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빅혼 전투 인디언 전쟁의 일부 | ||
커스터의 마지막 저항(Custer's Last Stand), 쿠르츠 & 알리슨社, 1899년 작.[1] | ||
날짜 | ||
1876년 6월 25일 | ||
장소 | ||
미국 몬태나 주 빅혼 카운티 리틀 빅혼 강 근처 | ||
이유 | ||
미국 정부의 서부 개척 정책으로 인한 평원 원주민과의 충돌 | ||
교전 국가 및 세력 | 미국 크로우족 척후병 아리카라족 척후병 | 수우족 북샤이엔족 아라파호족 |
지휘관 | 조지 커스터 † 마커스 리노 프레더릭 벤틴 마일스 케오 † 제임스 칼훈 † 네시라파트[2] † 이스추 쉬 디쉬[3] | 타탕카 이요탕카[4] 타슝카 위트코[5] Phizí[6] Vé'ho'énȯhnéhe[7] † Éše'he Ôhnéšesêstse[8] |
결과 | ||
수우-북샤이엔 연합의 승리 커스터 중령을 포함한 미합중국 육군 제7기병연대 전멸 | ||
영향 | ||
수우족의 유령춤 유행 운디드니 학살사건 발발 평원 원주민의 인디언 보호구역 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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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attle of Little Bighorn / Battle of the Greasy Grass[9]1876년 6월 25일에 미국 몬태나 주 리틀 빅혼에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지휘하는 미합중국 육군 제7기병연대와 타탕카 이요탕카와 타슝카 위트코가 이끄는 아메리카 원주민 다코타(수우) 족과 북부 샤이엔 족 사이에 벌어진 전투. 커스터 중령과 7기병연대는 이 전투에서 전멸했다.
이른바 인디언 전쟁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올린 최후의 대규모 승전이다. 리틀 빅혼 이후에도 아파치족의 제로니모 등 저항하는 원주민들이 남아 있었었으므로 이 전투가 최후의 전투는 아니다.
빅혼은 북미산 큰뿔양[10]을 가리킨다.
2. 전개 과정
남북 전쟁 직후 미 서부를 공격적으로 개척하며 그 과정에 방해되던 원주민 부족들을 철저히 분쇄하던 골드 러시 시대의 미합중국 연방 정부의 정책이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 제2차 라라미 요새조약에 따라 미주리 강 서쪽 다코타 지역에 대한 원주민의 독점권이 보장됐지만 백인들은 금을 찾아 원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다코타 땅에 들어와 살았다. 미국 정부는 백인 정착자를 내쫓지도, 다코타 족에게 그 땅을 팔라고 설득하지도 않고 원주민들이 가끔 백인 거주지역을 공격하는 것을 조약의 위반이라고 간주했다. 그래서 1876년 1월 31일까지 지정된 보호구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메리카 원주민을 미국의 적대적인 존재로 간주할 것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이 사냥꾼들에게 전달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겨울이라 이동하기 어려웠으며 많은 평원 원주민들이 더는 백인에게 양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단단히 했기 때문에 상호충돌은 불가피했다.1876년 5월 미국 정부는 연방군 육군을 동원해 원주민들을 3면에서 포위 공격하기 위한 작전을 입안하고 조지 크룩 육군 준장이 남쪽에서, 존 기본 육군 대령이 서쪽에서, 알프레드 H. 테리 육군 준장이 동쪽에서 각각 진격에 나섰다. 테리 장군은 원주민의 이동을 리틀 빅혼 강 어귀에서 막을 생각으로 주력부대를 옐로스톤 강 상류로 이동시키고 커스터 중령과 제7기병연대는 로즈버드 강을 따라올라가 6월 24일 리틀 빅혼 강 동쪽에 도착했다. 그러나 커스터 중령은 정찰병들로부터 그 근처에 캠프를 친 대규모의 수우 족 및 샤이엔 족이 있음을 알고 계획을 변경한다.
2.1. 실책
커스터는 연대 병력을 3개로 쪼개 원주민 캠프를 수색하기로 하고 프레더릭 벤틴 육군 대위와 마커스 리노 육군 소령에게 각각 3개 중대를 맡기고 자신은 북서쪽으로 가서 원주민 캠프를 급습하기로 했다. 하지만 커스터 중령이 전혀 모르고 있던 점이 있었으니, 원주민들은 2천여명으로 자신이 거느리는 연대 병력을 다 합쳐도 수적 열세였다. 게다가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같은 최신 병기들마저 "기병의 기동력을 죽이는 무기"라며 안 가지고 가는 실책까지 저질렀다.크로우족 정찰병들의 리더 이스추 쉬 디쉬와 커스터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아리카라 족 정찰병들의 리더 네시라파트[11]는 이러한 전력 차를 눈치채고 커스터에게 여러 번 경고했지만 커스터는 자만심에 취해 이를 무시하였다. 결국 이스추 쉬 디쉬는 커스터에게 "당신과 나는 오늘 밤에 우리가 모르는 길로 집에 돌아갈 것이다(You and I are both going home tonight by a road we do not know.)"라는 말을 남긴 뒤 네시라파트와 함께 돌아가고 두 사람은 리노 소령의 부대에 배속되었다.
