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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락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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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통자
1.1. 개요1.2. 역사1.3. 영향1.4. 다른 의미로써의 대학에서의 프락치1.5. 관련 문서
2. 1에서 유래된 벌칙

[clearfix]

1. 내통자

фракция(fraktiya)

1.1. 개요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 기형도, 《대학 시절》
뿌락치, 쁘락치 등으로도 쓴다. 러시아어로 특수한 사명을 띠고 어떤 조직체나 분야에 들어가서 본래의 신분을 속이고 몰래 활동하는 사람. 주로 정보 수집이나 선전, 선동을 일삼거나 분열과 이간질을 조장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스파이이고 일부의 경우는 지능형 안티다. 비슷한 의미의 순우리말로 '끄나풀'이 있다. 국회 프락치 사건처럼 해방 정국에서도 많이 쓰였으나 북한이나 타국과 관련된 프락치는 '간첩'이란 단어로 정리됐으며, 이후 프락치는 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운동권 세력에 잠입시킨 스파이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된다.

1.2. 역사

감시 및 견제 목적으로 특정 집단 내에 내통자, 밀고자를 심어놓는 것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널리 사용되던 통제수단이었으나,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19세기 중반~20세기 중반 혁명을 전후로 한 러시아에서 특히 악명을 떨쳤다.

로마노프 왕조가 봉건제의 바탕위에서 철권통치를 하던 제정 러시아 말기에 생활고에 시달리던 민중들의 불만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비밀경찰은 수많은 기관원들을 노동운동, 농민운동과 주요 반체제조직에 대거 잠입시켜 정보를 수집하면서 생활고에 고통받던 민중들이 반체제혁명세력에 동조하는걸 방지하고 최대한 온건하게 친정부적인 테두리에 묶여둘려고 시도하였다. 대표적으로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켰던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 노동자 시위대를 이끌었던 게오르기 가폰 정교회 신부도 사실은 경찰 프락치였다. 가폰 신부는 불만에 차 있던 20만명의 노동자들이 '체제전복'이나 '혁명'이 아닌 '차르 폐하의 자비'를 외치면서 평화 시위를 하도록 이끌었다. 즉 가폰 신부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차르한테 청원을 하면 민중을 사랑하는 거룩한 차르가 이들의 불만을 해결해주고, 차르의 자비에 감동한 노동자들이 차르 만세를 외치는 큰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평화시위를 경찰에서 무차별 발포로 대응하여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당시 경찰 추산 96명 사망, 333명 부상 / 시위대 추산 4,000명 사망 / 오늘날 연구 추산 1,000명 사상) 그리고 가폰은 완전히 혁명대열로 돌아서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가폰처럼 노동자, 빈민 조직에 침투해있던 많은 프락치들이 실제로 혁명활동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결국 1905년 혁명이 촉발된다. 이때부터 오히려 경찰계통 조직에서 잠입한 이러한 프락치들이 진짜로 동화되어 혁명에 가담하게 된 현상을 경찰사회주의라고 따로 지칭하는 용어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일종의 필수요소이기도 하다. 1960년대 이후 군부독재가 확립되면서 학생사회 내에 프락치는 항상 존재했다. 초기의 프락치는 학생사회 내에 존재하던 보수파 학생 모임을 포섭하는 형식으로 존재했다. 아직 학생운동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고 순수하던 이 시기에는 학생들의 숫자 자체가 적었다. 많이 어려웠던 시대에다가 먹고 살기 급급해서 20대 청년층의 대학 진학률은 5퍼센트 미만.

6.3 항쟁 시기에 드러난 가장 유명한 프락치 사건은 YTP 사건(일명 청사회 사건)이다. 4.19 혁명을 전후하여 학생사회에 존재하던 우파 학생 조직을 중앙정보부에서 접근, 학생사회를 분열시킬 목적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재미있는 점은 청사회는 본래 혁신계인 사회대중당의 유병묵 후보를 지지하던 40여명의 대학생들이 선거 직후 KKP(구국당)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한 데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좌파였던 것이다.

