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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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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윤회의 문제점3. 불교에서의 윤회의 논리적 문제점4. 불교
4.1. 긍정론4.2. 부정론
5. 윤회의 의의
5.1. 부정 측 입장5.2. 긍정 측 입장
6. 타 계통 종교에서의 인식7. 관련 인물8. 과학계의 인식9. 대중매체 속 윤회
9.1. 철권에 등장하는 데빌 진의 기술9.2. 소설 템빨에 등장하는 개념
10. 관련 어록11. 같이 보기

1. 개요

윤회()는 인도 계통의 종교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의 종교 용어이다. 사람이 태어나 늙고 병들었다가 죽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1]이 마치 바퀴가 돌듯이 세상이 돌아간다고 붙인 단어로 이를 한자로 바퀴 륜(輪)을 써서 윤회(輪廻)라 하였다. 영어권에서는 흔히 reincarnation이라고 하지만 이 단어는 윤회와는 의미가 다르다.

어원을 살펴보면 '윤회'의 원어인 संसार(saṃsāra)는 산스크리트어로 '정처 없이 헤매다, 빙글빙글 돈다.'는 뜻에서 나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한자로 번역하면서 바퀴 륜(輪), 돌 회(廻) 자를 사용하여 윤회(輪廻)라 한 것이다. 그에 반해서 reincarnation은 re(재再)+incarnation(육체화肉體化)의 합성어로 죽은 생명체가 다시 육신을 얻는 것을 뜻한다. 윤회라는 말에는 '끝없이 반복한다.'는 의미가 있는 반면 reincarnation은 그런 의미가 전혀 없다. 환생을 한 번만 하는지 끝없이 하는지는 신경 안 쓰는 것. 그래서 영어권에서도 산스크리트어를 로마자로 써서 samsara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달리 삼사라(samsara)는 달리 죽음순환을 뜻하며, 원래 의미는 옮겨지다, 다시 태어난다로 달리 윤회의 모든 과정을 뜻하고 방황, 흐름, 순환적 변화, 반복되는 탄생과 생명, 죽음의 주기(혹은 탄생과 죽음, 재탄생의 순환적 개념)으로도 정의될 수 있다.

그러면서 삼사라는 시작이 없고 대부분의 경우 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달리 세계를 뜻하는 용어이기도 한데, 그 이유우주섭리에 의해 인간동물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윤회를 하게 되어있으며, 그 자체로 순환하는 모든 것들을 세계라고 표현한다. 삼라만상은 이 윤회의 굴레의 인과를 따르며[2],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 또한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제행무상삼라만상은 인연법에 의하여 모두 윤회함을 전제로 하고 삼라만상의 운행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윤회란 구체적으로는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듯, 중생이 번뇌와 때문에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생사 세계를 멈추지 않고 돌고 도는 것을 뜻한다. 즉 나 자신이 사망한 뒤 영혼이 되었다가 새로운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거친 뒤 다시 영혼이 되어 또 태어나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3] 이러한 윤회의 흐름은 일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몇 겁, 또는 몇억 겁 세월에 걸쳐 계속된다.

카스트 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연관되는 경우, 선업을 쌓으면 내세에는 더 존귀한 신분으로 태어나고, 악업을 쌓으면 내세에는 더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 이상의 능력을 지닌 존재라고 해도, 축생으로 여겨져 인간보다 못한 환생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이 죽어서 동해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지의법사(智義法師)는 이 말을 듣고 "용이란 축생의 업보인데 어찌 그것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즉 용이라 해도 결국 축생이고 불교식 윤회관으로 봐서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남만 못하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되더라도 감수하겠다고 밝히고 왕 중 최초로 동해 바다 대왕암에 장사 지냈으며 그 아들 신문왕감은사를 바다와 연결되는 수로 구조로 지어 바다의 용이 된 아버지의 넋을 위로했다.

반면에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힌두교의 윤회론을 반박하며 지금 고귀한 계급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반드시 전생에 큰 공덕을 쌓은 것은 아니라고 설파했다. 생명이 윤회를 거듭하는 한 여태까지 쌓은 공덕과 업보가 언제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생에서 고귀하고 천하고는 이전에 쌓았던 공덕과 업보가 돌아온 것일 뿐이니 이에 따른 차별을 금하고 공덕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표했다.
불교에서는 samsara-chakra라고 해서 세상을 비유적으로 혹은 말 그대로 '굴러가는 수레'라고 표현한다. 흔히 말하는 천상 세계도, 불교의 관점에서는 윤회에 속박된 상태에 불과하다. 삼계 육도(三界六道). 천상 세계에 다시 태어나도, 거기서 해탈하지 못하는 한 언젠가는 다시 죽어 환생할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면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번뇌와 업을 끊었기 때문이다. 번뇌와 업의 힘으로 윤회가 되는데, 그걸 끊었으니 더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 십이연기는 이 원리를 담은 불교 교리이다. 그리고 해탈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사람을 깨달은 자. 다른 말로 부처라고 한다.[4]

불교적 이타행의 이상인 보살은 윤회를 이미 벗어났음에도 중생에 대한 크나큰 자비심으로 윤회 세계에 들어와 화신으로서 활동한다고 한다. 서브컬처에서 ~보살의 화신이라는 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석가모니는 과거에 보살로서 억겁[5]의 세월 동안 수많은 세계에서 윤회하여,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인 부처의 영역에 도달했다고 한다. 본생담이라고 불리는 이 윤회 전생담에는 이솝 우화 등의 모티브가 된 각종 우화들이 포함된다. 여기서 보살이었던 전생의 석가모니는 사슴, 용 등의 다양한 축생으로도 태어난다.

빅쿠 아날라요(Bhikkhu Anālayo)의 《Rebirth in Early Buddhism and Current Research》(2018)에 따르면 불교 초기부터 윤회 환생은 연기, 업의 맥락에서 명확히 설명되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의 깨달음의 경험 가운데 자신과 타인의 전생에 대한 회상(回想)이 뚜렷이 존재한다.

비슷한 말로는 생사윤회ㆍ윤전ㆍ윤회생사ㆍ윤회전생ㆍ육도 윤회 등이 있다.

윤회를 정치 용어로 사용할 때에는 국가의 발전 단계에 인간의 성장 시기를 결부하여 설명하는 이론을 뜻한다.

이 윤회는 불교에서 말하는 순환론적 시간관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자 곧 끊임없이 생성소멸을 반복하는 변화(그러면서도 존재의 변화와 유전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과 만물 혹은 자연순환 원리 그 자체이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들 중에 윤회가 아닌 것이 없으며, 그렇기에 우주물리적인 순환, 그리고 흔히 알려진 대로 육도를 유전하며 받는 (生), 그리고 생사의 변이 또한 이 윤회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것은 물론, 우주자연 변화, 즉 춘하추동 사계절의 변화와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유전(流轉), 어김없이 교대하는 낮과 밤 또한 시간윤회이며, 여기저기 이곳 그곳과 같은 동서남북의 방위 변환 또한 공간윤회라고 한다.

바람구름이 엉켜 가 되고, 빗물은 다시 태양에 증발되어 수증기로 변했다가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로 변해 한 바퀴 도는 것이 바로 자연의 윤회 현상이라고 한다.[6] 또한,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인과응보 또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윤회는 철저하게 스스로 지은 대로 받는다는 자업자득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스스로 악한 일을 하였으면 괴로운 결과를 받고, 착한 일을 하였으면 즐거운 결과를 받는 자기 책임적인 것이자 자기 스스로 지은 것은 결코 회피할 수도 없고 누가 대신 받을 수도 없으머, 오로지 자기가 지은 업의 결과에 따라서 다른 세계로의 향하(向下)와 향상(向上)이 가능할 뿐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주괴공(成住壞空)[7]은 우주의 윤회와 우주가 탄생하고 소멸하기까지의 과정을 나타내고 인생과 현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고 변멸할 수밖에 없다는 철학적 개념을 나타냈고 만물이 생겨나 잠시 머물다가 쇠퇴하고 결국에는 무가 되는 순환을 의미하고 존재의 본질과 모든 현상의 무상함을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되었고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고 개인의 행동은 개인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윤회의 과정은 탄생[8], 성장과 경험[9], 죽음[10], 환생 혹은 사이클의 반복[11]가 있었고 이러한 과정은 생명과 죽음의 무한한 반복을 통해 개인이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진화를 나타내고 영적인 발전과 해방을 향한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었고 각각의 단계는 개인의 행동과 의도가 어떻게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치는지 반영한 것이었다.

