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b0000> 로마 제국 집정관 Marinianus | 마리니아누스 | |
이름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Publius Licinius Egnatius Marinianus) |
생몰 년도 | 미상 - 268년 |
부모 | 발레리아누스(조부) 갈리에누스(아버지) 코르넬리아 살로니나(어머니) |
형제 | 발레리아누스 2세(큰 형) 살로니누스(작은 형)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268년 |
전임 |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아르케실라우스 |
동기 |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
후임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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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황족. 로마 황제 갈리에누스의 막내아들로, 268년 집정관에 선임되었지만 아버지가 암살된 후 원로원의 명령으로 어머니 코르넬리아 살로니나와 함께 처형되었다.2. 행적
갈리에누스와 코르넬리아 살로니나의 3남으로, 큰 형 발레리아누스 2세와 작은 형 살로니누스가 있었다. 두 형 중 큰형은 258년 잉게누우스 반란 직전에 병사하고, 작은형은 260년 포스투무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까닭에, 260년부터 유일한 후계자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두 형과 달리 카이사르 칭호를 268년까지 얻지 못했다.일설에 따르면, 249년생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 갈리에누스는 그를 로마에 남겨둘 뿐 타 지역에 보내지 않았다. 이유는 로마 제국이 당시 위기에 치닫고, 살로니누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제국의 등장 속에서 피살되면서 이 조치가 위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68년, 3세기에 여러 원로원 의원을 배출한 가문인 파테르누스 가문의 일원인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다만, 갈리에누스, 코레넬리아 살로니나의 세 아들 중 막내인 마리니아누스와 별개의 인물이 268년 집정관을 지낸 마리니아누스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후기 로마 제국의 프로소포그래피>로 알려진 PLRE 저자 A. H. M. 존스, 존 로버트 마틴데일와 같은 연구자들이 그들인데, 이들은 고대 기록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등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268년 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가 갈리에누스의 외사촌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마리니아누스의 후손으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첫 아내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친척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3살에 불과한 꼬마 마리니아누스가 카이사르 칭호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268년 정규 집정관에 3살짜리 꼬마를 임명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시 로마 국제, 정국상 의심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는 두 명의 미리니아누스가 있다는 주장도 있고, 마리니아누스가 실제로는 3살짜리 꼬마가 아니라 10대 소년으로 249년생의 마리니아누스와 동일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268년, 현직 집정관을 맡던 해 당시 밀라노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우레올루스를 진압하던 갈리에누스가 휘하 장교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로원은 갈리에누스가 원로원 의원이 군권을 가지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등 자신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한 것에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갈리에누스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즉시 코르넬리아 살로니나의 아우구스타 직책을 박탈하고 그녀와 마리니아누스 등 갈리에누스의 남은 가족을 처형했다. 이때 갈리에누스의 외사촌 에그나티우스 형제 등도 함께 처형되었으며, 갈리에누스의 이복 동생으로 마리니아누스의 삼촌인 소 발레리아누스도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