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ABC 뉴스 방영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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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4년 4월 5일 미국의 록밴드 너바나의 프론트맨 커트 코베인이 자신의 시애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왕성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커트 코베인이 산탄총을 이용한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사망하여 전 세계 음악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다.
2. 배경
1987년 밴드 결성 이후 1990년대 초반 전성기를 누렸던 커트 코베인은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헤로인 중독에 시달려 왔는데 밴드의 성공 이후와 코트니 러브와의 결혼을 기점으로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으며 투어 중 여러차례 쓰러지는 등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었다.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코베인 부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코트니 러브는 자신의 밴드 홀에 새로 들어온 여성 베이시스트 크리스틴 파프와 자신의 남편 커트 코베인이 서로 시집이나 향수같은 선물을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으며[1] 코트니는 "계속해서 내 남편과 친하게 지내면 밴드에서 해고하겠다."고 크리스틴에게 여러번 으름장을 놓았고 그녀에게 자주 고함을 치며 히스테리를 부린 적도 많았다고 한다. 이후 커트가 크리스틴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확신한 코트니 러브는 2집 Siamese Dream을 발표하여 성공의 기쁨을 누리고 있던 전남친이자 유부남인 빌리 코건에게 다시 접근하여 맞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결국 크리스틴 파프는 코트니를 두려워함과 동시에 홀의 멤버로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껴 Miss World의 뮤직비디오를 홀 멤버들과 함께 찍은 것을 마지막으로 1994년 2월, 코트니 러브에게 홀에서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후 고향 미네소타로 돌아갔다.
1994년 유럽 투어를 진행했던 너바나는 파리, 로마, 뮌헨 등에서 콘서트를 했다. 1994년 3월 1일 뭔헨 공연을 마치고 커트는 기관지염과 후두염에 걸렸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다음 날 로마로 돌아가 코트니 러브를 만났다. 그리고 3월 3일 커트는 진통제의 일종인 로히프놀을 과다복용해 의식을 잃었고 이를 발견한 코트니에 의해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훗날 코트니 러브는 이 일을 커트의 첫번째 자살 시도였다고 회상했다.[2] 치료를 마친 지 5일 후 커트는 시애틀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남은 유럽 투어 일정은 취소되었다.
구급차에 실려가는 커트 코베인과 울고있는 코트니 러브. 초록색 천으로 덮인 사람이 그이다. |
귀국 후 두문불출하던 시기였던 3월 18일 코트니 러브는 커트 코베인이 문을 잠근 뒤 총으로 자살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방에서 총들과 알약들을 발견했으나 커트는 살아 있었다. 커트는 코트니를 피해 방 안에 숨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약물 복용에서 어느정도 회복한 뒤 딸 프란시스 코베인과 찍힌 마지막 사진. 3월 12일에 찍혔다.# |
일주일 뒤인 3월 25일[3] 코트니는 커트의 마약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커트 코베인의 가장 친한 지인 10명을 집으로 불러 커트에게 마약 중독을 치료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커트는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으며 경멸의 말까지 내뱉은 뒤 윗층의 침실로 올라가 문을 잠가버리고 대화를 거부했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는지 그날 밤 커트는 코트니에게 약물중독 재활원에 들어가겠다고 했고 다음 날 LA로 이동해 재활원에 입소했다.
커트 코베인(왼쪽)의 생전 마지막 사진. 사망 12일 전인 3월 24일에 찍혔다.[4] |
그러나 재활원에서의 생활을 커트는 매우 버거워했다. 그러던 중인 3월 30일 코트니가 딸 프란시스 코베인과 함께 재활원을 방문해 커트를 면회했는데 커트는 프랜시스와 놀아 주면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이는 부녀의 생전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다음 날인 3월 31일 커트는 재활원에서의 생활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1.8m에 달하는 펜스를 넘어 무단으로 요양소를 탈출했으며 곧장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으로 가서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때 우연히 비행기 안에서 건즈 앤 로지스의 더프 맥케이건을 만났는데 평소 건즈 앤 로지스에게 악감정을 보이며 적대하던 커트는 이전과 달리 더프를 만나 매우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커트가 사망한 뒤 인터뷰에서 더프는 그의 기분 좋았던 모습을 회상하며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한편 커트 코베인이 재활원에서 탈출한 후에도 가족들은 3일 동안이나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뒤늦게 커트가 없어진 것을 안 코트니 러브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커트를 찾도록 시켰다. 커트는 4월 2일 한 총기점에 방문하여 총알을 구입했는데 이를 묻는 택시기사에게는 집에 강도가 들어 그에 따른 대비라고 둘러댔다. 다음 날인 3일에도 시애틀의 총기점 등 여러 장소에서 목격되었다.
3. 사망
커트 코베인의 시신이 발견된 집 |
시애틀시 경찰국은 커트가 산탄총을 몸에 걸친 채로 있었으며 두부에서 뚜렷한 총상이 발견되었고 유서는 시신 옆에 떨어져있었다는 사실을 조서를 통해 밝혔으며 그의 사인을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결론내리고 수사를 종결했다.
이 기사에서 수사 당시 촬영한 커트 코베인의 시신 일부[7]와 그 주변에 놓여 있던 유서, 지갑, 헤로인 등의 유품들, 그리고 그가 사용한 샷건까지 볼 수 있다.
