했지만, 경기가 한 고조를 부르짖은 직후 갑자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쳐서 위 조정의 중신들이 죄다 당황하고, 본인이 후한 한실의 제도 중 가장 싫어하던 천심을 핑계로 한 고위 인물에 대한 해임과 비난이 떠올라서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즉시 처형을 명한다. 그 직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남방이 장마로 인해 지도가 바뀌는 재앙을 맞이하고 있을 때, 이를 전혀 알지 못하고[17] 경기와 위황의 난을 명분 삼아서 한나라 관직을 가진 신하들을 모아서 원역사의 허창에서처럼 OX 퀴즈를 벌여 많은 쪽을 죽여버린다. 아랫사람들은 하필 유비가 퍼뜨린 맹덕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형을 집행하는지 이해를 못하는데 유비가 미리 길을 알려줬음에도 죽는 길을 택하는 모습을 연출해 유비에게 보내는 야유였다.

죄 없는 군량관의 죽음을 보고도 조조 아래서 온갖 더러운 일을 기꺼이 했던 노홍, 조달이나 유비가 무어라 했는지 알면서도 불 끄러나왔다며 매달리는 저들이나 절대다수의 인간들은 답안지가 뻔히 있음에도 당장의 이익, 생존을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어리석은 존재고 그들을 위해 제 혈육과 세력을 갈아가며 달려드는 유비의 행동은 무의미한 짓이라는 말을 예술가적 감수성을 발휘해 전달한 것(...)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홀로 가운데 서 있던 신하는 살려서 보내주려 했으나 스스로 기둥을 들이받아 죽음을 택함으로서 한 왕실을 위해 저항할만한 신하는 전부 사라진다.[18]그렇게 수백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해놓고도 "저런 무지렁이들 탓에 세상이 혼란스럽다"면서 한심해하는 건 덤.

그러나 이런 숙청의 와중에도 내리는 비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데 이는 조조가 중원 출신이라 형주에서 유종의 항복을 받고 적벽에서 대치할 때 잠깐 있었던 걸 빼면 남쪽에 가본 적이 없어 남쪽의 지리와 홍수의 위력을 실감할 일이 없었기 때문.

이후 양주자사 온회의 서신이 당도하자 적벽에서의 경험을 떠올려 일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뒤늦게나마 경계하라는 전령을 보내지만 이미 늦었음을 알고 있었고 이에 우금을 양번으로 보내라 명한다. 이에 사마의가 이대로 두면 문빙이 고립될테니 차라리 문빙을 보내라 권하지만 손권의 본성을 간파하고 있던 조조는 그러면 손권이 착각하고 유비 편에 붙을것이라며 문빙을 강하에 놔두라고 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조비와 조식 사이에서 후계 자리를 누구에게 줄지 고민한다.

대홍수가 양번을 휩쓸고 지나간 219년 하반기에 결국 직접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서 낙양까지 내려온다. 이미 여남과 영천은 관아를 지키는 것도 벅찬 상황에 조조가 있는 낙양의 옆인 홍농군에서조차 손랑이라는 자가 거병해 현을 하나둘씩 접수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반란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지만 결국 핵심은 완성의 유비군이라는 걸 잊지 않았고, 지방 반란은 일단 무시한 채 유비를 직접 처단할 것을 결심한다. 이에 서부의 조엄, 은서. 동남의 장료, 장패, 하후돈과 모든 정병들을 소집해 양번을 구원할 준비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손권에게 대장군 작위를 내리라고 명해 그에게 유비를 배신할 것을 응원하는 제스처를 보낸 뒤 전사했을 우금군 장졸들의 가족에게 위로금을 하사할 것을 명하나 정욱에게 유비가 우금과 포로 3만을 안 죽이고 먹여살린다는 소식을 듣자 결국 유비가 천성 탓에 자신에게 질 것이라면서 폭소한다. 조조 역시 서주와 하북에서 학살을 하고 싶지 않았으면서도 대의를 위해 했으나 유비는 그러지 못하기에 비웃은 것이다.[19] 또한 그러하면서도 유비가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한 제국의 겉치레, 위선적인 면모의 화신이 된 듯한 불쾌함을 느낀다.