1970년대에도 출세욕이 강하고 권력욕이 강한 학생들을 포섭해서 중앙정보부가 돈을 주고 학생운동을 분열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이 때는 아직 전반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순진해서였는지 아주 의외의 방식으로 프락치가 들통이 났다고 한다. 예를 들면 돈이 갑자기 어디서 났는지 운동권 선배 하나가 후배들에게 짜장면을 돌려서 온건파 후보가 학생회장이 되도록 유도한다던지, 서로서로 어디 여행 가봤다고 자랑하다가 "난 비행기도 타 봤다"라고 자랑을 해대는 통에 중앙정보부와의 커넥션이 들통 난다든지... 해외여행 자율화 이전으로 당시 일반인들은 비행기 구경도 못해 볼 시절이었고, 평범한 학생이 비행기 타고 갈 수 있는 곳은 제주도가 한계인데, 이는 결국 중앙정보부 돈으로 다녀왔단 소리가 된다(...). 70년대에는 비교적 잘사는 부잣집 신혼부부나 되어야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갈까 말까한 시대였다.

학생운동이 가장 격렬하던 노태우 시절 정권은 공안정국에 발맞추어 '학원 프락치 공작'을 더욱 적극적으로 시도했는데, 김동훈의 저서 <대학공화국>에 따르면 정보기관이나 경찰상황실(CP)을 통한 프락치 활동, 운동권 연행자가 경찰의 회유와 협박으로 프락치가 된 경우, 군복무 운동권 학생이 보안사의 협박과 회유로 프락치가 되는 경우, 경찰에 정보를 넘기는 유급 프락치, 전과 재수생이 프락치로 포섭된 경우 등 5가지로 분류했다.[1]

다만 대학가에 잠입해 정보수집을 하던 프락치는 초창기에는 일선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사비로 고용하는 알바생 같은 개념이었다.[2] 문제는 형사들이 싸게 먹히면서도 부담없이 소모품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을 찾다 보니 노숙자, 무직자, 전과자 등 배운 것 없고 연줄도 전무한 무지렁이들이 대다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단순 절도소매치기, 사소한 폭력 혹은 구걸 등으로 잡혀 온 바보들을 겁주고 을러서 "너 내가 빼 줄 테니까, 프락치 좀 해라" 같은 식으로 꼬셨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생김새는 대학생과 비슷할지 몰라도, 배운 것은 없다 보니 대학 문턱은 커녕 국졸, 중졸 학력이라서 대학생들이 말 좀 붙여보면 엄청난 아비투스 차이로 인해 금방 티가 났다. 낙성대 학생회에서 왔다든지, 복학생 흉내를 내면서 이번 학기에 50학점을 신청했다든지 하는 등 괴상한 소리를 늘어놓은 탓에 들키지 않을래야... 물론 붙잡혔을 경우에 대비해 나름대로 둘러댈 말은 암기시켜 놨겠지만, 근본이 천박했던 하층민들이었던데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을 리 만무하니 막상 실전에서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다가 금방 들통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들키지 않더라도, 아무래도 머리가 딸리기 때문에 실제 대학생들과 어울려서 정보를 캐내는 것은 무리였다. 때문에 경찰에서는 이 부류들을 좀도둑으로 쓰기 시작했다. 학생회실, 동아리방 등에서 다이어리, 문건, 유인물, 나중에는 핸드폰, 노트북 같은걸 훔쳐오라고 시키는 것이다. 어차피 잡범, 전과자이니 훔치다 들켜도 좀도둑이라 둘러대면 그만이다. 게다가 수천, 수만명이 다니는 큰 학교의 캠퍼스와 주변 대학가에는 실제로 좀도둑이나 그런 기질의 학생들이 많다. 이런 좀도둑류 프락치는 2000년대까지도 계속 존재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조금 더 발전해서 다른 학교에 다니는 혹은 다른 학교를 졸업한 진짜 대학생을 침투시키는 경우도 생겼다. 신입생 혹은 복학생이라면서 동아리에 가입하고, 학생회 집회에 따라다니면서 운동권 간부들한테 접근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대학 출신이다보니 아무래도 지식 면에서 티가 났고, 과사무실에 조회 한번이면 바로 가짜란게 들통나다보니 경찰 입장에선 그다지 유용하지가 않았다. 심지어 1992년 전남대 나윤성 의경 사건 같은 유급프락치 사례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프락치가 금방 들통나자 군사정권은 수법을 좀더 강화해서 해당 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직접 포섭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단계쯤 되면 일선 형사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안기부나 치안본부 대공분실(현 보안수사대) 시도경찰국 등 정보기관 차원에서 직접 움직이는 것이다. 광범위한 신상조사와 치밀한 공작으로 대상자를 포섭하는데 주 대상은 범생이 타입으로 기존에는 학생회나 운동권과 거의 관련이 없던 경우다. 이들은 갑자기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면서 열성적으로 활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학생회 선거에도 출마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잘 안 통해서 프락치인걸 감지한 다른 운동권 학생들은 의심하고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학과 동기들과 관계 파탄이 되는 경우가 많고, 알고보니 졸업 이후에 정보기관쪽으로 간 경우도 있다고 한다. 미리 취업보장?? 이런 경우의 부작용으로 저학년때는 관심이 없다가 정말로 생각이 바뀌어서 뒤늦게 학생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학생을 프락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심해서 내치는 경우도 생겼다. 사회운동의 기본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인데, 찾아오는 사람을 오히려 거부하는 황당한 시츄에이션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폐쇄성은 학생운동 몰락의 원인이 된다.

