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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6:31:14

루덴도르프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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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루덴도르프 공세
춘계공세

German Spring Offensive
Offensive du Printemps
Deutsche Frühjahrsoffensive 1918
제1차 세계 대전서부전선의 일부
<nopad> 파일:Bundesarchiv_Bild_183-R29407,_Westfront,_Stellungskrieg.jpg
영국 육군 참호를 돌파하는 독일 제국 육군 기병 병사들
기간
1918년 3월 21일 ~ 1918년 7월 21일
장소
프랑스 북부, 벨기에 플란데런 서부
동맹국 협상국
교전국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틀:국기|]][[틀:국기|
속령
프랑스
]]

[[영국|]][[틀:국기|]][[틀:국기|]]

[[미국|]][[틀:국기|]][[틀:국기|]]

[[이탈리아 왕국|]][[틀:국기|]][[틀:국기|]]

[[포르투갈|]][[틀:국기|]][[틀:국기|]]

[[벨기에|]][[틀:국기|]][[틀:국기|]]
병력 작전 초반 약 1,600,000명
작전 후반 약 1,390,000명
작전 초반 약 1,270,000명
작전 후반 약 1,620,000명
사상자 약 700,000명 프랑스: 약 400,000명
영국: 약 430,000명
기타 연합군: 약 12,000명
결과
독일 제국군의 작전 실패, 협상국의 방어 성공
영향
백일 공세의 시발점, 독일 제국 몰락의 가속화
1. 개요2. 당시 상황3. 독일 제국의 준비
3.1. 전략적 국면3.2. 작전적 국면3.3. 전술적 국면
4. 협상국의 대응
4.1. 작전의 진행
5. 결과6.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루덴도르프 공세(Ludendorff Offensive) 또는 춘계공세(, Spring Offensive, Frühjahrsoffensive)는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18년 3월 21일 ~ 1918년 7월 18일 동안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독일 제국군의 공세 작전이다.

독일 제국의 최후의 발악에 가까웠던 이 공세는 당시 미국의 참전으로 인하여 협상국으로 기울던 서부 전선의 전세를 더 늦기 전에 빨리 정리해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자 했던 배경이 있다.

2. 당시 상황

1914년 여름에 발생한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하여 독일 제국이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전쟁에 돌입한 지 4년이 지났다. 그러나 개전 당시 슐리펜 계획에 의거하여 단 6주 만에 프랑스를 제압하고 그 다음 러시아 제국을 격퇴하여 영국을 고립시킨 후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짓는다는 독일 육군의 무리한 계획은 군사 작전 수립 및 진행 시의 판단 착오와 협상국의 격렬한 저항에 가로막혀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 와중에 유럽 해역을 봉쇄하여 협상국으로의 물자 반입을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진행된 독일 제국 해군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당시 중립국이던 미국을 자극하여 결국 치머만 전보 사건과 함께 미국이 협상국에 참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1918년 3월, 독일 제국은 러시아 혁명으로 내부가 어수선하던 소비에트 러시아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동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로 인하여 독일은 자국의 전력을 서부전선으로 집중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나, 이와는 반대로 독일 내부의 상황은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이전에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대규모의 전쟁을 치르며 누적된 병력 손실로 인하여 예비 전력 및 동원 가능 인력이 거의 소진된 상황이었으며, 전시의 통제 경제 체제와 영국의 해상봉쇄가 맞물려 모든 독일인들이 순무로 연명하다 70만 명이 아사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스페인 독감까지 독일 전역에 퍼지자 독감에 걸려 죽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렇듯 국민들은 오랜 전쟁으로 지쳤으며, 카이저와 군부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그로 인한 반발로 제국이 붕괴할 것이 명확하였기에, 허수아비로 전락한 카이저 빌헬름 2세를 대신하여 전권을 휘두르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빨리 이 끔찍한 상황을 타파, 협상국에게 일격을 가해 단숨에 프랑스 파리를 함락시켜 평화 협상을 함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독일의 마지막 공세인 루덴도르프 공세를 입안했다.

3. 독일 제국의 준비

3.1. 전략적 국면

파일:004_greatwarr21.jpg
작전 전개도

작전 계획 수립 당시 미국은 협상국 측에서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파견하고 있었다. 유럽 내 미군의 전력은 계속 증강되고 있었으며, 몇 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한 유럽의 협상국들과는 다르게 전쟁에 참여한지 얼마 되지 않아 투입 가능한 자원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거대한 인구 수와 산업 규모, 그리고 본토에는 전쟁의 피해가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았다는 이점은 독일 측에 거대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러므로 독일 측에서는 신속하게 작전을 마무리지을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시간을 끌 경우 전력 격차는 더욱 벌어져 극복할 수 없는 수준임을 깨닫고 있었다.