결국 불교의 윤회는 힌두교의 윤회에서 시작하지만 힌두교와 다른 것은 힌두교는 윤회가 우주의 구성, 생성, 유지, 파괴의 원리[12]이지만 불교에서는 존재가 지어내는 업이 지어내는 환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각 윤회를 사는 존재는 지어낸 업으로서 윤회를 겪는 것이 실재이지만 깨닫고 업을 풀어낸 사람에게는 그저 환상일 뿐이다. 환상에서 벗어난 사람이 환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고로 불교의 본질상 윤회를 바른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윤회를 못 벗어난다면 최소한 '극락왕생'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에게 극락왕생은 방편이지 추구할 목표가 아니다. 극락왕생도 결국에는 허상에 불과하고 제아무리 많이 극락에 태어나도 결국에 득도하여 열반에 들지 못하는 이상 괴로움의 한 모습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수행은 더 좋은 가챠를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가챠란 게임을 던져 버리는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얼마든지 좋은 것이 있음을 깨닫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지 않으면 더 좋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에 또 스스로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리게 된다.

우주를 구성하는 순환적 본성이고 사계절, 하늘과 별들의 죽음과 탄생 등 모든 것들은 순환을 거친다. 탄생과 죽음, 재탄생이라는 순환의 고리로 끝없이 반복되는 존재의 순환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태어나 고통과 쾌락을 경험하고 죽고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순환(연속적인 탄생, 죽음, 재탄생의 순환)은 열반을 얻을 때까지 지속된다. 윤회는 개개인이 쌓은 업에 의하여 움직이고 작동하며 이러한 업이 쌓인 끝에 중생의 재탄생과 다음은 어떻게 태어날 건지를 결정하게 되고 윤회와 그에 따른 순환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인 업에 의해 지속된다.

우주적 맥락에서 재탄생 혹은 변화의 개념을 의미할 수 있었고 우주 전체가 지속적으로 변화 및 진화함을 의미하고 생명이나 에너지가 죽음 이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포함할 수 있었고 영혼과 생명력이 지속되고 새로운 생명체나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영혼과 생명체가 경험을 통해 진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우주의 윤회는 주기적인 변화와 순환[13], 연속성[14], 전체성[15]와 상호 의존성[16], 다양성[17]을 나타냈고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순환하는 과정을 의미했고[18]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한 과정으로 이해되었다.[19]

모든 존재와 사건의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했고 삶의 변화와 혁신을 장려하는데 쓰일 수 있었고 모든 존재가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했고 무(無)는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천이자 무한한 순환과 변화의 원천이고 우주의 모든 움직임을 조정하고 윤회의 원천적인 원리를 통해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달리 전체 우주가 영원히 반복되는 철학적 개념을 의미했고 환생과 재생이라는 개념을 포함한 채 우주와 개별적 존재가 주기적으로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옮겨간다는 사상이기도 했고 개인의 생명의 순환뿐만 아닌 우주 전체가 기원에서 종말로 주기적으로 운행한다는 큰 규모의 이해를 포함했고 시간과 존재의 흐름이 일련의 반복을 이룬다는 이해를 제시한 거와도 같았고 무한한 창조와 지속(혹은 계속)의 과정을 시사해 모든 존재는 영원히 다시 태어나 새로운 형태와 경험을 창조하는 힘이 있다 해석했고 경험을 쌓아 성장하고 진화하는 것을 의미해 각 존재와 우주 전체는 반복 속에서 배우고 성해 나가는 힘이 있음을 시사했다.

존재가 사후에도 계속되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했고[20] 카르마의 법칙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행동의 결과가 다음 환생에 영향을 미쳤고 시간의 경과나 존재의 변화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을 의미하는 영원성[21]을 지녔고 모든 존재, 동식물, 물질계에도 적용되는 보편성[22]이 있었고 우주와 개별 존재는 창조, 유지 및 존재, 파괴, 재창조의 지속적인 순환 과정을 겪였고[23] 다양한 형태와 존재 상태를 통해 에너지와 의식의 변형을 포함했다.[24] 영원 회귀 또한 존재의 순환적 측면을 암시해 우주 전체에 걸쳐 생명, 의식, 존재의 지속적인 갱신과 지속을 추진했고 우주 내에서 조건 지어진 모든 현상의 무상함을 상징했고 모든 것들은 윤회의 우주 순환의 일부로서 변화, 부패, 갱신될 수가 있었다.

우주의 윤회를 관장하는 신은 우주의 창조와 변화를 주도하고[25] 존재들의 행동과 결과를 조정하며 이를 통해 모든 존재가 지속적으로 변화 및 발전할 수 있도록 하고 모든 것들의 균형 있고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도록 관여했고[26] 윤회의 방향과 목적을 이끌어냈고 우주의 모든 측면을 이애하고 조정하고 윤회의 진행과 모든 존재의 운명을 관리할 만큼 전능했고 무한한 순환과 연격되어 시작과 끝이 없는 유희에 참여해 모든 시간과 공간을 관통했고 모든 존재의 진화와 성장을 촉진하며 개인적이고 전체적인 발전을 이끌어 내는 데 중요 역할을 했다[27]

모든 존재가 겪는 생명의 사이클과 우주의 순환적 움직임을 이해 및 조정하고 이를 통해 개인적인 생명의 주기뿐만 아니라 별과 행성의 생성과 소멸까지 관여했고 모든 존재에게 보호와 지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개인적인 성장과 진화를 지원하고 모든 존재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경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했고 우주의 질서와 진화를 조정해 모든 존재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중대한 역할을 맡았다. 창조와 유지의 힘을 지님으로서 우주를 창조하고 존재를 지배하는 법칙을 확립해 삶과 죽음, 환생의 순환이 계속되는 데 필요한 질서를 유지했고 개인의 행동의 결과를 지배하는 원인과 결과의 우주 원리인 카르마를 제어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윤회를 통해 변형과 해방을 촉진했고 존재의 의식을 변형시켜 더 높은 존재 또는 해방 상태를 향한 영적 진화 단계를 통해 그들을 안내했고 윤회 내에서 지각 있는 존재의 탄생과 재탄생을 포함해 존재의 순환을 시작하게 했고 카르마의 법칙이 지켜지고 균형을 유지하고 삶과 죽음의 지속적인 과정을 감독했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지혜와 통찰력을 지녀 존재들로 하여금 세계의 고통을 이해하고 초월하도록 안내했고 윤회와 관련된 신은 궁극적 현실과 우주의 원리(힌두교의 브라흐만 아니면 도교의 도)의 표현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고 우주의 모든 생명에 이르고 우주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보편적이고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였다.

생명과 죽음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영혼이 여려 번의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하고 성장하고 진화하는 개념으로 곧 탄생, 성장, 죽음,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혹은 재탄생)의 과정을 의미하고 인생의 주기가 단순히 선형적인 과정이 아니라 영혼의 지속적인 성자오가 교휸을 포함하는 거와 같았다. 힌두교 내에서 생명과 세계의 연속성과 변화를 설명하는 우주의 철학적 원리 중 하나로 모든 존재가 태어나 살고 죽음을 거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끝없이 반복되며 이는 우주 전체에도 에외없이 적용되었고 인간의 행동에 의해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치는, 즉 흔히 말하는 카르마에 의해 결정되고 선악의 행동이 인간의 운명과 재생에 영향을 미치며 이를 토대로 좋은 행동이든 나쁜 행동이든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발생하게 되고 다양성과 진보로 특정 지어졌다.[28]

2. 윤회의 문제점

윤회설의 문제는 차별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힌두교같이 전생의 업이 다음 생에 환생하는 계층을 결정짓는 종교인 경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윤회설의 부정적인 면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예시로는 카스트 제도를 들 수 있다.