그렇게 준비중에 장비와 황충에게 패한 관중군, 조홍의 군세, 하후돈이 데려온 동남군을 합쳐서 총 20만에 육박하는 대군으로 유비군과 대치한다.

정욱의 제안대로 손권의 배신을 전하는 여론전을 지시하고, 이게 먹혀서 유비가 회군하자 금방 긴장을 풀고, 추격을 자원한 조홍에게 절반 정도는 무사히 돌아가야 오나라랑 싸운다면서 여유까지 부리나... 이는 유비의 낚시였고 곽회가 전사하고 조홍마저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자 장료와 장패를 출진시켜 관우와 마초를 막는다.

그렇게 유비한테 얽매이는 와중에 여대가 사신으로 와서 문빙에게 명령해 강하수로를 열어주면 제갈량을 요격하겠다는 제안에 효과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손권이 배신하면 그대로 강하군을 빼앗기는 걸 알기에 고민한다.

그 후에도 전장에 병력을 밀어넣기 위해 정욱과 사마의의 의견대로 매복병을 끌어낼 계책을 내는 등 군의를 집행하다가 가후가 유비가 노리는 것이 따로 있다라는 말에 자신이 너무 유비의 상징성과 위선에만 시선을 집중했단 걸 깨닫는다. 유비가 노리는 것은 조조와 호응하기 위해 성문을 열게 되는 번성이었던 것. 조조가 이를 깨달았을 때 번성에서는 조인이 유비의 낚시로 황권과 장임과 싸우러 번성에서 나오고, 병력이 크게 줄어든 번성을 방통이 공격해 위연이 만총을 죽이고 만다.
이에 따라 문빙에게 길을 열라 할테니 빨리 제갈량을 막으라고 여대에게 지시하면서 유비가 본인의 이득을 위해 천하를 어지럽혔다며 유비를 원망한다. 번성을 구하기 위해 조휴와 허저를 출격시키나 결국 막히고, 조운에게 붙잡혀 번성의 끝자락에 몰린 조인은 결국 성벽에서 투신해 자결한다.

그리고 번성 주변까지 진군한 조조는 마침내 유비와 대면한다. 조조는 유비에게 자신이 평생 회복한 천하의 질서를 유비가 어지럽혀 다시 세상을 난세로 만든다고 비난하고, 손권이 강하를 통해 유비의 후방을 칠 것이니 조만간 원소를 만날 것이라고 비웃는다. 그러나 유비는 군호제 따위로 자식과 손자까지 병졸로 끌고가는 일을 없게 한다면서 응수한다.

그렇게 성과없는 설전이 끝난 이후, 한동안 대치하다가 유비가 약국현으로 빠지자 대군을 몰아 번성을 쳤으나, 2배 이상의 대군이어도 양번성과 한수를 낀 촉한군을 뚫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손권군이 패배하고 문빙마저 유비에게 항복하자 사실상 조위의 대촉 방어선이 붕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그 후에도 번성에서 대치하며 유비가 보내는 우금군 포로들의 여론전에 대응해 전군을 몰고 사열식을 진행하는 등 서로를 흔들려 애썼으나 수명이 다하기 전에 유비를 죽이는 것 외에는 조위의 안전을 보장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 남양군민들의 집과 밭을 태우고 강제로 끌고가는 잔혹한 강제 이주를 명하는 한편, 본인은 측근들 외에는 만나지 않으면서 남양으로 빠진다.

조조의 목표는 유비를 강제로 남양으로 끌어내어 변수없이 힘으로만 눌러 죽이려는 것. 그러나 남양은 평야라서 변수가 없는 대신에 조조가 유비를 포위하거나 쉽사리 추격하기도 어려웠다. 즉, 우세한 병력으로 몰아치는 게 쉽지 않다는 뜻. 가후와 정욱도 이를 진언하나 조조는 호표기와 청주병 같은 정예만 있으면 병력차가 없어도 유비를 죽일 수 있다면서 작전을 강행해 남양 결전이 벌어지게 된다.

