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ttle of Ia Drang Trận Ia Đrăng 이아드랑 전투 | ||
베트남 전쟁 | ||
날짜 | ||
1965년 11월 14일 ~ 18일 | ||
장소 | ||
남베트남 이아드랑 계곡 | ||
교전국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베트남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 ]][[틀:깃발| ]][[북베트남|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할 무어 | ]][[틀:깃발| ]][[틀:깃발| ]] 해리 키나드[[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응우옌 후 안| ]] | ]][[틀:깃발| ]][[쭈후이먼| ]]
결과 | ||
양측 모두 자신들의 승리를 주장 | ||
기타 | ||
미군이 북베트남 정규군과 벌인 첫 전투 | ||
병력 | 약 1,900명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 3개 대대 미국 육군 제21포병연대 제1대대 2개 포대 다수의 지원 항공기[1] 베트남 공화국 육군 2개 대대 | 약 2,500명 제33연대 2개 대대 제66연대 3개 대대 소수의 대공포 및 박격포 |
피해규모 | <미국 측 주장> 미군 237명 사망 미군 258명 부상 미군 4명 실종 헬리콥터 4기 남베트남군 약 350명 사상 <북베트남 측 주장> 미군 1500~1700 사상 남베트남군 1275명 사상 | <미국 측 주장> 1,070~1,753명 전사 <북베트남 측 주장> 559명 사망 669명 부상 |
1. 개요
이아드랑 전투는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미군과 북베트남 정규군 (이하 북베트남군)이 벌인 첫 정규 전투다.2. 상세
북베트남군 B3 전선군 사령부가 플레이미 서쪽에 있는 베트남 공화국 중부 고원지대의 남베트남군 제3군단 지역 격오지 군사캠프를 기습 점령하여, 이에 대한 구조 및 추격섬멸, 소탕 작전인 월미연합 은빛 총검 작전이 실시되었는데, 이아드랑 전투는 은빛 총검 작전의 3단계 중 두 번째 단계였다.첫 번째 단계(1965년 10월 19일-26일)는 북베트남군 제33연대의 급작스런 공격으로 점령당한 아군 캠프에 대한 남베트남 제3군단 기갑기동부대와 남베트남-미군 연합 특수부대 2개 중대의 구조작전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단계(10월 27일-11월 17일)는 미합중국 육군 제1기병사단의 추격 섬멸작전, 그리고 세 번째 단계(11월 18일-26일)는 남베트남 육군 공수여단의 잔존병력 소탕작전이었다.
이 전투의 이름은 플레이미 계곡의 서쪽에 흐르던, 교전이 주로 벌어졌던 드랑 강에서 따왔다. '이아'라는 말이 현지 산악 소수 민족의 말로 강이라는 뜻이므로, 직역하면 드랑 강 전투가 된다. 북베트남군의 기습에 대한 구조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자, 남베트남 제3군단은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미군에게 북베트남군을 추격 섬멸하도록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미 육군 제1기병사단 3여단( 7기병연대 1대대, 2대대]), 2여단(5기병연대 2대대])이 공중 투입되었다. 전투는 미 공군의 B-52 폭격기와 전투기의 근접항공지원으로 시작되었다.
제1기병사단이 투입되자 북베트남군은 강습 1파인 할 무어 육군 기병중령의 1대대에 공격을 집중했고, LZ X-Ray에 착륙한 미 육군 제7기병연대 1대대는 15일 정찰 나간 소대가 우연히 북베트남군의 집결 지점과 마주쳐 제압되어 고립되고[2] 이어 서쪽, 남쪽에서 주야간 대규모의 공격을 직면해 큰 손실을 봐야 했다. 3일간의 격전과 포병대, 공군과 주변에 있던 5기병연대 2대대의 지원 끝에 LZ X-Ray를 사수하긴 했지만 큰 피해를 입은 미군은 LZ X-Ray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철수 도중 17일에는 북북동쪽의 착륙지점인 LZ Albany에 매복 공격이 이어졌으며, 북베트남군이 7연대 2대대를 포위해 버렸다. 북베트남군은 초근접전을 선택했고 LZ Albany 주변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2대대는 이 교전에서만 미군 전사자의 절반 정도인 155명 정도가 전사하며 큰 희생을 치렀다. 다음 날 근처 LZ Columbus로 철수했던 5연대 2대대가 7연대 2대대의 후방을 확보해 포위를 풀고 7연대 2대대의 증원 후 북베트남군을 몰아낸다. 북베트남군은 전선의 구분 없이 무차별적으로 미군을 향해 돌진해왔는데 밀리던 미군은 하다 못해 브로큰 애로우를 선언하며 미군의 전폭기들에게 아군이 근접해 있는 위치에 네이팜탄을 투하를 요청했다. 북베트남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 과정에서 미군 화기 중대도 오인 폭격을 당해 중대원 대다수가 전사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다.