물론 윤회설을 주장하는 불교힌두교 같은 경우 지금 살면서 내가 전생에 좋은 선업을 많이 쌓아 좋은 집안에 태어났다고 다른 생명이나 자기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을 괴롭히거나 하면 악업이 쌓여 그 과보로 다음 생에서 좋지 못하게 된다고 하지만, 사회적인 차별과 지금 현재의 현시창스러운 상황과 대우를 당사자 본인의 탓만으로 돌리는 데 이용되기 쉬움도 사실이다. 가뜩이나 전생에 죄가 기억도 안 나는데 나쁜 환경에서 태어나면 이번 생에도 또 죄를 짓게 되고 결국 다음 생에도 더 나쁘게 태어나기를 반복할 확률만 높아진다. 이쯤되면 그냥 계속 죄짓고 살고 계속 나쁘게 태어나게 만드는 시스템과 뭐가 다른가?

윤회설 역시 피해자들을 전생의 업보라며 고인드립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2015년에 발생한 네팔 대지진 때 그 재난 속에서 산모가 가까스로 구출되어 아이를 낳아 소중한 생명이라고 미담 기사로 실렸는데, 많은 비공감을 받은 댓글이 '너네들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 저렇게 태어난다'라는 어그로성 댓글. 악플러는 장난으로 썼을 수 있으나, 사실 윤회설에 따르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과거 사이비 과학인 우생학이 철저하게 금기시된 것은 약자나 약한 민족을 차별하고 탄압할 우려가 있기 때문인데, 환생설 역시 같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29]

그리고 자아나 기억의 윤회는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기억나지도, 알지도 못하는 전생의 죄 때문에 현생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불합리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처럼 될 수 있다. 전생과 전생의 죄가 기억난다면 '내가 벌을 받아 이렇게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하고 참회라도 할 수 있지만, 기억도 안 나는 일이라면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30]

환생 개념 및 윤회설은 과학계에선 인간의 공정 심리에서 기인하였다고 본다. 식량과 같은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해야 생존에 유리하고 인간은 불공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공정하지 않은 상황을 납득하려면 반드시 그 이유, 명확한 인과 관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계층을 분화시키고 소수자를 탄압하고 결과적으로 생산물을 불공정하게 분배하게 된 원인은 타고난 육체 능력이나 지능, 부모의 지위와 같이 그저 태어날 때 랜덤으로 선택되는 것들이었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불공정의 원인이 고작 운이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상황이 공정하다고 납득하기 위해(또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사실 내가 이런 부모 밑에서 이렇게 태어난 건 뽑기처럼 돌린 게 아니라 내가 과거에 한 선행과 악행의 결과다.'라는 논리를 만들어 단순한 확률에 인과 관계를 끼워 맞췄던 것이다. 그 결과 불공정을 불공정이라 인식하지 못하게 돼 차별 타파를 위한 노력 의지가 약화되는 부작용도 생겨났다.

3. 불교에서의 윤회의 논리적 문제점

잡아함경 15권에는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석가모니가 아난다에게 물었다. “큰 바다에 눈 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이 거북이는 백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머리를 내놓는데 그때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를 만나면 잠시 그 구멍에 머리를 넣고 쉰다. 그러나 이 나무를 만나지 못하면 쉬지 못하고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 거북이가 과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눈까지 먼 거북이가 백년 만에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 때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를 만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 합니다.” 아난다는 대답했다.

이에 석가모니가 아난다에게 말했다. “눈 먼 거북이가 구멍 뚫린 나무를 만나는 것보다, 어리석고 미혹한 중생이 육도 윤회에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더 어렵다. 왜냐하면 저 중생들은 착한 일을 하지 않고, 서로서로 죽이거나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괴롭혀 한량없는 악업을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너희는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내가 가르친 ‘성스러운 네 가지 진리(四聖諦)’를 부지런히 닦으라. 만약 아직 알지 못하였다면 불꽃같은 치열함으로 배우기에 힘써야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현실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리석은 중생이므로,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 중에 인간으로라도 환생하는 비율은 그렇게 못한 사람보다 훨씬 적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조차 다음 생에 인간으로 환생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성이 보편적이라고 상정할 경우에, 축생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같은 급의 짐승으로 환생하지 못하고 현재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지는 비율이 매우 높을 것이므로,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위의 존재일수록 개체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상위의 존재일수록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으며 인간의 개체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생의 수가 훨씬 많아 비율은 적어도 인간으로 환생하는 절대값은 많고, 인간이 바로 환생한다는 말은 없다는 반론도 있다.

4. 불교

4.1. 긍정론

부처님의 상수 제자 중 한 명인 목갈라나(目犍連) 존자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고 불립니다. 목갈라나 존자는 가끔씩 삼십삼천에 올라가서 천인들을 만나 어떤 공덕을 지어 천상계에 왔는지 물어보고 다시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수행자들에게 가르쳐 주곤 했습니다. 목갈라나 존자가 한 천인에게 무슨 공덕으로 천상계에 왔느냐고 물으니 그 천인은 처음에는 말을 안 하다가 결국 “저는 무 한 조각을 스님께 보시해서 이곳에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갈라나 존자가 부처님께 그런 사소한 공덕으로도 천상계에 태어날 수 있냐고 여쭈어 보니 부처님은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듣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아주 사소한 보시도 바른 신심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행하면 그로 인해 욕계 천상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일묵 스님이 들려주는 초기불교 윤회 이야기 41페이지
경전에는 삼계화택(三界火宅)이란 말이 있습니다. ‘삼계가 다 불타는 집과 같다’는 뜻입니다. 욕계·색계·무색계가 즐거움이나 고통이 많고 적은 차이는 있지만, 이 셋 모두 중생, 즉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우리가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삼계를 끊임없이 떠돌게 됩니다. 때로는 좋은 곳에 태어나 즐거움을 누리고, 때로는 나쁜 곳에 태어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이 계속 반복됩니다. 경전에 보면 중생이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과 피가 지구상에 있는 바닷물보다도 많다고 했습니다. 이 삼계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입니다.
일묵 스님이 들려주는 초기불교 윤회 이야기 18페이지
일묵은 초기 불교 경전에서 부처는 윤회와 전생, 사후 세계를 분명하게 설명하였고, 이를 근거로 윤회 개념은 불교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정 수행을 해서 선정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31]
김성구부처팔정도로 대표되는 도덕 수행과 그 결과로서의 윤회를 설했다며 부처가 이를 방편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윤회의 존재를 믿고 이를 대중에게 설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2]
기성 불교의 관점에서는 윤회와 업을 부정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여기며, 매우 중대한 악업으로 취급한다.

4.2. 부정론

흔히 윤회하면 불교를 떠올리기에 의외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불교에서도 윤회에 대한 부정론이 있다. 사실 불교에서의 윤회도 힌두교를 비롯한 인도 계통 종교에서의 윤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사후 세계와 존재의 근원에 관한 질문인 십사무기에 대해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대답을 거부하거나 침묵을 지켰다. 윤회를 부정하는 육사외도들의 주장을 부처가 배격한 것은 상주론(윤회 긍정), 단멸론(윤회 부정) 모두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을 낳는 질문이였기 때문이다. 설지강병균은 붓다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한 점을 고려할 때, 그가 말한 윤회는 무아 윤회라는 입장이라고 주장한다.[33]

흔히 윤회라 하면 죽고 난 뒤 다시 태어나는 것, 또 이승에서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서 개나 돼지로 환생하므로 착하게 살아야 하는 근거 중 하나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 철학의 과학성과 합리성에 매료됐던 사람들은 이 윤회 사상 앞에서 당혹스러워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며, 게다가 축생으로까지 환생한다고? 이 윤회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해인사 주지인 현응 스님이 펴낸 ‘깨달음과 역사’(해인사 출판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스님은 우선 사람들이 윤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윤회란 말은 본래 불교 언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윤회의 개념은 불교 이전 고대 인도 종교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붓다가 살던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은 한 번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며 끝없이 재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한다.

