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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c1c27><colcolor=#ffffff> 제30대 펜실베니아 재무장관 로버트 버드 드와이어 Robert Budd Dwyer[1] | |
출생 | 1939년 11월 21일 |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 찰스 | |
사망 | 1987년 1월 22일 (향년 47세)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부모 | 아버지 로버트 말콤 드와이어 (1899 ~ 1980, 향년 80세) 어머니 앨리스 메리 버드 드와이어 (1907 ~ 1972, 향년 65세) |
배우자 | 조안 드와이어[2] (1939 ~ 2009, 향년 70세) |
자녀 | 슬하 1남 1녀 |
신체 | 185cm |
정당 | |
약력 | 펜실베이니아 주 상원의원 (1971~1981) 펜실베이니아 주 재무장관 (1981~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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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2. 생애
본래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고등학교 사회 교사로 일했으나 1964년 공화당 소속으로 펜실베이니아 주 하원의원[3]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1970년까지 하원의원을 지낸 후 1971년부터 1981년까지 펜실베이니아 주 상원의원, 1981년부터 1987년까지 펜실베이니아 주의 재무장관을 역임한 정치가이자 아내와 두 아이를 둔 평범한 정치인이었다. 즉, 이력만으로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질 만한 정치인은 아닌데 그럼에도 그가 알려진 이유는 그의 충격적인 최후 때문이다.위키백과 문서에 드와이어가 뇌물수수 의혹을 받게 된 계기와 이를 둘러싼 법적 공방, 기자 회견,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3. 자살 생중계 사건
사건의 전말은 그가 1986년에 계약 관련 뇌물수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곳에서 시작되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당시 펜실베이니아 주의 연방 공무원들은 연방보험료법(Federal Insurance Contributions Act 약칭 FICA)에 의해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수백만 달러의 세금을 더 낸 사실이 밝혀졌고 펜실베이니아 주 정부는 그 세금을 모두 환급하기로 결정한 후 이를 주관할 회계 법인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Computer Technology Associate(약칭 CTA)라는 회계법인이 이 업무를 주관하기로 결정되었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CTA가 계약을 따오기 위해 버드 드와이어에게 30만 달러의 뇌물을 건넸다는 것. 당시 주지사에게 해당 내용이 익명의 메모로 제보가 들어왔고 혐의까지 입증된 상황이었다. 만약 판결을 받았다면 징역 55년[4]에 추징금 30만 달러가 부과될 상황이었다.[5]드와이어는 혐의를 줄기차게 부인했으며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에게 서한으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결국 법원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고 최종심 판결 확정 전날인 1987년 1월 22일 아침에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자 회견을 자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에는 뉴스 방송과 사진 촬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드와이어는 준비된 회견문을 발표해나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발표를 중단하고[6] 측근들을 불러 편지를 하나하나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 편지는 세 가지였는데 하나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유서였고 하나는 장기기증 관련 문서[7] 및 기타 자료, 나머지 하나는 당시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에게 보내는 편지[8]였다.