기세를 모아 미 육군 제1기병사단 5연대 1대대 B중대가 역공을 가했는데 무어 중령까지 직접 착검한 채로 전 병력이 돌진했다. 당황한 북베트남군은 가용 가능 병력들을 모아 방어에 돌입하려 했지만 오히려 UH-1 건쉽이 날아와 북베트남군의 재수습된 병력들 마저 일망타진해버렸다. 양측 모두 심각한 손실을 입었는데, 미 육군은 250~300여명이 전사하고 1,000~1,700여명의 북베트남 육군 병력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 전과는 오로지 적군의 시신으로만 집계한 결과이므로 공습과 포격 지원으로 훼손되거나 원거리에 있어 수습되지 않은 시신의 숫자를 감안하면 북베트남 육군 사상자는 더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군이 해당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철수했기 때문에 실제로 시신을 집계한 결과가 아니다. 미군은 당시 LZ Albany 지역에서 북베트남군 403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으나, 전후 미국 측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확인된 베트남군의 시신은 200명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무어 중령 역시 당시 LZ X-Ray지역에서 부하들이 적군 834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해왔지만, 이는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여 상부에는 634명으로 축소보고했다는 점을 고백했다. 양 측 모두 상대측의 시신을 확인할 수 없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양측이 주장한 자국의 사상자 수, 즉 미군 500여명, 남베트남군 350명, 북베트남군 1200여명이 사실에 좀 더 가까우리라 예상할 수 있다. 이 전투의 공로로 무어 중령은 미육군 수훈십자 훈장을 수훈하고 대령으로 진급한다. 한편 미국은 미군의 대규모 사상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상자 통보는 택시 기사가 직접 유족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전투 후 무어 중령의 부인 줄리아 콤튼 무어(1929~2004)는 이 문제를 육군에 지적하고 참전자 부인들과 장례식을 지원하는 모임을 조직했다. 이는 미군이 전사자들의 장례와 송환을 지원하는 공식적인 조직을 운영하는 씨앗이 되었으며 영화 위 워 솔저스에도 이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에 따르면 이아드랑 전투 이후 미군 내의 평가 분석회의에서 중견 장교들은 하나같이 M16 소총을 치켜들며 "이번 승리는 용감한 병사들과 M16 소총이 원동력이었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북베트남군들이 근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돌격해오는데 자동소총인 M16만큼 상대하기 쉬웠던 무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M16 소총이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이 휴대했던 AK-47에 비해 성능이 떨어진다는 믿음이 미군 내에 있었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구형 자동 소총인 M14 소총을 개인 화기로 휴대했었다고 한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275를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M16의 효용성이 점차 입증되면서 1967년이 되면 미해병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미군 병력들이 M16을 제식 소총 으로 휴대하게 된다. 특히 정글 어딘가에서 갑자기 근거리에서 튀어나와 총을 갈겨대는 베트콩을 상대할 때 자동사격으로 처치할 수 있는 데다가 휴대성도 간편하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아드랑 전투 당시 베트남에 파병되어 있던 대부분의 미군이 여전히 M14를 휴대한 것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육군과 해병대는 급하게 M16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천하의 미국이라도 인프라도 없이 갑작스럽게 수만정의 총을 하루 아침에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결국 M16의 성능이 괜찮음을 수뇌부도 인정하고 미국에서 M16 생산 인프라를 확충한 끝에 파월 미군 전원이 M16으로 무장할 수 있었고, 1968년 쯤에는 남베트남, 대한민국, 호주, 필리핀, 태국 등 우방에도 M16을 대량으로 뿌려줄 수 있었다.
이 전투 이후 미군의 베트남전 작전은 헬리본이 기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베트남의 전장은 정글과 늪, 강이 많아 차량의 기동이 제한되었는데 헬리콥터는 이를 완벽히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던 것. 그래서 미군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 병력들을 포착하면 일단 압도적인 화력으로 타격을 가하면서 밀어내다가 후방에 헬리본으로 병력들이 강습해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일망타진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베트콩들은 이러한 미군의 초현대전 수준의 작전에도 쉽게 섬멸되지 않았고 결국 전쟁 내내 미군을 괴롭혔다. 이는 기본적으로 수색섬멸 search and hit 교리인데, 밀림 등 복잡한 지형에서 한번 훑어보고 가버리는 교리로는 완전 소탕이 어려웠던 탓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예 보병으로 점령해버리는 hit and stay 가 필요한데, 그 보병이 부족해서...
한편, 북베트남군과 처음으로 직접 맞닥뜨린 무어 중령은 북베트남군이 예사롭지 않은 군대라고 평가한다. 화력과 장비면에서 미군에 비해 일방적으로 밀리는데도 악착같이 미군을 향해 돌진해오는 북베트남군의 전의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3] 한편 해당 전투에 민간종군기자로 참여했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자들을 구한 공로로 동성훈장을 받은 조셉 갤러웨이[4]는 이 전투를 '호치민이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라고 평가했다. 이들의 판단처럼 북베트남군은 오합지졸의 군대가 아니었고 북베트남군을 얕본 미군 지휘관이나 남베트남군 지휘관들은 방심했다가 제대로 당하게 된다.
나중에 미 육군 중장까지 오른 해롤드 무어(Harold Gregory Moore Jr.)는 회고록에서 당시 북베트남군을 우습게 보았다라고 저 평가를 후회했다. 그는 45년 동안 같이 살던 아내를 먼저 사별하고 2017년 2월 10일, 95번째 생일을 3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3. 대중 매체
멜 깁슨이 출연한 영화인 위 워 솔저스가 이 전투를 소재로 하였다. 전반적으로는 실제 이아드랑 전투의 흐름을 그대로 묘사하지만, 극화 과정에서 일부 각색 및 창작한 부분은 있다. 해당 문서 참조.[1] 주로 수송에 동원된 헬리콥터들과 800소티 이상의 폭격에 동원된 전투기, 공격기 및 폭격기 포함[2] 공군과 포병의 지원으로 전투가 끝난 3일 뒤 겨우겨우 살아 돌아왔다.[3] 실제로도 무어 중령은 북베트남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북베트남의 농민병사들은 초강대국(미국)이 그들에게 날려보낸 끔찍한 첨단 기술의 불폭풍을 견뎌냈고, 최소한 미국과 무승부를 거둘 때까지 싸웠다. 그들의 잣대로 볼 때, 그런 강력한 상대와 비기는 것은 승리와 맞먹는다."[4] 갤러웨이와 무어가 베트남전에서의 경험을 담아 쓴 책이 "We were soldiers once...and young"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 위 워 솔저스의 기반이 된다.