이 방법으로도 부족하자 군사정권은 실제 운동권 간부를 기관에서 잡아다가 고문한 후에 프락치로 만드는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고문 과정에서 운동권 조직의 기밀사항을(이미 기관에서 파악하고 있는 사항도) 자백시킨 후 그 배반과 수치심을 미끼로 해서 일종의 이중첩자로 만드는 것. 인권탄압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군대에서 이런 경우가 많았다. 특히 5공 정권은 녹화사업이란 이름으로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주도하에 정권이 조직적으로 실행하였다. 운동권 학생들을 체포 후 본인 의사에 상관없이 무조건 강제 입대시키고, 소속 부대 보안대(기무대)가 두들겨 패면서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는 것이다. 보통 군대에서 어차피 매일 패고 매일 맞던 시절이긴 하다만... 당시 군사기밀보호법상 보도가 불가해 절대 외부에 공개가 되지 않았을 뿐 이런 식으로 약점이 잡혀서 강성 운동권에서 프락치로 전향한 사례도 있으며, 월북 내지는 탈영처리 되어 불귀의 객이 된 몇몇 젊은이들이 사실은 녹화사업의 희생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고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체포한 후에 "너 인생 조질래, 우리한테 협조할래?" 식으로 위협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가족과 주변 지인들의 신상까지 들이대면서 회유하는 경우도 많았다. 보통 "XX만 잡으면 풀어주겠다", "어차피 네가 한거 아무도 모른다."식으로 꼬드기면 겁에 질려서 하겠다는 하는 경우다. 1986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협박과 구타 끝에 프락치를 하게 된 배XX의 사례가 있고[3] 1989년 안기부에 끌려가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다고 고백한 여대생들도 있었다.

1.3. 영향

군사정권의 내부분열책 때문에 운동권 내부 역시 프락치에 대해 히스테릭했던 건 마찬가지. 발각된 프락치는 집단구타와 고문을 당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우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진짜건 가짜건 프락치로 찍힌 사람이 사망한 경우가 여럿 있었고 이건 절대로 옹호해 줄 수 없는 것이다. 특히나 프락치 여부가 거짓일 경우에는 더 심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4년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으로 서울대 운동권 간부들이 서울대 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4명의 타학교 학생 및 민간인들을 프락치로 판단하고 감금, 폭행한 사건으로 구속 후 징역을 살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주도한 게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멤버들이라 복학생협의회 의장이던 유시민이 폭행한 학생들을 대신해서 감옥에 갔다. 그리고 이때 지금도 명문으로 손꼽히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나오게 된다. 그 뒤에도 1989년 연세대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 1997년 전남대 이종권 치사 사건 등이 터졌으며, 가장 세상에 크게 알려진 것은 역시 1997년 6월 한양대에서 벌어진 이석 치사 사건이다. 그 전해 벌어진 연세대 사태와 더불어 이석씨 사건으로 학생운동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으며, 두 번 다시는 국민적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된다.