2.2. 전멸
작전이 개시되고 가장 먼저 남쪽에서 진격하던 리노 소령의 부대가 웅크린 황소의 마을을 발견했다. 자신에게 배정된 원주민 정찰병들을 파견한 뒤 그제서야 원주민 마을의 규모를 파악한 리노는 함정의 가능성을 떠올렸고 커스터가 도착할 때까지 위치를 사수하기 위해 산병 대형을 갖추었다. 이는 신중한 판단이었지만 동시에 이로 인해 그의 부대의 기동력과 화력은 감소하였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네시라파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태양을 향해 '나는 오늘 밤 네가 언덕 너머로 지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의 신호를 보냈고 리노의 부대는 마을에 총격을 가하기 시작한다.원주민 전사들은 처음에는 방심한 상태였지만 여자와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총을 쏘며 맹렬하게 공격하는 기병들을 보자 분노에 불타 용감하게 싸우기 시작했고 3개 중대 190명 남짓(원주민 정찰병 15명 포함)한 리노의 부대는 곧 취약한 좌측면을 노리고 집결한 500명 이상의 전사들의 반격에 노출되었다. 리노는 네시라파트를 불러 조언을 구하려고 했으나 그 순간 날아온 총알이 네시라파트의 머리에 명중하였고 그의 피를 뒤집어쓰고 공포에 질린 리노는 도주를 지시했고 부대도 그를 따라 무질서하게 강가를 향해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 때 커스터는 리노의 부대가 공격 받았음을 알고 증원에 나서려 했으나 지형을 몰라서 도하할 곳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커스터가 겨우 강을 건넜을 때는 이미 리노의 부대는 도하해서 꽁무니를 뺀 상태였고 그가 기대했던 벤틴 대위의 병력은 끝내 오지 않았다. 결국 커스터가 거느리고 있던 약 210명의 제7기병대 본대는 웅크린 황소의 마을을 발견하고 공격하기는 했으나 협곡에 갇힌 채 10배에 가까운 병력에 포위당해 1시간여 만에 모조리 전멸했고 커스터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두 동생[12]과 처남 마일스 케오, 조카 제임스 칼훈까지 죽어 버렸다. 벤틴과 리노가 패잔병을 수습해 퇴각하면서 전투는 원주민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건 당시 원주민들의 최고 지도자 역할을 맡고 있던 웅크린 황소는 "커스터의 본대는 대부분의 전사가 먼저 마을을 공격해 온 리노 소령의 부대를 쫓아 마을을 비웠을 때 자신의 촌락을 공격했고, 급히 모여든 원주민 전사들에게 포위당할 위기에 빠지자 도주하다가 결국 따라잡혀 포위당한 후 전멸하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애초에 커스터가 촌락의 위치를 몰랐다는 점을 감안하면 커스터의 본대는 무턱대고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원주민 마을을 발견하자 막무가내로 공격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후퇴하던 리노 소령의 부대는 원주민들이 커스터의 본대와 싸우러 후퇴하는 바람에 숨을 돌렸다. 여기에 드디어 벤틴 대위의 예비대와 그가 호송하던 병참 부대가 도착하여 합류했는데 이들은 커스터를 지원하기 위해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돌아오는 원주민 전사들과 마주쳐 약 350기의 병력[13]으로 절벽 꼭대기에서 방어전을 시작해야 했다. 하루 동안 포위당했던 미군 기병대는 전투가 길어지면 다른 백인들이 나타날 것을 염려한 웅크린 황소가 다른 전사들을 설득한 덕분에 생존자들이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이틀간의 전투로 미 기병대에는 커스터 휘하에서 전멸한 210명, 리노 소령 휘하에서 58명의 전사자와 5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웅크린 황소의 회고로는 원주민 측은 27명의 전사자와 그보다 많은 부상자를 냈을 뿐이라고 한다.
결국 이들의 도를 넘은 교만은 정찰의 경시와 부실한 준비로 이어졌고, 포위섬멸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각개격파를 당하며 죽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3. 무기는?