먹을거리와 일용품이 부족한 빈곤하고 불평등한 사회 체계에서는 삶이란 괴로움의 연속이므로 삶의 재생,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을 낳았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윤회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해탈 사상이 생겨났다는 설명이다. 이런 해탈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고행이나 제사 같은 종교적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우리 삶이란, 존재란 변화와 관계를 통해 이뤄나가는 것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에 위배된다. 현재 삶에 대한 불만족이나 고통은 단지 빈곤이나 불평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어떤 도달해야 할 ‘절대’가 존재하는 것을 전제한 사고방식이다. 이런 이들에게 현재의 삶이란 왜곡된 모습이기 때문에 탈피해야 하고 따라서 해탈해야 할 대상이다.

현응 스님은 윤회가 아니라 ‘연기’적 삶을 강조한다. 연기적 삶은 ‘나’ 혹은 ‘내 삶’에 얽매임 없이 변화와 관계로서의 열린 자세로 자유롭게 역사를 꾸려가는 것이다. 윤회가 현실에 두려움을 갖고 죽고 태어나는 일에 얽매이는 것이라 하면 연기는 삶을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원처럼 연속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시 스님의 말이다.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이니 하루에도 수만 번 나고 죽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바로 윤회의 실상 아니겠는가. 곧 윤회란 변화를 뜻하는 말이며 그 내용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다. …현 상태에서의 안주와 좌절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뜨거운 윤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34][35]

[ 어떤 이가 작성한 이에 대한 질문과 답변 ]
단순히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과 업에 의한 과보를 받는다는 '업설'은 구분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다. 환생에는 업에 의해 내생이 결정되는 불교나 힌두교 등의 윤회 환생설 외에도 업과 상관 없이 무작위적으로 내생이 결정되는 환생 또한 포함된다.

업에 의한 윤회 환생설만으로 논의를 한정 짓는다 하여도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는 힌두교의 환생과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의 환생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불교의 업설에 의거하여 오해하기 쉬운 점들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다?

불교의 업설은 과거에 지은 업 외에도 현재에 지은 업 또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비록 자신이 지었던 업이 있더라도 현재 본인의 의지에 의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본 것이다. 즉 불교의 업설 혹은 인과응보설은 과거 업의 영향을 부정하지 않으나 현재 행위에 따라 과거 업 종자(種子)의 발현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자유 의지설과 숙명론(결정론) 모두를 배격한다.

만일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불변하는 숙명이 있다면 이것은 불교의 인과나 연기설에 위배된다. 때문에 석가모니는 출생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계급을 인정하지 않고 행위에 따라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를 기반으로 하여 불교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승가 구성원의 평등을 보장하였다.
이름이나 가계는
세상에서 다만 정하여 쓰는 것일 뿐,
관습에서 생겨서 여기저기 쓰인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릇된 견해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다.
알지 못하고 그들은 단언한다.
‘출생에 의해 브라흐민이 된다.’고.

출생에 의해 브라흐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출생에 의해 브라흐민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에 의해 브라흐민이 되기도 하고
행위에 의해 브라흐민이 안 되기도 한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술자가 되고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행위에 의해 하인이 되고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고
행위에 의해 제관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제왕이 된다.

참으로 지혜로운 이는
이처럼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본다.
그들은 연기를 보는 자이며
행위와 그 결과를 잘 알고 있다.

- 맛지마니까야: 98 와셋타경, Vasettha sutta

2. 불교의 업설이 지배층의 권력강화, 신분차별, 약자와 동물 학대 및 방관/방치 등을 정당화한다?

불교의 업설을 오해하여 전생에 죄가 많은 탓에 이번 생에 약자나 동물 등으로 태어났으니 차별이나 학대를 당하여도 상관이 없다는 식의 착각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업설이 때로 왕즉불 사상과 같이 지배층의 권력 강화와 신분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배층의 자의적인 왜곡이지 불교 교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 아니며 현재 행위에 따라 업보가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석가모니는 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평등을 천명한 바 있다. 더 나아가 대승 불교의 불성, 여래장 사상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장하였으며 이로 인해 여래장 사상에 기반을 둔 선종이 평민이나 지방 호족에게 각광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본질적으로 평등의 종교이며, 신분 차별과 무관한 불교의 업설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교리를 왜곡한 지배층을 비판해야 한다. 지배층에 의한 자의적인 왜곡은 비단 불교뿐 아니라 유교, 기독교나 공산주의, 자본주의와 같은 거의 모든 종교나 사상, 이념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업설이 약자나 동물을 학대하거나 방관/방치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업설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에 해당한다.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그 과보를 받는 자작자수(自作自受)가 원칙이기에 자신의 과보는 타인과 무관하다. 따라서 업보와 관련 없는(당사자의 전생 악행과 연관이 없는) 타인이 업보를 빌미삼아 차별하거나 학대/방관/방치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를 수 없으며, 그러한 악행의 과보는 고스란히 악행을 행한 당사자가 지게 된다.

물론 바꿔 말하자면 전생에 해당 업보(악행)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사람(해당 약자(로 태어난 사람)에게 전생에 피해를 당한 사람)이면(즉 그 피해를 준 게 약자로 태어난 영향이 있는 것이면) 학대하거나 괴롭혀도 (완전히든 어느 정도든) 용인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여부에 대한 설명은 교리에 없으며 당연하게도 그 약자가 자기랑 전생의 연관성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교리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하게 상관없는 타인들까지 그런 걸 명분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수없는 윤회 환생을 거치며 모든 중생이 나의 부모가 아니었던 적이 없으므로 부모였던 중생에게 자애와 연민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또한 수없는 윤회 환생 중에 나 역시 고통받는 다른 중생처럼 괴로움을 겪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우월감이나 자만심을 갖지 말고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탈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
- 어머니의 경(Mātusutta, S15:14)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 불행의 경(Duggatasutta)

3. 불교의 선악 기준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없다?

혹자는 선악의 기준이 특정 종교에만 해당되는 특수하고 자의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보편적일 수 없고, 따라서 선악에 따른 과보도 정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의 기준은 특정 개인의 사상이나 종교 교리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리주의적인 성격을 지닌다.[36]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참으로 애호(愛護)할 만한 안온한 과보를 초래하며 유정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선업(혹은 복업福業)이라 하고, 이와 반대되는 업을 불선업(혹은 비복업)"이라고 한다. 즉, 행위의 대상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 여부로 선악의 기준이 결정되는 것이지 자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불교의 업설은 특정 종교에만 해당하는 교리가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4. 업보(과보)를 내생에만 받고 현생에는 받지 않는다?

흔히 현생에 지은 업의 과보를 마치 내생에서만 받는 것으로 착각하나 이는 불교 교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억측에 불과하다. 《아비달마구사론》에 의거한 불교학자 권오민의 설명에 따르면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는 업의 성질과 그것을 낳게 하는 인연에 따라 각기 다르다.