자살 당시의 기자 회견 영상(자살 장면 미포함, 성인인증)[9]
편지를 나눠준 드와이어는 노란색의 마닐라지 봉투를 집어서 그 안에서 뭔가를 꺼냈는데[10] 그것은 바로 리볼버 권총이었다. 평온하던 회견장은 순간 술렁이고 그다음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돌변했다. 주위 사람들이 놀라서 웅성거리며 만류하자 드와이어는 "불쾌하시다면 방을 나가주시기 바랍니다(Please leave the room if this will offend you.)"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다가오며 총을 버리라고 설득하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다급하게 자신을 말리지 말라고 했다. 이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그만 둬요, 그만 둬요, 그만 둬요! 누가 다치는 수가 있어요! (Don't, don't, don't, this will hurt someone.)"였다. 마지막 말을 남긴 후 드와이어는 누군가 말릴 틈도 없이 곧장 총구를 입에 넣은 후 입천장에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한다.[묘사주의][12] 총격으로 드와이어는 즉사하였고, 목전에서 한 사람의 권총 자살 현장을 생생히 목격한 주위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 채 패닉 상태에 빠져, 현장은 돌연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시의 영상을 보면 그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부터 예기치 못한 상황에 패닉에 빠져 욕설을 내뱉는 사람도 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하라고 소리치는 드와이어의 비서 제임스 호쇽의 목소리도 들린다.[13] 총알이 주요 동맥이 지나가는 입천장과 뇌를 지나갔던지라 코에서 피를 쏟는다. 드와이어의 공보담당비서인 제임스 호쇽이 "Dear God in heaven!"이라고 외치며 그의 시체 앞에 서서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시신은 무척이나 처참하지만 총알이 뇌간을 지나갔을 것이므로 그는 그나마 고통 없이 즉사했을 것이다. 자살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47세였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오자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만류하는 버드 드와이어의 모습 |
입에 총구를 넣는 드와이어의 모습. 이 사진이 찍힌 이후 불과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드와이어는 방아쇠를 당기고 그대로 사망한다.[14] |
이 사건을 보도하는 방식은 지역방송마다 제각각이었다. KDKA를 위시한 대다수의 지역방송국들은 최대한 자극적인 중계를 피하려 드와이어가 총구를 갖다대는 시점에서 화면을 일시정지시키고 음성만 내보내도록 처리하는 등 최대한 자체 검열을 했다. 그러나 WPVI[15] 등 일부 지역방송국들은 아무 편집 없이 그대로 사건을 생중계했다. 게다가 이 날 펜실베이니아 일부 지역에 폭설이 내렸기 때문에 휴교한 학교가 많았다. 학교 안 가고 집에서 뭐 볼 거 없나 하고 채널을 돌리던 아이들은 이 장면을 보고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너무 충격적인 탓에 대한민국에서도 여러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16]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자신의 실질적 고향이자[17] 지역구였으며 양친이 묻힌 곳이기도 한 펜실베이니아 주 크로포드 카운티에 묻혔다.
4. 모함 의혹
드와이어의 사망 이후 드와이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모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다. 특히 2010년에 방영된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어니스트 맨(Honest Man)'에는 드와이어의 재판에서 중요한 증언을 했던 윌리엄 스미스가 드와이어의 재판 이전에 있었던 다른 재판에서 위증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드와이어가 무고하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게 되었다. 단, 다큐멘터리에서 스미스는 드와이어한테 뇌물을 제안했고 드와이어가 이를 승낙했다는 증언 자체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또 뇌물을 제안한 것에 대해서 평생에 걸쳐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며 드와이어에게 죽을 때까지 미안할 것 같다는 고백을 했다.또 그와 같이 지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버드는 절대로 돈에 양심을 파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적은 돈이라도 낼 돈은 다 내야 직성이 풀렸다'고 하며 오히려 그런 강직함 때문에 같은 공화당 내에서도 그를 미워하고 따돌리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전술한 익명의 메모도 공화당원이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 이전에는 궁지에 몰려 자살한 부패 정치인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큐멘터리의 영향으로 동정론도 많이 생겼다. 다만 그의 자살에 대해서 '떳떳했다면 법적 분쟁을 진행할 수 있을텐데 굳이 자살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며 의구심을 가지는 이들도 적잖아 있으나 이미 위에서 설명되었듯이 드와이어는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유죄가 거의 확정된 상황에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법적 분쟁을 계속 진행했어도 감옥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위에서 언급된 증언 같은 것도 없었을 것이다.
한편 그와 동갑내기였던 부인 '조안'에게는 드와이어의 퇴직금 명목으로 128만 달러[18]가 주어졌으며 이후에도 재혼하지 않고 살다가 2009년에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과 딸은 위에 언급된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부인과의 인터뷰 역시 실려 있다.
5. 영향
드와이어와 마찬가지로 총기로 자살한 록 음악가 커트 코베인은 자살하기 직전 드와이어의 자살 비디오를 몇 번이나 되돌려가며 감상했다. 다만 커트 코베인은 드와이어처럼 권총이 아니라 샷건으로 자살했다.$uicideboy$의 멤버 $crim은 프로듀서로 활동할 때 드와이어의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했다.