3만 대 3만으로 맞서나 허저, 장료를 앞세우고 조홍, 장합, 장패, 조진을 배치해도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라는 유비의 포진에 조인과 서황의 부재를 아쉬워한다. 결전이 시작되자 비등했던 전황을 가후의 계책대로 마초 측에 경보병 뒤에 숨긴 철기로 기습하여 우세해지고 장패를 보내 유비를 위협한다. 그러나 유비 역시 스스로 본영을 움직이며 대담하게 나오면서 장패가 계책에 속아 발이 묶이고, 관우를 붙잡던 허저가 패배하여 전사, 전선을 누벼야 할 장료가 기동에 집중하다 장비를 놓치면서 결과적으로 다른 장수들 진영에서는 승리하기 어려워진다.

본인 역시 본대를 움직여 조진에게 합류해 유비를 공격하나 우세해 보이던 조조군이 끝내 유비에게 닿지 못하자 병사들이 조조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싶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청주병과 같은 1세대 군졸들은 조조가 엄격한 군령으로만 대했음에도 난세 속에서 조조 덕분에 목숨을 구원받은 이들이라 그것만으로도 존경하며 따랐지만, 이때 조조의 나이가 65세라는 당시 기준으로 무척 고령인 데다 워낙 전쟁을 자주 한 탓에 소모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과도기라는 현실에서 나오는 모순 때문에 관료화된 병사들이 보신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서 이렇게 된 것. 이 때문에 옛날 1세대 병졸들에게 한 번이라도 자상하게 대했어야 했나 잠깐 후회하기도 했다.
이후 조조가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 유비가 이끄는 촉한군이 그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지만 현실 부정에 빠져 도망갈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아직도 주령이나 1세대 장졸들 같은 조조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병사들이 남아있었고 그들이 몸을 던져가며 촉한군을 막아선 덕에 약간이나마 틈이 생겨 도망갈 수 있게 된다.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위해 몸을 던진 병사들에 대해 감사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 자신을 보며 그 자신조차도 그토록 증오하던 한 왕조처럼 썩어빠진 존재였음을[20] 깨닫고 극한의 좌절에 빠져 과거 본인의 친구였던 원소가 그랬듯 피를 토하고 만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으나, 원래부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패배로 인한 충격까지 합쳐져 허도로 가기도 전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자 중도에 제장들을 모아 유언을 남긴다. 일련의 전투로 조씨와 하후씨 군부 중진들이 하후돈 빼고 모두 사망해서 하후돈을 대장군으로 임명하며 이제 허도와 낙양은 지킬 수 없으니 포기하고 대신 천자와 한나라 조정을 업성으로 옮기라 지시한다. 헌제를 잘 지키며 절대로 건드리지 말 것과 남진하지 말라는 두 가지 당부를 남긴다.

남진하지 말라는 유언은 중원은 워낙 탁 트인 평야인 데다 후한의 수도권이었던 특성상 이번 패배로 주력을 상실하면서 중원 일대의 민심이 크게 흔들릴 것이 확실하고 조비의 불안정한 지위까지 합쳐져서 한동안 혼란스러워질 게 뻔하기 때문에 원소 사후 하북 정복할 때 지형상 애먹었던 하북에서 시간을 벌면서 하북의 인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재기의 여건을 마련하라는 의미였다. 헌제를 지키라는 유언은 조비가 섣불리 헌제를 해했다가 일어날 정치적 역풍뿐만 아니라, 헌제의 주변인들을 죽여서 헌제의 속을 상하게 하긴 했지만 헌제의 몸만은 끝까지 지켜주려 했던 조조는 유비에게 헌제가 넘어갔다가는 유비가 황제가 되고자 헌제를 죽일 것을 진심으로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조비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으면 일어날 정치적 역풍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여긴 것도 원인일 것이다. 한동안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조비 치세에 남하 자체를 하지 말라고 유언한 시점에서 조비에 대한 기대는 그냥 없다고 봐야 할 듯.