1994년 4월 10일 시애틀 센터에서 그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례식에는 너바나 멤버들과 코트니 러브, 팬들이 참석하였으며 코트니는 장례식에서 그의 유서를 읽으면서 추모하였다. 장례식이 끝날 때 쯤 코트니는 커트의 유품 중 남은 옷을 팬들에게 몇 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커트 코베인은 장례식 후 화장되어 시애틀에 있는 위시카 강(Wishkah River)에 뿌려졌으며 뉴욕에 있는 불교 사원에 그의 유골 일부를 보관중이라고 한다.[8] 나머지 유골은 코트니가 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4. 사후
인기와 명예의 정점에서 27살의 젊은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은 미국 락씬을 넘어 전 세계 음악계에 엄청난 충격과 비통함을 불러일으켰다.[9] 미국에서는 그의 죽음을 베르테르 효과를 우려해서 조심스럽게 방송했으나 몇 명의 청소년들이 자살했고 프랑스에도 자살한 팬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락카페에서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팬들이 울면서 너바나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일부 팬들은 그의 죽음에 관한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한다.[10] 자살 직전의 미공개 인터뷰에선 너바나를 해체하고 너바나와 정반대인 포크 장르로 솔로 앨범을 내거나 아내 코트니의 밴드 홀에 가입할지 말지를 고민했다고 한다.많은 록스타들이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유서에 자신의 곡 Hey Hey, My My (Into the Black)의 구절이 인용된 닐 영과 데이브 그롤이 몸담은 푸 파이터스는 각각 <Sleeps With Angels>와 <Friend of a Friend>라는 추모곡을 쓰기도 하였다.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코베인 사망 이듬해 발표된 6번째 앨범 One Hot Minute 9번째 트랙 Tearjerker란 곡으로 커트를 추모했다.[11] 힙합씬에서는 노래에 그의 죽음을 소재로 한 문장을 집어넣기도 했다.[12] 라이브 퍼포먼스와 정규 2집에서 적극적으로 락을 차용한 MGK의 경우 "코베인이 돌아왔다(Cobain is back)"라는 문구로 자신을 대변하기도 했다.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하루를 담은 영화 "라스트 데이즈"(거스 밴 샌트 감독)가 있지만 불친절한 거스 밴 샌트 영화에 속하니 유념하고 볼 것. 무엇보다도 영화 속에서 그는 커트 코베인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사실의 충실한 재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에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에 가깝다.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당해 베스트 1위에 꼽히기도 했다.
2015년 1월 24일 그의 생전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제목은 커트 코베인: 몽타주 오브 헥. 코트니 러브가 최초의 아이디어 제공자라고 하며 그의 딸인 프란시스는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커트 코베인을 소재로한 영상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족이 제작에 참여한 사례라고 한다. 특이하게도 몇몇 장면은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했다. 5월 4일에는 HBO를 통해서 TV로도 방영되었다.
[1] 실제로 커트와 크리스틴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서로 절친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크리스틴이 약물중독 요양소에서 퇴소한 직후 커트 코베인의 자살 소식을 접하자 오열하면서 한동안 폐인처럼 지냈다는 가족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 커트 코베인이 마지막으로 녹음한 곡 You Know You're Right의 가사가 크리스틴 파프와 관련되어 있다는 의견도 있다.[2] 로히프놀을 무려 50알 이상 복용했으며 자신도 얼만큼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3] 코트니 러브에 따르면 이날 그가 사실상 마지막으로 Do Re Mi라는 곡을 연주했다. 3월 25일 버전은 공개되지 않았고 이 버전은 1월에 녹음된 버전이다. 팬들은 가사의 뜻이 Don't Rape Me일 것이라고 추정한다.[4] 오른쪽의 사람은 커트 코베인이 1993년에 윌리엄 버로우즈와 함께 낸 싱글인 The “Priest” They Called Him의 총괄 프로듀서이다. 하지만 코베인의 머리 길이나 바로 윗사진에 비해 너무 건강해 보인다며 알려진 것보다 더 일찍 찍힌 사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5] 평전에 따르면 커트 코베인은 1987년 버드 드와이어라는 정치인이 자살하는 비디오를 구해서 자주 돌려봤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시신 사진이 검열 없이 바로 나오고 심지어 실제 비디오가 인터넷에 도는데 정신건강을 위해 찾아보지 말자.[6] 개리 스미스는 커트 코베인의 귀에서 피가 흘러내린 것을 보기 전까지 그가 잠들 줄 알았다 한다.[7] 그의 시신은 총을 발사했던 머리 부분을 제외하면 온전했으나 검열 차원으로 시신의 허리 부분과 왼발만 촬영되었다.[8] 코트니 러브는 불교 신자다.[9] 이방카 트럼프도 커트의 자살 당시 울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10] 음모론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게 아내인 코트니 러브가 죽였다는 것이라고 한다. 커트의 적들이 연합하여 암살했다는 설도 있다. 사실 유명한 가수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론은 이전에도 있어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실 살아 있다거나 투팍의 죽음과 관련한 미스터리들이 그 예시다. 투팍 샤커 살인 사건은 2023년에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만 해도 음모론이 돌곤 했다.[11] 또 Californication에서 코베인을 언급하는 가사도 있다.[12] 에미넴의 Cum On Everybody, 퍼블릭 에너미의 Are You Gonna Go Our Way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