오랜 기간 군사독재정권의 잔혹한 탄압과 프락치 등의 분열공작에 시달리던 학생운동, 노동운동은 극도로 중앙집중화되고, 철처한 상명하복식 위계질서를 갖춘 군대식 조직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말 그대로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을 닮아갔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이는 마치 볼셰비키가 러시아 혁명이 내전으로 비화되고 공산주의를 경계한 열강이 개입하자 극도로 중앙집권화되고 사회혁명당 좌파 등 다양한 세력을 축출하며 다양성과 자유로움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로 등장한게 바로 문부식 등이 제창한 우리 안의 파시즘[4] 담론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런 습성은 그대로 남아서 그 시절 인맥끼리만 뭉쳐다니는 배타적인 행태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자기들의 의견이나 자기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동지가 있으면 '프락치 몰이'를 하기도 한다. 이렇듯 자기들끼리만 뭉쳐다니다 보니 집단사고에 찌들어서 건설적인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성, 닫힌 사회, 피해의식, 음모론 등등의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특히 주체사상의 수령론(지도자 원리)를 수용한 NLPDR계 출신들이 이런 경향을 많이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통진당 부정경선 사건을 들 수 있다.

제헌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어 결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박살낸 게 바로 여기 관련된 국회의원이 북한의 프락치였다는 혐의를 씌운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이게 아니었어도 불안불안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고는 하지만….

1999년 서울대 사범대생 강성석이 국정원의 프락치 매수공작 의혹을 밝혀 잠깐 파문이 일었고, 2008년, 광우병 논란으로 시작된 광화문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폭력을 조장하는 무리가 있다 하여 프락치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집회, 시위 문화가 다시 활성화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프락치를 검색하기도 했다. '촛불집회의 이미지를 나쁘게 하기 위해 일부러 폭력을 조장하는 무리가 집회에 숨어 들어가 시민들을 선동했다'는 주장이 많았는데 인터넷 상으로 여러 사진들을 증거로 경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5]

하지만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 경찰이 폭력시위를 유도하기 위해서 프락치를 투입했다는 명확한 증거나 증언은 현재까지 나온 바가 없다. 해당 촛불집회가 명확한 지도부나 확실한 계획, 통제없이 오로지 여러 단체 및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만으로 장시간 흘러가다 보니 혼란속에서 온갖 해프닝이 생겼고, 이 와중에 근거가 불확실한 이야기들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점점 살이 붙어가면서 떠돌았는데 경찰프락치설도 그 중에 하나라 보인다. 당시 경찰이 시위대로 위장하여 폭력사용을 조장한다면서 넷상에 떠돌던 자료들은 나중에 대부분 착각, 오해, 과대포장, 합성 등으로 판명이 났다. 집회가 지도부의 가이드라인이 없이 진행되다 보니, 과거 1980년대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몇몇 운동권 그룹들이나 활동가들이 대놓고 폭력투쟁 준비를 하고 거리에 나오거나, 경찰과의 충돌을 유도했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현장에서 경찰과 시위대 모두 흥분해서 서로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박정희, 전두환 집권 시절 정권을 비판하는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1983년 군 복무 또는 대학 재학 중 불법 체포·감금돼 가혹행위를 당하고 이후 동료 학생에 대한 감시와 동향 보고 등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것 이른바 '프락치 강요 사건'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은 11월 22일 피해자 이종명·박만규 목사가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가 각각 9000만원씩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1#2

이에 대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1심 판결 항소를 포기했다. #

1.4. 다른 의미로써의 대학에서의 프락치

위 의미에서 유래했으며, 신입생 OT에서 선배 일부가 신입생 행세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대다수 대학에서는 스파이, X맨 등의 다른 단어로 대체되고 있으며 프락치라는 말을 쓰는 건 서울대와 한양대 일부 단과대학에만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서울소재 한 예술대학의 경우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것으로 확인된다. 신입생 신고식 개념으로 몰래카메라를 하는데, 이를 위해 신입생들 사이에 투입된 선배들을 프락치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몰래카메라에 선배들 대부분은 물론 심지어 교수님들 까지 참여하고 있어 그 열기가 상당하고, 또 누군가의 실수로 프락치가 단기간에 탄로나 과별로 신입생들을 위해 준비한 몰래카메라들이 실패하면 과 사이에 반목이 발생하는 경우도 상당한 모양이다. 다만 프락치가 들통나도 별 탈 없이 마무리되는 곳도 많으므로 결론은 케바케다.