3.2. 작전적 국면

독일 제국은 협상국 간의 협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고, 이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당시 서부전선의 지도를 보면, 북해 해안에서부터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영국군프랑스군 부대들이 순서대로, 따로따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양국의 혼성 부대나 통합 지휘는 없던 상황이었다. 이에 독일군 참모부는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의 경계 지역을 기습 돌파하여 양 군을 분단한 다음에 각개 격파하여 전세를 뒤집고자 하였다. 제 1목표는 영국군을 일단 북해 해안으로 밀어붙인 다음 섬멸하여 유럽 대륙 내에서 일시적으로 영국의 영향력을 제거하며, 그 후 형성된 돌출부를 넓혀 가며 지속적으로 프랑스군을 압박, 최단 거리로 파리를 향하여 진격, 점령할 계획이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최종적으로 영국으로부터 유럽 대륙의 해안을 방어함과 동시에, 영국 및 미국과 협상을 전개하여 독일 측에 유리한 내용으로 강화 협정을 체결할 생각이었다.

3.3. 전술적 국면

위 계획이 성공하려면 공세 초기에 연합군 방어선을 신속하게 무력화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러나 당시까지 진행되던 참호전은 한 번에 수십만 명의 인력을 소모하고도 전선을 밀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독일 제국군 참모부는 후티어 전술 교리를 바탕으로 4년 간의 전투 경험을 집약하여 새로운 전술을 준비하였다.

먼저 신속한 적 방어선 돌파 및 침투를 위하여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운용하였던 돌격대를 대량으로 편성하였다. 이들은 공격 초기 아군의 준비포격이 끝남과 동시에 연합군 방어선의 약점을 찾아 그 곳으로 침투, 혼란을 유발하여 균열을 형성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공격에 앞서 긴 시간 동안(길게는 며칠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퍼붓던 포격 방식을 변경하여 짧은 시간(수 시간) 안에 적 방어선과 포병 부대에 대량의 화포를 동원, 적 방어선의 가장 취약한 지점에 짧은 시간 동안 한꺼번에 강력한 포격을 퍼붓는 '허리케인 포격' 전술을 사용하여 연합군이 독일군의 공격에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자 하였다.

독일 제국이 승리를 노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으므로, 독일군은 전력을 최대한 동원하였다. 동부전선에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로 구성된 50개 사단 70만 명의 병력이 서부 전선으로 차출, 배치되었으며,[1] 작전 개시 후 5시간 동안 엄호 화력을 제공하기 위하여 10,000문의 화포가 동원되었다.

4. 협상국의 대응

4.1. 작전의 진행

3월 21일 새벽 4시 40분, 독일 제국 육군 포병 대령 게오르크 브뤼흐밀러Georg Bruchmüller의 지휘 하에 허리케인 포격을 개시하면서, 서부전선에 대한 총공세를 실시한다. 이것을 일명 루덴도르프 공세. 혹은 춘계 공세라고 불린다. 당시 독일은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에 투입, 당시 연합군의 병력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군대를 다 합하더라도 50만 남짓할 뿐이었다. 연합군 역시 오랜 전쟁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 인력 고갈이 심했기 때문이다.

총 네 차례의 공세가 있었으며, 각각 암호명은 미하엘(Michael), 게오르게테(Georgette), 블뤼허-요르크(Blücher-Yorck), 그나이제나우(Gneisenau)였다.[2] 연합군을 솜강에서 영국 해협까지 밀어내기 위한 공세가 미하엘, 나머지 셋은 연합군을 분산시켜 미하엘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공세 초기,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무섭게 연합군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연합군은 병력을 아미앵 철도역, 채널 항구 같이 필수적인 곳에만 배치하고, 나머지 지역은 포기하거나 병력을 거의 배치하지 않았다. 덕분에 독일군은 1914년, 국경 전투 이후로 처음으로 파리 근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진격속도에 비해 보급 라인이 뒤처졌기 때문에 독일군은 소모전을 강요 당했으며, 공세 시작 후 2주가 지나자 이는 독일군에게 엄청난 출혈[3]로 돌아왔다. 애초에 영-프 관할지 경계선 돌파 -> 프랑스 고립 -> 아미앵 철도역 확보 -> 파리 공략 ->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휴전 제의로 전쟁 종결이라는 계획인데 파리 공략에 핵심이었던 아미앵 철도역 공략을 실패한 시점에서 이미...