마지막 순간 자신은 하늘을 뒤집고 천하를 위해 백룡을 베고자 했으나 하늘에 깔려 실패했다는 말을 남기지만 휘하 신하들이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자 자신의 진정한 이해자는 숙적인 유비뿐이었나 생각하며 눈을 감는다. 이런 조조의 최후는 자신의 절친이었던 원소와 유사하면서도 다르다는 평을 듣는다.

조조 사후 1년 만에 조창과 조식은 조비의 살해미수를 피해 유비에게 도망치고 가후의 트롤링으로 조비가 모두의 눈앞에서 유협을 죽이고 자살하는 대형사고가 일어나면서 조위가 멸망하고 조조의 일족 성인 남자 200명이 마초에게 살해당하여 허망하게 몰락하게 된다. 일단 조창, 조식이 일가를 데리고 유비에게 도망쳤고 유비가 조창, 조식을 공식적으로 사면한 데다 마초가 조씨 일족을 학살할 때 어린아이는 살려줬다고 나오는 만큼 조간 같은 늦둥이는 살았을 가능성이 높아[21] 조조의 대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을 듯 하다.

5. 평가

「今天下英雄,唯使君與操耳。」(금천하영웅, 유사군여조이)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로지 사군(使君)과 이 (操)만이 있을 뿐입니다.
정사《삼국지》 「촉서」 - 선주전 논영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유비와 마찬가지로 일반인을 초월한 영웅.

본작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대외적으로는 이상주의적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좋게 보면 소시민적이고 나쁘게 보면 속물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조와 유비만은 예외인데,[22] 핑계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로 '역사적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인간은 작중 등장인물 중에서는 조조와 유비뿐이며,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3]

본작의 조조는 대단히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이며 이걸 숨기려 들지도 않는다. 허나 동시에 난세를 안정화시키는데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빼어난 능력에 뭇 사람들의 질타를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며 뒤따르는 위험도 모두 스스로 감당하는 배포를 겸비해 시대에 맞서고, 시대를 넘어서 보이려는 영웅이기도 하다. 고우영 삼국지의 사나이 조조를 떠올리게 하는, 정말 잘 만들어진 간웅 캐릭터.

재평가란 명목으로 조조의 악행들을 어줍잖은 논리로 변호 및 축소하는 작가들이나, 역으로 조조의 악행을 조명하겠답시고 조조를 일말의 매력도 느껴지지 않는 단편적인 악당으로 망가뜨리는 작가들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겠다. 동시에 빙의물에서 흔히 등장하는 미래 지식에 두들겨맞고 스러지는 악당이 아니라, 미래 지식으로 나름대로 정보전에서 우위를 점하는 유비에게 꼭 한 방[24]은 먹이고 물러나는 걸로 방심할 수 없는 숙적임을 어필하고 있다. 치명적 실책이 될 219년의 대홍수에 대한 미비한 대비도 모자란 게 아니고 남방의 기후를 겪어보지 못한 이의 당연한 반응으로 나타냈다.

그와 별개로 작품이 진행되면서 자기합리화를 비롯한 모순적인 면모도 드러내는 등 단순한 잔혹성을 배제해도 조조가 결국 악당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작가의 전작인 아! 내가 마속이다의 위나라 중진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점으로, 위나라의 사회구조를 만든 것이 조조임을 고려하면 조조 또한 그 모순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조조는 원래 한나라의 권신 정도로 만족하려 했으나 동승 등 헌제 측근들의 공격으로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찬탈을 하게 되었다는 전통적인 해석 대신, 협천자 훨씬 전부터 한왕조에 환멸을 느꼈던 것으로 그려지는 것도 이채로운 부분. 도덕 운운하며 충효를 절대시한 끝에 기상천외한 위선자들만 쏟아낸 한왕조를 진심으로 경멸하며 원소를 비롯해 그런 위선에 기대어 이름을 얻은 군웅들 다수를 자신이 쳐 없앴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원소의 맹진 학살보다 더 거대한 규모로 벌어진 서주대학살에 대해선 조금도 죄책감이 없으며, 원소 같은 위선자이자 살인마를 고작 6년상을 지냈다는 이유로 추앙한 한나라라면, 아버지 영전에 백성 10만을 죽여 바친 자신은 사상 유래 없는 효자로 떠받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냉소 가득한 야유를 보낸다. 원소를 비롯한 인물들은 충효지사를 자처하지만, 약자인 백성들은 떼죽음 당해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반면 명사 한 명의 죽음에는 분노하는 위선자에 불과하다는 것. 여기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제 식구 잃어가며 백성들을 끌아안았던 유비밖에 없다.[25]