1.5. 관련 문서

2. 1에서 유래된 벌칙

코미디TV[(현.iHQ)의 지금은 종영된 자체 제작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기막힌 외출에서 쓰이는 자체 체벌이다. 발단은 1기 당시 수박 씨 얼굴에 붙이기 게임(보라카이 특집)으로, 당시 멤버 다섯명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장동민만이 게임 규칙 등을 정확히 알고 있어서 '어떻게 너 혼자 그걸 다 알고 있냐' → '너 프락치냐' 로 발전, 최후에는 장동민을 눕혀놓고 나머지 다섯명이 발로 지근지근 일명 '프락치 송' 이란 노래의 리듬에 맞추어서 밟아대는 것으로 최종 발전했다.

밟히는 조건으로는 멤버중 누군가가 개드립을 쳤거나, 혹은 단체전 게임 도중 팀의 승리에 도움이 전혀 안되는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질렀다거나, 그냥 왠지 밟아줘야 할 것 같을때 라거나, 심지어 단지 그때 마침 누군가가 바닥에 누워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발동된다. 사실 프락치 송이 존재하기 전에도 바닥에 눕혀놓고 밟아대는건 존재했지만 프락치 송의 탄생을 기점으로 나름대로 체계화 된 밟기 기술이 되었다.

기막힌 외출 2, 3, 4기에서도 계속된 아이템으로 일단 걸렸다 하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밟아댄다. 선배 연예인이건 여자 출연자[6]건 담당 PD건 작가건 웬만하면 다 밟는다. 밟을때 부르는 '프락치~ 프락치~ 프락치 프락치 프락치~' 하는 프락치 송이 나름대로 중독성이 있다. 원곡은 영화 방과후 옥상의 <덕풍농고>다.

몇 년 후 무한도전 손연재 특집에서 손연재에게 실수로 신체적 상해를 입힌 경우에 다른 멤버들이 몰려가서 밟는 식으로 지상파 방송에서도 수입하였다.

1박 2일에서는 멤버들을 치게 만든 이용진이 검거되자 김준호가 주도해 인디언 발(...)을 하는데, 정황상 본인이 기막힌 외출 시절 했던 프락치의 변종인듯 하다.

2023년 신병 드라마 시즌 2에서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오는 행정병 노희정 일병을 상, 병장들이 무차별로 밟았는데 이걸 가져왔다. 마음의 편지를 쓴 사람이 노희정인걸 당직사관 중사 부소대장[7]과 당직부사관 병장 분대장[8] 에 들통났다.


[1] 원 출처: <대학공화국: 취재기자가 발로 쓴 6공화국 대학사건 취재기> - 김동훈 저. 한국대학신문. 1993. p125.[2] 고용된 사람에게는 지나친 것 같지만, 이런 소모품적인 스파이는 의외로 많았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생포된 스파이들에 대한 자백을 보면 상당수가 실향민, 피난민들을 국군과 미군에서 돈을 쥐어주거나 생환하면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보냈다는 것.이런 사람은 말 그대로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들. 실제로 이렇게 실종된 케이스가 많다.[3] 기사에 등장하는 홍OO 경감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공안경찰의 핵심 인물로 악명 높았던 홍승상 전 총경으로 추정된다.[4] 원조격인 문부식의 견해에 따르면, 해당 담론은 원래 국가주의라는 광기에서 해방되어 시민 개개인의 자유와 이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5] 다른 한편에선 몇몇 운동권 조직들이 일부러 경찰과의 유혈충돌을 유도한다는 반발도 있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던 다함께(현 노동자연대)는 이후 대중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6] 단, 이쪽은 '외모가 안받쳐줄 때'일 경우에 한정이다.[7] 습관적으로 노희정 일병을 찾았고 노희정 일병이 남은 휴가가 없다고 했다.[8] 컴퓨터 파일에 마음의 편지 내용과 같은걸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