가끔 유튜브 등지에서 드와이어의 자살 영상을 보고 반응하는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 사람이 종종 발견되는데 물론 반응은 비난 일색이며 비추천이 추천의 10배를 넘어간다. Encyclopedia Dramatica에서도 상단의 입에 권총 총구를 넣는 버드 드와이어의 사진에서 권총을 지우고 색소폰이나 트롬본 등의 악기를 합성한 조롱용 짤이 다수 있는데 한국의 사망한 일부 정치인들처럼 서구권에서 굉장히 민감한 요소이므로 멋대로 다루었다간 욕 먹게 된다.
절대로 검색해서는 안 될 검색어에서는 Budd Dwyer라는 이름으로 특정 절차를 밟으면 열람할 수 있는 검색어 중 위험도 4로 등재되었다. 위험도 4면 불쾌감을 넘어 장기간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내용이 있다는 뜻으로, 원래는 위험도 3이었으나 2020년부터 4로 올라갔다. 다만 특정 절차를 밟지 않아도 열람할 수 있는 검색어 중 위험도 3인 01A51CD0의 유튜브 영상들 중 ʎןʇuǝıʇɐdƃuıʇıɐʍ에 드와이어가 자살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자살하는 순간에 화면이 넘어갔는데, 문제는 자살 후의 장면이 ɹǝʌosıʇıɐʍǝɥʇ 영상 끝에 잠깐 나온다.
TV 공영 생방송에서 자살이 노골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드와이어를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2020년대 들어 인터넷 플랫폼을 통한 자살 생중계가 등장하면서 역시 적잖은 사람들을 경악에 빠뜨리고 영상이 틱톡이나 트위터을 통해 일파만파 퍼지는 현상이 발생해 커뮤니티에서 찬반 논란이 뜨겁게 발생하던 바 있었다. 문서 참고.
6. 매체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만큼 매체에서도 소재로 다루어졌다.- Friday Night Funkin' - Monday Morning Live Leakin' 모드: 불근신 게임으로, 그를 포함해 로니 맥넛, Shuaiby, 로로쨩, 글렙 코라블료프 등 자살 생중계를 한 실존 인물의 자살 등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서양에서 마저도 고인드립 등과 관련된 큰 논란이 되었다.
- Hey Man, Nice Shot: 1995년에 인더스트리얼 락 밴드인 필터가 이 사건을 주제로 한 곡을 냈다. 뜻은 "어이 친구, 잘 쐈어"다. 제목만 보면 자살한 걸 비꼬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드와이어를 추모하는 곡이다. 중간에 나오는 가사 "You'd fight and you were right. But they were just too strong."(당신은 맞서 싸웠고, 당신이 옳았어. 하지만 그들은 너무 강했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 Honest Man: 2010년에는 그를 소재로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다.
- 볼링 포 콜럼바인: 그의 자살 영상이 짧막하게 등장했다.