민간인 학살을 전술이랍시고 애용하는 악랄한 모습도 보이는데 이는 조조 사후에도 위군의 기본 전술이 되었고(...) 이런 민간인 학살과 초토화는 전근대에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26] 내전에서 조조만큼 대량학살을 즐겨 쓰면 전근대라도 크게 비판받았음을 고려하면 조조가 괜히 악당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원 역사에서 헌제를 핍박하고 제위를 찬탈했지만, 의외로 헌제가 조조 덕분에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생물학적으로는 정말로 잘 보호해줬다'는 재평가를 받았다.

흔히 조조란 인물을 해석할 때 젊었을 때는 통이 컸다가 나이 들어 몸이 쇠하고 여유가 없어지니 의심이 심해져 잔혹한 짓을 연달아 벌였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작의 조조는 원래부터 잔혹한 사람이었고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 따윈 해본 적도 없으며 당장 적절한 시기가 아니어서 참았을 뿐인, 무시무시한 간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소는 살인마이며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헌제가 제명에 못 죽었을 거라며 진심으로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조조의 행각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곽선호도 조조는 그 나름대로 진심으로 시대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새 시대를 만들고자 노력한 인간이지만, 섣부르게 절제 수술을 시도하다 역효과를 낸 사람이라 평하기도 했다.

결국 마지막 남양 결전에서 그간 악행을 합리화한 대가가 뼈저리게 돌아오게 된다. 수십 년간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관장 형제를 따랐던 촉한군 병사들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버텨서 끝내 조조군을 막아냈으나, 조조의 병사들은 명분도 와닿지 않는 싸움에서 목숨을 걸기 싫어서 불리해지자 도망쳐 조홍이 죽기에 이르고, 조조 본인이 있는 본대도 무너지게 된다. 이 상황이 되자 과거 자신을 존경하던 병사들을 그리워하나, 그런 이들은 대부분 오랜 전쟁과 조조의 무관심으로 이미 흩어져버린 후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주령이나 심감과 같은 조조를 존경하던 장졸들이 적게나마 남아있었고 그들이 기꺼이 희생한 덕에 살아나갈 기회를 얻지만[27] 지금의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한 왕조와 다를 바 없이 썩어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며 죽는다.

한편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건군 1세대들은 조조 사후 하후돈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고 유비가 강동 정복에 전념하며 하북 일대가 안정되자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해 귀향을 선택했다가 위나라 조정에게 반역자로 간주되어 몰살당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이때 주목할 점은 조조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청주병 포함 1세대 장졸들은 마지막까지 조조를 조공(曹公)이라 불렀다는 점이다. 조공이라는 명칭은 조조가 군벌이 된 뒤 위공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주로 불리던 호칭인데, 이때 거두어진 장졸들은 '조공'을 자신의 구원자로 추종하고 따랐으며 조공은 아무리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도 기상천외한 수단으로 늘 위험을 극복해낸 사람이라며 사마의에 의해 죽어갈 때까지도 습관적으로 '조공'을 찾았다. 정욱 같은 최고 원로를 제외한 모두가 청주병들이 왜 저항하지 않고 몰살당했는지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법령대로 청주병을 몰살시킨 것을 기뻐하기만 하는 모습을 본 정욱은 자신들 사후에도 나라가 잘 굴러가게 하고자 엄정한 법령을 강조했었고 이번에도 법령대로 처리된 건 맞지만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며 죽는다.