반면 연합군은 초반에는 패배했으나 미국의 엄청난 물량과[4] 적절히 병력을 후퇴시킨 덕분에 난관을 금방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공세는 독일에겐 최후의 발악일 뿐이었고 무리한 공세로 손실된 인력을 복구할 능력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무리한 이 공세는 협상국에게 백일 공세를 할 수 있게 만들었을 뿐이었고, 독일 제국의 멸망을 더욱 앞당긴 꼴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독일 제국군은 초반에는 큰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완전한 패배를 할 수밖에 없었다.

5. 결과

독일 제국은 이 작전을 통해 1차 세계대전 기준으로 상당한 영토를 얻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과 물자가 소모되었으며, 얻은 영토로 인해 전선이 길어져 협상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힘들어졌다.

작전 초기 협상국에 비해 우세했던 서부 전선의 병력은 계속 소모되어 7월에 이르자 독일군 207개 사단 대 연합군 203개 사단으로 비슷해 졌으며, 이는 곧 미국에서 꾸준히 병력이 추가됨에 따라 역전되었다. 독일은 인력이 고갈되어 손실된 병력을 보충 할 수 없었다. 독일 군 사령부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한달당 20만명이 필요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한달에 보충되는 병력은 7만에서 8만에 불과했으며, 만 18세를 넘어 징집할 수 있는 남자의 수는 고작 1년당 30만명에 불과했다. 특히 상술했듯이 독일군의 손실은 연합군과 달리 정예 병력의 비율이 훨씬 컸다.[5]그리고 황당하게도 이렇게 병력이 부족한 와중에도 100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드넓은 러시아 땅에 묶여 있었다.[6]

연합군들의 통합된 지휘 체계가 없어 발생했던 혼란은 페르디낭 포슈가 연합군 총사령관에 오르며 해결되었으며, 이후의 작전에서 더 원활한 협력이 이루어졌다. 또한 미국군은 처음으로 독립된 부대로써 전투에 참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초반의 성공적인 공세는 독일군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독일군은 보급 상황이 열악해지자 적군의 사정도 별 다를 것이 없다면서 병사들을 타이르곤 했지만, 병사들은 점령을 하며 적군의 보급이 훨씬 좋다는 것을 보고 그 말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다.

6. 같이보기


[1] 1917년에 맺어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로 러시아가 전쟁에서 빠졌기 때문에 독일군의 상황은 상당히 호전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발트 삼국 점령지 주둔군이 100만 명을 넘는 등, 무리한 점령이 병력 부족을 초래했다.[2]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프로이센 장군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3] 특히 정예병이라 할 수 있는 돌격대의 피해가 컸던 게 치명적이였다. 공세 초기 참호 지대의 신속한 돌파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연합군은 독일군보다 좀 더 많은 숫자의 손실을 입었지만 정예 돌격대와 고급 공격사단이 거의 궤멸해버린 독일군과 달리 대부분의 손실이 정예 병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질적 전투력 손실은 독일보다 낮았다.[4] 이건 어느 정도 오해의 소지가 없잖아 있는데, 대규모 미군이 본격적으로 전선을 형성한 것은 7월 1일인데, 이때쯤이면 춘계공세에서 진행된 5번의 공세 중에서 4번은 이미 막은 상태였다. 마지막 5번째 공세인 제2차 마른 전투 직전에 베르됭 지역에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여분의 프랑스군이 예비대로 전환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2차 마른 전투에서 결정적인 반격을 펼칠수 있었다. 즉, 수비는 영프 연합군으로 가능했으며, 영프독이 다같이 지쳤을 때 미국의 뒷심이 결정적인 반격전에서 미국의 힘이 빛을 발휘했다고 보는게 적절하다.[5] 루덴도르프 공세 당시에는 독일군이 공격측임에도 불구하고 연합군 상대로 더 우월한 교환비를 냈지만, 이는 정예 병력과 고급 사단들을 제물로 바치고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러한 숙련병들의 궤멸에 연합군의 전차 투입 확대가 겹치면서 백일 공세 당시에는 독일군이 방어측임에도 불구하고 연합군보다 더 열악한 교환비를 내는 결과로 되돌아온다.[6] 이 병력들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실행과 점령지 치안 유지를 위한 병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