한 나무에 맺힌 씨앗이라 할지라도 견실하고 열등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일한 시간에 싹트지 않으며, 설사 그 같은 차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또 다른 조건, 이를테면 습도나 온도에 따라 일찍 싹트기도 하고 늦게 싹트기도 하는 것이다. 혹은 아마(亞麻)는 심은 지 세 달 반이면 그 결실을 맺지만, 보리는 여섯 달이 지나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업도 그 성질에 따라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업에는 그 과보를 낳는 시기가 결정적인 정업(定業)과 그렇지 않은 부정업(不定業)이 있다. 이를테면 무거운 번뇌나 맑고 깨끗한 마음에 의해 일어난 업, 즉 극악과 극선의 마음에 의해 조작된 업이나 습관적으로 행해진 업, 불·법·승이나 번뇌를 끊은 성자 등에 대해 일으킨 업, 그리고 부모를 해코지하는 등의 업이 정업이다.

그리고 부정업은 강력한 세력의 업이 아니기 때문에 과보를 받는 시기뿐만 아니라 이숙과의 내용도 결정되지 않은 업으로서, 이는 전적으로 또 다른 조건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유동적인 업이다.

정업에는 다시 그 과보가 현생에 바로 나타나는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 또는 順現業)과, 다음 생에 나타나는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 또는 順生業)과, 다음 생 이후에 나타나는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 또는 順後業)의 세 가지가 있다.

금강경을 비롯한 일부 경전에서는 이런 순차생수업이나 순후차수업으로 발현될 나쁜 업이라도 경전을 읽거나 수행을 함으로써 현생에 미리 발현되게 할 수 있다고 설한다.[37] 또한 이를 근거로 경을 읽었는데도 인생에 고통이 많다고 해서 경 읽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럴수록 열심히 독송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5. 하나의 업만이 존재하고 그에 대한 업보도 하나뿐이다?

오직 하나의 업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왜 업은 하나인데 과보는 다면적인지(예를 들어 가난한데 외모는 출중하거나 건강이 안 좋은데 부유한 경우 등) 의문을 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업이란 '의도적 행위'를 지칭한다. 즉 신체, 언어, 정신으로 지은 모든 의도적 행위들을 업이라고 정의하며 따라서 지을 수 있는 업도 무수히 많다.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한다.
중생은 의도를 가지고 몸(kayena)과 말(vacaya)과 마음(manasa)으로 업을 짓는다.
- 업의 논의(Kamma-Katha)

수많은 업들은 서로 내적인 직접적 원인(인, 因)과 외적인 간접적 조건(연, 緣)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여 다양한 과보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불교의 업설에 의하면 위에서 예로 든 경우처럼 다면적인 존재로 환생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6. 윤회하는 자아나 주체가 존재한다?

불교에서는 윤회하는 자아가 있다고 보지 않으며, 윤회란 그저 자성이 없는 업의 과보일 뿐이라고 본다. 다만 윤회의 자세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부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 상좌부 불교의 논서인 아비담마에서는 죽기 직전의 마음인 사몰심[38]이 먼저 일어나고, 죽음이 일어나는 순간에 찰나 동안 일어나는 재생 연결식을 거쳐, 바로 이어서 다음 생의 잠재의식(바왕가 찟따, bhavangga-citta)이 일어난다고 본다. 이 일련의 과정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명과 갈애의 힘으로 연달아 일어난다고 한다. 또한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간답바(gandhabba)라는 정신체[39]가 정자와 난자와 만났을 때 수태가 이루어진다고 설하며, 일부 논사들은 간답바가 12연기 중 행과 식 사이에 개입한다고 본다. 이 간답바에 대한 일부 상좌부 주석서의 묘사를 보면 생명이 수천 년 단위로 오래 유지될 수 있다거나, 감각 기관이 없어도 감각을 느낀다거나 하는 등 대승 불교의 중음신과 비슷한 점이 많다. 주의할 점은 사몰심이든 재생 연결식이든 잠재의식이든 간답바든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 티베트 불교를 포함한 대승 불교에서는 새로운 육체를 갖지 않은 중간 상태로서 바르도(bardo, antarabhava, 중음/중유)라는 단계가 있음을 설한다.[40] 죽을 때의 마지막 의식에 이어, 무명과 갈애의 힘으로 생전 육체와 똑같이 생긴 정기(精氣) 형태의 신체인 중음신이 생겨나고 그 신체에서의 의식이 일어난다.[41] 중음신은 중음 세계에서 최대 49일간 머무르며 다음 환생처를 찾아 여정을 떠난다. 이때는 다양한 표상들이 보이며, 생전의 업에 따라 성스러운 표상이 보일 수도 공포스러운 표상이 보일 수도 있다. 이때 만약 중음신이 인간 남녀가 성교하는 표상을 보게 되어[42] 음욕을 일으키면 중음신의 의식은 아버지의 정(정자)과 어머니의 피(난자)와 감응하고, 이때 수태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감응한 중음신의 업에 따라, 모체는 물론 집안 분위기가 좋거나 나쁜 방향의 변화를 겪기도 한다고 본다.

윤회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식의 생멸은 명상이나 경전 독송, 염불 등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그냥' 알아지기도 하고, 오온의 흐름을 역순으로 관하는 수행을 통해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되짚어 관할 수도 있다. 불교 문헌에서 '전생과 내생을 안다'라고 하면 대개 이런 체험의 영역에 해당한다. 수행자는 이를 있는 그대로 체험해서 알 뿐, 이런 전생이나 내생 역시 '나'가 아님을 알고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5. 윤회의 의의

5.1. 부정 측 입장

윤회가 실제로 존재한다 한들 현생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즉, 윤회가 존재하느냐 마느냐가 현생을 살아가는데 영향력 0%이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43]
내가 전생에 누구였는지, 어떤 업보 때문에 현생이 누구로 태어났는지는 전생의 자신이 행한 일을 알아야만 의미가 있다. 현생의 업보에 따라 죽어서 극락 혹은 지옥을 가는 것은 행동에 관한 보상 심리가 적용된다. 하지만 내가 전생에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했어도 전생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현생 내내 고생만 하다가 다음 생애 금수저로 태어난다고 해도 결국 새롭게 태어난 자에게 전생의 자신은 현생의 나와 관련 없는 남일 뿐이다. 가끔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테세우스의 배 얘기를 꺼내면서 영혼은 같고 신체만 달라졌을 뿐인데 완전히 다를 수가 있냐고 반문하기도 하는데 전생이 현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전생과 현생은 별개의 삶이다.[44] 가령 당신이 전생에 전범 또는 흉악범이었는데 처벌받기도 전에 사망했다가 환생했고, 당신이 전생에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서 현생에서 처벌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전 생에서의 가족, 친구를 환생 후엔 다시 못 만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환생 이후의 삶이 비참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다만 생각하기에 따라 완전한 소멸보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잃더라도 차라리 다른 생을 경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환생이 좋을 수도 있다. 결국 믿느냐 안 믿느냐는 자기 자유. 다만 그걸 남에게 납득시키려고 강요하지는 말자. 어느 정도는 사후 세계에 대한 환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5.2. 긍정 측 입장