이들 외에도 조조는 협천자하던 시절에는 한 정부 중앙정부의 권위 때문에 모두가 모순 없이 조조를 따랐지만, 위공 즉위로 누가 봐도 한 황실의 역적이 된 시점에서 조조의 몰락을 알린 남양 결전 당시까지 사람들은 한나라와 위나라의 과도기라는 특성으로 인해 모순점을 느껴 조금만 상황이 흔들리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본작에서는 최후에 유비에게 패배하며 원소 꼴이 나는데, 하늘을 뒤집고자 했지만 하늘에 깔렸다는 조조의 유언이 단순히 자신의 악행으로 인해 유비에게 패배한 것뿐만 아니라 조조의 삶을 그대로 함축해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조조의 행동으로 인한 부작용이 너무 심각해서 시대의 악당이 되었기 때문.


[1] 진군과의 대화로 유비는 그저 십상시 때문에 한실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나 조조는 당시 황제인 영제가 어떤 패악질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봤기 때문에 그렇기에 자신이 가는 찬탈의 길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드러난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조 시점의 판단일 뿐 유비도 영제-헌제 시기에 한실이 패악질을 저지른 죄업이 있다는 건 인식하고 있었다.[2] 주인공 유비 또한 한나라의 온전한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3] 유엽이 제안한 서량-형남 정벌. 서량은 현지 호족들이 친조조와 반조조 사이에서 눈치 게임을 하는 가운데 서량 내 반조조 세력의 맹주인 마초는 간신히 기성과 상규성만 확보한 상태라 조조의 대군이 도착하면 단숨에 저울이 기우는 형국이었으며, 형주는 남쪽만 유비 소유인 상태에서 2번에 걸쳐 군사를 차출해 익주로 보낸지라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쳐내려 가면 어느 정도 버티더라도 결국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조조는 이 제안을 거절하며 결국 마초가 살아나고 유비가 성장할 시간을 줘버렸다.[4] 다만 정치와 상관 없는 군사 부분에서의 의문 제기나 이견은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잘 들어주며 조리 있게 설명해준다.[5] 당시 중국 귀족 사회에서 빈번했던 수은 사용을 원인으로 들기도 하나 후한 이전인 진시황 시절에도 수은은 빈번히 쓰였고 하안의 오석산 일화에서 알 수 있듯 헌제 시절이라고 수은을 적게 쓴 것도 아닌데 유독 후한 황제들의 요절이 심하고, 조조가 끼고 있던 헌제만 54세까지 산 것은 요절의 결정적인 요인이 따로 있었다는 뜻이며 헌제를 모시던 조조가 어느 정도 그 요인을 막아냈다는 뜻이기도 하다.[6] 실제로 원 역사의 조조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조조의 수법이 후대에 나쁜 방향으로 선례가 되어 589년까지 이어지는 위진남북조시대 잔혹사의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7] 사마의는 조조를 그대로 따라하기만 해서 창의성이 없었다고 평했다.[8] 거의 통일이라 한 이유는 서량과 한중에서 조조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는 마초와 장로가 세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9] 당연히 니네 뒷마당 털리게 생겼다며 조조군을 흔들기 위한 동오군의 술책이다.[10] 원소를 꺾은 후 원소와 내통한 이들의 편지를 보지 않고 태워버린 건 관대함의 소산이 아니라 어차피 나중에 죽여버릴 생각이었기에 당장 참았을 뿐이다.[11] 물론 왕랑이 센스있게 역적 놈들은 바로 죽여야지 굳이 고문해서 다른 힘 뺄 필요가 있냐고 말한 덕에 왕랑 본인이 조조를 거슬렀음에도 죽음은 피했다.[12] 연회에 참석했다 제거되는 국연 등은 원역에서도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되는 인물들이다. 유서 깊은 서량의 자립성은 몇 번 잘 해준다고 꺾어질 게 아니고, (유비가 명분으로 쓸수야 있겠지만)몇 번 가혹하게 대했다고 더해질 것도 아니다보니 포기하고 나오기로 한 마당에 유비에게 편한 일을 시켜줄 이유가 없다고 본 것.