[1] 보통 로버트는 생략하고 버드 드와이어 내지 R. 버드 드와이어라고 부른다.[2] 결혼 전 성씨는 그래피(Grappy).[3] 대한민국의 광역의원과 같은 개념... 이라고 하지만 연방제 특성상 조례나 규칙 따위가 아닌 주법(州法)을 제정할 수 있다.[4] 버드 드와이어가 당시 47세였으므로 사실상 무기징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은 형량이 센 만큼 교도소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가석방과 형 집행정지가 공식적/비공식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국가다. 따라서 단순 흉악범이 아닌 그가 55년을 전부 살았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고 중도에 가석방됐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가석방으로 출소한 이후, 그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이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을 면치 못할 거라는 것. 미국은 미국을 제외한 지역들 중 문화 및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의 인식과 달리 상당히 보수적인 사회이며, 특히 어느 정도 이상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윤리 기준은 한국보다 훨씬 엄격하다. 그가 자살한 이유도 교도소에서 가석방 없는 중형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가석방 이후의 끔찍한 삶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라고 봐야 한다.[5] 당시 기준으로라면 10억원에 가까운 금액이었다.[6] 발표하지 않은 부분에는 자신이 재무장관에서 사퇴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는 내용과 자살을 할 것을 의미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7] 그러나 병원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 각막 이외에는 모두 장기기증이 불가능했다.[8] 당시 주지사는 민주당 소속 밥 케이시 시니어(연방상원의원 밥 케이시 주니어의 아버지)로 주지사직에 취임한 지 2일밖에 되지 않았다. 드와이어는 해당 편지에서 자신의 아내인 조안을 차기 재무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케이시 주지사와 주의회는 이미 드와이어가 사퇴하거나 유죄 판결을 받아 장관직에서 해임될 것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내정자를 정해 둔 상태였고 드와이어가 사망하자 케이시 주지사는 해당 내정자를 차기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직전 주지사는 공화당 소속 딕 손버그였는데 같은 공화당 소속이었음에도 드와이어는 손버그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을 끌며 새로운 주지사가 취임하기까지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9] 봉투에서 권총을 꺼내는 것으로 이 영상은 종료된다. 이 이후 20초도 채 안 돼서 버드 드와이어는 입천장에 총을 발사한다. 여기서 드와이어의 비서인 제임스 호쇽이 담배를 피우는 걸 볼 수 있는데 1980년대 중후반에는 실내 흡연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10] 자세히 보면 서류를 정리하던 비서 제임스 호쇽이 노란 봉투에 손을 가까이 대자 드와이어가 급하게 낚아채는 게 보인다.[묘사주의] 방아쇠를 당긴 직후 앉은 자세로 쓰러진 채 콧구멍으로 피를 폭포수처럼 철철 뿜어댔으며, 머리에는 총알이 꿰뚫고 지나간 자국이 보인다. 총알이 얼굴 내부를 지나갔기에 뇌를 관통한 부분의 피가 코쪽으로 쏟아지는 것이다. 선혈이 터져나간 수도꼭지에서 솟구쳐나오는 수돗물마냥 흘러나오는 시신은 매우 참혹하나, 총알이 뇌간부터 타격하였기에 그나마 고통 없이 즉사하였을 것이다.[12] 입에 물고 쏘는 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다. 웬 안전인가 싶겠지만 벽을 등지고 쏜다는 전제하에 총알이 뒤통수로 관통하더라도 벽에 박혀 주변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총구 제어에도 효과적이라 탄도가 뇌의 주요 부위를 깔끔하게 파괴하므로 확실하게 죽을 수 있다. 이에 반해 관자놀이나 턱에 쏘는 방법은 심신미약과 같은 이유로 총구가 어긋나 치명상만 입고 살아남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샷건 같은 무기도 마찬가지로 얼굴만 사라지고 살아남은 경우도 있을 정도다.[13] 시신의 머리에 총알이 뚫고 지나간 구멍이 나 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당시 뒤쪽으로 총을 맞았는데 뇌압을 못 견뎌 두개골 앞쪽이 절반 가까이 날라간 원리를 생각하면 된다.[14] 이후 드와이어가 방아쇠를 당기고 총알이 그대로 머리를 관통한 뒤 쓰러지는 순간의 사진도 찍혔으며 위 사진과 함께 필라델피아 지역 신문 1면에 실리기도 했다.[15]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자살 영상의 원본이 이 방송국의 취재 영상이다.[16] 본 기사에 자살 전 사진, 자살 순간 사진, 자살 이후 사진이 나온다. 주의할 것.[17] 버드 드와이어는 미주리 주 출생이다. 성장한 곳이 펜실베이니아 주.[18] 2021년 기준으로는 300만 달러에 달하는 가치다. 드와이어가 유죄 판결을 받았었다면 해당 퇴직금 역시 주어지지 않을 예정이었으나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주어졌다. 일각에서는 드와이어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이 퇴직금 때문이었다는 설이 돌았으나 Honest Man에서 출연한 드와이어의 여동생은 이를 부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