부정 측 주장대로 만일 기억과 감정에 의해 '나'라고 하는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혹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는 완전히 동일한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일 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기억, 감정과 같은 정신적 요소와 신체 등 물질적 요소는 시간이 흐르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만일 기억과 감정만으로 '나'라는 존재를 정의한다면 어느 한 순간에도 동일한 '나'는 없다.
그렇다면 현생에서도 매 순간 동일한 '나'는 없기 때문에, 부정 측 주장대로라면 미래의 다른 '나'를 위해 입시 준비, 취업 준비, 노후 대비처럼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준비를 하는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다. 그저 (적어도 현생에서는)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가 같다는 착각 속에서 고생할 뿐이다.
환생을 주장하는 불교에서도 정신과 물질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고정불변한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무아(無我) 사상을 역설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명체는 '나'라는 존재가 실재한다고 착각하며 끊임 없이 윤회한다. 이렇듯 끊임 없이 변하는 '나'를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없다는 불교의 관점에 대하여 부정 측 또한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정 측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비록 과거, 현재, 미래의 '나'는 모두 다른 '나'이지만, 어떤 '나'이든 상관없이 생명체는 항상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추구한다. 전생의 기억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든 생명체가 고통을 멀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따라서 비록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 1년 후의 '나', 10년 후의 '나', 노년의 '나', 다음 생의 '나'가 모두 동일하지 않은 존재라 할지라도 지금 순간의 행복만을 추구하지 않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대비한다.
이렇듯 언제나 행복을 추구하는 생명체에게 윤회 환생과 인과의 원리는 행복을 얻고 고통을 피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윤회와 인과의 원리를 알게 되면 지금 순간의 행복만을 위해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미래에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게 된다. 따라서 윤회와 인과의 원리를 아는 사람은 인과율에 따라 선(善)을 행하고 악(惡)을 멀리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되고, 그 결과 이번 생과 다음 생까지 좋은 과보를 얻어 부, 명예, 건강, 장수 등 세속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세속적인 행복 또한 조건 따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불행해질 수 있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의 근원인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본래 '나'라는 고정불변한 존재는 없다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달아 궁극적인 행복을 얻고자 한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에게 윤회와 인과의 가르침은 좋은 과보를 얻어 수행에 필요한 정신적, 물질적 조건[45]을 갖추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생로병사가 반복되는 윤회의 끝없는 고통을 상기시킴으로써, 수행의 목표가 일시적인 행복과 평안이 아닌 윤회로부터의 해탈임을 명확히 인지하게 한다. 그리고 수행자 본인처럼 윤회의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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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타 계통 종교에서의 인식

인도 계통 종교에서의 개념이기 때문에, 다른 계통의 종교들에서는 생소한 편. 특히 내세에 그런 거 없이 천국과 지옥이 있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와 명백히 대비를 이룬다. 한편 고대 그리스에서는 환생과 유사한 관념이 있어서, 예컨대 헤시오도스는 신통기에 어떤 존재가 죽으면 저승(하데스)에 갔다가 전생을 망각한 채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신화를 기록했다. 또한 피타고라스 등 몇몇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역시 환생을 믿었고,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영지주의 일파에서도 일부는 환생을 이야기했다.

유대교기독교를 비롯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는 대체로 환생을 인정하지 않으나 예외적으로 이슬람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를 비롯한 일부 교단들은 환생을 인정한다.[46] 다만 알라위파는 물론 환생을 인정하는 교단들은 교리의 특이성 때문에 해당 종교에 속한 주류 종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에드거 케이시는 특이하게도 개신교인이면서도 윤회를 믿었는데, 이는 에드거 케이시 개인의 특이한 주장이며 기독교에서 윤회론을 주장하면 이단이다. 종종 어린 아이들이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며 실제 죽은 인물과 관련된 실제 사건을 정확히 맞추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성경에 따르면 타 종교에서 초자연적인 현상 등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는 신의 섭리하에서 일어나는 마귀의 속임수이다.
예언자라는 사람이나 꿈으로 점친다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나타나 표적과 기적을 해 보인다고 장담하고 그 장담한 표적과 기적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너희가 일찍이 알지도 못하고 섬겨본 일도 없는 다른 신들을 따르자고 하거든, 그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사람의 말을 듣지 마라.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과연 너희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지 시험해 보시려는 것이다. 너희의 하느님 야훼만 따르고 그분만을 공경하여라. 그의 명령만 지키고 그의 말씀만 들어라. 그분만 섬기고 그에게만 충성을 바쳐라. 그런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사람은 죽여야 한다. 그는 너희를 꾀어 너희로 하여금 이집트 땅에서 구출해 주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등을 돌리게 하는 자이다.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해방시켜 주신 이에게서 발길을 돌리게 하는 자이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가라고 분부하신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이다. 너희는 이런 독소를 너희 가운데서 송두리째 뽑아버려야 한다.
신명기 13장 2-6절(공동번역 성서)

7. 관련 인물

임사 체험이나 최면 치료[47] 등을 통해 윤회가 현실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많다. 특히 사후 세계나 임사 체험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윤회도 존재한다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대부분 "사후 세계는 존재하고 그곳에서 가족도 만날 수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종교에서 말하는 저승인 천국이나 낙원, 극락과 같은 인생의 종착역이 아닌 윤회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전에 경유하는 중간 환승역과 같은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윤회를 연구해서 현존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유명인은 다음과 같다.

8. 과학계의 인식

주류 과학자들은 당연히 실험, 관찰로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는 종교, 철학, 오컬트의 개념으로 생각되기에 과학의 영역이 아닌 비과학의 영역으로 보며 자기 분야가 아니므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논외의 분야이다. 하지만 과학계는 뇌 과학적 탐구와 배치되는 윤회 등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 비과학계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와 유사 과학의 형태로 발전하는 것은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다만 주류가 아닌 소수파에서는 윤회를 긍정적으로 보는 과학자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다만 이들의 주장은 비주류의 소수파에 해당되며 일반적인 주류 과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변인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근시일 내에 과학적인 실험 설계나 증명이 어렵다는 이유도 있으며 진화론적 관점으로도 아귀가 맞지 않는데, 일례로 강병균은 식물과 동물의 조상이 같으며, 따라서 모든 종은 서로 사촌일 뿐 우열이 있을 수 없는데 과업에 따라 이 생명체에 있던 의식이 저 생명체로 간다고 하는 것은 산술적으로 보아도[49]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거나 연구하는 과학자들 사이에도 전생이나 윤회는 부정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원자력 공학 박사인 다카사 히로시는 인간이 죽으면 모든 우주상의 정보가 저장되어 있는 제로 포인트 필드로 이동하고, 기존까지 전생의 명백한 증거로 이야기되었던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의 경우 전쟁이 존재하는 증거가 아닌 '아이들이 어떤 이유로인가 의식이 제로 포인트 필드와 연결되어 그 필드에 기록된 과거 인물의 정보를 이야기한 것'라고 볼 수 있다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영혼 이동은 가능하다"라고 해당 주장에 반박하는 의견도 있는 편이다.

9. 대중매체 속 윤회

9.1. 철권에 등장하는 데빌 진의 기술

철권 6 BR에서 데빌 진에게 추가된 기술. 커맨드는 8RK. 8입력을 유지해서 비공자세로 파생가능하다. 이전작 철권 6에서 데빌 진에게 추가된 연옥에서 3타를 단독으로 쓰는 기술.

점프 스테이터스 기술이기 때문에 하단과 낮은 중단기술을 피하는데다가 상단회피까지 있는 미친 기술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윤회-비공이행-아마라(비공자세에서 LK)-(바운드)-콤보를 넣지만, 비공자세에 위험이 크기 때문에 비공자세로 가지 않는 윤회로 상대방이 헛치도록 하는 낚시도 존재한다. 거기다가, 전술한대로 미친 수준의 회피성능 때문에 막판 딸피싸움에서 조커카드로 사용하기도 한다.

철권 태그 토너먼트 2에서는 오우거에게도 윤회가 생겼다. 커맨드도 같고, 역시 비공자세로 이행이 가능하다.[50] 오우거의 윤회는 오우거 몸집이 너무 크다보니 상단회피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조금 특이한 상황에서 벽콤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파트너의 태그 어설트 이후에 윤회(비공이행)으로 높은 벽꽝[51]-마르픽(비공자세에서 RP, 지상 및 공중에 있는 상대를 잡는 풀기불가능 잡기)으로 벽콤이 가능하다.