[13] 유비군의 대전략 융중대는 빙의한 주인공 유비의 활약으로 훨씬 더 강력하고 대대적인 공세가 가능해야 하는데 결국 일익을 맡아줘야 할 량주 방면의 호구가 부족하면 조조군의 대응이 원 역사처럼 형주 방면으로 쏠리게 된다. 조조가 융중대를 구체적으로 알진 못해도 유비의 행보를 보면 향후 어디로 공세를 취할지 모를리는 없으니 예상밖의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한방 제대로 먹인 것.[14] 물론 유비 역시 제갈량을 핵심으로 대비를 해놓은 만큼 조조의 기대만큼 효과가 있을지는 불명이다.[15] 다만 실제 조조 본인은 효를 혐오하기는 커녕 공융을 불효죄를 명분으로 처형하는 등 오히려 한나라 시대에 생긴 효를 이용하려고 들었다. 훗날 조모가 사마소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을때도, 태후에게 불효해서 죽였다라는 명분을 붙인 것을 보면 실제 위나라는 한나라 못지않게 효의 개념이 비틀려있었다. 물론 싫어하는 것과 이용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긴 하다.[16] 이때 이것도 못하면 가산을 몰수하겠다는, 조홍 한정으론 사형보다 더 무서운 처벌을 내리겠다고 강력히 경고한다.[17] 가후조차 그깟 비가 뭐 어쨌냐는 태도인데 이는 평생을 건조하고 습지가 적은 북방에서 살아왔기에 남방의 지리와 기후에 무지한 탓에 벌어진 방심이다. 실제로도 조조나 가후나 남방에는 장판-적벽 때 이후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다.[18] 본작의 조조가 악인이지만 동탁 같이 그릇 작은 폭군은 아님을 드러내는 소소한 장면이다. 업성으로 끌려온 신하들 중에 유일하게 조조의 심중을 읽고 저항한 이였지만 죽이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죽이냐고 눈으로 묻는 허저에게 내버려두라고 명했다.[19] 다만 과거 회차에서 한 왕조의 위선을 보여주기 위해 거행했다는, 명백히 자신이 학살을 의도했다는 묘사가 나왔기에 독자들은 내로남불이라며 조롱중이다.[20] 병사들에게 자신이 증오하던 한 왕조의 충신이 겹쳐보였고, 자신이 한 왕조처럼 썩어버리고도 충신들의 목숨을 발판삼아 억지로 수명을 연장하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21] 유비의 2차 북벌이 일어났을 당시(222년) 조간의 나이는 6살밖에 안 되었다(216년생).[22] 유비는 빙의되기 전부터 작중에서 여러 차례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했던 사람임이 암시된다.[23] 조조와 유비를 제외하고 그나마 영웅 소리를 들을 만한 인물로는, 작중에서 온갖 추태를 다 보여주면서도 강동 독립에 대한 열망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강하여, 천하의 영웅은 못 되지만 강동의 영웅은 될 수 있는 사람이라 묘사되는 손권 정도가 있다.[24] 서량 전쟁에서 서량은 빼앗겼지만 점령지의 호구는 쓸어가는 걸로 서량의 저력을 절반으로 줄여버린 것이 대표적.[25] 당연하지만 그런 참극을 겪은 서주 백성들은 조조의 행위예술 퍼포먼스(...) 따위는 알 바 아니고 수십 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도 조조 하면 이를 간다. 유비 하면 회자되는 형주 10만 탈출도 대부분은 서주와 중원에서 조조의 학살을 피해 형주로 도망쳤던 사람들이 다시 도주한 것이며, 이들은 이미 조조의 잔인성을 몸소 겪어서 도망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형주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형주에 남았다가 크게 후회하게 된다.[26] 조선도 초기 여진족 부락을 상대로 학살과 초토화는 기본이었다.[27] 이때 심감의 묘사에 따르면 이런다고 조조가 자신을 기억해 주지도, 자신의 일가가 보답받지 못한다는 것도, 조조가 악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 전쟁과 기근으로 죽어가던 자신을 조조가 구해 줬고 어쨌든 조조가 손을 뻗지 않았으면 그때 죽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보답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