원주민들이 도끼나 화살 정도나 사용했을 것이라고 오해하기 쉬우나 당시 원주민들은 다수의 총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미 100년 전 7년 전쟁의 아메리카 전선에 참전한 경험이 있던 원주민 부족들은 플린트락 시대때부터 총을 접해와서 총기에 굉장히 익숙했다. 원주민들은 헨리 소총 등의 레버액션 소총을 가지고 있었고 기병대 측은 스프링필드 M1873을 주무장으로 쓰고 있었는데 스프링필드 1873쪽이 유효 사거리는 더 길었지만 연발총[14]인 헨리 라이플 쪽이 연사속도가 더 빨랐다.[15] 게다가 교전 거리가 길지 않았고 양 측 모두 기병들을 주력으로 사용한 만큼, 스프링필드 1873의 우월한 사거리는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고 소총수의 수는 원주민이 훨씬 더 많았으므로 헨리 라이플의 강점은 극대화 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틀링 같은 연사무기나 야포가 없는 상황에서 소총의 연사속도도 느렸으니 한 발 쏘는 동안 서너발을 얻어맞는 상황인 미군 쪽이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4. 후일담
1886년에 리틀 빅혼에는 전상자를 추모하는 기념비[16]가 세워졌는데 처음엔 커스터 이름이 붙었다가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재임기간인 1991년에 리틀 빅혼 기념비로 이름이 바뀌었다.이 전투로 원주민 군세의 막강함이 입증되었지만 백인들의 경악과 분노를 초래해 결과적으로 이 지역의 운명이 결정되고 말았다. 사실 원주민들은 한 판 싸움에 크게 이겼으니 이제 승부는 끝났고 백인들이 물러갈줄 알았는데 오히려 분노에 불타는 미 육군이 복수하겠다면서 대규모의 병력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와 리틀 빅혼의 대승리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 원주민들은 미군에게 패하기 시작했다. 결국 타탕카 이요탕카는 미군을 피해 캐나다로 망명해야 했고 타슝카 위트코는 미군에게 잡혀 살해당했으며 원주민의 대부분은 미국 정부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 제7기병연대는 운디드니 학살사건에서 비무장 원주민들을 그저 리틀 빅혼의 원수라며 무차별로 아이건 여자건 마구잡이로 학살하며 분풀이했다.
5. 기타
아무튼 미국 역사에 있어서 꽤 충격을 가져다준 사건이었고 어떻게든 육군 제7기병연대를 멋지게 꾸며 보고자 '악랄한 원주민들에게 포위당한 채 용맹하게 맞서는 제7기병연대의 활약'상을 수많은 영화와 소설로 꾸몄다. 물론 최근에는 진실이 많이 알려졌는데 특히 더스틴 호프만이 열연한 서부영화 <작은 거인(Little big man)>에서 커스터와 리틀 빅혼의 실상이 잘 드러나 있다.존 포드 감독의 <아파치 요새> 후반부에 리틀 빅혼 전투를 다루고 있는데 당시 시대상을 생각한다면 정말 의외로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원주민들을 착취하는 백인들과 기병대 지휘관의 고지식함에 불거지는 원주민들의 무장 봉기, 그로 인해 전멸하는 기병대원들이라거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에서는 윈체스터 소총을 광고하는 무대에서 알그렌 대위(톰 크루즈)가 리틀빅혼전투를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현재 미군에게는 이때 전멸한 커스터의 제7기병연대가 재수없는 존재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영화 〈위 워 솔저스〉를 보면 멜 깁슨이 맡은 주인공 할 무어 미 육군 기병중령이 베트남에 파견되는 자신의 부대에 7연대란 이름이 붙자 언짢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더더욱 기분이 더러워질만도 한 것이, 위 워 솔져스의 실제 배경인 베트남 전쟁 당시 헬리콥터 강습부대들은 공중 기병대라고 불렸고 진짜 말타는 기병들이 폐지되고 헬기나 전차를 타게 되었어도 구 기병 부대였던 곳은 전통 유지 차원에서 부대 내규 등으로 보병이나 기갑 병과휘장이 아닌 기병 병과휘장을 달고 기병부대라는 이름을 계속 쓰는 경우도 많다. 그런 기병에게 미 연방군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 중 하나를 당한 7연대의 번호를 붙여줬다. 게다가 영화의 배경이 된 이아드랑 전투에서도 7연대는 베트남 인민육군과 베트콩 병력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6.25 전쟁에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저지른 미군 부대가 육군 제1기병사단 7연대 2대대로, 바로 제7기병연대의 후신이다. 현재 한국에 7기병연대 4대대가 1중전투여단 소속부대로서 미 육군 제2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있다.