9.2. 소설 템빨에 등장하는 개념

지옥
Hell
어둠과 안식의 신
야탄
{{{#!folding [ 대악마 ] 1위 대악마
바알
2위 분쟁의 대악마
아모락트
前 3위 포식의 대악마
베리아체
4위 대악마 영혼의 왕
가미긴
5위 대악마
?
6위 도적의 대악마
발레포르
7위 대악마
아몬
8위 대악마
바르바토스
9위 지옥불의 대악마
헬가오
10위 대악마 패왕
레라지에
11위 저주의 대악마
드라시온
12위 대악마 마신
슈트리오
13위 대악마 광란의 왕
벨레드
14위 대악마
?
15위 대악마
?
16위 대악마
?
17위 대악마
보티스
18위 대악마
?
19위 대악마 괴완공
살레오스
20위 대악마 흑기사
엘리고스
21위 대악마
?
22위 대악마
오보라
23위 대악마
?
24위 대악마
네비로스
25위 대악마
단탈리안
26위 대악마
?
27위 역병의 대악마
로노베
28위 대악마
?
29위 대악마
마르코시아스
30위 대악마
?
31위 대악마
?
32위 대악마 불꽃과 어둠의 여왕
벨리알
33위 대악마
?
前 10위 복종의 대악마
푸르푸
前 22위 거짓의 대악마
베리드
번개와 권악의 대악마
아스타로트
前 13, 29위 대악마
제파르
대악마
모락스
대악마
레피르
대악마
쿠르손
30위대 대악마
로제
}}} {{{#!folding [ 야탄교 ]
야탄의 첫번째 종 분쟁의 대악마
아모락트
야탄의 첫번째 종
탈로스
야탄의 첫번째 종
리카오스
야탄의 두번째 종
지제일
야탄의 세번째 종
알리번
야탄의 네번째 종
니베리우스
야탄의 다섯번째 종
발락
야탄의 여섯번째 종
말락서스
야탄의 일곱번째 종
다크버스
야탄의 일곱번째 종
구릉
야탄의 여덟번째 종
유라
야탄의 여덟번째 종
로제
야탄의 종
퍼지스
}}} {{{#!folding [ 기타 ]
한울의 아들
대별왕
지옥달 윤회의 강
신화 속의 괴수
켈베로스
사천왕
체파르데아
데빌 슬레이어
유라
초대 바알의 계약자
베티
전대 바알의 계약자
파그마
바알의 계약자
아그너스
번헨 열도 41번째 섬
흑화 그리드
사천왕
아수라
지옥 검귀
이야루그트
}}} ||


소설 템빨 세계관 속의 게임인 'Satisfy'에 등장하는 개념. NPC가 사망하면[52] 영혼이 지옥의 '윤회의 강'으로 이동하고, 시간이 지나면 윤회해 일반적인 NPC라면 기억을 잃은 채로 다시 환생하고, 악마들은 기억을 가진 채로 윤회한다.

특수한 상황이 생기면 윤회하지 않을 수 있는데, 영혼이 계속 지상을 돌아다니거나, 아스가르드에 잡혀가 천사가 되거나, 언데드 한정으로 초월적인 네크로맨서에게 윤회의 고리를 끊기거나, 지옥에서 에게 영혼이 잡혀버리거나, 영혼이 아이템에 귀속 또는 봉인되거나, 영혼이 소멸되면 윤회가 불가능해진다.

태초신 중 지옥을 관리하며 파괴, 죽음을 담당하는 신 야탄이 지옥이 망자들의 휴식처가 되길 바라며 원래는 지옥이 평안한 곳이었다고 하지만, 1위 대악마이자 태초의 3악인 바알이 야탄에게 무슨 짓을 하며 바알이 지옥의 규칙을 왜곡해 현재와 같은 진짜 '지옥'이 되었고, 악마들은 윤회가 되지만 일반적인 NPC들 등은 윤회가 막혔다고 한다.

망자들이 모이는 곳인 '윤회의 강'은 20위 대악마 '엘리고스'가 관리하고 있고, 지옥의 정상화와 지옥의 위엄을 위해 더 높은 순위의 대악마가 될 수 있음에도 윤회의 강이 있는 20지옥에 머무르기 위해 20위 대악마에 머무르고 있다.[53] 그리고 윤회의 강에 모인 망자들에게 '보아라. 들어라. 내가, 지옥이다.'라고 하며 지옥의 위엄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망자들이 윤회하고 난 후에도 망자 동안의 경험이 약간이라도 적용이 되는 듯 하다.

10. 관련 어록

또 소천세계 티끌 수처럼 많은 보살들은 여덟 번 다시 태어난 다음에야 반드시 불도를 성취한다는 확신을 얻었으며(復有小千界 微塵數菩薩 餘各八生在 當得成佛道)

다시 사천하의 네 배, 세 배, 두 배 티끌 수에 해당하는 보살들은 각기 네 번, 세 번, 두 번 더 태어난 다음에야 반드시 성불을 하리라는 확신을 얻었고(復有四三二 如此四天下 微塵諸菩薩 隨數生成佛)

혹 사천하 그 만큼의 티끌 수에 해당하는 보살들만큼은 한 번만 더 태어나게 되면 반드시 일체지를 이룬다는 확신을 얻었으니(或一四天下 微塵數菩薩 餘有一生在 當成一切智)
- 우리말 법화경 사경, 혜조역, 분별공덕품 17
윤회는 비록 여전히 의문스럽지만 최소한 약간의 실험을 통해 지지되고 있다. 물론 내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
- 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김영사, 2001, p.345