AP통신의 첫 특파원이었던 마크 켈로그는 리틀 빅혼 전투 취재 도중 살해당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사에 송고한 기사는 "나는 커스터와 함께 죽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마크 켈로그는 취재 중에 사망한 최초의 AP통신 기자로 기록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투사 고디안에서도 미 육군 기병대 차림으로 나오는 지구방위군 7연대[17]가 꽤 멋지게 나오지만 적의 함정에 걸려서 연대장[18] 이하 모두 전멸당하고 주인공 휘하의 군기빠진(출전하는데 졸면서 가거나, 만화책 보거나, 개별 전투 머신에 타고 면도하면서 출전하는데 당연히 이 꼴을 본 사령관은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참고로 7연대는 멋지게 출전) 당나라 군대 14연대[19]는 멋지게 활약하고 전 대원이 생환하여 좋은 대조를 이뤘다.
라이브 어 라이브/서부편에서는 보스가 제7기병대의 원혼집합체로 나온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대전사 캠페인의 마지막 미션이다. 꽤 구현이 잘되어 있다. 벤틴한테 징징대는 커스터는 덤.
117년 뒤 미 육군은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 전멸은 아니지만 안이한 준비로 리틀 빅혼 전투를 떠올리게 할 만큼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다크스트 오브 데이즈에서 프롤로그 미션으로 등장했다. #
무서운 게 딱! 좋아! 미국편의 '방황하는 유령군대'에서도 언급되었는데 여기서 '제17 기병대'라고 나왔다.[20]
리틀 빅혼 전투를 레고로 재현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도 있다.
영화 아바타가 리틀 빅혼 전투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6. 참고 자료
- 시팅불. 인디언의 창과 방패: 로버트 M. 어틀리 저, 김옥수 역, 두레(2001)
-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디 브라운 저, 최준식 역, 나무심는사람(2002)
- 이야기 미국사: 이구한 저, 청아출판사(2006)
[1] 철저히 미국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상상화다. 실제로 커스터 부대는 저렇게 모여서 장렬하게 산화한 게 아니라 도망치다 붙잡혀 죽었다.[2] 일명 블러디 나이프(Bloody Knife)[3] 일명 하프 옐로 페이스(Half Yellow Face)[4] 일명 시팅 불(Sitting Bull)[5] 일명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6] 일명 갈(Gall)[7] 일명 레임 화이트 맨(Lame White Man)[8] 일명 두 개의 달(Two Moons)[9] 아메리카 원주민 측에서 부르는 이름.[10] 뿔이 크게 말린 야생 산양.[11] 1840~1876. 수우족 아버지와 아리카라 족 어머니 사이에서 난 혼혈로, 수우족 마을에서 살고 있었지만 시팅 불과 갈을 비롯한 수우 족 지도층의 지속적인 차별과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아리카라족에 합류했다. 허나 수우족은 이후에도 그가 전령으로서, 혹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구타하고 모욕하는 등 온갖 수모를 주었고 결국 갈이 그의 두 형제를 살해하고 시체를 늑대 먹이로 내버려 두는 만행을 저지르자 그는 정찰병으로서 백인들에게 합류한다.[12] 토머스 커스터, 보스턴 커스터.[13] 당시 미 육군 기병대의 정원은 통상 600기(騎)였다.[14] 남북전쟁 때부터 남부에서 (7연발이라서) 1주일 내내 쏘아대는 빌어먹을 양키들의 총이라고 평했다. 당대에 그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졌다는 소리다.[15] 총열 및 관형탄창에 장전해서 레버션으로 쏘는 구조다. 반면 스프링필드 1873은 트랩도어로, 후장식이긴 하나 단발식으로 쏠 때마다 탄약을 뒤의 뚜껑을 열어 약실에 넣어야 한다.[16] 커스터 무덤은 뉴욕 주 웨스트포인트 군인묘지에 있다.[17] 깃발부터 7이라고 숫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18] 생김새도 진짜 커스터를 모델로 했다. 오죽하면 적군이 전투 전에 7연대에 대한 정보를 보고 "호오? 용맹하지만 무조건 돌격하는 게 버릇이군. 그럼 끌어들여서 처리하면 쉽겠어."라고 대놓고 비꼴 정도였다. 결국 적군 함정에 걸려 고전하던 터에 부하 장교(주인공 다이고와 친하게 지내던)에게 후회하지만 늦은 다음이었다.[19] 물론 여기도 14라고 새겨진 큰 깃발을 들고 출격한다.[20] 상술했다시피 실제로는 '제7기병연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