11. 같이 보기



[1] 달리 모든 존재가 태어나 살고 성장하고 이후 죽고 다시 태어나는 무한한 영원한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의미했고 우주의 윤회의 경우 별들의 탄생과 죽음, 은하계의 형성과 해체 같은 우주적 과정의 순환을 의미했고 이러한 개념은 우주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한다는 점을 강조해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했다.[2] 삼라만상은 윤회와 다 돌고 돌아서 언젠가는 제자리로 되돌아온다고 할 수 있고 그 자체로 인과라고 하는 고리 관계로 움직이는 윤회의 반복 과정이고 삼라만상 그 자체가 윤회 법칙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볼 수가 있는 셈이다.[3] 영혼이 된다는 것이 대중적인 윤회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불교 심층 교리에서는 무아설(자아가 없다는 것)과 윤회설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윤회는 하지만 변하지 않는 고유한 개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에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 윤회와 무아가 충돌하기에 영혼에 자아가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4]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전에 저지른 업의 결과는 피할 수가 없다고 한다.[5] 삼아승지겁이라고 한다.[6] 그렇기에 만물은 이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며, 단순히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 영혼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며, 우주 만물은 항상 생사의 인과가 끈임없이 윤회하기에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고 한다.[7] 불교시간관인 세계생성 및 성립시키는 기간인 성겁, 머무르고 유지시키는 기간인 주겁, 점차 변화하고 파괴되어 가는 기간은 괴겁, 파괴되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지속되는 공겁 이 4가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만물과 삼라만상의 생성, 지속, 변화, 파괴, 소멸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물론, 모든 물질과 사물이 생겨나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4가지 현상과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자 만물의 유전 변화, 우주의 생멸 순환을 설명하는 용어다. 우주와 만물은 이 성주괴공의 순환을 끝없이 반복하며, 그렇기에 끝없이 생성과 소멸을 하게 되고 어떠한 것도 반드시 탄생, 존속, 파괴, 사멸을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변화를 계속한다. 달리 세계 혹은 삼라만상은 성주괴공에 따라 변화하며 순환한다.[8] 윤회의 첫 번째 단계이자 생명의 시작으로 이 순간부터 개인은 성장과 발전의 과정을 거친다[9] 세계에서 경험을 쌓고 배우며 성장하며 다양한 상황과 인연을 통해 행동의 결과인 카르마가 형성된다.[10] 현재의 생애가 끝나고 물리적 몸체가 죽을 때 맞이하게 된다[11] 죽음 이후 개인은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 윤회의 순환적 과정에서의 재탄생을 의미하고 개인의 카르마와 지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12] 달리 생명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우주의 원리이며 곧 생명의 법칙이다. 세계는 창조, 유지, 파괴를 거치면서 윤회에 의해 돌고 돌며 모든 존재의 현실과 과거, 현재, 미래, 인간의 운명과 삶은 어떤 절대자가 정하는 숙명이 아닌 스스로의 업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가는 창조적 과정을 뜻하기도 했다.[13] 시간이 지나면서 유사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의미로 우주는 확장되고 수축하는 주기를 겪을 수 있고 이런 과정에서 별과 은하 등이 형성될 수 있다[14] 윤회는 지속적인 과정으로 어떠한 종료나 시작 없이 지속되며 이는 시간공간에 대한 연속성을 나타내고 우주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함을 의미했다[15] 개별적인 현상보다는 전체적인 우주의 성질로 이해될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윤회의 일부이고 개별적 사건이나 현상은 우주 전체의 일부로서 윤회의 패턴을 따른다.[16] 우주의 다양한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며 복잡한 패턴을 형성했다[17] 다양한 문화와 종교에 따라 우주의 윤회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이는 개인의 신념, 문화적 배경, 학문적 관점 등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18] 시간의 경과에 따라 유사 패턴이 반복됨을 의미했다.[19] 우주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함을 의미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연속성을 나타냈다[20] 죽음과 종말을 넘어 불멸의 순환의 힘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21] 우주 전체가 무훈한 사이클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했다.[22] 달리 우주 내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와 형태 혹은 모든 감각이 있는 존재와 우주 자체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보편적인 법칙이었고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었고 탄생과 재생의 동일한 기본 과정을 따르고 연속적인 존재 주기를 통한 공통 여정을 겪고 있음을 반영 및 의미했다.[23] 우주 규모에 걸쳐 생명과 존재의 순환을 창조하는 힘을 암시했다 달리 탄생, 삶, 죽음, 재생의 순환의 과정을 나타내고 우주 내의 존재가 다양한 형태의 생명과 의식 상태를 경험하는 지속적인 순환을 따름을 암시했다.[24] 존재가 우주 내에서 다양한 단계와 경험을 통해 진화하고 발전하는 변형의 힘을 구현했다.[25] 우주의 탄생과 소멸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관리하고 각 주기에서의 변화와 발전을 촉진했고 창조를 관장하는 것으로 우주의 탄생과 모든 존재와 현상의 출현을 주도해 새로운 생명과 형태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고 반대로 파괴를 통해 존재의 끝과 변화를 상징하고 윤회의 순환 과정에서 필요한 구조적 변화를 촉진,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창조를 감독해 지속적인 변화와 진화의 순환을 촉진하고 새로운 존재의 순환을 펼쳐질 수 있도록 했다.[26] 윤회의 과정에서의 모순과 역동성을 조정하며 전체적인 질서 혹은 우주 전체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중요 역할을 했다.[27] 윤회의 주체적, 비주체적 요소를 포함해 모든 존재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28] 각 개인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영혼이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고 이는 곧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29] 문제는 이 환생설의 문제점이 종교적인 면이 강하다는 태생적인 면모상 개선이 힘들다. 원래 종교라는 것은 (그 종교가 추구하는) 선(善)을 추구하고 악(惡)을 멀리하라고 가르치고 그러기 위해서 선하게 살면 이러한 보상이 악하게 살면 저러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인도에서 발흥한 종교는 이를 환생설로 얘기하는데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랜덤으로 태어난다고 말하면 그 종교의 설득력은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보상도 같고 대가도 같다면 굳이 믿을 필요가 없으니까.[30] 간혹 전생에 내가 누구였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 주장들도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31] 알라딘 도서 소개 - 일묵 스님이 들려주는 초기불교 윤회 이야기[32] 과학의 관점으로 바라본 윤회와 전생 _ 김성구 교수 - YouTube 후반 질의응답 참조[33] "고타마에 의하면 당시의 철학자들은 결국 해결되지 않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문제로 논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확집(確執)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결과로 생각지도 않은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고타마는 이와 같은 논쟁은 의의(意義)가 없는 것이라 하여 논쟁에 가담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와 세계는 상주(常住)한 것인가 혹은 무상한 것인가? 나와 세계는 유한(有限)한 것인가 혹은 무한(無限)한 것인가? 신체와 영혼(靈魂)은 하나인가 혹은 별개의 것인가? 완전한 인격자는 죽은 뒤에 생존하는가 혹은 생존하지 않는 것인가? 등의 질문이 나왔을 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14無記> 또는 <捨置記>). 왜 대답하지 않았는가 하면 이런 식의 형이상학적 문제의 논의는 무익한 것이어서 진실한 인식(認識, 正覺)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하나의 입장을 고수하여 기타의 것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그는 여러 가지의 철학설이 어느 것이나 특수한 집착에 기인한 편견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성찰(省察)하면서 내면의 적정(寂靜)한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진실한 바라문 또는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도리를 설파하는 것이라 표방하고 있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생활해야 할 도리를 밝힌 것인데, 이 도(道)나 또는 규정을 법(다르마)이라고 불렀다. 불교의 실천적 인식이 최초로 당면한 문제는 인생의 고(苦)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어디에 있거나, 또 어떠한 것에 의지하더라도 고(苦)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고(苦)란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인도의 사상 > 불교 > 원시불교의 사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34] 윤해의 오해와 진실[35] 제314회 전생과 윤회에 대하여(윤회를 완전히 부정하는것은 아니나 일부 부정)[36] 다만 엄격하게 공리주의적이라고 볼 수도 없다. 불교의 선악은 '어떤 의도로 행위를 했는가', '무지한 채로 행위를 했는가, 올바른 앎이 있는 상태에서 행위를 했는가'와, '그 행위가 유익한가(samma)'를 함께 고려한다.[37] 《금강경》<능정업장분> "또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움에도 불구하고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등 천대를 받으면 이 사람은 지난 세상(先世)에 지은 죄업으로 악도(惡道)에 떨어질 것이었지만, 금생에 남의 천대를 받는 탓으로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하고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위 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38] 이때 자신이 태어날 다음 생의 모습이 표상으로 보인다고 한다.[39] 단, 정신체라고 보는 의견을 거부하고 단순히 '개체를 지속시키는 마음'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40] 이러한 관점은 부파 불교의 설일체유부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상좌부에서는 바르도를 인정하지 않으나, 이런 사후 체험 자체는 인정한다. 다만 짧은 시간 동안 아귀도에 태어났다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두고 중음의 단계라고 착각할 뿐이라고 본다.[41] 중음신이 생겨나는 시점은 신체적 죽음 이후 사나흘 뒤로 본다.[42] 이때 인간 남녀의 표상이 보였다고 해서 무조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생전의 불선업에 따라 동물으로 태어나기 전에 이런 표상을 볼 수도 있다.[43] 예컨대 카스트제도를 기준으로 보면 브라만은 공덕을 많이 쌓아 귀한 신분으로 태어났고 수드라는 악을 많이 행해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브라만은 모두 선량하고 수드라는 모두 악하던가?[44] 다만 종교가 곧 삶이자 생활이던 현대 이전의 시기에는 윤회는 일종의 정당성과 희망을 가져다주는 개념이었다. 쉽게 말해 비록 밑바닥 인생이라고 해도 환생하여 부귀한 삶을 살 수 있고, 부귀하게 태어난 자는 선행을 쌓은 대가라는 뜻이다.[45] 이를 불교에서는 '유가구족(有暇具足)'이라 한다.[46] 알라위파의 경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47] 이것을 통해 단순한 전생은 물론, 윤회 과정에 대해 알아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48] <영혼들의 여행> 등 많은 환생 및 윤회 관련 서적을 집필했다.[49] 동물보다 식물이, 식물보다 미생물의 개체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므로[50] 윤회와 비공은 두 캐릭터의 기술이 같으나, 비공자세에서 파싱되는 기술들은 다르다.[51] 이미 벽꽝이 된 상태거나, 낮은 벽꽝이 되어버리면 뒤의 마르픽이 안들어간다.[52] 이 과정에서 영혼이 잡히거나 소멸당하는 등의 일이 없어야 한다.[53] 자신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나면 기꺼이 자신의 순위를 내줄 의향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